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9. 13:23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독립운동의 성과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


3.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독립운동의 결실이 적지 않은 데도 현재한 결과는 민족국가가 아닌 분단국가이다. 국토분단이 미소 패권주의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민족 역량의 한계는 독립운동의 반성을 통해서 극복의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냉정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국토의 분단이 독립운동에 연유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역량이 부족하여 아직도 분단국가에서 통일의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일을 달성할만한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반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포용력의 부족은 8·15 후에 급작히 마련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과정에서 배태했다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우려될만한 사실을 찾아서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이념이나 방략이 아닌 이유로 조직이 분열한 사례는 없었던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던가?


1. 독립운동의 지역성

독립운동자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전에 국내에서 상호간의 교류 없이 외국에서 처음 만났으므로 자연 동향인들의 모임이 잦았을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더구나 비밀을 지켜야 했던 독립운동의 처지였으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동향인이어서 동향인간에 교류가 잦았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해주와 만주나 상해의 경우를 보면 정도를 넘고 있었다. 사실 초기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여든 주변 인사를 보면 그 지도자의 동향 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초기 인사만이 아니라 근래에 소개된 몇몇 회고록에서도 그러한 그늘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한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버릇이 오늘날 더욱 확대되고 있다고 말해서 아니라고 강변할 용기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오늘날의 선거 풍토를 보면서 절실하게 반성할 과제라고 하겠다.


2. 독립운동의 공명성

해외독립운동에서 러시아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유시참변이나 백군파白軍派의 문창범이 극좌파로 전환한 것도 사상의 혁명적 변화에 의한 것 같지가 않다. 만주에서 독립군간의 알력도 이제는 냉정하게 분석할 때가 되었다. 1935년 임시정부의 존속 여부를 놓고 참여와 이탈이 연속되었던 사실도 이념의 논쟁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 내에서 이철부李鐵夫 한위건와 장지락張志樂 김산의 상쟁이 두 사람의 비극적 최후를 만들었고, 만주의 민생단民生團 사건도 나중에는 한인 공산주의자 사이의 분쟁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중경에서 안공근이 행방불명된 경우나 서안에서 현이평玄以平과 나월환羅月煥의 암살사건도 독립운동의 치부였다. 그리고 미주에서 박용만·안창호·이승만의 상쟁은 지도자의 수준을 의심할 정도였다.


3. 독립운동의 갈등 연장

독립운동의 광장은 격랑의 파도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보니 동족간에도 격정의 관계가 비극을 몰고 온 경우가 있었다. 위에서 말한 분쟁도 격정으로 종결짓는 경우가 많아 관용으로 포용할 기회를 잃고 있었다. 정순만·박용만·김좌진·김규식·현익철 등의 비운의 최후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델라 방식의 아량은 격세의 지도자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독립운동과 동족간의 문제는 구별할 여유가 있어야 했다. 그러한 격정의 버릇이 해방 후로 이어져 송진우·장덕수·여운형·김구 등의 비극을 연출한 원인이 되었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된다. 독립운동에서 절대독립을 추구하다가, 절대 논리를 좋아하는 버릇이 생겨 처변處變의 안목이 경색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아량을 키워주지 못한다. 그 위에 격정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비극을 연출하기 쉬운 법이다.


4. 외세에 대한 인식의 한계

대한제국의 멸망은 당시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개화정권은 신문물을 수입하는 데만 힘쓰고 제국주의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독립협회 당시에도 열강이 우리의 통신 시설이나 철도를 부설하는 것을 문명적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2차산업이 없는 나라에 유통시설을 기계화하는 것은 2차산업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통로를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침략으로 인식한 범위는 토지의 조차나 임야의 벌채 같은 1차산업의 가시적 물체의 손실에 한정되고 있었다. 실제는 1차산업의 손실 보다 유통시설을 통한 침략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하는 것도 직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외세 인식의 한계는 독립운동 선상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보니 중국에 의지하고, 소련에서는 소련정부에, 미국에서는 미국정부에 의지하려고 했던 경향이 있었다. 중국·소련·미국 등 그곳 정부의 정책의 내막을 파악하여 독립운동과 조국 건설에 유익하게 이용하려는 노력이 현저한 흔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외세는 이용해야지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의지해서 안된다고 해서 철저한 저항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외세의 향방을 정확히 살펴서 불가항력일 때는 그것을 유익하게 이용하는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독립운동을 종결하고 해방정국을 맞을 때도 그러한 국제적 감각과 처리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 통일문제의 처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5. 봉건적 잔재 청산 미흡

봉건적 잔재는 식민성 봉건체제의 탓이 컸지만 그래도 국내독립운동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면 식민체제를 비집고 근대의식을 보다 더 성장시킬 수가 있었다고 보면, 역시 독립운동의 반성으로 주목할 일이다. 그리하여 봉건 잔영이 해방 후에도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아직까지도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봉건적 이익을 선거에 악용하는 사례까지 있는 현실이다. 얼마전 지방자치단체 선거와 총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악용한 사례와 함께 일가와 종친 의식을 악용한 사례가 파다했다는 지적 등을 고려하면, 민주화에 역행했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반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간혹 봉건적 전통을 전통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미화하는 오류까지 범하고 있는 것이다.

6. 친일파 형성과 독립운동 역량의 부족

끝으로 식민지시기에 의외로 친일파가 많았다는 것은 독립운동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들을 규탄하면서 양심과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종합적으로 반성하는 마당에서는 그들을 규탄하기에 앞서 민족역량의 총량을 고려한 안목을 가지고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항목에서는 아무래도 해방 이후 친일파문제를 중심한 식민지시기의 청산 작업이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이승만의 반민특위사건 같은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니까 민족적 책임이 서지 않은 정치 풍토를 만들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백범도 암살당해야 했다. 책임감이 마비된 정치 풍토가 조성되면서 사라져야 할 사람, 근신해야 할 사람이 정치 무대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오늘날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한 풍토는 사회에까지 만연되어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와 유착하여 삼풍백화점의 대참사까지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식민지 잔재, 해방정국의 오류, 군사정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쓰러진 고목에서 독버섯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독립운동은 장기간에 걸쳐 세계 각처에서 그곳 조건에 따라 갖가지 단체 조직을 가지고 끊임없이 전개된 가운데 이념과 방략의 다원주의적 추구로 전개양상도 다양한 가운데 절대독립을 위한 격렬한 항쟁을 보였던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내용이 풍부했던 반면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특징을 찾아 성격을 규명하고 성과를 찾아 의의를 말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뚜렷한 몇 가지 의미를 찾아 기억하는 일은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주의를 성장시키며 근대민족국가의 운영 이론을 발전시킨 점은 큰 성과였다. 그리고 근대사회 형성의 추진 역량을 신장시킨 것과 민족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극단적 탄압과 수탈의 연속이었지만 수천년 역사의 민족적 기초는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 새로운 힘을 생산해 냈고 그 새로운 힘이 독립운동 역량으로 구체화되어 다시 독립운동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국제적 지위를 전에 없이 높여 놓았다.

그런 가운데 과오와 한계도 적지 않다. 특히 독립운동의 최대의 목표였던 민족국가 건설을 달성하지 못한 채 분단 60년이 되고 보니 무엇 보다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관점에서 반성할 것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먼저 독립운동 이래 오늘날 더욱 치성해진 지방파벌을 극복하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지역감정을 악용한 원흉은 따로 있지만 그의 온상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대학 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대학 안에 게시된 가장 많은 벽보가 향우회와 동창회 모임이고 보면 대학 지성의 향방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반성은 실제의 사례를 찾아 구체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래야 통일 조국의 기초도 구체적으로 다져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