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세변화 / 국내외 정세와 조선통치안의 검토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0. 21:03

제2장 국내외 정세와 조선통치안의 검토 

제1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세변화 13 

1.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정세변화 13 

2. 원경 수상의 식민지정책의 개편 15 

3. 조선총독부관제 개편 전 조선통치안 22 






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세변화 


1.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정세변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만臺灣과 팽호도澎湖島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화태樺太와 관동주關東州를 식민지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일제는 러시아와 협약을 통해 남만주지역을 세력 범위 안에 넣고 대륙 침략 기회를 엿보게 될 정도로 급격히 성장하였다. 또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동맹국으로 참전한 일본은 태평양 적도 이북에 산재한 독일령의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점령하고 세계대전이 끝나자 위임통치하며 사실상 식민지화하였다. 


일제는 동아시아를 침략해 들어오는 백인 러시아를 막기 위한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하며 조선을 전쟁에 끌여들이고 마침내 조선을 식민지로 점령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일제의 불법적 침략성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동아시아에 대한 정치적 여론은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을 막는데 집중되어 일본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을 오히려 러시아의 남화를 막는 동아시아 평화 유지의 길로 인식하였다. 

 

강제병합 후 무단적 헌병경찰의 탄압책으로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은 비밀결사 형태로 겨우 유지된데 비해 국외에서는 항일독립운동기지 개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독립운동의 저변 또한 크게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새로운 국면을 제공하였다. 어제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와도 동맹국이 된 일본은 러시아 영내에서의 항일운동을 하는 한인들의 탄압과 추방을 요구하였고 실제로 연해주 일대의 한국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표면적인 활동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서북간도 일대에 한인들이 개척한 지역 곳곳에서 항일운동은 계속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시베리아지역에까지 전파되면서 소비에트 노농정부는 약소민족의 해방과 제국주의의 타도를 외치었고 침체되었던 한인들의 반일운동은 재개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이전의 부조리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꿈꾸는 이상적 사조가 유행처럼 번져가면서 ‘정의’와 ‘인도’, 그리고 ‘개조’의 가치가 화두로 떠올랐다.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한 열강들은 세계의 구도를 이른바 ‘베르사유체제’로 구축해 제국주의 열강들간에 세력 균형을 이루어 다시는 전쟁에 돌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목표를 가졌다. 여기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될 것이라는 소식이 일본 유학생계와 재미한인사회에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특히 재미 동포들은 뉴욕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 참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변모하는 세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제 그야말로 사회진화론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논리가 쇠퇴하고 침략주의와 비인도적 전쟁을 비판하며 ‘정의’와 ‘인도’가 흐르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국외에서 고단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한인들에게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의 새로운 중심국가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로 인해 식민지 약소민족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었으며 적지 않게 미국에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던 안은 유럽문제였으며 동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제반 문제들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은 채 강화회의는 끝나고 말았다. 


2. 원경 수상의 식민지정책의 개편 


3·1운동 발발 직후 일본 천황은 조서를 발하여 “일찍부터 조선의 강령을 생각하고 민중을 애무하여 일시동화 짐의 신민臣民으로서 추호의 차이도 없다”는 ‘합방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고 일본과 합방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수상인 원경原敬, 1856~1921은 1919년 8월 19일 조선통치 방침을 변경할 것과 관제를 개정할 것을 발포하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조선은 일본의 판도로서 속방屬邦이 아니며 또한 식민지植民地도 아니며 즉 일본의 연장延長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조선를 동일한 제도 아래 두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이때에 조선의 관제개정에 대해서 앞서 개혁을 기도했으나 마침 금년 봄에 조선에서 소요가 일어났기 때문에 금일까지 지연되었다가 이제야 다행이 소요도 진정되었기 때문에 개혁을 단행하려 한다. 그렇지만 조선은 내지와는 크게 사정과 문화의 정도가 달라 지금 바로 무리하게 그 형태를 내지와 마찬가지로 동화시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조선에서는 특수한 사정이 있음을 잊지말고 적절한 시설을 하여 점차 교육·산업과 기타 여러 방면이 내지와 마찬가지의 영역에 도달케 하지 않으면 안된다. 註1) 


사실 원경 註2)은 일본에서는 드물게 평민출신이며 ‘대정大正데모크라시’를 이끌었던 수상이지만 그의 ‘내지연장주의’의 요점은 식민지를 완전한 일본의 한 지방으로 동화하자는 의미이다. 그는 어찌보면 식민주의자들보다도 더욱 팽창주의적인 애국자라고 할 수 있다. 원경 수상이 3·1운동 이전에 이미 조선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는 말은 솔직히 인정할 수 없다. 일본은 전세계를 상대로 선전하기를 조선 민중은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은혜로 여기고 있으며 일본의 조선통치는 시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여 조선통치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3·1운동의 발발로 일제의 무단적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죽음을 불살라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고 일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자 원경 수상은 서둘러 조선에 대한 새로운 개혁과 문화적 통치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원경이 조선을 일본의 연장으로 한다는 조선통치의 방침이 세워졌다 해도 당대의 일본 정치가들 모두의 정치의식에서 조선을 일본의 연장이라고 본 것은 아니었다. 조선 통치기간 내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수탈과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에서 조선식민지론朝鮮植民地論을 부정하는 이들은 당대 식민지의 현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일본은 조선을 결코 식민지배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다. 註3)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 책들이 일본에서 매년 발간되고 있다. 이들 책의 필자들은 대부분이 사료에 근거해 역사를 실증하기보다는 짧은 지식만으로 주관적으로 역사를 논평하려드는 자들로, 더불어 논쟁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문제의 논리적 모순은 당대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인측에서도 나타난다. 즉 민족운동계는 총독부 시정에서 일본인과의 차별철폐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일본으로의 동화는 절대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인이 일본인과 차별철폐를 주장했다고 해서 이를 일본으로의 동화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함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재등실 총독의 조선통치의 기본은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이민족인 유구琉球와 북해도北海道를 일본의 영토로 완전 흡수한 선례를 갖고 있었기에 조선 역시도 그와 같이 완전한 일본국으로 흡수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의 판도로서 속방도 아니요, 식민지도 아니며 곧 일본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조선을 동일한 제도 아래 두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註4)는 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이 부임할 예정인 재등실에게도 3·1운동의 조기 진압 임무와 함께 내지연장주의·내선융화 실현의 시정이 주문되었다. 문화통치의 실시는 조선총독 재등실의 구상이 아닌 원경 수상의 구상인 것이다. 


조선을 일본의 연장으로 한다는 식민지통치방침을 세운 원경 수상


한편 강제병합을 전후로 하여 조선에 들어와 일본인 관리로 조선 통치에 참여해 통치 경영의 경험을 갖고 조선의 시세를 진단하였던 이들은 무조건적인 내지연장·동화방책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1910년 강제병합 후 조선을 동화하기 위한 방법을 여러모로 검토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 나간 바 있다. 한국통감부 시절 학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학무정책을 담당하고 병합 후 조선총독부체제에서 학무국 제1대 과장을 역임한 외본번길畏本繁吉  註5)은 자신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민족을 진정한 일본민족으로 동화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한 의견서를 총독부에 제출한 바 있다. 註6) 


1895년 대만臺灣을 식민지로 획득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나선 일본은 한국과 만주, 그리고 남태평양의 섬들까지 식민지로 획득함으로써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帝國’으로 성장하였다. 대만을 식민지 통치하면서 비로서 식민지법률 체계를 갖추고자 일본 내부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만을 내지內地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논의의 중심에는 대정데모크라시를 이끈 원경 수상이 있다. 원경은 일본에서 오랜 기간 지속된 번벌藩閥정치와 원로정치를 비판하고 정치적 의견을 같이하는 상공업자와 도시 민중이 참여한 정우회政友會와 국민당 등의 정당 정치세력을 주도하였다. 1913년 ‘번벌 타도, 헌정 옹호’라는 구호 아래 제1차 호헌운동을 전개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원경은 대만통치에서 ‘내지연장주의’를 적용할 것을 일찍이 주창한 바 있으며, 조선통치에도 이를 적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註7) 그러나 당시 정치권을 장악한 장주長州·융마隆摩 파벌 세력이 주창하는 식민지 통치정책이 채택됨으로써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통치안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일어난 민주주의 사조와 1918년에 일어난 일본내 쌀소동으로 이반된 민심으로 인해 번벌정부 통치가 종결되자 정우회 총재였던 원경 정당 내각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내정의 내각은 쌀소동이라는 유례없는 민중 봉기에 봉착하자 그해 9월에 총사직하면서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던 산현유붕山縣有朋의 지지를 받은 원경은 9월 27일에 내각을 조직하고 일본 최초로 중의원으로서 의석을 갖는 총리대신에 올랐다. 원경 내각은 정국의 전환을 꾀하며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해 ‘내지연장주의’를 방침으로 한 개혁추진을 검토하였다. 변화와 개혁의 요구는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에 전민족적으로 저항한 3·1운동의 발발은 조선에서의 식민지 통치체제에 대한 전면적 개혁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하였고, 원경 수상은 자신의 평소 지론이었던 내지연장주의 정책을 조선통치에 채택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註8) 귀족 작위가 없는 이른바 평민 중의원 의원 출신인 원경의 출현을 일본 민중은 환영하였으며 원경 수상은 이에 걸맞게 여러 개혁을 시행하였다. 註9) 


원경은 1910년대 식민지 지배정책은 구미제국의 식민지배를 그대로 모방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이해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구미열강, 특히 백인국가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인종과 언어가 다르고 종교·역사·풍속 등이 달라 다른 제도와 법률을 적용하여 식민지를 통치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며 “일본과 신영토인 조선의 관계를 보면 언어와 풍속에는 다소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근본을 찾아간다면 거의 같은 계통에 속한다. 인종은 처음부터 같은 뿌리이고 역사도 상고로 올라가면 거의 동일하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일본에서와 마찬가지의 행정·사법·군사·경제·재정·교육제도 등을 시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3·1운동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조선의 독립 요구를 막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조선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조선은 일본과 문명의 정도나 생활 상태 등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급격한 동화가 아닌 점진적인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지연장주의’ 실시의 내용이다. 註10) 


그는 일본에서 대정데모크라시를 주도했을지 모르나 그의 ‘내지연장주의’가 조선에서 실현되려면 무단통치와는 다른 차원에서 식민지정책을 동반해야 했다. ‘내지연장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완전한 동화주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문화와 제도를 일본 국내와 동등하게 한다는 것은 빠른 시일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더욱이 실현 가능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는 제도적인 부분을 하나로 하는 외형적 동화를 이루되 완전 동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세’와 ‘민도’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중간단계의 개편이 요구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3·1운동이 빨리 진정되기를 원했던 일제는 식민지통치의 문제점과 민족문제 등에 대해 심각히 고려할 겨를도 없이 조선 통치안을 입안·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재등실齋藤實을 조선총독에 임명하여 조선총독의 중임을 맡겼다. 


이같이 조선통치의 개편을 서둘렀던 이유는 3·1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소식이 전세계로 전파되어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과거처럼 식민통치를 근대화와 문명화 과정으로 미화하던 일본의 일방적 선전책이 통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3·1운동의 여파를 시급히 진정시키고 국제여론의 약화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시급히 조선에서 실시해야 할 사안을 검토하여 식민지 통치방침을 발표하였다. 즉 조선총독은 현임 육군대장 임명에서 문·무관을 임명하는 것으로 개정하고, 일본의 법률과 국방·사법·재정 사무도 조선에서 동일하게 시행할 것과 지방제도 개혁과 헌병경찰제 폐지,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 실시, 조선인과 일본인간에 잡거雜居나 잡혼雜婚 장려, 관리 임용과 대우에서의 차별 철폐, 조일 양국민의 토지 개발 및 개간에서의 융화 도모, 관리의 제복·대검 폐지, 지방의 명족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태형을 폐지하며 일본 형법을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할 것, 그리고 3·1운동의 발발의 배경 세력인 기독교 선교사와의 의사소통을 중시하고 한국 특별 회계를 존속시켜 조선의 발전을 도모할 것 등 15가지의 항목들이 통치개혁안으로 마련되었다. 註11) 


3. 조선총독부관제 개편 전 조선통치안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본은 조선과 앞서 침략 점령한 대만 등지에서 식민지 통치를 어떠한 방향에서 실행해 갈 것인가에 대한 여러 의견서와 논문들이 일본내 지식인들과 정부 관료들의 사견私見을 표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1910년대 주목되는 이는 산본미월내山本美越乃이다. 그는 식민지통치에 ‘동화주의’와 ‘자치주의’ 2대주의를 제시하였다. 식민지통치 방식으로는 자치주의가 바람직하나 이것이 장래 독립을 준비해 주는 통치방법이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註12) 1910년대부터 주로 식민지 관료들은 동화주의를 주장한 반면, 일제 무단통치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일본인들과 재조선 일본인 사이에서는 자치주의의 주장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통치 방식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에는 독립운동 세력을 국경 밖으로 내몰고 조선인의 최소한의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강압적 무단통치만으로 조선을 안정적으로 식민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여러 논란이 일어나도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중을 상대로 한 식민지 관료들은 무단 식민지 통치가 한계에 도달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3·1운동의 발발은 1910년대 식민정책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달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을 진압한 조선군참모부에서 올린 1919년 7월 14일자 보고서에서는 3·1운동의 원인을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으로 구분해 제시하였다. 註13) 3·1운동의 원인은 ① 병합에 수반한 불평, ② 자유사상에 현혹된 분자의 활동, ③ 일반 시정에 대한 불평, ④ 일본인의 압박에 대한 불평 등을 꼽았다. 그중 ③의 내용은 즉 조선인 관리와 일본인 관리의 대우 차이, 일본인·조선인의 교육 차이, 급속한 여러 제도의 개변, 조선인 관리의 지위 불안정에서 오는 불평이고, ④의 내용은 하급관리의 경멸적輕蔑的 태도, 일반 일본인의 경모적 태도, 일본인의 조선 이민 문제 등에서 나온 불평이라고 정리하였다. 


근인은 ①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미국 대통령에 의해 창도되자 동경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주하는 배일조선인들에 호응하여 독립을 고창하고 3·1운동을 일으켰으며, ②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에 따른 독살 혹은 분사설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발전하였으며, ③ 미선교사들이 배후에서 3·1운동을 선동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의 활동으로 미국에 대한 존숭의식이 높아가면서 조선인들 사이에 미국이 일본보다 강대하다는 사대사상이 번성해 가고 있다. ④ 천도교는 배외사상으로 성립된 동학의 유물로 민족자결과 광무황제의 승하를 호기회로 삼아 기독교도들과 서로 제휴하여 3·1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의 원인을 이상과 같이 진단한 조선군참모부는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먼저 일본 국가의 위력과 권력체 안으로 조선인들을 완전 포섭하고, 여기에 일반민의 대우 개선과 생활 안정에 노력한다면 완전동화의 길로 나갈 것으로 진단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의 민도가 나아진다고 해도 절대로 독립을 허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편 대만과 조선에서 식민지 관료로 복무한 지지육삼랑持地六三郞은 1920년 6월과 11월에 조선총독부를 사임하면서 「조선통치론朝鮮統治論」과「조선통치후론朝鮮統治後論」이란 의견서를 재등실 총독에게 제출하였다. 註14)그는 대만과 조선에서의 20년간의 통치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경영이라는 것은 “본래 위선의 정치이고 모순의 정술政術”이라 진단하고 있다 . 그는 식민지경영의 본질은 “통치국민의 사상·감정·이익과 피통치 국민의 사상·감정·이익의 모순과 충돌을 교묘하게 안배하고 조화하여 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재등실에게 식민지통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겉으로는 공명정대한 왕도를 제창하면서도 속으로는 교묘한 패도를 택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註15) 재등실의 통치정책에 대해 자신의 경험에서 축적된 현실적인 충고를 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동화정책은 조선인들의 반감을 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註16) 


10년간의 식민지 관료로 복무하면서 그가 관찰한 조선은 일본보다 문명적으로 우수하고 조선인은 지력이나 판단력에서도 일본인보다도 뛰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조선인을 일본인화한다는 것은 사실상 대단히 어렵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을 동화하는 국민적 대사업의 수행은 소수의 지배자와 지식인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동참이 필요한데,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조선인이 일본에 동화할 수 없음은 조선은 독자적 문명을 갖고 있고 독립국가였다는 국민의식이 깊고 왜구와 임진왜란으로 인한 반일감정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으며, 조선이 일본보다 문명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부심 등의 민족감정이 형성되었기에 결코 일본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합병의 당위성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조선국민에게 동화정책의 실시는 결국 조선인의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註17)고 진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