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개항과 상품생산구조의 변화/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08:27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강화도조약과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개항과 일본의 경제침략
개항과 상품생산구조의 변화

3. 개항과 상품생산구조의 변화


1. 곡물상품화와 지주제 변화

조선후기 이래 농업생산력의 내재적 발전에 따라 농업생산물의 상품화가 진전되고 시장도 확대되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농업생산의 조건은 종래와 같이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외적 요인, 곧 대외무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게 되어 대량의 곡물수출은 상품화를 가속화시키고 농업경영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대외무역과 관련하여 농업생산의 구조변화를 살필 때 먼저 고려되어야 할 점은 교역조건의 문제이다. 일본상인은 금건 등 주로 섬유제품을 수입하여 조선시장에 판매했고 판매된 물품의 댓가로 다시 곡물을 구매하여 일본에 수출했다. 그러므로 수출품의 대표적 상품이었던 곡물과 수입품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섬유제품은 대외교역에서 대립되는 상품으로써 양자간의 가격체계의 변화는 대외무역에 의한 농업생산조건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세계자본주의체제 편입에 의해 수립된 새로운 농업생산물의 가격체계는 생산조건의 변동을 초래하며 조선의 농업생산구조를 일정하게 변용시키고 있었다. 註86)

1890년을 전후하여 수출상품인 쌀과 콩, 그리고 수입면제품과 국내산 목면의 가격조건을 비교해 보면 쌀·콩의 가격조건이 좋아지고 수입면제품의 그것은 나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곡물과 조선목면의 가격대비에서도 1890년을 전후하여 곡물의 가격조건이 나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註87)

대외무역과 관련하여 쌀과 콩의 가격조건이 좋아지는 상황에서 농업생산이 적어도 개항장의 배후지에서 수출과 관련된 쌀과 콩의 단작화로 진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다. 특히 같은 밭작물로서 콩과 대립하고 있던 면포의 경우 콩가격의 상대적 상승은 원료의 생산인 면작을 위축시킬 수 밖에 없었다. 1895년 “콩의 재배열은 면작에도 다소 영향을 미쳐 종래 면작을 하던 곳도 취향을 바꾸어 콩을 파종하고 그것을 팔아 금건·목면 등을 구입하는 경향이 생겨 면의 생산액은 오히려 감소한다”는 일본인의 관찰은 이같은 생산조건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註88)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농민전쟁 이전 시기에 이러한 사실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1890년 이전 시기에는 오히려 토포의 가격조건이 나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쌀의 경우 흉작과 관련하여 토포에 비해 상대가격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풍흉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같은 전작田作으로 면포와 대립하고 있던 콩의 상대적 가격이 1890년 이전 시기에 토포에 비해 낮아지고 있었다는 것은 일정하게 전작에서 면작이 아직 우세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개항 이후 곡물이 양국간 가격차이로 교역기회가 증대되고 교역조건이 유리해져 간 사정은 이미 조선후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촉진되고 있던 곡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곡물수출의 증가는 종래 협소한 국내시장을 대상으로 하던 지대地代의 시장확대를 초래하여 19세기 중반 이후 광범한 농민항쟁으로 정체되어온 지주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적어도 개항장과 인접한 배후지에서는 농민전쟁 이전에도 어느 정도 지주제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註89) 물론 이같은 현상은 농민전쟁 이전의 단계에서는 주로 개항장의 배후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개항장과 거리가 먼 지역에서는 지주제가 오히려 정체되는 사례도 있었다. 註90) 하지만 1890년대에 들어 대량의 곡물수출의 결과 지주제는 전반적으로 강화되는 경향에 있었고 대일수출곡물의 많은 부분을 소작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지주들은 지대의 수취를 확대하기 위하여 소작료의 인상, 생산물지대로의 전환을 꾀하고 직영지의 확대, 정미精米를 통한 상품화의 과정을 직접 장악하는 등의 방식으로 지주제를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고리대, 상업에의 투자 등으로도 부를 축적했고 여기에서 얻어진 수익을 토지에 재투자하며 보다 큰 지주로 성장하려 했다. 또 이 시기에 들어 곡물무역의 증대라는 역사적 조건을 배경으로 곡물의 상품화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새롭게 등장하는 지주도 있었다. 물론 이 같은 경향은 왕실이나 관청에 소속된 토지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농민전쟁 이전부터 왕실은 봉건권력을 통하여 일반 민전民田에 대규모의 장토庄土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갑오개혁 이후의 역둔토驛屯土정리사업도 국가나 왕실 소속의 소유토지에 대한 지주권과 지대수탈의 강화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註91)

지방관의 경우에도 수탈을 강화하며 세납곡물을 개항장으로 운송하고 상품화시키고 있었다. 지방관에 의한 상품화는 직접적으로 세곡수탈의 양을 증대시키는 방식만이 아니라, 방곡의 실시로 관할지역 내 곡물유출을 금지한 후 낮은 가격으로 매집하고 이를 개항장이나 곡가가 높은 지역에 판매하는 방법, 조세의 금납화과정을 이용해 농민에게서 곡물을 수취한 후 관고官庫에 저장하고 곡가가 오르기를 기다려 판매하거나 이를 개항장으로 운송 판매하여 취득한 화폐를 상납하고 그 차액을 착복하는 방식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註92) 이같은 수탈을 통하여 축적된 관료자본은 앞서의 지주제 강화를 통한 수탈된 지대, 그리고 일부의 상업자본과 함께 대한제국시기 식산흥업운동의 물질적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농민도 곡물을 상품화하고 있었으며 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우선 조세의 중압이 강요한 상품화를 들 수 있다. “1885년 부산 근방에 대기근이 들어 날마다 아사자가 십수명에 이르는 참상인 흉작인데도 불구하고 다소의 미곡수출이 있었던 것은 하민下民 등이 수세의 엄함을 두려워해 근근히 수확을 해도 매각해서 조세에 보충하는데 원인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註93) 조세의 금납화와 교역의 기회가 결합되면서 농민으로 하여금 곡물의 상품화를 강요하여 잉여생산물이나 자가소비부분까지 수출곡물화시켰던 것이다. 또한 농민은 전근대적 고리대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데다가 의복을 비롯한 필수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곡물을 상품화시키고 있었다. 이 의복의 구매는 외국상인이 수입하는 자본제 면제품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목면에서 수입금건 등으로 기호가 전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목면의 가격조건은 약화되어 가고 결과적으로 수입품구입을 위한 구매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註94) 그리고 무역증대에 따라 곡가등귀에 따른 가격체계가 유리해지면서 개항장의 배후지와 수운이나 해운이 가능한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하거나 면작지의 콩작으로 전환도 일어나는 등 생산이 증가한데도 원인이 있었다. 註95) 특히 콩은 주로 농민에 의한 상품화가 주도되었던 곡물이었다.

상품화의 이익은 자가소비부분까지 판매하는 경우가 아닌 잉여생산물의 판매에서도 반드시 농민에게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고 일본상인과 또 그들과 연계된 곡물상인, 그리고 봉건지배계급이 농민적 잉여를 착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곡물의 판매과정에서 상인은 곡물이 수확되고 곡가가 하락할 시점에서 매입했기 때문에 저장할 여유가 없는 농민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매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봉건적 부세체제와 방곡전후의 곡가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꾀하는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도 가혹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지주제가 강화되어 가면서 부농의 성장에도 한계가 있었고 소빈농 역시 분해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2. 광공업의 발전

1880년대에 들어 일본은 정화의 축적을 목적으로 조선에 설치된 일본제일은행지점 출장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산 금을 매입하고자 했다. 청국의 경우에도 수입품의 대가를 금으로 바꾸어 자국으로 수송하고 있어 양국과의 교역과정에서 금의 수요가 대량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도 왕실재정의 확보를 위해 광산의 개발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광산개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들어 봉건정부의 광업정책은 종래 국가가 지정한 광산만 인정하고 수세하던 소극적 저지적 광업정책인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에서 각아문과 민간에서의 자유로운 채광을 가능하게 한 사자개채제私自開採制로 이행되어 갔다. 註96) 1887년 총세무사 메켄리墨賢理의 보고에 의하면 “본국의 산금지는 종래 ‘사자개채’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뒤 국가의 이같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계속 사채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이 금령을 바꾸어 민간의 의사를 들어 채취함을 승인하고 산금량에 따라 백분의 몇을 세로서 징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금의 생산은 앞으로 수출액이 증가할수록 더욱 많아질 것이 틀림없다”라고 했다. 註97) 실제로 이 시기 광산의 개발은 대규모화하여 1886년 영흥금광의 경우 광부가 5~6천 내지 1만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註98) 그런데 이 제도를 통해 광업생산의 자유화가 어느 정도 인정됨으로써 광산개발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광산의 소유권까지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또 국가의 봉건적 수취체제가 여전히 존속하는 한 그대로 광업의 근대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7년에도 광무국鑛務局을 설치하고 전국각지의 광산현황과 광무행정을 관장토록 하는 한편, 근대적 기술도입을 위한 외국의 광산기사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광무국의 설치도 오히려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뿐 국내자원의 보호와 근대적 광업2제도의 확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고용된 서양의 광산기술자들은 한국광산의 근대화보다 그들의 이권획득을 위한 예비탐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었다. 1895년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미국의 경우에도 1888년과 1889년에 걸쳐 광산용기계와 5명의 광산기술자를 파견하고 있었다. 註99) 이처럼 근대적 광업정책이 수립되지 못한 실정에서 대량의 금의 국외유출은 조선의 전반적 자본축적을 저애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화폐제도의 개혁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정화의 축적을 불가능하게 하여 1890년대에 들어서의 몇 차례 화폐제도 개혁시도도 실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광업의 생산조직은 물주物主-덕대德大-임금노동자로 이어지는 형태로 경영을 담당하는 덕대가 10~20명 규모의 전업적 광산노동자나 농민인 계절노동자를 거느리고 자금을 대는 물주에게 소속된 경우가 많았다. 물주의 자본은 주로 상업이나 고리대자본, 또는 관료자본 등 전기적 자본의 성격이 강했고 덕대는 이에 일정하게 예속되고 있었으나 덕대제 경영은 하나의 경영단위로 노동조직의 기본형태였다.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경제외적 강제가 없는 임노동의 성격을 띠었고 일부 덕대경영에서는 매뉴팩쳐적 형태도 존재했다. 註100) 광업은 조선후기 이래 어느 산업분야보다 자본주의적 성격의 경영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이 시기 급격한 금수출의 증가와 관련하여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註101)

이 시기까지 덕대제 금광업은 여가를 이용한 농민겸 계절형 노동자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어서 1889년 이후 정부의 폐광정책과 대일 곡물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체에 빠지지만, 1893년 7월 이후 인도의 금 본위제 채택으로 인한 국제 금값의 급격한 등귀는 다시 덕대제 광업생산의 발전에 좋은 시장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영흥·단천 등 대규모 금 광산이 집중해 있었던 원산항의 경우는 곡물의 작황에 관계없이 금 수출액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대체로 전업적인 광업노동자의 고용에 기반한 자본가적 경영의 초기형태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덕대제 광업생산에 물주로서 참여하고 있었던 관료나 상인들이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1887년 10월 일본인 송전행장松田行藏이 목격한 경상도 언양금광은 광부가 2,000명에 이르는 덕대제 경영의 광산이었는데, 물주는 경성에 사는 백씨로 월 180문匁의 광세를 국가에 바치고 있었다. 이는 관료자본이 물주로 참여하는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註102)

다른 사례로 경상도 청도 화악산華岳山금광은 대구상인이 대구감사에게 1,000엔의 회뢰를 바치고 채굴하고 있었던 잠채형 광산이었는데, 하루에 광부 급료및 제 잡비를 제외하고도 5엔의 순익을 남기고 있었다. 註103)

이 시기 덕대제 민영광업은 생산량이나 규모면에서 영세성을 면하기 힘들었고 생산기술 측면에서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여전히 봉건 정부의 간섭과 잡세 관행 때문에 자본축적에 많은 애로가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 이래 매뉴팩쳐적 경영형태까지 보이던 제조업분야는 면포와 같이 외국의 자본제 공산품의 유입과 함께 일부 생산이 위축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개항장의 확대와 기선을 통한 교통의 발전, 그리고 금이나 곡물수출의 증가에 유발된 국내의 구매력 증대로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함으로써 근대적 산업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수입 자본제 제품과 대립이 격심하지 않던 상품의 경우 수요의 확대와 함께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적 추세였다. 이승훈李承薰이 세운 납청유기제조공장과 안성유기제조공장이 그것이다. 이들 두 공장에서는 생산공정을 분화하여 전문기술자가 각 공정을 전담하도록 하고 생산과정에서 근대적 기계를 사용하여 대량의 유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註104)

철기류의 제작은 전통적으로 농기구와 솥을 위주로 했다. 당시 쇠남비·쇠대야·쇠물통 등은 일본에서 수입되고 그 수량도 증대하고 있었으나 솥은 품질이 외국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서 거의 수입되지 못했다. 註105) 솥의 생산에서도 개천 무진대의 경우 분업적 협업에 기초한 생산이 이루어졌고, 註106) 청도의 한 솥공장에는 매일 평균 40인의 노동자가 생산에 참가하며 각자의 생산조직에서 임금을 받고 있었다. 註107)

민간 요업에서나 관영의 분원分院에서 조선후기 이래 매뉴팩쳐적 경영이 나타나던 도자기생산은 19세기 후반에 관영이 민영으로 재편되고 민간공장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 1895년 현재 비교적 큰 규모의 도자기공장은 35개였다고 한다. 註108) 그러나 일본도기 특히 다기茶器의 수입이 2점차 증대되는 추세에 있었으므로 요업도 일본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제지업은 개항 이후 계속적으로 생산이 증대한 제조업 중 하나였다. 한지韓紙는 국내적 상품유통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상품으로 개항장간, 미개항장간의 교역에서 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품질의 우수성이 국외에서도 인정되어 많은 양이 청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종 이가 일부 수입되기는 했지만 수출량에 비하면 극히 적은 양이 들어오고 있었다. 註109)

이 시기 국내시장에서 곡물 다음으로 많은 교역량을 차지하던 상품은 면제품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내재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망을 보여주던 토포는 그 상품의 성격상 수입되는 외국산 면제품, 특히 금건과 대립하며 생산조건이 바뀌어 갔다. 금건과 토포의 가격을 대비하여 산출한 상대가격을 보면 1890년 전후까지 금건의 상대가격이 낮아지고 그 이후는 금건의 가격조건이 높아져 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註110) 이는 우선 1890년 이전의 경우 개항 초기의 수입금건이 고가품 중심에서 점차 저렴한 것으로 수입의 형태가 바뀐데 있었고 다시 1890년대에 들어 대량의 곡물수출로 인한 수입섬유제품에 대한 구매력 창출이 기호의 고급화를 가져온 결과이다. 그래서 1890년 부산에서는 금건에 대한 기호가 고급화하여 상등품의 매매가 활발했고 하등품은 일체의 수요가 없는 실정이었다. 註111)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면포생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1893년의 기록에는 “근년 당국에서 금건의 수입이 현저히 증가하여 지금은 각도에 달하고 한촌벽읍寒村僻邑이라도 널리 본품의 수요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목동·나무꾼도 금건의 의복을 입는 정도라서 점차 그 품격을 낮추어 보기 때문에 근래에는 목면 의류를 입는 쪽이 오히려 귀하게 보이는 경향이 생겨 이 기호의 변천에 따라 금건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찾아내고 여러 단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방농민의 부유한 자 중에는 자국의 면을 제조하여 손으로 목면을 짜거나 또 면화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자는 해외에서 방적사를 매수하여 수직手織의 재료로 삼는 것이 증가했다”고 한다. 註112)

이 인용문은 자본제 섬유제품이 결코 사치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빈농 이하의 계급에도 침투하며 조선의 면포와 대립하고 있던 사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 기록에서 보는 금건의 취약성, 목면보다 세탁에 약하다는 점은 목면의 수요를 완전히 금건이 장악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상인은 일본산 목면으로 이에 대처하려 했지만 이 시기까지는 일본목면의 수입이 적어 조선 목면을 구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농민전쟁이전 면포생산의 기본형태는 농가부업적 수공업이었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전대제식 방식에 의한 부농경영도 존재했다. 註113) 1892년 서울에서는 일본제 면조기綿繰機를 도입하여 생산공정의 근대화를 꾀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註114) 그러므로 이 시기는 아직 외국산 섬유제품이 완전히 토포시장을 잠식하지 못하는 단계여서 면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발전 가능성은 일정하게 존재하였고 오히려 원격지 무역의 증대에 따라 면포의 국내 교역량이 증대하는 추세였다. 註115)

마포는 함경·강원·경상·전라도가 주된 산지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지방에서의 생산이 많아 함경도의 국내의 원격지간 상품유통에서 명태 다음 가는 품목이었다. 마포의 유통과 생산량도 계속 증대하여 갔는데 일부 중국마포의 수입이 있었으나 생산을 위축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마포 생산도 면포와 마찬가지로 주로 농가부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저포苧布의 생산도 같았다. 註116)

비단은 일본과 청국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특히 청국에서의 수입품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봉건정부도 근대적 산업의 하나로 견직업에 관심을 기울여 1880년대에 들어 뽕나무의 재배와 양잠을 권하고 있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농상사農商司에서는 1883년 양상규칙養桑規則을 발표하여 잠업을 권장하였고 1884년에는 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설치하여 외국인의 경영 및 기술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이 공사는 1889년에 폐지되었지만 직사기織絲機 등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의 근대화를 꾀하고 있었다. 註117) 1880년대 후반 영천榮川이나 상주 등지에서는 비단을 생산하는 호수가 각각 800호에 이르렀고 함창咸昌은 500호 정도였다. 그런데 영천이나 상주의 호당 평균 생산량이 2필인데 반해 함창은 34필이나 된다. 함창의 경우는 단순히 농가부업적 성격의 생산으로 보기 어려우며 전업적 생산 농가나 전대제 방식의 부농경영이 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註118)

이와 같이 광업은 주로 국외수출을 위한 금 생산이 주종을 이루며 이의 대량유출은 조선의 정화를 유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업은 어느 산업분야보다 매뉴팩쳐적 경영이 발달하고 있었다. 기타 제조업도 자본제 상품의 유입에 따라 면직업과 같이 일부 타격을 입는 분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금이나 곡물수출로 인한 수요 증대에 힙입은 원격지 유통의 활성화로 생산량이 증대하였다. 제조업은 대개 농공農工이 미분리된 상태였지만 일부는 생산공정의 근대화를 통하여 매뉴팩쳐적 경영형태를 보이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수입 자본제 제품과 대립할 경우 취약한 자본과 생산과정의 전근대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몰락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3. 개항 이후 사회변화에 대한 국내의 반응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은 조선 국내시장의 보호와 나아가 국내산업의 육성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국내시장이 보호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개방됨으로써 외국 자본주의의 파괴력이 그대로 조선시장에 관철되었고 그 결과 미숙하나마 국내적 분업체계에 의하여 성립되었던 종전의 상품생산과 유통구조가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상인들은 불평등조약에 기초해 개항 초기부터 약탈적 무역을 자행했고 외국인의 행상이 보장된 후에는 청국상인과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교역량을 증대시켰다. 특히 이들은 조선의 곡물과 금을 유출함으로써 일본 국내곡물시장의 안정을 꾀하고 정화를 축적하여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 물론 국내 상품유통도 기선과 같은 근대적 수송수단의 도입과 대외무역의 확대에 따른 구매력의 증진에 힘입어 원격지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상품생산과 수요확대는 국내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세계자본주의체제 편입의 결과였으며 유통과정도 기선을 장악한 외국상인이 주도하여 갔다. 이같은 제국주의의 침투를 막아내고 자주적 민족자본의 육성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시장 보호와 금융구조의 근대화가 당면과제였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악화남발을 통한 재정확대만 추구하여 화폐자본의 축적을 저애하였을 뿐만 아니라 봉건적 수탈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다.

개항 이후 농업생산의 환경도 달라지고 있었다. 곡물수출의 대외교역 조건이 유리해져 가면서 대량의 곡물수출과 함께 농업은 쌀과 콩의 단작화로 진행되어 갔고, 지주는 지대수입의 극대화를 꾀하며 지주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추세였다. 면작에 기반한 면포생산은 같은 밭작물로 면작에 대립하던 콩 재배의 면작지 침식, 자본제 면제품의 수입 증가로 위축받기도 하였으나 아직 이 시기까지는 성장이 가능하였다. 광업은 제국주의의 자원침탈, 봉건정부의 재정확대 요구, 그리고 민간의 광산개발 욕구에 힘입어 상당한 발전을 가져 왔으며 대량의 임금노동자를 발생시켰다. 기타 제조업 분야도 대외무역에서 촉발된 국내 수요의 증대에 따라 근대적 생산방식을 도입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조업 분야는 아직 농가부업이나 일부 부농 등의 소상품생산 중심의 농공 미분리형태가 대부분이어서 전반적으로 미숙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수입 자본제 상품과 대립할 경우 항상 몰락의 위험을 안고 있던 처지여서 근대적 생산력에 기반한 민족자본의 성장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같은 개항 이후 경제구조의 변동은 각 계급의 급격한 경제적 변용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 또는 정세인식의 차이에 따라 각계급의 변혁에 대한 대응형태도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제국주의는 먼저 유통부분부터 장악하고 들어왔다. 따라서 외세의 경제적 침투에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계급은 상인계급이었다. 이들은 국내시장이 보호되지 못하는 속에서 기왕의 국내상권마저 침탈 당하며 외국상인에게 예속되어 가거나 몰락해 갔다. 조선상인은 자국의 적극적 지원을 받는 외국상인에 비해 자금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을 뿐 아니라 악화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화폐자본의 축적이 어려운 상태여서 오히려 자금선대 등으로 외국상인들에게 금융적으로 예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상인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지 않는 한 성장이 어려웠으며 그들의 자본축적은 곧 매판화의 길을 의미한다.

전통적 대상인과 개항장객주와 같은 새로운 상인계급은 외국상인과의 상권 대립과 예속을 통하여, 또는 봉건적 특권상인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상권을 유지하거나 성장할 수 있었지만 행상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소상인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다. 영세소상인들은 외국상인들의 내지행상으로 상권을 침탈받으며 그들의 하부 유통조직으로의 편입을 강요당하는 데다가 봉건적 상업체제 아래 관권官權과 특권상인의 침탈까지 받고 있어 상품경제의 전반적 증대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저애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전쟁의 과정에서 나오는 특권적 도고都賈상인의 혁파, 외국상인의 무곡貿穀 행위에 대한 반대 등의 요구는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었다.

양반지배계급의 경우 왕실과 민씨 척족을 비롯한 문벌가문출신인 관료세력은 봉건적 수취구조 내에서 착취를 강화하는 한편, 대외무역을 통해서도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이들은 봉건적 착취의 수혜자였을 뿐만 아니라 광산의 실질적 소유자이자 대지주였으므로 금의 대량유출과 세곡이나 지대의 상품화 과정에서도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수탈은 부세수취의 과정에서 중간수탈을 행하며 사복을 채우는 것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국가재정의 전반적 위기를 가져왔고, 금이나 지대수출로 얻어지는 이윤도 개인적인 것에 불과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계급적 기반도 민씨 척족 등 문벌귀족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갑신정변파의 개혁노력이 기왕의 왕실 및 관료세력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부르주아적 발전의 물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관료세력의 수탈을 막고 부세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국가재정을 강화하고 이를 통일적으로 운영하려 했던 데 있다. 그들의 정강에 나오는 문벌의 폐지,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관리나 이서배의 중간수탈을 막고 국가재정을 호조로 일원화하는 것 등은 바로 그러한 의도를 보여준다. 개화파가 주체가 되어 만든 『한성순보』나 김옥균의 「치도약론治道略論」 등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에 필수적인 기간산업, 곧 교통·운수·통신수단의 근대화와 기계 조선공업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를 위해서 국가재정의 확보가 급선무였던 것이다. 또 개화파는 개혁의 계급적 기반을 지주와 상인자본에 두었다. 『한성순보』의 「회사설會社說」 등에서 보이는 상업자본의 육성이나 지조개정에 의한 지주적 개혁방식이 그것이다. 1884년의 단계가 아직 상인계급이 제국주의의 매판세력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없는 시점이므로 국내시장의 보호를 위한 자주적 경제정책이 수립된다면 상인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화는 위로부터 개혁의 물적 토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지조개정은 지주 중심의 개혁 전망을 가진 것이어서 그들의 개혁이 결코 봉건적 생산관계의 전면적 해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양반지배계급의 일부로서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봉건지주도 미곡수출이 본격화하는 1890년대에 들어서는 지대를 수출하고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며 지주제의 강화를 꾀했다. 곡물수출의 증대는 이에 편승한 새로운 지주층의 출현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정은 개항전기만 하여도 개항장의 배후지에 국한될 뿐 전국적인 상황은 아니어서 오히려 이들은 성리학적 사유체계에서 열강의 자본주의적 침투가 가져올 중세적 향촌질서의 붕괴를 두려워하며 대외무역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입장에 있었다. 1880년대 초반의 위정척사운동은 그러한 위기의식의 표현으로 자본주의열강의 침투를 막고 봉건적 생산관계를 재확립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의 그들의 지배적 위치를 온존시키려는 것이었다. 1894년의 농민전쟁에서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했던 것도 마찬가지 의도였다.

개항은 농민층에게도 새로운 생산조건을 제공했다. 교역조건의 변화에 따라 일부의 농민은 곡물수출과 관련하여 경작면적의 확대 등을 통한 생산력발전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면작과 토포생산을 통한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의 성장 가능성도 이 시기까지는 일정하게 존재했다. 물론 그 기반은 지극히 취약한 것이었다. 농민전쟁 이후 ‘미면교환체제’로 대표되는 대일 무역체계가 형성되면서 지주제는 전반적으로 강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부농의 성장 가능성 역시 제한적이었으며 대일수출과 관련된 소규모의 농업공황에 의해서도 그 존립기반이 위협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미면교환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농민전쟁을 전후한 단계에서 곡물의 상품화와 면업을 통한 부농의 성장 가능성이 아직 존재했다는 것은 이 시기 농민전쟁의 주체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성장을 저지하는 봉건적 수탈구조와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하여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품화의 이익은 자가소비부분까지 판매하는 경우가 아닌 잉여생산물의 판매에서도 반드시 농민에게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고 일본상인을 비롯한 상인조직, 그리고 봉건지배계급이 농민적 잉여를 착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일부의 농민이 성장하는 반면, 대다수의 농민은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지주제의 강화에 따른 지대의 고율화, 생산물지대로의 전환 등은 소작농민의 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켰다. 더구나 봉건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이나 곡물의 대량유출과 악화남발 등으로 인한 곡가상승도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잇던 빈농이나 농업노동자층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들은 토지에서 유리되어 유민화하여 일부는 도시지역으로 유입되거나 광산의 대대적 개발에 따라 광산노동자가 되기도 했고 개항장의 부두노동자가 되는 등 생산수단에서 소외된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여 갔으며 일부는 만주로 월경하거나 화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1880년대 초 영호남지방에 출몰한 화적들이 “상납전목上納錢木을 백주에 창탈하고 부촌요호에게 격문을 보내 징색하면서 의를 일으켜 왜倭를 벌하려 한다”는 경우에서 보듯이, 註119) 이들은 개항 초기부터 봉건지배체제의 수탈과 외세의 정치 경제적 침략에 저항적 자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봉건지배체제와 외세와의 침투가 질곡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잉여축적이 저애되고 있던 일부의 부농을 포함한 소농 이상의 농민, 지주제의 강화와 곡가의 급격한 등귀로 몰락하고 있던 임노동층을 비롯한 빈농 등 광범한 농민층은 소상인·소상품생산자층과 연대하여 반외세 반봉건의 농민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