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일제의 서적 금압정책과 금서 /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26. 11:05

제3장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1. 종교 차별·통제정책
2. 언론탄압
3. 교통·운수·통신 지배
4. 한국사 왜곡
5. 일제의 서적 금압정책과 금서


5. 일제의 서적 금압정책과 금서


1. 일제의 출판통제정책


1) 발매금지와 압수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민족의 자주독립사상을 억압하고 조선의 문화·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무지바한 사상통체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일환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시작하였던 출판통제를 더욱 엄격하게 강화하여 애국출판의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첫째 대한제국시기에 출간된 서적에 대한 대대적 발매금지·압수를 통해 애국적 사상의 전차 매체를 ‘없애려’하였고, 둘째 검열을 강화하여 은유적 ‘단어’의 표현까지 문제 삼으며 출판을 통제하였으며, 셋째 일체 침략정책에 순응하고 조선의 역사·문화를 왜곡하는 ‘위서僞書’를 만들어 애국적 출판물을 대체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신규 교과서의 편집을 주관하였던 소전성오는 다음과 같이 ‘침략적’ 교과서의 편찬을 언급하였다.


합병이 발표되어 반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가 되고 반도의 주민은 모두 폐하의 적자가 되었으므로, 학부 편찬 교과서는 그 내용이 매우 부적당하고, 기타 검정 또는 인가를 받은 보서도 모두 시세에 적당하지 않게 되었다. 註251)


‘한일합병’으로 기왕의 교과서가 모두 쓸모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우선적으로 교과서 자구字句정정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나아가 침략 목적에 맞는 교과서 편찬을 급속하게 추진하였다. 교과서 편찬 방침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은 조선총독부의 교과서 편찬 목적이 사실상 ‘침략’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것이다.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신민으로서 밖으로 세계 일등국의 인민으로 어깨를 견주고 안으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첫째 황실의 은택에 있음을 깊이 인상印象시키고, 각기 본분을 지켜 황실을 존숭하고 국가에 다할 깃을 알게 할 것 註252)


‘식진지’가 됨을 행복하게 여기고 일본 왕실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 교과서 편찬의 근본 목적으로, 이는 곧 민족의식을 마비시켜 식민지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잘 드러난다.


한국 아동이 학습하는 유일한 국사라는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일본 교과서 중에 삽입된 약간의 사적事蹟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은 전부가 교묘히 날조한 것뿐이니 이는 한국 아동에게 조국을 멸시하는 사상과 및 이와 동시에 일본에 대하여는 찬송경앙讚頌敬仰의 관념을 생生케 하기 위함이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교과서 편찬정책은 교과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적 일반에 적용되었다. 침략정책에 맞는 서적의 출판을 편찬·장려하는 것은 역으로 침략에 저항하는 애국적 출판문을 금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발매금지·검열을 통하여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1909년에 만든 출판법에 따라 1910년대 발매금지 및 압수된 책의 종류를 보면 〈표 12〉와 같다.


〈표 12〉1910년대 발매금지 및 압수서적 현황
연도191019111912191319141915191619171919합계
발매금지 · 압수 종5141429151061121


이들 서적 가운데 ‘풍속괴란風俗壞亂’을 금지 이유로 든 경우는 거의 없고(예컨대 『경국미담經國美談』은 풍속문제 때문에 금지되었다). 대부분은 ‘치안방해’ 혹은 ‘안녕질서 방해’에 해당되었다. 이유가 확인되지 않은 몇 종의 서적도 서명으로 보아, ‘치안방해’에 해당되었음이 확실하다. ‘치안방해’란 사실상 민족주의적 내용이나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며, 일제는 ‘합병’과 동시에 민족주의 사상을 억압하기 위하여 이들 서적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경무월보警務月報』에 「압수출판물 목록」을 게재하고, ‘특히 주의할 일’이라고 한데서 註253) 짐작되듯이 발매금지는 곧 일제 경찰력에 의한 ‘압수’를 의미하였으며, 나아가 서적 소지자에게는 ‘물리적’ 제재가 가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예건대 페퍼는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술회하였다.


합병조약이 늑체勒締되지 일본인은 즉시 한국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분소焚燒하였다. 한국의 문화를 일자일획一字一劃이라도 기록한 문자는 몰수沒數히 수색하여 소기消棄하였다. 그리하고 이런 문자는 가지고만 있어도 그 소유자는 감옥 수도囚徒를 면치 못하였다. 한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된다. 나도 월전月前에 조국의 국사 본 죄로 구타를 받은 후 15일 내지 30일 이내의 구류를 당한 한일을 목도目睹하였다. 註254)


또 박은식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의 역사·국어·국문에 대하여는 엄중히 금지한다. 어느 학교의 교사 최창식崔昌植이 몰래 국사를 편저하여 서랍에 감춰 교재로 사용한 일이 있었는데, 마침내 일본인에게 탐지되어 잡혀 금고 1년의 현을 받았다. 註255)


이 언급은 조선총독부의 발매금지·압수가 서적에만 한정하지 않고 서적을 통한 애국사상의 고취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대인적對人的 억압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발매금지는 ‘책’ 한 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문제였으며, ‘침략’과 그에 대한 ‘항거’의 대항관계를 내포한 것이었다.

앞서 1910년대에 120여 종의 서적이 발매금지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압수된 서적 전체가 아니었다. 박은식이 ‘국사를 편저’하여 사용하다 체포·압수된 사례를 지적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제의 출판검열과 발매금지처분을 피하기 위하여 뜻있는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저술을 하였고, 이들 서적은 경무당국에 발각되는 대로 압수되었다. 서명이 확인되는 금서 가운데는 특히 1910년대 후반에 비밀출판된 것이 많으면 민족운동의 현장에서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 애국적 출판물의 비밀간행이 활발하게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

대한제국 시기 ‘교과용 도서 검정규정’이나 ‘출판법’ 등의 악법이 반외세의 민족사상을 포괄적으로 치안방해로 규정하고 금지처분할 것이 규정하고 있듯이, 이들 악법의 적용은 책의 내용 일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표현이나 단어 하나 하나까지 이르고 있었다. 즉 “한국의 문화를 일자익획이라도 기록한 문자는 … 소기했다는 페퍼의 언급이나 ”한국의 역사·국어·국문에 대하여는 엄중히 금지 했고 … 각국의 혁명사, 독립사, 위인 역사까지도 모두 엄금하였으며 … 기타 여항閭巷의 가요·패고나소설일지라도 어쩌아 역사의 의미가 있으면 문득 문명의 명령으로 금지한다”는 박은식의 지적은 일제의 발매금지·압수가 경무당국의 공식 조치 외에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었음을 사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단행본 출판물 외에 미국 대통령이나 국제연맹에 관한 보도까지 문제 삼아 심문·잡지를 발매금지하고 압수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강점 후 일제의 대대적 발매금지·압수는 문화압살정책에 다름 아니었다.


2) 발매금지와 검열

조선총독부의 서적 금압의 다른 한축은 ‘검열’이었다. 검열은 교과서의 경우 학무국 편집과가 ‘검정’이라는 명목으로 일반서적·신문·잡지의 경우는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검열계에서 담당하였다. 반제 독립운동을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경무국 고등경찰과가 검열을 담당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검열을 통치 기반과 연관된 ‘치안’ 문제 혹은 ‘사상’ 문제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검열의 기준은 대한제국기의 ‘교과용도서 검정 규정’이나 ‘출판법’을 준용하였지만, 대내적인 금서처분에 맞춰 검열도 더욱 가

혹하게 이뤄졌다. 예건대 『기독신보』에 게재된 「신춘新春」이란 글에서 “만물이 새 생명을 얻어 갱생”이란 부분을, 검열에서 ‘갱생’이란 표현이 조선총독부에 반대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려는 뜻이라고 해석되어 발매금지되었다. 또 성서공회에서 “마음 가운데 있는 알마를 격퇴할지어다”는 표현을 담은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검열관은 ‘악마’를 ‘일본인’으로 해석하여 편집인을 문책하고 글자 삭제를 지시할 정도였다. 강점 후 검열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910년대 검열 경로는 검열관에서 시작하여 주임-경시-고등경찰과장-경무청장 등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과된 경우에는 주인朱印으로 ‘무사無事’라고 표시하였다. 일종의 서적에 대한 검열이 경무 총책임자에까지 보고되어 결재되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사상·치안통제책의 일환으로 서적 검열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위의 예는 잡지의 경우지만, 단행본도 동일한 라인의 검열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 결재 선은 경무청장이 경무국장으로 바뀔 뿐 1920년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검열은 출판원고에 대한 사전검열과 원고검열에 통과한 후 책을 만들어 납본한 후 다시 감열을 받는 납본 건열의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식민통치를 비판하거나 애국적 내용을 담은 서적을 간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단 출간된 서적이라 할지라도 발매금지·압수 조치가 언제든지 내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검열의 이중구조에 다시 발매금지라는 구조가 가중되어 삼중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검열의 실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검열의 엄격한 적용에 대해서는 앞서 표현 한 마디 글자, 한 구절까지 문제 삼았다고 언급하였거니와, 상대적인 비교를 하자면 일본 내에서 간행된 서적도 조선에서는 치안방해라는 이유를 들어 발매금지하였다.

둘째, 단행본이 검열에 들어가면 몇 달은 보통이고 심하면 그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들 서적이 일제통치에 반하는 서적이 아니라 일반

문예물·소설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검열이 별 문제 없는 일반 서적에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2. 1910년대 금서

1910년대 전반기의 금서는 경술국치 이후 출간된 것으로 확인되는 몇 종인 『만국통감』·『한국교회핍박』·『최신동국사』·『국민개병설』·『최도통崔都統』·『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을 제외하면, 대개가 대한제국기에 출간되었다. 이는 일제가 강점과 더불어 대대적인 서적 압살을 통하여 민족의식의 전파 매체를 절멸시키려는 의도였음을 보여준다.

금서의 종수는 1910~1914년 사이에 대략 100종 정도에 이르고 있다. 1905년부터 강점 전까지 출간되어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 광고된 서적이 171종임을 감안한다면, 註256) 사실상 대한제국시기에 사회적으로 주목받던 서적의 절반 이상이 금서처분된 것이다. 이는 계몽운동으로서의 출판운동을 물리적으로 부정함과 아울러 이를 대체할 일제 침략정책 도구로서의 출판문이 확산되는 것을 의미했다.

금서처분된 서적의 저자를 보면, 이름이 확인된 경우만 4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종 이상의 서적을 저술·번역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현 채 : 대한지지, 미국독립사 보통교과동국역사 동서양역사, 일본사기

정인호 : 국가사상학, 초등대한역사, 최신고등대한지지, 최신초학소학, 신초등대한지지

신채호 : 을지문적한글본·국한문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최도통

장지연 : 녀자독본, 대한신지지, 애급근세사, 애국부인전 신소설

원영의 : 신정동국역사유근 공저, 국어과본, 소학한문독본

유문상 : 대가논집번역, 청년입지편번역, 강자의 구너리경쟁

안국선 : 연설방법, 비률빈전사, 정치원론

이해조 : 화성돈전, 자유종, 은세계

휘문의숙 편집부 : 고등소학독본, 고등소학수신서, 중등수신교과서

박은식 : 정치소설, 서사건국지역술,몽배금태조

유  근: 신정동국역사원영의와 공저, 초등소학수신서

유호식 : 국민자유진보론, 민족경쟁론

유길준 : 노동야학, 보노사국후계두익대왕칠년전사

현공염 : 경국미담, 회천기담

변영만 : 이십세기지대참득제국주의, 세계삼괴물번역

이채우 : 애국정신담번역, 십구세기구주문명진화론

윤치호 : 찬미가역술, 유학가취

이승만 : 독립졍신, 애국사회핍박

안종화 : 초등윤리학교과서, 국가학강령번역


[註 251] 도부학·아부양 편,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조선편)』 39, 용계서사, 1991, 98~ 99쪽. ☞

[註 252] 도부학·아부양 편,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조선편)』 39, 용계서사, 1991, 100쪽. ☞

[註 253] 『警務月報』 3월호, 1912. ☞

[註 254] 내다니엘 페퍼, 『한국의 진상』, 11쪽. ☞

[註 255] 박은식, 『한국통사』, 109~110쪽. ☞

[註 256] 김봉희, 『한국 개화기 서적문화 연구』, 이화여대출판부, 1999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