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화폐정리사업과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 /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6. 20:00
제2장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수탈경제체제 구축
1. 토지조사사업
2. 화폐정리사업과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
3. 회사령과 일본자본의 침투

2. 화폐정리사업과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


1. 화폐정리사업

일본은 개항 이후 일본상인의 조선 내 활동이 증가하자 부산에 자본금 5만 엔의 사설 제일은행을 설립했다가 1878년에 이를 폐지하고 일본 제일은행의 지점을 설치하였다. 제일은행은 조선에서 주로 특수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그것은 조선의 세관 위탁관리, 우편환 자금의 보관 업무를 담당하는 것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에는 군용자금의 관리업무였다.

일본 제일은행은 일본의 금본위화폐 개혁과정에서 조선으로 일본화폐 공급이 어려워지자 1902년에 제일은행 부산지점권 1엔, 5엔, 10엔 화폐를 발행하였다. 제일은행권의 발행은 “한국에서 금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개항장을 비롯하여 전국에 걸쳐 제일은행권을 유통시켜 대한제국의 화폐를 무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註10)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로 제일은행 발행고가 급증하고 조선 내에서 화폐유통의 우위를 점하게 되자 제일은행 조선지점의 조선중앙은행화가 추진되었다. 러일전쟁

후 해관세를 담보로 화폐정리자금 3백만엔을 대여하는 대신 국고금 취급권을 획득하게 되자 일본 제일은행은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일제가 조선경제의 식민지화 작업으로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화폐정리사업’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세를 이용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대장성大藏省 주세국장主稅局長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으로 영입하여 조선정부의 재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1904년 9월 3일 「대한시설강령」 7개항을 시달받고 9월30일 서울에 도착, 10월 14일 재정고문으로 취임 했다. 註11)

일본의 조선화폐 정리사업은 일본과 한국의 화폐를 동일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통되던 백동화와 엽전을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여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으나, 이 과정에서 한국인은 소유한 백동화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해 도산하게 되었다. 화폐정리 이후 제일은행권이 한국에서 본위 화폐가 되었다가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자 제일은행의 업무와 은행권이 한국은행에 인계되었으며, 병합 후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개편되었다. 한국식민지화 기초작업으로 진행된 화폐정리사업은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일본측의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조선의 자본성장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註12) 한국의 화폐는 금준비제가 아닌 일본화폐 엔화圓貨에 기초한 엔본위체제였으므로 조선은행권의 통화공급은 일본은행의 수중에 있었다.


2. 식민지 금융제도의 수립과 금융기구

1906년 3월에는 「농공은행조례」를 공포하였다. 1906년 6월 먼저 서울·평양·대구·전주에 4개의 농공은행을 설립했고, 이어서 진주·광주·충주·해주·경성鏡城·공주에 6개 농공은행, 그리고 1907년에는 함흥 농공은행을 설립했다. 註13) 농공은행 설립배경은 부동산 담보금융을 통해 지방금융의 경색을 막고, 산업금융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공은행 도정관의 제정과 변경, 지점·대리점의 개폐, 주식배당 등을 탁지부로부터 인가받아야 했으며, 탁지부에서 파견한 감리관監理官이 업무를 감독했다.

농공은행 설립위원은 관·민에서 각기 절반씩 구성했는데 민간 측에서는 대개 지역의 대상인·대지주 등이었다. 또한 농공은행의 임원 역시 각 지역을 대표하는 대지주·대상인들이었다.

지방경제권의 확대에 따라 자금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금융계는 1907년 6월 충주 및 공주농공은행을 한성농공은행에 합병하여 한호농공은행으로 개편했으며, 1908년 8월에는 진주와 대구의 은행을 합하여 경상농공은행으로 개편했다. 또한 해주·평양을 합하여 평안농공은행, 경성鏡城과 함흥을 합하여 함경농공은행으로 했다. 6개의 농공은행은 1918년 6월 식산은행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의 중앙은행이 된 조선은행은 1910년대 초부터 만주지역에 지점을 설치함으로써 일본의 대륙 침략의 첨병역할을 하였다. 1936년 만주흥업은행의 설립에 따라 영업의 중심을 화북과 조선으로 옮겼으며, 이후 조선은행권 남발 등을 통해 일본의 전쟁비용을 조달함으로써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조선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은행권

발행이었다. 1911년 3월에 제정된 「조선은행법」을 보면 “조선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 제21조부터 제25조까지 은행권 발행에 관한 사항이다. 註14)

태환규정의 경우 태환대상에 금화가 포함되어 있어 금본위제 지폐인 듯하다. 이 태환규정에는 조선은행권을 일본은행권과 교환해 주면 금화와 태환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할 근거가 없다. 금본위제를 표방한 일본은행권과 교환이 이루어지므로 금환본위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은행권 자체가 1917년부터 1929년까지, 그리고 1932년 이후 계속 사실상 금과 태환되지 않는 불환지폐였으며, 1942년 관리통화제로 전환되면서 법적으로도 불환지폐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은행권은 1909년~1917년과 1930~1931년은 금환본위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머지 기간은 형식상 ‘엔환본위권’, 사실상 불환지폐였다고 할수있다. 관리통화체제로 이행하기 이전에 일본은행권이 태환지폐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행권이 사실상 불환지폐였다는 점은 식민지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금 준비 없이 그리고 일본은행권의 유출도 없이 단순한 은행권발행만을 통해 손쉽게 조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보증한도액은 한국은행에서 조선은행으로 바뀌면서 2,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보증준비발행한도의 확대와 아울러 제한외발행세의 인하는 1941년까지 발행제도 변화의 주요내용을 이룬다. 1910년대와 1935년 이후 그 조건이 대폭 완화되었다. 조선은행은 1910년대 정부대부, 국공채 매입, 공공단체 대부 등을 통해 조선총독부 재정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그에 소요되는 자금은 은행 권발행을 통해 조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1910년대에 철도·토목공사 등 식민지자본주의화를 위한 기간설비를 구축했다.

조선은행 외의 식민지 금융기관은 1906년 농공은행에서 비롯되었다. 농공은행은 “농업·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해 자본을 대부함”을 목적으로 전국 6개 도시에 설립되었다. 1906년부터 전국 주요지역에 설립된 농공은행의 목적은“농공업의 개량발달”을 위한 자금 대부였다. 註15) 그러나 1908년 말 농업자본 대출이 7.7%, 공업자본 대출이 4.4%인데 비해 상업자본 대출은 83%에 해당되어 상업자본 대출 중심, 즉 식민지경영 초기에 조선에서의 고리대적 착취와 원료약탈, 유통망 장악을 위한 자금조달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농공은행은 이후 어음할인 및 보통은행 업무도 겸임하였으며, 1912년부터는 소액 대부까지 취급하였다.

일제는 1914년 5월 「농공은행령」을 공포하여 보통은행업무와 생산물에 대한 대부 등 업무를 확장하였다. 농공은행의 점포가 철도역과 항구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은 일본인 상인을 주고객으로 확보하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註16)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의 금융자본이 확립됨에 따라 1918년 6월 「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하여 6개 농공은행을 합병하여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은 설립목적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 업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선식산은행의 금융업무는 산업공공금융 업무, 보통은행업무, 대리점업무로 나뉘는데, 이중 본연의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산업공공금융 업무는 공공단체, 공익법인, 농·상·공업 전반을 대상으로 하며, 설립 당시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30년 이내의 연부상환 또는 5년 이내의 정기상환에 의한 부동산담보 대부

-. 5년 이내 정기상환에 의한 어업권漁業權담보 대부

   -. 30년 이내의 연부상환 또는 5년 이내의 정기상환에 의한 재단財團담보 대부

-. 20명 이상의 농공업자 연대책임에 의한 무담보 정기상환 대부

-. 공공단체에 대한 1의 방법에 의한 무담보 대부

-. 금융조합·어업조합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법인에 대한 무담보 대부

-. 식산사업을 하는 회사 및 공공단체 등이 발행하는 채권 및 사채권의 응모 또는 인수 註17)


조선식산은행의 업무가 대부분 연부 및 정기상환 등에 의한 장기 대부업무라는 점에서 여러 산업 분야에 필요한 장기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주업무였다고 할수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선식산은행은 지주·자본가의 농민수탈, 식민지적 공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총독의 감독 아래 부동산 혹은 농공업을 대상으로 한 장기금융을 하고, 조선총독부와 일본대장성의 적극적인 보호와 지원 아래 보통·저축·권업·흥업은행의 역할을 담당하는 종합은행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조선식산은행은 채권을 발행하고 그 자금을 대지주, 농업경영회사, ‘산미증식계획’의 토지개량·수리조합, 금융조합연합회 등에 대부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註18)

농공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의 산업별 대출 비중 변화는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었다. 조선총독부의 1910년대 유통부문 재편, 1920~1930년대 초·중반의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중반 이후 공업화·군수공업화 추진에 발맞추어 은행도 대출의 중점을 상업·교통업에서 농업, 광공업으로 옮겨갔다. 한편 금융조합은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서 중소농민을 대상으로 한 금융업무를 담당했다. 일제는 1907년 「금융조합규칙」을 제정하여 지방금융조합을 만들었으며, 1914년 「지방금융조합령」 을 통해 지방금융조합 설립을 한층 확대하였다. 1918년 6월에는 「지방금융조합령」을 개정하여 지방 금융조합을 금융조합으로 개칭하고, 도 금융조합연합회와 도시 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註19)

금융조합은 한국민중을 장악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무이자 자금대부, 경비보조 등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금융조합은 하층 농민의 금융을 표방했지만, 조합원이 되려면 1인당 10원의 출자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농민이 가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뿐만아니라 당시 금융조합은 “소농의 구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소농의 생피를 빨아먹는 대농大農에게 흉기를 주는 상황”이라는 비유처럼, 註20) 빈농에게 자금을 융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중농 이상의 부자들에게 빈농을 괴롭힐 고리대 자금을 융통해 주고 있었다. 일제의 금융은 조선은행 →식산은행 →도금융조합연합회→ 금융조합의 체계를 갖추고 조선농민에게 고리대 조직으로 군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註 10]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 2007, 322~323쪽. ☞

[註 11] 김재순, 「露日戰爭 직후 일제의 화폐금융정책과 조선상인층의 대응」, 『한국사연구』 69, 한국사연구회, 1990, 120~121쪽. ☞

[註 12]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324~328쪽. ☞

[註 13] 高杉東峯, 『조선금융기관발달사』, 1940, 591쪽. ☞

[註 14]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4월 4일자. ☞

[註 15] 「農工銀行條例」, 칙령 13호, 1906의 제1조(朝鮮殖産銀行, 『朝鮮殖産銀行十年志』, 1928, 부록 41쪽). ☞

[註 16] 정병욱, 「일제하 조선식산은행의 산업금융에 관한 연구」, 고려대박사학위논문, 1998, 89~100쪽. ☞

[註 17] 「朝鮮殖産銀行令」, 제령 7호, 1918의 제16조(조선식산은행, 『조선식산은행십년지』). ☞

[註 18] 정병욱, 「일제하 조선식산은행의 산업금융에 관한 연구」, 112~117쪽. ☞

[註 19] 정용욱, 「1907~1918년 지방금융조합활동의 전개」, 『한국사론』 6, 서울대국사학과, 1987. ☞

[註 20] 久間健一, 『朝鮮農政の課題』, 1943, 381~38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