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7. 18. 22:24

제5장 사법제도와 식민체제 강화 

제4절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4. ‘조선태형령’과 ‘범죄즉결령’


일제는 한국을 강제 점령한 이후 일본인에 대해서는 일본 법률을 적용하였지만, 한국인에게는 대한제국기의 형법대전을 적용시켜 법적용에 차별을 두었다. 註74) 이후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해 동일하게 법을 적용한다며, 1912년 3월 ‘조선형사령’ 註75)을 공포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인에 한하여 태형을 그대로 부과하도록 하여 오히려 이를 법제화시켰다. 註76) 이어 3월 30일에 ‘태형집행요령’이 발포됨으로써 법규 정비가 완료되었다. 註77) 


이에 따르면 태형은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할 자에 대해 정상이 있을 때와 100원 이하의 벌금 및 과료에 처할 자가 일정한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자산이 없을 때 부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에 한하도록 하였으며, 하루에 태 30대5분간를 기준으로 하되 1·2회 나눠 집행토록 하고, 좌우 둔부에 번갈아 집행하고 집행시 마실물을 반드시 제공하며 집행 중간에 냉각법을 시행토록 하였다. 행될 때까지 감옥 또는 즉결관서에 유치토록 하였으며 이를 비밀리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밖의 태의 사용방법, 구체적인 집행방법 등은 ‘태형집행요령’에 규정되었다. 


이후 법령은 조금씩 개정되었는데, 1914년 4월 경무부장회의에서 집행 전 공의公醫가 배치된 지역에서는 집행 전 반드시 공의가 수형자의 건강상태를 진출하여 이상이 없을 경우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註78) 하지만 1910년대 전국에 배치된 공의의 총수가 200명을 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공문空文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註79) 


일제는 조선시기에 가장 쉽고 효과적인 교화 방법으로 이용되었던 태형을 식민지 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일제는 1882년 이미 태형을 전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식민지 조선에 존속시켰다. 이는 징역형보다는 태형이 비용면에서 절약되며 더욱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註80) 실제 징역 3개월의 경우 태 90대로 환형하면 2일간 구금하기만 되기 때문에 88일간의 행형비가 절약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재정 부족에 따른 감옥 증설의 어려움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註81) 실제 1917년 경우 1년간 집행된 총태수는 1,455,216대로 이를 위해 구금한 일수 30,744일을 공제한 1,424,472일분의 행형비, 444,425원이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註82)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시 일제는 ‘검거필죄檢擧必罰’이라는 말로 태형의 ‘효과’를 옹호하고 나섰으며, 오히려 사법관들에게 되도록 태형을 선고할 것을 ‘권장’하기로 하였다. 


채찍은 처음에는 80대가 보통이었지만 도중에 기절하게 되면 잠시 쉬게 하여 3일 후에 다시 불러내어 또 매를 가했다. 한 번 당한 날은 걷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여 다른 사람에게 업혀 나갔다. 죽을 경우에는 사체는 그날 밤에 행방불명되었다. 註83) 


하지만 일제는 ‘과학적인’ 집행방법이었다고 항변하면서 ‘태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다’며 안정하다고 억지를 부렸다. 註84) 태형은 정식재판에 의한 집행 이전에 일본 경찰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경우가 많았다. 즉 일제는 1910년 12월 ‘범죄즉결령’을 공포하여 태형을 조장하였다. 註85)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를 취급하는 자는 그 관할구역에서 다음의 범죄를 즉결할 수 있다. 

   ① 구류 또는 과료의 형에 해당하는 죄. 

   ②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할 도박죄 및 구류 또는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할 형법 제208조의죄. 

   ③ 3월 이하의 징역, 금고 또는 구류나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할 행정 법규 위반 죄. 

제2조 즉결은 재판을 정식으로 이용하지 않고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빙을 조사하여 즉각 그 언도를 해야 한다. 피고인을 호출할 필요가 없을 때, 또는 호출해도 출두하지 않을 때에는 즉시 그 언도서 사본을 본인 또는 그 주소로 송달할 수 있다. 


‘범죄즉결령’은 ‘형사사무처리의 간이민활’을 위해 ‘일정한 범위 내의 범죄에 대해 정식재판을 거치지 않고 피고인의 진술에 따라 경찰서장 및 그 직무를 취급하는 자가 즉결’할 수 있도록 한 행정법규였다. 헌병경찰제를 실사하고 있던 상황에서 즉결권자는 ‘경찰서장, 헌병분대장 및 분견소장’ 등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은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할 죄, 구류·과료’에 해당한 경우에 태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채 경찰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거의 대부분이 태형으로 환형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12년 ‘태형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경찰범처벌규칙’ 87개조 가운데 한 가지에 해당할 경우에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주된 항목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4. 이유 없이 면회를 강요하고 또는 강담强談, 협박 행위를 하는 자 

8. 단체 가입을 강요하는 자 

19. 함부로 대중을 취합하여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을 남용하는 자 

20.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또는 불온문서·도서·시가詩歌를 제시·반포·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 

29. 본적·주소·이름·연령·신분·직업 등을 상칭하여 투숙 또는 승선하는 자 

30. 이유 없이 관공서의 소환에 불응하는 자. 

32. 경찰관서에서 특별히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사항을 위반하는 자 


일제는 ‘경찰범처벌규칙’을 통해 항일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법적으로 규제하고자 하였다. 이와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3월 이하의 징역 도는 구류에 처해진 자와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할 자 가운데 일정한 주소가 없고 무산자인 경우는 태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에 대해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경찰이 범죄자로 지목한 모든 사람은 사법에 정해진 절차에 의하지 않고 바로 체포하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친족이나 친구에 주련株連하여 사실의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에 앞서 혹형을 가하였다. 그 결과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심문하였다. 도한 혹독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여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 죄를 성립시킨다. … 증인·감정인 또한 강박과 고문으로 그 범죄 사실을 위증케 하였다. 물품 압수와 가택 수색도 소유자의 승낙이나 입회 없었으며 물품이 범죄사실과 전연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이를 압수하였다. … 즉결의 예로 처리할 내용의 사건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즉결처분을 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사법재판을 요구한 경우에는 더욱 악형을 가하요 며칠을 감금하여 일부러 소정 기간을 넘기게 하고는 즉결처분이 확정되기를 기다려 형사를 집행하곤 하였다. 註86) 


1910년대 범죄즉결사건 처벌 인원 및 각형을 비교해보며 〈표 21〉과 같다. 

 〈표 21〉범죄즉결사건 처벌 인원 및 각형 비교 87)

연도 처벌총인원 자유형 재산형 체형
징역·금고·구류 벌금·과료 태형(환형비율)
19103,144391272,978(94.7)
191121,3889954,72815,065(70.4)
191236,1592,27415,45118,434(51.0)
191345,8482,56923,32019,959(43.5)
191448,7633,28022,46423,019(47.2)
191559,4364,45228,18726,797(45.1)
191681,1374,95136,96039,226(48.3)
191792,8134,29443,65144,868(48.3)
191894,5464,52851,33538,683(40.9)
191971,9844,80932,24234,933(48.5)


이에 따르면 처벌 총인원은 1911년 이후 매년 1만명 이상씩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1912년 태형령이 공포된 이후 환형비율은 40~50%대를 유지하였다. 일제는 태형집행을 ‘권장’하는가 하면 1917년 말~1918년 초에는 그 범위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註88) 하지만 이러한 구상은 원경原敬내각에서 주창한 ‘내지연장주의’ 방침과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체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폐지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태형제는 3·1운동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원경은 1919년 9월 부임하는 총독 재등실齋藤實과 정무총감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에게 한국에서 긴급히 시행해야할 ‘내지연장’의 방침 15가지 가운데 태형령의 폐지를 포함시켰다. 註89) 


재등실은 부임 직후에 사법관료들에게 ‘태형제’ 폐지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토록 하였지만, 이에 대한 반발론이 적지 않았다. 1919년 11월 19일자 『매일신보』 사설에 따르면, 태형제 폐지의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시기가 조선의 실정과 민도의 실제에 비해 너무 이르다는 입장을 내세워 그 범위의 축소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태형제의 폐지에 따른 감옥비의 격증 문제와 감옥을 증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등실은 이를 강행하여 1919년 10월 ‘태형령’ 폐지 개령안을 일본 내각에 송부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1920년 3월 ‘태형령’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註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