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재판소 설치 /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7. 18. 22:18

제5장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제3절 재판소 설치

제4절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3. 재판소 설치


1895년 3월 재판소구성법 註60)이 제정되어 행정권으로부터 사법권을 독립시키는 근대 사법제도의 기본원리를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1906년 10월 재판소구성법의 일부가 개정되었다. 註61) 이에 따라 한성재판소 관제를 개정하여 판사는 2명을 3명으로 증원하였고, 검사는 1명을 3명으로, 주사는 7명을 10명으로 각각 증원하는 한편 검사시보檢事試補는 폐지하였다. 註62) 이외에 지방재판소의 판·검사와 주사는 각 1명으로 정하고, 평리원은 판사 4명을 6명으로, 주사는 10명에서 12명으로 각각 증원하였다. 평양재판소는 폐지하였으며, 그동안 지방재판소를 따로 설치하지 않도록 했던 것을 개정하여 각 관찰도에 이를 설치토록 하였다. 다만 제주재판소 판사는 제주군수로 하여금 겸임토록 하였다. 또 개항시장재판소는 각 항시서港市署에 겸설하고 감리가 판사를 겸임하던 것을 각 부청에 겸설하고 부윤이 판사를 겸임하도록 개정하였다. 지방재판소 설치상황은 〈표 19〉와 같다. 


〈표 19〉지방재판소 설치 상황(1906년 10월)
재판소명 소재지 재판소명 소재지
한성재판소한성함남재판소함흥
경기재판소수원함북재판소경성
충북재판소충주제주재판소제주
충남재판소공주인천항재판소인천
전북재판소전주부산항재판소부산
전남재판소광주원상하재판소원산
경북재판소대구경흥항재판소경흥
경남재판소진주무안항재판소무안
황해재판소해주삼화항재판소삼화
평남재판소평양청원항재판소창원
평북재판소영변성진항재판소성진
강원재판소춘천옥구항재판소옥구

1907년 6월 군수의 관할권을 새롭게 정하여 관내의 민사와 태형에 해당하는 형사에 대한 제1심 재판권을 부여하였다. 註63) 다만 검험檢驗·가택수색·물건압류와 기타 일절의 수색처분은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9월에는 조세규칙위반사건에 대한 제1심 재판도 군수및 개항시장재판소에게 부여하였다. 註64) 다만, 칙임관·주임관의 범죄는 각도의 재판소나 한성재판소에서 제1심 재판을 하도록 하였다. 

통감부는 정미조약을 체결한 이후, 1907년 12월 종전의 법부관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제를 반포하였다. 註65) 이에 따르면 ‘삼심제도’를 채택하였는데, 종전에 군수가 재판하던 것을 단독제인 구재판소區裁判所제도를 창설하여 경미한 사건을 제1심으로 다루도록 했다. 그리고 지방재판소·개항장재판소·한성재판소를 지방재판소로 일원화해서 제1심으로 구재판소관장 이외의 사건을 합의심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재판소의 항소심을 제2심으로 담당하게 하고, 종전의 평리원을 공소원으로 개편하여 지방재판소의 합의사건에 대한 제2심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제3심으로서 대심원을 신설하여 공소원의 재판에 대한 상고를 관장하게 하는 동시에 종전의 특별법원을 폐지하여 그 소관을 신설 대심원 관할로 옮겼다. 

다음으로 각급법원에 소장 또는 원장을 두어 사법행정사무의 감독자로 임명하였다. 또 검사국을 두고 검사장대심원 검사국에는 검사총장을 두었으며, 법원 및 검사국에 현재의 사무국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서기과書記課를 두었다. 그리고 각급법원에 민사부와 형사부를 두고 부部에는 부장제도部長制度를 두었다. 이와 함께 종전에 왕족에 대해서 특별법원을 마련하여 특별히 대우해 오던 것을 형사사건은 일반법원인 대심원에서, 민사사건은 해당 지방법원에서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법제정 형식이 경과규정 등 필요한 사항은 각법의 부칙으로 정하던 것을 시행법이라는 단행법을 별도로 만들었다. 

법부대신은 재판소 및 검사국을 감독하고 검찰사무를 지휘하며 민사·형사·비송사건 및 감옥에 관한 사무와 기타 제반의 사법행정사무를 관리하는 직무권한을 가졌다. 대신관방에서는 재판소의 설립 폐지 및 그 관할구역에 관한 사항, 변호사에 관한 사항, 법관양성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민사국은 민사 및 비송사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형사국에서는 형사 검찰 감옥 및 은사恩赦에 관한 사무를 각각 관장하게 하였다. 전임직원으로서 법부서기관 9명·사무관 4명·번역관 3명·주사 43명을 두도록 하였다. 강점 직전 재판소 명칭과 위치는 〈표 20〉과 같다. 

〈표 20〉재판소 명칭 및 위치(1907년 12월)
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
경성

한성부
경성

한성부
경성한성부경기경성
한성부·양주·개성·연천·포천·김포·인천·강화·수원·안성·광주·이천·여주
강원춘천·이천·울주·강릉·통천·평창·원주·금성
공주충남공주·대전·회덕·천안·아산·홍주·서산·면천·보령·서천·홍천·은진·청양
충북충주·제천·음성·청주·보은·영동
함흥함남함흥·원산·덕원·영흥·북청·혜산진·삼수
함북경성·성진·경흥
평양평양평남평양·진남포·삼화·성천·안주·덕천·순천·강서
평북영변·의주·초산·강계·용천·정주·선천
해주황해해주·배천·평산·신계·서흥·황주·재령·송화
대구대구경북대구·영천·영덕·경주·영천·경산·성주·상주·선산·김산·문경·안동·청송·의성
진주경남진주·부산·동래·울산·밀양·마산·창원부·김해·용남·하동·거창·합천
광주전남광주·제주·영광·순천·장흥·강진·목포·무안·나주·곡성·담양
전북전주·김제·고창·군산·옥구·진안·금산·남원·고부·흥덕

1908년 3월 ‘법과분과규정’이 마련되었는데, 대신관방 각과 중 법무과를 없애고 직원과와 통계과를 증설하는 한편, 형사국의 사리과司理課와 검사과를 폐지하였다. 신설된 직원과에서는 관리의 진퇴 신분 및 출장에 관한 사항, 재판소 설립과 폐지 관할구역에 관한 사항, 법관양성과 변호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통계과에서는 통계보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1909년 10월 한국의 법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지되면서 통감부 사법청에서 관할하는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모든 재판기관들은 통감에 예속되었다. 이에 따라 군수와 도재판소 및 한성재판소의 사물관할事物管轄등에 관한 규정은 폐지되었다. 註66) 종전의 대심원은 고등법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원장은 고등법원의 행정사무를 지휘 감독할 뿐 하급법원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었다. 전국의 행정상의 지휘 감독권은 통감이 직접 행사하게 하였다. 통감은 지방재판소나 그 지청의 재판권에 속하는 형사사건의 예심을 명령할 수 있고, 고등법원장도 일정한 경우에 이를 명할 수 있게 해서 소위 예심제도를 신설하였다. 또한 인천·춘천·청주·원산·청진·신의주·진주·목포·전주구재판소에 소속 지방재판소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소관구재판소 구역 내의 사건에 관하여 지방재판소의 직무를 행하도록 하였다. 

한국 군인 군속의 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1909년 10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특별육군군법회特別陸軍軍法會議’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한국주차군사령관은 군법회의에 관해서 그들의 한국주차군 군법회의에 있어서와 동일한 직권을 가졌다. 

한편, 한국인 출신 판검사는 민사의 경우 원피고原被告가 모두 한국인인 경우에 재판할 수 있었고, 형사에 있어서는 피고인이 한국인인 경우에 한하여 재판할 수 있었다. 또 일본인에 대해서는 일본인 판사만 재판할 수 있게 하여 같은 재판소의 판검사이면서도 차별이 심하였다. 또한 구재판소 검사의 직무는 통감부 경시·경부 또는 통감부재판소 서기가 담당토록 했다.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10월 ‘조선총독재판소령’을 공포하여 통감부재판소를 조선총독부재판소로 명칭만 바꾸고 관할과 재판소의 종류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註67) 총독부관제 실시와 함께 통감부 사법청을 총독부 사법부로 개편하여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를 총괄하였다. 재판소는 고등법원 1개소京城 아래 공소원 3개소경성·평양·대구, 지방재판소 8개소경성·공주·함흥·평양·해주·대구·진주·광주, 지방 재판소 지부 12개소, 구 재판소 68개소 등 92개소가 설치되었다. 註68) 재판소 조직은 3심급 4계급제였는데, 심급구조는 구재판소 → 지방재판소 → 고등법원, 혹은 지방재판소 → 공소원 → 고등법원이었다. 

이렇듯 조선총독부가 재판조직을 크게 변경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통감부 시기의 사법체제가 이미 일본재판소 조직을 모방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조선총독부가 1910년 9월에 구상한 민·형사법 체제가 이전 시기의 사법체계에 대한 연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재판소는 민사 및 형사재판 외에 비송사건을 담당했으며 동 재판소 내에 검사국을 부설함으로써 사법기관은 총독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의 일원적인 계통으로 구성되고 행정관서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에 재판소가 조선총독 직속으로 설치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판사들은 일본국 판사에 비해서 신분보장이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한민족을 합리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판제도를 악용하였기 때문에 일본인 법관이 일본법 내지 총독부 법령에 의하여 한민족에게 일방적으로 중형을 내렸다. 법관은 1909년에 이미 일본인에게 독점되어 일본인 판사 192명에 비해 한국인 판사는 88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의 비중은 점점 더 높아져 1912년에는 판사 199명 중 38명과 검사 57명 중 3명만이 한국인이었다. 註69) 이는 각각 19.1%와 5.3%에 지나지 않는 수치이다. 
 
1912년에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이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간에 민·형사법에 대한 포괄적 합의가 이루어지자 조선총독부재판소령도 개정되었다. 註70) 당시 조선총독부재판소는 조선총독에게 직속하고 한국에서의 민사 및 형사재판과 비송사건에 관한 사무를 맡은 점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재판소를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으로 구분하여 3심 3급제로 바꿨다. 註71) 지방재판소는 민사 및 형사재판에 대해서 제1심 재판 및 비송사건을 맡았고, 복심법원은 지방법원의 재판에 대한 공소控訴및 항고를 맡았으며, 고등법원은 복심법원 재판에 대한 상고 및 항고에 대해 재판과 함께 재판소구성법에서 정한 대심원의 특별권한에 속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지방법원은 몇 가지 예외 사항 註72)을 제외하고는 판사 단독으로 재판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심법원은 3인, 고등법원은 5인의 판사로 조직된 합의부에서 재판을 수행하였다. 고등법원과 복심법원·지방법원의 각부에는 부장을 두고 부장이 해당 부서의 사무를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재판소에 검사국을 병치竝置하고 지방법원지청을 설치할 때는 그 지청에 검사분국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검사국은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고 한국에서의 검찰사무를 맡았으며 검사는 검찰사무상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두었다. 그리고 고등법원 검사국에는 검사장을 두었는데, 고등법원검사장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아 검사국 사무를 맡고 하급 검사국을 지휘 감독하였다. 복심법원검사장도 역시 관할구역 내 지방법원 검사국을 지휘 감독하였다. 지방법원검사정은 해당 검사국의 사무를 맡았다. 이와 함께 지방법원 지청의 검사 직무는 조선총독부 경시·경부 또는 재판소 서기가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재판소는 일제가 합리적 사법을 가장하여 한국인을 탄압을 법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절차 및 시설이었다. 재판관은 이미 1909년에 일본인으로 대치되어 일본인 판사 192명에 한국인 판사는 88명에 불과하였다. 1910년에는 일본인 판사가 183명, 한국인 판사 71명, 일본인 검사 54명에 한국인 검사는 6명, 1912년에는 일본인 판사 161명에 한국인 판사 38명, 일본인 검사 54명, 한국인 검사 3명 밖에 없었다. 또한 1910년대에는 조선인 판사 또는 검사는 민사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모두 조선인인 경우에, 형사에서는 피고가 조선인인 경우에만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註73) 같은 법관이라도 민족차별에 의하여 한국인 판사는 일본인이 관련된 재판을 담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차별폐지를 선언한 1920년 이후에도 합의부 재판소 구성에 있어서 한국인이 재판장이 된 일은 없으며 일본인 재판장이 권한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