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과 통감부 설치-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6. 16:26

제1장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과 통감부 설치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2.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1. 을사늑약 체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과 조선 주변의 열강들과 협의를 통해 전후문제처리를 하였다. 특히 만주문제의 처리는 열강의 참여를 배제하고 러일 양국의 회담을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하에서 처리하고자 하였다. 이는 열강의 중재를 수용할 경우 자국의 이해가 침해당할 수도 있다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전후처리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입장은 양국 모두 명확했다. 그것은 중국이 전쟁에 중립을 선언했고, 미국과 영국이 중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동아시아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후처리는 조선과 만주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중 만주에 대한 일본의 요구는 전쟁 전 일본의 요구했던 것 이상으로 반영되었다. 일본은 만주에 대한 경제적 문호개방 정도의 요구를 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러시아가 조차했던 여순항 등 요동반도는 물론 남만주철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훨씬 강력한 권익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우월적 지위는 영일동맹의 개정, 미국과의 카츠라-태프트밀약의 체결, 포츠머스조약 등 국제관계의 변화 및 조성에 의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기초를 마련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은 영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러시아 견제의 파트너로서 선택했다는 의미가 강하였고, 일본은 이를 통해 동아시아지역의 강대국으로 인정받음은 물론 영국과 동맹국이 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개정된 제2차 영일동맹은 전쟁 후의 변화된 동아시아 정세에 비추어 양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1차 영일동맹이 만료되는 1907년 이후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복수전의 유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입장에서도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은 일본을 통한 러시아의 견제라는 외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유용하였으며, 일본의 입장에서도 러시아의 복수전을 떨쳐낼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지역 평화유지의 열쇠였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영일동맹과 제2차 영일동맹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는 제1차 동맹은 동아시아의 현상유지를 위한 방어동맹이라는 성격을 갖지만, 제2차 동맹은 공수동맹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는 종전 이후 러시아가 일본의 권익을 침해할 경우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며, 일본 역시 영국의 인도대륙 방위를 지원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알 수 있다. 둘째, 러시아의 카스피해 연안의 철도 완성과 함께 인도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영국의 인도대륙 방위에 대한 지원을 규정한 것은 동맹의 지역적 범위가 확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맹의 범위가 확대된 것은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복수전에 대한 일본의 우려가 매우 컸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일본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지역을 초월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장기적인 국익의 관점에서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셋째, 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조선의 독립’ 조항이 폐기되었다는 점이다. 제1차 동맹 당시 영국은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으나 제2차 동맹에서는 이를 폐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특수한 이익’을 가지며 이익을 옹호·증진하기 위해 조선에 대해 지도·감리·보호조치할 수 있다는데에 영국이 동의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2차 영일동맹에 대해 조선정부는 영국정부에 대해 조영수호통상조약의 규정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폐기해야 할 것을 항의하자 제1·2차 한일의정서의 내용을 승인한 것일 뿐이라며 거부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일보 전진할 수 있었다. 제2차 영일동맹 체결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은 미국과도 조선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는 이른바 카츠라-태프트밀약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카츠라-태프트밀약은 체결 과정이나 절차 등에서 실제 조약의 형태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1905년 미국의 육군성 장관인 태프트William Haward Taft가 필리핀을 시찰하기 위한 여행 도중 일본의 동경에 잠시 머물 때 일본 수상 카츠라가 태프트와 함께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 걸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자리에서 카츠라는 러일전쟁의 원인이 조선문제이므로 조선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태프트는 이에 대해 조선이 일본의 동의 없이 타국과 어떠한 조약이나 약정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의 종주권을 일본이 갖는 것은 당연한 전과戰果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도 공헌하는 것이라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정리하여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를 카츠라-태프트밀약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이 밀약이 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메모 형식이었다. 註30)

그렇기 때문에 1907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의 제한 조치를 취하는 등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의 가능성까지 언급될 때에도 미국은 이 밀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밀약’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정부의 조선 및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 인식이 이 ‘밀약’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우승열패·생존투쟁 등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킨 것이다. 따라서 인간사회의 종족·민족·사회·국가도 모두 유기체이므로 생존투쟁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약자는 강자에 의해 구축된다는 논리이다. 약자인 조선도 결국 강자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인간사회의 기본법칙에 따라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지역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일본의 주장 역시 정당하다는 인식이다.

이와 같이 영일동맹, ‘카츠라-태프트밀약’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획득하는 한편 일본은 조선정부를 협박하여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급박하게 되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러일 양국은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였고, 2월 8일 여순旅順항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바로 서울에 들어왔고, 2월 10일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조선은 전쟁터가 되어 조선정부의 국외중립선언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즉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동시에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한 조선주재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는 고종에게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월 12일,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파블로브Pavlow,A.가 공사관원과 함께 러시아로 귀국하였고, 일본공사 임권조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정상井上과 함께 공수攻守·조일助日을 앞세운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였다. 동시에 반일·친로파였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길영수吉永洙·이학균李學均·현상건玄尙建 등 반일인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의 강압 아래 2월 23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이지용과 임권조 사이에 체결되었다. 전문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화평東洋和平을 확립함을 위하여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여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忠告를 용容할 사.

제2조 :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 안전강녕安全康寧케 할 사.

제3조 :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급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사.

제4조 : 제3국의 침해에 유由하며 혹은 내란內亂을 위하여 대한제국 황실에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유有할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필요臨機必要한 조치를 행함이 가함. 연然이 대한제국정부는 우右 대일본제국정부에 행동을 용이容易함을 위하여 십분 편의를 여與할 사.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 목적을 성취함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기수용隨機收用함을 득할 사.

제5조 :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불경不經하여 후래後來에 본 협정 취의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함을 득치 못 할 사.

제6조 : 본 협약에 관련하는 미실세조未悉細條는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간에 임기협정臨機協定할 사. 註31)


이 의정서의 내용을 보면, 제2조와 제3조에서 비록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증한다고 하였으나, 이후 경과에서 알 수 있듯이 명목상의 조항이었다. 오히려 제1·4·5·6조는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하면서 조선은 시정개선에 대한 일본의 ‘충고’를 수용해야 했고,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에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유有할 경우’ 신속히 ‘임기필요臨機必要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욱이 이를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유사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주둔시킬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군사적 강점의 길을 연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군은 1904년 8월 15일 군용지로서 용산에 300만평, 평양에 393만평, 의주에 280만평 등 모두 1,000만평에 가까운 토지를 수용하겠다고 조선정부에 통보하였다. 註32)

또한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에는 조선은 제3국과 협정을 체결할 수 없도록 하여 조선이 러시아 등 다른 열강과 접근하는 것을 견제하고 조선과 일본 간의 군사동맹 상태를 강제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적·군사적·외교적인 면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경영의 제1보를 디딘 것이라 판단된다.

‘한일의정서’가 3월 8일 『관보官報』에 공포되자 이에 대한 비난과 반대가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던 현상건과 이학균은 손탁Sontag 가家에 피신하였다가 상해로 탈출 註33)하였으며, 참찬 권중석,중추원 부의장 이유인, 광제원장 강홍대는 한일의정서 반대와 이지용탄핵상소를 올렸으며, 길영수·백시용白時鏞 등은 상무사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註34) 이외에도 『황성신문』·『제국신문』 등 언론에서도 이에 대한 논설을 통해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내의 반대운동에 대해 일제는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등박문을 한일친선 특파대신에 임명하여 이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기초 작업이 끝난 후 조선 내의 러시아 세력은 사라지고 친일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5월 18일자 조칙으로 한러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하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회사에 양도하였던 모든 권리도 취소했다. 이 결과 일제는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군사 행동과 수용·강점을 감행하여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였고,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하였다. 또한 경부京釜·경의京義 철도부설권도 군용으로 일제가 장악하였으며, 근대도로를 건설하였다. 註35) 이 시기 철도와 근대도로의 건설이 갖는 의미는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인 진출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1899년 제물포-노량진 구간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어 조선도 철도시대에 돌입하였다. 경인선은 이듬해인 1900년 노량진-남대문역 구간이 완공되어 제물포-남대문 구간으로 연장되었다. 또 1905년 1월에는 경부선이 완공되었고, 1906년 4월에는 경의선이 완공·운행되었다. 1911년 11월 1일에는 신의주와 만주의 안동을 연결하는 압록강 교량이 완공되었다. 이로써 1905년 9월 하관下關과 부산을 연결하는 부관연락선이 개통된 이후 6년 만에 일본과 대륙을 잇는 교통망 완성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1910년대 초 잡지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에 ‘구아연락최첩교통선歐亞連絡最捷交通線’ 註36)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만주와 중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진출 혹은 침략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는 이 조약을 근거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세목細目’ 등 식민지 경영을 위한 세부계획을 마련하여 1904년 5월말 각료회의에서 의결한 뒤 천황의 재가를 받아 확정·시행하였다. 註37) ‘대한방침’은 일제는 “한국에 대해 정사상政事上·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더욱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 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보다 노골화하였다. 그리고 ‘대한시설강령’과 ‘세목’ 은 ‘대한방침’에 따라 구체적인 식민지화 방안을 마련한 것이었다. ‘대한시설강령’ 6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방비를 온전히 할 것.

② 외정外政을 감독할 것.

③ 재정을 감독할 것.

④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

⑤ 통신기관을 장악할 것.

⑥ 척식拓植을 도모할 것. 註38)


이와 함께 일본정부는 ‘대한시정강령’을 실천하고자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과 스티븐슨Stevens를 각각 조선정부의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에 임명하였다. 주지하듯이 재정고문은 조선정부의 재정에 대한 정리·감사, 재정상의 제반시설에 대한 심의·기안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재정고문은 조선정부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의정부의 결의 및 각부의 사무상 재정에 관계된 것은 상주하여 결재받기 전에 반드시 재정고문이 동의·서명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정부의 재정에 관한 실질적 권한은 사실상 재정고문에게 넘어갔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외교고문은 일체의 외교상 및 기타 안건에 관하여 심의, 입안권을 가졌고, 조선의 외교에 관한 일체의 왕복 문건 및 모든 안건에 대한 동의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광무황제를 알현하여 외교상의 의견을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註39) 이렇게 일본정부는 조선에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영국과 미국 등 조선 주변의 열강과의 조약 체결, 그리고 조선정부와의 ‘한일의정서’ 체결 등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화에 한발 다가선 일제는 1905년 8월 포츠머스조약을 체결을 통해 조선의 보호국화를 위한 여건을 완성하였다. 포츠머스조약의 주요내용은 첫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의 승인, 둘째 여순·대련의 조차권 승인, 장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셋째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넷째 동해·오호츠크해·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것 등이다. 결국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고 말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제는 1905년 조선정부에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조선을 보호국화할 수 있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나오는 조선 대신들


앞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청과 러시아를 각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구축하는 한편 영국과 미국 등의 승인을 획득하여 조선을 보호국화할 조건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과 협정이나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제반 권익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 종전 후 일본은 스스로도 “조선의 국방·재정의 실권을 아我 손에 수람收攬하고 동시에 조선의 외교를 아 감독하에 두고 또한 조약 체결권을 제한하였다” 註40)고 할 정도로 조선의 식민지화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일제가 조선의 보호국화를 최종 결정한 것은 1905년 10월 27일 내각회의에서 ‘조선보호권확립실행朝鮮保護權確立實行에 관한 각의결정건閣議決定件’을 발표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이미 영국과 미국이 동의하였고 열강도 대세로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조선에 대한 보호권 실행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임권조 공사는 일진회로 하여금 보호조약 체결을 찬성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게 하는 등 조선인도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를 찬성한다는 여론을 조작하게 하였다.

11월 10일 이등박문이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11월 15일 고종을 강제로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이등박문에게 조선의 대외관계를 내용적으로 일본에 위임한다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조선이 외교권을 유지하며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각국 대표도 조선에 주차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이등박문은 외교권만 위탁하면 내정은 완전히 자치自治할 수 있다고 하면서 외교권 위탁에 대해서는 일말의 융통성도 두지 않았다. 註41) 11월 17일 이등박문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대장을 동반하고 궁궐에 들어가 대신들을 협박, 18일 오전 1시경 임권조 공사와 박제순 외부대신이 협정에 서명하였다. 註42) 을사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정부日本國政府와 한국정부韓國政府는 두 제국帝國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 일본국정부는 동경東京에 있는 외무성外務省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監理指揮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제2조 :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제3조 :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在韓國日本領事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장리掌理할 수 있다.

제4조 :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註43)


이 조약은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대행한다는 제1조와 제2조,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제3조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1월 22일 통감부統監府 및 이사청理事廳의 설치에 관한 칙령을 공포하였고, 23일에는 협약의 체결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를 각국에 통보함과 동시에 조선정부에 대해서는 외부와 재외 공사관을 공식적으로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국 주재 조선의 외교관은 일본측의 요구에 대하여 조선정부의 철퇴명령은 물론이고 협약체결도 받지 못했다며 철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외부대신 이완용은 12월 14일 프랑스·독일·미국·청·일본 주재 공사 및 영사에게 보유기록 및 관유재산을 일본대표에게 이전하고 철퇴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註44)

또한 일본정부는 조선 주재 각국 공사관도 조속히 철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45) 이러한 일본측의 요구에 따라 미국은 11월 24일 가장 먼저 공사관의 철폐 의사를 보였으며, 10월 17일 귀국하였던 이탈리아 공사는 서울에 부임하지 않은 채 공사관의 폐쇄를 결정했다. 이후 12월 초까지 대부분의 외교사절이 서울을 떠났다. 이로써 조선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일본외무성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미국·프랑스·독일청·이탈리아·벨기에·러시아 등 조선에 파견된 각국의 영사는 일본 외무성에 파견신청을 하여 천황의 승인을 받아 통감부를 통보하고 통감부는 조선정부에 이를 통고하는 형식으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조선 주재 각국 공사관의 철폐는 결국 일제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를 이들 열강이 인정함과 동시에 향후 조선의 식민지화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 통감부 설치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한편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는 조선의 내정까지도 간섭하게 되었다. 물론 을사늑약에는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었고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여 식민지화의 기초를 확고히 한 후 대륙침략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통감의 권한을 이와 같이 확대·해석하는 근거는 재청在淸특파대사로 북경北京에 머물고 있던 전 외무대신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의 조약문 해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통감의 직무권한을 협약 규정만으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고 종래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및 약속은 협약과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유효하다는 협약 4조의 정신에 근거하여 통감은 외교사무 외에 종래 조선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의 조약 및 약속을 실행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註46)

이러한 의미를 갖는 통감부는 1905년 11월 22일 일본국 칙령 제240호 통감부 및 이사청 설치의 건’ 註47)에 따라 1906년 2월 1일 설치되었다. 이에 따르면 통감부는 경성에, 이사청은 경성·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마산 및 기타 필요한 곳에 두어 을사늑약에 따른 여러 사무를 관장하게 할 것이 규정되었다. 부칙에는 당분간 통감부와 이사청의 업무를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집행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국 칙령 제267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가 전체 33조로서 반포되었다. 이에 의하면 한국 경성에 통감부를 두고제1조, 통감부에는 친임관親任官인 통감을 두는데, 그는 일본 천황에 직속하고 외교에 관해서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에 관해서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제2조.

또한 통감은 조선에 대해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일본주차 외국 대표자를 제외한 조선에서의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고, 조선에서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여러 업무를 감독하는 지위였다제3조. 아울러 통감은 조선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조선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으며제4조, 통감부령을 발하고 금고 1년 이하 또는 벌금 200원 이내의 벌칙을 부과제7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구역을 정하는 것도 통감의 직무였다제22조. 통감부에 소속되는 직원은 칙임관勅任官인 총무장관 1명, 칙임 또는 주임관奏任官인 농상공부 총장과 경무총장 각 1명, 주임관인 비서관 1명, 서기관 7명, 경시 2명, 기사 5명, 통역관 10명, 판임관判任官인 속屬·경부·기수·통역생을 합쳐 45명을 두게 되어 있으며제11조, 통감 유고시에는 조선수비군 사령관 또는 총무장관이 임시통감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제13조.

이상의 법령을 통해 볼 때 통감은 사실상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의 총독과 큰 차이가 없었다. 특히 통감이 일본내각이 아닌 천황에 직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감에 대한 지휘감독권이 명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만총독이 독자적인 명령제정권을 갖고 대만을 통치하고 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내각이 통감에 대한 지휘감독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통감의 소관 사무에 대해 내각 총리대신에 수시로 보고하게 하였고 총리대신 및 각부 대신이 조회·통첩·협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대만총독과는 달리 통감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장치를 마련하고자 한 일본내각의 의중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註48)

이와 같은 법령의 정비 후 일제는 1906년 2월 1일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초대통감으로 3월 2일 이등박문이 취임하였다. 그는 통감에 취임하기 전 이미 4차례나 일본의 총리대신을 역임한 인물로서 일본 정계의 원로였다. 따라서 그가 초대통감으로 임명된 것은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략적 발판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가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 국장으로 그의 장례를 거행한 것은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라도 통감의 권한은 확대되어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수비군을 ‘원수’의 자격으로 통수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통감부 체제의 실시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통감부 설치 이후 식민지 지배에 필수적인 기구들을 설치하여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를 강화하였다. 그것은 통감 이등이 부임한 이후 고종을 최초로 알현할 때부터 통감 본연의 임무인 외교업무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 없이 내정에 대해서만 얘기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통감부 설치 이후 만들어진 기구들은 외교분야는 소홀히 한 채 조선에 대한 침탈을 위한 기구 및 경찰조직들이었다. 즉 통감부 출범 당시 총무부비서과·서무과·외사과·내사과·법제과·회계과·토목 및 철도과, 농상공부상공과·농무과·광무과·수산과·산림과, 경무부고등경찰과·경무과·보안과·위생과의 3부 16과였던 산하기구에 1907년 3월 5일 외무부외무총장가 신설되었다. 4월에는 ‘통감부 사무분장 규정’의 개정으로 총무부의 외사·법제·토목 및 철도의 3과가 폐지되고 지방과가 신설되었으며, 외무부에 한국과·외국과 2과가 설치되었으며, 농상공부의 농무과와 산림과의 2과가 농림과로, 경무부의 고등경찰과가 폐지된 한편 법제심사과가 설치되었다. 이외에도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통감부의 설치와 동시에 외청으로 설치되었으며, 1906년에는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조선 내에 근무하는 기존의 고문관·참여관·보좌관·고문경찰 등은 모두 통감의 지휘와 통솔을 받게 되었다. 註49)

이러한 일련의 내정개혁은 통감이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고 황제권을 해체하고자 하는 준비이자 과정이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고종과 그의 측근들은 이러한 일제의 의도에 저항하였고, 일반 민중들은 의병투쟁과 언론활동·애국계몽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조 성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