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대한제국 통치조직과 지방제도 개편,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7. 13:46

제3장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편


대한제국 통치조직과 지방제도 개편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립학교 탄압
사법제도 개편과 의병탄압
신문지법 공포와 언론탄압


1. 대한제국 통치조직과 지방제도 개편


1. 궁내부

궁내부는 1894년 6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가 설립되고 갑오정권이 출범하면서 설치되었다. 갑오정권은 왕권을 제한하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입헌군주제의 정체변혁 구상에 따라 봉건적 정치권한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 궁내부를 설치하였다. 註1) 1894년 6월 의정부관제, 각 아문관제와 더불어 궁내부관제가 공포되었다. 당시는 관원 배치나 관제운용에 관한 상세한 규정 없이 종래 왕의 직속기구들을 분리하여 궁내부 산하에 부속시켰다. 즉 승정원을 승선원으로 개칭하고, 홍문관·예문관을 경연원으로, 교서관·도화서 등을 규장각으로 통합·정리하면서, 내의원·시강원·내시사 등과 함께 궁내부에서 관할토록 한 것이다. 이로써 봉건왕실의 권력기반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註2)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일제는 조선에 본격적으로 간섭하면서 홍범14조를 공포하여 왕권을 제한하는 한편, 1895년 4월 궁내부관제를 제정하여 궁중의 권한마저 축소시켰다. 註3) 하지만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정권이 붕괴되고 1897년 9월 내각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후 고종은 의정 이하 각부 대신들을 매주 한 번씩 만나 국정을 주도해 나갔다.

1899년 광무황제는 의정부보다는 궁내부를 통해 국정의 주요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갑오개혁 당시 궁내부는 왕권을 제한하는 기구였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내부가 확대되면서 국정의 주요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히 1899년 11월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사임한 샌즈가 궁내부 고문관 업무를 맡게 되면서 궁내부의 개혁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註4) 당시 궁내부는 국가 재정 수입의 45%를 관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궁내부의 내장원을 통해 주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註5)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 1905년 3월 ‘궁내부관제’가 개정되었다. 註6) 궁내부 대신은 황실의 일체 사무를 총괄적으로 맡아 처리하면서 소속관 각원과 사司의 귀족들을 감독하고 황실에 관계되는 제반 법규를 제정하여 시행한다는 내용이다. 그뒤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광무황제에 대한 고립정책이 추진되면서 궁내부의 위상 또한 격하되었다.

일제는 1906년 1월 궁내부 제도국 설치 이후, 7월 고문경찰로 하여금 궁중을 경위토록 하였으며, 궁금령宮禁令을 제정·공포하여 궁중 숙청 작업에 착수하였다. 註7) 궁금령은 ‘무질서하고 빈번한 잡배의 출입을 단속한 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광무황제를 사실상 연금 상태에 몰아넣었다. 이후 통감부는 경무고문으로 하여금 일본경찰관을 궁중 각문에 배치하여 광무황제를 감시하는 동시에 궁중에 일본세력을 부식하였다. 궁궐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내시나 궁녀들의 출입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시들은 궁궐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의병세력과 광무황제와 관계를 차단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일제는 1907년 5월 유약한 박제순내각을 경질하고 일찍부터 광무황제의 폐위를 주장해 온 이완용을 참정대신에 발탁하였다. 이어 ‘내각관제’를 전격 발표하였다. 註8) 이에 따라 내각 총리대신은 정부수반으로 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 각부를 통할하고, 필요한 경우 각령閣令을 발포하거나 각부의 처분 또는 명령을 중지시키는 칙제勅裁를 청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군부대신이 군기군령軍機軍令에 관해 상주할 때에 미리 보고 받을 권리 등을 확보하여 황제권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의정부 참정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켰다.

광무황제는 망명중인 박영효에게 밀지를 내려 보내 급히 귀국시키는 한편 1907년 7월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광무황제를 폐위시키고,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궁내부에 일본인 관리를 임용하는 등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1907년 11월 ‘궁내부관제’ 공포는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註9) 이전 24개청에 달하던 관제를 통폐합하고 대신관방과 12개청으로 축소하였다.

궁내부관제 개정을 통해 기구 정비가 일단락되자 일제는 궁내부의 거의 모든 기관에 일본인을 배치하였다. 즉 종래에 대신관방·내장원·황실재산정리국 등 수뇌직에만 일본인이 배치되었던 것을 1908년까지 임용범위를 대폭 확장한 것이다. 또한 궁금령과 황궁경찰의 배치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일본인 의사를 전의典醫 기타 직에 임용하였으며, 궁내부의 제사에 관한 의식도 개정하였다. 곧 종래 재실사帝室祀와 국사國祀를 혼동하여 제사의 명칭이 붙은 것은 모두 없애고, 1908년 7월부터 제실의 제사만 거행토록 하였다.

궁내부관제 개정으로 폐관 또는 퇴관退官된 자는 칙·주임관 이하 166명에 달하였고, 해고자는 전후 합하여 역원 3,809명, 여관女官 232명, 권임權任·순검 이하 317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에게 지급될 금액은 무려 31만여 원이었다고 한다. 註10)


2. 중추원의 기능과 변질

중추원은 1894년 6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에서 내각제를 시행하면서 설치되었다. 註11) 1895년 3월 ‘중추원관제급사무장정’이 제정되면서 중추원의 기능과 권한이 강화되는 가운데 법률·칙령 등을 심사·의정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분명해 졌다. 중추원의 기본조직인 의장·부의장·의관 등의 선임 기준과 그들의 임무도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중추원은 정책결정에 대한 자문 사항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하는 의정부의 부속기관에 불과하였다. 註12) 중추원에서 의안을 부결하거나 혹은 수정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각의 필요에 따라 원안대로 실행할 수 있다고 제한함으로써 중추원의 기능을 자문기관으로 규정한 것이다. 더욱이 ‘내각의 자문에 응한다’고 하는 제한규정은 중추원을 여전히 형식적인 자문기관으로 머물게 하였다.

중추원은 1898년 4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과 더불어 박정양내각이 결성되면서 기능과 권한이 크게 확대되었다.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에서 제출한 ‘헌의6조’ 가운데 중추원의 동의 없이는 이권 양여를 불가능하도록 결의했다. 그뒤 조칙이 내려지면서 중추원은 1898년 11월 관제가 공포되어 입법, 국민대표의 원리, 행정감독·다수결의 원리 등 근대 의회제도의 성격을 지닌 최초의 의회로 탈바꿈하였다. 註13) 중추원관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중추원은 ① 법률·칙령의 제정·폐지 혹은 개정에 관한 사항, ② 의정부에서 경의經義·상주上奏하는 일체사항, ③ 칙령으로 인하여 의정부에서 자문하는 사항, ④ 의정부의 임시건의에 대해 자문하는 사항, ⑤ 중추원에서 임시건의하는 사항, ⑥ 인민이 헌의하는 사항 등을 심사·의정한다.

(2) 중추원에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관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의 직원을 둔다.

(3) 의장은 황제가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의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며, 의관의 반은 정부에서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를 회의주천會議奏薦하고, 나머지 반은 인민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법률·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 선거한다.

(4) 중추원에서는 각항의 안건에 대하여 의결권만 있고, 상주 혹은 발령을 직행할 수 없다.

(5)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할 때에는 부府·원院이 합석·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할 수 없다.


중추원 관제


이에 중추원은 표재인선票材人選, 화폐제도 논의, 신문조례, 기복행공起復行公 폐지, 러시아와 외교문제 등에 적극 나서는 한편, 근대·자주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1898년 11월 중추원의 관제가 개정되어 의관 50인 전원이 정부의 추천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註14) 1899년 5월에는 중추원관제를 개정하여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안의 경우에는 협의를 통해 가결한 뒤에 시행토록 하면서도 시급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직접 상주토록 하여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시켰다. 같은 해 8월 25일, 1902년 11월에 중추원관제가 개정되면서 중추원 의관들은 보수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註15) 이후 입법·행정감독 등의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중추원의 기능과 권한을 더욱 축소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광무황제는 중추원을 개편·활성화시킴으로써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의정부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註16) 1904년 2월 국가 중대사인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당시 의정부가 중추원의 자문을 받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처리하면서 국가적인 위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에 중추원 인사들은 “중추원 장정은 있으나 의정부에서 중추원에 자문하는 사항이 전혀 없어 민국사무를 알지 못하니 중추원을 설치한 의미가 없다”며 사직상소를 올렸고, 이에 광무황제는 ‘장정을 존중하여 지키고 잃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註17)

중추원은 이에 멈추지 않고 광무황제의 우호적인 입장에 힘입어 관제 개정을 추진하였다. 중추원의 주요 기능인 자문활동을 위축시켰던 “시급한 사안은 정부에서 직행타결할 사”라는 조항을 삭제하고, 일체의 정부 의안을 중추원에 자문하는 장정 실시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의정부는 ‘칙령 개정이 사체신중事體愼重’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였다. 註18) 중추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던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참서관 구완희 등을 ‘매국지적賣國之賊’이라 비판하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의정부의 각 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의정부는 『관보』에 안건들을 게재한 뒤에 중추원에 알려 법률·칙령 의안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방법을 취하며 비난을 모면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결국 중추원을 무시한 것에 불과하였다. 註19)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할 당시만 하더라도 의정부는 중추원에 자문을 구하지 않은 채 일제의 의지대로 처리되었다. 광무황제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고, 대처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다시 한번 중추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일제의 일방적인 침탈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1904년 10월 정부로 하여금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신구를 참작하여 행정기관의 관계를 완비하여 나라의 완전한 법을 확정지을 것을 지시하였다. 특히 중추원의 활성화와 민의 국정참여를 통하여 의정부 활동을 견제하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註20)

의정부 대신들은 중추원의 국정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광무황제 의견을 형식적으로만 따르는 한편,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1905년 2월 중추원의 관제 개편이 이뤄져 ‘중추원이 임시 건의하는 사항’이 삭제되는 대신에 ‘법률·칙령의 실행 효과의 여하 및 그 미비로 인한 사안에 관하여 건의하는 사항’과 ‘법률·칙령·실시에 관하여 건의하는 사항’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중추원은 의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강제력이 없었다. 더욱이 중추원의 구성원의 수가 50명이었는데, 칙임으로 15명만을 임명하도록 개정하고, 의관을 찬의로 개칭하며 참의로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2개년 현직을 역임한 자로 제한하여 규모를 축소하였다. 註21)

이후 중추원은 더욱 약화되어 갔다. 급하지 않은 의안도 중추원에 자문을 구하지 않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 자구 노력에 힘을 기울이는 이도 없었다. 1905년 10월 의정부회의규정이 개정되어 정부에서 가부를 결정하기 전에 황제가 독단 처리하던 사항이 삭제되고 군국대사를 중추원 자문회의를 거친 뒤에 가부를 결정하도록 바뀌었다. 註22) 이와 관련하여 중추원관제도 개정되어 의정부에서 자문하는 법률·칙령 외에도 군국중요사무사항에 대해 심사 의정하도록 하는 한편, 시급을 요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중론박채衆論博採가 필요할 경우에는 의장이 원임의정부대신과 함께 회의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였다.

1905년 11월 8일에 개정된 중추원관제에 따르면, 중추원의 구성원 가운데 ‘찬의 15명 칙임’이 삭제되고 ‘찬의 8명 칙임, 부찬의 15명 주임’으로 규모가 더욱 축소되었다. 註23) 하지만 1906년 12월 중추원 의장과 의관들이 새롭게 구성되면서 의정부를 견제하며 일제의 ‘보호국화’ 시도를 막아서는 등 일제에 대한 저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07년 5월 헤이그특사 파견 이후 중추원의 활동은 위축되었으며 형식적인 의정부의 자문마저 없어졌다. 註24) 통감부는 법제상으로 고문직을 신설하고 친일인사들을 대거 포진하였다. 당시 고문에 임명된 6명은 모두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정부 대신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만 의정부 참정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모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註25) 이후 중추원은 일제의 식민지화 추진을 위한 자문 내지 체임된 정부대신들을 위한 명예직 또는 대기직의 성격으로 변질되어 갔다.

당시 통감부는 1907년 중추원관제를 개정하여 고문관을 설치하고 중추원의 업무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지만, 주요 군국사무를 중추원 의장이 고문과 함께 의결하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당시 중추원의 활동사항을 살펴보면, 자치제를 비롯하여 종두법 실시·국적법·민법·농회규칙·재가허용·지방토지·인구조사 등이었다. 이는 통감부가 식민통치구조로 변화시키는데 중추원을 이용하고자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1907년 4월 성균관관제를 개정하는데, 경학과 외에 예학과를 두어 정치·법률·기술에 관한 학과를 전담하고, 경·예술과를 졸업한 학생을 관리로 서용할 것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註26) 이후 중추원은 계속 존재하였으나 그 활동을 미약하였다. 1909년 말 중추원은 ‘한일합방’을 선동하는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하였다. 註27)

중추원은 일제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한 내정개혁을 합리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변질된 자문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일제의 경술국치 이후로는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을 정당화·홍보화하고 그 정책을 뒷받침하는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는 조선총독부의 예하기구로 전락하였다.


3. 지방제도의 개편


1) 통감부 이전 시기 도제 개편

전통시대 8도체제의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 논의가 처음으로 이뤄진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최고조에 달하고 청일전쟁이 시작되던 때였다. 註28) 1894년 6월 일본공사는 ‘내정개혁방안강목’을 제시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자 했다. 이때 지방제도와 관련하여 “현재의 부·군·현치는 그 수가 많으므로 마땅히 이를 작량·폐합하여 민치에 무방하도록 소수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주로 중앙관제 중심의 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방제도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註29)

1895년 3월 내각관제가 발표되고 같은 해 5월 국왕의 조칙과 더불어 8도체제를 크게 개편하여,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부 아래 337군을 소속시켜 부에는 관찰사를 두게 되었다. 註30) 종래 유수부·부·목·대도호부·도호부·군·현으로 되어 있던 고을을 일률적으로 군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 하지만 이는 도제道制에 한한 것이었고, 군의 구역에 대해서는 기존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단순히 23부 아래 분속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의한 저항으로 의병운동에 거세게 일면서 관찰사와 군수들이 응징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사직 상소가 줄을 잇게 되면서 23부제는 1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註31)

1896년 8월 윤용선 내각은 23부제를 전면 폐지하고 13도제로 개편했다. 개편 내용을 보면, “① 이전 8도 중 함경도·평안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5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13도로 하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둔다, ② 23부제 하에서 군으로 격하되었던 한성을 특별히 도와 동격의 부로 하고 판윤을 둔다, ③ 도 아래에 다시 부·목·군으로 나누어 7부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 1목제주, 331군으로 구획한다, ④ 종래 도제에서 유수부·부·목·대도호부·도호부·군·현으로 되어 있던 각 고을을 군으로 일원화하며 각 군을 5등으로 나누어 군수의 대우를 달리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지방관직제·지방관사무장정·지방관임기 등 지방제도와 관련된 법률이 개정되었으며, ‘개항장 감리복설 관제 및 규칙’ 등의 규정이 잇달아 공포되었다. 인천·동래·덕원·경흥은 개항장으로서 경무서를 설치하였다. 註32)


2) 통감부 시기의 행정구역 개편

일제에 의한 지방제도 개편 논란은 1905년 8월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1906년 3월경 통감부는 ‘시정개선’이라는 명목하에 대한제국 내부에 ‘지방군현폐합조사표’를 작성토록 하였다. 註33) 이에 따르면 13도를 9성으로 하고 관찰사를 도내의 중앙군으로 이설하는 한편, 3~4개 또는 2~3개의 군현을 1개 군으로 만들어 345개 군을 170개 군으로 축소하는 방안이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인구와 호수의 불균일, 전토田土 결세結稅의 부정제不整齊, 산천도로의 부적당, 무역 교환의 불편 등의 이유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또한 군현을 곧바로 폐합하면 관직을 잃게 되거나 영업을 하지 못해 수십 만호의 사람들이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라 우려를 표명하였다. 註34)

일제는 이러한 비판에도 1906년 4월 ‘지방제도조사소’를 설치하였다. 지방제도조사소는 지방과 중앙경비의 부담 문제, 지방행정의 구획설정 문제, 공무분배법, 조세징수의 지방관청 관장 범위, 경찰관과 지방관의 충돌회피 방법 등을 강구했다. 註35)

지방제도조사소는 설립한 지 3개월이 지난 7월경에 ‘지방제도개정청의서’와 ‘지방구역분합성명서’를 작성하였다. 註36) 조사소의 활동을 1개월 연장하면서까지 내놓은 결과를 살펴보면, 도계道界는 13도로 하고 345개의 부군을 합군하여 36% 감소시켜 219개로 개편하자는 내용으로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폐합의 정도가 약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발표되면서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황성신문』은 이속되는 군민과 병합하는 군민 모두 두려워하고, 의병이 봉기한 가운데 합군 조치를 단행하면 부언浮言과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 우려하였다. 또한 서리들이 세미歲米를 충당하기 어렵게 되어 민정民情의 소란이 일어날 것이라 우려를 표명했다. 오히려 합군보다는 지방관을 공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는 것이 낫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註37)

통감부는 지방의 여론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서들의 소란이 염려스러운 가운데 군폐합안을 계속 추진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이등박문은 합군을 잠시 정지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내부 또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합군설을 부인하는 훈령을 내렸다. 註38) 그뒤 통감부는 조사소의 활동기한을 2개월 연장한 뒤에 1906년 9월경 ‘지방관관제’ 개정과 부분적인 군 폐합, 즉 두입지斗入地와 비입지飛入地를 조사하여 경계를 정리하는 것으로 지방제도 개편 방향을 선회하였다. 註39)


3) ‘지방관관제’ 개정과 면장제 강화

통감부는 1906년 9월 ‘지방관관제’를 개정하여 관찰사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관찰사의 직급을 칙임 2등 이하로 하여 중앙의 각부 대신들보다 격을 낮게 하였고, 관장사무를 향제·민적·진휼·토목·경찰·위생·교육·농림·농상 등 일반 행정사무로 제한하였다. 註40)

경찰사무는 경무서장으로 하여금 관할토록 하여 경찰사무를 제약하였으며, 사법권을 분리하기 위한 사법권의 제약 또는 부분적 박탈도 이뤄졌으며, 징세권을 분리하여 군수에게는 단순히 세금을 지금고에 납부하는 권한만 주어 재정권을 빼앗았다. 이러한 군수의 고유 권한들은 전문기관으로 기능이 옮겨 가거나 상급기관인 도 또는 하급기관인 면으로 이관되었다. 이로서 군은 면의 관할과 관련된 기능만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그 지위는 격하되고 말았다.

군주사를 신설하여 군수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하며, 군수 유고시 직무를 대리토록 하였다. 이는 기존의 향임이나 서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던 향장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방의 유력층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註41) 또한 통감부는 ‘지방관관제’ 개정과 더불어 개항장을 중심으로 설치하였던 이사청을 늘려 각도 관찰부 소재지에 이사청지청을 설치하고 부이사관을 배치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한국 지방행정을 명령·감독하도록 하였다.

1908년 6월에는 ‘군수임용령’을 제정하여 군수는 관찰사가 구역내에 거주하고 있는 자 가운데 적임자를 내부에 천보薦報하여 임명을 받도록 했다. ‘지방관관제’도 개정하여 관찰사에게 부군주사의 진퇴권을 부여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내부대신을 경질하면서 13명의 관찰사 가운데 7명을 친일적인 인물로 교체했다. 이에 따라 1909년 11곳의 부와 44곳의 군에 일본인 주사가 각 1명씩 임명되었고, 도에는 처음에는 일본인 주사 3명씩을 임용하였으나 6명으로 증원하여 군수와 관찰사를 견제토록 하였다. 註42) 한편 1908년 11월 통감부는 지방관자격심사회를 신설하여 일본인 내부차관을 위원장으로 3~4회 심의를 거쳐 일제에 협력하는 인물로 지방관을 임명시키고자 했다. 또한 지방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 지방관을 통제해 나갔다.

1908년 6월 헌병보조원 제도와 같은 해 7월 지방관관제를 개정하여 각도에 경찰부를 설치하여 일본인 경찰부장을 임명하면서 지방경찰의 지휘권을 관찰사에게 부여하였다. 이는 1907년 이후 군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관찰사를 친일적인 인물로 교체하는 한편 그들에게 경찰권과 인사권을 부여하여 도-군의 행정계통을 확립하여 점진적으로 지배기구의 식민지적 재편을 꾀한 것이다. 註43)

한편 통감부는 일본의 ‘정촌제町村制’를 수용하고자 이를 적극 소개하고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등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는 향촌자치기구로서 통합성이 가장 약한 면제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다양한 방식의 자치단체 설치가 시도되고 있었다. 민의소·민회·방회·군민회·면의소·인민협의회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가운데 통감부는 면장협의회를 설치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면장협의회는 1908년 8월 탁지부에서 ‘면장협의회규정준칙’을 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지방위원회의 보조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註44)

통감부는 면제를 강화함으로서 면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면장을 징세활동에 적극 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면장은 징세와 민적에 관한 사항 외에는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 당시 면장은 의병을 진압하려는 경찰 헌병대를 안내하고 필요물품을 조달하여 관내 치안 사항을 보고하였다. 또한 면장은 자위단에 협력해야만 했으며, 도로·교량·수리에 면민을 동원하거나 동리장회합을 주선하며, 개인간의 분쟁조정을 맞는 등 행정 침투의 전위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통감부는 새로운 행정기능의 강화를 목적으로 1908년 이후 면장직제를 제정하여 면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註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