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9. 12:26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독립운동의 성과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


1.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먼저 독립운동가의 유형을 보기로 한다. 3·1운동을 기준하면 거의 전민족이 독립운동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전민족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의 유형을 분류할 수도 없음으로 유명인사에 한정하고 그 외는 민중집단으로 묶을 수밖에 없다. 유명인사로 한정한다고 해도 무엇을 기준하여 분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는 당자의 사상·직업·운동영역을 중시하기로 한다. 유학자, 종교인, 신지식인, 학생, 청소년, 사회주의자, 농민, 노동자, 여성 등의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독립운동의 주체는 민족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민족해방운동을 말한다. 민족운동에는 시민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 민족통일운동 등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인 민족해방운동은 종속해방운동과 식민지해방운동으로 나뉘어지는데 종속해방운동은 반半식민지해방운동으로서 구국운동이라고도 하고, 반식민지가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의 식민지해방운동을 독립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반식민지해방운동은 과거의 중국처럼 반식민지해방운동으로 끝난 경우도 많으나, 한편 반식민지해방운동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에는 반식민지해방운동인 구국운동이 식민지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독립운동은 종속해방운동인 구국운동을 선행운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한국의 경우에 구한말 구국운동으로 전개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그것이다.

모든 사회운동은 근대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민족운동도 근대에 일어났다. 민족이나 민족의식은 전통시대에 발생하고 있었으나 민족운동이나 민족주의는 근대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그의 식민지 지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독립운동이란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운동도 운동의 목적인 이념이 있고, 그 이념에 호응한 인원의 조직이 있고, 다음에 그 조직이 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활동을 전개하기 마련이므로 위의 일련의 노력이란 것도 합목적성에 의한 조직적인 활동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개념을 정리하고 보면, 한국독립운동은 구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던 구국운동에서 비롯되어 1919년 3·1운동의 분수령을 너머 1920년대의 민족 총력항쟁의 시기를 거쳐 1930년대에는 이론과 조직을 정비하면서 일제 패망을 전기한 1940년대에 독립전쟁을 통하여 해방을 맞는 것으로 대단원을 내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거기에 나타난 일반 성격과 특징은 어떤 것이고 그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註1)

제국주의가 세계를 압도하던 1900년 전후의 100년 동안에는 지구의 8할의 인구가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내의 계급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2할의 소수 인구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8할의 인구가 각기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성격은 모두 달랐다. 그것은 각기의 주·객관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독립운동은 어떻게 달랐을까.


1. 독립운동의 지구성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왜란甲午倭亂에 대항하여 의병이 봉기하고, 이어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동학농민전쟁이 다시 일어나 독립운동의 포문을 연 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50년간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구한말에는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인 1910년대는 독립운동의 공간을 해외로 확장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전열을 정비하고 역량을 축적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의 결실을 맺었다. 그 후 1920년대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 걸쳐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정치적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독립전쟁, 사회경제적으로는 물산장려운동과 협동조합운동 같은 자산가 운동도 있었지만, 농민운동·노동운동·형평운동·여성운동·학생운동처럼 좀더 강력한 항쟁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국학운동과 언론운동과 교육운동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산만한 점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통할을 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인데,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면서 임시정부의 기능이 약화되자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에 신간회가 결성되어 국내에서나마 통할 기능을 회복하였는데 그것이 길지는 못하였다. 신간회가 1931년에 해산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의 유일당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만주에서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가 국민부와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로 개편되는 변화가 있었다.

1930년대에도 독립운동 전체를 통할할 조직의 발전은 없었다. 윤봉길의 상해의거 후 임시정부가 활력을 되찾기는 했으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 각처를 이동하느라고 전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즉, 정부적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전체를 통할할 사령탑이 없었던 1930년대라고 해도 독립운동 계열별로 조직의 정비가 추진되어 1920년대처럼 산만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는 문화운동·노농운동·학생운동별로 조직을 정비하여 항쟁이 전개되었는가 하면, 국외에서도 정당 조직이 추진되면서 정비되었다. 가령 중국 관내의 경우를 본다면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고, 1935년에 좌파연합의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우파에서는 한국국민당의 결성을 보았다. 그리고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우파정당인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민족혁명당을 중심한 좌파정당은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1940년 전후에는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동북항일련군 등 각처의 독립군이 광복을 전망하면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8·15 당시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무장단체는 중경의 한국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소련 88여단의 한인부대가 있었는데 총인원은 2천 명 정도였다. 1940년에 임시정부도 중경에 정착하면서 통할 기능을 회복해 갔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운동은 해방에 이르기까지 50년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운동조직을 면면히 이어가면서, 또 각 분야별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시간적 지속성을 남다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2. 독립운동의 세계성

독립운동은 초기부터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1908년 연해주에 유인석·이범윤·최재형·안중근 등의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또 『해조신문』과 한민학교를 중심한 계몽운동도 활발하여 해외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외독립운동이 그때에 비롯된 것은 아니다. 1895년 김구가 참가한 김이언의 강계의병은 만주 삼도구에서 결성한 것이었고, 이듬해 유인석의 호서의진은 초산을 거쳐 관전현寬甸縣에 들어가 활동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1906년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의숙瑞甸義塾은 만주 용정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선구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본격적인 것은 1908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903년부터 미주에 이민 또는 망명에 의한 동포사회가 형성되면서 1908년에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에 이어 1909년에는 박용만을 중심한 덴버의 해외독립운동지도자총회와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가 설치되면서 미주동포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기에도 1905년 안창호 등이 공립협회와 『공립신문』을 간행한 것과 같이 선행 민족운동이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는 1908년부터로 보인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전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앞의 연해주와 미주 외에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북경과 상해를 중심한 중국 관내지방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많은 지사들이 집결하면서 거기가 새롭게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유럽지방도 프랑스의 임시정부 파리통신부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1904년 이한응이 자결한 런던과 그곳의 한인친목회, 헤이그의 1907년 만국평화회의 활동과 이준의 순국, 국제사회당대회가 열렸던 암스테르담이나 제네바, 1911년 이범진이 순국한 페테르부르크, 그리고 한국 공산주의 자들이 무수하게 드나든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 등 세계 곳곳이 한국독립운동의 무대였다. 1930년대부터 중국은 전 국토가 한국독립운동의 무대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당사국인 일본도 독립운동의 대상지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와 같이 세계가 곧 한국독립운동의 무대였는데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국독립운동의 수난의 단면이기도 했다. 그곳 당사국의 정책에 따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현지 정부와의 관계가 가장 복잡했던 곳은 러시아였다. 제정 러시아때만 해도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에 항거하여 유인석·이상설 등이 성명회를 결성하여 국제적으로 항쟁을 전개하자 러시아정부는 독립운동자를 검거하고 문창범 등 7명을 이르쿠츠크지방으로 유배시켰다. 1914년에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다시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때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고 활동을 개시한 이상설·박은식·신채호 등이 중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이동휘는 옥에 갇히는 불운을 당했다. 그 후 1917년 2월혁명과 더불어 다시 활동을 계속했으나 10월혁명 후에는 일본군이 진주하여 4월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혁명의 와중에서 수난이 적지 않았다.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혁명이 끝난 뒤에는 소련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였고 한인 독자적 조직에 의한 공산주의운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부분의 동포가 강제이주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한국독립운동의 수난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무대가 세계적이었으므로 수난이 있기는 해도 한국인의 의지를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효과로 보면 수난에 그치는 일은 아니었다.


3. 독립운동 이념의 다원성

독립운동의 이념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던 것은 특히 3·1운동 후부터의 일이었다. 그전에 전통 보수사상과 신진 진보사상이 양립되었던 사실은 언제 어느 나라에나 있던 역사 변혁기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의 현상은 달랐다. 3·1운동의 기본사상은 모든 선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의·인도’ 즉, 정의사회론과 인도주의였고 그를 위한 사회개조와 세계개조 사상이었다. 때문에 인도주의와 사회개조의 구체적 방법으로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3·1운동 뒤인 1920년대에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3·1운동 전까지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 인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고민의 결과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한 것이 여러 갈래의 사상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인도주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방법론의 차이 때문에 독립운동이 분열 조짐을 보이면 협동전선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여러 정당이 난립되었을 때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념의 문제로 주목할 것은 민족주의 위상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그가 목표한 최고의 가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주의에 있었다. 민족주의의 요구는 세계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전단계에 한시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시적 기간에는 민족주의가 세계주의와 모순되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가 정착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의 이야기였다. 그전에는 대체로 자유주의자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되어 세계주의자는 독립운동을 포기하였고, 반면 민족주의자는 구한말에는 종족주의, 1920년대까지는 국수주의에 머물고 있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신간회를 결성한 시기를 제외하면 당장에 세계주의를 달성할 듯이 세계혁명론을 고집하고 있었다. 세계혁명과 민족혁명의 시기와 그에 대한 논리가 비교적 분명했던 것은 무정부주의의 노선이었다. 아시아 무정부주의운동에서는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가 끝난 1923년부터 민족주의의 노선이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것도 운동자의 당대에 세계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공상에 젖어 있었다. 혹은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도 민족주의 단계를 거치면 세계주의가 곧 달성될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런 경향은 한국독립운동 선상의 착각이 아니라 세계사조의 오류였다. 당시는 세계주의과 국제주의을 혼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계주의와 국제주의를 같은 의미로 뒤섞어 사용하였다. 그것은 착각이고 오류였다. 세계주의의 꿈을 실현하자면 민족주의의 기초 위에서 국제주의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국제주의의 단계란 유럽연합이 노리는 국가연합 같은 블럭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변형일 뿐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국제주의 단계란 민족국가간의 다국적사회가 형성된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셋 또는 넷의 복수 시민권을 행사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한 국제주의 단계를 거치면 그때에 비로소 세계주의 이상을 구체화할 기초가 마련되고 또 이론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에서 바로 세계주의로 비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그와 같이 세계주의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기초 위에서 거론할 문제인데 1920년대에 국제주의는커녕 민족주의의 단계도 거치지 않고 세계주의 실현을 성급하게 제기하여 판단을 흐려 놓았다. 하물며 식민지하의 민족으로서 민족주의를 외면한 논리는 너무 공허한 주장이었다.

민족주의 문제를 살핌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개량주의의 문제이다. 원래 개량주의란 용어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될 때 사회주의 진영에서 제기된 말이다.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인정하고 의회주의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계산한 논리를 혁명적 사회주의측에서 개량주의라고 비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노선은 1957년 프랑크푸르트 국제사회당대회에서 정의한 민주사회주의 노선이다. 한국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20년대까지도 사회주의의 개량주의는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1920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한 개량주의는 민족운동상의 개량주의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식민통치체제와 공존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노선이다. 그것이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식민 권력과 타협하면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별도의 논쟁이 있어야 할 문제이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혁명 사회주의인 공산주의 외에 민주사회주의 사조가 일러났던 것으로 이해된다. 주로 사회주의 교양을 위하여 문필활동에 종사한 이가 그들이었다.

이상과 같은 사상 동향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에서도 같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임시정부에서 채택하고 있던 삼균주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였다고 하겠다. 삼균주의는 1931년에 조소앙이 제창한 것으로 그에 앞서 안창호가 제창한 대공주의와 표리관계의 내용이었다. 즉 대공주의는 삼균주의로 이론이 구체화되었다고 이해된다. 그 후 삼균주의는 1930년대 각 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고 1940년에는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에 임시정부 헌장의 이념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이념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한 사상의 다원적 특질은 독립운동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다종교 국가였던 한국사의 특질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한 다원주의적 한국인의 체질은 일원적 사고에 얽매인 것 보다 더 인문주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면 다원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아량과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4. 조직의 분산과 협동전선

독립운동 사상이 다원적이었으므로 운동 조직도 분산적이었다. 조직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상의 다원성에만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략의 차이에 기인한 바도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이유는 독립운동을 원만히 수행하자면 후속인원과 자금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원활치 못하여 조직이 분산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한국독립운동을 세계 각처에서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조직이 분산된 것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비밀지하조직으로 존재하여 연락도 용이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분산 조직이 당연했을 수도 있다. 무장활동을 한 만주 같은 경우에는 무기를 소지한다는 것이 국제법상 용인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남북만주의 지하무장단체가 분산해서 활동했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때문에 독립운동 조직이 분산해 있었다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립 분열하여 서로 부정적 존재가 되지 않았던가의 여부가 문제였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기간에 연합과 협동전선이 꾸준히 추진되었던 것이다. 협동전선의 초기의 모습은 구한말 의병진의 합동작전이라든지,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각처 독립군의 연합을 시도한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성격의 단체간의 단순한 연합 또는 통합의 의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협동전선이란 이념을 달리하는 조직이 공동의 목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같은 방략을 세우고 협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통합이나 통일과는 달랐다. 단지 통일의 전제일 수는 있었다. 1926년부터 만주에서 유일당운동이 추진되던 과정에서나 또 1939년 기강에서 7당회의가 열렸을 때, 단체본위와 개인본위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 바로 단체본위의 협동론과 개인본위의 통합론으로 의견이 대립했던 것인데 그것을 보면, 독립운동 전선에서 협동과 통일의 실제 차이를 이해할 것이다. 오늘날 남북한에서 연합이니 연방이니 하면서 공히 통일의 전단계로서 협동전선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역사의 산물로 이해된다.

협동전선의 형성을 위한 선구적 노력은 1919년 임시정부의 통합정부가 수립될 때 연립내각을 형성했던 사실과 1923년 5개월간에 걸친 국민대표회의였다. 그런데 그 두 사실은 통합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협동전선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26년부터 국내외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대당 결성의 추진이었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국내에서 신간회 결성의 성과로 끝났다. 1931년 신간회를 해산하면서 또 안재홍의 그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무산되면서 협동전선이 붕괴되는 듯 했다. 그때인 1932년에 상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출범하여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1935년 남경에서는 민족혁명당, 1936년 만주에서는 조국광복회가, 1937년 남경에서는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 1938년 한구에서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되었고, 1939년에는 이것을 총망라한 협동전선의 방안으로서 7당회의와 5당회의가 중국의 오지인 기강에서 열렸던 것이다. 그때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2년에 중경에 있던 양대 정당인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이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무정부주의연맹 등의 군소정당까지 제휴받아 임시정부의 통합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연적한 과제의 일단을 해결한 셈이 되었다. 뒤이어 1945년에는 임시정부의 김구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연안의 조선독립동맹을 이끈 김두봉과 교섭하여 협동 연합에 합의하였다. 그때에 8·15를 맞아 실현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이 세계 각처에서 전개된 나머지 독립운동 조직도 각처에 산재하였다. 그에 따라 서로 연락이 어려웠고 또 현지의 영향도 있어 이념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주목할 것은 꾸준히 통일을 지향한 협동전선이 추진되어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8·15가 광복인 것을 해방으로 그치게 하고 또 동시에 분단의 역사가 되게 한 엄연한 사실이 주체적 의지가 아닌 미소를 중심한 국제제패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민족의 통일 의지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5. 방법과 전략의 다양성

독립운동의 이념과 조직이 다원적이고 분산적이었던 것처럼 독립운동의 방략도 다양하였다. 처음에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유림의 살신성인의 정신과 민중의 생명을 담보한 항쟁의 정신이 결합한 의병의 전쟁 노선이 있었던가 하면, 유산자 지식인의 사회진화론적 계몽운동의 실력양성 노선이 양립하여 앞으로 독립운동의 전략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한 두 노선이 1910년대에 이르러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합하면서 합류해 갔다. 즉 해외의 서간도 경학사耕學社, 북간도 간민회墾民會, 연해주 권업회, 하와이 국민군단國民軍團 등이 추진한 독립군기지 개척이나 국내의 대한광복회와 조선국민회 등의 혁명노선이 새롭게 독립운동 방략의 주류를 형성해 갔다.

두 노선의 통합이란 사회진화론적 계몽운동이 의병의 독립전쟁 노선으로 수정한 것을 말하지만 의병은 계몽주의의 근대적 정치이론을 수용하므로써 두 노선이 합류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존 노선을 고수한경우는 의병노선으로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民團組合, 그리고 1920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있었는데 그들의 복벽주의의 봉건성이 대중적 호소력을 갖지 못하여 생명이 길지 못하였다. 한편 구한말 계몽주의 노선을 고수한 경우는 1910년대에는 조선산직장려계가 대표적이었다. 그것이 1920년대에 사회진화론을 지킨 민족 개량주의의 길을 열었다.

개량주의 외에는 1910년대까지 양기탁·박은식·신채호·이동휘처럼 사회진화론자였다고 하더라도 3·1운동을 계기로 사회진화론의 사고에서 탈피하여 절대독립을 목표한 독립전쟁론자가 되었다. 독립군기지를 개척하던 이의 경우는 말할 것 없다.

그리하여 독립운동 방략으로 독립전쟁론이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독립전쟁론에는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는 의열투쟁론이나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혁명론이나 이른바 민족주의 좌파의 비타협론도 모두 독립전쟁론과 같은 범주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독립전쟁론이 중심 이론으로 자리를 굳혀 8·15가 가까울수록 더욱 강화되어 갔다. 중심 방략인 독립전쟁론 외에 외교론·실력양성론이 있었다. 외교론은 이승만을 중심한 미주동포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던 방략으로 8·15까지 이론의 변화가 없었다. 외교론도 독립전쟁을 위한 것이었다면 독립전쟁론 중 방법이 되겠지만, 외교론 자체가 방략이라면 외세 인식에 결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외교론은 종속론에 함몰할 위험성이 있었다.

실력양성론은 민족개량주의의 방략이었다. 그것은 민족주의의 가냘픈 유형으로 의미가 있을런지는 몰라도 독립운동의 방략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독립운동의 방략이 못된다면 민족주의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도 강력하다. 그러나 개량주의는 1920년대에는 연약하나마 민족주의로 존재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연약한 체질 탓으로 친일파로 전락하는 등 민족주의에서 떠나 버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자치론이다. 간혹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자치론이 중심 방략이었다고 해서 한국독립운동에서도 그것을 의미있게 평가하려는 논의가 있다. 그것은 식민통치의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논의이다.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통치는 간접통치였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직접 식민통치였다. 간접통치에서 자치론은 민족공간의 확대를 겨냥한 것이지만 직접통치에서 자치론은 식민통치의 통로를 확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식민지시대 자치론은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독립운동의 방략은 독립전쟁론이 중심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격렬한 독립운동이라야 역사에서도 각광을 받게 되었고 격정이 넘치는 체질이 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기억해 둘만 하다.


대동단결선언


방략의 문제로 또 하나 간과해서 안될 것은 망명정부와 임시정부 수립의 전략에 관한 것이다. 당초 1910년을 전후해서는 망명정부 전략만이 있었다. 망명정부 계획은 세 가지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첫번째는 1910년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광무황제에게 망명을 종용한 밀서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두번째는 1915년 이상설 등의 신한혁명당의 계획이었고, 세번째가 이회영의 추진이었다. 그런데 1917년부터는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다는 것은 광무황제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보황주의를 버리고 공화주의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민족의 고유주권설을 선언하며 국내외에 전달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이었다. 그리하여 3·1운동과 더불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국내에서 셋, 해외에서 넷, 도합 7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6. 운동양상의 격렬성과 민중의 주도성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방략이 절대독립을 위한 독립전쟁론이 주축이었으므로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은 자연히 격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 같은 무장활동은 말할 것 없지만 국내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의 경우를 보아도 격렬한 투쟁 양상을 나타냈다. 그것은 독립운동이 의병전쟁에서 비롯된 주체적 성격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일제 식민통치의 극단적 잔학성에 대한 상대적 현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소작쟁의를 중심한 농민운동과 노동쟁의 등의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 양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민중운동이었지만 학생운동도 학생이 중산층 가정의 자녀라고 해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민중운동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국내독립운동에서는 민중운동이 질과 양, 양면에서 모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민중은 불특정한 대중 가운데 운동 주체로 성장한 특정한 대중을 가리킨다. 그러한 민중이 역사에 부상한 것은 조선후기 홍경래란이나 삼남민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서 민중운동이 부각된 것은 동학농민전쟁 제2차 봉기부터의 일이었다. 그 후 영학당·활빈당 등의 광무농민운동을 거쳐 의병전쟁에 합류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민중의 존재조건이 더욱 악화되어 3·1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민중은 3·1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후 격렬한 민중운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어떠한 제한독립론도 거부한 절대독립론을 확립해 갔던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격렬하게 전개된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