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2장 침략의 전진기지 일본공관의 구조, 일본공관의 설치와 활동/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10. 08:55

제2장 침략의 전진기지 일본공관의 구조


일본공관의 설치와 활동

일본공관의 구조


1. 일본공관의 설치와 활동


일본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개항 이후 일본은 부산에 관리관管理官을 파견해 공관을 설치했으나 외교공관이라기보다 개항장인 부산의 일본의 거류민을 ‘관리’하는 기관이었고, 통상과 거류민을 보호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공관 설치를 위해 일본은 끊임없이 조선정부에 외교적 협상을 해오다가 1880년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개항장에 영사관을 둠으로써 조선의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전 부문에서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재조선 일본공관은 단순히 자국의 지시를 수행하는 기관만은 아니었다. 일본공사관과 영사관의 구성원들은 직접 조선의 각지를 유력하면서 조선 국내 사정을 탐지해 침략의 기초적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중앙정치의 상황을 파악해 일본에 보고함으로써 일본의 대조선정책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영사관은 일본의 경제침략의 첨병으로 기능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조선정책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이 같은 재조선 일본공사관과 영사관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활동에 못지않게 외교활동의 기반이 되는 공관 내부의 제도적 장치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그동안 개항기 재조선 일본공사나 영사 등 일본 외교관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 시기를 다룬 정치 외교사 연구에서 연구의 시기와 대상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상당히 자세히 검토되어 왔다. 註1) 그러나 공사관이나 영사관의 구조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는 찾기 어렵다. 註2) 그래서 재조선 일본공관의 외교관의 구성 등 인적 조건, 운영 경비 등 물적 기반의 규명과 일본의 조선침략의 과정에서 일본공관이 어떤 활동을 했던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공사관의 설치와 공사

1875년 운양호雲揚號사건 이후 일본정부는 개항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다.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으로 조건에 온 흑전청륭黑田淸隆은 태정대신太政大臣 삼조실미三條實美에게서 훈조訓條를 받아 조약체결을 하게 되었다. 이 훈조 중에 “피아의 화목을 위해 양국의 수도에 서로 사신을 재류하게 하고, 그 사신은 예조판서와 대등한 예를 가지도록 한다”라는 항목이 있었다. 註3) 그러나 외교사절단의 파견 및 상주는 즉각 이뤄지지 않았다. 외교관의 상주는 조선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어어서 수호조규 제2조에도 “일본국 정부는 지금으로부터 15개월 후 조선의 한성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조판서를 친접親接하고 교제사무를 상의商議한다. 사신使臣의 주류구잠駐留久暫은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라 하여 상주를 확정한 것이 아니었다. 조약체결 이후 그 후속조치를 위해 파견된 외무성 이사관 궁본소일宮本小一은 수호조규 제2조를 상주사절의 파견으로 해석하여 사신의 관사를 설치한다는 제1조 조항을 포함한 조일수호조규부록안을 제시하면서 외교사절의 상주를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의 강수관講修官 조인희趙寅熙는 이사관의 파견과 같이 양국 통교상 사신이 왕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주永住’라는 말이 없으므로 이를 ‘주경駐京’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회담이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일본공사관 설치문제는 수호조규부록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註4)

1877년 9월 일본정부는 화방의질花房義質을 대리공사로 파견해서 상주공사관 개설과 공사 주재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사신의 직무를 교빙에 국한하고 관리관과 지방관간의 교섭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말았다. 註5) 일본의 관리관은 조일수호조규에서 영사재판권이 규정되면서 1876년 11월에 초대 부산항 관리관으로 근등진서近藤鎭鋤가 임명되었다. 註6) 조선정부는 여전히 왜관의 관리관을 통해 동래부사와 교섭하던 전통적 관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조선과의 교섭을 개항이전과 같이 동래부사를 통하는 방식을 수용할 수 없어 공사관의 설치와 공사의 주경駐京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외교현안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정부는 1880년 화방의질을 조선주차朝鮮國駐箚 변리공사辨理公使로 격상시킨 후 “한성에 주재시켜 교섭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한다”는 국서를 고종에게 봉정하도록 했다. 註7) 1880년 12월 17일 서울에 도착한 화방은 예조판서를 통해 국서를 국왕에게 봉정하게 일정을 잡아 달라고 했다. 마침 이때는 척사론이 비등하던 시기여서 정부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22일 예조판서 윤자승尹滋承과 동참판同參判 김홍집金弘集이 화방과 만난 뒤 정부는 봉정을 허락했다. 27일 화방은 인천의 일본군함에서 의장대를 불러 숙소에서 돈화문까지 행진하고 창덕궁 중희당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국서를 봉정했다. 註8) 국서의 내용 중 조선정부는 공사의 주경을 허용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인 끝에 천황의 칭호문제 등에 대해 청의 자문을 구한 후 국서를 수리하기에 이르렀다. 국서의 봉정으로 일본은 주경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고, 조선정부도 일본공사가 장기간에 걸쳐 구경기중영舊京畿中營, 淸水館에 일본국기를 게양하면서 체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섭을 하는 일도 묵인함으로서 일본공사의 주경문제는 마무리를 지었다. 조선정부가 일본의 국서 내용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일본공사의 주경駐京이 실현되었다. 註9) 이와 함께 이해 부산, 원산의 개항과 함께 영사관의 설치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 가족동반과 조선 내의 여행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 이후에 가능하게 되었다. 註10)

1886년 일본은 칙령으로 재외공사관에 주요관리로 특명전권공사칙임1등, 변리공사칙임2등, 대리공사주임1등, 공사관 참사관주임1등, 공사관 서기관주임2-4등,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주임5-6등을 두고 서기생판임으로 하여금 공사관 회계를 전담하도록 했다. 註11) 특명전권공사나 변리공사의 파견은 대상 국가의 중요도에 따라 달랐다. 조선에 주경한 초기 공사는 변리공사였으므로 공사관 설치 직후는 변리공사·공사관 참사관·공사서기관·공사관시보 등으로 구성되었고, 변리공사 부재시 대리공사체제로 운영했다. 화방의질·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공사체제 때는 변리공사가 일본을 자주 왕래하는 바람에 일상적 업무는 대리공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1893년 7월 부임한 대조규개大鳥圭介 공사 이후는 전권특명공사가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해 10월 외교관 관제가 바뀌어 특명전권공사, 변리공사, 대리공사, 공사관 1등 서기관, 공사관 2등 서기관, 공사관 3등 서기관, 외교관보, 서기생 등이 공사관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註12) 1895년에는 이상의 직제에 공사관 1등 통역관, 공사관 2등 통역관, 공사관 통역사 등이 추가되었다. 註13) 물론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가등증웅加藤增雄등이 취임 초기에 변리공사로서 활동하다가 전권특명공사로 임명되기도 해, 대조규개 이후에도 조선에 변리공사 직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촌수태랑·원경原敬 공사 때에는 가등증웅이, 임권조林權助 공사 시기에는 산좌원차랑山座圓次郞이 대리공사를 맡아 대리공사제도도 함께 운영되었다. 註14)

역대 주한공사를 역임한 자는 초대 화방을 비롯해서 죽첨진일랑·근등진서·하북준필河北俊弼·미산정개梶山鼎介·대석정기大石正已·대조규개·정상형井上馨·삼포오루三浦梧樓·소촌수태랑·원경·가등증웅·임권조 등 13명이며, 임시대리공사를 포함하면 20명이 넘는다. 그들을 연령별로 살펴보면, 30대 3명화방 37, 대석 37, 임 39, 40대 8명죽첨 40, 근등 47, 하북 46, 미산 43, 삼포 49, 소촌 40, 원 40, 가등 44, 50대정상 58와 60대대조 61가 각각 1명이다. 이들 중 청일전쟁과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관련해서 일종의 특수 임무를 띠었던 정상·삼포를 제외하면, 주한공사는 30~4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註15)

19세기 말의 격변하던 조선 내부의 정치적 사건과 국제정세를 반영하듯이 공사의 재직 기간은 짧았다. 표에서 보듯이 가장 오래 주재하고 있던 임권조를 제외하면, 화방·죽첨·근등·가등 등이 비교적 장기간인 2~3년간 재직했을 뿐 나머지 공사들은 1년을 넘기지도 못했다. 초기 공사였던 화방·죽첨의 경우 잦은 귀국으로 실제로 약 1년 3개월 밖에 근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대리공사체제로 운영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재임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특히 1890년대 이후 공사는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아관파천 등 국내외적 사건의 발생과 관련해 재임기간이 극히 짧았던 것이다.

공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당연히 공사였다. 공사의 선임은 일본 국내의 정치적 위치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었다. 조선 내의 사안에 따라, 그 출신 배경에 따라 공사의 선임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공사 중에는 이미 조선을 방문한 경험이 있거나 재조선 일본공사관 혹은 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실정에 밝은 인물들이 많았다. 공사관이 설치된 후 초대공사인 화방은 1872년 8월 명치유신 후 외무성이 외교를 총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에 통보하고 무역 협상을 벌이려고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876년 10월 조일수호조규에 근거해 외무대승外務大丞으로 대리공사에 임명되었다. 

〈표1〉역대 재조선 일본공사의 재임기간
성명재임기간임명·취임· 
이임일
직명리명재임기간취임일 
이임일
직명비고
화방
의질
1880.4.17~ 
1882.11.6
80.4.17 임명, 
81.6.29 이임, 
82.4.22 취임, 
82.9.18 이임 
변리공사副田節1881.6~ 
1882.4
81.6.29~
82.4.22
공사사대리81.6.29 
~82.4 
일시귀국
近藤鎭鋤1882.9~ 
1882.1
82.9.18~
83.1.7
임시대리
공사
1881.9.18 
귀국
죽첨진일랑1882.11.6~ 
1887.8.6
82.11.6 임명 
83.1.7 취임 
83.12.6 이임 
84.10.30 취임 
85.1 이임 
변리공사島村久1883.12~
1884.10
83.12.6~
84.10.30
임시대리
공사
83.12.6 
歸朝
近藤鎭鋤1885.1~ 
1885.6
85.1~ 
85.6.23
임시대리
공사
85.1 
귀조
高平小五郞1885.6~ 
1886.9
85.6.23~
86.10.4
임시대리
공사
 
 1886.9~ 
1887.2
86.10.4~
87.3.13
임시대리
공사
 
 1887.2~ 
1887.7
87.3.13~
87.9.18
임시대리
공사
 
 1887.8.6~ 
1890.12.17
87.8.6 임명 
87.9.18 취임 
91.2.4 이임
대리변리
공사
   임시대리
공사
 
 1890.12.17~
1891.3.10
90.12.20 임명 
91.2.4 취임 
91.3.15 이임
대리변리
공사
松井慶四郞1891.3~ 
1891.4
91.3.10~
91.4.17
공사사무
대리
91.3.9 
사망
미산정개1891.3.24~ 
1892.12.16
91.3.20 임명 
91.4.17 취임 
93.1.24 이임
변리공사     
 1892.12.16~
1893.7.26
93.1.12 임명 
93.1.24 취임 
93 이임
변리공사     
대조규개1893.7.26~ 
1894.10.15
93.7.15 임명 
93.9.29 취임 
94.10.19 이임
특명전권
공사
     
정상형1894.10.15~
1895.8.17
94.10.15 임명 
94.10.26 취임 
95.9.17 이임
특명전권
공사
     
삼포오루1895.8.17~ 
1895.10.17
95.8.17 임명 
95.9.1 취임 
95.10.19 이임
특명전권
공사
     
소촌수태랑1895.10.17~
1896.6.11
95.10.17 임명 
95.10.19 취임 
96.4.8 임명 
96.5.31 이임
변리공사
특명전권공사 
(96.4.8 임명)
加藤增雄1896.5~ 
1896.7
96.5.31~
96.7.7
임시대리공사96.4.8 
특명전권 
공사로 
승임됨
원경1896.6.11~ 
1897.2.23
96.6.11 임명 
96.7.7 취임 
96.10.4 이임
특명전권공사加藤增雄1896.10~
1897.2
96.10~ 
96.2.24
대리공사96.10 귀조
가등증웅1897.2.23~ 
1899.6.1
97.2.24 임명 
97.2.24 취임 
98.11.30 임명 
99.5.17 이임
변리공사
특명전권공사 
(98.11.29 임명)
    98.11.30 
특명전권 
공사로 
승임됨
임권1899.6.1~ 
1906.1.31
99.6.1 임명 
99.6 취임 
06.2.21 이임
특명전권공사山座圓次郞1899.12 임시대리공사1899.12.25
일시귀국
출전 : 한철호, 「개화기(1880-1906) 역대 주한 일본공사의 경력과 한국인식」, 『한국사상사학보 』 25, 2001.

1877년 9월과 1879년 3월 다시 대리공사로 임명된 후 공사 주경駐京과 부산 외 두 곳의 개항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註16) 물론 이 경우는 공관을 가진 공사가 아니라 외교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임명된 것이었다. 정상井上도 1876년 12월 특명전권 부대신으로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는데 공을 세우고, 임오군란 직후 하관下關까지 출장을 나가 화방 공사를 진두지휘하면서 제물포조약 체결을 지원했고, 갑신정변 후에는 특명전권대사로서 직접 내한하여 한성조약을 맺었다.
또한 근등은 1876년 11월 부산항 관리관으로 파견된 이래 1880년 2월부터 1882년 2월까지 초대 부산영사를 지냈다. 1882년 4월부터 1883년 1월까지 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인천영사1882.4~12를 겸임하고, 화방의 귀국 후 임시대리공사82.9~83.1, 1885년 1월부터 7월까지 공사관 서기관으로서 죽첨 귀국 후 임시대리공사로도 활동하였다. 註17) 임권조 역시 1888년 11월부터 1890년 4월까지 인천영사관 부영사로 재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가등은 1894년 10월부터 부산영사로 근무 중 1896년 5월 공사관 서기관으로 겸임 발령을 받아 7월까지, 이어 1896년 10월말 공사 원경이 귀국한 후에도 임시대리공사를 각각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경이 공사직에 복귀하지 않자 공사로 발탁되었다.
또 공사 중에는 조선에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청국과 러시아 등 조선 주변의 국가에 근무하면서 한국문제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인물도 있었다. 앞서 화방은 1870년 7월 청국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사전 교섭을 벌일 당시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유원전광柳原前光의 수행원으로 천진에 파견되었고, 그 다음해 열강이 청일수호조규 체결을 구미 배척 시도로 간주하자 이 사실을 전권대신 이달종성伊達宗城에 전달하고 대책을 강구하러 역시 천진으로 급파된 적이 있었다. 이어 1872년 청국 고력苦力사건으로 러시아와 외교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리공사로서 교섭을 성공리에 마무리짓기도 하였다. 註18)
죽첨은 1875년 11월 특명전권공사 삼유례森有禮의 수행원으로 청국에 파견되었고, 1880년 5월부터 2년간 천진영사로 근무하면서 지부芝罘·우장牛莊영사도 겸임했다. 미산도 1880년 3월 주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한 후 1886년 5월부터 1888년 2월까지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임시대리공사87.6~11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대조는 1889년 6월부터 4년간 주청특명전권공사로, 원경도 1883년 11월부터 1년 6개월간 천진영사로 근무했다. 소촌은 1893년 10월 주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그 다음달 임시대리공사로 부임하였다가 1894년 8월 청일전쟁으로 국교가 단절되자 귀국한 뒤 그해 10월 만주의 일본군 제1군 점령지역의 민정장관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임권조도 1887년 10월 지부 부영사와 1892년 3월 상해영사, 그리고 1898년 청국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註19)
일본은 공사의 상주를 반대하는 조선과 계속적인 외교교섭 끝에 1880년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한 이후 통감부 설치 때까지 공사를 파견했다. 이들의 재임기간은 이 시기 급변하던 국내외 정세 속에 짧을 수밖에 없었고, 주로 조선에 직간접으로 관계에 있던 인물이 공사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2. 영사관의 설치와 활동
일본에서 ‘영사’란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69년이었지만, 관제로 자리 잡은 것은 1871년 「태정관포고」에 의해서였다. 이때 총영사5등관·영사6등관·부영사7등관·대영사代領事, 8등관 제도가 만들어졌다가 그 뒤 대영사가 없어졌다. 공사는 정치적 성격이 강해 외교관리 중에서도 영사와 다른 직무계열이었다. 앞에서 본대로 외교관 출신이 아닌, 군인의 경우에도 공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영사는 외교관 출신이 많았지만 영사 업무가 경제관계와 직접 관련되는 만큼 1894년 외교관 시험제도가 있기 전까지는 대장성 출신들이 다수 있었다. 註20)
조선에서 영사가 파견된 것은 공사의 주경문제가 해결된 1880년이었다. 1880년 공사의 주경과 함께 개항장인 부산과 원산에 영사를 함께 파견했다. 영사파견 이전에도 전통적으로 왜관이 설치된 부산지역에는 1876년부터 이미 관리관이란 직함으로 영사업무를 맡는 관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 8관에는 “일본상민을 관리하는 官을 설치한다”고 되어 있었고, 이에 의해 근등진서가 10월 31일 부산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관리관은 “부산무역사정 및 부산에 오는 인민·선박·재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호”하는 것을 임무로 사실상 영사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였다. 註21) 1879년 부산의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던 전전헌길前田獻吉은 원산 개항과 함께 총영사로 부임했다. 註22)
1886년 영사관 관제에 의하면 총영사주임 1등·영사주임2-4등·부영사주임5-6등·영사관 서기생판임을 두고, 필요에 따라 무역사무관주임 3등 이하을 둘 수 있었다. 1893년 10월의 관제개편으로 총영사공사관 1등 서기관급·1등 영사공사관 2등 서기관급·2등 영사공사관 3등 서기관급·영사관보공사관 외교관보급로 재편되었다. 무역사무관은 직급상 1등영사나 2등 영사와 같았다. 註23) 1895년에는 영사관의 외교관에는 공사관과 마찬가지로 통역관과 통역생이 추가되었다.
각 영사관의 영사의 직위는 〈표 2〉에서 보는 대로 해당 지역의 중요도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영사관은 부산1880·원산1880·인천1882·서울1884·목포1897·진남포1897·마산1900 등 7개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 7개 영사관으로 조선 전역을 관할구역으로 나누어 각종 조사를 해 보고를 했던 것이다. 註24)
1900년 12월 외무성이 작성한 「재외제국영사관관할구역在外帝國領事館管轄區域」에 의하면 각 영사관의 관할구역은 다음과 같다.

① 부산영사관
경상도 동북부-김해·양산·밀양·영산·창녕·현풍·인동·선산·개령·김산으로 서남부와의 경계로 하고 그 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강원도 남부-평창·삼척으로 북부와 경계로 하고 그 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② 원산영사관
함경도
강원도 동북부-경계는 경성 및 부산영사관의 관할구역에 표기
③ 인천영사관
경기도 서부-경계는 경성영사관의 관할구역에 표기
황해도 남부-장연·해주·배천·금천으로 북부와의 경계로 하고 그 부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충청도 서북부-경계는 경성과 목포영사관의 관할구역에 표기.
④ 경성영사관
경기도 동부-죽산·용인·과천·양주·고양·파주·장단·개성으로 서부와 경계로 하고 그 부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강원도 서부-철원·금화·낭천·춘천·홍천·원주로서 동부의 경계로 하고 그 부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충청도 동부-목천·전의·연기·진잠으로 서부의 경계로 하고 그 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⑤ 목포영사관
전라도
충청도 남부-보령·남포·홍산·정산·공주·노성·연산으로 서북과의 경계로 하고 그 부군의 관할지는 본 관구에 속한다.
⑥ 진남포영사관
평안도
황해도 북부-경계는 인천영사관 관할구역에 표기.
⑦ 마산영사관
경상도 서남부-경계는 부산영사관 관할구역에 표기.

그뒤 통감부 설치로 1906년 2월 1일 개항장에 영사관 조직이 이사청 조직으로 전환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 영사관제도를 폐지했다. 이사청의 설치과정에서 통감부가 있던 서울과 중요도가 떨어지던 진남포는 이사청이 설치되지 않았다.
〈표2〉재조선 일본영사관의 역대 영사

가 . 부산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79.5.17관리관前田獻吉
1880.2.21영사近藤鎭鋤
1882.6.13영사副田節
1882.7.31총영사前田獻吉
1886.1.14영사鈴木充美
1886.9.15영사室田義文
1890.4.2영사立田革
1891.3.30부영사中川恒次郞
1894.10.22일등영사加藤增雄
1896.3.29총영사室田義文
1896.4.23일등영사秋月左都夫
1898.11.17일등영사伊集院彦吉
1899.5.2일등영사能勢辰五郞
1899.5.23마산분관개관
1900.4.11마산분관 영사관 독립
1901.9.5영사幣原喜重郞
1904.2.23영사有吉明
1906.2.1통감부 이사청으로 이관
나. 원산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80.2.2총영사前田獻吉
1882.7.31영사副田節
1886.6.9부영사渡邊修
1893.6.8부영사中川恒次郞
1893.12.5이등영사上野專一
1896.2.6이등영사二口美久
1898.11.4이등영사小川盛重
1899.8.8영사武藤精次郞
1901.6.12영사瀨川淺之進
1903.7.14부영사大木安之助
1906.2.1통감부 이사청으로 이관
다. 인천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82.4.19영사近藤鎭鋤
1883.4.10영사小林端一
1886.2.6영사鈴木充美
1888.11.26부영사林權助
1892.3.29부영사能勢辰五郞
1894.9.15일등영사荒川巳次
1894.12.18일등영사珍田捨巳
1895.9.13일등영사橋口直右衛門
1896.9.3일등영사石井菊次郞
1899.3.31일등영사伊集院彦吉
1901.8.5영사加藤本四郞
1906.2.1통감부 이사청으로 이관
라. 서울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84.10.30겸임영사島村久
1885.5.16島村의 겸임을 중지하고 영사파견 않음
1887.6.28부영사橋口直右衛門
1891.2.21총영사河北俊弼
1891.9.22영사杉村濬
1893.11.10이등영사加藤增雄
1896.6.20일등영사加藤增雄
1897.2.23일등영사秋月左都夫
1899.12.6영사山座円次郞
1900.6.11영사三增久米吉
마. 목포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97.9.16일등영사久水三郞
1897.10.26영사관개관
1899.5.26군산분관 개관
1899.6.23영사森川季四郞
1902.5.10영사若松兎三郞
1906.2.1통감부 이사청으로 이관
바. 진남포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897.9.28石井영사(인천) 겸무
1897.10.30영사관개관
1899.5.2伊集院영사(인천) 겸무
1901.11.16영사中山嘉吉郞
1903.9.16부영사染谷成章
사. 마산
임명 일시직 위영사명
1900.4.11영사坂田重次郞
1900.4.11부산영사관 마산분관에서 영사관으로 독립 개관
1902.10.29영사三浦彌五郞
1906.2.1통감부 이사청으로 이관
출전 : 角山日榮本 編著,『 領事報告の硏究-資料編』, 同文館, 1986, 489~493·498~500쪽.

1880년 만들어진 「재조선영사관훈령」에 의하면 영사는 그 지역의 지방관과 대등하게 교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 훈령에는 전염병 발생에 대한 대응, 거류 일본인의 호구파악, 일본인의 학교와 병원 설립시 인허가 업무, 거류민 보호를 위한 경찰 운용, 거류민의 거류지내 부동산 임대 지권 발급, 거류민의 영업에 대해 영업세의 징수와 폐지, 거류민이 포상과 수재 화재로 인해 재해인민의 본국 송환, 거류민과 협의해 도로나 하수도를 수선하고 거류민 대표자 선출의 인가업무 등을 규정했다. 註25)
이처럼 일본영사의 업무는 관할지역내의 모든 행정 사법사무를 맡아보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영사재판권과 일본인의 해외통상업무확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10관에 의해 일본은 조선에서의 일본인 범죄를 조선측이 아니라 일본 관원이 재판하는 치외법권을 획득했다.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일본은 영사재판권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했다. 형사범죄의 경우 징역 100일 이하는 영사가 전결하고 민사재판은 모두 영사의 주관 아래 심리하도록 있었다. 형사사건 중 100일 이상의 징역, 민사사건의 공소의 경우는 장기長崎 상등재판소 관할로 이관하도록 했다. 註26)
1885년 이후 조선에 파견된 영사의 업무는 중요한 업무로 추가된 것은 호조의 발급이었다. 일본상인의 통행이 자유로운 간행이정間行里程은 1882년이후 종래의 10리에서 100리40km로 확장되었다. 1882년 8월 30일 음력 7월 23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과 함께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속약」 제1관에는 “원산·부산·인천 각항에서의 간행이정을 확장하여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부터는 다시 이를 각 100리로 확장한다”고 되어 있었다. 註27) 그래서, 1883년 7월 25일6월 22일의 「의정조선국간행이정조약議訂朝鮮國間行里程約條」에 의하여 50리로 확장되었고, 註28) 1884년 11월 29일10월 12일 조인된 「조선국간행이정조약부록朝鮮國間行里程約書附錄」에 따라 100리의 간행이정 구간이 정해졌다. 註29)
간행이정의 확정과 함께 외국상인의 개항장 밖으로의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1882년 8월 23일7월 10일 조인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제4조에는 호조護照를 휴대한 청국인에게는 행상이 인정되고 있었다. 註30) 이것에 의하여 1883년 11월 26일10월 27의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이하 「영약英約」으로 함 제4관 6조에 조계 100리 이내는 호조없이, 100리 이외는 호조소지자에 한하여 여행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이루어졌다. 註31) 이 조문은 다른 통상국에도 균점되고 말았는데 특히 일본은 최혜국조관의 규정에 따라 이 조약의 균점을 주장했다. 註32) 원래 일본과의 조약은 이 규정이 없었으나 「영약」에 의해 개항장 밖으로 행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註33) 이에 따라 일본외무성은 1885년 6월 23일 「조선국내지여행취체규칙朝鮮國內地旅行取締規則」을 제정 영사에게 시달하여 일본인의 개항장 밖으로의 여행, 행상에 대한 세부지침을 마련했다. 註34)
호조의 발급은 원래 각항의 영사가 감리監理를 경유하여 통리아문에서 인증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888년 10월부터는 호조의 발급을 각항감리에게 위임하여 신청인이 감리서監理署에 요청하면 감리가 발급하고, 1894년부터는 영사관에 감리서의 압인押印을 두어 영사가 직접 교부했다. 1893년 8월 17일에는 동일지방을 상시 왕복하는 자에 대해서는 1매의 호조로 6개월간 왕복사용이 가능하도록 해 일본상인의 행상은 거의 저지를 받지 않게 되었고 호조 역시 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註35)
일본이 세계 각지에 영사관을 설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인의 해외통상업무확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명치 초기부터 영사보고제도가 있었지만, 경비문제나 영사관의 인원부족으로 1884년 무역보고규칙이 제정되면서 사실상 영사보고규정이 정식화되었다. 註36)
일본 영사관 활동의 결과물로 외무성에 보고하는 영사보고가 공개화된 것은 1882년부터였다. 1882년 7월 외무성 기록국은 재외영사와의 왕복문서를 통상서류로 일괄 정리해 1881년 보고를 『명치십사년통상휘편明治十四年通商彙編』으로 펴냈다. 그 서언에 “통상무역通商貿易에 관한 것을 게재함을 주로 한다”고 되어있다. 註37) 이 『통상휘찬』은 처음에 연간이었으나 “내외 무역에 관한 것은 긴급한 시기를 우려가 있어” 註38) 1883년 보고부터는 상 하반계로 나누고, 1886년부터는 한 해에 3~4회 발행체제를 갖추다가 『명치19년 제2회 통상휘편明治十九年第二回通商彙編』1889년 간행을 끝으로 10책을 발행한 후 통상보고체제로 넘어갔다. 『통상보고』로 바뀐 이유는 통상정보가 대량화하면서 이를 신속하게 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통상보고』는 1887년부터 매월 3-4회 발행되었고, 1889년 중단되었다. 註39) 1894년부터는 외무성 통상국에서 발행하는 『통상휘찬』이 나왔다. 註40)
그리고 『관보』에도 영사보고가 실려 있었다. 최초로 『관보』에 실린 조선에서의 영사보고는 1893년 8월 10일 ‘조선국인천항경황朝鮮國仁川港景況’였다. 註41) 그래서 영사보고가 ‘농상공사정農商工事情’이나 ‘외보外報’ 등으로 분류되어 실려 있다.
이 같은 영사보고의 내용을 통해 영사관의 활동을 살필 수 있다.
〈표3〉『통상휘편』소재 중국·한국의 영사보고
영사관蠶絲면화직물製茶米穀水産화폐금속잡화잡록무역통계합계
한국1111 41896370158
일본533151910153954154
출전 : 高嶋雅明, 「領事報告제도の發展と「領事報告」の利行」, 角山日榮本編著, 『 領事報告の硏究』, 同文館, 1986, 101쪽

우선 『통상휘편』 소재 조선에서의 영사보고는 〈표 3〉에서 보는 대로 모두 154건이었다. 같은 기간 중국에서의 일본영사 보고와 비교해 보아도 그 양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중 잡록이 많은 것은 개항장이 만들어지고, 조선의 내부 사정을 조사하던 이유를 먼저 들 수 있다. 이미 기초적 경제지표 조사가 끝난 중국과는 달리 도량형 등 각종 경제관계의 기초자료를 조사하는 활동이 있었던 탓이었고, 새롭게 밀려드는 개항장 일본인의 출신지 및 영업 상황의 보고 등 무역 이외에도 보고할 사항이 많았던 개항 초기의 조건과도 관련 있었다. 註42)
그런데 1887년 이후에 나온 『통상보고』에 실린 중국의 영사보고는 603건인데 비해 조선은 182건에 불과하다. 註43) 그 이유는 곡물수출의 부진으로 인한 불경기에서 찾아야 한다. 계속된 흉작과 정치적 변란으로 일본으로 수출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880년대 중반에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쌀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거류지 일본상인의 불경기를 야기하여 거상巨商의 폐점이 속출하고, 대부분 타인의 자본으로 영업하는 영세상인만이 남게 되는 상황이었다. 註44) 1886년도 부산 수출곡물의 생산지인 전라·경상도에 흉작이 심하여 종자가 구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농민이 농촌을 떠나 이산하는 지경이었고, 註45) 외국미가 수입되고 있었다. 註46) 이 같은 흉작으로 인한 곡가의 등귀는 미곡의 수출을 주도하던 일본상인에 대한 반발을 초래하여 1886년 12월 경상도 방곡령 때에는 밀양 관하의 수산水山에서 곡물을 배에 싣고 지나던 일본상인 교목미삼랑橋木彌三郞이 관리의 수세에 항의하다가 군집한 군중에게 구타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註47) 1880년대 후반에도 이 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수출량보다 더 많은 외국미가 수입되고 1889년 1월에는 일본미 3만석을 삼남 각연해읍에 나누어 기민飢民들이 매식하도록 하는 실정이었다. 註48) 이 같은 불경기는 『통상보고』를 주된 목적으로 하던 영사관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관보』의 경우 『통상휘편』이나 『통상보고』가 주로 통상관계 자료를 제공하던데 비해 ‘外報’를 통해 상대적으로 조선내부 사정을 전해 주고 있어 영사관의 활동영역을 짐작하게 한다. 통상관계 자료가 가장 많지만 그밖에도 곡창지대의 작황조사, 일정 지방의 특정작물의 작황조사, 민정民情의 조사, 도량형 조사, 각지의 인구와 지형 지세의 조사 등 조선의 사정 전반을 조사·보고하였다. 註49)
『통상휘찬』 단계에 들어가면 일본영사관의 활동 영역이 전 부문에 걸쳐 있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각 지방의 경제 상황만이 아니라 각지방의 정치적 상황보고까지 영사관의 보고 대상이었다. 『통상휘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복명서復命書’류이다. ‘복명서’에는 영사관에서 파견된 일본인이 각 지방을 다니면서 정치적 상황에 따른 민정일반, 각 지역의 인구, 면적, 지세, 경제관계 일반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조사 보고하고 있어 영사관의 활동 영역이 조선 내 모든 상황을 포괄해 조사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물론 일본영사관의 활동이 조선 내 사정을 보고하는데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의 통상과 관련해 방해되는 요소들은 일상적으로 항의를 통해 일본인에게 유리하게 사정을 끌어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방곡령이다.
1881년 부산 일본영사 근등진서는 외무대신 정상형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달양력 1881년 5월 중순부터 조선인의 본항本港으로 수도輸到된 미곡이 점차 감소하고 하순에 이르러 거의 곡로穀路가 두절杜絶되는 양상이 나타나기에 정탐探偵하여 보니 양산·구포·김해 등의 지방에 대구관리大丘官吏가 출장하여 수곡輸穀을 차류差留하고 있었다. 작년도 이때 즈음해 같은 폐해를 받고 자못 곤란했는데 전철을 밟고 있다. 註50)

그래서, 5월 23일 일본영사는 동래부사 김선근金善根에게 현재의 미곡유출저지사건은 양국간에 미협정된 것이어서 관리의 독단으로 개항장으로의 곡물유통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 註51) 이에 대하여 김선근은 양식이 궁핍한 때 각영 각읍에서 백성을 위해 지방관 방곡을 시행하는 것은 상례라고 했다. 註52) 그러나 일본영사는 방곡은 바로 곡물수출을 금하는 것이라 하고 양국상민의 무역을 관리가 막을 수 없다는 병자수호조규 제9관을 들어 반박하며 1880년 5월경음력 4월의 방곡에 대해 언급한 후 대구관리의 곡문집류穀物執留를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註53) 그러자 김선근은 대구관리의 집곡執穀은 ‘세곡방간稅穀防奸’을 위한 것으로 상로商路를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며, 註54) 대구의 감영에서는 항의에 따라 관리들을 철수했다. 註55)
이같은 사례는 방곡령 실시 시기마다 빈발했고, 조선 각지에서의 수세에 대해서도 불평등한 조약의 조문을 내세워 격렬하게 항의했다. 註56) 청일전쟁 이후 일본상인이 조선 각지에서 사실상 유통과정을 장악해 나가는 데는 이 같은 일본영사관의 활동이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영사관은 외교현안을 다루는 공사관과 역할이 달랐다. 영사관의 활동 영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사재판권의 행사와 일본인의 해외통상업무확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일본영사관의 활동 영역은 각 지방의 경제 상황이나 통상에 관련된 정보만이 아니라 각 지방의 정치적 상황보고까지 영사관의 보고 대상이어서 조선 사회 이 전부문에 걸쳐 직접 각지를 유력하고 정보를 수집해 일본의 대한 정책수립의 기초를 제공했다. 또한 지방관의 정책에 대해서도 외교적 압력을 행사함으로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