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과 통감부 설치-제3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몽유도원 2013. 1. 16. 15:58

제1장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과 통감부 설치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1. 일제의 보호국화 추진


1. 청일전쟁과 일제의 대조선정책

1868년 단행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결과 일본에서는 막부정권이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이는 18세기 말 이후 번벌藩閥들의 저항이 보다 격화되고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막부정권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치유신으로 왕정을 복고한 명치정부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한편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함은 물론 막부세력으로 대표되는 구세력의 저항도 무마하고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명치정부는 지금까지 번주藩主가 그 지방의 토지와 인민을 사유하였던 것을 없애고 폐번치현廢藩置縣과 징병제徵兵制의 실시 즉 천황제天皇制를 강화·정착시키기 위한 권력강화 장치와 개화시 구미열강에 유린당한 일본의 패배감과 열등감의 회복, 더 나아가 종래의 동아시아질서 속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던 일본의 위상을 극복할 방안 등을 마련해야만 하였다. 또한 막부사회를 주도해왔으나 중세 막부사회에서 근대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무사계급의 불만을 해소해야 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목호효윤木戶孝允은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대륙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제1보가 조선을 경영하는 것이다. … 속히 천하의 방향을 하나로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무례를 문책했을 때 조선이 이를 불복하면 이와 같은 잘못의 댓가로 조선의 국토를 공격하여 크게 일본의 위엄을 신장시킬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 획득하기 용이한 조선·만주·중국 본토를 대체지로 하여 …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도록 해야 한다” 註1)고 하였다. 이는 “조선은 무례하여 일본의 무위武威를 보여주어야 하고 불평무사군不平武士群을 이주시켜야 될 나라” 註2)라는 평가와 의미가 같은 것으로, 정한론征韓論이 막부사회의 무사들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한론은 이미 막부 말기에 탄생하였음을 다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미 미영米英과 화친和親한 이상 우리측에서 절교絶交함은 신의에 어긋나므로 국토를 지키고 조약을 엄히 하고 미영을 묶어놓고 북해도北海道를 개척하고 유구琉球를 편입, 조선을 빼앗고 만주를 꺾고 중국을 누르고 인도에 다다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취적 자세를 펴야 한다. 註3)


결국 일본은 우선 조선을 정벌하여 개항시 구미 열강에게 당했던 패배감과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특징은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킨다는 표현으로 굴종하면서 조선·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침략적인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것은 곧 사상적으로는 구미제국을 만이蠻夷 혹은 외이外夷라 멸시하는 한편 천황이 주변제국에 대해서는 중화황제中華皇帝로 군림해야 한다는 논의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근대 일본의 천황제의 원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한론에 바탕하여 일본은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켰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여 조선을 강제 개국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을 조선에서 축출하는 한편 청국 내에 일본의 군항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을 경쟁자로 간주하지 않던 서구 열강들도 일본의 성장에 긴장하게 되고 일본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나타났다.

물론 청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일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래 일본의 일관된 정책이었음은 물론이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조일수호조규 6개월 후인 1876년 7월 6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조선국의정제항일본인민무역규칙朝鮮國議定諸港日本人民貿易規則’ 등 부속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보장해주는 불평등한 성격의 조약임이 보다 명확하게 되었다. 註4)

이 조약들의 내용 중 무역에 관한 조항만을 정리하면 부산항을 비롯한 3개 항구의 개항, 무관세무역, 개항장 내에서의 일본화폐의 유통, 자유무역, 조선연안 무역에서의 일본의 특권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1876년 개항한 부산에 이어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을 개항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항구의 개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만이 아니라 조선이 1882년 미국을 필두로 서양 제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미국·영국·청·러시아 등 열강의 침략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 무관세조항은 국제 관계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불평등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국내시장과 유치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마저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주요 재원이 될 수 있는 관세수입을 박탈당한 셈이 되었다. 이와 함께 자유무역조항은 면포 등 외래상품의 무제한 유입과 쌀·콩 등 국내 곡물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경제적 수탈과 지배를 보장해주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여기에 개항장 내에서 유통이 허용되었던 일본화폐는 1883년 이후 일본 제일은행이 조선의 해관세海關稅를 관리하고 조선정부가 당오전當五錢 등 악화를 발행하면서 일본화폐가 조선인민의 신용을 획득하는 단서가 되었고 조선상인을 일본상인에 종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상 조선의 경제가 일본에 점차 종속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화정책이 진전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에 의해 저항받거나 견제받기도 하였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조선 최초의 저항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임오군란은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訓練都監 군인들이 선혜청宣惠廳 도봉소都封所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하급군인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도봉소사건의 결과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 4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훈련도감 하급군인이 많이 살고 있던 왕십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들이 거주하던 왕십리는 서울의 빈민들이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지역이었다.

한편 하급군인과 빈민들은 계층적으로 일치하였다. 그것은 서울의 하급군인은 대부분이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수공업 혹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시근교에서 야채를 재배하여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급군인들과 빈민들은 계급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빈민들은 민씨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영세 수공업의 몰락, 미곡수출로 인한 곡물가격의 폭등 등으로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또한 하급군인들은 5군영의 폐지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봉급이 13개월이나 지불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급군인들의 거주지인 빈민촌락에 통문이 돌려졌다. 통문의 내용은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인들은 6월 9일 아침 동별영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통문에 호응하여 모인 군병들은 먼저 무위대장 이경하와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등소等疏를 올렸다. 등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인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행사에 돌입하여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인들을 소집하였다. 영세상인과 수공업자 등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그후 이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에 구속되었던 죄수들을 석방하는 한편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그리고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살해하고,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구식 군인에게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의 지급과 별기군의 폐지를 약속하고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대원군이 집권하자 일본과 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은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정권과 일본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하였다. 대원군정권이 민씨정권의 폭압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던 하급군인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에 청군은 대원군 세력을 체포·투옥하여 대원군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하급군인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세력을 진압했다.

이로써 임오군란을 진압되었으나 조선을 둘러싼 내외정세는 급격하게 변하였다. 즉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경제침투를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하던 일본의 기세는 일단 한풀 꺾였다. 반면에 일본의 기세에 눌려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에 손상이 갔던 청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청의 경제적 영향력은 급속하게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청군의 조선 주둔은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정치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영향력에서도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던 개화파의 근대 개혁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특히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 청에 의한 조선의 속방화屬邦化정책은 자주독립과 개화를 꿈꾸고 있던 이들에게 청국타도를 결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개화파를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결과 개화파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직면했다.

개화파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개화파는 다음과 같이 갑신정변을 준비하였다. 첫째는 신식군대를 양성하였다. 즉 윤웅렬尹雄烈은 1883년 1월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있으면서 북청北靑지역의 장정 약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군대로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3월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된 박영효朴泳孝도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도합 1,000여 명의 신식군대를 양성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한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 생도들이 1884년 7월 귀국하여 이들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또한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해 43명으로 이루어진 비밀무장조직 충의계忠義契를 조직하여 신복모申福模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개화파가 무장정변을 준비하던 중인 1884년 5월 23일경 청은 프랑스와 전쟁을 대비하여 서울에 주둔하던 3,000명의 군사 중 1,500명을 베트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후 1884년 8월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복건함대福建艦隊를 격파하는 등 전쟁은 청국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기회로 개화파는 1884년 9월 정변을 결정하였다. 개화파는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郎과 협의하여 일본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의 차입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일본측의 배신과 청군의 개입으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개혁운동인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고 정변의 주체들은 체포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대화운동은 이후 약 10년 간 중단되고 말았다. 반면 보수세력 영향력은 강화되는 계기였다.

다른 한편 청에게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고자 김옥균 등에 대한 후원을 약속했던 일본은 청군의 개입으로 주도권 회복이 무산된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즉 정한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침략하고자 했던 명치세력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일본은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일본 내의 여론은 당시 발행되었던 일본 신문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자유신문自由新聞』은 “신속히 군대를 보내 조선 경성을 점유하고, 한편으로는 한왕韓王 및 개화당이 청국 때문에 위압을 받아 그 뜻을 펴지 못하여 해를 남겼으며, 한정韓廷이 멋대로 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단을 북경 정부에 물어 충분하고 만족한 처분을 요구해야 할 뿐” 註5)이라고 하면서 청국이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조야신문朝野新聞』은 “그淸와 우리의 형세를 비교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승산이 있다면 이번 기회를 잃지 말고 우리가 조선에 국권을 확장하는 것이 우리 조정의 왕의 책임” 註6)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신문은 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것은 청의 군사력에 의해 일본의 조선 침략이 중단되고 명치정부가 추구하고자 했던 제국주의로의 성장이 좌절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대조선정책은 조선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그 결과 천진天津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전환을 촉진하였던 것이 1885년 4월 15일 발생한 거문도사건이라 할 수 있다. 註7) 즉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복택유길福澤諭吉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선정부는 나라를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민을 착취하는 구폐를 일소하고자 하려는 의지도 없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군비확장을 통해 청과 러시아에 대항할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註8)

복택유길의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실은 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본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국에 의해 감행된 거문도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조선 진출 혹은 점령이 향후 일본의 조선 혹은 대륙진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처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조선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청·일본·영국·러시아의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국정부에 ‘조선처리 8조’를 제안하였다. 그것은 첫째 조선의 내정과 외교 등 정무를 일본과 청국이 공동으로 감독·관리하며, 둘째 궁중과 정부를 구별하여 정부의 관여없이 궁중으로부터 밀지 하달을 막아 국사 개입을 못하게 하고, 셋째 조선정부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을 지도적 지위에 임명하는 애용을 먼저 이홍장과 상의한 후 이홍장과 일본공사가 공동으로 다시 협의한 후 조선이 처리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제안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사실상 묵인하여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서 분쟁을 피하면서 내정과 외교를 공동으로 관리하여 일본의 기존세력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청의 이홍장은 일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조선의 내정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원세개袁世凱를 ‘주차조선통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하였다. 여기에 더해 이홍장은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천진협약을 체결함으로써 1887년 2월 영국의 거문도 철수를 이끌어내어 일본의 조선정책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정책은 ‘탈아론脫亞論’과 ‘흥아론興亞論’,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 강화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과 같이 일본의 국운이 걸린 사건에서 청에 패배한 원인과 향후 과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논리라 할 수 있다. 즉 일본이 조선에서 청에 패배한 것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라 보면서 한편으로는 군비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발전을 같이 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되어 일본의 대조선정책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일본我日本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변에 있지만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여기에 불행한 것은 근린近隣에 지나支那라 하고 조선이라 하는 차이국此二國의 인민도 고래 아시아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에서 살아온 것은 아일본我日本과 다르지 않지만 … 문명개화의 유행을 만나지 못한 양국은 그 전염의 천연을 어겨 무리하게 이를 피하고자 하여 실내室內에 한거閉居하고 공기의 유통을 막고 있어서 질식되지 않을 수 없다. …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삼국의 지리상접地理相接 때문에 혹은 이를 동일시하고 지한支韓을 평가함으로써 아일본我日本을 생각하는 의미 없지 않다. … 그 영향이 사실로 나타나서 간접으로 아외교상我外交上의 고장을 이룬 것이 실로 적지 않다. 아일본我日本의 일대 불행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금일의 모謀를 위함에 아국我國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공共히 아시아 부흥의 유예猶豫 있을 수 없다. 차라리 기오其伍를 탈脫하여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공히 하고 기지나조선其支那朝鮮에 접하는 법도 인국隣國인 고로 특별히 해석을 내릴 것이 아니라 서양인이 이에 접하는 풍風으로 따라서 처분할 수 있을 뿐 … 註9)


결국 곧 일본이 제국주의시대에 부국강병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세력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탈아입구脫亞入歐’만이 일본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제기된 것이었으나 이 시기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재정립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산현유붕山縣有朋은 1890년 12월 6일 일본의 외교·군사문제에 관한 시정방침연설에서 일본의 독립자위의 길은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을 정하여 방어하는데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일본의 이익선의 초점은 조선에 있다고 지적했다. 註10) 이 말은 곧 일본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청이나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서는 안되며,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일본의 이념은 황인종 아시아 국가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그 지도국가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서 “백인종인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황인종인 아시아 제국諸國은 단결하여 일어서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조선이 합동하여 대동大同이라는 새로운 합방국合邦國을 만들고 대동국大同國이 청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수립” 註11)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일본 내에서는 이미 이 시기에 조선 진출을 위해서라면 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동시에 조선에 파병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군의 조선 파병은 단순히 조선 진출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 영국 등 외국과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국내 경제 불황으로 위기에 몰린 이등박문伊藤博文 내각이 해외파병을 통해 국내 불만세력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일본정부는 청국이 조선에 출병시 일본이 청군에 상응하는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며, 조선 내에서 일본과 청의 세력균형을 도모하고자 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개전開戰의 책임을 청국에 전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청일 양국이 군대를 파견한 이상 충돌하여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상황이므로 개전 시기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쟁목적을 관철시켜야만 한다. 즉 가능한 한 평화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영예를 보존하고 청일양국의 권력 균형을 유지해야 함과 동시에 우리는 되도록 피동자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언제나 청국이 주동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註12)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


이렇게 조선 파병을 결정한 일본은 파병의 명분으로서 주한일본공사관과 일본인의 보호를 내걸었다. 즉 조선정부가 스스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없어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면 조선 내의 일본인의 안위가 의심스러우므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외국군의 주둔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청국과 공동으로 조선의 질서 회복과 내정개혁을 지원한다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 및 ‘조일맹약朝日盟約’을 체결하여 철도·항만 등의 이권과 군사 주둔권을 획득하고 청의 종주권을 배제하는 한편 갑오개혁 이후 개화파 정권에 다수의 고문단을 파견함으로써 보호국화의 단서를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1894년 8월 17일 각의에서 조선을 실질적 보호국화할 것을 결정하였다. 註13)

일본의 흥아론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 보다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면서 나타난 조선내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기사는 이러한 당시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일본 사람들은 황인종 형제의 모든 나라를 권고하고 인도하되 작은 이익을 탐치 말며 작은 분에 충격치 말고 한 가지인 종자들을 서로 보호할 큰 계책을 세워 동양 큰 판에 평화함을 유지케 하는 것이 그 하나님께 정하여 주신 당연한 의무이다. 註14)

만주는 동아의 문호라서 만주를 잃게 된다면 우리 한국은 위태로워질 것이며, 중국은 분열된 것이니 한국이 위태롭고 중국이 분열된다면 러시아가 반드시 동양에 세력을 크게 키워 장차 일본 열도를 병탄할 것이니 이는 만주일로가 러시아인의 일본 병탄에의 문을 열게 되어 일본의 안위존망이 또한 만주의 득실과 관련되어 일본은 부득불 일전할 것이다. 註15)


더욱이 『황성신문』은 “청일전쟁 때 일본이 우리 한국 독립을 도와주는 것을 제일 의무로 삼아 오늘에 이르도록 독립의 기초를 확고히 지킨 것은 모두 일본의 힘” 註16)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이 시기 이른바 ‘근대 언론’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그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일본측의 주장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특히 『독립신문』에 나타난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인종주의는 첫째, 국민에게 약육강식과 강자의 권리만이 인정되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국제사회의 인종이나 국가간의 갈등과 싸움을 설명하고, 한국민에게 약자의 입장에 있는 한국의 현실을 인식시키고 국가의 근대화의 긴급성을 계몽시키기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당시의 세계를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의 시기로 보고 아시아에서 백인종의 세력 확대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을 중심으러 황인종의 단합 내지는 아시아 연대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註17)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일본이 황인종을 지도할 국가로서 상정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의 인식은 당시 근대적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히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의 일부에 깊숙이 전파되었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자 한 세력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을 아시아 제국의 지도국가로 인정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부국강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논리는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보다 노골화하였다.


2. 러일전쟁과 일제의 대조선정책

조선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은 1858년 애훈愛琿조약과 1860년 북경北京조약이 체결된 이후의 일이었다. 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양국의 정식관계는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조선에서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과 대륙진출을 추진하던 일본 이외에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진출과 그 시기를 같이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나 러시아와 일본은 동아시아지역에서 정치적·전략적 이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경쟁구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철도의 발달로 아시아 내륙 깊숙이 수송망을 건설하면서 인도와 중국에서 남하정책을 추진했다. 일본도 역시 청일전쟁 이후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결국 양국이 조선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특히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은 일본열도의 심장을 겨눈 비수이면서 동시에 대륙 진출의 관문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곧 일본의 제국주의국가로의 성장의 본질적인 열쇠가 조선에 있다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러시아의 경우에도 조선은 극동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배후기지였으며, 러시아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인 부동항을 제공해줄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 시기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지역으로서 양국이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조선을 둘러싼 이러한 경쟁 구도 속에서 또 다른 세력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영국이었다. 영국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라기보다는 자신의 세계 전략 속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였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영국은 청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였으나 청일전쟁 이후에는 청의 역할을 대신할 세력의 부재와 삼국간섭에서 배제되어 동아시아외교에서 고립되었으므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85년 거문도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성장과 함께 영국은 과거 청에 의존하였던 러시아 견제를 일본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2년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의 체결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나섰다. 이와 같이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영일동맹의 기능은 유럽의 국제정치에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였다. 註18)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이와 같은 이해 대립 속에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국권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에 대한 조선 내의 입장은 크게 러시아 제휴론과 러시아 위협론의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러시아 제휴론자들은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청과 일본 등 특정 세력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걸맞는 세력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세력은 바로 러시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독립신문』에 보도된 다음과 같은 김가진金嘉鎭의 발언과 같은 목적으로 외국인 고문관을 임명하였다고 판단된다.


대한의 시급함은 법률을 공평하게 하며 재정을 정돈하고 군제를 엄격하게 하는 일이라. 이 세 가지는 대한 사람의 문견과 관습으로는 어느 때까지도 못할 터이니 속히 고문관을 선임하여 전권을 맡겨 그 성공하기를 독촉하라. 註19)


이러한 조선정부의 목적과는 달리 청·일본·러시아 등은 각각 자국인이나 자국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조선정부에 공작하였다. 그리하여 갑오개혁기에는 일본인들이 고문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아관파천기에는 러시아측의 인물들이 고문직을 차지하였다. 註20) 따라서 러시아 제휴론을 확산시키는데는 이러한 고문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친일정부가 들어선 시기인 갑오개혁기 고문관이 된 미국인 러젠드르Le Gendre와 아관파천기에 러시아의 고문직 독점을 위한 활동은 조선정부 내에서 러시아 제휴론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기 대부분의 고문관은 일본인이었으므로 일본인 고문관의 활동은 곧 일본의 조선보호국화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였던 정상형井上馨은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이 직접 개입하여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정상형에게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개혁은 조선보호국화 작업을 위한 필수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894년 11월 20~21일 조선정부에 제출한 ‘20개조 개혁안’ 이후 1895년 6월 모두 13명의 일본인이 조선정부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갑오개혁기 조선정부에 의해 임명된 외국인 고문관은 〈표 1〉과 같다.

〈표 1〉 갑오개혁기 정부 고문관 명단 註21)
이 름국 적부서명고빙기간
石塚英藏내각고문94.12~95.8
岡本柳之助궁내부/군부 고문94.12~95.2
C. Legendre궁내부고문95.7~99.9
서재필중추원고문95.5~97.12
齊藤修一郞내부고문95.~
太庭寬一내부고문95.5~
澁谷加藤次고문보좌관/내부고문95.~
仁尾惟茂탁지부고문95.1~96.2
McLeavy Brown탁지부고문94.10~97.12
C. Greathouse외부고문94.12~99.10
吉松豊作법부고문95.~
星亨법부고문95.4~
野澤鷄一법부고문96.2~97.1
山田雪助농상공부고문95.5~97.5
長谷川義之介농상공부고문95.5~
楠瀨辛彦고문95.2~
武久克造경무청고문94.12~96.2
永島某학부고문95.5~
賴脇壽雄내부고문95.~96.2
栗林彦군부보좌관95.~
野村金五郞학부보좌관95.~
加藤格昌학부보좌관95.~
木村網太郞학부보좌관95.~
佐藤潤象학부보좌관95.~
多田桓내각보좌관95.6~을미기
鹽川一太郞내부보좌관95.6~을미기
恒室盛服내각보좌관95.6~을미기
加藤武관보국고문95.~
阿比留 作경무청보좌관수륜과95.~
齊藤二郞법부보좌관95.~
佐藤衫법부보좌관95.~
高田富三법부보좌관95.~
八島英법부고원95.~
吉松豊作법부고원95.~
淺山顯三보좌관95 초반
栗林次彦보좌관95 초반
佐藤潤象보좌관95 초반
曾我勉(會段勉)보좌관95 초반
武田尙보좌관95.1
國分哲군부번역사무관95.2
麻川松太郞사범학교교관95.~
野村金五郞학부보좌관95.~
加藤格昌학부보좌관95.~
木村網太郞학부보좌관95.~
住永琇三통신국보좌관(농상공부)95.~97.8.3.

다음으로 러시아 위협론은 인종주의와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조선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었다. 註22) 특히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온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이러한 이미지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 특히 김홍집은 “최근 러시아는 도문강 부근에 군함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해상을 돌아 청국의 산동성을 향하여 북경을 공략하려고 한다. … 사건이 발발하면 한국과 일본이 피해를 입으며” 註23)라고 하여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이 조선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고 대련大連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있는 것은 동양의 각국을 점령할 목적을 지닌 것” 註24)이라고 보도하면서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조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19세기말 부동항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정책 일환으로 발생한 1903년 용암포사건龍岩浦事件은 러시아 위협론을 보다 확산시켰다. 즉 부동항을 획득하기 위하여 러시아는 만주와 청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정치적·군사적·경제적인 진출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3국간섭 이후, 특히 아관파천으로 조선정부 내에 친러파가 정권을 잡자 러시아는 1896년 함경북도 경성·경원의 광산이권 및 압록강 유역·두만강 유역·울릉도 등의 삼림벌채권을 획득하고, 러시아 관리를 재정·군사 고문으로 채용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만주에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는 의화단사건을 진압한 이후에도 철군하지 않고 계속 군대를 주둔시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이 1902년 1월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자 러시아는 같은 해 4월 청국과 만주철군협정을 체결하고 10월에 제1차로 군대를 철군하였다. 그러나 1903년 4월 베조브라조프·플레베·아바자 등 만한적극론자滿韓積極論者들이 러시아정부 내에서 실권을 잡은 후 4월 21일 제2차 철군 대신 조선과의 국경지방까지 군대를 남하시켜 압록강 삼림벌채사업에 착수하였다. 5월 상순에는 벌채사업과 그 종업원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러시아군과 만주 마적의 혼성부대가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였다. 이를 용암포사건이라고 한다.

이후 러시아는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고, 만주의 구련성九連城에서 봉황성鳳凰城·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용암포에 이르는 선상에 1개 여단 병력을 배치하고, 6월에는 안동-용암포 간의 수저전선水低電線을 가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7월에 한성주재원 귄스버그가 이용익李容翊에게 접근해 용암포의 조차를 약속받았다. 이에 조성협趙性協이 삼림감리로 파견되고, 7월 20일 용암포조차에 대한 가조약을 러시아 삼림회사 총무인 모지스코와 체결했다. 그러나 이 가조차협약은 독립협회의 강한 반발과 일본·영국·프랑스·독일 등의 항의와 간섭으로 성립되지 못했으며, 용암포는 1904년 통상구안通商口岸으로 선언됨으로써 개항장이 되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조선보다는 만주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부 지식인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는 러시아의 위협이 과장되게 유포되었던 것은 『독립신문』과 같은 언론과 일본의 선전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인은 러시아를 영원한 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군에 대해서는 공포감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보호를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는 외국인의 관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註25)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에 1만원을 기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즉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과 협동하여 동학교도를 동원하는 가운데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조선정부를 개혁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은 결국 러일전쟁을 계기로 결정되었다. 그것은 “조선반도는 유래하길 수동적 반도이다. 그 국민도 식민적 국민이며 혹은 이민적 국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 현재의 주민이 모두 실제로 다른 지방에서 식민하고 이민한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바로써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그 토지와 주민의 사이에 밀접한 연계가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국민에게 선천적으로 애국적 관념 혹은 국가적 정신이 결핍되었음은 식민적 국민 혹은 이민적 국민의 예증이라고 할 것이다” 註26)고 하면서, 조선의 식민지화가 일본에 유리하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러일전쟁 이후에는 “한국을 새로운 일대 식민지로 획득” 註27)했다거나 “일본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풍물이 다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조선” 註28) 등의 표현이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이등청장伊藤淸藏은 자신의 저서 『한국식민관견韓國殖民管見』의 부제를 ‘어떻게 일본의 중소농민을 한국에 이식할까’라고 하여 일본 농민의 조선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집필하였다.

이것은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설립 직후 일본 농민을 조선에 이주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17년까지 매년 일정한 가구를 조선에 농업이민을 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을 국내의 유휴인력의 송출지로서 간주하는 한편 그들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영을 예비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서 조선지배를 논하는 용어는 ‘식민’ 이외에도 ‘합병’·‘처분’·‘경영’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註29) 먼저 영토확장을 함의한 표현으로는 ‘합병’·‘처분’ 등이 사용되었으며, ‘경영’은 주로 경제적 지배의 측면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경영’은 주로 일본의 상공업자나 재조일본인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용어상의 차이는 곧 이 시기 일본에서 조선의 보호국화 혹은 식민지화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였음과 동시에 조선의 보호국화 혹은 식민지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있었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러시아와 일전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양국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점차 높아졌다. 이러한 공감대의 형성 과정은 식민의 대상인 조선과 식민의 주체인 일본의 양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조선과 조선인을 대상으로는 조선의 야만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과 일본인의 근대성과 발전된 양태를 강조함으로써 조선과 일본의 양 국민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은 위생관념이 없으며, 조선의 거리는 더럽고 불결하다는 등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러한 인식은 1910년 조선을 완전히 강점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식민지 경영의 기본 논리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행하였으며, 러시아도 같은 날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연전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더욱이 일본은 조선에서 이해 확보라는 전쟁 전의 목적을 뛰어넘어 남만주와 북만주에서도 러시아를 축출하여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