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토지조사사업 /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4. 08:06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 제2장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1. 토지조사사업

2. 화폐정리사업과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

3. 회사령과 일본자본의 침투


1. 토지조사사업


일제는 한국을 병합한 후 식민지 수탈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식량과 원료를 일본으로 반출하고 상품과 자본을 식민지 조선으로 반입하는 식민지 경제구조로의 재편이었다.

1910년대는 그 기반을 구축하는 단계로서, 일제는 화폐·금융제도·교통·통신 등 기간산업 정비와 함께 근대적 소유제를 도입한다는 명분하에 토지 등 조선의 1차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조선의 광대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였고,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헐값으로 매각하였다. 또한 1911년 「삼림령」과 1916년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전체 삼림 가운데 60% 이상을 국유림으로 하였고, 국유림에서는 가축방목이나 땔감의 채취 등을 금지하였다. 1911년 「어업령」을 공포하여 한국의 어업권을 부인하고 어장을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성하였다. 1915년에는 「광업령」을 공포하여 일본인의 독점권을 강화함에 따라 전체 광산의 75% 이상을 일본인이 점유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업의 발흥과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회사령」을 시행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조선에서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토지소유권의 확인과 지세부과 체계의 정비 를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최대 지주가 되었고 안정적인 지세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註1)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토지와 지세를 효율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456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토지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토지조사사업은 크게 토지소유권 조사, 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 토지가격 산정, 토지대장작성 등으로 실시되었다. 註2)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 별로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토지대장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지형지모 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작업이었고, 토지 가격 산정은 전국의 지가를 조사하여 지세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창설하고, 같은 해 9월 「임시조사국관제」칙령 제20호와 1912년 8월 「고등토지조사위원회관제」·「토지조사령」 등을 차례로 제정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근간이 되었던 「토지조사령」의 핵심은 제4조에서 명시한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성명 또는 명칭, 소유지의 소재·지목·자번호字番號·사표四標·등급·지적·결수를 임시토지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단 국유지의 경우는 보관 관청이 임시 토지조사국장에게 통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註3)

이 조항은 조선인이 절차상의 번잡함과 이민족의 강압적 지배 등의 이유로 제대로 신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도 “신고인이 서류수속을 누락하거나 도장을 분실하던가, 형식에 잘못이 있어 서면 접수를 기한 내 하지 못하여 소유권을 잃어버린 경우”가 있다며 이러한 우려를 인정하였다. 註4)

토지소유권 조사는 ‘신고주의’에 입각하여 토지소유자가 작성한 토지신고서를 임시토지조사국에 제출하도록 했고, 그 배포 및 수집은 지주총대가 맡았다. 지주총대는 결수연명부와 대조하고, 확인과정에서 이상이 없을 경우 토지신고서에 날인하여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신고자를 토지소유자로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지정한 30~90일 이내에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모두 국유화했다. 토지신고서를 통한 신고와 사정을 거친 후 그것을 근거로 토지대장을 작성했고, 토지대장의 기재 사항을 근거로 토지에 관한 제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개항 이전 조선사회에도 이미 성립되어 있었으며, 대한제국시기에는 전통적 소유권에 대해 근대적 사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양전지계사업’이 전국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조선후기부터 생성된 소유권인도지권·입회권·소작권 등 토지에 대한 다양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지주에게만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했다. 또한 궁장토宮庄土·역둔토驛屯土 등 전통시대 국유지와 궁방宮房에 투탁하거나 공동소유화 한 농민의 땅이 총독부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는 식민지 지배권력이 경작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빼앗긴 총면적은 1912년 현재 133,633 정보로 그해 경지 면적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방대하였다. 이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은 331,748명이나 되었다. 註5)

조선시대 황실재산은 국유재산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일제는 고종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서라도 황실재산을 국유재산으로 정리하여 황실의 재정적 기초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이외에도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 등이 유력자의 신고에 의해 사유지화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개인의 소유가 아니므로 신고하지 않은 미신고 토지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공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세력의 미신고 토지가 모두 총독부 소유로 귀속되는 등 문제가 급증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따라서 조사사업의 결과 토지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급증하였고 이러한 소유권 분쟁 중 65%가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편입된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토지소유권 분쟁의 대강을 보면, 분쟁지 건수 33,937건 99,445필지, 화해 건수 11,648건 26,423필지였다. 그 내역은 소유권 분쟁 99,138필지99.7%, 경계 분쟁 307필지0.3%, 국유지와의 분쟁 64,570필지65%, 민유지 상호분쟁 34,875필지35%였다. 註6)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는 총독부 소유의 토지를 대량으로 확보하여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또한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한 지세地稅수입을 확보하여 식민지지배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1918년 「지세령」이 공포되어 지가의 2천분의 1이 지세로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와 같이 풍흉에 따라 증감되는 지세의 대납금은 사라지고 지가에 따른 화폐납이 자리 잡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과세지는 52% 증가하고, 지세징수액은 1911년 6,245,000여 원이 1920년에는 11,570,000여 원으로 약 2배나 증가했다. 註7)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되자 계획수립 당시의 예정이었던 276만여 정보, 1,378만여 필을 훨씬 넘는 487만 여 정보, 1,911만여 필의 토지가 조사되었다. 1910년 말의 경지면적과 비교하면 논은 83.8%, 밭은 79.1%가 증가하여 경지 전체로는 80.7% 증가를 보였다. 그리고 막대한 양의 국유지가 창출되었다. 사업 직후 국유지의 면적은 12만 7,331정보에 달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출자한 것까지 합하면 총 13만7,225정보2.8%에 달하였다. 1918년 동척의 소유면적은 7만176정보1.5%이고 국유지와 동척 소유 토지의 합은 1918년 현재 전체 사정면적의 4.2%를 차지하였다. 1918년 일본인 토지소유는 과세지로 환산할 경우 전체의 7.5%에 달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총독부와 일본인 지주는 조선경지의 10%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작성된 토지대장은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등기제도를 도입할 수 있게 되어 일본 자본의 입장에서는 토지거래를 확대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즉 토지의 상품화가 급격히 진행될 수 있는 여건을 등기제도가 강화시켜 주었으며 반면 제도변화에 따른 지세의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급격한 지세액 변화를 완화하기 위해 총독부는 지세액이

10원 미만인 경우 중에서 종전보다 2배 이상 납부액이 증가한 농가는 그 초과분을 3년 동안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지세 방법의 변화에 의해 1/4 이상의 농가가 이전보다 지세를 2배나 더 내는 상황이 발생하여 잉여생산이 거의 없는 영세농가의 경우는 지세부담을 견디기 힘들었다.

토지조사사업 완료 후 많은 토지가 새로 파악되어 논 84%, 밭 79%가 증가했으며, 전체 경지면적은 81%가 늘어났다. 註8) 미간지나 삼림·산야 등 민유지로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것은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편입시켰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과세대상지의 색출, 조선총독부 소유지의 증가, 그리고 소유권의 확립 등 일제의 사업실시 목적이 그대로 관철되었던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된 1918년 현재 조선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조사사업의 결과 토지소유상황은 전 농가 호수의 3.1%약 9만호에 불과한 지주가 전 경지면적의 50.4%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는 77.2%약 200만호나 되었다. 이로써 3.1%의 지주가 전체 경작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토지소유 관계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註9)

이러한 지주-소작관계는 1910~1920년대 더욱 강화되었다. 193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철폐와 농촌진흥운동 등으로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이러한 기형적인 토지소유관계는 일제 통치기간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註 1] 정재정, 「식민지수탈구조의구축」, 『한국사』 47, 국사편찬위원회, 2001, 52쪽. ☞

[註 2] 조선총독부, 『朝鮮土地調査事業報告書』, 1918. ☞

[註 3] 조선총독부, 『朝鮮法令輯覽』 上, 1941. ☞

[註 4] 조선총독부, 『도지사회의속기록』, 1919, 6쪽. ☞

[註 5] 印貞植, 『朝鮮の農業機構』, 백양사, 1940, 60쪽. ☞

[註 6] 조선총독부,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 1918. ☞

[註 7] 조석곤, 「토지조사사업에있어서의근대적토지소유제도와지세제도의확립」,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5. ☞

[註 8] 강만길 엮음, 『한국자본주의의역사』, 역사비평사, 2000, 96쪽. ☞

[註 9] 小早川九郞編, 『朝鮮農業發達史』, 1959, 59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