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중경의 임시정부/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34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7. 중경의 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민족적 여망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의 발생가치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수립이 없었다면 3·1운동의 가치도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독립의 의지, 자유의 의지, 통치의 의지, 통일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 곧 임시정부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망명정부도 아니고 유효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정부도 아니었다. 국제적 선례로 보면 임시정부는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정부였다. 그러므로 단기간에 존재했던 것이 선례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27년이란 장기간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국제법상으로 모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으로서는 중요한 존재였다. 국제정치상으로는 한국인의 주권 의지의 상징적 존재였다. 또 3·1운동 후의 독립운동을 통할하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당초에 7개의 임시정부가 출현했으나 1919년 9월 통합정부가 실현됨으로써 통일의지를 구현하였고, 다음에 민주공화국을 표방함으로써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봉건주의를 불식하고 자유주의 역사의 제도적 기초를 닦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초기의 활동은 해외동포사회를 거류민단 혹은 군정서

와 대한인국민회으로 묶어 질서를 잡고, 만주 독립군 조직과 연결하여 독립전쟁의 기초를 다졌으며 외교활동도 활발하게 펴나갔다. 국내에 대하여도 연통부·교통국 등으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정부적 위치의 책임을 수행하는데 온갖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제의 추격과 동포사회와의 두절 등으로 인한 활동 제한, 재정난과 정부요인의 사상적 방황, 베르사유체제의 안정기조에 의한 국제적 냉대 등으로 말미암아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고비로 임시정부는 침체되어 갔다. 여기서 대통령 이승만의 독주와 국무총리 이동휘의 소련자금 문제가 겹쳐 더욱 혼란에 빠져 들었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의 축출과 헌법개정, 그리고 1927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이당치국을 위하여 민족유일당 결성을 시도하며 극복을 모색해 보았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1930년경의 임시정부는 침몰할 듯한 위기 속에서 김구 등의 몇몇 인사가 간판을 지켜가는 비참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

이 위기를 구제한 것은 윤봉길 의거였다. 상해의거로 활기는 되찾았지만 일제의 추격에 쫓기는 수난을 맞아야 했다. 1940년 9월 9월 중경에 안착할 때까지 8년여 동안 항주·진강·장사·광동·유주·기강으로 이동의 수난이 계속되었다. 정상적인 정부도 그의 평가는 발생가치와 역할가치로 나누어 따진다. 임시정부를 그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발생가치는 3·1운동의 생산물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역할가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간판만 겨우 부지하며 중도에도 몇 번이나 존속 여부가 의심받았다. 그러므로 1935년 김규식·김원봉이 주도하고 양기탁·조소앙·신익희·이청천이 합세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 그들은 임시정부의 해체를 구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1942년)


임시정부의 중경시대 註116)는 그 동안의 침체와 수난을 정비하고 새롭게 발전하는 시기였다. 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임한 전시체제 수립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구에 올 광복의 기초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1940년에 광복군을 편성하여 중일전쟁에 조직적으로 대처했고, 삼균주의에 근거한 건국강령을 다듬어 광복 한국의 길을 분명하게 닦았다. 민족진영은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통합으로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으며 또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의 좌파 인사와 무정부주의연맹 인사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2년 10월 통합의회를 성립시켰다. 그에 앞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하여 임시정부는 크게 확충되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의 형성이 1923년 국민대표회 결렬 이래 다섯번째의 시도에서 성공한 셈이다. 통합의회 성립을 전후한 임시정부는 초기 이상으로 대내외 활동이 활발하였다. 1941년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두고, 대통령에서 탄핵 당한 후 분열을 일삼던 이승만을 다시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도 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註117)

이럴 때 1942년 4월부터 미국의 『Happiness』·『Life』·『Time』 지에 한국의 국제관리설이 보도되어 독립운동계를 긴장시켰다. 註118) 1943년 3월에는 미·영회담에서 역시 같은 논의가 있었고, 그것은 중국의 『대공보大公報』에 보도되어 더욱 긴장시켰다 이에 임시정부는 새로운 외교문제에 당면하게 되어 그 해 5월에 재중한인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열강의 패권주의를 규탄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반가운 소식은 있었으나 역시 ‘적당한 순서’라는 전제가 붙었고, 이어 미국 정가에서는 국제관리설이 더욱 확산되고있었다. 이때에 임시정부는 전시외교를 더욱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복군을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하는 한편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국내진격을 계획하는 등 독립전쟁의 폭을 확대하였던 것도 국제적 발언권을 높여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국제관리설을 극복해 보려는 의도의 일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외무부의 공식활동은 물론, 기관지 『독립신문』을 비롯한 기타 해외 동포의 언론지들은 일제히 국제관리설을 통박하고 나셨다. 8·15의 영광과 그늘이 독립운동 진영에 투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보면서, 이제는 연합국의 패군주의적 계산이 문제되었다. 임시정부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세계 각국에 비망록을 송달하면서 국제관리설을 반박하였다. 이렇게 보면 종전기 임시정부는 독립전쟁과 국제관리설에 대한 독립외교에 전력을 쏟았던 시기라고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