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통감부의 조직과 기능, 통감부의 보호체제 구축-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7. 08:16

제2장 통감부의 보호체제 구축


통감부의 조직과 기능

이사청 조직과 기능


1. 통감부의 조직과 기능


1. 통감부의 조직

일제는 1905년 11월 22일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건’을 칙령으로 공포한 이후, 같은 해 12월 20일 추밀원 회의를 거쳐 통감부 관제를 칙령으로 공포하였다. 註1) 이는 모두 32개조로 이뤄졌는데 통감의 권한과 임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르면 한국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친임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일본왕에 직예直隸하고 외교에 관해 외무대신을 경유하여 총리대신를 거치고, 기타 사무는 총리대신 재가를 받도록 하였다.

통감은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한국에서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와 일본 관헌 및 공서公署가 시행해야 할 제반 정무를 감독하고, 주한일본주차군 사령관에게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 한국정부에 고용된 일본인 관리들도 지휘·감독하도록 되었다. 또한 통감부령을 발포하고 금고 1년 이하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아울러 통감에게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즉 통감은 대한제국 소관관청의 명령 또는 처분이 을사늑약 혹은 법령에 위배되거나 공익을 해치거나 권한을 넘었다고 판단하여 이를 정지·취소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관리들도 교체할 수 있는 인사권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통감은 일본 내각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통감의 지위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통감부 직제와 직원 등은 〈도표 1〉과 〈표 2〉와 같다.

〈도표 1〉 통감부 직제(1906년 설립 당시)



출전 : 『구한말관보』 1905년 12월 21일 「호외」.

〈표 2〉 통감부 직원 및 정원
직 명정 원(명)구 분
총무장관1칙임
농상공부장관1칙임 또는 주임
경무총장1
비서관전임 1주임
서기관7
경시2
기사5
통역관10
전임 4~5판임
경부
기수
통역생

출전 : 『관보』 1905년 12월 21일 「호외」


1906년 2월 1일 통감부 및 부속관청 개청 당시 통감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비롯하여 총무장관에 학원정길鶴原定吉, 농상공무장관에 목내중사랑木內重四郞, 경무총장에 강희칠랑岡喜七郞 등이 임명되었다. 註2) 이외에 통감부 설치 이전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었던 고문들은 내각 보좌관·교관 또는 기타 직에 편입되었다.

이등박문은 1906년 11월 귀국한 지 4개월만인 1907년 3월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동안 한국 내에서는 대한자강회·서북학회 등 계몽운동 단체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은 친일내각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연일 터져 나왔다. 1907년 2월 대구에서는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나인영·오기호 등 오적암살단은 을사오적 대신들을 노상에서 습격하는 등 친일파들이 궁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註3)


1906년 2월 1일부터 외교업무를 강제한 통감부 전경

국내 반일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통감은 1907년 4월 9일 제14회 협의회를 열고, “만일 러시아와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했다면 틀림없이 만주 및 한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즉시 한국을 병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불온하다면 한국은 끝내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루 아침에 당국에 반란을 일으키면 일본군을 동원해서 반일운동을 차단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註4)

이등박문은 친일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광무황제의 반대에도 1907년 5월 22일, 이완용내각을 출범시켰다. 註5) 이완용은 내각 조직 방향을, 첫째 시무에 통하여 ‘한일제휴韓日提携’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둘째 시정개선에 열심할 것, 셋째 어떤 곤란한 상황에도 이상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중도에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친일파들로 내각 구성을 마쳤다. 註6)

이완용내각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제16회 협의회에서, 이등박문은 정치개선·교육보급·식산흥업 등에 역점을 둘 것을 지시했다. 또한 개별적으로 황제를 만나거나 상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부득이 황제를 알현할 때에는 반드시 참정대신과 동행하도록 하였으며, 황제가 개별적으로 소견召見하더라도 이를 거부토록 하여 황제를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고자 했다. 註7)

이등박문은 정치개선 일환으로 6월 14일 의정부관제를 일본과 같은 내각제內閣制로 고쳤다. 이에 각부의 협판은 차관으로, 참서관은 서기관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 이완용은 탁지부대신에 고영희高永喜, 법부대신에 조중응趙重應 등을 등용하였으며, 각 대신들과 재야 단체의 반발에도 이등박문이 추천한 일진회장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에 임명함으로써 모든 인선을 마무리 했다. 註8) 이로써 총리대신은 행정부 수반이 되어 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 각부를 통할하고, 필요한 경우 각령閣令을 발포하거나 각부의 처분 또는 명령을 중지시키는 칙재勅栽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점차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 광무황제는 1907년 6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려 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특사들의 활동은 일제의 방해와 서방 열강의 냉대 속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사들의 활동을 보고 받은 이등박문과 일본정부는 광무황제를 양위시킬 좋은 기회라 여겼다.

7월 12일 일본 내각은 광무황제의 양위와 외무대신의 한국 파견을 결정하였다. 서원사西園寺 총리는 “제국정부는 현하의 기회를 잃지 말고 한국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고 그 실행에 관해서는 실시의 정황을 참작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는 극비의 대한처리 요강안을 내려보냈다. 註9) 당시 처리요강에서 한국에 대한 조치로 3가지 안이 마련되었다. 제1안은 한국 황제로 하여금 대권에 속하는 내치정무內治政務의 실행을 통감에게 위임시킬 것, 제2안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내정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모두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하고 또 시정개선에 관한 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을 약속받을 것, 제3안은 군부대신·탁지부대신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에 임명토록 할 것 등이었다. 별지 2의 요강에서는 한국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 장래의 화근을 단절시키는데 이 수단을 취함이 불가피함. 단 본건의 실행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실행함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국왕 및 정부는 통감의 부서 없이는 정무를 실행하지 못하도록 하며, 주요 부서는 일본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로 하여금 대신 혹은 차관의 직무를 실행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일제는 헤이그특사 파견을 일본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광무황제를 몰아붙였다. 註10)

이등박문은 광무황제를 알현하여 헤이그특사와 관련하여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조약위반을 통박하고 책임을 물어 양위를 강요했다. 결국 광무황제는 7월 19일 새벽, 황태자 대리 조칙을 발표하였고, 통감은 다음날 서둘러 양위식을 거행해 버렸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서울 각지에서 일본의 불법적 처사를 규탄하는 동시에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회보』 건물을 부수는가 하면, 마구잡이로 일본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완용의 집이 불태워지고 통감이 저격 목표가 되는 등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져 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는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통감은 일본 외무대신 임동林董, 일본군 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리대신 이완용 등과 회합하여 한일협약 및 이의 시행에 관한 비밀각서인 ‘한일신협약’이른바 정미조약을 체결했다. 註11) 이로써 통감부는 한국 내정 간섭을 공식화하였다. 통감은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에 대한 승인권, 고등관리 임면에 대한 동의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한국 내정의 최고 감독권자가 되었다.

통감은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한다는 정미조약 제5조에 근거하여, “한국의 관리는 법률·정치사상이 결핍되어 있고, 더불어 임면任免에서 사무가 숙달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관리로 일본인을 임명하여 사무처리를 원활하게 한다”며, 한국인 차관들을 몰아내고 일본인들을 차관에 임명했다. 註12) 궁내부 차관에 통감부 총무장관 학원정길鶴原定吉, 내부에 농상공부총장 목내중사랑木內重四郞, 학부에 표손일俵孫一, 탁지부에 황정현태랑荒井賢太郞, 법부에 창부용삼랑倉富勇三郞 등이 임용되었다.

이어 1907년 9월 통감부의 조직을 개편하여, 총장을 폐지하고 부통감을 친임으로 두어 통감을 보좌하고 통감의 유교시에 직무를 대리케 하였다. 아울러 한국의 궁내부 및 각부의 차관급들을 통감부의 참여관으로 하는 구관제에서 농상공부와 경무警務를 폐관하고 새롭게 전임 2명의 참여관과 비서관 1명을 두어 기사 6명, 통역관 1명, 판임관 16명으로 규모를 축소시키고 경시 및 경부는 폐지시켰다. 註13) 대신 감사부와 지방부를 두고 국정전반의 감사 특히 재정감사와 지방의 조직적인 지배체제를 확대·강화하였다.

〈도표 2〉 1910년 '합병' 당시 조직 편제(1909년 6월 현재)


출전 : 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박영사, 1998, 115쪽.


또한 재판소의 구성과 감옥 설치까지 아울러 한국인에 대한 저항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고자 하였다. 1907년 7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통감부에 위탁하는 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과 형행권刑行權을 탈취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법무·감옥·재판소가 폐지되고 통감부의 사법청·감옥·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의 경찰권까지 빼앗고 말았다.

통감부는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수순으로 1909년 10월 직제를 다시 개편하여, 통감부 관방 내에 문서과·인사과·계과를 두고, 외무부에도 영사관 및 외국인과 한국인의 심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부에서는 지방의 생산·금융·종교·교육·사법·경찰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케 하는 부部-과課의 체제를 확립하고 한국 ‘병합’의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註14) 당시 직제는 〈도표 2〉와 같다.


2. 통감의 권한

통감부는 일본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독립기관이고, 통감은 친임관으로서 천황에 직예한 천황권의 대행자이다. 註15) 이는 통감부를 일본정책 수행상 최상위에 둔 것으로 한국을 사실상 일본의 통치지역의 일부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외교문제는 일본의 외교노선과 맥을 같이 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일본의 외무성을 거쳐 총리를 경유하도록 규정하였다. 그외는 모두 각성各省을 거치지 않고 총리를 경유하여 상주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통감의 지위는 1910년 8월 ‘병합’ 당시 뿐만 아니라 이후 총독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통감은 일본을 대표하는 동시에 일본 주재 외국대표자를 경유하는 것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외국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계되는 사무까지 아울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정사무에서 외국인과 관계 있는 것은 모두 감독하도록 하여 한국의 외교문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한국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한국수비대 사령관에 병력사용을 명령할 수 있는 등 한국인의 저항을 탄압할 수 있었다.

한국의 행정사무 집행에서 통감은 한국정부에 이첩하여 그 실행을 요구할 수 있고, 또한 집행 후 한국정부에 통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일본인 외에 타국인의 용빙은 통감의 승인 또는 동의가 있도록 하여 타국의 간섭으로 제한받을 수 있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했다. 1907년 이후 일본인 외에 외국인은 단 한 명도 한국 내정에 간여하지 못하였다. 1909년 말까지 임명된 일본인 관리는 2,700여 명이었다.

1906년 2월 공포된 ‘통감부령공문식’에 따르면, 註16) 통감부령은 통감부령임을 명기하고 통감이 서명하고 일자를 기입하여 공포하며제1조, 이를 『한성신보』에 공고하고제2조, 각 관청에 도달한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만 7일을 경과한 후 이를 시행하되, 단 시행시기가 정해졌을 경우에는 예외로 하였다제3조. 이사청의 법령은 이사청령·고시·포달布達 등의 형식이었다. 훈령은 통감부의 규칙에 해당하고 고시는 일반적인 사항이나 한국법률을 적용할 경우에 활용되었다. 註17)

통감은 해당관청에 발하는 명령 또는 처분에서도 이를 정지 또는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각부의 관리를 감독하고 그의 진퇴를 전단할 수 있었다. 각부의 관리에 대한 서위와 서훈을 상주하여 일본인 관리와 한국인 관리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 한국정부가 고등관리를 임면할 때에도 통감의 동의를 반드시 받도록 하여 인사권까지 간여토록 했다. 이외에도 법령 및 처분의 심사, 식산 및 금융, 종교 및 교육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등 한국 국정 전반에 걸쳐 통감의 권한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결국 한국의 독자적인 결정과 집행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식민통치하에 있었다. 1907년 7월 정미조약 이후에는 통감의 권한이 보다 조직적으로 강화되어 적극적으로 한국을 지배해 나갔다. 정기 또는 임시회의를 이유로 한국대신들을 통감관저에 소집하여 회의를 주재하고 여기서 한국의 ‘시정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이미 실시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사항을 대신들에게 통고하여 집행을 강요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