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종교 차별·통제정책 /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 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2. 26. 10:26

제3장 사회·문화의 통제와 식민통치


1. 종교 차별·통제정책
2. 언론탄압
3. 교통·운수·통신 지배
4. 한국사 왜곡
5. 일제의 서적 금압정책과 금서

1. 종교 차별·통제정책

1. 종교정책의 방향과 포교규칙의 제정
종교정책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가장 고심한 것 중의 하나였다. 종교행정은 1910년 10월 총독 훈령으로 공포된 ‘조선총독부 사무분장규정’에 따라 중앙에서는 내무부 지방국 지방과에서, 각도에서는 내무부 학무계에서 각각 담당토록 하였다. 이후 1912년 3월 30일 규정이 개정되면서 내무부 지방국 제1과에서, 1915년 5월 1일부터는 내무부 제1과에서 담당했다. 註1) 1910년대 종교행정을 총독부 내무부에서 담당한 사실은 종교의 교화기능보다 종교통제에 정책의 중심이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한국에는 유교·불교·천도교·대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었다. 일제는 이를 장악하기는커녕 제대로 파악조차 못한 실정이었다. 더욱이 천주교와 개신교 분야는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자칫 종교를 무단으로 억압·통제할 경우 외교문제로 비화하거나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일제는 통감부시기부터 서구 선교사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를 자신들의 정책에 동조하도록 회유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내세워 민족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헌병경찰들을 동원하여 종교계에 대한 감시와 억압을 자행하였다. 註2)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공표된 당일 사내정의寺內正毅통감이 ‘유고諭告’를 발표하면서 종교를 포함시킨 것도 사안이 매우 민감하였기 때문이었다. 註3) 사내정의는 이를 통해 “신앙의 자유는 문명국이 다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를 빙자하여 정사를 논하거나 다른 기도를 하는 것은 풍속을 해치고 안녕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처단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다만 유교·불교·기독교가 총독부의 ‘시정목적’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평등하게 포교·전도에 보호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통감이 종교에 대해 탄압과 회유정책을 실시하여 식민통치에 맞게 길들이고자 한 것이다.
이는 치안 부문에서 ‘종교취체’를 단행하고 종교단체의 활동과 선교 현황을 조사·정리하면서 법규를 통한 종교통제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일제는 종교행위를 치안문제로 규정하여 특히 한국의 신종교인 천도교天道敎·시천교侍天敎·대종교大倧敎·대동교大同敎·태극교太極敎·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공자교孔子敎·경천교敬天敎·대성종교大成宗敎등에 대해 종교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 순수한 종교로 보기 어렵다며 규제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註4)
먼저 일제는 그나마 통제가 가능하였던 불교와 유교부터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통제의 손길을 내밀었다. 1911년 6월 ‘사찰령’을 공포하여 한국불교를 총독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경학원규정’으로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을 신설하여 사회교육적인 기능만을 유지시켰다. 이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외교적인 문제로 법령을 통한 제제를 가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1년 ‘사내정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는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여 활동을 위축시켰다. 그뒤 1911년과 1915년에 ‘사립학교규칙’을 만들어 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조선포교규칙 해설

조선총독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종교를 통제하고자 한 것은 1915년 8월 ‘포교규칙’을 공포한 이후부터이다. 註5) 일제는 종교자유의 보장, 포교행위의 공인, 종교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표방하기 위해 ‘포교규칙’을 제정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기만적인 수준에 불과하였다. ‘포교규칙’의 핵심은 종교자유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종교를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종교 공인정책이었지만, 종교 자유의 원칙과 종교 공인정책은 상호 모순되므로 이 법령은 종교자유를 제약하고 통제를 단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포교규칙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註6)

제1조 :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神道나 불도佛道 및 기독교를 일컫는다.
제15조 : 조선총독은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종교와 유사한 단체로 인정되는 것에 본령을 준용할 수도 있다. 전항에 의하여 본령을 준용하는 단체는 이를 고시告示한다.

이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파신도와 불교·기독교 등에 한해서만 공인종교로 인정하고 포교자는 자격 및 이력서를 갖춰 조선총독에게 신고토록 하였다. 포교행위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또한 종교용도로 쓰기 위한 교회당·설교소·강의소 등을 설립·변경할 때도 총독의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벌금 또는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규정하였다. 필요한 경우에는 ‘유사종교단체’에도 ‘포교규칙’을 준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포교규칙’은 사실상 종교자유를 침해하고자 만든 악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관공리, 특히 헌병경찰을 통해 신자 개개인의 신앙의 자유까지 간섭·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1912년 3월에 공포한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단체 가입을 강청하는 자”,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또는 불온문서·도화·시가의 게시·반포, 낭독 또는 방음을 하는 자”, “함부로 길흉화복을 말하고 또는 기도·부주符呪 등을 하고 혹은 수찰류守札類를 수여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는 자”, “병자에 대하여 금염禁厭·기도·부주 또는 정신요법 등을 실시하고 또는 신부神符·신수神水 등을 주어 치료를 방해하는 자” 등에 대하여 구류 또는 과료科料에 처하도록 하였다. 註7) 이는 적용하기 따라서는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었다.

2. 불교와 사찰령
조선총독부가 가장 먼저 종교 통제에 나선 것은 불교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불교계 통합·정비·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6월 ‘사찰령’ 註8)과 같은해 7월 ‘사찰령시행규칙’ 註9)을 공포하여, 조선총독이 직접 조선불교를 통제 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식민통치기간 내내 몇 차례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지만 그 골격은 유지되었다.
‘사찰령’ 제1조에서는 사찰의 병합과 이전에 관한 사항만을 규정하여 새로운 사찰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2조는 사찰을 전법·포교·법요 집행 및 승려의 거주 목적 이외에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불교신자들이 사찰에 머물며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지방장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사찰에 은신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 제3조는 각 본사에서 사법寺法을 정하여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제5조에서는 사찰 재산을 매각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명시하여 불교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제7조는 사찰령에 명시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조선총독은 임의로 법을 제정하여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계는 어떠한 경우라도 조선총독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사찰령시행규칙’을 보면, 제1조는 주지를 정하는 방법, 주지의 교체 절차 및 임기 중 사망하거나 기타 사고를 당했을 경우 사법에 사무寺務 취급방법을 명시하였고, 제2조는 전 조선의 사찰 1,300여 개 가운데 거찰巨刹 30개를 본사로 지정하였다. 이에 나머지 사찰들은 소속 지역의 본사에 배속되어 말사末寺가 되었다. 말사는 주지 임면부터 제반 사항에 대해 본사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본사 주지는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취임할 수 있었고,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불교의 재정권과 더불어 인사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제3~6조는 주지의 자격과 임기·면직 사유 등을, 제7조에서는 사찰에 소속된 토지·삼림·건물·불상 등 재산과 기타 귀중품 목록을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조선불교의 전통적인 자율성을 말살하고 강력한 통제와 전제적 지배권을 확립하여, 註10) 불교를 식민지 교화기구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조선불교는 일본 신도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임으로써 크게 변질되고 말았다. 註11)

3. 성균관 폐지와 경학원 설치 註12)
강제병합 후 일제는 유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유교는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정치·사회·문화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해 왔고 한국인들에게 윤리 도덕의 기초가 되었다. 더욱이 양반 유림들은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또한 중앙 정치권력을 장악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들을 포섭하지 않고서는 식민정책을 펼쳐나가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한말 유림들이 앞장서서 의병운동을 전개해 나가자 이들의 반일의식을 희석시켜 친일화를 기도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친일관료를 동원하여 1907년 3월에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조직하였으며, 註13) 1909년 10월에는 이를 ‘공자교’로 개칭하여 조선의 친일유림들을 끌어들였다. 註14) 당시 이등박문伊藤博文통감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공자교는 친일유림을 동원하여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월보를 간행하는 한편 전문학교 운영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註15)
1910년 8월 강제병합 후 일제는 ‘교육칙어’를 통해 한국인을 충량한 신민臣民으로 만들고자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는 한편, 유림의 친일화를
통해 반일의식을 희석시키고 그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일제는 ‘덕치정치’를 내세우고 ‘은혜’를 베푼다는 구실로 유력한 양반 유생들을 회유하기 위해 12,115명에 대하여 ‘상치은금尙齒恩金’이라는 명목으로 30만원을 교부하였고, 조선귀족 76인에게 후작6인·백작3인·자작22인·남작45인의 작위와 함께 註16) ‘합방은사금’을 지급하였다.
특히 일제는 성균관과 향교를 조선총독부 체제에 맞게 재편시켜 식민지통치의 기관으로 변질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사사로이 행해지는 문묘제례를 일체 허가하지 않았으며, 註17) 경학원과 향교를 총독의 직접 감독 아래 조선 전통 유교의 진흥이란 명목을 내세워 식민지 사회교화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을 봉건적 유교로 긴박시키고 일제에 저항하는 반일유학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성균관을 없애고 경학원을 설립했다.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아 경학을 강구하며 문묘를 제사하며 풍교덕화風敎德化를 비보裨補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며, 註18) 유림을 우대하며 미풍을 장려하고자 하였다. 註19) 즉 일제는 유학 정신을 이용하여 일제에 충忠을 강요하고 경학원을 중심으로 친일유림을 집단화하여 이들을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필요한 교화와 선전의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 註20)
일제는 대제학 이하 부제학·제주祭酒·사성司成·직원直員 등을 비롯하여 註21) 13도 강사들을 선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선발하면서 “조선총독은 각도에서 학식덕망이 있는 자를 선발”하고 “재덕才德 겸비자를 뽑아 직원에 충당”하였다고 선전했다. 총독은 이들을 수시로 초대하여 다과향응을 베풀며 교화사업에 전념하라는 훈시와 함께 총독부의 시정 의도를 전달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천황폐하’에 충성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직원들에게 경학원 설립의 목적과 취지를 천명하면서 ‘천황국가’에 공헌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註22)
경학원 직원은 ‘천황폐하봉도식예배전’·‘황태후폐하대상의요배식’·‘명치천황일주년제’·‘천황즉위대례식’ 등 일본 왕실의 모든 추도식, 애도식에 참석해야 했다. 대례식에는 대제학이 일본까지 출장가서 참석하였으며 왕실의 경사에는 송문頌文을, 상제喪祭에는 조문을 지어 바쳐야만 했다. 지방순회 강사들은 총독으로부터 총독부의 신시정新施政의 취지를 주지시키는데 노력해 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註23) 또한 학무국장은 그들에게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이 결코 경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시키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에 지방향교와 보통학교에서 이뤄지는 경학강연 이외에 총독통치에 관한 선전강연이 이어지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 유림들의 정황을 시찰, 보고하였고 지방의 향교와 학교 상황을 총독부에 보고하는 염탐군의 역할과 함께 각군의 향교직원들에게는 총독부의 고시문과 포유문을 전달하여 각 지방의 유림계에 통포通布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註24) 한편 경학원의 부제학 이하 사성과 직원들은 각지에 출장하여 강연을 하는 한편 강사들의 순회강연 상황을 시찰·보고하였다.
경학원 강사들과 직원들에게는 수당이 지급되었다. 註25)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정식 수당 외에 일신상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경학원 직원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여 이들을 회유하였다. 강사의 임기는 초기에는 규정되
지 않아 사망하거나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계속할 수 있었다. 註26) 1911년 7월 31일자로 처음 임명된 경학원 직원의 명단은 〈표 2〉과 같다. 이들은 경학원 설립 공로자나 친일관료 출신자로서 구성되어 있다.

〈표 2〉경학원 직원 명단
직 책이 름(작위)임 기비 고
대제학박제순(자작)1911. 7~1916. 6사망으로 면직
김윤식(자작)1916. 7~1919. 7 
부제학이용직(자작)1911. 7~1919. 7독립청원으로 면직
박제빈(남작)1911. 7~1921. 9 
사 성김유제(성균관장)1911. 7~1914. 10사망으로 면직
이인직(대한신문사장)1911. 7~1916. 11 
박치상1914. 10~1918. 3 
정윤수1917. 1~1921. 4 
김완진(군수)1918. 6~ 
박치상1911. 9~1914. 10 
직 원이대영(용산감리서주사)1911. 9~1921. 7사성으로 승진
정철영(내각주사)1911. 9~ 
박시양(공립보통학교대용교원)1915. 3~ 
 

경학원은 일왕의 보조금 25만원, 본래 성균관 재산인 건물 39동과 부지 16,000여 평에서 나오는 수입금 13,000여 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예산 6,000여 원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註27) 일제는 경학원을 운영한지 2년이 지난 1913년 3월에 ‘경학원의 원무에 관한 건’ 註28)을 발포하여 한국의 유학단체와 유학자들이 소회분립小會分立한다고 비판하며 조선의 유학을 통일하여 경학원을 중축으로 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유학의 총본부로 내세웠다.
경학원은 교육기능보다는 교화기능에 치중하였다. 경학원의 주된 사업은 직원·강사를 선발하여 이들로 하여금 춘추에 걸쳐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도록 하고 강연회를 통해 유림과 일반 인민들에게 조선총독부의 신정 취지를 주지시키며 이들을 교화하는 일이었다. 또한 『경학원잡지』도 발간·배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은 사업을 진행하면서 경학원에 참여하지 않은 유림들을 비판하였고, 註29) 경학원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이들을 ‘각성’한 유림들이라 하여 우대하였다.
경학원의 대표적인 사업은 석전제 시행, 강연회 개최, 기관지 간행 등 세 가지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학원은 석전제를 시행하였다. 석전제란 예전부터 성균관과 지방향교에서 연중 춘기 음력 2월 초정일初丁日과 추기 음력 8월 초정일初丁日에 걸쳐 공자 및 성현들을 제사한 의식이다. 경학원 설치 당시 석전제는 오전 10시부터 거행하다가 1915년 추계석전 때 행사가 끝난 후 강연회를 열기로 한 후부터는 오전 9시부터 거행되었다. 註30) 석전제는 총독의 지휘를 받아 경학원 대제학이 집전하였다. 註31) 석전제전에는 조선총독을 비롯한 정무총감·학무국장·경기도지사·경성부윤과 고등관 이상의 총독부 관리들이 참배하였고 경학원 대제학과 직원들은 물론 지방의 13도 강사와 일반 유림들이 참가했다. 또한 1921년 이후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유도대동회儒道大東會 등 친일 유림단체 회원들과 심지어는 일본의 동경사문회東京斯文會 대표들도 참가하였다. 註32) 뿐만 아니라 경성 소재 관공립학교의 남녀 학생 1,000~2,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한편 석전제는 지방 문묘나 향교에서도 경학원에서와 같이 춘추 2회로 행하였다. 지방 석전제에는 도장관·부윤·군수·군청관리이 참석하였는데, 3·1운동 이후에는 경찰서원·헌병대원들까지 동원되었다. 이외에 향교직원들과 중학교·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들을 비롯한 학교직원과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때 군수가 초헌관初獻官이 되어 석전제를 주도하거나 註33) 석전제문을 낭독하였고, 경찰서장이 성훈봉답문聖訓奉答文을 낭독하는 등 석전행사에 조선의 유림들보다는 일본인 관리들이 석전행사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註34) 조선총독부가 경학원과 향교에서 석전을 성대하게 치른 것은 유생들의 환심 얻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註35)
두번째로 경학원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유생들은 자강自講할 뿐이지 일반에게 포급布及하지 않고 형식에만 흘러 세상에 나와 그 도道를 행하는 자가 희박하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일제는 “유덕有德한 강사를 선발하여 각도에 배치하고 형식적 강학의 폐해를 피하고 오로지 정신적 강수講授”에 힘을 쏟겠다며 註36) 1912년 3월 대제학의 추천을 받아 경성과 13도에 강사를 임명하였다. 13도 강사의 명단은 〈표 3〉과 같다.
13도 강사들은 일방적으로 임명하고 추후 승인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註37) 이는 임명자 가운데 곽종석·박은식·박동흠·김광현·박용흠·한회선·이희석 등은 스스로 직을 사임의원면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정확한 사퇴사정은 잘 알 수 없으나 곽종석은 영남유림의 태두로서 조선총독부 유교정책에 찬동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박은식은 이미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고 난 후였기 때문에 강사로 임명받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표 3〉13도 강사 명단
지 역이 름(작위 혹 전직)기 간비 고
경성여규형(경성고등보통학교교유1912. 2~1921. 8사망으로 면직
경기황돈수(양성군향교직원)1912. 2~1921. 4.
충북송병순1912. 3.
한창우(장릉참봉)1912. 10~
충남성낙현(성균관박사)1912. 3~
전북김동진(무주군지방위원)1912. 3~
전남조협승(내부시찰관)1912. 3~1913. 9
정봉현1913. 12~1918. 11
심선택(성균관박사)1920. 3~
경북박승동1912. 3~1922. 5
경남곽종석1912. 3~1912. 9의면
손경현(규장각부제학)1912. 9~1915. 10
정준민(시종원부경)1915. 10~
강원정봉시1912. 3~1929. 9부제학으로 승진
황해오헌영(해주군향교직원)1912. 3~1925. 8사망으로 면직
평남박은식(한성사범학교교관)1912. 3~1912. 9의면
박동흠(규장각직각)1912. 9~1913. 3
김광현(비서원승)1913. 3~1920. 11
황업(평안남도참사)1920. 11~1923. 7사망으로 면직
평북박용흠1912. 3~1912. 10의면
양봉제(군수)1912. 10~1926. 12사망으로 면직
함남한회선1912. 3~1913. 1의면
박장홍1913. 1~1920. 4사망으로 면직
이기헌(함경남도관찰부주사)1920. 6~1922. 5
이희석(중추원외랑)1912. 3~1913. 2의면
함북이학재1913. 2~920. 2.사망으로 면직
신태악(함경북도참사)1920. 7~1927. 3
 
 
강사들은 1913년 4월 총독훈시에 따라 경학원에서는 매월 둘째주 토요일을 강연회 일자로 잡아 주로 명륜당에서 월차 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경학원의 부제학·사성 이하 직원들이 출장하여 순회강연을 하거나 각도에서 선발된 13도 강사들이 해당 지방 도내를 순회하며 강연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1913년에 ‘경학원 강사 순강巡講에 관한 건’을 마련하여 매년 춘추 2기 석전제를 행한 후 순회 강연을 하도록 하였다. 경학원 대제학 이하 직원들이 지방순강할 때는 일정을 정하여 도장관과 경무부장에게 신고하면 이에 따른 편의를 제공하도록 각 지방에 통첩하였다. 註38) 경학원직원 출장 강연은 주로 부제학이 사성 등의 직원들을 인솔하였고 지방향교에서 일반 양반유생을 동원하여 강연했다. 註39) 조선총독부에서는 지방순회 강연의 효과를 높인다며 1915년 10월 ‘경학원 강연시행에 관한 요항’을 발포하여 강연회가 끝난 후에는 강연자의 제목과 청강자수, 강연 상황을 보고토록 하였다. 다만 경학원 강연은 대제학이 조선총독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방강연 시에는 출장 강연을 나간 부제학·사성·강사가 지방장관이나 대제학을 거쳐 총독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註40)
1915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유교정책을 식민지교육과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1915년 9월 추계석전 이후부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교육의 기본 정신과 방향을 제시한 ‘교육에 관한 칙어’를 경학원에 두도록 하고, ‘교육칙어를 봉독케 할 사’라고 강연규정을 개정하여 매 강연회 개최할 때마다 반드시 먼저 이를 봉독케 했다. 또한 강사의 지방 순강강령도 제정하여 註41) 향교 또는 군청·학교·면역소 등에서 강연회를 개최할 때에도 반드시 이를 봉독하도록 하였다. 註42)
1915년 이후 일제는 보통강연회를 통해 한국인들의 교화를 꾀하였다. 처음 경학원에서는 경학에 관련된 강연회만을 개최했다. 1915년 9월 추계석전제 이후부터 경학강연이 끝난 뒤에 보통강연회도 열리기 시작하였다. 경학강연은 주로 부제학인 이용직이 논어·맹자·중용·대학 등 사서를 중심으로 강연을 하였지만, 보통강연은 주로 경학원 직원이나 총독부 고위 관료·교장·교유들이 강연자로 나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교육의 취지를 설명하거나 사회교화시책에 부응하는 내용을 주로 강연하였다. 註43) 경학원의 강연 연사 및 연설 제목을 〈표 4〉로 정리했다.

표 4〉경학원 보통강연회 연사 및 강연 제목
강연회수강연자강연제목
14회(1915. 9. 13)총독부 기사중촌언中村彦 
이완용
조선농업시설에 관한 설 
신학구학新學舊學에 관한 강화
15회(1916.10. 17)경성고등보통학교 
교유
고교형高橋亨 
이완용
유교의 근본의根本義 
부연敷演
16회(1916. 3. 11)총독부 의원 의관삼안연길森安連吉건강과 위생
17회(1916. 4. 8)총독부학무국편수관입병효준立柄效俊이궁존덕옹二宮尊德翁의 보덕교報德敎요지
18회(1916. 5. 13)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장태전수수太田秀穗이궁존덕옹二宮尊德翁의 인물 및 도덕
19회(1916. 6. 10)총독부 촉탁촌상유길村上唯吉입신치부지요결立身致富之要決
20회(1916. 9. 7)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금진명今津明조선의 화학공업
21회(1917. 2. 24)경성공업전문학교장풍영진리豊永眞里이용후생
22회(1917. 4. 14)경성전수학교장오손자승吾孫子勝법률과 도덕
23회(1917. 5. 12)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우야삼랑宇野三郎조선공업의 촉진
24회(1917. 6. 16) 조중응금일 조선유교인의 자각처自覺處
25회(1917. 9. 22)총독부 관립학교 
촉탁
대규식야大槻式也양생법養生法에 취하야
26회(1917.11. 10)총독부학무국편수관입병효준立柄效俊국민도덕은 하야何也
27회(1918. 3. 21)총독부 관측소장평전덕태랑平田德太郎조선 기상氣象에 대하야
28회(1918. 5. 11)총독부 촉탁금관수마내지의 송학宋學
29회(1918. 6. 8)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편산片山화학과 인생
30회(1918. 9. 7)총독부 촉탁금관수마양한경학兩漢經學의 성쇠와 청학淸學
31회(1918. 10. 12)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중촌일위中村一衛보통교육에 재한 한문과의 임무
32회(1918. 11. 16)총독부 촉탁이등등태랑伊藤藤太郎근검저축

지방에서는 문묘석전제가 끝난 후 부윤·교장 등이 강사가 되어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회에는 부윤·도장관·도참여관·군수·면장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양반 유생들을 동원하여 시세와 시정에 관한 요지를 주지시키는 관제 강연회의 형태를 띠었다. 註44)
경학원 직원과 13도 강사에 의해 이뤄진 지방강연회에서는 유교경전 강연과 함께 한국의 유학을 일본유교와 비교하면서 은근히 한국 유학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한국유학의 폐해를 언급하며 충효인의忠孝仁義의 윤리, 도덕의 유교정신을 식민지통치에 적절히 이용하고자 하였다. 즉 일제는 유교를 교화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여 신분·계급질서를 지키고 자신의 분수에 맞게 본분을 지키고 조선시기의 순종과 충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약화시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식과 행동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강연회장은 일왕과 총독의 뜻을 전달하는 선전장으로써도 이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9월 ‘경학원 강연개량에 관한 건’ 註45)을 공포하여 경학원 강사들이 지방순회강연을 할 때에 대제학이 지방장관과 협의하여 강연일정을 정하도록 하였다. 이후 강사강연 외에 도·부·군청 관리와 더불어 관공립 학교직원들도 강연에 동원되었다. 이는 평소 지방에 칩거한 양반유생들을 경학강연에 동원시키고자 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식민지교육·권업·기타 신정의 취지와 시무에 관한 정책을 선전하곤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민풍개량·근검저축 장려 등 사회교화사업에 대한 선정과 아울러 총독의 훈시 및 새로 제정된 총독령 반포 등을 선전하곤 하였다. 註46)
세번째로 『경학원잡지』를 간행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3년 5월 ‘경학원잡지 편찬에 관한 요항’을 발포한 후, 1913년 12월에 『경학원잡지』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잡지는 3·6·9·12월에 1,000부 정도 비매품으로 발행하였다. 註47) 배포대상은 경학원 직원과 각도의 장관과 참여관 및 부·군수, 그리고 각 군의 향교 직원, 기타 대제학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유림인물들이었다. 註48) 창간 당시 편집장은 여규형呂圭亨, 편찬주임 이인직李人稙, 註49) 편찬위원 박치상朴稚祥·이종식李種植, 註50) 사무원 이대영李大榮·정철영鄭喆永, 고문은 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편집과장 소전성오小田省吾와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인 태전수혜太田秀穗, 그리고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장인 고교형高橋亨과 한국인 여규형·정봉시鄭鳳時·정만조鄭萬朝·윤희구尹喜求·이상영李商永 등이었다. 註51)
『경학원잡지』에는 경학에 관한 논설, 경학강연의 필기, 강사와 기타의 고문稿文과 석전제 후 거행된 강연회에서의 강연과 13도 강사들의 지방순회 강연 원문, 일본인 유학자들의 논설, 신문과 서적의 번역, 총독의 유고 및 총독부 신정취지新政趣旨, 필요한 법령, 강사의 지방 보고문, 시문 등이 게재되었다. 『경학원잡지』는 편찬 20일 전에 대제학의 열람을 거쳐 학무국의 검열을 받아야만 하였다.

4. 기독교와 사립학교규칙
일제는 통감부시기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종교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며 회유하곤 하였다. 일제는 기독교 국가인 서구 열강의 적극적인 지지아래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한 후 일제는 태도를 바꾸어 기독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는 천주교 기관지였던 『경향신문』에 종교적인 내용으로만 신문을 발행토록 통보하는 한편, 같은해 12월에는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폐지하는 동시에 신문의 사전검열제를 실시하였다. 천주교회는 이를 거부하고 1910년 12월 30일자 제220호를 발간하였다가 폐간당하고 말았다. 註52)
이어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같은 해 10월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註53) ‘사립학교규칙’의 목적은 사립학교를 설립할 경우에는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여, 민간인이 설립한 학교는 물론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학교까지도 규제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기독교를 규제하는 간접 법령으로 기능하였다. 1911년 7월 사내정의는 각도 장관 회의석상에서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의 불온한 교육태도를 지적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할 것을 지시했다. 註54)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을 통해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내세웠지만, 여전히 기독교계 학교를 통제하기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일제는 더
욱 강경한 방법을 채택하였다.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서 종교교육과 의식을 완전히 금지시키기 위해 선교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육분야에서 물러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어 1915년 3월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였다. 註55)이에 따르면, 1911년 10월에 제정한 것을 개악한 것으로 개정 목적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교수 용어도 일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교사직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다. 즉 기독교 교육이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식민지교육과 배치되므로 이를 통해 사립학교와 기독교를 탄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관옥정삼랑關屋貞三郞이 ‘개정의 2대 요점’은 종교·교육의 분리와 교원 자격의 강화라고 밝힌데서도 드러난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교육을 독점하고 교원도 일본어에 능하고 식민지교육 실시에 적합한 인물로 교원을 삼아 동화교육을 철저히 이행하고자 한 것으로 이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탄압을 가하여 선교사의 교사 자격을 박탈하고자 한 것이었다. 註56)
한편 개정된 규칙에는 교사 자격 기준강화 및 전문사립학교 설립에 대한 재단법인 규정, 고등보통학교로의 명의 변경 등이 포함되었다. 상급학교의 입학자격을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가를 받지 못할 경우 교회 학교들은 정규교육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고등보통학교로 승인받지 못한 학교는 무자격 학교로 되어 학생들의 진학 자격이 인정되지 않았고, 취직에도 불이익이 따랐던 것이다.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에 이어 공포된 개정사립학교규칙은 더욱 강화된 기독교 규제법령이었다.

5. 신도와 신사사원규칙
조선총독부는 일반 종교를 억압·통제한 것과 달리 신사·신도 만큼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법령을 정비하여 국교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지원·장려하였다. 일제는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위임통치 등으로 통치권을 강탈한 뒤에는 그 지역에 ‘관폐대사官幣大社’를 설치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일본 거류민들이 세운 신사를 그 밑에 두고 현지인의 토속신앙을 교화하는 ‘종교적 지배체제의 정비’를 도모했다. 조선총독부도 관립신사 건립계획을 세우고 1912년부터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다. 이에 경성의 남산 중턱에 20만 평 부지를 조성하여 신사를 건립하기로 하고, 제신은 일본 천황가의 시조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으로 정하였다. 1918년 일본 각의의 결의를 거쳐 1919년 7월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공포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관공립 신사는 물론 민간 신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신사사원규칙’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과 기존 신사들도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여 신사에 관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註57) 조선총독부는 1917년 3월 ‘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신사神社로 공인받지 못한 소규모 집단의 소사小社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註58)
이와 함께 일본의 교파신도敎派神道도 일찍부터 한국에 침투했다. 註59) 일본 교파신도 가운데 하나인 천리교天理敎는 1893년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하였고, 신리교神理敎도 1897년경부터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통감부시기에는 금광교金光敎·대사교大社敎 등이 통감부의 보호를 받으며 차례로 포교를 개시했다. 이들 교파신도 가운데 천리교가 가장 세력이 있었는데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에는 부산·서울 이외에도 대전·대구 등 전국적으로 교선敎線을 확대하고, 부산에 있던 한국포교관리소를 서울로 옮겨 조선포교관리소로 개칭하는 등 한국인에게까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폈다. 그러나 교파신도는 치병治病을 위한 기복적 기도 등을 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식계층의 소수 한국인 신자를 얻었을 뿐, 일본적 분위기가 강하여 한국인에게 적극적으로 침투되지는 못했다. 註60) 때문에 교파신도의 한국인 신자수 증가가 ‘일선동화日鮮同化’의 지표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즉 한말 학부 참여관으로 활동했던 폐원탄幣原坦은 “근년에 내선인의 융화를 증명하는 하나의 새로운 사실은 신도의 신자가 조선인 중에 나왔다는 것이다. 즉 1911년 말에는 약 5,000인을 헤아렸고, 1916년 말에는 8,500인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註61)
교파신도는 1915년 포교규칙에서 불교·기독교와 함께 공인종교로 인정되어 총독부의 보호를 받아가며 한국인 신자 획득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교파신도의 총신자 수가 증가했음에도 한국인 신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민족적 자각으로 교파신도에서 떠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3·1운동 이후 일제는 운동의 주동세력으로 인식된 기독교·천도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불교·일본조합교회 등과 함께 천리교와 같은 교파신도의 보호·육성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註62)

6. 신종교단체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은 서구인·한국인 관할 종교로 구분하고, 한국인 관할 종교를 다시 기성종교와 신종교로 구분하여 추진되었다. 일제는 기성종교 못지않게 한국의 신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간섭했다. 註63) 신종교 중에는 하층부, 즉 민중세력의 항일독립운동을 촉발시킬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단체들이 많았다. 한국이 후천개벽의 새시대에는 세계를 주도하는 중심국가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자존심을 높이고 자주의식을 고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종교의 신도나 추종자들이 거의 대부분 과거의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던 이들로 구성된 것도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註64)일제가 한국의 신종교 중 특히 관심을 집중한 종교단체는 민족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 단체들이었다.
‘한일합병’ 당시 신종교의 교세를 보면, 동학계인 천도교 112, 767명, 시천교 7,063명, 상제교 5,585명이고, 증산계인 보천교 277명, 불교·숭신계인 대종교大倧敎 66명, 칠성교 6명, 유교계인 태극교 3,896명, 대종교大宗敎 70명 등 129,542명이었다. 註65) 당시 불교·개신교·천주교의 교세와 비교하여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註66)
1915년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신도·불교·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그 외의 종교들은 ‘유사종교’ 혹은 ‘비종교’로 분류하여 종교라는 보호구역에서 배제하였다. 다만 규칙 제15조에서 “유사종교단체로 인정되는 단체는 본령을 준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지만, “본령을 준용한 단체는 별도로 고시한다”는 단서를 달아 어용하는 종교단체만을 인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포교규칙’에서 공식종교로 규정되지 못한 천도교·보천교·시천교 등 한국의 신종교는 통감부시기에 공포한 ‘보안법1907년 9월’과 ‘집회취체에 관한 건1910년 8월’ 적용을 받게 되었고, 註67) 경찰의 강력한 단속대상이 되었다. 신종교 중 일제가 가장 주목한 단체는 천도교와 대종교였다.
천도교는 1910년 신자 수 100만 명에 이르는 대종단으로 교세가 막강하였다. 註68) 천도교는 ‘한일합병’후 국권회복을 위한 직접적인 항일운동보다는 장기적인 민족교육과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1911년 3월에는 전국 교구에 825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일반을 교육에 주력하였다. 또한 1914년 12월 동덕여학교 외에 7~8개 학교를 운영하며 포교와 교육활동을 펼쳤다. 대종교는 만주지역에서 교세가 확장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내의 대종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였다.
한편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일제당국과 직접 부딪친 신종교는 증산교였다. 증산교는 강증산에 비롯되었으나, 1911년 그의 뒤를 이은 부인 고판례高判禮와 차경석에 의해 다시 교단이 조직되었다. 차경석은 일명 태을교를 창시하여 교세를 넓혀 실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18년 10월에는 제주도의 신자가 교금敎金 10여 만 원을 몰래 가지고 나오다가 목포의 일본 경찰에 검거되면서 신자들이 대거 검거되기도 했다. 註69)
1910년대 한국의 신종교는 ‘포교규칙’에 의해 종교로 인정받지 못해 포교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천도교와 대종교를 중심으로 포교활동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유사종교로 분류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다. 註70)

[註 1]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0월 1일, 1912년 3월 30일, 1915년 5월 1일. ☞
[註 2] 김승태, 『일제의 식민지종교정책과 한국기독교계의 대응 1931-1945』,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학위논문, 2006, 20쪽. ☞
[註 3]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8월 29일. ☞
[註 4]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연보』, 1911, 77쪽. ☞
[註 5]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연보』, 1915, 66~67쪽. ☞
[註 6]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8월 16일. ☞
[註 7]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3월 25일. ☞
[註 8]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6월 3일. ☞
[註 9]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7월 8일. ☞
[註 10] 李鴻範, 「韓國で行なわれた日本の植民地宗敎政策」, 『新羅佛敎硏究』, 山喜房佛書林, 1973, 681~683쪽. ☞
[註 11] 김순석,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2004, 경인문화사, 50~51쪽. ☞
[註 12] 이명화,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1910∼1920년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경학원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36,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005 ; 정일균,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학원」, 『사회와 역사』 76, 한국사회사학회, 2007 ; 정욱재, 「1910~1920년대 경학원의 인적 구성과 역할-사성과 강사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10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7 참고. ☞
[註 13] 유준기, 「1910년대 일제의 유림친일화정책-대동교와 공자교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3, 199쪽. ☞
[註 14] 유준기, 「1910년대 일제의 유림친일화정책-대동교와 공자교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 204쪽. ☞
[註 15] 신용하, 「박은식의 유교구신논·양명학논·대동사상」, 『역사학보』 73, 역사학회, 1977 참고. ☞
[註 16] 中村進吾, 『朝鮮施政發展史』, 1936, 103∼104쪽. ☞
[註 17] 『동아일보』 1923년 7월 30일 「孔子廟의 私設은 절대로 허가하지 안는다」. ☞
[註 18]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6월 15일. ☞
[註 19] 조선총독부훈령 65호. ☞
[註 20] 이명화,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1910∼1920년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92쪽. ☞
[註 21] 경학원규정 제5조. ☞
[註 22] 총독부훈령 제13호, 1913. ☞
[註 23] 『경학원잡지』 7, 1915, 65쪽. ☞
[註 24] 『경학원잡지』 5, 1914, 59쪽. ☞
[註 25] 경학원규정 제10∼12조 및 총령 제73호(1911. 6). ☞
[註 26] 강사의 임기가 정해진 것은 1940년 11월 12일로 부령 제240호에 의해 3년으로 정해졌으며 만기 및 임기 중이라 할지라도 교체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
[註 27] 조선총독부 학무국, 『朝鮮敎育要覽』, 1926. ☞
[註 28]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3월 17일. ☞
[註 29] 일제는 천황이 25만원을 하사한 ‘聖意’와 경학원을 신설한 취지를 ‘違越’하는 儒者가 있으면, 이는 ‘명치천황의 죄인이오, 공자의 죄인이오, 우리 조선민족의 죄인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들을 비난하였다(『매일신보』 1917년 2월 24일 「聖廟大祀」). ☞
[註 30] 『경학원잡지』 9, 1915, 38쪽. ☞
[註 31] 경학원규정 제4조. ☞
[註 32] 『경학원잡지』 22, 1921, 57쪽 ; 『동아일보』 1922년 5월 8일자. ☞
[註 33] 1921년 개성군 문묘의 추기석전대제에 개성군 군수인 일본인 山崎三郎이 초헌관이 되어 석전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21년 9월 15일자). ☞
[註 34] 『경학원잡지』 22, 1921, 81쪽. ☞
[註 35] 『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 「향교재산관리규정개정에 대하야」. ☞
[註 36] 『매일신보』 1914년 3월 11일 「經學의 本旨」. ☞
[註 37] 이명화,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1910∼1920년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102쪽. ☞
[註 38] 『경학원잡지』 1, 1913, 58쪽. ☞
[註 39] 『매일신보』 1917년 9월 2일자. ☞
[註 40] 『경학원잡지』 9, 1915, 51쪽. ☞
[註 41] 『경학원잡지』 11, 1916, 82쪽. ☞
[註 42] 『경학원잡지』 9, 1915, 47∼48쪽. ☞
[註 43] 『경학원잡지』 매호, 「日誌大要欄」 참조. ☞
[註 44] 『매일신보』 1913년 3월 25일자. ☞
[註 45] 『경학원잡지』 19, 1918, 32~34쪽. ☞
[註 46] 『경학원잡지』 5, 1914, 59쪽. ☞
[註 47] 1920년대로 들어오면서 동 잡지는 20호부터 1년에 한번 발간되었다. ☞
[註 48] 경학원잡지편찬요항. ☞
[註 49] 이인직의 사망으로 1916년 12월 9일자 박치상이 편찬주임 임명됨. ☞
[註 50] 이종직의 해면으로 1917년 2월 6일자로 정윤수가 편찬위원 임명되었다. ☞
[註 51] 吉川文太郎, 『朝鮮諸宗敎』, 조선흥문회, 1922, 86쪽. ☞
[註 52] 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국학자료원, 2002, 19~20쪽. ☞
[註 53]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10월 20일 호외. ☞
[註 54] 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21쪽. ☞
[註 55]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3월 24일. ☞
[註 56] 『조선휘보』 4월호, 1915, 22~27쪽. ☞
[註 57]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8월 16일. ☞
[註 58] 『조선총독부관보』 1917년 3월 22일. ☞
[註 59] 敎派神道란 國家神道體制下의 神道系 민간 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13개 교파신도가 있다. 메이지 초기의 神道國敎化 정책이 국내외의 저항에 부딪혀 여의치 않게 되자 메이지 정부는 神社神道를 超宗敎의 국가제사로 삼고, 神道系 민간 종교를 敎派神道(宗派神道 또는 宗敎神道라고도 한다)로 편성하여 불교·기독교와 함께 국가신도에 종속된 공인 종교로 하였다. 이렇게 공인된 교파신도로는 神道·黑住敎·大社敎·扶桑敎·神道修成派·實行敎·大成敎·神習敎·御嶽敎·神理敎·禊敎·金光敎·天理敎 등이 있다. ☞
[註 60] 大藏省 管理局, 『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4(朝鮮編), 1947, 65쪽. ☞
[註 61] 幣原坦, 『朝鮮敎育論』, 1919, 91쪽. ☞
[註 62] 조선군 참모부, 朝特報 26호 「騷擾의 原因 및 朝鮮統治上 注意할 件」, 1919년 7월 24일 ;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2)』, 208쪽. ☞
[註 63] 그동안 한국에서 창립된 종교를 부르는 명칭을 나누어보면, 유사종교(사이비종교·사교·미신종교), 신흥종교(민족종교·민족적 종교·한국자생종교·보국종교·국산종교), 신종교(새종교·민중종교)로 구분할 수 있다. 신종교라는 용어는 1930년대 이능화가 저술한 『朝鮮道敎史』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한국학계에서 점차 사용하기 시작하여 ‘한국종교의 명칭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44~45쪽). ☞
[註 64] 한승조, 「한국독립운동과 신흥민족종교」, 『한민족독립운동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91, 561~562쪽. ☞
[註 65] 조선총독부, 『朝鮮の類似宗敎』, 1935, 524~550쪽. ☞
[註 66] 1910년 천주교신자 수는 73,517명, 개신교 장로교 신자수는 140,470명이었다(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51쪽). ☞
[註 67] 박승길, 『현대 한국의 종교와 사회』, 1992, 문학과 지성사, 39쪽. ☞
[註 6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문화투쟁사-』 8, 1976, 648쪽. ☞
[註 69]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신종교」, 『한국근대사와 종교』, 54~56쪽. ☞
[註 70] 윤선자, 『한국근대사와 종교』, 57~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