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개항과 일본의 경제침략/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1. 08:22

제3장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과 사회 경제적 변동


강화도조약과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개항과 일본의 경제침략
개항과 상품생산구조의 변화

2. 개항과 일본의 경제침략

1. 수출입무역과 조선상인
개항과 함께 일본상인은 조선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초기 일본상인들은 일종의 모험상인으로서 교역의 초기단계에서 양국간의 물가표준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이용하여 “백엔 가격의 수입품이 의외로 천엔의 가격으로 뛰는” 기만적 약탈무역을 행하고 있었다. 註39) 더구나 1884년 2월 부산·원산·인천의 개항장에 해관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관세마저 면제받고 있었다. 개항 초기부터 대일무역액은 급격히 증대하여 갔다. 초기의 대일무역은 무역상의 수지면에서 항상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수입품은 영국산 자본제 면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본과의 교역이 증대함에 따라 종래 전통적인 청국과의 국경무역은 위축되고 있었다. 개항을 전후해 의주에서의 조·청간의 교역량은 금건金巾, 옥양목등 자본제 면제품의 수입을 중심으로 연평균 3~4백만엔에 달했으나 1880년대에 들어 인천과 원산까지 개항되면서 줄어들어 1883년만 하여도 120만엔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註40) 그러므로 청국의 입장에서는 조선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방도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이 같은 군사력의 위협을 배경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고,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정치적·군사적 압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청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대하여 갔다.
〈표 6〉은 청국의 진출이 본격화하는 1885년 이후 청일 양국과 무역액을 비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상품의 수출입합계’항의 대비에서 보듯이 절대액에서는 일본과의 교역액이 계속 높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상호 경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수입’항의 대비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데 1890년대에 이르면 상호 절대액에서도 차이가 줄어들고 있었다. 더구나 무역의 수지면에서 일본과의 경우 1890년대에 들어 곡물의 수출이 급격히 증대하면서 수출초과의 현상이 나타나며 조선측이 흑자를 보이는 때도 있으나 청국과의 교역에서는 항상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수지면에서의 양국간 차이는 청국상인이 주로 수입무역에 종사한데 반해 일본상인의 경우 자본제 상품의 수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국 내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저미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서 대량의 곡물을 수출하여 간 결과이다. 註41)

〈표6〉 대청일對淸日 무역액 비교(1885~1894)(단위: 천엔)
연도대일본대청국양국간 무역의 대비
수입수출(B)상품의 
수출입 
합계
무역수지수입수출(G)상품의 
수출입 
합계
무역수지수입수출상품의 
수출입 
합계
상품상품상품
(A)(C)(D)(E)(B-A)(F)(H)(I)(J)(G-F)(A/F)(C/H)(D/F)(E/J)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377

2,064

2,080

2,196

2,299

3,086

3,226

2,542

1,949

3,646

377 

488 

783 

785 

1,122

3,475

3,219

2,271

1,543

2,050

599 

911 

1,177

1,025

608 

275 

273 

366 

425 

638 

1,754

2,552

2,863

2,981

3,421

6,561

6,445

4,813

3,492

5,696

-401

-665

-120

-386

-569

664 

266 

95 

19 

-958

301 

439 

732 

847 

1,085

1,651

2,044

2,050

1,906

2,065

9 

15 

18 

71 

109

70 

136

149

134

162




218

210

348

373

474

415

485

493

259




454 

750 

918 

1,194

1,721

2,180

2,199

2,040

2,227



-206 

-504 

-428 

-603 

-1,107

-1,493

-1,416

-1,279

-1,644

4.57 

4.70 

2.84 

2.59 

2.12 

1.87 

1.58 

1.24 

1.02 

1.77 

41.89 

32.53 

43.50 

11.06 

10.29 

49.64 

23.67 

15.24 

11.51 

12.65 



4.18 

5.60 

2.95 

1.63 

0.58 

0.66 

0.75 

0.86 

2.46 




5.62 

3.82 

3.25 

2.87 

3.81 

2.96 

2.19 

1.71 

2.56 

출전 : 오두환, 『한국개항기의 화폐제도 및 유통에 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84에서 재구성. 

비고 : ①‘양국간 무역액 대비’항은 대일무역액에 대청무역액을 나눈 상대수치이다. 

② ‘상품의 수출입합계’항은 ‘금’을 제외한 ‘수입(상품)’항과 ‘수출상품’항의 합계이다.


이는 ‘금’수출항의 대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국상인은 수입상품의 판매대금으로 주로 엽전을 받고 이를 다시 사금이나 은화 등 정화正貨의 형태로 바꾸어 유출했으므로 오히려 일본보다 청국으로의 금의 수출이 많아지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註42)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주로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제일은행을 통하여 금을 매입·유출함으로써 정화를 축적하고 나아가 금본위제 확립에 기초를 마련했다. 註43) 그러나 일본상인은 청국상인과는 달리 수입자본제 상품을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다시 곡물을 구입하여 일본으로 수출하는 교역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1890년대 이후 곡물수출이 증대하면서 자금이 주로 곡물매입에 투자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으로의 금유출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註44)

〈표 7〉에서 보듯이 일본에서의 수입은 후기로 갈수록 다양해지는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아직 자본제 면제품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그런데 일본상인은 청일전쟁 이전 단계까지 주로 영국산 섬유제품을 상해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매입하고 조선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해에서 조선에 바로 수입하는 청국상인보다 가격면에서도 상대적 열세일 수밖에 없었고, 또한 일본상인들은 주로 수입품을 현금이 아닌 하환荷換의 형태로 수입하고 있어 은행에 대한 이자지불부담이 컸다. 그 때문에 수입품에 이자부담을 전가하여 가격을 높이는데다가 이의 부담을 줄이려면 빠른 시일 안에 팔아 버려야 했으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註45) 더구나 화물을 주로 은행창고에 저장하는 탓에 비싼 보관료를 물게 되어 판로가 막히면 비싼 보관료까지 물게 되므로 손실을 입고서라도 부득이 투매投賣하는 경우도 있었다. 註46)

이같은 사정에서 일본상인이 섬유제품류를 수입했던 것은 단순히 수입품의 판매를 통한 이윤의 획득보다 그를 판매한 댓가로 곡물을 매집하여 수출하려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註47) 즉 섬유제품류의 구입원가와 곡물의 일본시장에서 판매가격의 차이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청국상인은 수입면제품의 가격조건에서 우세할 뿐만 아니라 특유의 단결력과 근검, 상대적으로 우세한 자금력으로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에서도 일본상인을 압도하여 이들이 주로 진출한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수입품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註48)

〈표7〉 주요상품별 대일수출입액 구성비(단위 : 엔, %)
연도수출수입
총액우괴총액면제품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92,518 

58,759 

181,469 

612,174 

1,256,225

2,230,296

1,768,619

1,656,078

884,060 

388,023 

504,225 

804,996 

867,058 

1,233,841

3,550,478

3,366,344

2,443,739

1,698,116

2,311,215


1,959 

50,600 

358,812 

729,706 

381,283 

21,011 

45,625 

196 

15,691 

2,193 

90,071 

21,810 

77,578 

2,037,868

1,820,319

998,519 

367,165 

979,292 


3.3 

27.9

58.6

58.1

17.2

1.2 

2.8 

0.0 

4.0 

2.4 

11.2

2.5 

6.3 

57.4

54.1

40.9

21.6

42.4


4,155 

25,323 

99,123 

19,307 

196,695 

311,325 

293,955 

100,705 

28,884 

51,733 

335,415 

471,541 

645,429 

1,005,156

913,939 

797,884 

628,324 

506,888 


7.1 

14.0

16.2

9.5 

8.8 

17.6

17.8

11.4

7.4 

10.3

41.7

54.4

52.3

28.3

27.1

32.7

37.0

21.9


54,533 

44,989 

59,229 

193,132

330,436

291,731

270,492

172,159

282,357

382,066

299,884

210,631

222,409

147,463

214,642

291,080

274,682

336,888


29.8

24.8

9.7 

15.4

14.8

16.5

16.3

19.5

72.8

75.8

37.3

24.3

18.0

4.2 

6.4 

11.9

16.2

14.6
188,246 

126,569 

244,545 

566,955 

978,014 

1,873,976

1,562,169

2,178,400

793,734 

1,671,652

2,474,185

2,815,441

3,046,443

3,377,815

4,727,839

5,256,468

4,598,485

3,880,155

5,831,563
11,623 

54,250 

167,894 

477,222 

768,467 

1,495,026

1,283,108

912,856 

497,593 

1,122,359

1,305,731

1,894,324

1,961,932

1,709,142

2,674,807

2,874,837

2,185,073

1,733,458

2,494,544
6.2 

42.9

68.7

84.2

78.6

79.8

82.1

41.9

62.7

67.1

52.8

67.3

64.4

50.6

56.6

54.7

47.5

44.7

42.8

출전 : 수출입총액과 면제품 수입액은 梶村秀樹, 『 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展開』, 龍溪書舍, 1977, 22~26쪽에 의함. 쌀과 콩의 수출액은 河元鎬, 「開港後 防穀令實施의 原因에 관한 硏究」, 『 한국사연구』 49~50·51쪽, 한국사연구회, 1985에 의함. 우피는 1877~1983년은 姜德相, 「李氏朝鮮開港直後における朝日貿易の展開」, 『 歷史學硏究』 265쪽, 1962, 1884년은 『 通商彙編』, 1885~1993년은 『 朝鮮通商三關貿易冊』, 1894년은 『 通商彙纂』에 의함.


〈표 7〉을 살펴보면 대일 수출액이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는 때는 쌀수출액이 증대할 경우이다. 쌀은 70년대 후반에 상당한 수출증대를 보이다가 1880년대는 거의 수출이 되지 않았다. 이는 계속된 흉작 이외에도 임오군란·갑신정변과 같은 정치적 원인에서도 기인한다. 그래서 1880년대 중반에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쌀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거류지 일본상인의 불경기를 야기하여 거상巨商의 폐점이 속출하고, 대부분 타인의 자본으로 영업하는 영세상인만이 남게 되는 상황이었다. 註49)

1880년대 후반에도 이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수출량보다 더 많은 외국미가 수입되고 1889년 1월에는 일본미 3만석을 삼남 각 연해읍에 나누어 기민飢民들이 매식하도록 하는 실정이었다. 註50) 그러나 1890년대 이후 쌀 수출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1890년 쌀수출의 급증은 일본에서 1889년 추미秋米의 대흉작, 1890년 하맥夏麥의 대흉작으로 인하여 이른바 ‘쌀소동’이 일어난 반면, 조선의 미작이 대풍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註51) 1891년·1892년의 수출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893년에 들어 흉작으로 수출이 다소 부진했고 이해 조선정부는 전국적으로 방곡령을 발포하기도 했다. 註52)

그런데 쌀이 풍흉에 극심한 영향을 받는데 비하여 콩은 기후조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일본에서의 수요가 증가하여 계속적으로 수출량도 많아지고 있었다. 원래 일본인은 콩을 간장과 조미료로 만드는데 사용했으나, 조선산의 콩이 값싸고 품질이 좋아서 수입을 조선에 의존하고 매년 콩밭을 뽕밭으로 하는 자가 많아지는 등 콩의 생산량이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였고 조선산 콩을 나른 나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입장에서도 무역을 통한 콩재배의 이익이 높아 후기로 갈수록 콩의 재배면적을 넓히고 있었다. 註53) 그 때문에 콩의 수출은 개항 전시기를 통하여 계속적 증대를 보이고 가격도 큰 변동이 없었다.

소가죽은 군화제조 등 일본의 군수공업의 필요성 때문에 개항 초기부터 계속 수출이 증대하여 갔으며 흉작으로 수출액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 때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흉작일 때 전염병의 발생이 많아 폐사한 농우가 대량으로 발생하거나 기근을 면하기위해 농민들이 농우를 처분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註54)

외국간의 교역은 개항장을 통하지 않은 밀무역도 있었다. 이 밀무역은 주로 곡물과 자본제 면제품의 교환형태를 띠었다. 1883년까지 일본상인은 조약상 조계 10리 밖으로의 여행이 금지되었고, 1885년에 가서야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개항 초기 개항장의 일본상인과 생산지 사이의 유통과정에는 항상 조선의 중개상인이 매개하고 있었다. 조선상인을 통한 복잡한 유통과정은 수출곡물의 원가를 상승시켜 일본상인들은 이의 축소를 원했고 또한 그들은 수출곡물의 양을 증가시키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밀무역을 기도하고 곡물의 구입에 직접 나서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곡가가 높은 개항장으로 곡물을 반출하여 이익의 증가를 원하는 조선상인의 의도도 가세하여 밀무역이 성행했다. 개항장 밖으로 여행이 자유로왔던 1884년 이후의 단계에서는 일본상인이 직접 유통과정에 침투하여 곡물을 매입하고 수입품을 판매했지만, 그 이전에는 개항장 밖으로의 행상이 금지되어 밀무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세곡선을 중심으로 한 밀매행위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이같은 일본상인과의 밀매행위에는 선상·객주 등의 곡물상인과 지방관과의 결탁이 전제되어 있었다. 일본상인의 행상이 인정되고 난 뒤에도 이러한 밀무역의 형태는 계속되었다. 특히 일본선박에 의한 미개항장에서의 밀무역은 전국적인 현상이어서 중앙정부는 각 지방에 관문을 내리며 이를 저지하기에 부심했고, 1892년에는 기선을 이용하여 부산에서 인천간을 순찰하며 밀무역을 적발하려는 사례까지 있었다. 註55) 일본상인만이 아니라 황해도·평안도 연안에서 청국상인의 밀무역도 적지 않았다. 註56)

이처럼 일본상인들은 불평등조약에 기초해 개항초기부터 약탈적 무역을 자행했고 외국인의 행상이 보장된 후에는 청국상인과 상호 대립 가운데 교역량을 증대시켰다. 특히 이들은 조선의 곡물과 금을 유출함으로써 일본 국내곡물시장의 안정을 꾀하고 정화를 축적하여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대외 교역량의 증대와 외국상인의 유통과정침투는 조선의 상품화폐경제를 변화시키며 종래의 국내상품생산의 분업구조를 교란해 갔다.

개항으로 국내적 상품유통은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는 농민전쟁이후나 보호국화된 뒤의 단계 만큼 유통구조의 재편이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외무역이 증대하고 각 지역의 상권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종래의 상품유통권, 유통상품의 구성, 유통조직 등 유통구조는 전반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각 개항장은 전통적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를 대신하여 각지에서 생산된 상품이 집산되고 국내의 각 포구 등으로 중계하는 유통의 거점으로 등장했다. 종래 동해안과 서해안간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로, 특히 북어의 집산지로 명성이 있었던 마산의 상권이 부산의 개항으로 몰락했던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원래 전통적 국내상품유통권은 크게 경상도의 동해안과 강원도의 영동지방 및 함경도를 연결하는 유통권과 전라도·경상도에서 서울·개성을 거쳐 황해도·평안도를 잇는 유통권으로 양분할 수 있다. 註57)

그런데 개항 직후부터 대일무역이 증가하면서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어 갔다. 원산항이 1880년 4월, 인천항이 1883년 11월에 개항되기 이전에는 주로 부산을 통하여 수출되고 있었다. 1879년 당시 수입품의 대종을 이루던 금건의 판매지역은 대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 4개도였는데, 수입품이 엽전을 매개로 곡물로 바뀌어 수출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에는 이 4개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여진다. 註58) 당시 국내적 유통과 대외교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쌀과 콩 등의 국내적 곡물수급구조는 이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면서 위협받았다. 종래 함경도 지역은 강원도의 영동지방과 경상도 동해안을 연결하는 곡물 유통권 아래 경상도에서 미곡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항의 곡물수출이 증가하면서 함경도로 공급되던 곡물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식량의 부족현상이 일어나서 함경도의 많은 농민이 유민화하고 만주 지역으로 월경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 곡물의 대일수출에 따른 미가의 상승과 식량부족에서 발생했다는 지적도 이 새로운 곡물유통권의 형성으로 인한 전국적인 곡물수급구조의 교란현상에 근거한다. 註59) 실제로 개항 이전에 주로 서울로 운송되던 전라도의 미곡은 1890년을 전후하여 10분의 7~8이 부산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註60) 그래서 1892년 전라감사는 ‘외국인의 곡물수출로 인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부안 등 14개 읍에 방곡을 실시하기도 했다. 註61)

그뒤 1885년과 1886년은 부산항의 수출비율이 총쌀수출액의 각각 83.6%, 98.1%를 차지했으나 이후는 인천항의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60%전후를 차지하다가 1893년, 1894년 경에는 오히려 인천항의 수출비율이 각각 73.3%, 82.9%로 역전되었다. 註62) 두류豆類는 1887년 이후 인천항과 부산항의 수출비율이 대등하며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인천의 수출양이 우세한 추세에 있었다. 그러므로 곡물수출의 주도권도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부산 중심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인천항은 입지적인 관계로 서울의 유통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종래 서울로 향하던 무곡선은 인천항의 미가와 서울의 미가의 차이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890년 이후 급격한 곡물수출의 증가는 서울의 곡물가격을 등귀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전통적인 국내 최대의 곡물소비지인 서울과 곡물의 대일수출의 새로운 중심지로 등장한 인천항간에 같은 유통권의 주도를 놓고 상권대립이 치열했다. 그래서 1893년 1월 조선정부는 인천항으로의 곡물유출을 막기 위한 한 방법으로 외무독판이 ‘만석동회선령萬石洞廻船令’을 내려 조선선박의 인천항에서의 적하와 양륙을 금지했고, 이에 대항하여 일본상인들은 철폐를 요구하고 조선상인과의 거래를 거절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註63)

한편 이 시기 기선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도입은 원격지 유통의 확대와 이에 따른 국내 상품유통의 전반적 증대를 가져왔다. 부산의 예를 들면 1885년 국내상품 이입액이 38,495엔, 이출액이 68,856엔이었던데 비해 1894년에는 각각 520,848엔, 473,653엔으로 증가했다. 원산은 1885년에 이입 76,781엔, 이출 62,247엔이던 것이 1894년 이입 326,894엔, 이출 428,625엔으로 증가했고 인천도 1885년이 이입 16,649엔, 이출 5,174엔인데 1895년은 이입 297,601엔, 이출 277,164엔이었다. 이중 이입액에는 외국과의 교역을 위한 상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출액은 대부분 국내적 유통을 위한 것이었다. 외국과의 무역상품으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국내적 상품유통에서는 중요한 상품이었고 외국상품의 수입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던 명태와 마포의 예를 들면 명태는 1880년대 중엽에 5만엔 정도에 불과한 원산의 이출액이 1890년대에 30만엔 내외, 마포는 1885년 6만엔대에서 1890년대 초 한때 100만엔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註64) 이같은 유통량의 증대는 무엇보다 기선이라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한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상품생산과 수요가 확대되고 있었음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 즉, 대외무역 특히 곡물과 금 등의 대량수출로 전반적으로 조선사회의 상품 구매력이 증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격지 유통은 주로 일본인이 소유한 기선에 의존했다. 따라서 국내적 상품유통에서도 일본상인이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었고 일본상인에 대한 조선상인의 종속도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기선을 이용해 개항장간의 교역을 주도했고 개항되지 않은 연안의 포구에서 밀무역을 자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상인들은 일본에서의 곡가가 하락할 때 매입한 곡물을 다른 개항장으로 이송하고 상업적 이윤을 취득했다. 항상적으로 부산항에서 미곡을 공급받고 있던 원산항으로의 일본기선에 의한 곡물수송이 바로 그것이다. 註65) 이같은 현상은 다른 상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1889년 인천의 연안무역의 경우 미개항장에서의 미곡 운송 등은 조선상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원격지인 부산의 곤포昆布, 원산의 명태 등의 상권은 대체로 기선을 이용한 일본상인이 담당했다. 註66) 그래서 종래 조선상인에 의해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수송되던 함경도의 명태와 마포의 상권이 해로를 이용한 일본상인에게 침식 당해 서울의 어물전상인이 손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었고 1893년 일본인의 보고에 의하면 “명태어의 판매권도 점점 한상韓商의 손을 떠나 재류외상在留外商의 손에 이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註67)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은 호남지방에서 목면을 서울에 반입하고 판매함으로써 백목전상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註68)

이같은 외국상인의 상권침탈은 종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전통상인에게 대응과 종속을 강요했다. 위의 어물전이나 백목전의 경우와 같이 외국상인이 직접 서울에 점포를 설치漢城開棧하며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게 되자 이들은 외국상인의 점포철수를 요구하는 동맹철시를 하기도 했다. 註69) 또한 조선후기 이래 세곡운송을 통하여 성장하여 온 경강상인京江商人들은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상권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일본기선의 세곡운송으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고 있었다. 개성상인은 종래의 상업조직을 이용하여 개항 이후 활동영역을 수출입유통업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통하여 이 시기까지는 서울 이북지방에서 계속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해주와 재령상인들도 황해도 지방에서 미곡을 매집하는 일본상인과 대응하여 일정하게 유지했다. 평양상인들은 1883년 인천항에 대동상회를 설치하고 개항초부터 수출입상품의 유통에 종사함으로써 적어도 진남포가 개항되고 일본상인이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이전까지는 상권을 오히려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註70) 보부상은 혜상공국惠商公局에서 상리국商理局으로 소속되는 등 어용상인화하면서 관권을 빙자하여 경제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던 소상인을 침탈하는 전근대성을 면치 못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에서도 보부상의 작폐 금지 요구가 나왔던 것이다 註.71)

개항 후 등장한 새로운 상인층으로는 개항장객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개항초기에는 경강과 외방의 객주와는 달리 주인권을 소유하지 않아 특권에 기초한 중개독점권이나 영업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개항장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정부는 수출화물에 대한 수세와 함께 개항장객주를 선정하는 등 통제를 시작했다. 개항장객주들도 상회·상의소 등의 객주조합을 결성했다. 관허의 상회사는 상업세를 내는 댓가로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매매주선권을 보장받는 특권적 상인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1880년대 말부터 외국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내지행상에 나서 산지의 객주에게 직접 상품을 매매하면서 개항장객주의 상권은 위축되어 갔다. 봉건정부도 개항장객주에게서 거두는 세입이 감소하자 이들의 특권적 지위를 강화하려고 특정객주를 선정하여 이들에게 각 지역의 매매주선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25가객주 전관제와 같은 특권적 상업정책을 실시했다가 행상 등 소상인의 반발과 외국공사들의 항의로 인해 곧 철폐하기도 했다. 註72) 그런데 개항장객주는 그 성격상 상품유통과정에서 외국상인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다가 자본면에서도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의 금융지배체제에 예속되어 있어 그 성장 자체가 매판화의 가능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개항 이후 상품유통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급격히 진전되었고 국내 상품유통도 기선과 같은 근대적 수송수단의 도입과 대외무역의 확대에 따른 구매력의 증진에 힘입어 원격지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국내적 상품생산과 수요확대는 국내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세계자본주의체제 편입의 결과였으며 유통과정도 기선을 장악한 외국상인이 주도하여 감으로써 국내시장 자체가 보호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상품유통의 증대는 조선경제의 제국주의에의 예속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국내시장이 보호되지 못하는 속에서 상인조직도 외국상인과 연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상권이 축소될 수밖에 없어 이 시기 상인계급의 성장은 매판화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는 것이었다.

 

2. 악화남발과 일본금융자본의 침투

조선후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확대는 화폐의 유통을 확대시켜왔다. 더구나 개항으로 대외무역이 증대하면서 화폐경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이같은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고액화의 제조를 방기하고 봉건정부의 이익을 위한 악화를 남발했다. 봉건적 수취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재정악화현상은 개항 이후에도 여전했고 오히려 개화정책을 수행을 위해 재정수요는 더 확대되는 경향에 있었다. 이의 타개를 위해 고종은 민씨 일파와 묄렌도르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1883년부터 당오전을 주조했다.

당오전은 명목가치가 종래 당일전상평통보의 5배이면서도 실질가치는 2~3배 밖에 안되는 악화였다. 註73) 이 화폐는 그 이듬해까지 대량으로 발행되었으나 악화주조에 따른 폐해로 주조가 한동안 억제되었다가 1888년부터 다시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정부의 주조 외에도 민간인의 청부 주조 및 일본인 등의 사주전私鑄錢 밀수로 1891년 현재 당일전 유통량이 2,000만냥이었던데 비해 당오전의 유통량은 약 7,700만냥에 달했다. 註74)그런데 당오전은 당일전의 5배로 강제 통용되었으나 1년도 못되어 명목가치의 반 이하로 폭락한 후 지속적인 하락추세를 보였다. 이 당오전은 초기에는 경인지방에 국한하여 유통되다가 1886년경부터 유통구역이 확장되면서 경기도 외에 황해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방, 그리고 강원도 연해지방 등에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화폐유통권은 각각 당오전·당일전 통용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이같은 화폐유통권의 양분은 봉건정부의 재정정책의 이중성에 기인한다. 즉 화폐발행을 통한 재정확대를 위해서는 당오전 유통구역을 확장시켜야 하면서도 동시에 부세수취시 악화인 당오전 수납이 당일전 수취에 비해 상대적 재정 손실을 가져 오는 것이었으므로 당오전 유통구역의 전면적 확장을 도모할 수 없었던 것이다. 註75) 당오전 유통권은 대개 서울 중심의 상품유통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상품유통권이 다를 경우 화폐유통권의 차이는 현실의 경제생활에서 큰 불편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폐유통권의 분할은 이 시기 전국적 시장권의 성장이 미숙했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로 볼 수도 있다.

1891년부터는 평양에서 종래 당일전 실질가치의 1/3도 못되는, 흔히 평양전이라 불리는 조악한 당일전이 대량 발행되었다. 평양전은 원산·부산 등 기왕의 당일전 유통권에까지 침투함으로써 당일전의 유통가치도 하락시켰다. 부산의 경우 1891년 들어 당오전이 일부 유통되기 시작한 데다가 1892년 7~8월 이래 인천에서 평양전이 대량으로 유입됨으로써 당일전의 가치까지 하락시켜 조선과 외국화폐와의 환율엽전시세도 폭락하게 되었다. 註76) 그리하여 봉건정부의 악화남발은 유통되는 모든 조선화폐에 대한 가치를 하락시키며 격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했고, 1892년경에는 조선 전역에 걸쳐 당오전·평양전·구당일전 구별없이 모두 같은 가치로 유통하게 되었다. 註77)

악화남발로 인한 화폐가치의 하락은 먼저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잇던 도시나 농촌의 임금노동자층을 비롯하여 하급관리·군인 등 임금생활자의 생계를 극심하게 압박했다. 또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당오전으로 그 대가를 받게 된 공인貢人도 자본축적의 여지가 줄어들고 오히려 몰락하고 있었다. 註78) 기타 상인이나 상품생산자의 경우에도 조선화폐에 의한 화폐자본의 축적이 어려워지고 말았으며 상대적으로 일본화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가치가 계속 하락하는 데다가 운송·저장, 또 거액거래에 불편한 소액동전이었던 조선화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안정되어 있고 운반·저장에 편리한 일본은화나 지폐가 상거래나 부의 축적수단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註79) 곡물수출의 확대로 대일무역이 본격화하는 1890년에 들어 개항장뿐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일본화폐의 저장·거래가 빈번했으며 그 유통량도 1894년경이 되면 100~150만엔 정도로 조선 전체 화폐유통량의 1/10 이상을 차지했다. 註80) 일본화폐의 사용 증대는 조선상인의 일본자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도를 높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같은 악화남발로 인한 사회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근대적 폐제의 수립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1891년에는 정부는 1원 은화, 10문 동화, 5문 동화를 주조하여 동화를 보조화로 하는 은본위제를 채택하는 ‘신식화폐조례’를 발표하고 근대적 화폐제도의 수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청국의 간섭, 봉건정부의 이해와 정화 축적이 부족했던 관계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1894년의 ‘신식화폐장정’의 경우에도 백동화 남발로 화폐제도가 극도로 문란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註81)

1894년까지 조선에 지점을 설치한 일본은행은 제일은행1878, 제18은행1890, 제53은행1892 등 3개였다. 이중에서도 제일은행은 부산1878·원산1880·인천1882·서울1887 등에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 은행은 일본정부와의 위탁계약으로 금을 매입했을 뿐만 아니라 1884년 이후부터는 해관세 취급특권도 획득했다. 근대적 금융기관이 전무한 채 전근대적 계조직이나 객주 등 상인조직 내에서의 어음거래, 그밖의 고리대가 금융기관을 대신했던 조선에서 재정의 주요부분을 차지했던 해관세를 일본제일은행이 장악한 것은 자주적 금융구조의 수립에 큰 손실이었다. 제일은행에 예치된 해관세는 주로 일본상인들의 상업·무역 자금원으로 기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일본은행에서 융자받은 일본상인은 이 자금을 다시 조선상인들에게 대부하여 주로 곡물을 매입하도록 했다. 註82)

일본상인의 자금선대는 개항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일채보관록』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1885년 음력 1월에서 5월까지 부산의 일본상인에게 부채를 지고 갚지 못하여 고발당한 조선인은 경상도와 전라도 각지에 걸쳐 있으며 부채액은 100냥 미만에서 최고 3,500냥에 이른다. 註83) 1894년 부산항의 일본상인에게 진 조선상인의 공식적 부채총액은 원리금 합계 약 14만냥에 달했다. 註84) 이러한 선대자금을 곡물이나 현금으로 상환하지 못할 경우 가옥이나 전답을 팔 수밖에 없었고 그것마저 없을 때 일본상인들은 채무자의 친족들에게까지 보상을 강요하여 이들의 족징族徵행위는 당면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註85)

이 시기는 근대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을 통해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할 수 있는 민족경제의 확립이 긴급히 요구되던 때였다. 근대적 화폐정책의 수립과 금융구조의 자주적 근대화는 이를 위해 반드시 전제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악화남발을 통한 재정확대만 추구함으로써 극심한 인플레이션현상을 초래하여 민중의 생계를 압박하고 화폐자본의 축적을 저애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화폐의 유통확대와 일본금융자본에 대한 조선인의 종속을 심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