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형무소의 설치 /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7. 18. 22:11

제5장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제2절 형무소의 설치

1. 감옥관제 제정

2. 감옥의 설치와 운용

제3절 재판소 설치

제4절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2. 형무소의 설치

1. 감옥관제 제정

조선시대의 감옥은 미결수를 수용하던 곳이었고, 감옥은 설치하되 비어있게 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감옥 규모가 크지 않았다. 조선후기 전옥서의 수감인원은 평균 40~100여 명, 지방의 경우 50명 내외 정도로 매우 소극적으로 운영되었다. 시설과 규모면에서도 보통 2~3개의 온돌방 정도였고, 도주를 방지하기 위한 관리·감독 외에는 별도의 운영 시스템이 없었다. 註18) 

그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감옥사무는 내부內部의 소관하에 경무청 업무에 속하게 되었고, 1895년 4월에는 전옥서가 폐지되고 감옥서가 신설되었다. 註19) 1896년 4월 ‘형률명례’ 註20)를 공포하여 형률을 사형·유형·역형役刑·태형 등 4종류로 나눠 전통시대와 근대적인 형률을 모두 포함한 형태를 띠었다. 1898년 1월 ‘감옥규칙’을 제정하여 미결수와 기결수를 구분하는가 하면, 註21)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 금지·입감 절차 및 기록 유지·관리 등의 원칙이 마련되는 등 근대적인 형태를 갖춰 나갔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감옥제도 또한 식민권력의 탄압기구로 변질되어 갔다. 1907년 12월 정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을 더욱 옥죄던 통감부는 이를 법부法部로 이관시키고 ‘감옥관제’ 註22)를 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법부대신이 형 집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전옥典獄9명, 간수장 54명, 감옥의監獄醫12명, 통역 7명의 직원을 두도록 했다. 전옥은 법부대신 및 검사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감옥 사무를 관장하며 부하직원을 지휘·감독하였다. 註23) 감옥의는 상관의 명을 받아 의무에 종사하며 통역은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통역을 둔 것은 정미조약 체결 이후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면서 감옥서의 고위직에 일본인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하위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관제개편의 후속 조치로 한성부 경무청 감옥서를 폐지되고 경성감옥서가 설치되었다. 註24) 당시 감옥개편은 소위 ‘옥무쇄신獄務刷新의 제1간수第1看守’로 평가받았던 법부 차관 창부용삼랑倉富勇三郞  註25)과 법부서기관 신야충무神野忠武  註26)에 의해 주도되었다. 註27) 창부는 한국 내 일본인에 의한 통감부재판소의 설치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제안하면서 관련 법령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일본인을 직접 한국재판소의 관리로 임명하여 일본인 및 다른 외국인의 재판 일체를 관장하고자 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내 일본을 제외한 외국에 대하여 치외법권의 효력을 폐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註28) 신야는 감옥관제 및 각종 법령 등을 정비하면서 감옥관리 선발, 감옥관리에 대한 복제, 급여 및 감옥운영 세입·세출, 옥사 개축 등 감옥 운영에 필요한 제반사항 일체를 정비하였다. 

2. 감옥의 설치와 운용

1908년 4월 전국에 걸쳐 감옥서가 전격 폐지되고 경성감옥을 비롯하여 8개의 ‘감옥’이 설치되었고, 註29) 같은해 7월부터 업무가 개시되었다. 이는 종전의 감옥시설을 약간 변경한 것이다. 8개 지역을 선정한 것은 1907년 12월 제정·공포된 ‘재판소구성법’에 맞춘 것이었다. 전국을 공소원이 있었던 서울·평양·대구 등 3개 권역별로 나누고, 이하 지방재판소가 있었던 공주·함흥·해주·진주·광주를 대상지로 삼았던 것이다. 註30) 

일제는 8개 본감을 공소원 검사장의 감독하에 두어 통제토록 하였다. 경성공소원 검사장은 경성·공주·함흥감옥을, 평양공소원 검사장은 평양·해주감옥을, 대구공소원 검사장은 대구·진주·광주감옥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간수와 간수장 중간에 간수부장직을 신설하여 중간관리, 감독활동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본감 설치는 지방 사법사무 및 경찰행정 장악 방법과 마찬가지로 서울을 중심으로 각 권역의 중심도시를 먼저 장악하고, 각 권역의 중심도시 하에 주요 지방도시를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즉 통제구조를 1단계 경성감옥, 2단계 평양감옥, 3단계 공주·함흥·해주·전주·광주감옥으로 편제하여 감옥운영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던 것이다. 

1908년 8월 경성감옥에 근무했던 인물은 경성감옥서장 신미호지조神尾虎之助를 비롯하여 간수장 정상신조조井上信之助·국분만차랑國分萬次郞·청원효태랑淸原孝太郞, 감옥의 고두만치高頭萬冶 등이었다. 이들은 경성감옥 근무 경력을 발판으로 감옥서장으로 승진하여 일제강점기 전국 각 감옥서장을 역임하였다. 註31) 한국인으로 경성감옥에 재직하였던 인물로는 간수장 이석구李錫求·홍진항洪鎭恒·이기용李基鏞  註32) 및 통역 권오봉權五鳳등이 확인된다. 이전부터 감옥관리로 근무하였던 자들이었다. 당시 감옥운영은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이뤄졌으며, 기존 한국인 감옥서 관리들을 하층관리로 기용하여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註33) 

경성감옥은 종로의 전옥서 자리에서 독립문 밖 금계동현재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신축·이전하였다. 註34) 예전 전옥서는 경성감옥 종로출장소로 사용되다가 1921년에 폐지되었다. 註35) 경성감옥을 신축 이전한 것은 당시 경무고문이었던 환산丸山이 앞으로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 것을 우려하여 미리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註36) 

당시 일제침략에 맞선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감옥의 수용인원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註37) 대표적인 항일의병장으로 허위·이강년·이인영·김구학·김경운 등이 수감되었다. 註38) 이에 일제는 1909년 서대문 대평동에 있는 원래 조선포병대 막사를 인수하여 경성감옥 서대문출장소 註39)로 개조하여 항일운동가들을 수용하였다. 수감자를 사유별로 살펴보면, 내란 192명, 폭동 44명, 강도 710명 등 주로 정치·사상범이 많았다. 註40) 

당시 제대로 감옥시설을 갖춘 곳은 경성감옥뿐이었고 그 외의 감옥은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온돌 감방이 2~3개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8개 감옥의 감방면적을 집계하면 298평 3합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註41) 또한 1908년 말 수용인원은 이미 2,000명을 넘고 있었지만 註42) 수용밀도는 평당 7명을 넘어설 정도로 옥사는 가득 찼으나 계속 수용인원이 증가하여 평당 십 수 명에 이를 정도였다. 수감자들은 비좁아 누워서 잘 수가 없어 1/2씩 또는 1/3씩 교대로 잘 정도로 감옥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대구감옥은 감방 3개로 15평에 불과했지만 수감자가 150명이나 되었으며, 공주감옥은 감방 안에 변기를 넣을 공간이 없어 감방 앞에 항아리를 놓아두고 호스를 방으로 연결하여 용변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 註43) 함흥감옥에서는 감방 내에 상하단의 선반을 설치하고 마치 2층처럼 만들었는데, 천장이 낮은 온돌방을 2단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가로로 눕기만 할 정도였다고 한다. 註44) 

서대문형무소

1908년 11월 ‘감옥분감 설치령’ 註45)이 제정되면서 각지에 분감이 설치되었다. 분감 설치는 1907년 12월 감옥관제 개편 당시 계획되었다. 감옥관제 제10조 분감 설치규정과 분감장은 간수장으로 할 것을 명시하고, 또한 간수장의 인원을 54명으로 대거 증원하여 감옥의 전국 확대를 준비하였다. 註46) 일제는 8개 본감 예하에 분감까지 설치하여 식민지배 권력을 지방 곳곳까지 확대해 나가고자 했다. 註47) 이를 살펴보면 경성감옥의 분감으로 인천과 춘천에, 공주감옥의 분감은 청주, 함흥감옥의 분감은 경성鏡城과 원산에, 평양감옥의 분감은 의주, 진주감옥의 분감은 부산, 광주감옥의 분감은 전주 등 8개소가 설치되었다. 註48) 영등포의 이사청감옥을 영등포감옥본감으로 개편하고 의주분감 대신 신의주의 이사청감옥 註49)을 신의주분감으로 개편하였다. 이와 함께 의주분감은 신의주분감의 출장소로 변경하고 청진분감을 신설하여 종전의 경성분감은 청진분감 출장소로 변경하였으며 광주감옥 목포분감을 신설하였다. 


이들 분감은 1909년 2~3월경에 업무를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54명이었던 간수장은 1909년 2월에 70명으로 늘어났다. 註50) 인천분감은 1909년 2월 인천이사청 건물에 설치되었다가 1923년 3월 폐지되어 인천구호원仁川救護院으로 사용되었다. 춘천분감은 1909년 3월 춘천관아의 감옥시설과 순찰교습소 건물 일부에 설치되었다. 순찰교습소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감방은 온돌방 3개였는데 수감자가 증가하여 수용이 어렵게 되자 같은해 9월 춘천읍 위동리 재판소 부지 일부에 감옥을 신축하였다. 註51) 그뒤 감옥의 운영 및 관리인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총 315명 가운데 일본인이 257명81.6%이 차지하였고 한국인은 58명18.4%에 불과할 정도였다. 본감의 감옥서장 8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註52) 대표적인 한국인 간수장으로는 박영준朴永俊·김경태金璟泰·김택봉金宅鳳등과 간수 및 통역을 담당하였던 김정배金正培등이 확인된다. 결국 전국 16개 지역에 설치된 본감과 분감은 한국인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09년 7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인 기유각서己酉覺書  註53)가 체결되면서 한국의 법부를 폐지되어 사법권과 감옥사무가 박탈되었다. 註54) 감옥사무를 장악한 일제는 1909년 10월 한국의 감옥규칙을 비롯한 감옥관계의 법령을 모두 폐지하고, 11월부터 통감부령에 의해 사법청에서 감옥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통감부사법청분과규정’ 에 따르면, 사법청에 직원과·서무과·민사과·형사과의 4개과를 두었다. 감옥의 설치나 폐지는 직원과의 소관이었으나 감옥의 운영, 감독은 형사과에서 관장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강점 후에도 통감부의 조직이 잠정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9월 29일부터 조선총독부관제를 제정·시행함으로써 통감부 사법청은 총독부 사법부로 개편하여 한국에서의 사법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사법부는 서무과·민사과·형사과가 있었는데 감옥과 재판소의 설치 및 폐지는 서무과 소관이었고 감옥업무 및 출옥인 보호는 형사과 소관이었다. 註55) 사법기관은 총독에게 직속되어 사법기구 구성, 법관 인사 등이 총독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총독정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 ‘감옥관제’ 註56)를 개정하였다. 감옥관제의 주요 내용을 보면 총독이 감옥을 관리하며 그 설치나 폐지도 총독의 권한에 속하도록 하였고, 공소원 검사장으로 하여금 관할 내의 감옥을 감독토록 하였다. 이어 ‘특별임용령特別任用令’을 제정하여 전옥典獄은 통감부 전옥이나 감옥사무관 재직자 중에서 임용하게 하였고, 10월 종전에 통감부 감옥에 근무하던 감옥관리는 동등한 대우의 봉급으로 총독부 감옥의 직원에 임명시키는 과도적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감옥직원은 전국에 전옥典獄9명, 간수장看守長75명, 통역생通譯生9명, 그밖에 감옥의監獄醫·교회사敎誨師·교사敎師·약제사藥劑師·간수看守·여감취제女監取締등을 두고 감옥은 본감과 분감으로 설치, 본감本監의 장長은 전옥典獄으로, 분감장分監長은 간수장看守長으로 보하게 하였다. 


1910년 10월 감옥을 개편하여 영등포감옥을 경성감옥 영등포 분감으로 변경하고 진남포·마산·군산 등지에 새로 분감을 설치함으로써 전국의 감옥은 본감 8개소, 분감 13개소가 되었다. 註57) 


일제가 1912년 3월 감옥 기본법인 ‘조선감옥령’ 註58)을 공포하면서 비로소 ‘감옥법’이 제정되었고, 사무분장규정 또한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사법부 서무과는 감리과로 개칭되었고 민사과·형사과·감리과로 개편하였다. 이는 일본의 감옥법監獄法  註59)을 한국에 적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특별한 법령이 있을 경우에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이를 근거로 일본에서는 시행하지 않는 태형笞刑을 실시하는 등 감옥운영 전반에 걸쳐 일본과 달리하고 행형에서 조차 민족차별을 심화시켰다. 또한 1912년 9월 종전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고 마포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신설하여 형기 10년 이상의 장기수들을 수용하였다. 


1915년 5월 관제 및 사무분장규정을 개정하여 민사·형사·감리 등 3개과에서 법무과·감옥과의 2개과로 축소·개편하였다. 법무과는 재판소의 설치 및 폐지, 민사·형사 및 비송사건의 재판사무에 관한 사항, 형의 집행에 관한 사항 등을 담당했고 감옥과는 감옥에 관한 사항, 가출옥 및 출옥인 보호에 관한 사항, 범죄인의 식별에 관한 사항 등을 담당했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걸쳐 감옥수감자는 초만원을 이루자 일제는 이를 계기로 감옥시설을 크게 확장하였다. 1919년 5월 대전감옥을 신설한데 이어 1920년 영등포·청진·신의주·목포·전주 등지에 5개의 분감을 본감으로 승격·개편하였으며, 1921년에는 개성·강릉·금산포·서흥·김천·안동·제주 등지에 7개소의 분감을 신설하였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이 전환되면서 관제 개편이 이뤄져 같은해 8월 사법부는 법무국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20년 8월 법무과를 민사과와 형사과로 분리하고 감옥과監獄課는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