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30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3.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의 날이라고 하면 광복이란 말에 불만스럽다는 사람이 많다. 해방이라고 해도 기준에 따라 여러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8·15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고 애매하게 파악되는 것은 한국의 독립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8·15 후 미소 군정 아래서 한국인이 자유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지금까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처지에서 8·15에 대하여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8·15 이전에 한국인이 광복을 쟁취하려는 주체적 노력이 없었다면 해방도 그만이고 광복도 그만이다. 그리고 분단이 몇 갈래 강요되었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한국인은 광복을 쟁취하려고 쏟은 노력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충분했다고 믿고 있으므로 미소에 의한 국제제패에 불만이 많은 것이다.

이와 같은 8·15의 국제제패는 독립운동 종막의 시련이기도 하므로 그 시련의 자생적 근원이 되는 독립운동, 특히 일제말기 독립운동 註94)에 대하여 반성적 자세로 상황을 분석할 일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1. 독립운동의 시기적 특성


독립운동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의 발단, 1904년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과 독립운동의 전개 등, 나름대로 일제의 침략상황과 민족운동의 성격에 따라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하나하나를 검토할 겨를이 없으므로 1894년의 의병봉기와 동학농민전쟁에 기점을 둔다는 입장만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일제의 식민통치 형세와 독립운동의 시기적 상황을 위험하지만 〈표 9〉로 요약하고 그친다.

표 9〉 독립운동의 개황
식민통치의 기조일제의 표현방식독립운동의 요강독립운동 중심성격
구한말식민지화의 심화 
반식민지 상태
보호정치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 계몽운동구국운동 
반식민지 해방 
운동
1910년대신민통치의 기반구축 
①직접식민통치체제 
②경제수탈의 구조 조직 
③민족동화정책
무단통치 
헌병경찰제
국내외 독립운동의 정비 : 독립군기지 개척, 민족교육, 식민성 계층 형성에 대한 응징, 3·1운동독립전쟁의 준비
1920년대식민지 관료 수탈과
회유분열 책동
문화정치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의 총력항쟁민족총력항쟁
1930년대군국주의의 강화와 병참기지화전시체제독립운동의 재정비 : 통일전선의 추구, 독립운동 이론의 정비, 학생·노동자·농민 등의 민중운동 발전, 조선학운동통일전선의 발전
종전기민족말살정책국가총동원체제국내외 비밀결사 항쟁, 해외의 독립전쟁독립전쟁의 발전

그에 앞서 이해할 것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립운동의 종합적 특징이다. 식민통치의 남다른 특징은 직접 식민통치였고, 제국주의의 본질인 경제수탈이 구조적으로 잔인했다는 점, 줄곧 민족동화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시간적인 지속성, 국내외 걸친 공간적인 세계성,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의 다양성, 독립전쟁을 주류로 한 민족주의의 심화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위의 〈표 9〉가 가지고 있는 무리한 점과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의 도움을 위하여 〈표 9〉에 나타난 시기별로 몇 가지 설명을 붙여둔다. 1910년대는 일제도 식민지 법령을 발포하고 토지조사사업을 마무리하는 등 식민통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기간이었지만, 한국인도 독립운동의 체제를 정비하는 시기였다. 해외에서는 연해주의 권업회勤業會, 간도의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 서간도의 경학사耕學社, 상해의 동제사同濟社,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등이 새로 결성되었던 것이 그것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민족교육이 새로 정비되었고, 대한광복회의 활동에서 보듯이 식민지 봉건계층의 형성에 대한 응징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1920년대는 3·1운동의 발전시기로서 민족총력전쟁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만주에서는 여러 독립군 단체의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당시의 한국인이 가진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농민·노동자·여성·학생운동을 전개했고, 물산장려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문화운동도 각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3·1운동의 기본사상인 인도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이 만발했던 것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지성적 고민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통일 전선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신간회였다.

1930년대는 1920년대의 산만했던 독립운동을 정리하여 한결 정비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이론의 정비가 추진되었고, 해외에서는 통일전선의 정비가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국 관내만 해도 대일전선통일동맹·조선민족혁명당·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들이 모두 통일전선을 지향한 것이고, 1939년 기강에서의 7당회의와 5당회의도 1930년대 추진된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회의였다. 그러한 노력이 1940년대 독립전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종전기라는 항을 두었는데, 대체로 1938년 이후를 말한다. 중일전쟁 후 일제의 전시체제가 강화되어 1938년에 제3차 조선교육령과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1932년에 결성된 농·어·산촌진흥회의 조직 외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새로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가격통제령’·‘소작료통제령’ 등 일련의 전시법령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1940년에 이르러 진흥회와 정신연맹을 통합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을 결성하고 군·면은 물론 리 단위에도 이른바 애국반이라 하여 집집의 동태를 통제하였다. 그 속에서는 지하조직에 의한 독립운동도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해외독립운동은 중일전쟁과 더불어 활기를 띠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분기하여 따로 관찰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이해하기가 쉽다.


2.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의 정비


1) 독립운동의 방략


독립운동의 이념 가운데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방략에 대하여 먼저 정리해 두고자 한다. 방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전쟁과 실력양성론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그 밖에 자치론이 있는데, 註95) 그것은 독립운동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또 준비론과 외교론이 있었는데 그것은 독립전쟁의 준비냐, 실력양성의 준비냐 혹은 자치론의 준비냐에 따라 전쟁론과 실력양성론, 자치론에 종속된 것이다. 구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독립전쟁론과 실력양성론이 양립한 전형적인 경우인데 의병전쟁은 위정척사사상과 민중항쟁 의식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이었고, 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한 실력양성론이었다.

그러다가 식민지시기에 이르러 전략이론이 조정되었는데 독립전쟁론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실력양성론은 개량주의로 정비되었다. 이때 개량주의는 사상적 원류로 보면 구한말 계몽주의 우파대한협회에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조선산직장려계로, 1920년대에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졌다. 비타협적 민족주의가 포괄하는 내용은 독립군의 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 같은 무장투쟁을 최선의 방법으로 앞세우지만 그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좌파와 민주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사상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문화운동인데 개량주의가 아니고 민족주의 좌파에 해당하는 문화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운동 가운데 민족보존을 위하여 전개한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註96)

그렇게 보면, 독립운동의 방략은 독립전쟁론을 주축으로 전개되어 왔고 그를 뒷받침하고 있는 이론은 비타협적 민족조의거나 사회주의 혁명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도 같은 나라의 독립운동에서는 자치론이나 실력양성론이 긍정적 각광을 받았는데 한국독립운동에서는 비하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식민 조건의 직접통치와 간접통치의 차이에 유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경우도 비타협 노선을 원칙으로 준수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2) 지도이념의 정착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은 정치이론을 중심으로 변천해 왔다. 즉, 독립국가의 주권의 소재와 통치방식의 이론을 말한다. 3·1운동 전까지는 복벽주의와 보황주의와 공화주의로 대립되어 있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와 보황주의는 쇠퇴하고 공화주의만 남게 되었다. 註97) 남은 공화주의도 새롭게 정리되었다. 3·1운동의 근본이념인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부상하고 있었으므로 공화주의는 자연 민주주의 사상속에 용해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갈라졌으며, 그 가운데서 또 한 갈래가 무정부주의였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3·1운동 전에는 공화주의에 앞서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이 지배적이었는데 3·1운동과 더불어 사회진화론이 일단 물러나고 약자의 생존권을 강조하는 인도주의가 부상하여 註98) 그 인도주의의 실현방법으로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자리잡아 갔다. 그리하여 1920년대는 사상논쟁이 만발한 시기가 되었다.

1920년대가 사상논쟁이 만발한 시기라고 해도 그 수준은 팸플릿 수준을 면치 못하였다. 가령 민족주의도 국수주의와 분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 사회주의라고 해도 민주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분간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사상이 한결 정비되어 갔다. 해외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국수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이론의 길이 열리고, 사회주의도 다양한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자유주의가 표방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극우와 극좌로 한, 중도론으로서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사회주의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이념으로 대두하였다.

그것은 만주의 1920년대 우파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진보성 강령을 표방하고 있던 사실, 국내 사회주의자 가운데 적지않은 인원이 1930년대에 극좌 노선을 포기하고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던 사실, 그리고 임시정부가 1930년부터 대공주의大公主義 또는 삼균주의를 표방하던 사실 등이 당시의 사상 경향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국내의 신간회처럼 좌우파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얻은 결론이기도 했지만, 1929년부터 전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창출한 극복방안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은 우파로 자처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한국독립당의 강령과 좌파를 자처한 조선민족혁명당이나 조선독립동맹의 강령이 모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3) 통일전선의 모색


3·1운동 후에 이념이 다양하게 발전했던 것은 인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한 나머지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분화 분열로 나타나 독립운동 전선을 무척 소란하게 만들었으므로 통일전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통일전선이란 다른 이념의 정당 단체가 당면한 과제, 즉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협동 연합 통일 등의 운동전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註99)

역사상 통일전선이 처음으로 모색된 것은 1923년 임시정부를 중심한 국민대표회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것은 1926년 북경에서 결성된 민족유일당 북경촉성회에서 비롯되어 이듬해 만주·상해·남경·광동 등 각처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대당결성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주에서는 그것이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통합운동으로 성격이 바꾸어졌지만, 임시정부에서는 1927년 헌법까지 개정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을 위한 통일정당 형성을 지원하였다. 註100)

그러나 국내에서 신간회가 결성된 것 외에는 모두 실패하였다. 그것은 복잡한 국제적 영향에 원인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통일전선 형성을 중단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 상해 대일전선통일동맹, 남경 조선민족혁명당·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 한구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강 7당회의 등이 모두 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한 조직이거나 모임이었다. 그것을 보면 독립운동에서 통일전선을 얼마나 갈구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통일전선은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의 극좌노선으로 말미암아 한때 붕괴되기도 했다. 1931년 신간회 해체가 그것을 말하고, 1930년대 전반기 만주에서 한국 공산주의자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500명이나 학살당한 민생단 비극이 그것을 말한다. 그러한 극좌노선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그들 자신이 철회한 것을 보아도 얼마나 큰 오류였던가를 알게 한다. 그제야 만주에서 조국광복회가 결성되어 통일전선을 모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 관내에서는 꾸준히 노력한 결과, 중경에서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무정부주의자연맹의 통일전선이 성공하여 1942년에 임시정부의 통합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연안의 독립동맹과 교섭하여 서로의 의사를 모은 후 1945년에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통일전선 형성을 합의했다. 그것이 1948년의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註101)

이와 같이 당초에 이념의 다양한 발전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국내외에서 통일전선의 모색이 꾸준히 전개되어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가 집결되어 있던 중국 관내에서는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민족의지였다. 그 후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로 민족의지가 봉쇄당한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