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31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4.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민중이란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 백성·서민·대중과 같은 뜻으로 지성적 계급연합으로, 단순히 인민대중의 준 말로, 사회주의운동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로 각각 상이하게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불특정한 대중 가운데 운동 주체로 성장한 지성적 대중을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부터 시민과는 별도로 성장한 한국사적 특수존재이다. 註102)

1938년 이후의 일제말기에 국내지도층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붕괴되고 있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친일화되었고, 조선공산당 전향파나 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도 일제의 강권에 굴복하고 말았다. 1920년대 이른바 국민협회장 민원식 방식의 참정운동이 종전기에는 동아연맹의 자치운동 따위로 변모하였다. 민족지도자가 있어도 민중과 손이 닿지 못하였고, 민족문학이 있어도 민중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종전기의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민중 자체의 조직과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의 조직이 지속성 있게 발전할 수는 없었으나 단절되면 이어지고 탄압하면 항쟁하면서 특히 학생·농민·노동자의 항일조직이 8·15 전야를 빛냈다.


1. 학생운동


먼저 종전기 일제에게 피검된 학생운동 註103) 건수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0〉 학생운동 피검건수

연대193919401941194219431944(상반기)
건수61648574616189
인원2612120340919842999

위의 〈표 10〉를 통하여 일제에게 발각된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항일조직이 있어 학원의 민족적 풍토를 짐작케 한다. 일제 경찰이 중일전쟁 후의 학생의 시국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는 것을 봐도 학원의 동정을 알 수가 있다.


① 중일전쟁은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발발한 것이다.

② 전쟁으로 일본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조선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③ 중일전쟁이 장기화하여 일본의 힘이 약화되면 소련이 회우의 일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④ 일인 관리, 교사, 신문, 잡지 등은 일본에 유리한 해설만 하므로 믿을 수가 없다.

⑤ 좌경한 학생들은 중일전쟁을 일본 제국주의의 최후 발악으로 보았다. 註104)


학생들의 이와 같은 시국관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일제의 남경함락을 비롯한 외형상의 승전양상을 보면서 지도층의 인사가 전향하는 경향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학생의 시국관이 항일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촉진제가 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통제가 더욱 가혹하던 1941년 이후 비밀결사로서 일제에 발각됐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註105)

 

대구사범학교의 다혁당茶革黨, 함흥 여러 학교의 철혈단鐵血團과 동광사東光社, 경성농업학교의 비밀결사, 수원고농水原高農의 한글연구회, 연희전문 학생중심의 조선학생동지회同志會, 광주서중학교의 무등회無等會, 원산상업학교의 경회鯨會, 중앙중학교의 5인독서회, 경성京城의 축구부, 루시여학교樓氏女學校 특별기도회, 덕수상업학교의 학운동지공제회, 성진상업보습학교의 비밀결사, 대구사범의 무우단無憂團, 경복중학교의 근목당槿木黨,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太極團, 경복중학교의 흑백당黑白黨, 동래중학교의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 부산 제2상업의 무궁단無窮團, 부산진보통학교 출신 중학생의 순국당殉國黨, 마산중학교의 건국회建國會, 중앙·양정중학생의 갑신동맹甲申同盟, 경성제대 예과생의 윤독회輪讀會, 전주사범의 석류회石榴會, 경기중학교의 고려회高麗會와 괴회槐會, 안동농림학교의 조선독립회복 연구단朝鮮獨立恢復 硏究團, 춘천사범학교의 백의동맹白衣同盟, 이리농업의 화랑회花郞會


위의 비밀결사 일제에게 발각되어 관계자가 피검되었다. 일제에게 발각되지 않은 조직도 있었을 터이니 8·15 직전까지 학생의 투쟁이 강력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학병學兵으로서 평양과 대구에서 집단적 조직적으로 탈출 항쟁한 일과 중국전선에서 광복군으로 탈출한 것, 또 곳곳의 전선에서 연합군으로 탈출한 사례도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보면 학생운동의 폭넓은 발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전기의 학생운동은 민중의 항일운동을 대변하는 듯 왕성하였다. 학생은 민중이 아니라 원래 시민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식민지 지배 아래서 민중의 수탈상태를 보면서 자신은 시민 가정의 출신이라고 해도 학생 지성은 민중적으로 발전해 갔다. 註106) 때문에 다음에 보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경우보다 더 대중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3·1운동 때 학생이 전위적 역할을 담당할 뒤 사회계층으로서의 학생계층이 형성되었고, 또 이상을 추구하는 학생이므로 항상 자유의 순결을 고집하면서 일제에 항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활 자체에서 농민과 노동자처럼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연구하고 비판하는 신분이었으므로 양심과 정의에 호소할 의식과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집단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비밀결사를 조직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도 농민이나 노동자의 경우와 다른 학생운동이 성장할 이유가 되었다.


2. 농민운동


제국주의의 본질은 경제적 수탈에 있다. 일제의 경우는 식민지 한국의 농업수탈을 통하여 경제적 이득을 도모하려고 했고, 그것은 지주적 수탈을 구조화한 속에서 감행되었다. 그러므로 식민통치의 제1차 작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고, 일제의 직접적 수탈 대상이 된 농민은 그 피해측면이 어느 계층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하 농민운동 註107)은 지주적 수탈에 항쟁하는 소작쟁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작쟁의는 1919년 황해도 흑교농장黑橋農場의 쟁의를 효시로 하는데, 쟁의의 대상은 식민성 지주와 지주적 수탈체제 자체였다. 식민성 지주에는 일본인 지주는 물론이지만 식민권력에 존재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인 지주도 해당된다.

일제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1939년 12월 소작료통제령이 발표될 때 까지 총 14만 969건의 쟁의가 있었고, 조선소작조정령과 조선농지령 발표의 전후인 1933년부터의 건수를 13만 6,215건으로 계산하고 있다. 註108) 1932년 소작조정령이 발표된 뒤라면 소형 쟁의가 많았던 시기이나 대형 농민조합의 항쟁도 많았다는 것을 본다면 소형 쟁의가 주축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종전기에 해당하는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쟁의원인의 82.7%가 소작권 관계라고 한다면 소작료 감량을 요구하는 초기적 쟁의 성격과 달리 수탈체제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민 조직으로 농민조합은 1930년대 중반기부터 잠적했고, 일제의 부락진흥회와 맞섰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와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도 그 후반기에 잠적했다. 또 1937년 명천明川농민조합의 항쟁이 표면상 농민항쟁의 종막처럼 보였지만, 그 후에도 금천의 고조농장高潮農場과 철원의 가등농장의 소작쟁의는 소작료통제령 직전의 쟁의로 주목되며, 길주吉州와 영흥永興의 농조農組사건, 홍원洪原의 농조사건·성진 농민이 다수 피검된 사실도 농촌사회가 붕괴되던 당시의 항쟁을 입증하고 있다. 또 건국동맹의 파생조직인 용문산의 농민동맹도 8·15 직전의 항일조직으로 주목해야 한다.

조직적 항쟁은 아니더라도 농산물의 강제 공출에 산발적으로 항거하여 일제 관리와의 충돌이 일반화 되어 있었고, 보국대와 징용 징발, 그리고 여자정신대에 대한 항쟁도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징용이나 징발의 노무현장에서 항쟁한 것도 자유노동자가 아니었으므로 노동운동이 아니라 농민항쟁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39년 소작료통제령 이후 사소한 농업문제까지 법적 규제로 묶고, 공출과 징용 등으로 물적 인적 농촌조직이 파괴된 상태에서, 더구나 당시 공동체적 농촌 체질을 이용한 식민성 지주의 압박과 농업관리의 횡포 속에서 산발적으로 항쟁한 농민운동을 조직성의 결여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숨막히는 속에서도 앞에 말한 농민동맹이나 특히 경산慶山에서 27명이 결사대를 조작히여 대왕산大旺山에 올라가 성을 쌓고 죽창으로 무장하여 3일이나 항쟁한 사례는 괄목할 일이다.


3. 노동운동


노동운동 註109)은 다른 민중운동에 비하여 운동전개상 편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집단 생활을 하고, 또 고용주에 대한 피해 감각이 동질적이고 피해 반응을 동시에 일으키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1930년대 후반기에 더욱 발전하였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1935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군수공장을 가동시킴에 따라 노동인원의 증가와 노동활동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 징용·보국대 등의 노무동원으로 그들이 자유노동자는 아니었더라도 기왕의 자유노동자와 합류하여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간 점, 1930년대 전반기부터 지하로 잠적한 공산주의운동이 합세한 점 등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발전하던 노동운동이 종전기에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량적으로는 감퇴하고 있었다. 전시통제 아래서라는 각도에서 보면 그것이 쇠퇴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해주 조선시멘트공장의 파업, 인천부두노동자의 파업, 대구직조공장의 파업, 평양고무공장의 파업, 함흥제사공장의 파업, 성진부두노동자의 파업, 편창제사공장의 파업, 만포수력발전소공장의 파업, 흥남질소화학공장의 폭파사건, 청진일철제철소의 파업, 운곡탄광의 파업, 조일경금속공장의 파업, 성진고주파공장의 파업 등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례들을 보아도 비밀결사의 꾸준한 조직과 부단히 계획된 항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업을 수단으로 한 노동쟁의 외에 태업과 이동 또는 도망의 수단으로 항쟁하기도 했다. 일제가 1940년에 직업이동방지령職業移動防止令까지 만들어 그들 나름의 식민적 노동질서를 유지해 보려고 했으나 그것으로 노동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