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언론탄압 /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26. 10:35

제3장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1. 종교 차별·통제정책
2. 언론탄압
3. 교통·운수·통신 지배
4. 한국사 왜곡
5. 일제의 서적 금압정책과 금서


2. 언론탄압


1. 통감부의 한국언론 탄압

일제의 언론탄압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언론통제에 관한 법률상의 규제는 없었다. 1904년 3월 주한일본공사 임권조林勸助는 한국정부에 신문을 통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어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註71)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04년 7월에는 조선주차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국내언론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군사경찰훈령’을 발표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군사상의 보완을 이유를 내세워 ‘군정 시행에 관한 내훈’을 통해 집회·신문·잡지·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註72) 일제는 이를 근거로 『제국신문』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으며, 註73) 1905년 11월 『황성신문』을 정간시키고 사장 장지연張志淵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註74)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형태로 언론을 탄압하였다. 1906년 4월 ‘보안규칙’을 통해 “신문지 및 기타 인쇄물의 기사가 외교 또는 군사기밀에 저촉되거나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안정 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될 때는 그 발매·반포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국내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註75)

이어 일제는 1907년 7월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여 註76) 한국 신문에 대해 직접적인 규제를 단행하여 반일·반정부언론을 탄압하고자 하였다. 註77) 이에 따르면 신문발행은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하되 국적과 무관하게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의 통제 안에 두고자 하였다. 이어 보증금 납부 조항을 두어 300원의 보증금을 납부토록 하였다. 이는 학술·기예 혹은 물가정보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는 일반 신문사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이들 신문사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기 위한 것으로 간접적 탄압책이었다. 이로 인해서 『제국신문』은 재정난으로 폐간의 위기를 맡기도 하였다. 註78) 또한 신문사 역원의 변경은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청원자의 정치성향에 따라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명문화하였다. 특히 일제는 신문발행 즉시 2부를 내부와 관할관청에 납본토록을 명시하였다. 이전에는 인쇄에 앞서 조판대장을 경시청에 납본하여 검열을 받고 인쇄하였다. 때문에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은 활자를 거꾸로 하여 인쇄한 ‘벽돌신문’이 발간되었다.

이후 일제는 1908년 4월 ‘광무신문지법’을 개정하였다. 이전 신문지법과 보안규칙으로 국내에서 발행되던 대부분의 신문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발행인이 서양인들인 경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개 종교신문으로 개신교의 『예수교신보』, 천주교의 『경향신문』 등이 있었으며, 일반신문으로는 베셀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가 문제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지법 공포 이전부터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고 종교신문과 달리 반일언론을 펴 한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신문이었다. 1906년 고종친서사건과 1907년 ‘조도전대학토론회사건’·헤이그특사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신문지법 공포 이후에도 『대한매일신보』는 한국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키고 반일감정을 독려하는 내용의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 관보 게재 정지, 註79) 헐버트·맥켄지의 활동과 외국신문에 게재된 반일활동, 통감정책의 비난기사 註80) 등이 게재되었다. 이외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일본인의 한국이민과 관련하여 일본인에게 토지 불매를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미일 관계의 악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한편 친일내각의 총사직도 요구하였다. 註81)

이에 일제는 1908년 4월 20일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외국에서 발행한 신문지를 비롯하여 외국인이 국내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치안을 방해하며 또한 풍속을 괴란한다고 인정될 때에 내부대신이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항목과 더불어 이를 위반할 경우에 내국인은 200원의 벌금에 처하며, 이를 반포금지된 것은 운송하는 자에게는 50원 이내의 벌금을 내도록 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다. 註82) 이로써 국내에서의 신문 발행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하와이·샌프란시스코·블리디보스토크

에서 발행되던 한글 또는 한문의 신문의 반입이 원찬 봉쇄되었다.

1909년에는 당시 조선정부가 관장해오던 신문 검열권을 통감부로 이관시켜 언론 통제를 위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 하였다. 더욱이 1910년 5월 이른바 ‘신문압수처분’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적용하여 민족 언론의 활동은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말았다. 註83) 특히 1910년 6월 사내정의 통감이 부임한 이후에 신문 검열권을 쥐게 된 통감부의 경무총장한국주차 일본헌병사령관 겸임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은 1910년 7월 각 신문사의 사장 및 발행인들을 소집한 뒤에 다음과 같이 기사 취재에 관해 경고하였다.


첫째, 지방에서 무기를 가지고 인민을 침해하는 도당에 대하여 의병이라 일컫고 은연히 동정하여 이를 선동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일관계를 소격疏隔케 하는 문자를 써서 인심을 선동치 말 것.

셋째, 단체 또는 개인 간의 악감정을 도발하여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말 것.

넷째, 억측의 기사를 쓰지 말 것.


이를 근거로 명석원이랑은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1910년 8월 3일자 『황성신문』을 압수한 뒤에 발행을 정지시켰으며8월 6일에 발행이 허가됨, 또한 『대한매일신보』는 8월 9일자에 「진영이동 후의 현상」이란 기사를 게재한 것에 대해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발행정지를 당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8월 10일에는 『대한야소교회보』·『천도교회월보』를 비롯하여 『소년』 잡지 역시 치안방해로 압수되었다. 그후 『대한매일신보』는 8월 15일에 해제되어 8월 17일에 속간되었으나, 치안방해라 하여 발매금지와 동시에 발행정지를 당하였다. 『대한민보』도 역시 8월 18일에 발매금지와 발행정지를 당하고 말았다.

일제는 ‘한일합방’ 직전에 언론인 28명을 예비 검속하는 한편,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하였다. 일제는 당시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한매일신보』에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일제는 외교경로를 통해 발행인 배설을 1907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배설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 한편, 1908년 5월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 Alfred Marnham에게 넘겼다. 그런데 1909년 5월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5월 일제는 비밀리에 만함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신문을 매수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6월 14일자부터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지만,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이란 두 글자를 생략한 채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변질되고 말았다. 註84) 이후 한글신문의 발행은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황성신문』은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되다가 같은해 9월 14일 폐간되었다. 『대한민보』 또한 8월 30일부터 『민보』로 고쳤지만, 결국 8월 31일부터 폐간되었다. 이완용내각의 기관지였던 『대한신문』 역시 8월 30일자로 『한양신문』으로 개재되었지만, 다음날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와 같이 사내정의 통감은 1910년 8월 경술국치에 이를 때까지 정치적 논평을 정지시키는 것은 물론 이에 관한 보도자체도 일제 차단하였다. 각 신문은 연일 발매반포금지처분을 받았으며 8월 19일 하루동안에 부산지역에서 차압처분을 받은 일본신문의 매수가 9,164매에 이르렀으며, 폐간된 신문은 『조선일일신문』 등 8개에 달하였다. 註85) 이때 사내정의는 일본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민중에 대해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중히 행동할 것”을 훈시하였다. 8월 22일 ‘합방조약’이 체결된 사실이 일본 내 발행의 신문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는 일본신문은 압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경성일보』가 1910년 8월 27일자 신문에 「시국문제의 경과」라는 제목으로 이를 기사화하고, 다음날에 「시국경과의 詳報」라고 보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1910년대 일제의 언론탄압


1) 한국인 발행의 언론 탄압

일제의 1910년대 언론탄압은 무단통치 가운데서도 특징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강점을 이전부터 한국 식민지화에 반대·비판하는 언론매체와 언론인에 대해서는 탄압을 가하였지만, 이를 찬성·지지하는 경우에는 적극 육성·보호하였다. 註86) 이러한 언론탄압은 ‘한일합병’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만 남겨두고 잡지는 일본인 식민주의자나 친일 조선인이 발행하는 것만 존속시켰다. 註87)

1909년에 조중응趙重應이 발행한 『법정신문法政新聞』 註88)을 비롯하여 1910년대 초까지 『국민신보』·『대한신문』·『대동일보』·『시사신문』 등이 존속하였다. 註89) 국민신보사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한일합병’을 지지한 일진회의 기관지로서 『국민신보』를 발행했다. 註90) 


일진회 기관지『국민신보』


국민신보사는 1909년 11월 1일 동경에서 개최된 이등박문 장례식에 기자 김환을 보냈다. 같은해 11월 14일에는 대한신문사·한성신보사 등과 함께 원흥사에서 이등박문 추도기념식을 열었다. 또한 1909년 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이용구·송병준 등이 이완용내각에 ‘한일합방 상주문’을 제출하고 이를 공표하는 동시에 『국민신보』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註91) 『국민신보』는 12월 9일 「국제법상의 국가」라는 논설을 통하여 일진회의 합방청원에 적극 찬동했다. 註92) 12월 13일 사장 최영년이 “일진회의 합방청원서는 국리민복이 되는 것인데 일반인들이 오해하여 반대하니 심히 애석하다”라는 망언까지 했다.

대한신문사는 이인직이 천도교계의 『만세보萬歲報』를 인수한 것으로 제호를 『대한신문』으로 고쳐서 발간했다. 이완용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註93) 『대한신문』은 1908년 1월 23일 논설을 통해 일제의 고종황제 폐위를 옹호하고 통감부의 지배정책에 적극 찬동했다. 註94) 대한신문사 역시 1909년 11월 14일 국민신보사·한성신보사 등과 함께 원흥사에서 이등박문 추도기념식을 열었다. 1910년 6월 2일 사장 이인직은 공자교 대표로 구 통감 전별餞別과 신 통감 환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대동일보사는 1909년 10월 19일 『대동일보』를 창간했다. 『대동일보』는 1910년 6월 4일 한성신보사 주간 전촌田村에 의하여 한성신보사와 함께 대한일일신문사로 합병되었다. 시사신문사는 1910년 1월 1일 『시사신문』을 발행했다. 창간호 1면에 증미황조曾禰荒助통감의 축필 휘호를 게재했다. 1910년 4월에 사장 민원식이 일진회 회원으로서 합방찬성추진단체인 정우회政友會 발기에 가담하면서, 『시사신문』은 정우회의 기관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매일신보』를 제외한 여타의 신문은 ‘신문지법’으로 통제하여 새로운 한글신문의 발행을 전연 인정하지 않았다. 친일적인 『대한일보』와 『국민신문』 등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아 이들 신문은 강제로 폐간되었다. 이런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대동공보』나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잡지 『대도大道』, 하와이의 『신한국보』, 『한인교보』 등이 비밀리에 국내에 반입되어 일부 사람들에게 읽혀지곤 하였다.

이렇듯 『매일신보』 만 존속되는 가운데 일제 강점 초기 언론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민족독립의식과 자유평등의식 등의 자각과 고양을 저지시키고,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착취 문제 등 민족적·계급적 모순관계를 은폐·왜곡하여 조선민중의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억압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식민주의 논리를 선전·보급하여 조선인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했다. 즉 한반도 침략합리화론, 식민통치미화론, 민족동화론, 수작자 등을 매개로 한 조선사회재편론, 조선경제의 일본경제체제로의 편입론, 조선문화 말살론, 황국신민화 교육론, 타율성론·당파성론·사대주의론, 대륙침략=동양평화 수호=아세아주의·백화론白禍論, ‘조선독립불가론’ 등 註95)이 강조되었다.

셋째, 친일적인 언론인이나 지식인을 육성·보호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의 주요한 인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반일언론매체와 반일 언론인 등을 탄압하거나 없애 버리고 통감부 및 조선총독부 기관지나 식민주의적이고 친일매국적인 신문과 잡지만을 육성·보호하는 일제의 언론정책이 실시되었다. 더구나 조선인의 80% 이상이 문맹 註96)인 당시 상황에서 언론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친일적인 언론인이나 친일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2) 일본인 발행의 언론탄압

일제의 언론통제와 탄압으로 더 이상 민족지는 흔적을 감추고 말았지만,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식민당국의 언론탄압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을 봉쇄시키는 한편,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1910년 10월 사내정의는 경성일보사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식민지 당국의 기관지 역할을 당부하였다. 註97) ① 『경성일보』의 사원은 충군애국의 정신을 발휘하여 조선총독부 시정의 목적을 관철하는데 힘쓸 것, ② 사원 일동은 질서를 지키고 규율에 복종하며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에 사운社運의 융성을 기할 것, ③ 공정건강필봉을 근엄히 하고 『경성일보』의 품위를 지켜 신용을 얻고 세력을 넓히는데 힘쓸 것, ④ 사원은 각자가 품행을 방정히 하고 위엄과 체면을 지켜 신문기자로서의 자격을 고상히 가질 것, ⑤ 여하한 경우에도 윗사람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각개의 능력을 경주하고 자발적으로 활동하여 그 직문에 충실토록 할 것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일제는 강점 이전에는 반일적 언론활동을 억압하고 일본의 ‘합방’ 정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보도활동을 봉쇄하였다. 이후 치안이 어느 정도 평정되었음에도 일본인의 언론활동까지 가혹하게 통제하면서 일본인 기자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註98)

『대판조일신문』은 1911년 4월 5일부터 15일까지 10회에 걸쳐 「사내총독론寺內總督論」을 게재하면서 사내정의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는 경성특파원 강야양지조岡野養之助가 ‘고천자告天子’라는 필명으로 사내 총독의 사람 됨됨이와 정책 등을 거세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내용은 15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註99) 이 가운데에서 특징적인 몇 개의 논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註100)


제1 「총독의 악 평판」 : 사내정의가 악 평판을 초래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다른 게 아니고 그의 자신과 지성至誠을 탁托해야 할 그릇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 번벌藩閥의 힘으로 사내정의는 오늘날까지 겨우 절대계급주의로 유지되는 육군부내에서 성공해 왔을 뿐 그는 민정民政에 관해서는 신참자이다. …

제3 「신앙의 2개조」 : 사내정의는 2개조를 신앙을 가지녔는데, 첫째는 ‘군인을 헐뜯는 자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단, 자기에게 부회하는 자는 군인에 준함), 둘째는 백성은 관민에게 납세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고’ … 이 주의에 덧붙인다면 그는 편협한 사람이다. 그의 정치가 자칫하면 간섭정치, 정탐정치에 빠질 것은 당연하고 ….

제5 「공명정대함을 결함」 : 사내정의를 무단정치가라고 부른다. 어쩌면 미명美名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무단적인 것 같지만 정말 무단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는 무와 더불어 지녀야 할 공명정대함이 없다. 또한 너무 신경질적이고 남을 의심하며 마음이 명랑하지 못하다. 더구나 공명정대함을 결하고 따르지 않으면 아주 거세해 버리고 자기에게 굽실거리는 자만을 등용하고 있다. ….

제9 「조선이란 뭐냐」 : 조선을 군인과 관리들의 전유물인 것으로 알고 그들에게만 개발권을 주고 일본 자본가나 농민들에게는 겨우 조금씩 허가할 뿐 …. 사내 총독은 입으로는 조선인의 보호를 말하지만 그의 부하인 1만5천의 경관은 결코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온정으로써 조선인을 보호하기는커녕 죄도 없는 자를 잡아다가 파옥破獄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 등의 짓을 저지르고 있다. ….

제10 「소위 언론의 압박」 : 언론자유의 기회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언론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내정의는 유별나 지금 언론압박이라면 ‘사내정의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그의 두뇌가 현대의 대세에 뒤떨어져 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지 않은가. 사내정의는 학생들에게 훈시할 때마다 이르기를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실리실익을 취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언론은 모두가 공론이라고 하니 아아! 20세기인 오늘날 이 같은 말을 하는 정치가가 있다니 ….

제14 「대조선인 방침」 : 한국인은 보호가 필요하다며 제일방침으로 내지인의 이주를 가능한 억제하고 교육에 의해 한국인들과 더불어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나아갈 때까지 자원 개발을 보류하고 또한 일본인의 이민을 근소하게 동척이민에 한정하며, 또한 이민도 반드시 예비 군인으로 제한한다는 규정을 두고 …. 아무리 한국인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모국인의 이익에 반하고 모국민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모국민의 증가는 그들의 유도를 필요로 하겠으며 또한 반도가 좁다고 하지만 아직 백만, 2백만을 수용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사내총독론」이 식민지의 부당성과 식민지인의 처지를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청년들도 쌍수를 들고 쾌재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註101) 결국 『대판조일신문』은 이로 인해서 4월 9일부터 한국으로의 이입을 금지되었으며, 다른 일본 내에서 발행되던 신문도 한국으로의 반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이러한 사내정의의 언론탄압의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 대촌금화大村琴花의 글이 주목된다.


뾰족한 머리, 45도로 치켜 올라간 매 같은 눈매, 자유롭지 못한 오른손은 언제나 뒷짐을 지고 거만스러운 독재자라기보다는 독선전인 사내정의는 항상 청적靑赤의 연필을 쥐고서는 막료들이 내미는 문안에는 반드시 다소의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못 배기고, 의사에게 의술을 훈시하고 농민에게 농경을 가르치려고 하는 희한한 인물이었다. 註102)


대촌금화는 사내정의의 ‘전제정치가적’인 식민통치 성격에서 언론탄압이 비롯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뒤 사내정의와 신문이나 신문기자들과의 감정적인 대립은 점점 격해져 갔다. 사내정의가 이등박문의 신궁참배 때에 냉대를 받았다는 보도를 하였다고 하여 『대판매일신문』이 발매 금지되었고, 註103) 이를 전재한 『경성신문』 또한 발행정지처분을 받았다. 일본인 기자들은 이러한 사내정의 총독의 언론 탄압에 맞서 ‘춘추회春秋會’ 註104)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경성기자단의 체면을 보지保持하여 원기를 진작시키고 기자의 본분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자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춘추회’ 첫 모임에서 ‘합방’ 직후 “한국의 형세가 이미 정해진 오늘에 이르러 언론 취체가 준엄한 것은 유감이다. 사내정의 총독은 여론의 대세를 참작하여 반성할 것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명석원이랑은 춘추회를 ‘위험부장의 집회단체’ 註105)로 규정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대해 명석원이랑은 “총독을 비난하는 것은 총독의 위신을 해쳐 한국인들이 얕보는 원인이 되고, 일본인들의 인심을 괜히 동요시킬 필요가 없으며 불온한 언론 기사는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유포된다면, 가공할 악영향을 초래하게 되므로 일본에 있어서는 지장이 없는 기사라할 지라도 한국에서는 이를 엄히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본인들은 입만 열면 언론자유를 외치지만 한국에는 헌법시행이 되지 않은 터에 언론의 자유를 바란다는 것은 산에서 배를 구하는 것과 같이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무리들은 지금 당장 동경으로 돌아가라 註106)는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였다.

그뒤 일본인들의 발행 신문 또한 재등실의 무단정책을 후퇴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필봉을 거두고 말았다. 재등실은 언론탄압은 점점 확고한 정책으로 나아갔다. 1911년 후반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한편 재등실에 대한 비난 여론도 잠잠해졌다. 이후 『경성신보』와 잡지 『조선』이 중심이 되어 언론정책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1913년 2월 『경성신보』는 ‘사회주의’라는 낙인이 찍혀 폐간처분을 받고 말았고, 이후 『조선』 이외에는 아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註107)


[註 71] 정진석,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보』, 마당, 1982, 64~66쪽. ☞

[註 72] 장석흥, 「일제의 식민지언론 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참고. ☞

[註 73] 최기영, 「제국신문의 간행과 하층민 계몽」,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 일조각, 1991 참고. ☞

[註 74] 정진석,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보』, 247쪽. ☞

[註 75] 김진두, 『1910년대 매일신보의 성격에 관한 연구-사설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중앙대박사학위논문, 1995, 21쪽. ☞

[註 76] 『구한말관보』 1907년 7월 27일. ☞

[註 77] 최기영, 「광무신문지법에 관한 연구」, 『역사학보』 92, 역사학회, 1981 ; 김창록, 「일제강점기 언론·출판법제」, 『한국문학연구』 30, 한국문학연구학회, 2006 참고. ☞

[註 78] 『황성신문』 1907년 10월 11일 「신문속박의 조례」. ☞

[註 79]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6일 「본보의 官報停揭」. 한국관보에 일본인들이 더 등장하니 한국관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그 게재를 중지하는 논설을 게재하였다. ☞

[註 80]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5일 「한국문제」, 12월 6일 「條約勒定說明」, 12월 21일 「한국을 위하여 홀법씨의 운동력」, 1908년 2월 26일 「맥켄씨의 예상」. ☞

[註 81] 최기영, 「광무신문지법에 관한 연구」, 『역사학보』 92, 88~89쪽. ☞

[註 82] 『구한말관보』 1908년 4월 29일. ☞

[註 83]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4일자. ☞

[註 84] 황민호, 『일제하 식민지 지배권력과 언론의 경향』, 경인문화사, 2005, 4쪽. ☞

[註 85]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이우출판사, 1978, 117쪽. ☞

[註 86]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88쪽. ☞

[註 87]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친일언론의 본산을 파헤친 최초의 연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63~65쪽. ☞

[註 88] 장석흥, 「일제의 식민지언론 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419쪽. ☞

[註 89] 『매일신보』 1919년 6월 27일자 ; 『신한민보』 1920년 5월 7일자. ☞

[註 90] 장석흥, 「일제의 식민지언론 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419쪽. ☞

[註 91]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177쪽. ☞

[註 92] 『국민신보』 1909년 12월 9일자. ☞

[註 93] 장석흥, 「일제의 식민지언론 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419쪽. ☞

[註 94] 『대한신문』 1908년 1월 23일자. ☞

[註 95] 장석흥, 「일제의 식민지 언론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454~456쪽. ☞

[註 96] 김규환, 『일제의 대한 언론·선전정책』, 13쪽. ☞

[註 97] 『朝鮮及滿洲』 202, 45쪽. ☞

[註 98]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149~150쪽. ☞

[註 99] 제1 「총독의 악평판」, 제2 「寺內子의 逆櫓」, 제3 「신앙의 2개조」, 제4 「과연 내가 아니라면」, 제5 「공명정대함을 결함」, 제6 「遁辭」, 제7 「경찰정치의 弊」, 제8 「일종의 諧謔劇」, 제9 「조선이란 뭐냐」, 제10 「소위 언론의 압박」, 제11 「선정과 囑託·밀정」, 제12 「은사금의 매매제한」, 제13 「利源의 폐쇄」, 제14 「대조선인 방침」, 제15 「총독의 器의 그릇됨」 등이다. ☞

[註 100]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152~154쪽 참고. ☞

[註 101] 大村琴花, 「寺內와 宿緣의 싸움」, 『村山龍平傳』, 444쪽. ☞

[註 102]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151쪽 각주 108번. ☞

[註 103] 『대판매일신문』 1911년 4월 22일자. ☞

[註 104] 춘추회는 『동경조일』 신문 특파원 岡野, 『대판매일』의 豊田, 『시사』의 橫尾, 『報知』의 武田, 『경성신보』의 峰岸, 『일본전보』의 牧出, 『조선』의 釋尾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조선』 5월호, 1911, 6~7쪽). ☞

[註 105] 『조선』 39. ☞

[註 106] 『조선』 5월호, 1911, 2~5쪽. ☞

[註 107] 김규환, 『일제의 대한언론·선전정책』, 157~1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