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조선교육령의 실시 / 식민지 노예교육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7. 18. 21:50

제4장 식민지 노예교육 

제1절 조선교육령의 실시 175 

1. 식민교육제도안 마련 175 

2. 일본제국교육회와 식민교육제도안 마련 181 

3. 조선교육령의 제정과 ‘동화교육’ 실시 186 

4. 유학정책과 고등교육 실상 196 


1. 조선교육령의 실시


1. 식민교육제도안 마련


일제는 통감부라는 제한적인 권력으로 한국을 통치해야만 했기 때문에 한국 내의 정치상황에 따라 통제와 탄압으로 일관하였고, 교육정책은 우민화교육, 일본어 보급과 저급한 산업기술교육 강화 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인들로부터 무관심과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註1)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새로운 식민통치 이데올로기를 창출해 내야만 했지만, 통치기구를 강화시키는 정도에 머물렀다. 통감부 동안 경험했던 반일의식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불신과 저항의식은 여전하였다. 사내정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이에 무력을 앞세웠던 것이다. 


비록 일제는 유구琉球나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한국은 한민족으로서 오랫동안 독립국가로 유지해왔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보다 높다는 문화자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통치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제는 무력적인 탄압과 통치방식으로 한국을 식민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총독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문명개화론’으로 침략·지배를 합리화키며, 통치이념이나 시정방침을 거론할 때마다 ‘융합동화’·‘일시동인주의’를 주지시켰지만, 註2) 이를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일제는 ‘동화교육’을 추진해 나가고자 했지만, 이를 시행해본 경험이 없었다. 일제는 교육을 통해 대만인을 동화시키고 개화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지만, 1919년 이전까지는 대만에 확실한 학제를 도입하지 못하였다. 註3)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10년 8월경 강점 직후 식민통치의 기조로 ‘동화정책’을 내걸고 이에 걸맞은 식민교육정책을 수립하고자 했다. 식민교육정책은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외본번길隈本繁吉  註4)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1908년 3월 학무국 서기관으로 부임한 이후 한국의 식민교육을 담당해왔던 인물이다. 외본번길은 「군정學政에 관한 의견」이란 문건을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보고하였다. 註5) 보고서에는 교육에 관한 근본 훈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훈령 요지를 작성하여 당시 학교운영의 실태를 밝히고 교육정책을 펼쳐나갈 때에 유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적었다. 


먼저 교육목적으로 유교를 활용할 것유교주의과 사립학교의 감독 특히 종교학교의 감독 강화, 토지조사요원 양성을 위한 중등 정도의 실업교육 실시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식민교육정책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유교를 식민통치에 활용하기 위해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종교학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1911·1915년 ‘사립학교규칙’을 만들었다. 


또한 외본번길은 같은해 9월에 ‘교화의견서敎化意見書’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보고하였다. 註6) ‘교화의견서’는 동화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그는 ‘충량적忠良的동화’보다는 한국민족을 일본민족에 종속적인 지위로 두는 ‘조선민족의 순량화’에 두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주장했다. 교화의견서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민족으로 동화시키려면 단순히 그 언어·풍속·관습 등의 외적 모방에 그치지 말고 일본민족의 특징인 황실에 대한 충의심忠義心을 체득시켜야 한다. 

② 조선민족은 상당한 자존심을 가지고 그 제도문물을 발전시켜 언어·풍속·습관이 확립되었으며, 그 민족정신도 이미 형성되었으므로 일본민족에게 감화영향感化影響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③ 조선인은 조선민족이라는 것에 명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민족적 자부심은 일본민족의 동화적 감화感化에 큰 장애가 될 것이다. 

③ 조선민족은 1,200만 이상의 대중을 이룬다. 조선인이 일본민족으로 확고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면 도리어 조선민족으로 동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민족은 수천년 동안 제도문물을 발전시켜 왔으며 민족정신도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감화시키고 동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면서, 만약 이들을 동화시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동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한국인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의 언어·풍속·습관 등을 채용 모방하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일본민족과 황실에 대한 충군애국정신을 체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의견서와 함께 식민교육의 목적과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초등교육은 주로 일본어를 보급하는 기관으로 하고, 학과는 농업을 주로 하고 상공업에 관한 실과교재實科敎材를 대부분으로 한다. 여아에게는 특히 재봉수예 등을 가하여 근로를 애호하는 성정性情과 습관을 교양한다. 그리고 덕육德育에서는 제국과 황실에 대한 감사보은의 정을 훈도薰陶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조선인의 제악諸惡을 교정하는데 노력함으로써 결국 자로自勞에 의해 안온安穩히 자활自活하는 순順한 제국의 신민을 교양하는데 유의한다. 직업교육은 초등교육을 계승하여 그를 완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금후 일본제국의 통치에 대하여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민족적 자각심이며, 교육시설에서 이점에 가장 유의하여 조선인이 민족적 자각심을 각성하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초등교육 이외에 해야 할 교육상의 시설은 조선인의 생업에 직접 관계있는 것에 한함으로써 착실온건着實穩健한 교양을 받게 하고 제국통치하에서 행복한 생활을 향락케 하는 방향으로 저들을 지도해야 한다. 


초등교육 과정에서는 일어와 실업 위주로 가르치고, 졸업한 뒤에는 직업교육을 시켜 사회에 내보내 제국통치하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 학생들에게는 일본제국과 황실에 감사하고 보은의 정신을 가르쳐 순한 제국신민을 길러내는데 힘써야 하며, 절대로 민족적 자각심을 각성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중·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초등교육을 통한 단순한 식민지 기능인으로, 그리고 민족적 자각심을 철저히 차단시켜 일제에 순종하는 식물 한국인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즉 그는 한국인을 탄압·억압하고 ‘충량화忠良化’, 즉 노예화 우민화정책의 실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제국교육회가 제시하였던 ‘교육칙어’와 식민지 교육제도와 연결시키고 있지 못하다. 


그뒤 총독부는 1910년 10월 통치기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기존 학부를 내무부의 소속의 한 개 국으로 축소·편입시켰다. 註7) 통감부시기 학부는 1908년 1월 개편 당시 관공립제학교 註8)와 본청편집국과 학무국 1·2과 등의 부서를 두었으나, 총독부 내무부의 학무국으로 격하시키고 관공립 모든 학교는 총독부의 소속관서에 편제하고 학무과와 편집과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무분장 또한 축소되어 註9) 학무과에서는 학교·유치원·도서관 기타 학제와 교원에 관한 사항만을, 註10) 편집과는 주된 임무는 교과용도서의 편집·반포·검정 및 인가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사무분장규정이 개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註11) 


이러한 조처는 통감부 시기 중·고등교육기관을 담당하였던 학무국 제1과를 없애고, 사범학교와 관공립보통학교와 관련된 제2과만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외본번길의 ‘교화의견서’에 따라 초등교육을 위주로 식민교육을 펼치고자 한 것이라 여겨지며, 학제와 교원에 관한 사항만을 담당하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식민교육제도를 확고히 다지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는 1910년 10월 학무국장에 동경제대 법과 출신인 관옥정삼랑關屋貞三郞을, 학무과장에 외본번길, 편집과장에 소전성오小田省吾  註12) 등을 각각 임명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외본번길은 학부 학무국 2과장에서 그대로 유임되었고, 편집국 서기관이었던 소전성오를 편집과장에 임명한 것은 통감부시기에 추진하였던 교육제도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동화교육’을 강화시켜 나가겠다는 조선총독의 의지로 해석된다. 


그뒤 조선총독은 외본번길가 제기한 바 있던 ‘교육에 관한 근본 훈령’을 만들고자 애를 썼다. 조선교육령은 이러한 의도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등 체계를 갖춰나갔다. 통감부시기의 학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조선인 교원의 양성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교원 양성을 두고 여러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먼저 각도에 사범학교를 설립하는 방안과 기존 사범학교·고등학교·실업학교 졸업생 가운데 실업교육을 담당시킬 목적에서 일본 유학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註13) 아울러 실업교육에 주안점을 두기 위해 수공과·수예과를 새롭게 추가하고자 하였다. 註14)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임명된 관옥정삼랑은 ‘조선학제안 요지’와 ‘조선학교제도안’을 토대로 식민교육정책을 마련해 나갔다. ‘조선학제안 요지’에 따르면, 학제는 국가통치의 대방침에 기초하여 시세 및 민정民情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기존의 학제와 큰 차이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註15) 


2. 일본제국교육회와 식민교육제도안 마련


‘한일합방’ 전후로 한국의 식민교육에 대한 일본 내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연일 잡지나 신문을 통해 한국의 식민교육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쏟아냈다. 그 의견들은 대개 교육무용론, 특정의 목적교육론, 일본인과 같은 목적교육론 등이 그것이다. 註16) 그 가운데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제국교육회의 움직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 교육계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제국교육회회장 辻新次는 1910년 8월 대한제국 당시 학정참여관을 역임하였던 문부성 시학관 겸 동경제대 교수 폐원탄幣原坦의 발의로 조선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註17) 제국교육회는 “신영토 조선의 신민을 교육동화하는 것은 금후 대조선의 필요문제”라 여겼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교육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들은 조야의 교육가, 특히 한국과 대만교육에 관여한 인물들을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조선교육에 대한 식자들의 의견을 모아서 적당한 방법 찾아 조선민족의 교육동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註18) 그뒤 같은해 9월 3일 폐원탄은 홍콩·인도·이집트·남아공·호주 등 영국 식민지와 필리핀군도·하와이 등의 미국 식민지를 둘러보며 식민지 교육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다. 註19) 일제가 식민지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매우 긴급하게 상황이 돌아갔던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9월에 열린 제2차 조선교육조사위원회에서 조선 식민교육의 방침으로, ① 일본어 보급, ② 종래 유교사상 유지, ③ 교육칙어 정신 철저, ④ 의식주의 정도를 정할 것 등의 의견이 개진되었다. 註20) 매우 짧은 시간에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내용이 부족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이어 1910년 10월 조선교육조사위원회는 비로소 구체적인 조사안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註21) 이는 주로 통감부시기 학부 참여관으로 재직하였던 삼토충조三土忠造  註22)와 통구감차랑樋口勘次郞등에 의해 준비되었다. 註23) 


1. 교육칙어의 취지를 보급케 하고 일본과 조선 간에는 종래 특별한 관계가 있은 즉 양국의 합병은 당연한 운명임을 이해케 하고, 또 일본의 신민이 되어 문명한 무대에 활약케 함에는 조선인민의 발전상 막대한 이익이 된다는 희망을 심어 줄 것 

2. 일본어 보급을 급무로 하여 이에 전력을 기울이되 다음과 같은 실행할 방법으로 할 것. 

  ① 초등교육에는 언문·한문을 전폐하고 일본어를 사용할 것. 

  ② 일본어 교습학교에는 적당한 보조를 할 것. 

  ③ 사범학교를 증설하여 일본어에 숙달한 교원을 다수 양성할 것. 

  ④ 각종학교·전문학교에서도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것. 

  ⑤ 일본어로써 관용어로 삼을 것. 

  ⑥ 일본어로 써진 가정서류의 보급할 방도를 연구할 것. 

3. 교과서 편찬은 특히 중대한 것인즉 총독이 직할할 기관을 만들어 이에 종사케 할 것. 


조선교육조사위원회의 한국교육에 대한 제안은 크게 세 가지이다. 먼저 교육칙어 취지 보급, 일본어 보급, 교과서 편찬 등이다. 조선교육조사위원회는 1890년 10월 일본에서 공포되어 ‘참다운 성전聖典’으로 불리는 ‘교육칙어’ 註24)의 취지를 알려 ‘일본 천황의 충량한 신민’이 되도록 할 것과 ‘한일합방’은 역사적으로 당연한 운명이며, 문명국인 일본의 신민이 된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도록 하는 교육방침을 세우도록 하였다. 결국 교육칙어를 통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조선인의 동화정책의 수단과 교육정책에 도입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어 보급에 전력을 기울이며 교과서 편찬을 위해 총독 직속의 기관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어 보급을 위해 조선어와 한문을 전폐하도록 한 점이나 일본어를 관용으로 하도록 한 점은 매우 강경한 조처로 조선어를 완전히 말살시켜 민족의식을 철저히 억누르고자 한 것이었다. 


그뒤 제국교육회는 1910년 12월 21일 조선교육안을 가결시키고 1911년에 평의원회에 제출하여 결정되면 계태랑桂太郞수상과 조선총독에게 건의하고자 했다. 이때 기존안을 보완하여 일본어 보급을 당면 급무라 보고 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일본어를 보급하는 방법에 있어서 ‘중등학교 및 전문학교에서는 한문 및 외국어 외에 일체 일본문의 교과서를 사용하고 일본어로 교수’하도록 수정되었고, ‘사립학교 또는 사숙에서 주로 일본어로 교수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보조를 할 것’ 등과 통속독물류通俗讀物類를 편찬하여 염가로 판매할 것 등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외 “일반 조선인을 위해서 일본신민으로서 필요한 덕조德操를 함양하고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상당한 방법을 강구”토록 하는 방안이 추가되었다. 註25) 그뒤 조선교육조사위원회는 여러 번의 심의를 거쳐, 초등교육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선어와 한문’ 폐지를 삭제한 뒤에 1911년 2월 6일 최종안을 마련하였다. 註26) 


① 교육칙어의 성지聖旨를 보급하고 일본제국과 조선반도와의 고래로 특수하게 친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일본 신민으로서의 이익과 희망을 충분히 요해시키도록 힘쓸 것. 

② 일본어를 보급하는 것을 당면한 급무로 하고 이에 전력을 기울일 것. 

   가. 초등교육에서는 일체 일본문의 교과서를 사용하고 일본어로 교수할 것. 

   나. 사범학교를 증설하여 조선인으로서 일본어에 숙달한 다수의 교원을 양성할 것. 

   다. 중등학교 및 전문학교에서는 한문 및 외국어 외에 일체 일본문의 교과서를 사용하고 일본어로 교수할 것. 

  라. 사립학교 또는 사숙에서 주로 일본어를 교수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보조를 할 것. 

  마. 일본어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통속적인 독서물을 편찬하여 염가로 판매하는 방법을 강구할 것. 

  바. 일반 조선인에게 일본어에 습숙하게 하기 위해 일본어를 관용어로 하고 공문은 모두 일본문을 사용할 것. 

③ 실업교육의 보급에 힘쓸 것. 

④ 교과서의 편찬에 중점을 두어 총독 직속의 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종사하게 할 것. 

⑤ 일반 조선인을 위하여 일본신민으로서 필요한 덕성을 함양하고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도록 상당한 방법을 강구할 것. 


1911년 3월경, 십신차·택유정태랑·삼토충조 등 위원들은 최종안을 들고 당시 동경에 머물고 있던 조선총독을 찾았다. 註27) 조선총독 자신은 한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점진주의를 추구한다면서, 교육의 문명의 정도, 인민의 생활정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급격히 개혁한다는 것은 민심을 동요시켜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또한 일본어 보급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일본어로 교수하는 것은 좀 더 고려해봐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선교육에 있어서 유교주의를 십분 활용할 것이며, 그외 교원의 양성, 보통학교의 보급 등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한국 교육에 대한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첫째는 한국인을 충량한 신민으로 양성하기 위해 일본인과 동일한 도덕교육으로 임해야 하는지, 둘째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반드시 일본어를 배우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註28) 


사내정의는 조선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데 종래에는 점진주의를 채용하였지만, 앞으로 비교적 급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그는 일본어의 교육시수를 1주일에 12시간으로 늘려 가르칠 것이며, 조선어 과목은 폐지시키기보다는 이를 필수과목으로 하는 것이 식민통치에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 註29) 그는 일본어를 보급하는 방법으로 일본어로 강의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였다. 


3. 조선교육령의 제정과 ‘동화교육’ 실시


일본어보급 방법을 두고 조선총독과 제국교육회 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1911년 4월 신학기에 맞춰 실시하고자 했던 한국식민교육제도는 늦춰지게 되었다. 총독부는 1911년 2월경에 식민교육제도안을 마련하고 이를 일본 추밀원에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뒤 식민교육제도안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학무과장 외본번길이 대만총독부로 자리를 옮겨갔기 때문이다. 註30) 같은해 2월 23일 관옥정삼랑 학무국장이 추밀원 조선교육령에 대한 의결문제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당시 관옥정삼랑은 조선교육방침이 대략 확정되었음을 밝히고 급격한 변혁을 피하고 현재의 학교에 있어서 일본인 학교에 한어과韓語科를 신설하고,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일본어 보급하기로 하였으며, 일반 교육 상태는 자못 양호하다며 의학교·공예학교를 가설하여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는 한편, 전문지식의 보급에 큰 효과를 거두게 할 것이라 언급하였다. 註31) 하지만 2월 25일 추밀원특별위원특별위원장 芳川伯에 상정된 조선교육령은 여러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의하였지만 이에 대해 의결을 하지 못하였다. 註32) 


여전히 조선총독부측과 일본 정계인물들과 간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커 쉽게 결론은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에 ‘동화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데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일본어 및 실업교육 강화에는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의무교육 실시문제, 조선어 및 한문 시간 전폐 문제, 조선인교원양성문제, 교수용어 문제 등에 있어서는 조선총독부 측과 일본 내의 지식인, 정치인들 간의 입장 차이가 적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내정의 총독은 점진주의 동화교육을 내세운 반면, 제국교육회의 경우는 모든 수업을 일본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를 전폐할 것을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교육칙어’는 일본과 같이 하기 어려다고 보고, 다만 수신과목을 통해 이를 보충하며 유교주의를 가미하도록 하고, 당분간 중등학교의 설립에 부정적인 데는 일정부분 의견을 같이하였다. 註33) 


조선총독이 일본의회에서 교육에 관해서는 가장 신중히 연구할 것이라 답변하게 되면서, 註34) 본래 4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신학제는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뒤 조선총독는 다시금 ‘제도안’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4월 사내정의는 학제를 직접 심의하고 있는 중이며, 조만간 관옥정삼랑 학무국장이 귀임한 후에는 교육의 방침, 각 학교의 관제 및 교직원 대우법을 발표할 것이며 1912년 초에 외국어 학교를 폐지할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였다. 註35) 이렇듯 수정된 안은 1911년 4월 일본 추밀원에 자문을 거쳐 5월 중에는 일본왕의 재가를 받고자 하였지만, 註36) 이 역시 의결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1911년 5월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관옥정삼랑 註37)과 사무관 소전성오 註38)·궁삭행태랑 등을 중심으로 식민교육제도안이 수정되었다. 7월 1일 사내정의는 제2회 각 도장관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교육방침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는 “조선의 교육은 오로지 유용의 지식과 온건한 덕조와를 양성하여 제국신민다운 자질 품성을 구비토록 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 따라서 먼저 보통교육의 완비를 바라고 또한 중점을 실용교육에 두고자 했다”며 조선교육령의 목적을 밝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註39) 


첫째, 조선인을 일본 신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둘째, 점진주의로 한다. 

셋째, 근로의 습관을 형성하도록 힘쓴다. 

넷째, 보통교육 및 실업교육에 힘쓴다. 

다섯째, 국어보급을 도모한다. 


한국의 교육은 오로지 유용의 지식과 온건한 덕조德操를 양성하여 제국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비토록 하는데 있다고 밝힘에 따라, 보통교육의 완비와 실용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7월 12일에 ‘조선교육령제정의 건朝鮮敎育令制定ノ件’이 최종적으로 작성되었다. 이에 따르면, 초기에는 사범교육을 교육제도안에 포함시켰지만 이를 삭제하고 보통교육·실업교육·전문교육만을 포함시켰으며, 법관학교·외국어학교·성균관은 폐교시키기로 하였다. 註40) 보통교육은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학교를 포함한 것으로 이른바 ‘민도’에 적합한 교육을 베풀어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도야하고, 또한 그 생활에 필수적인 지식 기능을 배우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보통학교의 교원을 양성은 고등보통학교에 사범과·교원 속성과·여학교에 사범과를 설치토록 했다. 실업교육은 실업학교에 농상공업 등 실업에 필요한 교육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산업의 개량발달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전문교육은 ‘시세의 진보와 민력의 발전’에 따라 천천히 개설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각종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지도 감독한다는 원칙적인 안을 마련하였다. 註41) 


그뒤 일본 추밀원의 의결을 거쳐 ‘한일합방’이 단행된 지 1년여 만인 8월 23일 칙령 제229호로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다. 시행기일은 조선총독이 정하도록 하였다. 註42)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본제국 신민의 자격과 품성을 갖추도록 교육할 것”을 주안으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조에서 조선의 모든 교육은 조선교육령에 따른다고 명시한 뒤에 다음과 같은 7개조의 강령을 제시하였다. 


제1조 조선에 있어 조선인의 교육은 본령에 의한다. 

제2조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하여 충량한 국민을 기르는 본의로 한다. 

제3조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맞도록 이를 베푼다. 

제4조 교육은 이를 크게 나누어 보통교육·실업교육 및 전문교육으로 한다. 

제5조 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가르쳐 주고, 특히 국민된 성격의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6조 실업교육은 농업·상업·공업에 관한 지식·기능을 가르쳐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7조 전문교육은 고등한 학술과 기예技藝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교육령’에서는 1890년 10월 30일 일본에서 공포된 ‘교육칙어’에 따라 ‘충량한 일본국민’으로 만들겠다고 하였지만, 일제는 식민지교육에 차별을 두었다. 다만 일제는 ‘교육칙어’에 따라 ‘천황숭배사상’과 더불어 식민지교육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주입하고자 하였고 이는 ‘봉건적 유교도덕’이 강조되었다. ‘교육칙어’에는 국체와 더불어 충忠과 효행孝行, 형제兄弟의 우애友愛, 부부夫婦의 화목和睦, 붕우유신朋友有信, 박애를 비롯하여 헌법의 준수遵守, 충의忠義와 용기勇氣등에 이르는 12가지 덕목의 실천을 밝혔다. ‘교육칙어’를 통해 이러한 가르침이 조상에서 내려온 교훈이며, 역사적으로나 국제적으로도 올바른 보편적인 도덕이므로 모두 함께 노력하여 인격을 연마하자고 하여 일제에 순종하는 조선인을 만들겠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 교육은 특히 덕성德性의 함양과 국어 보급에 힘을 집중시킴으로써 제국신민으로서의 자질과 품성’ 註43)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보통학교 교육에서 제시한 ‘구학부편찬 보통학교용 교과서 교수상의 주의’에 따르면, 수신서·일어독본·국어독본 및 습자 교재 가운데 동화교육상 ‘불량’한 것을 골라 일일이 교수상의 주의를 하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르면 황실에 관해서는 기존 내용 가운데 조선 황실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고, 그 대신에 조선인이 받아들여야 할 황실은 대일본 천황폐하·황후폐하 및 황족임을 주지시킬 것과 기원절·연호·국호·축일 등과 같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보강하는 요소들에 대해 상세하게 교육하여 ‘황국신민의 자각’을 가지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註44) 특히 수신교과서와 국어독본·역사 등의 교과서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국체정신에 대한 인식과 천황에 대한 충성,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도야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사내정의는 유고諭告를 발표하여 조선에서의 교육은 ‘일본제국 신민의 육성과 소위 시세와 민도에 적합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겠다는 것과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분명히 하였다. 註45) 


제국교육의 대본大本은 일찍이 교육칙어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국체와 역사에 비춰 확고하여 움직일 수 없다. 조선교육의 본의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내지와 그 사정이 같지 않다. 따라서 그 교육은 특히 덕성의 함양과 일본어의 보급에 역점을 둠으로써 제국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가령 궁리를 논하고 실행을 머리하며 근로를 싫어하고 안일에 흘러 실질적인 돈후敦厚의 미속을 버리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운 경조부박輕佻浮薄 악풍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의 본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일신을 그르치고 국가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실시함에 있어 모름지기 시세와 민도에 적응시켜 양선良善한 효과를 거두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조선의 교육은 이를 대별大別하여 보통교육 실업교육 및 전문교육으로 한다. … 사립학교의 교육도 또한 법령에 준거하여 제국교육의 본지에 위배됨이 없도록 할 것이다. … 또한 신교信敎는 각자의 자유라고는 하지만 제국의 학정에서는 일찍이 국민교육을 종교의 밖에 두는 것은 주의로 하고 있다. 따라서 관공립학교는 물론, 특히 법령으로 학과과정을 규정한 학교에서는 종교상의 교육을 실시하거나 의식을 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당사자는 모두 이 취지를 깨닫고 자제교육의 방향에 그르침이 없도록 할 것이다. 


무릇 조선이 제국의 융운隆運에 따라 그 경복慶福을 다하려면 실로 후진의 교육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민중은 모름지기 이 점에 유의하여 각자 분수에 맞게 자제로 하여금 적당한 교육을 받아 덕성德性을 이루고, 재능을 발달시키는 길로 나서도록 할 것이다. 이 같이 함으로써 비로소 조선의 민중은 우리 황상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넓은 은혜를 입고 일신일가一身一家의 복리를 향수享受하고 인문의 발달에 공헌하여 제국신민다운 실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보통학교의 교육 목적에 대해서는 내무장관 우좌미승부宇佐美勝夫에 의해서도 재차 강조되었다. 註46) 그는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교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공립보통학교의 경영은 총독부가 가장 중점을 두는 바로서 여러분의 임무와 성실에 중차대한 것이다. 이로써 여러분은 오로지 이 학교의 내용을 충실히 하는 데 힘을 다하고 여력이 있으면 나아가 사립학교 및 서당의 지도휴액指導誘掖에 진력해야 할 바이다. 또 보통학교의 목적은 결코 졸업생이 중학·대학 등 등급을 따라 향상하여 더욱 학문의 연구를 하게 함에 있지 않다. 즉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실무에 종사하여 성실·근면하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또 상당한 실제적 지식 기능을 소유한 충량한 신민을 양성함을 본지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립보통학교의 목적은 결코 아동에게 예비적 교육을 실시함에 있지 않고 그 교육은 바로 한 사람의 인간을 양성함에 있음을 여러분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내정의는 오로지 보통교육의 증설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는 1912년 1월 “무릇 교육은 개인이 사람으로서 상응하는 일에 종사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부여하여 국가에 대해 인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 이상의 교육은 오늘날 서둘지 않아도 좋다” 註47)고 하거나, 1913년 2월에는 “오늘날 조선에서는 고상한 학문은 우선은 조선인에게는 그다지 서둘러 시킬 정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에게는 비근卑近한 정도의 보통교육을 실시하여 한 사람의 일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데 안목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註48)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 결과 학무국소관 학교보조금 예산은 대부분 일본인 교원 봉급에 해당되는 보통학교 보조비에 충당되었다. 註49) 이에 보통학교의 숫자는 급증하였지만, 상대적으로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의 숫자는 늘지 않았다. 


〈표 13〉관·공·사립학교 학교 수
학교별 1911 1919
학교수 학생수 학교수 학생수
보통학교공립

사립

236

74


28,608

4,737

482

2(부속)

25(사립)
84,304

461

2,031
고등보통학교관립392172,083
사립2150111,758
실업학교관공립17805211,797
사립11071162
간이실업학교 17476671,252
전문학교관립1644424
사립  2111  


 총독부는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동화교육’을 철처히 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교과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어 교과서를 살펴보면, 1907년에 편찬된 『국어독본』을 『보통학교학도용 조선어독본』으로 개정하였다. 『국어독본』은 국가의식 형성과 관련된 제재들이 포함되었지만, 註50) 『보통학교학도용 조선어독본』에는 국가·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들이 대폭 수정되었다. ‘우리나라 국기’ 단원 삽화 중에서 일장기만 남기고 태극기와 중국 국기를 모두 지워버렸으며, 새롭게 추가된 내용은 대부분 일본적인 것들로 조선 학생들에게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가르쳐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註51) 


1913년에 편찬된 『보통학교 수신서』는 일제의 국가주의와 천황주의에 적합하고, 식민지 통치에 순응할 충량한 국민육성과 순종주의·근로주의적 시세에 민도에 맞는 인간 육성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다. 수신서에서는 천황의 은덕을 드높여 강조하면서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충군애국 하는 것이며 국민의 의무라고 교육시켰다. 이러한 천황숭배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일본의 우수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국사교과서와 같은 침략사관전승사관과 식민사관을 통해 호전성을 주입시키고, 식민지 아동에게는 보다 철저히 열등적인 식민성을 자각시켰다. 조선총독부 수신서에는 일본수신서보다도 더욱 순종·정직에 대한 항목을 강화하여 가르쳤다. 


1914년에 『신편창가집』이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1915년에 출간된 『로마자 신편창가집』은 『신편창가집』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 『신편창가집』은 모두 일본어로 가사가 되어 있다. 註52) 일반창가 29곡 가운데 23곡이 일본의 문부성 창가이거나 일본의 창가집에 수록된 것이며, 나머지 6곡은 작곡·작사자가 미상이다. 1920년에 발간한 『보통학교 창가서』의 앞부분에는 의식창가가 실려 있고 뒤에는 일반 창가가 실려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부성 창가이거나 일본의 전래동요들이 대부분이다. 1학년용은 20곡 가운데 8곡이 조선어 가사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다. 

이는 1914년에 공포된 보통학교교과서 편찬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내용 서술에서 직접 국민성 양성과 관계가 있는 교과목에 한해서는 대만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 국가의 일본인 것을 명백히 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제국에 대해서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하는 바를 강조토록 하였으며,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밖으로는 세계 일등국의 인민과 어깨를 견주고 안으로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모두 황실의 은택’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각기 본분을 지켜 ‘황실을 존중하고 국가에 진충할 도’를 알게 할 것을 강조토록 하였다. 註53)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른 교과과정 및 교수시수를 보면 〈표 14〉와 같다. 

〈표 14〉제1차 조선교육령 시기 각 학년 교과과정 및 매주 교수시수표
과 목 시 수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수 신1111
조선어 및 한문6655
일어(국어)10101010
산 술6666
미 과  22
체조 · 창가3333
 

4. 유학정책과 고등교육 실상


1910년대 도일 유학생 註54) 수는 한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500~600명을 선회하였다. 당시는 1911년 8월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조선인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최고 교육기관이 전문학교가 전부였다. 그것도 1915년 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경성전수학교·경성의학·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의 관립전문학교와 1917년에 사립재단에 의해 설립된 연희·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고작이었다. 이들 전문학교는 법학·의학·공업·농업 등 식민정책에 필요한 인재를 얻기 위한 학교였기 때문에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등교육기회와 더불어 중등교육조차 열악한 상황에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10년 강점 이후 일본유학은 이전과 비교할 때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한말 및 1910년대 일본유학생 수는 〈표 15〉 및 〈표 16〉과 같다. 


〈표 15〉한말~1910년대 일본유학생 수55)
연도 190419051906190719081909191019111912191319141915
기존 102197430554702739595449502430450342
신도 1582521531811031475935810768?
260449583735805886600542560537518342
〈표 16〉1910년대 관비·사비일본유학생 수56)
연도 19121913191419151916191719181919
기존 5047472629173047
신도 485635535581545641739631
535682582607574658769678

〈표 15〉에 의하면 1908·1909년 일본 유학열이 고조되었으나 1910년대 열기는 이전만 못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강점의 상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겠지만 1911년에 제정된 ‘조선총독부 유학생규정’이 공포되면서 위축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비로써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는 자는 미리 이수학과, 입학 및 출발시기를 명기하고 이력서를 첨부하여 지방장관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대해 지방장관은 본인의 성품 및 부형의 생업과 재산상활까지 명맥히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또한 각 지방 군수·부윤은 일본으로 유학하고자 하는 이에 대해 가능한 한 조선 내에서 수업하도록 설득하였다. 일본 유학을 희망하는 자는 학자금을 책임질만한 2명의 보증인 연서의 보증서를 첨부토록 규정했다. 註57) ‘유학생규정’은 일제가 한국인에 대한 일본유학을 억제하고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였지만, 실제로는 대학 예과나 전문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정칙영어예비학교正則英語豫備學校혹은 일진영어학교 연수학관 등의 예비학교에서 수학하곤 하였다. 이러한 경과가 빚어진 것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은 대학 본과에 입학자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고등보통학교를 4년제로 정하였기 때문에, 6년제 중학교심상·고등를 졸업한 경우에만 대학 진학시험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인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자라는 학력을 보충하기 위해 예비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유학생의 학교별 재학생 현화은 〈표 17〉과 같다. 


〈표 17〉일본유학생의 학교별 재학생 수
학교 종류별 학생수(비율)
대학 본과29(2.5%)
전문학교(대학 예과 포함)424(36.2%)
실업학교72(6.3)
중학교(여학교 포함)99(8.7%)
기 타517(45.3%)
1,141(100)



 예비학교를 다니다가 혹은 전문학교 이상 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12~1919년 사이에 정규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학생은 359명이었지만, 사비유학생들 가운데는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아 270명에 달하였다. 註58) 당시 전문학교 이상 재학생들의 전공은 주로 법정·경제와 사회학 방면 전공자가 가장 많아 480명으로 전체의 37%를 차지할 정도였다. 註59) 


중도에 포기하거나 졸업한 뒤에 귀국한 일본유학생일지라도 취직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1912년부터 1923년까지 귀국한 학생 1,312명 가운데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288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무직284명, 학교교원177명, 관공리140명, 은행·회사원119명, 상업103명, 의사50명, 변호사16명 등의 순위였다. 농업과 무직을 합하면 43.6%를 차지할 정도로 취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법정·경제 등을 전공한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10년대 여자 일본유학생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증가하였다. 1917년 여름에 각급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은 7명이었고, 1918년에는 3명이 귀국하였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그 숫자는 급증하여 1926년 전문학교 재학생이 88명, 중등학교 재학생이 146명에 달할 정도였다. 註60)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일본유학생의 관리에 철저하였다. 통감부시기에는 주일공사관 자리에 유학생 감독부를 두고 주일공사관 한치유韓致愈로 하여금 이들을 감독토록 하였다. 감독부는 구 공사관 구내에 기숙사를 지어 50~60명의 유학생들을 수용하였다. 1914년까지 이만규李晩奎가 유학생 감독을 맡았고 이후에는 서기은徐基殷이 맡았다. 註61)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감독부가 조선유학생학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재단법인 동양협회가 위탁하여 유학생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註62) 


일제는 이를 통해 일본유학생들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1915년 12월 당시 재일 조선인의 수가 4,000여 명에 달했는데, 1916년 ‘요시찰 조선인’이 500여 명으로 대부분 유학생들이 차지했다. 이는 1916년 7월 일본 내무성에서 ‘요시찰조선인시찰내규’를 만들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르면 ‘요시찰 조선인’을 갑호 1~6, 을호 1·2로 나누었는데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우려가 있는 자로서 이를 전파할 가능성이 높고, 행동으로 옮길 우려가 높으며, 또 외국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가 있는 자를 요시찰 대상으로 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