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일제하 사법제도의 형성 /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7. 18. 22:05

제5장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제1절 일제하 사법제도의 형성

제2절 형무소의 설치

1. 감옥관제 제정

2. 감옥의 설치와 운용

제3절 재판소 설치

제4절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1. 일제하 사법제도의 형성


일제는 통감부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즉 일제의 사법권 침탈은 1907년 7월 24일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본격화하였다. 註1) 이미 일제는 이전에도 이미 법무 고문·참여관·보좌관의 배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사무에 광범하게 관여해 오고 있었다. 한일신협약 제3조에서 사법 사무는 보통행정과 구별한다는 것으로 사법권의 탈취의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재판제도가 한성재판소 및 평리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방재판소에 전담 재판관 없이 관찰사·목사 등이 겸직해온 현실을 비판하면서 사법권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각 재판소에 일본인 보좌관 등을 배치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침탈해왔다. 註2)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협약 부속 각서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 즉 대심원大審院·공소원控訴院·지방재판소地方裁判所·구재판소區裁判所를 신설하고, 간수장 이하 반수를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을 설치할 것을 약속받은 일제는 이제 사법권의 완전 장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 12월 법률 제8호 「재판소구성법」, 제9호 「동 시행법」, 제10호 「재판소설치법」 공포로 일본과 같은 3심제를 채택한 일제는 대심원 1서울, 공소원 3서울·평양·대구, 지방재판소 8서울·공주·함흥·평양·해주·대구·진주·광주, 구재판소 113개소한성부 1·경기도 12·강원도 8·충남 12·충북 6·함남 5·함북 3·평남 7·평북 7·황해도 8·경북 14·경남 10·전남 11·전북 9를 설치하고 전옥典獄을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재정상 이유로 한꺼번에 모든 재판소를 신설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일제는 1차로 1908년 1월 대심원, 공소원과 서울 외 7개 지방재판소, 서울 외 15개 구재판소를 개청하고, 1909년 1월에는 2차로 인천 외 7개소 지방재판소지부와 개성 외 23개 구재판소를 개청하였다. 註3) 게다가 1908년 3월부터 대심원장, 검사총장, 서울 공소원장, 서울 공소원 검사장, 서울 지방재판소장 및 검사장, 서기 6인에 일본인을 고빙傭聘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다수의 일본인 법관을 임명함으로써 경찰권과 함께 통치권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적 강제기구인 사법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908년 새로 임용된 법관 내역을 보면 번역관보飜譯官補 9명이 임용된데 비해, 조선인은 판사 36인, 검사 9인, 서기 4인이 임용된데 불과하였다. 註4) 


또한 앞으로 병합 이후 조선에 대한 법률적 지배에 대비하여 구래舊來의 조선법에 대한 조사와 그 개정 작업도 시작하였다. 1908년 1월부터 형법·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 및 기타 부속법령의 입안 및 그 재료 조사에 착수하였고, 5월 말부터는 민법 편찬 재료모집을 위해 조선 각지의 관습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08년 7월 『형법대전刑法大全』을 개정하고, 민·형사 소송규칙 및 기타 제 법률에 대한 개정 및 신설 법령이 발표되었다. 註5) 

 

이처럼 조선의 사법권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초준비를 마친 일제는 마지막 단계로 1909년 7월 12일 조선의 사법 및 감옥서무를 모두 일본정부에 위탁한다는 이른바 ‘기유각서己酉覺書’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5조로 이루어진 각서의 내용 註6)에 따라, 10월 법부가 폐지되고 그 사무는 신설된 통감부 사법청으로 이관되었다. 칙령 제236호 「통감부재판소령」, 제243호 「통감부 감옥관제」를 발포한 일제는 통감부 사법청 산하에 고등법원 1개소, 공소원 3개소, 지방재판소 8개소, 동 지부 9개소, 구재판소 80개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판사 192명, 검사 57명, 통역관 기타 246명 총 495명과 조선인 판사 88명, 검사 7명, 기타 215명 총 310명을 채용하였다. 註7) 그러나 조선인 법관은 민사재판은 원고·피고 모두가 조선인인 경우, 형사재판은 피고인이 조선인인 경우에 한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특히 적용법규에 있어서 일본제국 법규를 원칙으로 하되, 조선인에 대해서는 조선 법규 및 관습을 적용한다고 했으면서도, 실제로 조선인과 조선인이 아닌 사람의 민사소송에 대해서는 일본법규를 적용하게 함으로써 註8)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병합 이전부터 이미 대부분 일본제국주의의 법률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한일합병 직후에도 1910년 10월 1일 제령 5호 ‘통감부재판소령 중 개정하는 건’을 공포하여 종래의 사법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즉 ‘통감’을 ‘조선총독’으로, ‘한국’을 ‘조선’으로, ‘대심원’을 ‘고등법원’으로 고쳐 종래의 「통감부재판소령」을 「조선총독부재판소령」으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기존의 4급 3심제 재판소 조직은 ‘구재판소→지방재판소→고등법원’ 혹은 ‘지방재판소→공소원→고등법원’이었는데, 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조선인 판·검사는 민사의 경우엔 원고와 피고가 모두 조선인일 경우에만, 형사의 경우엔 피고인이 조선인일 경우에만 재판에 참여케 하였던 조항도 존속시켰다. 註9) 


일제는 1912년경에 재판제도와 판·검사 정원의 조정, 민·형사법제의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형사령」과 「조선민사령」의 제정 등 전반적으로 사법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법제도의 정비는 강점 과정에서 의병재판 등 사법적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늘어난 사법기구와 법관의 정비, 나아가 총독부 재정의 독립에 따른 총독부 기구와 인원의 정비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註10) 또 일제는 1912년 3월 18일 제령 4호로 註11)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대폭 개정하여, 기존의 재판소 명칭을 법원으로 바꾸고 4급 3심제를 고등법원-복심법원-지방법원의 3급 3심제로 바꾸었다. 과거 재판소는 합의제였으나 개정령에서는 지방법원은 제1심의 판사 단독으로 재판함을 원칙으로 하고 특히 중요한 사건에 한하여 3인의 판사로 구성되는 합의부에서 재판하게 하였다. 복심법원은 3인, 고등법원은 5인의 판사로 조직된 합의부에서 재판하게 하였다. 


고등법원은 종래와 같이 경성 한 곳에 두고, 복심법원은 경성·대구·평양의 세 곳에, 지방법원은 경성·공주·함흥·평양·해주·대구·부산·광주의 8개 지역에 두었다. 지방법원은 일제 말까지 신의주·전주·청진의 세 곳이 증대되어 도합 11개소가 존재하였다. 또한 지방법원의 사무 일부를 담당하기 위하여 구재판소를 지방지청으로 변경하여 103개소에서 60개로 축소하여 두었다. 그후 이들 지방법원 지청들은 일제 말까지 승격되거나 격하 또는 폐지되기도 하고 때로 신설되기도 하였다. 1914년부터 지방법원 관할 하에 지방법원 출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일제 말에는 모두 173개의 출장소가 존재하였다. 여기서는 재판소 서기가 주로 등기와 공증사무 등을 취급하였다. 註12) 


그리고 개정령에 따라 검사국의 명칭 역시 고등법원 검사국, 복심법원 검사국, 지방법원 검사국, 지방법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변경되었다. 고등법원과 복심법원엔 검사장, 지방법원에는 검사정, 지청에는 검사를 두되, 지방법원 검사정의 명령에 따라 지청 검사분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註13) 


1913년 4월 5일자 제령 제4호로 1910년에 제정된 제령 제6호를 개정하여 조선총독부 사법관시보제를 창설하였다. 사법관시보의 자격은 전술한 바 있는 일본재판소구성법상의 사법관시보의 자격이 있는 자로 하고, 총독부재판소 및 검사국에서 1년 6개월 이상 총독이 정하는 실무수습을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 중에서 판·검사를 임용도록 하였다. 이 령의 위임을 받아 조선총독은 같은 해 5월 2일자 조선총독부령 제45호로 ‘조선총독부사법관시보 실무수습 및 시험규칙’을 제정하여 실무수습과 실무시험에 관한 세부사항을 규정한 바, 대체로 일본의 그것과 비슷하였다. 註14) 


사법관시보에 임용된 자는 지방법원 또는 지방법원 지청에서 그 감독판사의 감독하에 실무를 수습도록 하였다. 즉 감독판사의 허락하에 재판 및 등기 이외의 사법사무를 취급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조선총독은 사법관시보들에게 형사단독사건에 관한 검사직무를 대행케 할 권한도 부여하였다. 그리고 사법관시보를 마치고 조선총독부 판사나 검사에 임명된 자가 보직할 자리가 없을 경우에는 자리가 날 때까지 예비판사 또는 예비검사로서 지방법원 또는 지방법원 지청 혹은 그 검사국에 근무하도록 하였다. 지방법원장 또는 검사정은 그들을 지방법원이나 지방법원 지청의 판·검사를 대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21년에는 사법관의 정년제를 신설하였다. 당시까지는 「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제26조에 의하면 판사 휴직 규정만 있었는데, 이때 정년에 관한 사항을 제정한 것이다. 즉 1921년 8월 15일 제령 제12호를 공포하여 고등법원장은 63세, 기타의 사법관은 60세로 정하고 이에 해당하는 자는 퇴직토록 하였다. 다만 조선총독은 고등법원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5년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그 기간만큼 더 재직할 수 있도록 단서 조항을 두었다. 註15) 


한편 일제는 1920년대에 항일민족운동이 격화되자 1927년경부터 고등법원 검사국 내에 사상검사 배치를 검토하여 1928년 1월에서부터 사상검사를 임용하기 시작했다. 그해 8월에는 경성·평양·대구·광주·부산의 지방법원에 사상사건 전담 검사를 1명씩 배치하였으며, 1929년 1월에는 고등법원 검사국 내에 정식으로 사상계를 설치하였고 6월에는 경성법원 검사국 내에 사상계 전문검사를 배치하였다. 註16) 그리고 전시체제기인 1930년대 후반부터는 「사상범보호관찰법」에 따라 보호관찰소를,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라 예방구금소를 설치하여 사실상 사법기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1941년 3월 6일 「국방보안법」, 같은 해 12월 26일 「조선임시보안령」 등을 제정하여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조선인의 항일민족운동을 탄압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1944년 2월 16일 제령 제2호로 「조선총독부재판소전시특례」를 제정하였다. 이 법률은 전시라는 이유와 재판수속의 간소화라는 명목으로 첫째 민사·형사 재판에서 3심제의 전면 폐지 및 2심제 실시, 둘째 사형·무기 이외의 모든 사건을 단독판사 관할로 할 수 있도록 한 단독판사의 권한 강화, 셋째 소송절차의 간소화에 따른 약식명령의 범위 확대 등을 담고 있다. 註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