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회사령과 일본자본의 침투 /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6. 20:05

제2장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1. 토지조사사업

2. 화폐정리사업과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

3. 회사령과 일본자본의 침투


3. 회사령과 일본자본의 침투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한국에서의 공업발전을 억압하는 정책으로 1910년 12월 29일자 제령 제13호로 「회사령」을 제정·공포했다. 이 법령은 조선 내에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조선 밖에서 설립한 회사의 본점이나 지점을 조선에 설치할 경우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이러 한 조치를 취한 것은 당시 일본의 자본축적이 미약했다는 조건도 있지만, 조선에서의 자본축적과 공업 발전을 억제함으로써 조선을 식량·원료의 공급지이자 일본상품의 판매시장으로 묶어두려는데 있었다. 즉 제국주의 본국과 식민지의 산업구조를 구분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다. 註21)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공포한 이유로, 조선인은 법률상·경제상의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여 복잡한 회사조직의 사업을 경영할 수 없고, 일본인자본가 또한 조선 실정을 몰라 예측하지 못한 손해를 입을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조선산업의 건전한 발달을 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註22) 그러나 「회사령」 제2조에서 “회사가 본령 혹은 본령

에 근거하여 발한 명령·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공공질서 혹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는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거나 제12조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의 설립 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5천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부실신고를 하여 허가 받은 자도 이와 같다”고 명시하고 있듯이 註23) 조선총독은 민간인의 경제활동에 간섭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회사령」은 조선인 기업의 설립과 성장 발전을 억압하고, 전통적 도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한편, 개항장·개시장·철도연선·군사기지 등 일제의 침략과 관련된 신흥도시의 발전을 조장하며, 이들 도시에서 일본자본의 팽창·확대를 촉진하였다. 註24)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일본이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자, 일본자본의 조선투자가 확대되었다. 1914년에는 「회사령」의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회사설립의 허가조건을 완화하였다. 「회사령」이 실시된 1910년부터 1919년까지 회사 설립상황을 살펴보면, 한국 밖 회사의 지점 설치 신청 91건허가85건, 한국 밖 회사의 본점 설치 신청11건전부허가, 한국 내 회사 설치 인정 676건허가556건, 기존 설치 회사에 대한 해산명령 7건, 기존 설치 회사의 지점 폐쇄명령 1건이었다. 註25) 「회사령」 실시 기간에 회사 설치허가를 받은 것은 일본인 회사 쪽이 훨씬 많았다. 1911년에서 1919년까지 8년간 조선인회사의 증가수는 36개로 일본인 회사의 180개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1910년대 조선의 공업은 정미업·피혁과 피혁제조업·조면업繰綿業·방적업·요업·금속공업철공업, 농구류·제재업·연초제조업·농수산물가공업·양조업·제염업·통조림업·한천우무제조업 등 경공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에서 공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낮았다. 공업생산의 농업생산액에 대한 비율은 1917년 15.6%, 1919년 18.2%에 불과했다. 註26)

한편 1910년대 초에 조선에 침투한 일본인 공업은 정미업·양조업·조면업·방적업이 주된 것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방적업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육지면 재배를 장려하는 동시에 조면공장을 다수 설립했다. 그러나 1916년 이후로 가면서 일본자본은 방적업·경질제도업硬質製陶業·시멘트제조업·제철업·펄프업·양조업·성냥제조업·제당업 등에 적극 진출했다. 註27)

조선공업에서 일본인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선인 공업보다 월등히 높았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본인 공업의 변화를 살펴보면, 공장 수는 185개에서 1,125개로 약 6배, 자본금은 982만 6,000원에서 1억 4,022만 9,000원으로 14.25배. 종업원 수는 1만 613명에서 4만 1,772명으로 3.9배, 또 생산액은 1만 6,920원에서 15만 4,100원으로 약 10배가 증대되었다. 註28)

1916년에서 1919년까지 한국에 침투해 온 일본인 대자본은 다음과 같았다. 삼정三井계열로서 조선방직주식회사·조선생사주식회사·남북면업주식회사·소야전小野田시멘트주식회사 등, 삼릉三菱계열로서 삼릉제철주식회사·조선무연탄주식회사·서선중앙철도주식회사·동산농사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또 자본금은 적지만 서선조면공장·삼읍주조주식회사·족립足立흑연·석면제련소·합자회사 경곡상점내화연와·열전상회·장진제일공장전분·성전정미소·조선물산주식회사정미업·조선성냥주식회사·조선정유주식회사·조선전분주식회사·편창片倉제사 대구공장 등이 설립되

었다. 이밖에 기존의 대기업으로는 조선제면주식회사·경성전기주식회사·동아연초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부산경질도기주식회사·조선우선주식회사·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註29)

1919년 일본인 공업회사를 보면, 회사 수에서는 주조업·정비업·제재업이 많고, 자본금액에서는 방적업·주조업·제재업·도자기업·정미업의 순서로 많았다. 특히 정미업은 공장수가 전체의 23%, 생산액이 전체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처럼 일본인 자본이 지배적인 조선공업은 약간의 제철· 광산업을 제외하고는 주로 방적업·정미업·농수산물가공업·경공업 등 원료 약탈과 관련되는 것이 많아 식민지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

[註 21] 정재정, 「식민지수탈구조의구축」, 『한국사』 47, 87쪽. ☞

[註 22]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 116~117쪽. ☞

[註 23]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2월 30일 호외. ☞

[註 24] 손정목, 「회사령연구」, 『한국사연구』 5, 한국사연구회, 1984. ☞

[註 25] 大藏省管理局, 『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朝鮮編 6 분책, 7쪽. ☞

[註 26] 허수열, 「조선인자본의 존재양태」, 『경제논집』, 충남대, 1990. ☞

[註 27] 허수열, 「식민지 경제구조의 변화와 민족자본의 동향」, 『한국사』 4, 한길사, 1994. ☞

[註 28] 朴慶植, 『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 청목서점, 1973, 108~109쪽. ☞

[註 29] 박경식, 『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 111~1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