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강화도조약과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08:15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강화도조약과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개항과 일본의 경제침략
개항과 상품생산구조의 변화


1. 강화도조약과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1. 조약체결과 대일개국론

1875년 일본이 도발한 운양호사건은 개항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일본은 여러 차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중국과 전통적 조공체제 아래에서 사대의 외교로, 일본과는 교린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해 새로운 국제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서계문제는 한일 양국간 격렬한 외교상의 마찰을 일으켰고, 일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바뀌어 가고 있었다. 註1) 아편전쟁 이후의 서양열강의 중국 침략이 국내에도 알려지고 이미 중국에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의 책이 들어와 지식인에게 널리 읽혀졌다. 그런데 대원군 정권기의 초기 개화사상은 해방론海防論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책이 대부분 해방론을 다룬 것이었고, 대표적 초기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도 북학北學사상을 토대로 국내의 해방론과 중국의 해방사상을 절충수용하면서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었고 강화도조약 당시 대일수교에도 적극적이었다. 註2)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척사론자들은 대일수교에 대해 반대했다. 강화도조약 당시의 조약반대 상소는 일본을 이적시하여 물리칠 것을 주장하거나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에 입각하여 일본과의 수호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했다.

전前 지평持平 이학년李學年과 전前 사간司諫장호근張皓根의 상소에서는 강화부에 상륙한 일본인을 ‘섬 오랑캐’·‘해적’·‘더러운 비적’ 등으로 표현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토멸할 것을 주장하였다. 註3) 우통례右通禮 오상현吳尙鉉의 상소는 양복을 입고 양선洋船을 타고 온 왜국사신은 ‘양인洋人이면서 왜인倭人이고 왜인이면서 양인’이라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했다. 일본과의 교역을 허락하는 것은 양인들과 교역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천주교의 확산을 가져와 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전쟁을 치르더라도 물리쳐야 할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화친할 수 있는 대상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이 날뛰는 것은 반드시 사악한 무리가 안에서 호응하여 가능한 것이라 하여 개국론자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註4) 최익현崔益鉉도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고 금수일 따름이라며 왜양일체론에 입각하여 강화가 초래할 난리와 멸망을 경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註5)

당시 청국이나 동래부를 통해 전해진 일본에 대한 정보는 일본을 교린의 대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하였다. 최익현·김평묵金平默 등 척사론자들이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정보에 기반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에 입각하여 왜와 화친은 결국 서양과의 화친을 의미한다며 구호회복이라는 주장을 일축하며 척왜를 주장했다. 註6)

대일수교를 곧 서양과의 수교로 보는 왜양일체론은 대일수교를 추진하는 정부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응논리로 제기된 것이 바로 왜양분리론倭洋分離論이었다. 왜양분리론의 전형적인 내용은 부호군副護軍 윤치현尹致賢이 올린 상소에서 나타난다. 그는 왜와 양이 내면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왜사倭使라 칭하여 왔으면 왜국사신으로 대해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양국洋國이 오페르트도굴사건1868 이래 결코 화친할 수 없는 불공대천의 원수임을 강조하면서, 대일수교가 결코 서양과의 화친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자고 청하였던 것이다. 註7) 고종은 이에 대하여 “‘왜국과의 우호를 잇는 것이며, 양국이 아니면 화친할 수 있다與倭續好匪洋伊和’의 여덟 자는 더욱 절실하고 요긴한 말”이라며 “매우 가상하며 유념하겠다”고 비답批答을 내리고 있다.

왜와 양을 분리하여 양이 아니라 왜이기 때문에 통호通好한다는 왜양분리론은 구호회복론과 표리를 이루면서 왜양일체론에 대항하는 정부의 논리로 적극 활용되었다. 1876년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복합연명상소운동伏閤聯名上疏運動을 벌이던 유생들이 결국 ‘서양과 강화하는 것은 불가하나 왜와 강화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하고 철수한 것도 ‘왜양분리론’에 근거한 정부의 설득이 주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개국론자들도 서양과 일본이 합세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 왜양일체론에서 벗어나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서양과 일본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개국론자이던 강위는 일본이 오랑캐가 아님은 물론이요 이웃의 대국大國이라고 주장했다.

강위는 우리가 ‘오랑캐’ 혹은 ‘금수’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일본이 사실은 ‘강력한 대국’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공격하면 제어할 힘이 있냐고 반문하면서 일본을 물리칠 힘이 없는 조선이 일본과의 수호 교섭을 외면할 수 없다고 했다. 註8)

이미 개국론자들은 조약 체결 이전부터 일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중국을 통해 일본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시下示하신 “일본영사가 처음에 중국에 들어가 관館을 열고 교시交市하며 조약을 정할 것을 청할 때에 ‘물침속국勿侵屬國’이라는 1조가 있다. 지금 저들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 수호 운운云云을 칭하는 것은 이미 조약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번의 거사가 수호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여 그 뜻이 만일 여의치 못하여 병력을 동원함에 이른다면 또한 중국에 ‘조선이 먼저 잘못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용병用兵함에 이른 것은 일본이 중국에 약조를 어긴 것이 아니다’라고 발명發明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뜻은 분명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즉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저들이 비록 병선으로써 위협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먼저 발發하여 병력을 가加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이 한 단락의 가르치신 뜻은 진실로 옳습니다. 금일 일본이 전쟁을 칭하는 핵심이며, 또한 금일 일을 처리하는 기요機要인 것입니다. … 저들의 정상情狀이 비록 지극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또한 도리어 조약을 두려워하니 우리가 먼저 잘못하지 않는다면 저들도 또한 감히 가벼이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서 종사할 바의 것은 오직 이 한 문장뿐입니다. 註9)


이는 강위의 글이지만 하시下示 이하 인용은 박규수의 말이다. 박규수는 일본이 사신을 파견한 의도가 전쟁의 단서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청일수호조규의 ‘물침속국’ 조항 때문에 조선을 함부로 침공할 수 없다고 보고 ‘수호’라는 명목으로 군대와 사신을 보내 전쟁의 빌미를 얻으려는 것이니 먼저 병력을 동원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강위 역시 동의하면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잘못해서는 안된다我不先失’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1873년에 전해진 일본과 서양세력의 조선 침략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단 박규수나 강위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조선 조야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왔던 침략설의 내용은 1873년 6월 왜사가 양사洋使와 함께 청황제를 만나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었다. 1873년 연행시燕行時 남긴 강위의 「북유담초」에는 사행의 침략설의 진위여부에 대한 강한 관심과 조선의 위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註10)

개국론자들이 대일개국을 주장하는 논거는 형세론에 입각하여 대일개국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개국불가피론과 명분론적 측면에서 대일수교가 수백 년간 쌓아왔던 전통적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구호회복론이다.

1874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규수는 고종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양각국은 오로지 교역 상판을 중히 여기는데, 출항하는 상선을 모두 장부에 기재하고 그 화물을 계산해 세금을 받아 이로 나라의 재정을 충당한다. 이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부강의 방법이다. 그들은 중외 각국과 통상하지 못함이 없었는데 유독 우리나라와는 통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해 동안 우리나라에 와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 일본은 양이를 따라 중국에 교역을 청하고 중국 또한 허락했다. 지금은 일본은 서양과 한편이 되어 있다. 註11)


박규수는 서양과 일본이 통상을 요구해 오는데 우리나라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개국의 불가피성을 제시했다. 그래서 서양과 일본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고종에게 위기의식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이어 일본과 교섭을 재개할 것을 정책으로 채택하도록 요구했다. 註12) 박규수의 대일개국론은 무엇보다 일본이 침입할 기회를 주지 않자는데 있었다. 박규수는 그의 대일개국론을 비난하는 대원군의 편지에 답하면서 일본의 수호통상 요구를 거절하면 그들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대일개국론의 첫번째 이유였다. 또한 일본이 침입해 올 경우 서양세력이 이에 가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서양과 한 편이 된 일본이 서계를 받지 않는 핑계로 침범해 오면 오래 동안 우리를 엿보던 서양도 합세해 올 것이라고 보았다. 註13) 서양이 일본과 합세하리라는 견해는 일본의 대만침공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나왔다. 1874년 중국에 간 사신들은 일본이 서양인에 의탁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은 80만냥을 빌어 대만을 침략한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註14) 이때 이건창이 조선을 위해 조언해 줄 것을 요청하자, 황옥黃鈺은 “서양인을 대하는 것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옳다”는 말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註15) 그래서 일본과 서양이 침입해 오면 조선의 국력으로서는 그들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어 일본과의 개국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註16) 그래서 박규수는 중국에 사절로 갔을 때 만나 교유를 했던 만청려萬靑黎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의 침입을 우려했다. 일본의 침략을 막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청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 중에 중국의 속방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의거해 일본에 압력을 넣어 침략을 저지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註17)

서양과 일본이 합세한다는 논리는 척사론자의 왜양일체론과 외면적으로는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척사론자들은 국제적 현실에 대한 안목이 없었던데 반해 개국론자들은 서양과 일본의 연합이라는 현실적 위기의식이 대일 개국론에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註18)

개국론자들이 개국의 불가피성을 주장한 데에는 조선이 약국이라는 냉엄한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었다. 강위는 조선을 춘추시대의 약국 정나라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일본을 ‘강력한 대국’이라 한 것과 대비되면서 자연스레 개국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註19)



옳구나! 장숙평의 말이여! 말하기를 “중국이 경신庚申, 1860의 액厄을 당하였을 때 주장하는 자가 많아서 패배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편하고 쉬운 이야기만 말하였기 때문이다 …”라 했다. 이는 진실로 경험에 따른 말로 궁구窮究하여 음미할 바가 있다. 대저 중국의 강대함으로도 오히려 이러한 괴로움이 있었는데, 하물며 중국에 어림없이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 있어서랴? 그러나 돌이켜 구해보면 허물은 약함에 있을 따름이다. 약함을 쌓아서 패배에 이르거나 강함을 쌓아서 승리를 취하거나 그 실마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적에게 있지 않으니 쌓은 바가 어떠한가를 돌아볼 따름이다. 註20)강위는 중국의 실패에 대한 장세준의 말을 언급하면서 중국보다 국력이 훨씬 못한 조선이 어찌하겠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의 국력이 일본을 적대하거나 왜양연합군倭洋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므로 대일개국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약국 조선의 현실에서 일본의 수호통상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움은 자명하였지만, 강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때 닥칠 사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개국의 불가피함을 한층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註21)

강위는 강화도에서 접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인천·부평에 상륙하여 서울로 곧장 진격하는 것은 이미 일본사신이 올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라며, 우리가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는 이 경우 조선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대단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과 일전一戰도 불사해야 한다는 척사론자들의 주장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그는 일본 군대의 정예함을 지적하면서 조선이 군사력 면에서도 결코 일본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註22) 중국보다도 훨씬 약한 국력을 지닌 조선이 ‘강력한 대국’ 일본과 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통상화약을 거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예한 군대와 우수한 군정을 갖춘 일본은 결코 아무런 대비도 없는 조선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척왜斥倭는 자칫 일본이 양이와 합세하여 조선을 공격해오는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르는 행위였던 것이다.


운양호


한편 강위는 일본과의 수호통상이 구호를 회복하는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註23) 강위는 대일수교가 어디까지나 ‘구호舊好를 닦는 것’일 뿐이고 교역도 왜관무역倭館貿易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본말을 살피지 않고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일수교가 구호회복이라는 자신의 논리를 부연설명을 통해 강화시키려 하지 않고, 단지 현실과 괴리된 척사론을 비판할 따름이었다. 즉 도道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 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인데, 척사론자들의 주장에는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보국안민’이 아닌 ‘위국살민危國殺民’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박규수는 이미 1861년 중국 사행을 다녀오면서 대미개국론을 주장했다. 박규수가 미국을 개국의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그가 당시의 국제정세를 동서의 열강이 서로 동맹해 약소국을 침략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인식하고 열강의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졌던데 있다. 긍정적 미국관에서 미국과의 결맹을 구상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을 피하고 열강의 침입을 견제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의 발전된 기술을 수용하고 필요한 산물을 수입해 부강국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박규수의 대일개국론도 개국불가피라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대미개국론의 연장선에서 전개된 부강론이 배경에 있었다. 註24)

1876년 1월 일본측이 조약안을 제시했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열렸던 어전회의에서 박규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만 생각건대 삼천리 강토에서 만약 우리가 내수외양의 방책을 다 실시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더라면 저 작은 섬나라가 감히 우리의 서울을 엿보며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참으로 통분이 극도로 치밈을 누를 수 없다. 註25)


그동안 내수외양을 하지 않고 개국을 하지 않으면서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한 탓에 이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한탄의 말이지만, 그동안의 그가 주장했던 개국을 통한 부국강병론이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과의 수호에도 이같은 부강론을 이루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미 중국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 추진 소식을 듣고 있었던 박규수는 조일수호조약의 체결 이후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김기수에게 일본의 근대 문물을 직접 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규수가 김옥균 등 개화파에게 세계정세를 지도하면서 근대문물의 수용을 주장했던 것도 이같은 개국을 통한 부강론의 연장에 있었던 것이다.

강위 역시 1873년과 1874년 두 차례의 연행을 통해서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진행상황을 견문하고 부강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위는 양무파 관료인 장세준張世準·황옥黃鈺 등과 만나 양무운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강위가 얻었던 정보는 중국의 현실에서 양무운동이 일어나게 된 요인과 그 논리, 추진성과 등이었다. 양이의 선박과 기계의 견고함은 중국의 고법에서 대처방법을 찾을 수 없어 점차 양법을 도입하여 대처하려 한다는 황옥의 말 註26)이나, 서양의 기기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들의 장기를 모두 얻어서 그들에게 믿을 바가 없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고, 그들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 기술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지 오랑캐가 되어 오랑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장세준의 언급 註27) 등은 양무운동에 대한 강위의 이해를 심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장세준이나 황옥 등은 더 나아가 강위 등에게 조선도 자강에 힘쓸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었다. 註28) 강위는 두 차례의 연행에서 조선이 자강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절감하였다.

척사론자와 마찬가지로 왜양일체론적 사고를 하면서도 척왜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대일수교가 구호회복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서양의 세력 확대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그러한 서양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방안은 부국강병 밖에 없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을 대국大國으로 표현한 것도 일본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국강병을 추진하여 일정한 성과를 얻고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해된다. 따라서 구호회복론은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점을 인식하면서도 자강을 위해서 개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자강을 위해 개국이 필요하더라도 그 대상은 수백 년간 수호하였던 일본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구호회복론은 양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일본과 수교는 하더라도 양이와의 수교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데에 강조점이 있었던 것이다. 註29)

그러나 국내적으로 개국론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뒤이은 조일수호조규부록 및 통상장정과 함께 불평등조약 체제를 형성한다. 수호조규의 체결과정에서 최혜국조관이 빠진 것은 무엇보다 이와 같은 구호회복론의 연장에서 서양과 통교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과정은 물론 국내의 개국반대론자들을 설득시키려는 의도에 나온 것이지만, 그 결과는 조약에 대한 체계적 대응을 불가능하게 했다. 근대적 조약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이미 중국 사행과정에서 개국론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註30) 하지만 이들은 조약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의 구체적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개국론은 화이론적 세계관에 빠져 있던 개국반대파들에 비해 상대적 진보성을 가진 것이었지만, 대응방식에서는 조약의 내용이나 그 결과가 초래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했다. 결국 불평등조약은 일본이 강요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개국론자 역시 근대적 조약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약체결 과정에서 개국론자들은 일본의 무력 침입을 우려해 개국불가피론과 그동안 일본과의 관계의 연장이라는 국호회복론을 주장하면서 반대론자들을 설득했다. 이들은 개항 이전에도 이미 개국을 통한 근대물물의 도입과 부강론을 주장했지만, 국내의 전반적 쇄국론적 분위기에서 현실화될 수는 없었고,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개국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근대적 조약체제에 대한 인식의 한계로 불평등조약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가진다.


2.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일본의 포함외교에 의해 체결된 1876년 2월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전문에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를 평등하게 규정했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에서 이 조약은 이 해 8월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통상장정’과 함께 전형적 불평등조약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註31)

우선 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조계인 거류지의 설정·세 항구의 개항이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국제법상의 조약관례를 무시하고 조약유효기간 및 폐기조항을 결락시켜 불평등조약의 무기한 존속까지 기도했던 것이다. 더구나 국내시장의 보호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불가결한 관세권마저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교섭당사자들은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가 없어 무관세의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 같은 관세자주권의 상실은 밀려드는 자본제공산품으로부터 국내산업을 보호할 수 없어 후일의 자주적 식산흥업의 추진에도 장애가 되어 민족자본을 육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화폐를 조선에서 자유로이 유통될 수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은행지점이 조선에 진출하여 자국상인의 금융을 지원하며 자본력면에서 조선상인을 압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화폐의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상인은 양국간의 환시세를 조작하여 수출품을 염가매입하는 한편, 은행에서 대부받은 자금을 조선상인에게 대부하고 환차익까지 챙기기도 했다.

일본이 기도한 불평등조약 체계의 수립은 특히 곡물의 수출문제에서 더욱 기만적으로 드러난다. 통상장정의 제6칙은 조선과 일본의 원문이 각기 다르다. 원래 제 6칙의 조선측 조약문은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곡물의 매입을 허가한 것이며 양국간 교역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註32) 그러나 일본은 자국의 조약문에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住留日本人民’이라는 문구를 제외함으로서 곡물수출을 합법화시켰던 것이다. 註33)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면서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꾀하려 했지만 일본측의 거부로 조약의 전면적 개정은 불가능했다. 그뒤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의 충격은 구미열강에 대한 조선정부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또 이때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에서의 일본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타국과의 조약을 조선에 권고하고 있었고 1871년신미양요에 개항을 시도한 적이 있던 미국은 마침 청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호조약의 타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이 결합되어 1871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 양측 대표의 회담도


조미조약은 치외법권 등 전형적 불평등조약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조선측으로서는 일본과의 조약에 비하면 다소 나아진 것이었다. 註34) 먼저 이 조약은 열강이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조약이었다. 관세율은 수입 10%, 수출 5%로 규정되고 수입품에 대한 모든 형태의 개항장 밖에서 과세를 부정했다. 또 연안해운이 승인되고 조선의 곡물수출의 금지권은 인정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과는 달리 타국과의 조약에서 체결되는 조약상의 특혜를 균점할 수 있는 최혜국조관이 첨가되었다. 미국은 조선연안에서 조난되는 자국선박의 구제에 조약체결의 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어 통상관계에서는 일정한 양보를 했으나 최혜국 대우를 확보함으로서 다른 나라가 통상상의 특권을 획득했을 때 자연스럽게 이를 균점할 수 있었다. 이 조약에 이어 조영조약·조독조약이 체결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 청국은 정치적·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이 장정은 서문에 청과 조선이 종주국과 속국과의 관계라고 규정함으로서 조선정부의 비준조차 요구되지 않는 일방적인 것으로 그 내용에서도 특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치외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최초로 서울·양화진에서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권護照을 소지한 경우 개항장 밖으로의 통상이 가능한 내지통상권을 인정하고 나아가 연안무역권까지 승인했다. 청은 장정을 타국이 균점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지만, 그뒤에 체결되는 조약, 특히 일본과 영국간의 조약개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불평등조약 체계의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註35)

1883년 일본은 종래의 ‘통상장정’을 개정하여 새로운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했다. 그 중요한 내용을 살펴 보면 우선 관세율은 수출 5% 수입 8%를 기본으로 하는 협정관세이며 일체의 내지과세가 부정되었다. 내지과세는 조청장정에서는 인정되었고 조미조약에서는 수입품만 부정했으나 이 장정에 이르러 수출입품 모두에 대해 완전히 부정된 것으로 이후 타국과의 조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또 조미조약·조청장정에서 각각 승인된 연안해운·연안무역권이 통합, 승인되었으며 일본의 최혜국 대우가 인정되었고 곡물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방곡령 실시조항은 1개월 전의 사전통보라는 제한규정이 부기되어 실제로 곡물유출의 방지에는 미흡했고, 또 지방관의 방곡 실시 때마다 일본은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이의 시행을 저지했다. 註36) 그밖에 일본은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에서의 연안어업권 등도 획득했다.

같은 해 영국은 기왕의 조약을 개정하여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하여 불평등조약체계는 그 형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는 관세율 수출 5%, 수입 7.5%를 기본으로 하는 협정관세 및 관세 이외의 일체의 내지과세의 부정,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거류지 밖 4km까지 외국인의 토지·가옥의 임차·구매권과 공장 등의 설립 자유를 인정했다. 더구나 이 조약에서는 조청장정에서 청의 독점으로 규정되었던 서울·양화진의 개방과 내지통상권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 내지통상권은 조청장정이 조선산품의 구매에만 독점적으로 규정한데 비해 구매·판매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었으며 개항장외 40km까지는 여행권없이 자유통행이 가능했다. 註37) 이상의 조문이 그 뒤 최혜국 대우에 의해 열강에 균점되면서 조선시장은 서울에서 벽촌에 이르기까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고 말았다.

이 같은 조약체계는 청일과 비교해 보아도 불평등성이 더 강한 것이었다. 물론 청국과 일본이 서구열강과 맺은 조약 역시 자유무역을 기초로 한 통상항의 개방과 거류지의 설치, 영사재판권, 협정관세, 최혜국 조항이 주내용이어서 기본적으로는 모두 불평등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세율의 상대적 유리, 내지통상권의 불인정, 연안무역권·연안해운권의 제한, 해관관리권의 자주성을 일본이 확보한데 반해 청국은 이러한 주권들을 상실했고 조선의 경우도 청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청국과는 달리 개항장·개시장에서의 토지·가옥의 소유, 공장의 건설과 수도의 개시장으로서의 개방을 규정하는 등 더 불리한 내용이 부가되었다. 註38) 뿐만 아니라 청일을 비롯한 열강은 외교적 압력을 통하여 조약문을 자국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하였다.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은 조선 국내시장의 보호와 나아가 국내산업의 육성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세계 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 이후 국내시장이 보호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개방되었다는 것은 외국 자본주의의 파괴력이 그대로 조선시장에 관철됨을 의미하며 그 결과 미숙하나마 국내적 분업체계에 의하여 성립되었던 종전의 상품생산과 유통구조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제국주의 자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민족자본의 성장을 저애한 근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