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독립운동의 성과/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9. 13:19

제7장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독립운동의 성과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


2. 독립운동의 성과


1. 독립운동의 자율성과 타율성 문제

독립운동은 민족의 자주의식이 성장해 있었으므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가운데 자주의식이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점은 인간사회라면 자연의 추세이다. 그렇다고 만족할 수준이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자율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장기간에 걸쳐 또 세계 도처에서 다양하게 전개한 독립운동이니만큼 독립운동을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전개했느냐 그리고 독립운동의 결과 독립을 쟁취했느냐, 즉 민족국가를 건설했느냐의 문제를 무엇보다 먼저 논의해야 한다.

일제시대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8·15 해방을 그전의 역사적 관점에서 광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가 하면, 젊은이들은 8·15 후의 현대사를 고려하여 분단 60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가하면 일제식민통치와의 관계만을 전제한 해방 60년이라고 한정시켜 말하기도 한다. 독립운동자나 그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광복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반면 독립운동을 냉정하게 보려는 사람은 해방이라고만 말한다. 친일파라면 종전이라고 하기 좋아한다. 독립운동의 역사 보다 8·15이후의 문제에 더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분단 60년이라고 말한다. 광복과 해방과 분단이 동시적인 일이었으므로 관심·관점에 따라 호칭도 다를 수밖에 없다.

광복과 해방과 분단이 왜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던가. 그것은 미소가 해방이 되자마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광복의 길을 막고, 남북을 분단 점령한 데에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해방군이라 자처하면서 한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기들의 국익을 챙긴 것이다. 미소는 한민족이나 한국독립운동을 안중에 두지 않았거나 두었다고 해도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미소가 함께 강대국의 패권주의 정책을 구사한 탓이지만 우리로서는 미주나 소련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이 그들의 패권주의의 예각을 꺾을만한 수준이 되었던가를 생각해야 한다. 미주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1919년에 안창호와 박용만이 떠난 후에는 이승만을 중심한 외교론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외교론도 미국을 상대한 것이었다. 결국 독립을 미국에 의지하고 담보한 꼴이 될수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독립운동의 주체성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을 수 있다.

소련은 레닌의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제국 이래 한국인과 한국독립운동을 무척 괴롭힌 나라였다. 러시아제국은 1910년과 1914년에 한국독립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한 바 있었고, 스탈린은 1928년에 코민테른을 통하여 세계의 유례없이 조선공산당을 해체시켰는가 하면 1930년에는 한인의 국경 출입을 금지시켰고 끝내는 1937년 강제이주를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스탈린의 안중에 한국이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해방정국에 관여함으로써 강제이주의 죄과를 은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한 두 나라에 의해서 분단 점령당한 한국이므로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의 광복을 봉쇄 당하고 타율적인 분단 60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성과도 독립운동 의지가 아닌 타율적 처리로 종결되고 말았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그렇다고 독립운동이 모두 타율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독립운동이 분단을 잉태했다가 해방과 동시에 생산하지도 않았다.

국제관계에서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타율성을 말하는 수가 있다. 구한말 개화파 인사의 구국논리, 3·1운동과 국제관계, 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관계, 외교론을 주축으로 했던 미주 일각의 독립운동, 장개석의 자금을 받고 있던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노선, 중국군 작전 범위 안에 있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 동북항일련군 한인부대의 활동 등을 설명할 때, 타율적 성격이 짙었다고 말하는 수가 있다. 이중에서 개화파 인사의 구국논리처럼 타율성이 강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개화파의 타율성은 3·1운동을 통하여 극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에 3·1운동의 타율성 논란은 1차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중심한 국제정국에 의지하여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일제 경찰보고에서 제기된 것인데 그렇다면 세계가 개편되던 당시에 상관하지 않고 구경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국제사회가 변하면 민첩하게 그를 이용하고 그에 대처해야 할 것은 오히려 주체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하기는 전혀 국제관계에만 의지했다면 타율적인 사고 행태이다. 실제에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3·1운동이 대중화하면서 민족의 의지가 절대독립을 추구하는데 따라 극복되어 갔던 것이다. 절대독립의 표상이 임시정부의 수립이었고 독립군의 독립전쟁이었다. 다음에 조선공산당의 문제는 국제공산당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직의 문제였다.장개석의 후원은 김구나 김원봉의 성공적인 성과로 보아야 한다. 중국군의 작전 안에 있던 무장부대의 경우도 같은 것이다. 국제법상 타국에서 무장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인데 당사국의 작전을 이용하여 실익을 도모한 활동을 타율성으로 이해해서 안될 것이다. 다만 만주에서 참혹하게 나타났던 민생단 사건 같은 경우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독립운동에서 분단을 잉태하고 있었던가의 문제이다. 한국독립운동은 이념이나 조직이나 방략이나 모두 다양하고 다원주의적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 종교도, 어떤 이념도, 어떤 카리스마도, 하나의 지배가 불가능했던 인간주의적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와 같이 다양하고 다원적인 것을 분단의 전주로 이해한다면 일당독재가 아닌 정당국가들은 모두 분단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분단은 국제제패에 의한 산물일 뿐이다. 다만 국제제패에 의한 분단이라고 해도 그것은 국토분단일 뿐인데 국토분단을 민족분단으로 확대 심화시켰다면 그것은 민족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주류는 주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더불어 광복으로 가는 것인데 미소가 점령하여 독립운동의 성과를 가로막고 분단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국토의 분단을 민족분단으로 가져간 책임은 우리민족 자신에게 있다. 그 책임은 통일을 달성하는 것으로 극복될 문제인데 민족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2.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의 발전

이 문제는 민족주의의 논리가 발전했다는 것과 민족의식이 대중적으로 고양되었다는 두 측면에서 살피기로 한다. 민족, 민족의식,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논리적으로 정립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민족과 종족의 구분이 명확치 못했고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이 구별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종족주의나 국가주의와 혼동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50년간에 인식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구한말의 문서를 보면 민족과 종족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이해도 대체로 3·1운동 전까지는 종족적 민족주의, 그 후에는 국수적 민족주의로 이해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보편적 민족주의로 이해하는 등 단계적으로 변천하였다.

그와 같이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변천하기까지는 일본이나 서양의 이해방식이 우리와 달랐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본은 8·15까지 민족을 종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들의 황도사상皇道思想에 근거한 국수주의를 민족주의로 이해한 군국주의자의 논리가 일반 이론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미농부美濃部의 천황기관설조차 역적으로 몰릴 정도였다. 그러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민족의 종족적 인식과 국수주의 사상이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서양에서는 우선 민족의 개념이 우리와 달랐다. 우리는 고대의 여러 부족이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 통합되면서 민족 형성이 진행되어 고려에 이르러 의식공동체요 운명공동체인 민족의 윤곽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고려 때에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에 나타난 바와 같이 민족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서양서유럽에 한정에서는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국민 또는 민족의 개념이 섰고 나폴레옹전쟁을 전후하여 내셔널리즘이 대두하였다. 따라서 거기의 내셔널리즘은 민족이 아닌 국민주의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 형성된 바도 없었고 우리와 같은 민족주의가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과 다른 민족주의는 모두 종족주의로 보았다. 그러니까 서양문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독립운동의 거리에 우리의 특수성을 이해하면서 민족주의를 바르게 키워간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즉 종족과 민족을 구별하지 못한 것은 전통시대에는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일본과 서양의 영향을 받아 1920년대까지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나 국수주의와 구별하지 않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비교적 선구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신채호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국가주의 논리에서 봉건적 한계를 떠나 민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7월의 「독사신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 그때의 민족주의는 국민주의와 종족주의의 복합체로 이해한 것 같았다. 따라서 그의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성장하게 되었다. 1930년에 『조선일보』에 「조선사」를 연재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1920년대 국학자도 거의 다름이 없었다. 가령 국사학자였던 박은식·장도빈·황의돈·권덕규 등의 저술을 보면 그러한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1930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국수주의가 극복되고 있었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단적인 경우가 국내에서는 안재홍의 민세주의였고 해외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였다. 여기에 이르러 민족주의의 보편적 논리가 수립되었다. 민세주의의 민족과 세계의 모순 없는 발전을 꾀하는 논리나, 삼균주의의 인균人均·국균國均·족균族均의 논리가 국수주의를 극복한 구체적 내용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이나 민족주의 논리가 크게 발전하였다.

다음에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가 대중화되었던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독립운동이 민중운동을 통하여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구한말 의병전쟁 당시만 해도 민족 논리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민족의식이 대중화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3·1운동과 더불어 민중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항일의식에 이은 민족의식이 크게 확산되어 갔다. 그에 따라 민족주의도 1930년대에 이르면 시민적 테두리에 국한하지 않은 즉, 모든 계급을 총괄한 이론의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것을 해방 후에 신민족주의라고 하였다.


3. 근대 정치이론의 발전 모색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 일제 침략에 대항한 구국운동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먼저 의병전쟁에서는 허위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정치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 이론이 있었다면 중세적 복벽론이었다. 그에 비하여 계몽운동은 근대국가 이론은 개발하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으로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한계는 독립군기지 개척을 추진하면서 극복되어 갔다. 그리하여 여러 독립군 단체와 그 학교들에서 새조국 건설을 꿈꾸며 새조국 운영 이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자들은 ‘신한新韓’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근대국가의 정치 이론은 3·1운동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갔다.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는 극복되었다. 만주에서 대한독립단 같은 복벽주의를 표방한 유일한 예외는 있었으나 그 외에는 보황주의로 표현되던 입헌군주론도 다시 대두하지는 않았다. 그와 같이 3·1운동 후에는 근대국가를 지향했던 것이 민족의지였다. 그것은 3·1운동과 더불어 국내외 각처에서 수립한 7개의 임시정부가 모두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3·1운동 후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이론이 확산되면서 또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면서 논쟁과 토론을 거듭한 가운데에서도 정치이론은 발전했지만, 1930년부터 임시정부 주변에서 정당 조직이 추진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30년의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1930년대의 대표적 정당이었다. 1940년대에는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이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와 정당들이 개발한 정치이론은 만주와 러시아지역, 그리고 미주지역 인사들의 정치 식견과 함께 해방 후 신국가 운영 이론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신국가의 정치 이론은 절대 군왕이 지배하던, 그리고 삼권을 전횡하던 조선총독의 식민통치의 산물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국내 독립운동이라기보다 해외독립운동의 결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념과 정치방향은 발전시킬 수가 있지만 정치토론의 광장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발전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에서 반反봉건 사상이 일어난 구체적 사례는 조선후기부터의 일이었다. 그런데 제도적으로 근대사회의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부터였다. 그러나 그 후 15년 후에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데 국력을 소모하느라 봉건적 제도와 사상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식민통치에서는 청산하지 못한 봉건적 잔재를 식민수탈의 유용한 기능으로 법제화하고 구조화하였다. 그것을 식민성 봉건체제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양반 봉건체제는 잔존하게 되었다. 양반체제가 존속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 양반 후예들은 식민지 속에서 안주한 사람이 많았다. 물론 선진적 양반이나 그 후예들은 가묘와 사당을 폐쇄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해외로 망명하였으나 식민통치 속에서 향교를 지키고 대원군 때 훼철된 서원을 복원하면서 봉건적 권위를 복원해 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봉건적 여맥을 유지시켜 준 장치가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이 전통시대나 조선후기부터 성장한 농민의 갖가지 권리는 무시하고 말살하면서, 지주의 권익은 최대한으로 보장하면서 강행되었기 때문에 봉건적 양반이 식민지 지주로 새롭게 변신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봉건체제는 8·15까지 존속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봉건적 계급의 잔재를 무시하고 모든 분야에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체제를 수립한 것은 어디에 연원이 있었던가. 여자참정권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남북한에서 공히 실시된 농(토)지개혁은 언제 어디에서 배운 이론이었던가. 그것은 독립운동의 의지요 이론이었다. 해방 후 친일파가 준동하면서 신국가 운영과 신사회 건설에 차질을 빚기는 했으나 역사의 큰 흐름은 독립운동 의지에 의해 발전했던 것이다. 그 의지에 의하여 해방 후 향학열을 불태우며 교육을 발전시켰고, 그러한 민주 역량은 경제발전의 역동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의지가 맥맥히 흐르고 있으므로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정권도, 일본군 출신이 주도한5·16정권도 겉으로는 과거의 자기 실체를 감추기에 급급하였고, 감추었다고 해도 민족적 신뢰를 얻을 수 없어 한시적 존재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결국은 독립운동 의지가 정권이나 역사를 지배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독립운동 의지가 정권의 힘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역량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은 당장에는 불행스럽게 보이겠지만, 원시안으로 크게 보면 독립운동 의지가 저변에서 견고하게 축적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다행일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4. 민족문화의 성장을 촉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시대에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은 제국주의 본질인 경제수탈 외에 민족동화를 획책한 점에 있었다. 민족을 동화하자면 나라를 없애고 민족의 생명 구실을 하는 말과 글을 없애고, 민족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역사와 예술을 파괴하고, 그 위에 일본어와 일본 역사 일본예술을 심어야 했다. 그러한 계산 밑에 일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어와 일본역사와 일본 노래를 가르치고 강요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민족 보존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국학연구가 추진되었다.


1930년대 한글의 정리와 보급을 위해 추진되었던 우리말 큰 사전 원고(상)와 기관지 「한글」(하)


국학연구 가운데에서도 국어학과·국사학과·국문학의 연구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따라서 식민지시대 국학연구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어학 즉, 한글학자의 공헌이 컸다. 주시경을 비롯하여 최현배·이윤재·김윤경·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인사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계봉우·김두봉·홍언 등의 활약이 괄목되어 오늘날 해외동포의 민족어 보존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그러한 어문운동이었으므로 일제는 1942년에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박은식·신채호·황의돈·장도빈·안확·권덕규·정인보·문일평·안재홍·최익한·손진태·백남운·이청원·이북만·김광진 등의 민족사학자가 이룬 공헌을 여기에서 모두 언급할 겨를이 없다. 그들에 의해서 식민사학의 조직적 공세를 극복하고 한국사학의 본연의 영역을 지키고 발전시켰던 업적은 한국독립운동사뿐 아니라 한국사학사에서도 특기할 일이었다.

국학자 가운데 명암이 엇갈린 경우가 국문학자의 행적이었다. 특히 일제말기에 친일 문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이룬 민족문학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5. 한민족의 국제적 지위 향상

한국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 은자隱者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은자의 나라로 일컬어질 정도로 알려진 범위도 넓지 못하였다. 그러한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독립운동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널리, 또 강인한 민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충격을 안겨준 가장 앞선 일은 1907년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를 상대한 활동이었다. 그에 이어 보다 더 충격을 던진 것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전명운의 의거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이며 세계 외교가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처단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이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알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국제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3·1운동이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이 2천만 민족이 하나같이 단결하여 일으킨 3·1운동은 세계 모든 나라가 놀래기에 충분하였다. 3·1운동에 감탄하여 미국의 많은 유명 인사가 한국의 지원자가 되었고, 레닌은 소련혁명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1920년에 2백만 루불을 임시정부에 지원하겠다고 나섰으며 40만 루불은 당장에 내 놓을 정도로 한국독립운동에의 동조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네바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 결의하였고 중국·미국·이탈리아·프랑스·영국에서는 한인친목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한 강대국 외에 당시로서 거의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거나 식민지로 전락해 있던 대부분의 약소 민족은 한국의 3·1운동을 선망의 눈으로 찬양하였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을 때 영국이, 1905년 미일비밀협정을 맺을 때 미국이,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 때 세계 국가들이, 1910년 러일 외교교섭 때 러시아가 한국은 무력한 나라로 보았던 눈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한국독립운동은 더욱 많은 나라를 무대로 전개되면서 한국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세계인의 이해를 넓혔고 1932년 윤봉길의 의거 때는 전세계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각국의 언론 보도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울러 중국 각처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열국의 관심이 남달랐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임시정부도 중경에 정착한 1940년 이후에는 침체기를 벗어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특히 광복군의 인도·버마 전선의 참전과 OSS 작전이 독립운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이바지함은 물론,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련군 한인부대의 활약은 공산권 세계에 한국독립운동을 선양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아직도 전쟁이 끝나기 거의 2년 전에 한국의 독립을 결의한 성과를 보았던 것이다. 해방 후 미소美蘇의 국익에 밀려 시련에 시련을 거듭한 고난이 있기는 했으나 세계 모든 국가의 모임인 유엔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공인했다는 것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일본이나 다른 남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바로 독립운동이 국제적으로 각인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런 결실 외에도 오늘날 6백만의 해외 동포가 미주·중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일본 등 세계 각국에 거주하면서 모국인 한국의 발전을 음양으로 돕고 있는 심성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 의식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결실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재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