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35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8.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지금까지 8·15에 이르기까지 종전기의 독립운동을 개관하였는데 여기서 8·15의 단면을 놓고 독립운동 진영의 모습을 간추려 보겠다. 국내의 경우에는 학생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이 지하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쟁하다가 투옥이 계속되는 속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혹은 부민관府民館의 폭파와 같이 애국청년의 의열투쟁 속에서 해방이 되었다. 아니면 농민운동의 경우에 많았던 일로서 개인단위로 산발적인 항쟁을 펴다가 8·15를 맞았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관계자를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 인사처림 옥중에서 8·15를 맞았고, 혹은 장도빈·황의돈·정인보·김병로·홍명희·안재홍·김광진 등은 은거생활에서, 전진한은 홍천 창촌리에서 머슴살이 하고, 박헌영은 광주에서 벽돌공장 직공으로, 최익한은 대포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8·15를 맞았다. 여운형과 그의 건국동맹 또는 농민동맹 관계인사도 잠적상태에서 8·15를 맞았다.

8·15 당시의 독립운동단체는 중경의 임시정부광복군, 연안의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미주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소련의 88여단 한인부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 지원단체였음으로 별도 성격의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거기서 이탈한 이승만동지회은 임시정부주미외교위원회를 계속 맡아 있었으며, 그 후에 이탈한 조선민족혁명당후원회는 임시정부의 김원봉을 지원하였으므로 모두 임시정부의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88여단의 한인부대는 별도의 정치단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8·15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정치 군사 양면 조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이 대표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이 통일전선을 도모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거나 종전기에 국내유격전을 계획했고, 국내에서 직접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려는 이른바 취지수항就地受降을 꾀하였던 사실로 보아도 명실이 부합한다고 하겠다. 註119)

그런데 8·15 후 환국할 때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서 무장이 해제되고, 임시정부와 독립독맹,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인사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여기에서 1942년부터 나돌던 국제관리설을 기억하게 했으며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순서'라는 전제가 무엇이라는 것의 윤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인은 38선의 분할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잠정적 군사분계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때 미국이나 소련은 남북에서 각각 자기세력이 집권하도록 준비를 진행하였다.

한국인이 독립운동 기간에 민족·공산 진영으로 나뉘어 좌우대립하였던 것은 사실인데, 그렇더라도 미국과 소련은 독립운동 진영의 좌우익 어느쪽 의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국인의 사상이 자기들과 같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세력을 부식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독립전쟁 같은 해외독립운동은 외지적 종결이 강요되고 말았다.

남과 북의 분단이 고정되어 가는 속에서, 북에서 박헌영·무정·김두봉 등의 숙청은 소련의 기반을 확대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며 남에서 김구·여운형의 암살과 반민특위사건은 미군정 이래 친일파의 정착과정을 한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과 북에서 민중과는 유리된 정치세력이 성장하여 갔다. 반면에 민중은 일제 통치 아래서도 표현하였던 민족적 양심을 잃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정착을 위하여 희생되어 갔다.

8·15 이후 그와 같은 국제제패의 풍토 속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으로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설이 전달되어 왔을 때, 온 민족이 반대했던 이유도 축적된 독립의지 때문이었다. 당시의 한국독립당·한국민주당·한국국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 등 모두가 반탁의 기치를 올렸다. 1942년부터 국제관리설이 제기되었고, 임시정부나 독립동맹이 그토록 반대해 왔던 국제관리설이 신탁통치로 이름을 바꾸어 전달되어 왔을 때, 찬탁贊託이 아무리 차원을 달리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더라도 국제제패를 심화시키는 처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46년 초부터 국제관계를 고려한 찬탁론이 일어나고 그것이 좌파를 중심으로 현실적으로 확산되면서 찬탁·반탁은 좌우파의 세력 다툼으로 전이되었고, 세력의 역학은 배후에 미국과 소련을 업을 필요에 당면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민족의 자주 자립적 꿈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자유주의자가 찬탁을 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반탁을 외칠 수 없는 비민족적 함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반탁과 반공反共 구호가 유착하여 미군정 아래서 친일군상이 난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은 근신해야 할 일본 학병 출신자가 학병동맹을 조직하여 강력한 운동단체로 등장하는 것 같은 독립운동을 무색케 하는 일이 파다하게 전개되었다.

8·15 이후 친일 풍토의 불식문제, 적산관리敵産管理 문제, 농지개혁의 문제, 식민교육 잔영의 청산문제 등이 당장의 민족적 과제였으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논의하고 단죄해 본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미소를 대변한 좌우의 세력 성장이 당면과제가 되어버렸다. 당시의 미소관계는 냉전이 심각할 때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냉전이 한국에서 긴박하게 나타나 한국의 극단적 남북대립을 조성하였다. 중도노선은 물론, 어떠한 수정노선도 회색분자로 취급되었다. 세계에서는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사회주의가 실제로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논의 자체도 회색분자로 사법처리되었다. 미소의 냉전과 냉전체제의 제패로 당해야 했던 한국의 양극 풍토로 인한 고통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결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시각은 색맹증色盲症에 걸려 정사正邪·선악善惡을 구별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갔다. 공산주의 국가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정치행각을 고집하던 북의 경우는 말할 것 없다. 남에서도 1948년의 헌법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고 하면서, 註120) 또 초기 자본주의의 야경국가적 모순을 극복하는 복지국가로서의 헌법조항을 규정해 놓고도 註121) 기획경제란 용어가 한동안 부정되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그러한 극단 논리가 애국적이라고 착각한 한때로 말미암아 필요 이상의 비극적 혼란을 야기했던 불행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데올로기의 노예들이 죽였고, 애국이란 미명으로 서로 처단했던가?

이제는 거시적 안목에서 반성해야 한다. 북에서는 약간의 중도적 기색만 보여도 반동으로 몰아붙였고, 남에서 다소라도 복지국가적 지향을 나타내면 좌경으로 단죄하던 우매했던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 그 반동과 회색논리에서 민족적 양심을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8·15 해방의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의 전통과 이념은 퇴색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그에 따라 민중은 방향감각의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신생국가의 민중적 기반은 오랫동안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민족 없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고, 민중없는 지도자가 없다는 관점에서 양심의 소재를 정확히 찾아야 할 것이다. 민족이나 민중이 선거 구호의 장식품으로나 필요했던 사치성 기만도 한계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