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식민지교육정책의 변화와 동화교육의 강화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1. 21:13

제5장 식민지교육정책의 변화와 동화교육의 강화 

제1절 3·1운동 이후 학무국 업무의 변화 151 

제2절 조선교육령 개정과 식민지교육정책 156 

1.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설치와 교육령 개정 156 

2.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 설치와 교과서 개편 161 

3.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식민지교육의 대응 164 

4. 경성제국대학의 설립과 운영 168 

제3절 조선총독부의 언어동화정책 178 

1. 강제병합과 언어동화정책 178 

2. 3·1운동의 발발과 언어동화정책의 강화 180 

3. 개정 조선교육령에 나타난 언어정책 181 

4. 교육 현장에서의 언어동화 183 

5. 사회교육을 통한 일본어 보급 189 

제4절 조선어장려책의 본의와 민족적 항거 193 

1. 조선어장려책 시행의 배경 193 

2. 조선어장려시험의 시행과 민족적 항거 195 




1. 3·1운동 이후 학무국 업무의 변화


일제는 국제사회와 식민지사회의 정세 변동에 따라 통치의 수위를 조정하며 절대 독립을 요망하는 한국민의 항일운동에 대응하였다. 식민통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실행되었는데, 당장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과 장기적인 투자를 통한 근본적인 효과를 노린 정책의 추진이 그것이다. 전자는 앞서 제3장에서 검토한 선전정책이라 할 수 있고 후자로는 식민지 교육정책을 꼽을 수 있다. 


강제병합 전 한국통감부는 대한제국의 학부를 장악하고 식민지 교육정책을 준비하고 추진해왔다. 병합 이후에는 여러 가지 식민지 교육 관련 법령을 제정하여 ‘합법’을 가장한 폭압적인 동화 교육정책을 추진하였다. 식민지 교육 관련 문제를 전담하고자 설치한 행정부서가 학무국學務局이며 조선총독부는 이 학무국을 통해 모든 식민지 교육, 나아가 문화정책을 추진하였다. 학무국은 식민지 실상의 변화에 따라 현실에 적합한 교육안을 마련하여 교육행정을 펼쳤다. 따라서 학무국의 운영 변화를 추적해 보면 식민지 교육의 실상과 그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통치의 전환적 시기마다 예외 없이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시세에 따른 기만적인 식민지 교육체제를 구축하였다. 병합 초기에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적합한 교육실시라는 명분 아래 일제 자본주의 발전에 요구되는 실업교육과 기술교육, 직업교육에 식민지 아동·청년들을 기능적으로 집중 훈련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학생·청년층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사회개혁운동이 확산되어가자, 조선총독부는 교육담당부서인 학무국을 내무부 소속에서 총독부 직속의 독립부서로 승격시키고 위기상황에서 식민지교육체제를 재구축해 가고자 하였다. 


학무국은 국내외 정세 변동과 식민지 지배정책 변화에 대응하면서 탄력있게 운영되었다. 1920년대 문화 통치기에서 조선총독부의 그 어떤 행정기구보다 학무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컸다. 註1) 


조선총독부 체제를 출범시킨 이래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적 통치체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조선인의 항일운동을 잠재웠다고 자부하던 일제에게 3·1운동은 큰 충격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일본 유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고자 일본에 있는 동양협회東洋協會에게 유학생들의 지도감독을 위촉하였다. 註2) 그리고 예전에는 일본대학 및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전문학교, 또는 고등학교에 입학 자격이 되지 않아도 특과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으나 각 학교에서 입학자격시험을 시행하여 합격자들만을 정과생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을 까다롭게 개정하여 일본유학을 통제하였다. 註3) 이처럼 일제는 3·1운동의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되는 부분에서 나름대로 독립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예방 장치를 마련하였다. 1920년 3·1운동 1주기를 맞이해서 학무국장은 각 도지사와 학교장들을 학무국으로 소집해 수차례 3·1운동의 재발을 막기 위한 예방책을 지시하였으며 밤늦도록 학부형과 학생들을 모이게 하고 교사들을 동원해 설득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註4) 그리고 각 지역의 공사립학교 학교장회의도 열어 대책 수립을 토론하고 시학관들을 각 학교로 파견하여 학무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註5) 


1921년 2월에 개정 발표된 조선총독부 관제는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조치하는데 만전을 기하는 방향에서 성립되었다. 총독부 관제 개정의 기본 방침은 “중앙·지방의 연락을 긴밀히 하여 시정방침에 철저를 기하고, 민정民情의 기미機微를 통찰하고 ‘민의창달民意暢達의 실효’를 거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감찰관監察官과 민정시찰民情視察 사무관事務官을 두었고 1922년부터는 각도에 이사관 1인씩을 본래 정원에서 증원시키고 시학관으로 충용充用하여 이들로 하여금 학사시찰과 그밖의 교육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다. 註6)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민의창달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내세웠지만 실상 학교와 학생들의 감시체제는 이전에 비해 강화되고 더욱 치밀해졌다. 그러나 당시 민족운동계는 일제의 기만적 문화통치와 문치주의 표방의 통치 개편 약속에 고무되었으며, 특히 교육계에서는 민족교육본위의 교육진흥을 이루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교육진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도 이러한 배경 위에서 탄생하였다. 1923년 이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민립대학 설립 요구가 강해지자, 당시 학무국장은 긴급히 조선대학위원회를 결성하고 스스로 위원으로 참가하여 註7) 대학 설립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1924년 12월에 학무국 내에 경성제국대학 부속 대학예과 개설 사무소를 설치하고 註8) 총독부는 직접 나서서 서둘러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1년 10월 관제 개정에 의거해 학무국에 새로이 고적조사과古蹟調査課가 설치되었다. 註9) 고적조사과의 관장사무는 박물관1932년부터는 사회과에서 관장·고적조사사업·고사사고건축보존古社寺古建築保存·명승천연기념물보존名勝天然記念物保存 등이다. 그러나 1924년에 단행된 행정 정리 때에 고적조사과는 학무국 내 소속인 종교과 내의 업무로 정리되었다. 註10) 고적조사사업은 전국에 산재한 조선 재래의 명승고적·천연기념물·사찰 등의 실태를 조사하고 사찰의 재산과 문화재가 될만한 유물들을 파악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속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1926년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학무국장 주재로 열린 도道시학관회의에서 총독은 “사유寺有 재산 보호 감독에 관한 사항, 사찰 폐지에 관한 사항, 사찰에 속한 불상·고기물古器物·서화류 보호처리에 관한 사항,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 기부금 출자 방법에 관한 사항, 내지 각 종파에 속한 사원 소유의 부동산과 보물에 관한 규정 등을 계출할 것을 지시하였다. 註11) 전국의 불교사찰 모두를 총독부 관할로 장악하였다. 고적조사사업이 종교과 업무가 되는 업무 상관관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식민지 문화정책이라는 광의廣義의 범주에서 고적조사사업과 종교사업을 연계시킴으로써 문화사업이라는 외피를 쓰고 학무국은 각 지방의 사찰과 향교의 재산 註12)을 파악하고 그 재산을 조선총독부 아래 장악해 둠으로써 3·1운동 때와 같이 민족운동에 종교의 조직력과 자금이 동원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2. 조선교육령 개정과 식민지교육정책


1.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설치와 교육령 개정 


1910년대 식민지 동화교육을 통해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삼을 수 있다고 과신한 총독부는 1910년대 내내 일방적인 동화교육으로 일관하였다. 관공립학교를 통해 노예교육을 강압하고 식민지교육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새로운 시대 의식을 대중적으로 심어준 3·1운동은 시대를 선도해 줄 신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폭발적으로 증대시켰으나 총독부에서는 조선인의 염원, 비전과는 관계없이 “조선 중심의 아닌 일본 내지의 문화가 조선에 미치게 한다는 의미의 내지연장주의는 일본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목표로 한 것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동화의 목적달성을 위해 ‘조선교육령’의 개정은 불가피하였다. 


민족운동계는 식민지 동화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교육을 주장했지만, 일제의 교육개혁의 방향은 다시는 3·1운동과 같은 전민족적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근’과 ‘채찍’이 동반된 식민지 동화교육체제가 요구되었다. ‘탄압’과 ‘회유’라는 이중의 카드로 민족운동에 대응한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방침에 따라 민족 내부에서도 실력을 축척한 후에 독립의 길로 나가자는 ‘현실파’들이 등장하였다. 식민지 동화를 목표로 한 일제의 ‘내지연장주의’·‘내선일체’의 실현과 민족운동계가 제기하는 ‘조선인본위’·‘조선문화존중’ 목표는 논리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민족운동계는 당장 현안 문제였던 식민지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교육 개정을 요구하였으며 교육진흥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당황한 총독부에서는 1920년 12월 23일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서둘러 교육령 개정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註13) ‘문화정치’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인사들은 총독부가 교육령 개정을 통해 어느 정도 조선인의 교육적 요구를 수렴해 교육개혁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서나 진정서를 발표했다. 민족운동계에서 상정한 의견서 및 진정서의 내용은 우선 교수용어가 일본어이고 교과서가 일본어로 편찬 간행되고 있는 식민지 언어동화의 실정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해 줄 것과 조선어로 된 교과서를 편찬할 것, 교과에 조선역사와 지리과를 포함시켜 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즉 조선의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註14) 이에 대해 임시교육조사위원회는 “보통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이 능력발달에 과연 방해되는 사실이 유有하면 조선어를 사용함이 가可하다하야 그 실상을 조사연구한 후 좌우를 결決하겠노라” 註15) 하면서, 조선인의 의견을 존중해 교육개혁을 해 줄 것처럼 조선인을 호도하였다. 총독부에서 교과서조사위원으로 위촉된 조선인 임경재任璟宰도 신문지상에 「교과서문제의 핵심」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였는데, 일본어에 의해 조선의 고유한 민족적 개성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해 줄 것과 조선어로 된 교과서 편찬을 요구하였다. 註16) 


조선총독부 국사교과서 내용


조선총독부는 동화주의와 식민지 지배정책에 배치되는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 리는 없었다. 총독부에 의해 소집된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임원구성과 회의진행의 과정을 보면, 총독부의 정치적 의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조선에서 교육 경험이 있는 다수의 명사를 촉탁하여 임시교육조시를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임시위원 총 30명 중에 조선인은 친일분자인 이완용李完用·석진형石鎭亨·고원훈高元勳 3명 뿐이었다.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서 고원훈은 교육용어로 조선어를 사용하자는 안案을 발의하였다. 이 안에 대해 1인의 찬성만 있어도 토론에 부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이 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완용은 이 안에 대해 반대하였고 석진형은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註17)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조선인 역할은 조선인을 아예 제외시킬 수 없기에 참여시키는 들러리에 불과하였다. 총독부는 조선 민간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교육령에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럼에도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믿었던 1920년 초에 조선청년회연합회·조선교육회의 인사들,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은 교육개선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각 지방의 교육상황·교육경비·교육기관 확장에 대한 사항을 조사하였으며 교육개선안에 대한 진정서 및 건의안을 작성하여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조선교육령’ 개정과 교육개혁에 식민통치 당국이 민간 조선인의 의견이 참작해 줄 것을 예비하고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건의안를 통해 식민지 동화교육의 반대와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성을 존중해 줄 교육 개혁의 실시, 민족차별교육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폐단을 시정해 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21년 1월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일본어 보급상황을 조사하고 일본어 보급을 강화하는 방침을 미리 정하고 조사를 행하였으며, 제1회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서 「학제개혁안요령」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요령안은 민간의 의견 수렴없이 총독부에서 제출한 원안 그대로의 내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임시교육조사위원회의 모든 조사활동은 ‘조선인을 점차 완전한 일본국민이 되도록 하고 의연히 학교에서 국어일본어교수를 중시하는 대방침’ 註18) 아래에서 이루어졌기에 교육정책과 방침에서는 1910년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개정된 조선교육령 제4조의 교육의 목적에서 “보통학교는 아동신체 발달에 유의하여 이에 덕육을 실시하고 생활에 필수인 보통의 지식 기술을 교수하고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습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라고 하여, 이전의 조선교육령에서 “총명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으로써 본의로 한다” 는 문구가 삭제되었으나 그 근본 차이는 없었다. 개정된 조선교육령의 요지는 민족차별 철폐의 주장을 수용하며 ‘내선일체’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제1차 조선교육령이 조선인의 민도를 저급하게 평가해 실용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것을 반성한다면서 제2차 조선교육령은 “내선인 교육제도를 교육령 중에 통합 설정하고 내지일본와 전적으로 동일한 교육주의와 제도를 채용한다” 註19)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개정 이전 교육령에서는 아예 없었던 대학교육과 사범교육에 관한 규정을 개정 교육령 안에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하고자 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반발을 초래했던 부작용을 없애고 식민교육의 중임을 맡길만한 충량한 교원과 식민통치를 보조해 줄 총독부 관리를 양성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개정 교육령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동일한 교육주의와 동일한 제도로 교육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교육 운영에서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는 구별되었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국어일본어 상용 학교일본인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학교조선인로 구분해서 교육하였고, 일본인 소학교가 6년제인데 비해 조선인의 보통학교 수업연한도 6년을 본체本體로 하나 5년이나 4년으로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에 따라 실제 약 60%의 보통학교가 4년제로 운영되었다. 註20) 


2.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 설치와 교과서 개편 


1922년 2월에 공포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내선융화·내지연장주의의 슬로건 아래 교과서 내용도 대폭 개편이 요구되었다. 3·1운동 이후 총독부에서는 1920년 11월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교과용도서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였다. 1922년 1월에 개최한 교과서조사위원회의 조사·심의 결과에 따라 교과서 개정 작업에 들어가 1924년 말에 보통학교용 교과서 19종 32책등 총 25종 19책의 교과서를 새로운 식민지체제에 맞게 간행하였다. 3·1운동 이후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해 줄 것과 교과서 편찬을 조선어로 해달라는 민족적 요구는 무시되었으며 총독부가 그나마 취한 조처는 초등 교과과정에서 조선어 과목을 독립시킨 것이 전부였다. 


1921년에 개정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에 의해 『보통학교조선어독본』은 1922년 9월에 발행되기 시작하여 1924년에 전 6권으로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역시 무단통치기인 1917년에 편찬된 교과서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다만 3·1운동 후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지리·우화를 소재로 한 단원들을 채택하여 싣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 내용들은 통치에 도움이 되는 수신적이며 도덕적인 소재들이며 그 안에서 내선융화와 천황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철저히 식민지 교재로 역이용하였다. 註21) 


조선총독부 발행한 『아동용 보통학교 국사』표지


고등과정은 여전히 조선어와 한문을 혼합한 조선어급한문 교과를 유지한 채, 1922년 9월 『고등조선어급한문독본』 5권을 발행하였다. 『고등조선어급한문독본』 5책에 총 62개 단원이 실려있는데, 이중 조선어 관련 단원은 8개에 불과하여 한문 편중 교육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단원 중에서도 조선인 작품이나 조선 문헌에서 채택한 것이 21개 단원이고 나머지 31개 단원은 중국고전과 일본인 작품에서 선정하였다. 註22) 그중 조선과 일본 양 언어의 어법 비교와 동물상으로 본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제가 강조하는 ‘일선동조론’을 은근히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1920년대 중반들어 민족주의계열의 문화주의 운동에 회의를 느낀 청년·학생층에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되자 총독부는 이를 ‘교육의 위기’로 해석하고 식민지 교육체계에 대한 새로운 체제정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교과서의 새로운 편찬도 계획되었는데, 당시 학무국 편집과에서 심혈을 기울여 편찬하려 한 교과서는 일본어·조선어·수신·역사·지리과로 의식교육과 관련된 과목들이다. 註23) 이들 교과서는 1925년 말에 대강의 편찬작업을 완료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전히 조선인 본위의 교과서, 조선어 주의의 교과서, 조선심朝鮮心 위주의 교과서 편찬을 여전히 요구 註24)하고 조선어교과서는 일본인 글을 번역해 교과에 넣는 경향을 지양하고 조선인들의 글을 선택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註25)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요구를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우원일성宇垣一成 총독은 자신이 주력하고 있는 농촌진흥운동과 짝하여 식민지 교육체제를 재편하기 위하여 1928년 8월에 기존 교과서에 대한 일대 개정을 위해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교과서 개정에 관한 주의요강을 심의하고 한층 식민지 동화정책을 강화하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교과서 편찬 방침을 결정했다. 


① 칙어와 조서의 성지를 철저히 하는데 일층 유의할 것 

② 황실과 국가에 관한 사항에 일층 유의할 것 

③ 일한 병합의 정신을 이해시키고 내선융화의 실實을 거두기 위하여 그에 관한 사항에 일층 유의할 것 

④ 조선의 실정에 비추어 근로애호·흥업치산·직업존중과 자립자영의 정신을 함양하는데 적절한 자료를 증가할 것 

⑤ 동양도덕에 배태한 조선의 미풍양속을 진작하기에 적합한 교재를 증가할 것 

⑥ 조선에서 가정과 사회의 풍습을 개선하는데 적절한 자료를 증가할 것 註26) 

 

이처럼 총독부는 위기에 직면한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구책으로 교과서 편찬방침을 강화하고 교과서에 대한 일대 개정을 가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미풍양속을 진작한다는 방침 내용은 어디까지 총독부가 조선의 전통미풍인 충효의 정신을 통치에 이용하여 일본에 충성심으로 도치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편찬방침에 따라 1930년 9월에 『보통학교국어독본』 권2가 발행된데 이어 5~7권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한편 1930년에 결정된 언문철자법에 의하여 1931년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보통학교조선어독본』 역시 일본의 우월성과 천황주의를 강조하고 총독부의 시정을 선전하는 단원으로 채워졌다. 註27) 


3.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식민지교육의 대응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벌린 조선총독부의 민족분열책은 민족진영 내에 개량주의를 출현시켰으며, 신사상으로써 사회주의사상이 청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전래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청년 학도들의 현상을 보건대 근시에 왕왕 사회의 악풍에 물들어 전도를 그르친 자가 적지 않다” 註28)라며 사회의 악풍에 물들고 있다며 우려하였다. 


1920년대 전반 일제는 어용청년단체와 사회사업단체에 이른바 하사금下賜金을 내려 재정지원을 하는 등 각 사회단체를 통해 일본통치에 순종하도록 하는 교화사업을 펼쳤다. 주로 각 지역의 관·공립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관변청년회官邊靑年會를 조직하여 교화운동을 주도케 하였는데, 지역주민들과 청년층들을 대상으로 주로 학교 시설을 이용해 활동사진과 인쇄물을 돌리고 국어일본어강습회·순회강연·야학·전람회 등을 개최하며 총독정치를 선전하였다. 註29)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의 기만성은 이미 폭로되었으나 학생층은 여전히 조선총독부가 약속한 문화정치에 걸맞는 고등교육의 실시와 민족본위교육의 실현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1924년 7월에 조선학생총연합회朝鮮學生總聯合會를 구성하였고 1925년 5월 공학회共學會를 창립하였다. 이들 단체로 “사회과학연구, 민중본위 교육실현”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투쟁의 무대로 진출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강령과 그 구성분자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공학회를 해산시켰다. 註30) 조선총독부는 약속한 교육개혁과 교육 보급은 실행되지 않았으며 註31) 오히려 동화교육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개량주의로 전환해 간데 비해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며 실력행사로 맞섰다. 이에 학무국은 학생들의 실력행사를 강제 해산하는 등 강력 대처했으며, 이에 맞서 학생들은 동맹휴교 등으로 투쟁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은 학생운동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한편 절대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항일민족운동이 증가하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동화교육 그 자체를 반대하고 일본노예교육의 폐지와 일본인교원배척운동 등이 적극적으로 일어났다. 이처럼 학생운동이 반제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자 조선총독부의 위기의식은 첨예화되었다. 


학생들의 의식 수준은 높아져 간 반면, 식민지 사정에 어두운 채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교사들은 민족차별 발언과 행동으로 학생들의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일본인교원배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註32) 학생들은 ‘조선인본위교육’을 격렬하게 요구한 반면 일본인 교사들은 식민지교육에 열중하는 불협화음이 지속되자 일제는 학생들의 맹휴운동의 원인을 사상단체들의 선동에서 오는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註33) 사회주의 사상과 진보적 민족주의운동이 학원과 청년층에서 점차 사회기층에까지 파고들자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사회적 통제와 아울러 사상적 통제까지 가하였다. 한편 민족운동계에 지도력에 한계를 실감한 교사와 학생들 중에는 공산주의로 경도되어 가는 이들이 증가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그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쏟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재등실 총독이 제네바 군축회의에 일본제국의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출석하는 동안 임시대리로 육군대장 우원일성이 부임하여 임시로 총독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재등실이 군축회담이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총독직을 사임해 버리자 그의 후임으로 육군대장 산리반조山梨半造, 1927.12.10~1929.8.17가 제4대 조선총독에 취임하였다. 그가 부임하고 있는 동안인 1928년은 전국에서 학생맹휴가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주장은 조선어 시간을 증가시킬 것과 역사는 조선어로 교수해 줄 것, 註34) 의무교육제 시행과 학교비의 국고보조를 증설할 것, 입학 연령이 초과한 아동들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교육기관을 설치할 것과 중등교육기관을 확장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註35) 


1928년 7월 개최된 전국 각도 시학관회의에서 당면한 교육문제 대책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학무국장은 당시 빈번하게 일어난 학생맹휴의 대책으로 외부의 선동 등에 대해 신중히 조사하여 단연히 처치할 것과 조선사정을 잘 아는 일본인을 교원으로 초빙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註36)이처럼 조선총독부는 맹휴의 근본적 이유를 조사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학생맹휴의 원인을 밖으로의 선동이라고 호도하고 조선사정에 능통한 일본인 교원을 초빙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인의 진정한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대책은 보통학교에 실업과를 폐지하는 대신 직업과를 필수과목으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보통학교 졸업생에 대해 직업교육과 공민교육을 지도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註37) 식민지 교육체제의 관권官權 아래 청년층들을 묶어두고자 하였다. 


조선 내의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독립운동의 진전 상황을 “청년들을 공리공론空理空論 빠져 실용實用을 중시하지 않은 풍조” 註38)라고 비난하고, 조선은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빈약하다고 지적하면서 보통학교 증설과 직업교육·실업교육의 실시를 한층 강조하였다. 초등교육부터 조선인 학생들에게 고등교육보다는 직업훈련에 치중한 기능인을 양성하고자 했던 합병 이래 총독부의 기본 식민지교육 방침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데다가 거기에 사상적 교화교육을 강화시켜 나가는 형태인 것이다. 


4. 경성제국대학의 설립과 운영 


1920년대 ‘문화통치’와 ‘문치주의’의 표방은 민족운동계의 민족적 불만을 무마하고 조선에 문명적 조치로서 민족본위의 교육진흥을 이루게 해 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하도록 기만하였다. 조선인의 교육진흥운동의 대표적인 실천운동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이었다. 1923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가자 조선총독부는 긴급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학무국장 장야간長野干등을 조선대학위원朝鮮大學委員으로 선정하고 註39) 1924년 12월에 학무국 내에 조선제국대학 부속 대학예과 개설사무소를 설치 註40)하며 서둘러 대학설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전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대학설립에 관한 논의를 민립대학 설립이 실현되기에 앞서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대학의 설립을 서둘렀던 것이다. 


사실 대학령이 칙령으로 공포된 때는 1918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도’에 맞지 않고 ‘시세’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서의 대학설립을 미루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 분위기와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1920년 12월 23일에 구성된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서 대학설립에 관한 안건을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1922년 2월에 마련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조선교육령 제12조에 ‘대학에 관한 규정’을 처음 마련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3년 11월 말에 조선대학창설위원회朝鮮大學創設委員會를 발족시키고 대학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조선에 설립할 대학은 일본 현행의 ‘관립대학령’에 의거해 종합대학으로 설립하고 명칭을 ‘조선제국대학’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1924년 4월 14일 일본내각의 심의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제국대학이라 하면 ‘조선’이 식민지가 아닌 ‘일본제국’과 상응한 하나의 독립된 제국임을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 ‘경성제국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920년 1월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백조고길白鳥庫吉·복부우지길服部宇之吉·상전만上田萬·건부둔오建部遯吾 등은 연명으로 경성 및 여순旅順 또는 대련大連에 대학을 세우도록 일본 내 총리대신 및 문부대신·조선총독부·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장관 등에게 건백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 건백서에서 백조고길은 대학의 설립 목표는 “식민지에서 문화를 연구함과 함께 식민지민을 문화에 접촉시켜 융화를 꾀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식민지 민중의 문화향상이나 교육발전과는 관계 없고 식민지 통치와 그를 위한 보조 목적에 의한 지역연구의 필요성에 두었다. 건백서에 연명한 이들은 대부분 동양사 및 동양철학, 어문학을 전공한 자들이며 일제의 대륙침략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였던 학자들이다. 註41) 민립대학설립운동이 한창 진행될 당시인 1921년에 조선총독부의 학무과장에 재직 중이던 송촌송성松村松盛는 후일 경성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회고하면서, 대학이 사학私學에 맡겨지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위기감을 드러내었다. 註42) 이처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조선인을 위한 교육기관이라 선전했지만 기실은 조선들의 민립대학 설립을 무산시키고 총독부 주도의 관립 제국대학을 세워 식민지의 의도에 맞도록 운영하고자 했던 의도가 분명하였다. 


한편 대학설립의 이유 중에는 재조선 일본인 자제가 진학할 고등교육 학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23년 말까지만 해도 재조선 일본인의 수는 40여 만명에 달하였다. 이들 중 고등교육학교 진급 대상에 들어가는 일본인 중학교 9개교에 총 3,500여 명과 고등여학교여중 19개교에 4,300여 명, 총 7,800여 명이 재학 중이었다. 대학설립 전에는 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 내의 대학 입학 경쟁난으로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조선 일본인 학생들이 진학할만한 대학이 필요했으며, 또 이들을 조선전문가 내지는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관료로 육성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5월 2일 경성제국대학관제칙령 제104호를 공포한 후 서울에 조선총독부 관립 종합대학으로서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두고 1926년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발표된 경성제대 예과규정 註43)에서 예과의 입학선발은 체격검사와 학과시험을 동시에 치루며, 학과시험은 4일간에 걸쳐 하루 한과목씩 응시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시험과목에는 조선인·일본인 학생을 불문하고 일본어가 공통으로 부과되었으며 문과文科 지망의 경우 일본역사 시험까지 치루도록 규정하였다. 註44) 이 점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일본인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선인 학생의 입학조선이 불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총독부 학무당국과 경성제대 당국자들은 입학지원자들에 대한 ‘전과前科의 유무, 사상의 경향, 3·1운동 관련 유무와 그 가정의 사상경향과 재산성, 행동’ 등에 관한 관련 여부를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의뢰하여 신분조사 註45)를 엄밀히 하였다. 일제측에서 볼 때 불령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있으면 입학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설립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1926년 5월 6일에는 청량리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본학 예과 신축 교사가 준공되었고 5월 9일에는 총독부 정무총감 유길충일有吉忠一이 총장 사무취급을 명받아 실무를 맡으면서 마침내 5월 10일에 가서야 예과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편 예과가 개설된 지 2년 뒤인 1926년 4월에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개설되면서 5월 1일부터 정식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 


1926년도 경성제국대학의 지원자 상황을 보면 일본인 지원자가 513인, 조선인 지원자가 374인이었다. 註46) 이들은 선발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내지인과 조선인과는 하등 차별을 하지 않는다” 註47)고 하였지만 일본어 입학 시험 점수가 조선인과 일본인 응시자간에 우열을 결정지웠다.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어 시험의 학습 부담은 여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註48) 그리고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3명이었으며,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41년에는 교수 140명 중 1명만이, 학생 611명 중 216명만이 조선인이었다. 경성제대 교수로 윤일선尹日善, 후에 서울대 총장 역임이 의학부에 첫 조선인 교수가 되었지만 1년만에 세브란스의전으로 옮겼으며, 고영순高永珣은 발령 후 이틀만에, 윤태동尹泰東도 교수 발령을 받은 지 4개월도 못되서 차별대우로 사임한 바 있다.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안에는 법률·정치·철학·사학史學·문학 등의 전공학과를 두었으나 1927년 3월 18일에 법률학과와 정치학과의 두학과가 새로이 법학과로 통합되었다. 이후 법문학부에는 이들 4개 학과 외에 다른 학과는 설치되지 않았다. 의학부는 개설 초에 해부학·생리학·의화학醫化學·약물학·병리학病理學·미생물학 등 기초의학 관련 강좌가 개설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개설강좌도 다양해지고 세분되었으며 1928년 조선총독부 의원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공학부가 설치된 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였다. 1938년에 이르러서야 이공학부 신설 규정이 마련되었다. 


대학설립 초기 구상은 장기적으로 법·문·이·공·농·의 학부 등을 두고 연차별로 학부를 증설하도록 논의했으나 이공계열의 학부를 설치되지 않았다. 식민통치 관료를 양성하는데 유용한 학부만을 설치하고 조선인의 독립의식과 실력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애초부터 설치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註49) 그러나 전시에 직면하면서 이공분야의 인력이 요구되면서 이공학부가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에 간행된 역사사전에 게재된 경성제국대학 항목을 보면, “… 경성제국대학은 조선문화의 개발, 나아가서는 대륙문화의 연구에 기여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지역 제반의 실증적 연구업적을 쌓았다. 『법문학부기요法文學部紀要』와 『향가급이두 연구鄕歌及吏讀硏究』를 시작으로 조선사, 조선민속, 

 

경성제국대학 전경


각지의 방언, 법률제도, 조선경제 등에 걸친 조사 책자와 논문집이 50책을 헤아리고 질양質量 모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 현재는 국립 서울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註50)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차원에서 적극 활용되었던 관립대학의 기본성격과 그 역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극도로 미화한 서술임을 알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초기 예과의 교육목표는 “국민도덕의 충실에 힘쓰는 것” 이었다. 그리고 예과는 이러한 교육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훈육5강령訓育五綱領’을 제정하고, 이를 교육의 바탕으로 삼았다. 훈육5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지성을 본으로 하고 관용협화寬容協和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 

② 윤상倫常을 숭상하고 공검恭儉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③ 책임을 중히 여기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

④ 성찰자중省察自重으로써 중정中正의 도道를 걸어야 한다. 

⑤ 실질강건實質剛健을 본지本旨로 삼고 부화방종浮華放縱을 삼가해야 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공부하는 이른바 ‘내선일체’·‘일시동인’의 한 모델로서 ‘관용협화’의 덕을 강조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동화교육을 거부하고 조선 고유의 문화와 민족적 교육진흥을 요구하였던 조선인의 욕구를 무시하고 ‘성찰자중’과 ‘실질강건’을 내세우며 조선 고유의 문화진흥과 독립 요구의 형세를 ‘부화방종’으로 몰아 일제 식민지 통치체제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할 것을 훈육하였던 것이다. 註51) 


1924년 5월 공포된 경성제국대학 관제 제2조에는 “총장은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아 경성제국대학 일반의 사무를 장악하고 소속직원을 통독統督”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의 「제국대학령」과 비교해 볼 때, 경성제국대학의 설립목적은 한층 분명해진다. 일본의 제국대학에는 평의회와 교수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평의회는 총장이 의장이 되며 각 학부장 및 각 학부의 교수 2인 이내로 조직하도록 명시하였다. 그리고 평의회에서 학부의 학과 설치 및 폐지, 강좌의 설치 및 폐지에 대한 자문사항 등을 심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경성제대는 일본 내의 대학과 달리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게 규정함으로써 대학운영의 자치와 학문연구의 자유 등을 전혀 주지 않았다. 법문학부와 의학부의 학과구성이 설립 초기부터 1945년까지 20여 년간 일체의 변동이 없다는 점에서도 대학 자치와 학문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926년 5월 1일에 있었던 학부 개학식에서 초대 총장은 경성제대의 사명과 대학의 자유에 대해 “… 조선의 연구를 행하고 동양문화 연구의 권성權成이 되는 것이 본 대학의 사명이라 믿고, 능히 이 사명을 수행하는데는 일본정신을 원동력으로 하고 일신日新의 학술을 이기利器로 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 본 대학과 같이 국가가 설립 유지하고 관리하는 대학에서는 적어도 국가의 기초를 동요시키고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과 같은 연구는 허용될 만한 것이 아니다. 또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연구로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근시近時에 사회과학 연구를 표방하고 가끔 연구범위를 초월하여 실행의 영역을 밟는 자가 있는 것은 학생의 본분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라고 연설하였다. 이는 경성제대의 교육방침이 국수적 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동화주의에 있음과 한국인들의 사회·민족운동에 대한 강한 경계와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역대 경성제대 총장은 모두 동경제국대학 출신으로 학교행정을 통해 식민주의 교육에 앞장선 어용관학자들이었다. 그밖에 각 학부장과 예과부장 등 교수진도 대부분 일제의 식민정책을 추종하는 인사였거나 정보원의 역할을 하던 자들이었다. 조선사편수회 회장을 역임한 하강충치下岡忠治와 탕천창평湯淺倉平는 총장 사무취급을 역임하며 경성제대 설립을 준비하였고, 초대 총장 복부우지길服部宇之吉, 4대 총장 산전삼량山田三良 및 5대 총장 속수황速水滉 등은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도엽암길稻葉岩吉, 간사 및 수사관 역임, 금서룡今西龍, 소전성오小田省吾, 6대 총장 소전치책篠田治策, 대곡승진大谷勝眞, 등전양책藤田亮策, 수사관 역임, 중촌영효中村榮孝, 말송보화末松保和 등은 위원이나 수사관을 역임하였다. 註52) 이처럼 경성제대의 총장과 사학과에 재직 중에 많은 이들이 조선사편수회에 간여하였다. 이들은 조선문화 역사를 연구한다는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조선사 왜곡과 문화침탈에 동원된 실상을 보여준다. 註53) 


졸업생들의 진로를 통해서 경성제대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졸업생들은 주로 관공서·학교·은행회사·금융조합·신문잡지 등 관변 관련 직종에 진출하였다. 여기서 관공서는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 도청 및 시군청·경찰서·법원 등을 가리킨다. 조선인 졸업자 323명 가운데 108명이 관공서에 취직33.4%한 반면, 일본인 졸업자는 481명 가운데 120명이 취직25%하여 조선인의 관공서 취업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보면 경성제대가 식민통치에 필요한 식민관료친일분자의 양성이라는 목적을 별 차질없이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1942년까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사람 가운데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8%에 지나지 않는다. 의학부 졸업생들은 주로 관공서·학교·관공립병원·사립병원·군의軍醫·개업·회사 등으로 진출하였다. 졸업자 가운데 43.8%가 학교 교의校醫 내지 양호교원으로 진출하였고 두번째 높은 비율이 군의로 진출이었다. 졸업생 가운데 관공립병원 진출 비율은 10% 이하로 일본인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이공학부가 설치된 이래 조선인 졸업자는 통틀어 36명에 불과하였다. 註54) 이공학부의 교수와 기사技士, 실험을 돕는 직원 가운데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공학부는 학생의 동원, 젊은 교수의 군軍 차출, 교수들에게 레이더 설치와 같은 군위탁軍委託의 연구과제를 수행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설립의 배경이나 경위, 대학의 이념, 예과 학생들의 입학과정과 교육목표·교육과정, 법문학부와 의학부·이공학부의 교육 연구의 실상, 그리고 역대 총장의 경력이나 교육방침, 또한 교직원과 학생의 구성비율, 졸업생들의 진로 등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볼 때,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인대학이라기보다는 일제 식민통치를 위한 대학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유능한 식민지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조선총독부의 언어동화정책


1. 강제병합과 언어동화정책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교육의 목표는 식민지민에게 모국의 언어, 문화를 강제하여 그들 민족 고유의 언어·문화를 차단시키고 식민지민에게 열등의식과 노예의식을 조장시켜 독립불능에 빠지도록 유도하여 식민지 통치에 복종시키는데 있었다. 자국어는 그 민족의 사상을 낳게 하는 모체이므로 민족어를 잃어버릴 때 민족의 주체성은 쉽게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민족어는 그 민족의 독립과 자유사상을 보급하는 수단이 되고 나아가 과학과 기술지식을 대중화시킴으로써 민족의 비젼과 발전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교육을 통한 언어동화정책은 단순히 언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도록 하는 소통과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한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민의 언어를 말살시키고 자신들의 모국어를 대체하기를 강제하지만, 문화와 전통이 깊은 민족일수록 제국주의의 식민지 언어동화정책에 대한 강하게 저항하기 마련이다. 일제의 식민지 언어동화정책은 일본어를 ‘국어’로서 보급하고 조선어는 불필요하고 열등한 언어로 취급하여 궁극적으로는 언어말살을 꽈하려는 것이 식민지 문화침략의 핵심이었다. 


1891년 일어학당이 세워진 이래,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목적으로 일본정부의 후원 아래 일본인 민간단체에 의해 많은 일본어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들 교육기관은 일본어 교육이라기보다는 일본어에 의한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식민지 동화교육을 준비하였다. 1905년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일제는 학부를 장악한 후 학제개혁을 단행, 일본어를 정규 학과과정에 넣어 초등학년부터 교수하도록 하였다. 모든 민간 일어학교를 관공립학교로 흡수하고 일본어 교육을 관 주도하에 통일하면서 구국차원에서 번성했던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 동시에 자주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워주는 교과서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어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교과서 편찬 작업에 착수한 일제는 그 침략성과 식민지성을 감추고 일본어를 ‘시세상’ 필요한 과목으로 강조하면서 그 보급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반일감정과 일본어 교재의 미비로 일본어 보급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여론을 통해 침략과 언어동화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세우면서 일본어 보급을 위한 식민지 교육체제를 차분히 구축하였다.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총독부는 조선교육령 제정을 근거로 언어동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어를 조선인의 ‘국어’로 선포하고 국어교육은 모든 식민지교육의 기본 방침인 ‘충량忠良한 신민육성臣民育成’을 위한 필수 과목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본어는 교수용어뿐만 아니라 일상에까지 그 상용이 강압되었다. 또한 모든 교과운영을 통해 일본어 교육의 효과를 달성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수신·정신교육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반면 조선어는 한문과목과 한 단위로 묶여 수업되었으며 그나마 한문이 주과목이 됨으로써 일본어에 비해 그 비중이 현저히 비하되었다. 

 

2. 3·1운동의 발발과 언어동화정책의 강화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총독부에서는 조선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문화통치와 차별철폐를 내세우고 ‘내선융화’와 ‘내지연장주의’를 슬로건으로 하여 조선인 회유책에 적극 나섰다. 3·1운동은 진정되어 갔지만 사회 각계 각층에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식민지 교육정책은 자국어인 조선어를 무시하고 외국어인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받으며 조선어도 모르는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이로써 조선인 피교육자의 진보와 발달의 방해받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억압은 민족문화가 파괴당하는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註55) 


3·1운동의 발발 원인 중에 하나인 일제의 언어강제 동화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당시 학무국장 관옥정삼랑關屋貞三郞은 “조선인 교육에서 일어를 교수하는 것은 결코 조선어를 박멸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제국신민’에게 국어일본어의 가치를 인정하케 하기 위함” 註56)이라는 억설을 늘어놓았다.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쓰여진 교과서와 일본어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겨우 ‘조선어 급 한문’ 과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들어 조선어를 교수하였으며, 종래의 언문을 학습에 적합하도록 통일시키기 위해 언문의 철자법綴字法을 조사시켰다. 이에 의해 조선어 교과서를 편찬하도록 조치했다고 자찬하였다. 그리고 일본인교원에게 조선어학습을 장려하고 교원의 고과점수에 조선어학습의 성적을 부가하고 있지만 차차 조선어를 통하는 자로 할 방침이라며 조선어 장려를 자랑하였다. 이는 당시 관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일본인 교원들이 조선어도 깨우치지 않은 채 교단에 서서 피교육자들의 학습 이해정도와 관계없이 일방적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제1회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서 ‘학제개혁안요령’을 제출한 바 있다. 이 안은 총독부 학무국에서 마련한 원안대로 조사위원회에서 ‘조선인이 점차 완전한 일본국민이 되도록 하고 의연히 학교에서 국어교수를 중시하는 것으로써 대방침’ 註57)을 세움으로 식민지 동화교육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일제의 언어동화정책은 한발치 양보도 하지 않고 조선인의 교육식 요구를 철저히 묵살하였다. 


이로써 재등실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통치의 안전판은 민족간의 분열을 조장하면서 식민지 동화교육을 확대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언어동화교육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는 새로 개정된 조선교육령을 통해 표출되었다. 


3. 개정 조선교육령에 나타난 언어정책


1922년 2월 4일에 공포된 개정 교육령은 ‘차별을 철폐하고 내지와 동일한 제도에 의한 주의’ 註58)로 한다는 일시동인과 내지연장주의의 슬로건을 내걸고 보통학교의 교육 목적을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습득習得, 熟達 - 고등보통학교 및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숙달로 표현됨 - 필자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다’제4조,제6조고 적시하였다. 이는 개정 전과 다름없이 일본어 보급을 식민지 교육의 목표로 정하였다. 


조선어를 교수용어로 해달라는 민중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하여 종래 ‘조선어 급 한문’ 과목을 보통학교에서는 그나마 양과목을 분리하여 조선어는 독립교과의 필수과목으로 하고 한문은 5~6학년부터 수의과목으로 개설토록 한 것이 총독부의 조처였다. 註59) 고등보통학교에서는 ‘조선어 급 한문’을 필수과목에서 수의과목隨意科目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일본어시간은 늘리고 조선어 시간은 감소되었으며, 수신과를 중시하여 정신교화교육을 강화하였다. 교육령에서는 이전 교과에 없었던 조선역사, 지리 시간을 가르친다고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이들 과목을 통하여 식민지 역사관을 심어주는, 일본사에 부수한 조선사를 가르쳤다. 형식상 일본과 동일한 교과를 교수한다는 구실을 대어 일본어·일본사·일본지리를 강조하는 교과서를 편찬, 교재가 됨에 따라 결국 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심과 독립사상을 억제시키는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해달라는 요구가 묵살당하였고 교육령 개정 후인 1923년에 학무국장은 각 도지사에게 일본어를 철저히 교수하여 그 보급과 상용에 한층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 註60)하는 등 언어동화교육은 강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은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신문사설을 통해 비난할 뿐이다. 註61) 총독부에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에 눈을 뜬 유지 제씨들이 각지에서 조선어문에 대한 연구와 진흥을 목적으로 한 강연회 및 강습회 개최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문화통치 이후 일제가 내걸은 일단의 개혁이란 이름 아래 수행된 모든 교육정책은 결국 조선인을 위한 것은 없고 1910년대의 식민지 교육체제를 더욱 공고히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4. 교육 현장에서의 언어동화 


조선총독부의 언어동화정책 수행에 가장 중요한 장場이 된 곳은 물론 학교이다. 각종 학교의 교재인 교과서는 조선어과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어로써 기술되고 교수용어에 있어서도 조선어과 수업마져도 일본어로 진행되는 등 학교수업 그 자체가 일본어 보급의 방편이 된 것이다. 총독부에서는 교수용어 외에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어를 상용하고 있다고 선전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성을 띠어 학생은 물론 학부형들의 반발을 자아내었다. 


즉 수업시간 외에도 학생 상호간에 학교 내에서의 일상용어도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고 수업시간에 조선어로 질문해도 교사는 일본어로만 대답함으로써 일본어로만 질문하도록 강제하였다. 심지어 조선어를 사용할 경우 교사가 폭행을 가하거나 벌금을 부과하고, 정학 및 퇴학을 시키는 학교도 있었다. 註62) 


일본어 과목은 필수과목으로 다른 교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교수시수를 배당 註63)한 반면, 조선어 과목은 시수도 적었으나 수업내용, 성의면에서도 형편없이 취급되었다. 조선어 교사가 사임했다 하여 조선어를 아예 교수치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조선어 과목의 교재를 대강 끝내고 일본어 수업으로 대치하는 등 철저히 경시당했다. 註64) 이른바 ‘국어’상용의 일본인 학교 커리큐럼인 조선어과 교과 수업시간에는 상급학교 진급을 이유로 영어과로 대체되어 수업이 중지되기도 하였고, 혹은 수강 희망자가 없다는 이유로 아예 과목 자체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註65) 


이처럼 당시 학교교육이 일본어 편중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언어동화교육에 대해 일반에서는 보통학교를 일어전문학교라고 비난하였다. 註66) 또한 수업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주최하는 음악회나 학예회 등 학내 행사나 과외활동에서도 ‘국어력 증진’이라는 이유로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였다. 이에 대해 학부형들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학내 행사가 아니라 일어강습회라고 비꼬았다. 註67) 학교에서의 수업과 과외활동 모두가 언어동화 과정화되어 갔지만 민족운동계에서는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한다거나 여론을 동원하여 조선어 시간을 증가시켜 달라는 요구서를 제출 註68)하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일부 조선어과를 담당하던 교사들에 의해서 식민지 언어동화교육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간 조선어 교육의 문제점이 심각하게 지적 註69)되기도 하였지만 그 시정 요구를 식민지 당국에서 들어줄 리 만무하였다. 


관공립학교의 경우는 총독부가 교원들을 직접 통제하였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으나 사립학교에까지 통제하고자 일찍이 1915년에 ‘사립학교교원시험규칙’을 제정한 바 있다. 이 규칙에는 ‘국어는 단순히 처세상의 필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교육의 본의인 충량한 신민을 육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교원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어에 통달해야 함을 요함이라’ 註70)라는 훈령을 발하여 사립학교 교원을 채용하는 시험규칙에도 일본어에 숙달한 이들을 교사로 채용토록 규정하였다. 註71) 3·1운동 이후 1922년에 새로이 발포된 ‘사범학교규정’는 교사들이 학생을 교양하는 요지 중에 ‘일어사용을 정확히 하여 그 응용을 자재自在케 하기를 기하여 항상 일어 숙달에 유의’ 註72)할 것을 명시했으며, 일본어 교육에서 교사의 발음·어조·기타 일본어에 대한 능력이 학생의 학력에 영향주는 바가 현저하다는 이유를 들어 각 사립학교에 일본인 교원 채용을 의무화하였다. 그리고 조선인 교원에게는 일본어강습회에서 일본어를 학습, 일본어 과정을 이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인 교원에 대한 일본어 강습의 의무화는 교원 친일화의 한 방편이기도 했으며 조선인 교사들을 언어동화정책에 완전히 동원하고자 한 조처였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1926년에 ‘사상선도’를 이유로 식민지 통치질서에 순응할 정신교화교육을 강화시켜 나갔다. 학생층을 파고드는 사회주의 사상의 여파를 막기 위해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지도 감독을 철저히 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각종 사립학교가 ‘내용이 빈약하여 설비가 미비한 점이 많으며 교원은 인가없이 사용한 곳도 있고 교과과정도 매주 교수시간대로 실행하지 않는 곳이 있어 법규에 위반도 되고 사상선도에도 아름답지 못한 사실이 있다’ 註73)고 지적하고, 사립학교에 대한 지도 감독을 철저히 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사립학교에도 일본어를 비롯한 수신·지리·역사 과목 등 이른바 정신교육 과목에서 ‘당해 과목에 자격이 있는 일본인을 채용하라’ 註74)는 주의를 발하여 일본인 교사에 의한 정신교육 및 동화교육의 전담을 강제하였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각종 학교 입학시험의 필수였지만 일본어는 국어시험 내지는 진급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학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필수과목화 했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어는 경시되었다. 


사립학교에서 민족주의 교육이 억압당하자, 부형들은 총독부 관할의 보통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자녀들을 서당으로 입학시켰다. 총독부에서는 이미 1918년 2월 ‘서당규칙’ 註75)을 제정·발포하고 이들 서당들까지도 식민지 교육 장소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식민지 교육광경


그래서 근대교육으로 개혁한다는 명분 아래 서당에도 일본어와 산술 등의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부과하며 일본어 교육의 주요 보급처로 삼았다. 註76) 1920년대까지 이러한 교육방침으로 일관하다가 1929년 6월 서당규칙을 바꾸어 ‘서당에서 일본어·조선어·산술 등을 교수하는 경우는 그 교수용도서는 조선총독부편찬 교과서를 사용해야 한다’ 註77)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서당에도 직업과를 두도록 하고 교육목표를 ‘근로애호의 정신을 함양하고 직업적 의식을 계배啓培  註78)함에 두는 등 완전히 식민지 교육기관으로 삼고자 했으며 일본어와 산술을 교과에 두지 않는 서당은 아예 인가받지 못하도록 조처하였다. 註79) 1930년대로 들어와서는 서당의 감독·취체 기능은 더욱 발휘되었다. 註80) 


1920년대 문화통치하의 교육정책은 3개면에 1개 초등학교10년대는 6개면 1개교, 30년대는 1면 1개교를 두는 것이다. 이로써 학생수도 1920년에 15만여 명에서 1929년에는 48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교육내용에서는 여전히 일본어를 위주로 삼아 4년만 학교에 다니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도록 교육하였다. 1919년에 일어 해독자가 24만명이었던데 비하면 문화통치 기간에 이룩한 성과를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20년의 ‘개정 사립학교 규칙’으로 사립교에서도 일어과와 수신과는 필수과목으로 강제되었다. 


한편 학교교육뿐 아니라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국어야학회·국어강습회를 개최하고 청년훈련소 및 간이학교 시설 등을 만들어 학교를 다니지 않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일본어 보급과 아울러 사회교화 교육도 꾀하였다. 그리고 일본어를 통달해야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관공서공문 및 공용어는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규제하였다. 


일제는 강제병합 이전의 학부와 민간에서 편찬한 교과서에 대한 조사를 행하고 학부 편찬 교과서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작업과 아울러 민간교과서를 불인가하여 그 사용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강점 후 총독부에서는 일본어를 필수과목화하고 교수용어를 일본어로 하였으며 일본어로 기술된 교과서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총독부의 식민지 언어동화정책의 방향은 일본어 보급을 통해 언어동화의 목적을 달성함과 아울러 이를 통해 정신적 동화의 목적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어학시간은 단순한 어학학습이 아닌 정신교화 및 수신적인 학습 효과를 꾀하여 교과서와 수업을 통해 일본주의와 천황주의를 주지시키고 일본의 국세를 과시하며 총독부의 시정을 선전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조선인 학습자들에게 열등의식을 자극하여 식민지 통치에 순응하게 만드는 노예교육이 행해졌던 것이다. 


3·1운동으로 인해 민족교육운동이 거세지자 조선총독부는 한국민의 민족본위교육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교육령을 개정하고 조선적인 교재를 많이 채택한 새로운 교과서 편찬을 조선인에게 약속했지만 결국 조선인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더우기 192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청년학생층에 사회주의 사상이 번성하자 통치에 위기감을 느낀 총독부에서는 일본어·조선어·수신·지리·역사 등 주로 의식교육과 관련있는 과목을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 동화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의 교과서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개정된 어학 교과서들은 일본의 우월성과 문화를 강조하고 천황주의와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총독부의 시정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들 교과서는 1938년 제3차 교육령 개정에 이르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총독부의 어학수업과 교과서를 통한 언어동화교육은 식민지 교육정책을 수행하는 기초적 수단이 되는 한편 식민지교육의 최종 목표로써 진행되었다. 註81) 


5. 사회교육을 통한 일본어 보급


일제는 일본어보급을 위해 학교를 통한 정규 교과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각 지방 공사립학교에 배치되어 있는 일본어과 교원들을 이용해 대중에 대한 일본어 보급사업을 전개하였다. 병합 초기에는 시세에 민감한 청년층들과 지방 군수 및 유지층을 제외하면 일반인들로서 일본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는 일본어 보급을 통해 조선인들을 급속히 동화시키고자 하는 식민지 당국자들을 난감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합 직전부터 강습회를 통해 일본어 보급을 꾀한 식민지 당국자들은 병합 후에는 국어야학회·국어강습회·국어연구회·국어연습회라는 형태로 일본어 보급에 적극 나섰다. 이들 강습회의 교수는 일본인 교원들이었으며 일본인 교원이 없는 벽지인 경우는 헌병·경찰관이 중심이 되어 강습회를 주도하였다. 


군수·면장 등 지방관리들이 강습회를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강습 장소는 학교나 부·군청·순사주재소·헌병분견소·회사·공장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註82) 총독부에서는 친일적인 민간유지들에게 이들 강습회의 운영자금을 원조하도록 하였고 강의하는 교수요원들은 대개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또한 피교육자들에게 강의료는 물론 교재도 무효로 배포되었다. 註83) 이처럼 일본어 학습의 시설과 편의를 제공하고 보조한 총독부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단지 일본어보급 자체에 그치지 않고 ‘선인의 감화’ 註84)와 ‘민심民心의 귀향歸嚮에 보조補助’ 註85)라는 교육목표를 아울러 갖고 언어동화를 통해 친일파를 대중적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강습자들은 시세에 민감했던 청년남자층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여자들과 노인들이었으며 군면 사무소에 근무하는 조선인들이 일본어 숙달 여부가 자신의 출세와 관계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본어를 수학하였다. 


3·1운동 이래 일본어강습회는 민족운동의 열기와 조선인들의 반발이 일자 개최를 보류시켜 부진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교육단체 및 청년단체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가자 이에 당황한 총독부에서는 총독부가 조정하는 어용 교육단체 및 청년사회단체 등 관변단체를 육성·지원하여 다시 맹렬한 교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주민들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주로 학교 시설을 이용하여 강습회·순회강연·야학 등을 개최하여 일본어강습을 비롯한 동화교화교육을 행하고 총독통치를 선전하였다. 註86) 이를 위하여 총독부에서는 일반 강습회 등에서 사용될 일본어 교습 교재로 『국어속수독본國語速修讀本』이라는 것을 출판하고 무료로 이를 배부시켰다. 註87) 


한편 산리山梨 총독이 뇌물수령으로 경질되자 조선에 재부임한 재등실 총독은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교화사업을 재건하였다. 학교에서는 정신교육을 강화하여 학생들의 훈육교육을 철저히 하는 한편 사회교육시설로서 청년훈련소를 설치하여 식민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아동, 혹은 이미 학교를 졸업하여 통제가 불가능한 청년층들을 훈련소에 예속시키고 계속 감시·관리하면서 정신교화교육을 연장·강화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예외없이 일본어교육이 철저히 시행되었다. 註88) 이외에도 관리·교원·은행원·회사원으로 채용하는데 일본어 해독 조건을 기본으로 내세웠으며, 관공서의 공문도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고 관공리와 공직자들이 대민교섭에서 일체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관공서를 출입할 수 없었다. 註89) 이처럼 조선인들이 사회활동을 위하여 일본어를 학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만주침략 이후에는 더 한층 동화정책을 강화시켜 1934년에는 벽지의 농민자제들을 대상으로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한 사람이기 전에 일본국민이 된다.’‘ 국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직업 이해와 능력을 갖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보통학교장의 감독아래 일본인 선생을 상임시키고 일본어를 비롯하여 조선어 註90)·수신·산술·직업과농업 등의 교과목을 교수, 조선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저급한 산업인력과 전시체제에 순응할 수 있는 동원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註91) 


4. 조선어장려책의 본의와 민족적 항거


1. 조선어장려책 시행의 배경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강압하는 한편,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는 조선어 학습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그 조선어장려책의 본의本意는 조선인과 순수한 언어적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으로 몰려오는 일본인 식민지 통치관리들의 통치의 편리를 기하기 위한 자구책에서 나아가 취체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일제는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판임문관·문사·간수와 여감女監취체取締의 직임을 맡은 이들 중 조선어에 능하여 통역의 일을 겸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 월수당을 지급한 바 있다. 註92) 그리고 1916년부터는 총독부 및 소속 관서직원, 특히 경찰관인 조선인들과 직접 접촉하는 자들의 임용이나 승진하는데 조선어 시험을 치루게 하였고 채용되면서부터 조선어 학습과 시험을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다. 경찰관의 경우 실무성적을 매길 때 일본인에게는 조선어, 조선인에게는 국어일본어의 숙부熟否’제2조 7항를 고려한다고 규정하였다. 註93) 뿐만 아니라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여 일본인교원들에게 조선어를 강습하도록 하였고 註94) ‘조선어시험규칙’을 발하여 시험을 치루게 함으로써 교원들이 조선어를 해득하지 못해 발생하는 학생 지도 감독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註95) 이처럼 ‘조선어장려책’은 식민지 통치에 현실적 필요에 의해 요구되었으며 대중적 정책이 아니었다. 조선어장려책의 대상은 주로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들, 즉 경찰관과 교원, 그밖의 관리들과 금융조합 이사들로 이들에 한정되어 시행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9월에 조선에 부임한 수야水野 경무총감은 3·1운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없었던 책임의 절반은 통치측의 조선어 이해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즉 그간의 ‘조선의 정치는 맹농아盲聾啞의 정치’였다고 반성하며 ‘진정 미묘한 의사나 감정이 통하지 않는 감이 있다’고 시인하였다. 그래서 직접 조선인을 접하는 헌병·경찰은 물론 군·면 이원吏員 등의 지방관리와 학교 교원 등에게 ‘조선인을 일일이 감시하기 위하여 그들은 신문지의 표제라든가 혹은 게시문 등을 보아도 그 대요를 알 수 있고 혹은 저들간에 교류되고 있는 잡담의 한마디 두마디라도 알려면 모든 점에서 편리’하다고 하면서 정보수집과 효율적인 탄압을 위해 경찰과 관공리 등에게 조선어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註96) 


3·1운동 때 진압에 나섰던 조선군참모부에서도 헌병경찰관과 하급관리들에게 조선어를 습득할 것을 장려하는 것을 당면의 급무라고 여겼다. 이에 조선어를 습득하는 재조선일본인 관리나 교사들에게 물질적으로 대우해주고 특별수당을 지급하는 길을 강구할 것을 검토한 바 있다. 註97) 이러한 1921년 5월에 조선어 장려수당는 관련 칙령 註98)을 발포하고 이어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조선어장려규정’ 註99)을 발포하여 조선어를 숙달한 자에 대하여 장려수당을 지급하기로 규정하였다. 註100) 장려수당의 지급대상자는 경찰관을 포함하여 총독부 소속 직원을 대상으로 조선어장려시험을 치루게 하고 여기서 성적 우수자를 선발하여 합격한 자들에게 조선어장려수당을 지급하였다. 조선총독부 통치에서 매년의 ‘국어보급’의 상황이 『시정연보』에 실리듯이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선어장려’도 『시정연보』에 보고되는 등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특정의 직업적 통역자 양성만으로는 통치에 철저를 기할 수 없고 치안 유지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반성에서 관공리들에게 조선어장려는 한층 강도있게 시행되어 아예 경찰소 자체에 조선어강습소를 설치하여 경관들에게 조선어를 강습하도록 하였다. 註101) 


2. 조선어장려시험의 시행과 민족적 항거 


조선어 장려시험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 응시자는 일본인 경찰관과 교사, 그리고 관리들이었다. 본 시험은 총독부 혹은 각도에서 년 1회 시험을 실시하고 갑종 1등은 50원, 2등은 30원, 을종 1등은 10원, 2등은 5원의 월액 장려수당을 지급하였다. 을종시험은 각관의 서장이 추천한 자만이 응시할 수 있었고 갑종시험은 을종시험 1등 합격자로서 소속 장관이 추천한 자들이 응시할 수 있었다. 註102) 그래서 총독부 중앙은 물론 전도에 배치된 지소나 지방경찰서에서는 다투어 강습회나 학습회를 조직하고 적당한 교과서를 가지고 학습을 의무적으로 하는 등 한사람이라도 많은 합격자를 내고자 궁리했다고 한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합격자 중 경찰관이 점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註103) 식민지 당국의 하급관리와 조선민중과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조선어장려정책을 시행하게 되는 주요 대상 註104)이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지배를 위해 대단히 적극적인 조선어 학습을 장려한 것이다. 註105) 


출제된 조선어 시험 문제로 ‘조선인의 사상경향은 어떠한가’라든가 ‘조선인의 사회운동으로 어떠한 종류가 있나’ 등의 과제가 주어진 것으로 보아 조선총독부가 어떠한 표준 아래서 수험자의 조선어를 구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註106) 


1930년대 이후 사상취체 건이 늘어나자 경무국에서는 전조선 고등계 경찰관들에게 조선어 속기술을 교습할 것을 정하기도 하였다. 註107) 이처럼 일본인들에게 조선어 학습의 장려는 조선어를 존중하거나 발전시키고자 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 근본 배경은 조선어를 무기로 해야만 통치에 유리하다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치안상 불가피’ 註108)하였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개정 조선교육령은 이전의 교육령과 비교해 볼 때, 교육의 목적과 목표에 있어서는 변화 것이 없다. 교육의 목표는 국어일본어를 보급하고 조선인을 일본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 육성하는 것, 그것뿐이다. 학교에서 모국어인 조선어 학습을 차단당하고 민족어 말살의 위기가 초래되자 언어문제야말로 민족문제의 중심이라는 절실한 자각 아래 민족어를 보급하고 발전시켜나감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노력은 민간에서 주도되었다. 그중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연구회의 활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어연구회에서는 강습회·강연회·잡지발간·조선어학자 양성이라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이래 조선교육협회와 각 지방청년회 등에서도 조선어강습회·강연회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었다. 註109) 


1920년대 중반에는 언론사·조선사연구회·조선어교원 등이 연합하여 각 농촌에서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지방청년회나 지방 단체 등에서도 강습회나 야학을 개설하여 조선어문을 강의하며 어문운동은 발전해 나갔다. 註110) 지석영·최현배·권덕규·이병기 등 조선 어문학자들은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조선어사전편찬 준비에 착수하였다. 1928년 동아일보사는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였으나 총독부에서 중지령을 내린 바 있으며 註111) 또한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가 개편되어 조직된 조선어학회와 언론사, 그리고 학생들에 의해 조선문자보급운동브나로드운동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가자 조선어보급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을 자극할 것이 두려워 한 총독부에서는 강습회 교재가 불인가받은 불온한 내용이라는 구실을 부쳐 경찰·도지사 등을 동원하여 아예 운동 자체를 금지시켰다. 註112) 


한편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정책의 부당함에 맞서 1921년 이후 동맹휴교의 수단으로 저항하면서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할 것과 일본인교원배척운동을 전개하며 조선인 본위교육과 일본노예교육제도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註113) 학생들과 비타협민족주의자들은 개량주의와 일제의 식민지통치 모두를 전면 부인하면서 1924년 7월에 조선학생총연합회를 결성하고 이를 1925년 5월 공학회로 발전시켜 일제의 우민화 정책과 동화정책에 맞서 ‘사회과학연구, 민중본위 교육실현’을 내걸고 학교 밖으로 나와 정치투쟁의 무대로 나왔다. 註114) 처음 학생운동이 조선인 본위교육이라는 계몽차원의 운동에서 실천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자 총독부 당국은 이러한 민족교육운동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고 철저한 취체를 가하였다. 그러자 교육운동단체들은 표면적으로 친목·자선·교육장려라고 하는 취지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려다 일제의 취체에 부딪혀 주도자들은 검거당하고 단체는 강제로 해산되기도 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어가자 민족주의자 일부는 고육책으로 일제가 허용하는 이른바 식민지법 체제 내에서나마 운동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친일파육성책과 맞물려 적당히 타협해 가는 단체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일제 식민지 체제 내로 의존해 가는 정도가 심화되어가는 민족상층부, 이른바 지방유지·지주·상공업자·지식인 등은 민족교육운동을 실천적이며 주체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물리적 힘에 굴복하고 민족분열책에 유입되어 가면서 직접적인 대립투쟁을 접고 일제의 협조를 구하는 가운데 운동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른바 민족부르조아층 주도의 민족교육운동은 본질적인 한계를 안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조선총독부의 체제 내 운동으로 어용화되어 가기도 하였다. 민족교육운동 자체가 바로 반제 항일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본다면 민족부르조아층에 의한 민족교육운동은 이념적으로나 실천성에서 투철한 의식과 투쟁성을 가질 수 없었기에 막연히 민족지향성 만으로 운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결국 교육운동을 전개하던 이들 중에는 민족노선에서 완전 이탈하여 일제의 주구로 전락해 버린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강조했던 조선인본위 교육운동도 1923년 이후에는 구호만이 난무한 채 실천운동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투쟁성을 갖고 조선인본위 교육운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층은 학생층이었다. ‘조선인본위운동’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폭로하고 민족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학생층과 독립운동가들의 반제항일운동의 정신적 구호가 되었으며, 문맹퇴치운동과 한글보급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형성하였다. 


1927년 말에 부임한 산리반조 총독은 사회주의사상과 비타협 민족주의운동이 점차 사회기층까지 파고들자 학교에 강력한 사상적 통체를 가하고자 시학관視學官과 시학視學을 증원하였다. 1928년 10월에 ‘시학관과 시학위원시찰규정’을 발표하여 모든 교육행정 상황을 총독에게 보고하도록 조처하였다. 아울러 동화교육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국어보급의 상황’과 그 시설에 대하여 시찰하도록 지시하였다. 註115) 보통학교의 1면1교 증설과 실업교육의 충실이라는 본질적인 식민지 교육방침을 재확인하고 1928년 임시교육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8월에는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를 소집하여 시세의 변천과 통치위기에 따른 교과서 편찬에 착수하여 식민지교육체제를 더욱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결국 독립적 민족교육을 요구하였던 학생들의 울분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여 학생들은 집단적 동맹휴교 투쟁을 벌렸으며 식민지 노예교육철폐, 조선인 본위교육제도 확립, 조선역사 교수, 조선어 시간 증가, 일본인 교원 배척,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의 주장을 내걸고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였다. 註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