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28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2.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1. 문화운동과 국학


식민지 지배 아래서 민족문화 註71)의 존재와 발전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923년에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기개幾個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자명自嗚하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 할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註72)


라고 하면서 식민지 아래서 문화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부정적으로 평가할 뿐 아니라 문화운동자는 식민지 지배 아래서 기생하려는 자로서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식민지 지배 아래서 그나마의 문화운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에 의한 최소한의 소득이었지만, 식민체제 속에서 문화활동으로 안주한다는 것은 식민통치를 묵시적으로 용인한다는 자세였던 것도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온건한 독립운동자로 알려진 안창호도 1926년에 국내에서 대두한 자치론과 실력양성론을 통박하면서 


또 일파에서는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칭하나 이것 또한 불가능하다. 자본, 경험이 부족한 아민족我民族은 가령 일본이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할 수 없다. 하물며 우리에게 실력과 문화의 진보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에 있어서랴. 註73)


라고 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지배 아래서는 문화에 대하여 손을 떼야 옳았던가. 문화운동은 중단되어야 했던가. 이 문제에 대해 문화운동이 실력양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식민통치 속에서 안주한 기회주의적 자세였으나 독립운동 단체의 출판물을 중심한 독립운동을 지향한 문화운동과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이었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註74) 민족보존을 기능으로 한 문화운동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해야 한다는 이유는 식민지 독립운동의 일반론에서도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특수성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일본의 식민통치에는 제국주의 일반론 외에 1910년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취임 당초부터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묘사되어 후일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이름한 민족동화를 표적한 민족말살정책의 특수성이 있었다. 그러한 민족말살정책은 경제수탈로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여 조선민족을 노예로 굴복시키는 한편,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그 위에 일본 문화를 이식하는 작업으로 추진되었다. 종국에는 조선의 말과 글은 잊어버리고 일본말과 글로 일본 역사를 배우고, 일본의 위인전과 문학작품을 읽으며 일본 노래를 부르는 민족문화 상실상태, 즉 민족말살상태를 도모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본 식민통치의 특수성이 식민지시기 조선민족의 객관적 조건이었기 때문에 민족말살에 항거하고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이라고 했을 때, 문화의 내용 가운데 민족의 형성과 지속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어문학과 역사학, 즉 국어학·국문학·국사학 등의 국학운동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우리의 민족주의가 아닌 중동이나 서구의 내셔널리즘이라면 註75) 국학보다도 종교가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주의에서는 종교민족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하기 때문에 국학민족주의 측면에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註76) 국학의 내용인 국어학·국문학·국사학의 상호관계는 서로 밀접한 것은 사실인데 서로의 관계를 분간해서 명쾌하게 논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의 국학민족운동자들은 세 영역을 드나들거나 복합적으로 전공한 경우가 많았다.

어학과 역사학을 함께 연구한 권덕규·신채호·정인보·안재홍·백남운 등이 역사해석에서 어의語義를 중시한 것도 그것이지만, 그 외에 안확은 문학과 역사학을 복합 연구했고, 러시아에서 활약한 계봉우는 어학·문학·역사학 세 가지 저술을 함께 남겨 놓고 있다. 그렇게 복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국어학·국문학·국사학을 순수한 학문으로 연구했던 것이 아니라 국학민족주의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연구하다가 보니 국학 각 분야를 서로 넘나들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분리해서 본다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민족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학이 국학민족주의의 핵심인 것 같다. 가령 민족문학이 파탄을 맞아 일본문학에 용해되어 가던 1940년대에 표현문자가 한글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시한 『신조新潮』에서 


조선문학이 현재의 존재방법 조선어로 씌어지는 것을 계속한다면 민족의 혼일적인 융화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註77)


라고 할 정도로 작품내용의 동화에 만족하지 않고 어문의 혼일적渾一的인 일체까지 획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때문에 그와 같은 식민정책에 대응한 문화운동은 무엇보다도 어문운동이 민족보존을 위한 마지막 방패로서 중요했다. 이상과 같이 어문운동 등의 문화운동은 문화역량을 축적했다는 여유있는 태도가 아니라 당장에 민족말살을 저지하는 이유에서 긴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1923년에 문화운동을 공박했던 신채호도 1925년을 전후해서, 또 1931년을 전후해서는 민족문화, 특히 민족역사에 대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기고했고, 기고한 연재물은 당시 식민사학에 오염되어 가던 풍토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註78)

이러한 국학운동에 대하여 전 시대에 걸쳐서 살핀다는 것은 너무 장황하다. 그리고 1920년대의 문화운동은 다른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백화난만百花爛漫하게 일어나 민족운동 차원에서 간추릴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식민지시기의 후반기인 1930~1940년대에 좀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국어학


한말 계몽운동이 국학민족주의를 표방할 때, 국학민족주의 운동조직으로 가장 먼저 결성한 것이 국어연구소와 국어연구학회였다. 그 여파로 3·1운동 후 1921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결성되었고, 그것은 1931년 1월 10일에 최현배·이극로·권덕규 등의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1931년에는 조선어문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도 탄생하였다. 그러니까 3개의 국어연구 모임이 있게 된 셈이다.

조선어문학회는 조윤제·이희승·이재욱·김재철 등이 창립하고 후일 김태준·방종현方鍾鉉·이숭녕李崇寧 등이 가입함으로써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진학자의 동인회同人會 분위기를 느끼게 했지만, 얼핏 보기에 참신한 인상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회원구성뿐만 아니라 그 해 7월에 그들이 간행한 『조선어문학회보朝鮮語文學會報』는 최초의 학회지로서 주목을 받았고, 조선어학회에서 이듬해에 간행한 『한글』보다 더 읽을 거리와 이론을 담은 내용의 글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어문학회는 이름대로 ‘조선어학, 조선문학 연구를 목적으로 함’ 註79)이라는 모임이어서 순전한 조선어학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와는 달랐다. 한말 국문연구소와 국어연구학회 이래 주시경周時經적 연구전통을 이어 이미 기반을 튼튼하게 쌓은 조선어학회를 제치고 식민지 제국대학의 출신자가 민족어 연구에서 앞장설 수는 없었다. 이 점은 다른 국학분야의 사정과는 다른 조선어학회, 즉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었고 자랑인 것이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봐도 국어학운동을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조선어문학회가 주도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조선어문학회는 1933년에 핵심인물인 김재철金在喆이 사후하고 그해 7월에 『조선어문학회보』를 『조선어문』으로 바꾸어 제7호를 간행하고 자취를 감추어 어학연구자는 조선어학회로 합류하였다. 그런데 조선어문학회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학연구 분위기를 고양했다는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수난을 당한 인사들


1930년대 국학연구를 고양하는데 이바지한 것은 조선어학회와 조선어문학회 외에 조선어학연구회도 있었다. 비록 철자법에서 최현배를 중심한 조선어학회의 주장에 반대한 박승빈朴勝彬 학설을 관철하기 위하여 결성한 모임이긴 했어도 학설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보면, 두 학회가 논쟁하는 가운데 국어학이 크게 성장했고 논쟁의 파급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어학연구회는 1943년 『정음正音』을 회지로 간행하면서 1933년에 발표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서 다양한 논쟁을 전개하며 1941년 제37호로 폐간할 때까지 국어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가 벌인 논쟁은 맞춤법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논쟁을 통해서 어문이론과 체제가 정비되고 성장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국어운동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맞춤법 자체는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미 1912년에 보통학교 언문諺文철자법을 제정하고 1921년부터는 맞춤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학회의 논쟁이 바른말, 바른 글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 것은 틀림없었으나 그것만으로 그쳤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어학회가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고, 1936년에 표준어사전과 1940년에 외래어 표기법을 다듬어 1942년에 이르러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던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맞춤법을 마련하여 거듭거듭 토론하고 註80) 표준어와 외래어를 정리하여 註81) 민족어문을 총정리하는 사전을 편찬한다는 註82) 일련의 작업은 민족의 형성과 생명력이 민족어문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민족보존을 위하여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이 생활공동체 또는 의식공동체로 형성되고 성장할 때, 공동체 형성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언어·국가·종교였다는 것이 세계적 추세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종교는 제외되고 언어와 국가의 역할이 가장 켰다. 그렇게 보면 식민지시기에는 국가가 없었으므로 결국 민족을 유지해 가는 것은 주로 언어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일제 지배 아래서 국어학이 가지고 있던 민족적 책임과 임무였고 동시에 식민지시대 국어학의 영광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국어학이었으므로 민족동화를 획책한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방관할 수 없어 1942년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켰던 것이고, 반대로 한국민족운동에서는 그러한 한글운동을 민족보존을 위하여 고집스럽게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한 언어에 대한 민족적 노력은 국어학자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어학회의 문자보급운동을 비롯하여 농민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농민운동 현장에서 문자보급을 빠짐없이 추진하고 있었고, 가정마다 한글을 익히는 정성이 쌓여 민족어문이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그 결과로 8·15 아침부터 어문 사용의 불편 없는 민족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말살과 민족보존의 문제가 민족어문의 존속여부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서유럽의 내셔널리즘과 다른 동양민족주의적 특성이기도 했다.


3. 국문학


민족은 현실적으로 정치·경제 등에 의한 국가생활의 보장과 민족정서 또는 민족의식에 의해서 존속해 나간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에 정치는 박탈당하고 경제는 수탈당한 위기 속에서 민족정서나 민족의식을 키워 간다는 것은 민족보존을 위하여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족정서는 생활풍속이나 민족예술에 의하여 보존되고 풍부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민족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보면, 생활풍속이 아닌 기획적인 것만으로는 민족음악과 미술과 문학 등 예술활동의 내용과 존재양상에 따라 민족정서의 성장여부가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족음악은 성장하지 못하였다. 토속적인 곡목이래야 동요수준의 것 몇 가지 외에는 없었다. 판소리나 민요 등의 국악은 1930년대 전후에 일본에서 상륙한 유행가에 밀려 생명을 부지하기조차 힘든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음악풍토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민족음악의 보전을 위하여 활동하는 음악인은 없었다. 미술도 거의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시회 체제에 흡수되고 말았다. 상당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 연극·영화는 일본자본에 의탁해야 했으므로 말할 것 없었다. 그러니까 민족예술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다면 민족문학 즉 국문학 밖에 없었다. 문학은 그 입각하는 바가 예술이지만 지향하는 바는 인문주의에 있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을 예술적으로 묘사하고 미학 기준을 세워 작품을 꾸미는 가운데 어느 분야보다 더 민족의식이나 민족정서를 의미있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에 문학작품으로 말미암은 필화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문학은 고전문학이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근대문학은 신문학이라고 불리며 고전문학과는 별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학에서조차 고전문학과 현대 문학의 전공계열이 다르고 전공교수가 다르다. 문학만을 놓고 보면 고전시대와 현대가 별도로 병존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별도로 존재했더라도 양자의 접목을 시도해야 할 터인데, 그것은 신문학 당초에나 현재도 양측에서 공히 거부하거나 외면한다. 식민지시기에도 물론 그랬다. 그러다가 보니 신문학 또는 현대문학은 전통시대의 고전문학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외래 이식문학으로서 존재하였다. 외래한 경로를 보면 서양에서 발생한 것을 일본에서 여과하거나 가공하여 조선에 들여온 꼴이다. 그것은 이인직李人稙·이광수李光洙 등 구한말 이래의 신문학이 되었든, 박영희朴英熙·김기진金基鎭 등 1920년대 이래의 카프문학이 되었든 마찬가지였다. 단지 서양의 발생처가 영국이냐 독일이냐 프랑스냐 소련이냐 등이 다를 뿐이었다. 그래도 모자라 1930년대에 해외문학파가 나타나 서양모방의 집단활동을 전개할 정도였다. 그러한 까닭에 국문학이라고 하면 고전문학을 일컬을 때가 많게 되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 고전문학 분야의 활동은 전통시대의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평론하는 것이었지 창작을 통하여 고전문학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시조 창작이 시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안확 등은 시조를 시조시문학으로 이해하면서 고전문학으로서의 시조를 현대문학의 시조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조의 형식을 존중하였고 그러다가 창작의 폭을 넓히지 못하였다. 결국 창작은 현대문학의 전유물처럼 생각했고 그 뿌리와 기법은 서양에서 온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창작문학에서는 민족주의가 뿌리내리기힘들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문학에서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를 찾아보기로 한다. 1934년에 김기진이 다음과 같이 문인계보文人系譜를 분류하고 있는데 註83) 거기에는 민족주의 문학이라고 분류한 것은 사회주의 또는 계급문학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총망라하고 있다.


〈표 7〉 1930년대 초기 문인계보



자료 : 동아일보사, 『신동아』 1월호, 1934, 46쪽.

앞에서 국수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시조작가를 모아 놓은 듯하고 민족주의에 소속되어 있는 봉건적 인도주의는 패배주의 문학이었으며, 소시민적 자유주의는 민족성을 다소 나타낼 것도 있는가 하면 순수문학을 표방하면서 이념성을 탈색한 경우 등 성향이 모두 달랐다. 교회문학도 종교에 따라 달랐고 또 어떤 종교라도 1930년대 전반기의 처지에 따라 서로 달랐다. 당시의 기독교는 세계주의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주의는 계급문학에서 크게 고양되던 당시였다. 그것은 코민테른 6차대회 후 193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운동의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시기였다. 이때에 김기진이 계급문학에서 이탈하여 대중문학을 제창하고 나섰던 것은 주목된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로 분류한 문학은 민족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와 같이 분류가 정확치 못한 자체가 민족주의의 혼돈을 의미한다. 註84)

하지만 김동인·박종화·현진건·홍명희 등의 역사소설이나 채만식·박태원 등의 세태소설과 이효석·김효정 등의 토속소설 같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경우가 있었다. 註85) 그것은 작품에서 식민지 현실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과 민족역사와 민속사회에 근거한 문제의식이 호소력을 가지고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1930년대 후반기에 많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해외문학의 모방에 대한 민족적 반성과 특히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후 사회주의 운동의 민족주의적 전환이 영향을 끼친 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카프 주변의 변질과 해체가 영향을 끼친 바도 컸다. 註86) 1931년 6월부터 카프에 대한 제1차 검거사건을 전후하여 이탈자가 나오는 가운데 김기진의 사회개량주의적 노선변화와 회장이던 박영희의 탈퇴와 변절, 그리고 1934년 9월의 제2차 검거선풍으로 카프는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註87) 그렇다고 카프의 위축에 따른 탈퇴자가 곧 민족주의자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탈퇴자 가운데는 민족의 양심을 버리고 친일문학에 참여한 이가 많았다. 중심 없는 세계주의자가 사상성을 상실했을 때 갈 수밖에 없는 친일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이 193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역사소설·세태소설·토속소설의 작품활동이 확산되고 시조부흥운동도 활발해지면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이 접목될 가능성도 높아갔다. 그러한 때에 문학활동이 크게 제약받는 1940년대를 맞아 접목이 무산되고 말았는데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니다.

문인들의 최소한의 민족지로 1939년 2월과 10월에 창간한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1941년 4월에 일어日語 사용 요구를 거부하고 해산한 뒤에는 註88) 민족문학의 광장은 일어나지 못하고 현대문학의 작가들은 거의 변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친일문학’이라는 낱말을 만들어 낼 정도가 되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현대문학가들은 거의 친일문학에 참여했다. 그렇게 변절한 이유가 바로 현대문학이 고전문학과는 별도로 생성한 현대문학의 비역사주의적 인식과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음의 이유는 현대문학가들은 가끔 문학의 예술론을 둘러싸고 논쟁을 펴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함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진선미에서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물론 미이다. 그런데 미의 범위는 미 자체일 수도 있지만 진선미를 종합한 미의 세계와 또 진이나 선이 나타내고 있는 미를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가 있다는 점에는 등한한 경우가 많았다. 전통시대에 문학이 정치나 윤리도덕에 예속되었던 것과는 달리 예술이나 문학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문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그 독립성은 입각점이지 추구하고 묘사하는 세계는 인간생활 총체여야 하는 것이다. 가령 역사학이 입각하고 있는 진의 세계도 예술미을 학문으로 분석하여 음악사와 미술사나 문학사를 저술하는 경우와 동시에 인간생활 총체의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시기에 현진건 같이 문학을 거시적으로 본 몇 인사를 제외하면 註89) 이광수처럼 순수예술론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그만 친일문학에 몸을 맡기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대문학이 이식문학으로 자만하고 있을 때 고전문학은 창작활동이 아닌 작품정리에 골몰하였다.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조선소설사』, 이재철의 『조선연극사』,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등이 그것인데 이런 것은 문학의 창작활동이 아닌 문학사의 학술활동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사학의 분류사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책마다 제시하고 있는 이론은 거창한데 본론의 내용은 자료집 경향의 것이다.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은 오늘날까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분리해서 저술한 선례를 남겼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전문학가가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것은 위의 명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때 조윤제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구상에 동참하고 있었다. 註90)


4. 국사학


한국의 근대역사학은 구한말의 계몽주의사학을 거쳐 1908년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1909년 황의돈黃義敦의 『대동청사』로서 궤도에 올랐다. 그후 박은식·장도빈 등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었는데 192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그를 이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이 조직적으로 확산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3년을 전후하여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 장도빈의 『조선사요령』, 안확의 『조선문명사』, 권덕규의 『조선유기』 등이 간행되어 민족사학의 체면이 유지되었다. 이들의 역사방법론은 문화사학으로서 식민사학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과 타율성론他律性論에 대해서는 방패논리가 되었지만 정체성론停滯性論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민족사학도 국어학과 국문학의 경우와 같이 1930년대에 이르러 다양하게 발전하고 또 정비되어 갔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신채호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유심론사학의 결정판으로서 193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로 계승되었다. 1933년에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출간되면서 유물론사학이 개척되어 19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로 이어졌지만, 그 밖에도 이북만·이청원·김광진 등에 의해서 유물론사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 속에서 1920년대에 일어났던 문화사학이 유물론사학의 방법론을 일부 수용하여 1920년대의 문화사학에 비하여 사회경제 문제에 관심을 높인 새로운 문화사학이 개척되고 있었는데, 필자는 이것을 후기문화사학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註91) 문일평·안재홍·최익한·손진태 등의 역사학이 그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와 같이 1930년대에 역사학이 유심론사학·유물론사학·후기문화사학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또 서로 논쟁을 일으키자 역사연구를 원점에서 점검하자는 여론이 일어나 실증사학이 대두하였다. 실증사학은 신진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그들의 모임이 1934년에 결성한 진단학회였다. 실증사학을 민족사학 측면에서 보면 역사연구를 원점에서 새롭게 점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비민족적인 처신이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학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한 것이〈표 8〉이다.


〈표 8〉 1930년대 역사학 계보



민족주의사학은 민족사학의 분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때에 민족사학은 식민사학에 대칭되는 말이 된다. 그리고 민족주의사학은 유심론사학과 문화사학의 방법을 통하여 달성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 가운데 유심론사학이 국혼國魂·낭가사상郎家恩想·얼 등 정신적 일원론에 근거한 논리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강도가 좀더 강하게 표현된 역사학이었다.

그에 비하여 문화사학은 다원론적이어서 민족주의적 응집력이 유심론사학보다는 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남선의 경우처럼 일본문화사학에 흡수되어 간 경우도 있었다. 유물론사학은 보편주의사학이어서 민족주의와는 상대되는 방법의 역사학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사학이 일제의 특수주의 또는 일제 민족주의국수주의 사학의 속성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보편주의 이론으로 반격했다는 의미에서 보면, 민족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식민사학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론을 역사의 일반법칙으로 반격함으로써 민족사학이 품격을 높이고, 동시에 민족사학이 유심론사학·문화사학 등의 방법으로 반격할 수 없었던 정체성론을 극복해 갔다는 점에서 민족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유물론 사학자 가운데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묶여 정체성론을 수용한 경우도 있었으므로 학자에 따라 달랐다고 하겠다.

실증사학은 어떠한 역사방법론에서도 기초 작업인 고증에 머문 것이므로 그것은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있었던 반면, 식민사학과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어서 민족주의 기준에서 보면 명암이 엇갈리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1930년대의 역사학이 1940년대의 식민지 전시체제 속에서는 학자들이 은퇴하거나 아니면 본색을 감추고 모두 실증사학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박은식·신채호·문일평 등은 이미 사별하였고, 장도빈·안확·황의돈·정인보·권덕규·백남운·이청원·한흥수·김태준 등은 은퇴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역사학계를 떠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진학자로 등장한 홍이섭·김석형·박시형·전석담 등이 새로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실증사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1940년대 식민지 조건의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계봉우桂奉瑀처럼 해외에서 활동한 경우는 각기의 역사방법론을 개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註92)

그런데 1940년대에 은퇴하거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혹은 실증사학에 머물렀다고 해도 그것이 장도빈·안재홍·손진태·전석담 등의 경우처럼 8·15 후에 민족사학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구기간이었다고 생각하면 식민지 조건에 대응한 적절한 대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註93)

이상과 같이 보면 국사학은 역사방법론에 따라 민족주의 위상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유심론사학과 문화사학 등의 민족주의사학은 한국민족의 특수주의에 입각한 역사학으로서 일본 특수주의사학인 식민사학에 대하여 같은 특수주의 논리로 대항하고 있었다. 한편 유물론사학은 보편주의 논리로 식민사학의 특수론을 극복하는데 노력을 쏟고 있었다. 그와 같이 하나는 직접적으로, 하나는 간접적으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서 민족사를 수호해 갔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모두 실증사학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5. 국학과 민족주의


국학의 범위는 이상에서 거론한 것 외에도 민속학이나 국문학 분야에서도 가사歌辭와 민요에 대해서도 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의 민속학과 가사와 민요는 민속자료나 민요를 수집한 정도를 넘지 않았던 것 같다.

1931년에 결성한 조선민속학회는 일본인도 참가하여 민속조사에 다소의 성과는 올렸으나 손진태의 업적 외에는 민족적 의미를 찾기에는 회의적이다. 가사와 민요수집의 경우도 역시 같았다. 민족주의 기준에서 보면 실증사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므로 이 글에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속이나 가사와 민요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서민사회에서 퍼져나가고 또 유지되어 있었던 사실은 민족의식의 보존의 의미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이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국어학이나 국문학과 국사학을 개척한 사실에 못지않은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국학연구학자의 한계였다. 이와 같이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국학은 국어학·국문학·국사학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국어학에 가장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국문학에서는 현대문학이 고전문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친일문학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음악이나 미술 분야가 더욱 심각하였는데, 그와 같이 국문학에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이 접목되지 못한 것은 오늘날도 한가지라고 보면, 민족적 반성이 촉구되는 문제라고 하겠다. 국사학의 경우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족적 의미를 갖는 경우와 아닌 경우가 혼재하였다.

이러한 국어학·국문학·국사학이 각기 다른 경향은 세 가지 분야의 전공자들이 일제 말기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고문을 당하는 감옥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민족학자로서의 양심을 끝내 지켜왔는데 비하여 문학가들은 친일문학으로 변절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국사학자의 경우는 식민지 권력 앞에서 지조를 지킨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등이 혼재했다.

이렇게 분야에 따라 달랐던 이유는 각 분야의 학문적 속성 탓이었는지, 아니면 전통시대에 뿌리를 심고 성장한 학문활동이었느냐의 여부에 있었는지는 속단하기 힘들다. 단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문語文이 민족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 왔으므로 국어학의 독자성이 국문학과 국사학보다 더 선명하고 강했다는 점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보면 국어학·국문학·국사학이 나타낸 민족적 차이점은 학문의 민족적 속성과 이를 전통고전시대에 접목하는 여부를 연구하는 방법 등에 기인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위의 이유에 앞서 담당한 학자의 양심과 민족주의적 태도가 중요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국학의 식민지시대의 처지를 보면서 오늘날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식민지시대에 지식인들이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전해 주고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식인이 더욱더 조심해야 될 역사적 교훈으로 간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