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조선총독의 식민통치와 통치기구
조선총독의 권한과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일제의 식민통치론 -‘일선동조론’·‘문명개화론’-
식민 통치기구와 행정 제도의 변화
중추원관제
제4조. 법률의 전부 또는 일부를 조선에 시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칙령으로 이를 정한다.
제5~제6조 생략
부칙
제18.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칙령안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둔다.
조선총독부에 조선 총독을 두고 위임 받은 범위 안에서 육해군을 통솔하여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도록 한다. 통감부 및 그 소속 관서는 당분간 존속시켜 조선 총독의 직무는 통감이 대행하도록 한다. 종래 한국 정부에 속하였던 관청은 내각과 표훈원을 제외하고는 조선총독부 소속 관서로 간주하여 당분간 존속시킨다. 전항의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는 구한국 정부에서 근무하던 때와 동일하게 대우한다. … 註11)
1910년 8월 16일 사내정의 통감은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내각 대신회의를 개최토록 한 뒤에 미리 준비한 ‘합병방침’을 안건으로 채택하여 이를 통과시킨 뒤에, 20일에는 순종 임석하에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주일 뒤인 1910년 8월 29일에 공식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사내정의는 총독으로 임명되어 식민지로서 조선을 통치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갔다. 사내정의는 동화정책의 지표로 우선 ① 식민지의 안정화, ② 문명화, ③ 일본화를 꼽았다. 식민지의 안정화는 동화정책의 전제조건이며, 문명화는 동화정책을 가능케 하는 명분이며, 일본화는 동화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註12)
사내정의 총독 당시 침략·지배논리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문명개화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내정의는 통치이념이나 시정방침을 거론할 때마다, ‘융합동화’·‘일시동인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한일역사관인 ‘일선동조론’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2. 일선동조론
사내정의는 민족동화론을 추진하고자 했는데, 이는 일선동조론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일선동조론은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로 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한 것이라면, 한국은 이제 일본에 대해 외국·외민족은 될 수 없으므로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한 것이다.
그는 백두산과 일본 고천혜봉高千穗峰의 형제관계설, 소잔명존素戔鳴尊의 조선경영설 등을 사실처럼 믿었던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註13)에 따르면, 일본의 시조신 가운데 하나인 수좌지남명須佐之男命이 신라 땅을 다스렸고, 신공황후神功皇后는 신라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반도에 이르는 대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일합방’은 침략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려온 숙원사업을 해결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형제관계로 출발했던 양국이 한쪽은 대륙에 접한 ‘반도국’이고 다른 한쪽은 사면 환해環海의 도국島國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별개 사회를 형성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사내정의 총독은 일왕 명치의 권위를 빌어서 조선을 식민지로 생각하는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 註14)의 조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조선인은 ‘폐하의 적자’로서 차별이 없는 ‘일가一家의 동포’라 여겼다. 註15) 때문에 사내정의는 조선인 또한 일본민족과 일본문명에 동화되어 대일본제국인이 되는 것이 운명의 대도大道라 주장했다. 즉 한국과 조선관계는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고 이해관계 또한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적 혹은 문화적 루트가 같은 점同種同文으로 풍속도 역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통일된 국가하에 융합 동화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註16)
이러한 맥락에서 ‘일선동조론’은 침략·지배논리로 제기되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인과 조선인은 동일한 조상, 동일한 근원을 가진 혈연적 연대가 있는 동시에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사실 등을 내세워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가장과 가족원의 관계 또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가 있다는 논리이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에 가서 조선인이 되고 일본신이 조선에 옮겨가 조선신이 되고, 또한 일본인이나 일본신이 조선의 국왕과 건국신이 되고 조선인은 일본에 투항·귀화하여 일본인이 되고 천황의 세상이 되어서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하여 조선을 신종臣從시키는 등 조선은 태고 이래 일본에 복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註17)
이러한 논리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명치시기 이후 서구 학문의 유입과 더불어 일신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을 강점한 이후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을 실제 답사하며 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그 논리를 보강시켰다. 이를 통해 일제는 한국과 일본의 인종적 구성이 비슷하고 한국 남부의 인종과 일본의 주류인종은 같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한편, 고대사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주장하고자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이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주입되었다. 이러한 동조동근론을 통해 일제는 한일간의 근친성과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식민본국과 식민지의 인종이 일치하는 것을 서구 제국주의와는 구별되는 일본만의 특수성이라는 주장하며, 조선인 ‘동화’의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은 을사늑약 전후로 초·중등 국사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특히 1908년 교과서에 대한 검인정제도가 실시된 이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실은 교과서는 더욱 증가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의 『동사집략』1902에는 일제의 침략성을 간과한 채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순치脣齒 관계라고까지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註18) 또한 그가 저술한 『역사집략歷史輯略』1905에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른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이나 임나일본부설 등이 그대로 실려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개항기 역사교과서 가운데 근대적 역사교과서로 평가를 받고 있는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1906에도 신공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 등이 실려있다. 1910년 유근柳瑾이 저술한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에도 “일본은 임나가야제국를 점하여 일본부를 가락국도에 설하고 신라·백제 2국과 합하여 누차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으나” 註19)라고 기술하고 있어, 이를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한일 양 민족이 태고적부터 동일민족이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1911년 이후 참사관실의 주도하에 『반도사』 편찬을 추진토록 하였다. 註20) 한편 조선총독부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목적에서 남부지방의 유적을 조사토록 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는 천황제 이념을 조선인들에게 주입시킬 수단으로 신사제도를 적극 이용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사항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3. 문명개화론과 ‘독립불능론’
사내정의는 ‘일선동조론’과 ‘문명개화론’을 강하게 내세웠던 것은 조선의 ‘독립불능론’을 전제로 주장된 것이었다. 당시 사내정의는 조선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였다. 한 나라가 독립을 하기 위해 최량 最良의 육군과 해군, 그리고 이들 군사력을 지탱할 수 있는 과학적 능력과 지식의 구비가 필수적인데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을 믿고 일본에 의뢰하는 것이 자국의 행복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으며, 한국병합 취지 자체도 양국의 상합일체相合一體로 피아차별을 없애고 상호 전반의 안녕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일제는 ‘일선동조론’을 통해 한·일간의 근친성을 주장하는 한편, 문명개화론을 내세워 조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고자 했으며, 이를 수단으로 동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일제는 과거 조선사회를 ‘야만’·‘악정’으로 매도하였으며, ‘정체된 역사’상을 가진 민족이하 비하하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8세기에 세워졌던 내랑奈郞·평안조平安朝 시대와 비슷하다며 현재의 일본은 조선의 미래라는 침략논리를 펼쳤다. 이는 조선이 고대국가 체제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론’을 언급한 것이다. 조선사회는 부존자원이 풍부하고 기후 풍토도 양호하여 부원개발富源開發의 여지가 컸지만, 그러한 폐단 때문에 빈곤과 정체의 늪에 빠졌고 농업·수산업·광공업·제염업 등 산업 전 분야와 도로교통은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렇다 할 금융·의료기관이 없어 고리대가 판을 치고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산야는 황폐화되고 민력民力은 고갈되어 민중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자들은 실행을 망각하고 공리공담과 당쟁만을 일삼았고, 이러한 풍토에서 유능한 인재들은 고원한 학문의 허영심에 빠져 무위도식하면서 가계를 탕진했고 그 결과 국가가 쇠퇴하였다고 떠들어 대면서 한국 식민지화를 합리화시키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일제는 한·일간의 근친성을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을 제기하며 한일의 ‘공동체’ 건설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문명화’를 내세워 한국과 일본의 차별 또한 강조하였다. 즉 ‘민도론民度論’을 언급하며 빈약한 조선민중을 무육撫育하고 그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양시켜 한국인을 문화적인 단계로 끌어올린 뒤에야 비로소 민족동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註21) 이를 근거로 사내정의는 한국과 일본의 ‘민도民度’ 격차가 크기 때문에 급진적 동화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의 산업·교육시설 등이 부재하고, 인민이 나태하고 게으른 원인을 조선 정부의 악정에서 찾고, 이의 해결이 당면 과제라 선전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존재와 그 시정을 합리화하고자 했다. 일제는 강점 이후 각종 제도를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일원화시켰다. 이는 효과적인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선을 문명화시키고자 한 것이라며 선전하곤 하였다. 식민통치를 위한 제도의 완비를 골자로 하는 ‘문명화’는 조선인 ‘동화’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희박한 상황에서, ‘동화’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수긍하여 식민지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1910년대 조선의 지식인층은 식민화된 원인을 ‘문명화’를 이루지 못한 과거에 두었다. 일제의 강점을 인정하거나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여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일제와 다를 게 없었다. 특히 윤치호는 1919년 1월 신한청년단이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외교를 통한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조선의 실정과 일본의 유능한 행정 간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고, 이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전보다 더 못살고 있다는 것을 강화회의에 납득시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입장이었다. 註22) 당시 최린·오세창 등 지식인들은 대체로 조선총독부의 존재와 그 시정에 반발하기 보다는, 조선인으로서 그들이 받는 차별에 대한 반감이 컸다. 때문에 1920년대 이들의 활동은 주로 교육·실업과 같은 수단을 통해 차별의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친일세력들은 ‘일선동조론’과 문명개화론을 수용하면서 독립불능론·실력양성론을 펼쳐나갔다. 1910년대 친일세력은 일제의 식민통치 이데올로기였던 ‘합방’의 불가피성과 조선의 독립불능론을 주장하였다. 『매일신보』는 1915년 2월 18일자 사설에서 “약자가 강자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열자가 능히 승자를 따라가지 못하여 약자 열자가 필경 강자 우자의 ‘의뢰부호依賴扶護’를 피被하는 경우”가 생겨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피보호 및 병합 등의 현상이 당연하게 생겼다고 하면서, 병합은 침략이 아니고 그 국토의 방위상 또는 그 민족의 보호상 부득이 행한 것이라 강변하였다. 곧 ‘한일병합’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그 식민지에 대하는 것과 같은 ‘속지와 예민’이 아니고, ‘조선의 국토를 방위하고 조선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궤변을 늘어놨다.
또한 조선은 ‘일성一姓의 계통이 면원綿遠치 못하고 전란과 쟁탈이 상속하여 민생이 안도할 날이 없었고, 이런 점으로 조선을 금후라도 조선대로 방임하면 이런 예증이 속출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 없고, 일본의 지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친일 논리를 폈다. 이러한 점은 일본 문명의 원류는 조선이고 언어·습속·민족의 구성 등이 같으며, 일선양가는 자고 이래로 융화친선하여 상호교도하며 상호 모방하고 각자 사단취장捨短取長한 동문동종이므로 더욱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註23)
이러한 논리에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고 찬동하며 일제의 지배·지도 아래 문명화를 추진하려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註24)는 식산흥업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산업발전론’에 따라 회사·은행간부 등과 손을 잡고 실업구락부를 만들어 일제 관헌의 지도하에 수리사업, 황무지 개척, 근검저축 실천 등을 해야 하며, 이것이 부원개발·산업발달·근검저축을 이루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註25)
일제는 ‘문명개화론’을 통해 식민통치의 명분을 얻기 위해 박람회·공진회 혹은 일본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 지배가 한국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조선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주고자 하였다. 일본시찰단 파견이 시작된 것은 1909년 3월경이었다. 당시 통감부가 후원하고 경성일보사가 주최하여 사회단체 인사 93명을 관광 및 시찰단으로 파견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註26) 그후 1910년 4월 경성일보사는 두번째로 일본관광단을 파견하였다. 이때에는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을 단장으로 한국 왕실·정부 대표와 각 도 선발 실업가 대표 등으로 구성되었다. 註27)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동양척식주식회가 일본시찰단 파견을 주관하였다. 1911년 동양척식주회사는 “조선인의 사상을 계발하고 조선의 산업을 개량하기 위하여 채택할 수단 방법은 많으나, 그들을 모국 각반의 사물을 실지 목격하거나 또는 모국 상하의 인사에게 접촉시키는 것이 가장 첩경”이라며, 일본시찰단 파견 목적을 밝혔다. 註28) 그 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4년까지 지속적으로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그 외에도 경성일보사는 ‘일선융화’를 목적으로 일본의 국민신문사와 공동으로 일본시찰단과 함께 일본인으로 구성된 조선시찰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註29)
시찰단에 참가하였던 중추원 고문 박제순은 “일본 천황의 홍덕洪德에 감읍하고 목욕하기를 절망”할 뿐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註30) 조중응은 일본시찰단을 조직하여 일본 문명을 찬양하고 흡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註31)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민족은 일심으로 문명개발에 향하여 할 터인데, 그 방법은 동양에서 문명 선각자 된 일본 국기 하에서 천황 폐하 일시동인하시는 그 대성의大聖意를 봉체奉體하여 국가의 충량의 신이 되는 것이 제일이라”며, 조선이 신문명 민족인 일본의 부분이 된 것을 자랑하고, 동양의 평화와 자신의 행복을 증진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중심지인 서울이 문명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註32) 일제의 일본시찰단 파견이 식민지 지배에 협력할 조선인을 양성하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일관련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중응을 중심으로 1916년 12월 이른바 ‘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가 조직되었다. 대정친목회는 1910년대 종교단체 이외에 유일한 조선인 친일단체였는데, 조선인 전직 관료·귀족·대지주·실업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내선융화’를 목표로 활동한 단체였다. 조중응은 이를 “식산흥업·근검저축·풍속교정 등을 달성하여 문명개발에 기여하는 것이며, 바로 내선인의 융화를 이루는 것”이라 자부하였다. 註33) 대정친목회는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내선융화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를 격렬히 비판하면서 일본의 제국의회 의원도 뽑자는 참정권청원운동에 적극 나섰다.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한 지방이라는 인식 속에 척식성 관할하에 두는 것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더욱이 대정친목회는 스스로를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생각하면서 일제의 민주침략을 옹호하는 한편,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진행된 창씨개명에 적극 환영하기도 하였다. 註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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