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일제말기의 독립군/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33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6. 일제말기의 독립군


8·15 해방 당시에 독립운동 무장단체는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독립동맹의 당군인 조선의용군과 소련의 소수민족 국제군인 88여단에 소속해있던 한인부대 등 세 부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은 중국 관내에서 참전하여 종전기 독립운동의 위치를 크게 고양시켰다.


1. 한국광복군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에 창설하였는데 1938년 11월에 결성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을 기초로 창설하였다. 처음에1·2·3지대로 편성하였으나 3지대는 문서상의 편제일 뿐이다. 1941년에 이미 태항산 일대에서 공작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편입시켜 실제에는1·2·5지대로 편성되어있었다. 이때 제1지대이준식는 산서성 임분臨汾지방에서, 제2지대공진원는 수원綵遠지방에서, 제5지대나월환는 서안西案에 본부를 두고 노안지방에서 공작활동을 펴고 있었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 병력 가운데 중경에 남아있던 본부 병력의 편입으로 다시1·2·3지대로 개편했는데, 이 개편을 기준하여 광복군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 병력이었고, 제2지대는 전기 광복군의1·2·5지대를 통합한 것이고, 제3지대는 부양阜陽·서주徐州 일대에서 모병하여 활약했다.

광복군 병력은 1933년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를 이수한 인원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중앙군관학교 또는 각처의 분교 출신자가 주축이었고, 그 후 광복군의 초모 공작에 의해서 징모된 인원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초모인원은 현지 중국군관학교 분교에서 훈련을 받게 한 후에 광복군 병력으로 입적시켰다. 한청반韓靑班·한광반韓光班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중경重慶 토교土橋에 있던 토교대란 것이 때로는 보충대, 때로는 교육대로 역할하였다. 즉 1944년 제3지대 한광반 출신자가 중경으로 와서 제2지대 등에 배치될 때까지 머문 것은 보충대 구실이었고, 45년 6월 임시정부 경위대의 윤경림尹慶淋과 선우진鮮于鎭이 유가만柳家灣 포로수용소에 가서 인수한 한인병사가 머문 때는 교육대의 구실을 했다.

광복군의 인원은 1945년에 크게 증원되었다. 보계寶溪수용소와 유가만수용소에 있던 한인병사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그 해 5월 1일 중국정부는 일본군을 수용한 포로수용소의 한인병사에 대한 광복군 인계조치를 시달하여 집단인원의 인수인계가 이루어 졌다. 그 밖에 9전구인 장사長沙지방에서 한인병사의 탈출이 많았고 남경에서 한인청년 수십 명이 상요上饒로 탈출한 경우도 있었다.


2.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었다. 원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였으나 1942년 7월 10일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에 무한에서 창설했는데 젊은 대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0년 11월에 화북진출을 결정하고 낙양洛陽으로 집결하여 1941년 3월 황하를 건너 처음에는 하북성河北省으로 북상하였다. 이때는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 등이 주도하여 만주로 이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 1대이익성·2대김세광·3대왕자인로 편성하여 석가장 남쪽 경광선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12일과 26일에 호가장전투와 형태邢台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태항산중太行山中 사현涉縣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1942년 5월 28일 편성전투에서 윤세주가 전사하는 등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사진


중경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에서는 화북지대의 작전이 여의치 못하던 그해 5월에 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하였다. 그러니까 화북지대는 본대 없는 지대로 남게되어 독자적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개편은 중국공산당 또는 팔로군과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팔로군 포병사령관인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에 취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용군으로 독립하면서 민족혁명당과 별도로 혁명정당이 필요했으므로 때마침 중경에서 연안으로 온 김두봉을 영입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실제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이신동체격이었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6월에 일본군의 대습격을 받아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안전한 연안으로 이동시켰다. 1944년 4월에 연안의 나가평羅家坪으로 이동을 끝냈는데 그것은 중공이 제2차세계대전 후 조선통치의 요원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조치로 짐작된다.

연안으로 이동한 조선의용군의 편제는 조선항일군정학교를 본부로 하여 박효삼이 거느린 4개 구대가 있었고, 이익성·이상조·김세광이 주관한 익동·산동·동북, 진서북에 주둔한 4개 선견대先遣隊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의 인원은 1941년에 북상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주축으로 해서, 원래 중공군에 있던 10명 정도의 인원, 1938년 조선의용대가 계림에 있을 때 연안으로 갔던 최창익 등의 18명 외에 동북지방이나 국내에서 망명해 온 인원도 있었으나 수적으로는 선견대에서 초모한 인원이 많았다.


3.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편제는 다르나 활동은 전선에 잠입하여 정보수집·선전활동·일본군 포로심문 등 비슷한 내용이었다. 초모인원을 독립군으로 편입시킬 때는 광복군은 중국 군관학교에 부설되어 있는 한인특설반 교육을 받게 했고, 조선의용군은 조선항일군정학교에서 교육을 받게한 후에 입적시켰다. 특히 일본군의 지원병·징병·학병 등으로 일본군 교육을 받고 종군한 인원을 그대로 편입시킨 것이 아니라 독립군 교육을 필한 후에 입적시킨 것은 극히 당연하고 현명한 처리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전례식 기념


활동내용에서 특수한 것은 먼저 광복군의 인면印緬, 인도·버마 파견대의 인도·버마 전선에서 활약한 것이다. 비록 활동내용이 괄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한국독립군의 공간적 확대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광복군의 OSS훈련이었다. 이것은 훈련으로 끝난 일이었지만 국토회복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다음에는 조선의용군의 선견대가 동북과 산동성 등 국내와 근접한 일본군 점령지 안에 있었고, 특히 만주에서는 국내와도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은 본부는 중경과 연안에 있었다고 해도 일본군의 중국전선 일대에서 활동했음은 물론, 인도·버마 전선까지 나아가 항전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격을 한층 드높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끌려갔던 한인 청년들이 망명처를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보아도 중국 관내에 한국독립군의 위치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8·15 해방을 맞자 광복군은 관내에 있던 청년동포와 일본군에 있던한적병사를 받아들여 3개 지대와는 별도로 북경최용덕·남경안춘생·상해박시창·항주김관오·한구권준·광주최덕신 등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7개의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여잠편지대 하나는 오광선의 국내지대이다 국내로 개선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9월 15일 중공군의 동북정진군東北挺進軍과 함께 만주로 가서 역시 국내로 개선할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8·15 이후의 문제는 여기서 줄이기로 하지만, 그러나 광복군이 1989년 창설 49주년에야 비로소 창설기념식을 가질 정도로 그동안 외면당한 남한 정국과, 조선의용군이 북한에서 연안파 숙청으로 역사의 미아가 되어버린 사실을 반성하면서, 중국 관내의 독립군 또는 독립운동은 분단정국에 의해서 희생되고 말았다.


4. 소련 88여단의 한인부대


소련의 88여단은 소련 아무르黑龍江주 하바로프스크花發浦·迫力 북방에 있던 소수민족부대로서 부대장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이었다 소련이 대일전쟁에 대비하여 편성한 부대였는데, 소련 안에 있는 소수민족의 항일군을 조직화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들을 통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곳의 한인부대 註115)는 1940년에 만주에서 활약하던 중국 동북항일련군의 한인부대가 이동하여 편입한 빨치산부대를 가리킨다. 동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일성부대, 동북만주에서 활약하던 최용건부대, 북만주에서 활약하던 김책부대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소련에 들어가 소련군 대위의 계급으로 최용건은 본부참모, 김일성은 제1영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간 당초에는 연해주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蘇王嶺·雙城子에 주둔했는데 흔히 남영南營이라는 것이 여기이다. 1942년에 하바로프스크 북쪽 70킬로미터의 야스코에로 옮겼는데 여기를 북영北營이라고도 한다. 전쟁 말기에 한인부대로 조선공작대를 편성하여 소련군의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국내공작을 계획한 바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계획에 불과했다.

8·15 후에 김일성은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왔는데 최용건은 만주로 파견되었다. 소련이 보기에 최용건은 너무 중국적인 인물로 진단된 것 같다. 최용건은 중국의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출신으로 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교관까지 역임하였다. 그에 비하여 김일성은 중국색이 짙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김일성의 선점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