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8. 14:27

제6장 후기(1931~1945)의 독립운동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의 정착

해방 직전의 국내외 독립운동

해방 직전의 민중결사

일제말기의 정치사회단체

일제말기의 독립군

중경의 임시정부

8·15 해방과 독립운동 진영의 시련


1.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


1930년대의 세계는 경제공황에 대처한 미국·영국·프랑스의 블록경제체제와 그에 편입하지 못한 독일·이탈리아·일본·스페인의 파쇼체제에 의한 팽창정책이 대립하는 두 유형의 자본주의 구도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1930년부터 일어난 군사쿠테타와 1931년 만주침공의 역사가 그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을 보면 경제공황이 극도에 달한 1929년부터 소련은 집단농장체제를 강화하고 세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점치면서 1920년대 민족진영과의 연합을 수정해갔다. 1930년을 전후한 12월테제·9월테제·10월서신 등의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책결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는 한국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으로 주목되어야 한다. 즉 그에 대응한 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시각이 요망된다. 註1)

1920년대를 돌아보면 제1차세계대전 뒤에 세계적으로 인도주의가 고조되고 있던 사조에 따라서 식민지 상황인 우리에게도 인도주의가 부각되어 3·1운동의 이념으로 집약되었고, 이어 민족운동의 지배논리로 확산되었다. 註2) 그리하여 인도주의의 실현논리로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부상하여 1920년대 민족운동을 다양하게 발전시켜갔다. 그런데 다양하기는 했어도 그것을 민족운동 조직으로 결집하는 데는 미진한 점이 많았다. 이론이나 행동양식이 비교적 체계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회주의운동도 당시에는 이론수준 자체도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조직구성원의 분파변동이 무상하여, 코민테른의 깊은 조정도 무위로 끝나고 결국 조선공산당은 해체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1920년대의 민족운동을 단계적으로 보면, 민족주의계열에서는 1923년경부터 송진우宋鎭禹·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타협적 노선인 실력양성론·자치론·민족개조론 등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등장하였으며, 註3) 안재홍安在鴻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반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운동이 분화되어 갔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의 새로운 이념으로 수용되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이 1923년을 전후하여 소위 신흥청년단체들이 대두하면서 신사상연구회·서울청년회·신흥청년동맹·화요회가 탄생하였고, 지방의 개량적인 농촌계몽운동 단체도 사회주의적인 조직형태로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註4)

그 후 1925년 말경 일제가 자치론을 검토하게 되자 1926년부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계열에서 민족적 단일운동 조직으로 정치투쟁을 벌이려는 시도가 대두되었다.

이때 사회주의계에서도 동경유학생들 중심의 일월회一月會와 국내의 정우회正友會가 합당하고, 1926년 말 ‘방향전환론’을 내세우면서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확보되었다. 註5) 방향전환론은 그해 7월에 발표한 「조선공산당선언」에서 민족유일전선民族唯一戰線 또는 협동전선이 제기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었다. 註6)

이러한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계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계열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민족협동전선의 신간회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만의 현상은 아니었고, 1926년부터 지방의 운동계에서도 폭넓게 방향전환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註7)

1920년대의 민족운동 결집 양상은 신간회에서 일단 달성되었다. 그러나 신간회도 이상재·권동진·허헌·김병로체제로 이어지는 시련을 거듭하다가 1931년에는 해체하고 말았다. 註8) 이와 같이 1920년대 민족운동이 다양하나마 산만하고 결집성이 부족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제 식민통치의 농간 탓이 컸지만 주체적 역량면에서도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註9) 1910년대 민족운동의 주체가 3·1운동을 계기로 해외독립운동의 무대로 옮겨간 탓인지는 모르지만 1920년대 민족운동의 중심주체로 계승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1. 1930년대 독립운동의 추세와 특징

세계공황과 특히 농업공황을 맞은 일본 제국주의는 그 타개책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1920년대 독립운동기지로 국내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만주지방의 위치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우선 독립운동의 중심이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192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단체가 거의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내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봐야 한다. 1920년대에 만주의 독립군과 연결된 국내 조직은 1930년대에는 성장할 수 없었으며, 국내의 민족적 시선도 중국 관내로 옮겨가게 되었다.

비록 괴뢰 만주국이 성립한 뒤에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잔류부대가 1938년까지 활약했다고 해도 조선혁명군 자신이 국내에 대한 관심보다는 동지들인 조선혁명당이 이동한 중국 관내에 기울고 있어 註10) 국내의 주목을 받을 수 없었고, 또 동북항일련군의 경우도 중국공산당 조직으로 존재하는 한계 때문에 국내와의 민족적인 연결은 용이하지 않았다.註11) 1936년 5월에 결성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국내에 조직을 확산하여 주목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알지 못한 상황에서 함남지방에 국한되었다가 곧 발각되고 말았다. 註12) 1937년 6월 4일 보천보普天堡사건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크게 보도함으로써 국내에서 만주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註13)

그러나 다음달인 7월 7일에 일어난 중일전쟁과 더불어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으로 사회 자체를 감옥처럼 통제하는 속에서 민족적 연결을 도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註14)

이와 같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서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중국 관내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1932년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국내외 동포의 민족적 시선을 상해로 모았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내나 일본, 그리고 만주에 살던 청년들이 상해나 남경 등지로 몰려갔다. 註15) 남경의 의열단 간부학교의 특히 제2기생 가운데에는 국내 지망생이 많았던 것을 비롯하여, 註16) 안재홍이 국내에서 이영여李榮如·문학봉·정필성鄭必成·김덕원金德元을 의열단에 소개했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일이나, 註17) 일본에서 흑우동맹黑友同盟에서 활약하던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 등이 중국으로 건너가 청년전지공작대靑年戰地工作隊에 이어 광복군으로 활약한 일, 註18) 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 등이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서 맹장으로 활약한 일, 註19) 만주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김구·이청천·김원봉을 따라 낙양군관학교를 거쳐 남경에 집결했던 일 외에도 1930년대 초반에 무수하게 중국 관내로 이동한 사례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註20)이러한 사실은 국내의 민족적 시선이 1920년대의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1930년대에도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주목된다.

〈표 5〉의열단의 국내 공작활동 일람
기수이름추진한 운동의병활동지
1기김영배金永培1933.5,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1934.1.(경남도경)
나석성羅錫聖귀향하여 농민조합 활동1934. 8.
문길환文吉煥향리로 파견되어 활동1934. 2.
안병철安炳喆향리로 파견되어 활동1933. 12.(자수)
윤익균尹益均국내로 파견되어 활동1934. 3. (경북도경)
이무용李懋庸향리로 파견되어 활동 착수1934. 1.
이육사李陸史국내로 파견되어 『조선일보』기자로서 활동착수 직전 피검1934. 3.
2기김천복1937년 12월 현재 국내에서 계속 활동중 
김찬서金燦瑞활동 착수 중1934. 6.(평안북도 자수)
오룡성吳龍成활동 착수 중1934. 6.(정주)
윤공흠尹公欽 1934. 6.(서울)
전갑성全甲成 1934. 6.(경기도)
전형렬全亨烈 1934. 10.(정주)
홍가륵洪加勒 1934. 11.(서울)
강영직姜永直활동 하던 중1936. 4.(평북)
김성식金成式 1936. 3.(평북)
김영렬金泳烈 1936. 8.(폐환으로 사망)
왕작림  
3기송 광  
함영식咸永軾  

자료 : 김영범, 「1930년대 의열단의 항일청년투사 양성에 관한 연구 : 의열단 간부학교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472~475쪽 ; 염인호, 「후기 의열단의 국내 대중운동(1926~1935)」, 『이원순교수정년기념 한국사논총』, 1991, 375쪽.


다음으로 해외독립군의 국내 공작활동의 사례를 살펴보면 의열단의 경우가 가장 활발하였다. 당시 의열단이 공작원을 파견하여 발각된 경우를 보면 앞의 〈표 5〉와 같다.

193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은 사회주의운동 선상에서 이루어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테제’ 발표되자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운동에 대해 자체적으로 비판하면서 조선 공산주의운동 중심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진정한 전위=노동계급의 당=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이라 하여 즉각적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註21)

12월테제 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조선공산당재건운동 註22)을 계파별로 살펴보면 ML당계는 길림吉林에서 1929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그리고 같은 해 5월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朝鮮共産黨再組織中央幹部를 각각 조직하였고, 아울러 국내 조직에 착수하기 위해 공산청년중앙간부 원태희元泰喜·박문병朴文秉 등이 같은 해 6월을 전후해서 국내로 들어와 조선공산당 제4차 검거를 피한 인정식印貞植 등과 결합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하였다. 註23)

다음에 서울·상해계의 김규열·이동휘는 김철수·윤자영·김일수·최동욱 등과 협의하여 1929년 6월 25일 길림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朝鮮共産黨再建設準備委員會를 설치하였고, 8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준비회高麗共産靑年會準備會를 결성하였다. 1930년 봄부터는 국내조직에 착수하였으며, 7월 이후로는 오산세를 비롯하여 김일수·이철영·박봉관 등 지도적 활동가들이 대거 입국하였고, 8월에는 함경남도 함주군 신흥에서 재건준비위 중앙간부를 선정하여 책임비서 밑에 조직부·선전부·공청부를 두었다. 註24)



제2차 조선공산당 관련 인사를 탄압하는 신문기사


화요계에서도 제1·2차 조선공산당에 관계한 박민영朴珉榮 및 김한·정재달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들은 1928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조직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9년 7월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생들과 함께 입국한 김단야金丹冶에 의해 추진되는 당재건운동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1929년 11월 초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코민테른의 재조직 결정서에 의거하여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원산·부산·평양·목포·함흥·마산·청진·웅기·신의주 등에 노동자·농민에 기초를 둔 지방당기관을 설치하였고, 공산대학을 졸업한 신진청년들을 배치하여 활동하였다. 註25) 이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국내외 운동의 연결에는 의열단처럼 중국관내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던 국제주의의 형식논리를 수용한 나머지 민족적 측면에서 반성해야 할 점이 있으므로 주의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유형의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계는 1937년을 고비로 한산해져갔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통제가 더욱 악랄하게 강화된 데도 있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3일 남경함락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의 오지로 이동하게 되어 서로 연락하기가 어려웠고 독립운동단체들도 중일전쟁 전에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국내는 물론 만주나 일본에서 인력을 공급받던 방법을 중국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국내에 대한 주목이 약화된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김태준의 경우처럼 연안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그곳 독립군들이 국내 정보에 어두운 나머지 일본 첩자로 의심하여 갖가지 화제를 남겨 국내외의 연결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註26) 따라서 국내 독립운동의 해외와의 연결성은 1940년 전후부터는 거의 사라져갔다.

한편 1937년 연해주 동포의 강제이주 문제도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이나 인력공급의 측면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註27) 1992년 7월 북한 언론계의 원로 남봉진 옹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가 공작원으로 국내에 들어갔다가 1932년 두만강에서 사망당했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연해주의 거주 동포들이 무수하게 국내에 파견되어 공작활동을 폈었다. 이러한 공작활동은 동해안 일대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이 발달한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註28)

이와 같이 1930년대에는 일제의 군국주의의 탄압이 강화되었고 또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이동함에 따라 1920년대처럼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된 국내조직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반면에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조직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심화하면서 발전해갔다. 1920년대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조선노농총동맹이나 농민동맹·노동조합·소작회·조선학생대회처럼 등록단체합법단체 註29)로서 활약한 경우가 많았는데, 1930년대에는 모두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1930년대에 돌연히 나타난 변화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1920년대 후반기부터 1930년대의 특징을 형성할 징조로서 나타나고 있었다. 가령 농민운동의 경우에 1920년대의 특징인 소작쟁의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쟁의의 상대는 지주와 더불어 식민통치기관 즉, 식민권력으로 확대 또는 이행해갔고, 쟁의의 주체도 소작회에서 농민조합으로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라는 정치투쟁 단계에 이른 것이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종전과 다른 특징은 첫째 노농소비에트의 건설과 토지혁명 등 혁명적 슬로건을 제기하였으며, 둘째 계급·계층별 조직원칙을 강조하면서 농업노동자부, 그리고 청년부·부녀부 등 새로운 독자부서를 결성하고, 또 빈농계급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을 서둘렀다. 셋째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정치투쟁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넷째 합법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종전의 운동의 한계를 탈피하여 비합법투쟁의 전국적인 전개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개량적인 농민운동을 개조하거나 아니면 이를 아예 분쇄하고자 하였다. 여섯째 자신들의 운동을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당재건운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는 점 등이 종전의 합법농조운동과 구별되었다. 註30)

이러한 1930년대의 특징은 학생운동의 경우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학생운동의 단체를 보면 문헌으로 추적할 수 있는 단체조직만 해도 다음과 같이 광범위하게 발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비밀지하조직이었는데 이때 한편에서 학생계몽운동조직도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특히 1930년대 전반기는 학생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1930년 4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심화되자 학생비밀단체는 일제의 계속적 침략을 저지하고 규탄하기 위한 반전·반제反戰·反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註31) 따라서 이때의 학생운동은 학생만의 독자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과 관련을 맞고 민족운동의 지성을 대표 대변하는 반전·반제운동의 공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註32)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학생운동 단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요계에서도 제1·2차 조선공산당에 관계한 박민영朴珉榮 및 김한·정재달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들은 1928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조직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9년 7월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생들과 함께 입국한 김단야金丹冶에 의해 추진되는 당재건운동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1929년 11월 초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코민테른의 재조직 결정서에 의거하여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원산·부산·평양·목포·함흥·마산·청진·웅기·신의주 등에 노동자·농민에 기초를 둔 지방당기관을 설치하였고, 공산대학을 졸업한 신진청년들을 배치하여 활동하였다. 註25) 이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국내외 운동의 연결에는 의열단처럼 중국관내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던 국제주의의 형식논리를 수용한 나머지 민족적 측면에서 반성해야 할 점이 있으므로 주의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유형의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계는 1937년을 고비로 한산해져갔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통제가 더욱 악랄하게 강화된 데도 있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3일 남경함락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의 오지로 이동하게 되어 서로 연락하기가 어려웠고 독립운동단체들도 중일전쟁 전에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국내는 물론 만주나 일본에서 인력을 공급받던 방법을 중국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국내에 대한 주목이 약화된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김태준의 경우처럼 연안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그곳 독립군들이 국내 정보에 어두운 나머지 일본 첩자로 의심하여 갖가지 화제를 남겨 국내외의 연결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註26) 따라서 국내 독립운동의 해외와의 연결성은 1940년 전후부터는 거의 사라져갔다.

한편 1937년 연해주 동포의 강제이주 문제도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결이나 인력공급의 측면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註27) 1992년 7월 북한 언론계의 원로 남봉진 옹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가 공작원으로 국내에 들어갔다가 1932년 두만강에서 사망당했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연해주의 거주 동포들이 무수하게 국내에 파견되어 공작활동을 폈었다. 이러한 공작활동은 동해안 일대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이 발달한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註28)

이와 같이 1930년대에는 일제의 군국주의의 탄압이 강화되었고 또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이동함에 따라 1920년대처럼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된 국내조직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반면에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조직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심화하면서 발전해갔다. 1920년대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조선노농총동맹이나 농민동맹·노동조합·소작회·조선학생대회처럼 등록단체합법단체 註29)로서 활약한 경우가 많았는데, 1930년대에는 모두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1930년대에 돌연히 나타난 변화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1920년대 후반기부터 1930년대의 특징을 형성할 징조로서 나타나고 있었다. 가령 농민운동의 경우에 1920년대의 특징인 소작쟁의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쟁의의 상대는 지주와 더불어 식민통치기관 즉, 식민권력으로 확대 또는 이행해갔고, 쟁의의 주체도 소작회에서 농민조합으로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라는 정치투쟁 단계에 이른 것이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종전과 다른 특징은 첫째 노농소비에트의 건설과 토지혁명 등 혁명적 슬로건을 제기하였으며, 둘째 계급·계층별 조직원칙을 강조하면서 농업노동자부, 그리고 청년부·부녀부 등 새로운 독자부서를 결성하고, 또 빈농계급을 중심으로 한 조직개편을 서둘렀다. 셋째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정치투쟁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넷째 합법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종전의 운동의 한계를 탈피하여 비합법투쟁의 전국적인 전개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개량적인 농민운동을 개조하거나 아니면 이를 아예 분쇄하고자 하였다. 여섯째 자신들의 운동을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당재건운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는 점 등이 종전의 합법농조운동과 구별되었다. 註30)

이러한 1930년대의 특징은 학생운동의 경우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학생운동의 단체를 보면 문헌으로 추적할 수 있는 단체조직만 해도 다음과 같이 광범위하게 발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비밀지하조직이었는데 이때 한편에서 학생계몽운동조직도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특히 1930년대 전반기는 학생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1930년 4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심화되자 학생비밀단체는 일제의 계속적 침략을 저지하고 규탄하기 위한 반전·반제反戰·反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註31) 따라서 이때의 학생운동은 학생만의 독자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과 관련을 맞고 민족운동의 지성을 대표 대변하는 반전·반제운동의 공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註32)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학생운동 단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3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단체

백망회白望會·적광회赤光會·에스당S黨·권대拳隊·학생전위동맹후계조직學生前衛同盟後繼組織·권독회勸讀會·여수수산학교독서회麗水水産學校讀書會·대구고보사회과학연구회大邱高普社會科學硏究會·함흥고보독서회咸興高普讀書會·쟁의단爭議團·소년공산당少年共産黨·동모회同牟會·함흥상업학교독서회咸興商業學校讀書會·서울계공산당재건계획共産黨再建計劃·경성제국대학독서회京城帝國大學讀書會·경성제국대학반제부京城帝國大學反帝部·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反帝京城都市學生協議會·적우회赤友會·평양고보독서회平壤高普讀書會·티케단TK團·경성R·S회·적기단赤旗會·반제전위동맹反帝前衛同盟·스포츠단·제일고보第一高普R·S회·제이고보第二高普R·S회·공주고보반전비밀결사公州高普反戰秘密結社·제주농업학교독서회濟州農業學校讀書會·소척대蘇拓隊·전주신흥학교독서회全州新興學校讀書會·전주중학교독서회全州中學校讀書會·학생공동위원회學生共同委員會·원산각학교독서회元山各學校讀書會·엘회L會·사리원농업학교독서회沙里院農業學校讀書會·이리농업학교독서회裡里農業學校讀書會·엠엘엠M.L.M·진주고보학생비밀결사晋州高普學生秘密結社·공산청년학생회共産靑年學生會·예산농업학교독서회禮山農業學校讀書會·독서회반제반讀書會反帝班·보성고보독서회普成高普讀書會·백청단白靑團·동덕여고보독서회同德女高普讀書會·송정리공업실습학교독서회松汀里工業實習學校讀書會·영변농업학교독서회寧邊農業學校讀書會·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해주고보반제동맹海州高普反帝同盟·결사회決死會·이화여고보독서회梨花女高普讀書會·경성제2고보독서회京城第二高普讀書會·정읍농업학교독서회井邑農業學校讀書會·경성여자상업학교독서회京城女子商業學校讀書會·진주고보독서회晋州高普讀書會·강릉농업학교독서회江陵農業學校讀書會·적색돌격대赤色突擊隊·중앙고보반제동맹中央高普反帝同盟·수원농고상록수운동水原農高常綠樹運動·독서회 註33)춘천중학교독서운동春川中學校讀書運動·비씨케단BCK團·목포상업학교독서회木浦商業學校讀書會·고성동지회高城同志會·인상친목회仁商親睦會·대구사범학교윤독회大邱師範學校輪讀會·대구사범학교문예부·연구회·다혁당茶革黨·오인독서회五人讀書會·경농생민족운동京農生民族運動·경성약학전문비밀결사京城藥學專門秘密結社·한글연구회·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지경친목회地境親睦會·강서친목회江西親睦會·주서친목회州西親睦會·철혈단鐵血團

 

▒ 1940년대 학생운동 단체

경성유학오인조京城留學五人組·학우동지공제회學友同志共濟會·화령회和寧會·태극단太極團·무등회無等會·무우단無憂團·흑백당黑白黨·근목당槿木黨·동래중학교독서회東萊中學校讀書會·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순국당殉國黨·자일회紫一會·건국위원회建國委員會·무궁단無窮團·갑신동맹甲申同盟·경성제대예과윤독회京城帝大豫科輪讀會·우리회·석류회石榴會·백의동맹白衣同盟·괴회槐會·대한독립회복연구회大韓獨立回復硏究會·화랑회花郞會

 

위의 1930년대 각 단체의 인원을 검토해 보면 동일인이 중복되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체의 탄압으로 조직이 파괴되고 감옥에 가면 새로운 조직이 새 인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외형은 분산적이었지만 질적 통일을 도모할 정도로 민족적 역량이 축적되어간 것은 학생계였다. 1940년대의 학생운동단체를 보면 8·15를 전망하듯이 독립군적 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1940년대의 독립군적 분위기는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계뿐 아니라 사회인사들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미 알려진 안동 자유청년연합회, 울진 창유계暢幽契, 경산 대왕산결사대大旺山決死隊, 서울 조선청년우국단朝鮮靑年憂國團·건국동맹, 양평 농민동맹 등춘천중학교독서운동春川中學校讀書運動·비씨케단BCK團·목포상업학교독서회木浦商業學校讀書會·고성동지회高城同志會·인상친목회仁商親睦會·대구사범학교윤독회大邱師範學校輪讀會·대구사범학교문예부·연구회·다혁당茶革黨·오인독서회五人讀書會·경농생민족운동京農生民族運動·경성약학전문비밀결사京城藥學專門秘密結社·한글연구회·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지경친목회地境親睦會·강서친목회江西親睦會·주서친목회州西親睦會·철혈단鐵血團

 

▒ 1940년대 학생운동 단체

경성유학오인조京城留學五人組·학우동지공제회學友同志共濟會·화령회和寧會·태극단太極團·무등회無等會·무우단無憂團·흑백당黑白黨·근목당槿木黨·동래중학교독서회東萊中學校讀書會·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순국당殉國黨·자일회紫一會·건국위원회建國委員會·무궁단無窮團·갑신동맹甲申同盟·경성제대예과윤독회京城帝大豫科輪讀會·우리회·석류회石榴會·백의동맹白衣同盟·괴회槐會·대한독립회복연구회大韓獨立回復硏究會·화랑회花郞會

 



위의 1930년대 각 단체의 인원을 검토해 보면 동일인이 중복되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체의 탄압으로 조직이 파괴되고 감옥에 가면 새로운 조직이 새 인물에 의해서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외형은 분산적이었지만 질적 통일을 도모할 정도로 민족적 역량이 축적되어간 것은 학생계였다. 1940년대의 학생운동단체를 보면 8·15를 전망하듯이 독립군적 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1940년대의 독립군적 분위기는 해외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계뿐 아니라 사회인사들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미 알려진 안동 자유청년연합회, 울진 창유계暢幽契, 경산 대왕산결사대大旺山決死隊, 서울 조선청년우국단朝鮮靑年憂國團·건국동맹, 양평 농민동맹 등 1930년 전국 자작농호의 평균 17.6%, 자소작농호의 36.5%, 소작농호의 66%가 춘궁농가였다. 註35)

〈표 6〉1930년대 농가 호수추이(단위 : 천호)
연도총호수지주 
(갑)
지주 
(을)
자작자소작소작소작겸
화전
순화전피용자백분비(%)
지주자작자소작소작
19302,87021835048901,3349738 3.617.631.046.5
19312,88223824088541,3939641 3.617.029.647.4
19322,93133724767431,5469660 3.616.325.352.8
19333,010  5467251,563 8294 17.124.751.9
19343,013  5437221,564 81403 17.024.051.9
19353,066  5487391,591 76112 17.924.151.9
19363,060  5467381,584 75117 17.924.151.8
19373,059  5507341,581 73117 18.024.051.7
19383,052  5527291,583 71116 18.123.951.9
19393,023  5407191,583 69112 17.923.8524
19403,047  5517111,617 66102 18.123.353.1

자료 : 1)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31·1941년판. 

2) 小早川九郞, 『朝鮮農業發達史』(資料篇), 부록, 93쪽. 

3) 강태훈, 「일제하 조선의 농민층분해에 관한 연구」, 『한국근대 농촌사회와 농민운동』, 열음사, 1988, 185쪽 등에서 재인용.


930년에 이르면 학생·언론인·종교인·지식인·사상가도 농민을 위하여 농촌에 몸을 던졌다. 1930년대 초에 전국으로 확산된 농촌계몽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인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 민족운동이 농촌으로 집중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註36)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도 식민적 관심을 농촌에 돌려 1932년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停令이나 1934년 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을 기초한 농촌진흥운동으로 농민문제를 호도하고 우리의 농민운동 또는 농촌운동을 봉쇄하려 하였다. 註37)


불이흥업 황주지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농민운동과 농촌운동은 함께 농민을 위한 운동이기는 해도 농촌운동은 농민에 의한 운동은 아니다. 1930년대 학생·지식인·언론인·종교인들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의 주체가 농민이 아니기 때문에 농민운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농촌운동으로 치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註38)

주체의 성격구분이 어려운 것은 1930년대에 정평·명천·홍원·양양·강릉·삼척·울진·양산·김해·해남 등 주로 동해안 지방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의 경우이다. 그것은 농민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이 함께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례에 따라차이는 있다.

1930년 전후 ML파의 경우처럼 당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노농운동을 추진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노농운동을 선행시키고 그 기초 위에 당재건을 도모한 사례도 있었다. 전남노농협의회나 註39) 강릉농조는 註40) 전자에 속하고, 전남운동협의회나 양양농조는 註41) 후자에 속한다. 이러한 차이는 대개 1931년 ‘10월서신’의 시기를 분수령으로 전자와 후자의 성격이 나누어진 경향이 있지만 어느 것이나 혁명적 사회주의 지식인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지식인의 참여가 노동운동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킨 독립운동사적 측면에서는 주목되어야 한다. 그것이 1920년대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과 다른 1930년대 농민운동 또는 노동운동의 특징이기는 하나 지식인의 깊은 관여로 말미암아 농민운동의 주체성격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운동 측면에서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1930년대 농민조합운동으로 천도교 조선농민사의 경우는 중앙조직이 개량화되었다고 해서 외면하기 쉬우나 함경도·평안도 지방에서 발달한 지방조직은 별도로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방조직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제기의 의미에서 지적해 두는 것이다. 註42)

1930년대 농조운동이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맞물려 있던 것은 12월테제 후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주의 운동의 시련이 문제이다. 이러한 시련은 노동운동에서 좀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ML당계열의 재건운동에도 이재유·정태식·이승엽·이강국·최용달·이주하 등의 1930년대 활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실상을 전해주는 사례들이고, 그 성격은 위에서 말한 농민조합운동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혁명적 노동운동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민족문제보다 계급문제를 앞세워 계급해방론이 노동운동의 제일차적 구호로 부각되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은 193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던 문제였다. 그것은 그때 학생운동단체의 이름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급해방론이 사회운동의 중심개념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민족주의보다 국제주의가 상위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파쇼 독재로 가는 국가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이론을 무기로 전쟁을 도발하고 있는데 대항하여 국제주의적 반전운동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 국제주의가 일본의 국수주의적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기문제와 상대성도 이해하지 못하는 맹목적이고 형식적인 국제주의는 진정한 국제주의와 우리의 독립운동의 시각에서는 철저히 반성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총괄한 총체적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개된 사회주의운동에서 일국일당一國一黨의 원칙 아래 국제주의가 악용되고 있었던 사례도 한국 사회주의운동 선상에서는 물론, 국제주의의 관점에서도 엄격히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만주의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에서도 남겨진 교훈이다. 註43)

이러한 국제주의나 계급해방론만의 교조적 명분론은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태의 아시아 민족운동에서도 외면당하는 수가 많았다. 註44) 그리하여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인민전선방략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註45)

그러한 안팎의 요구로 1930년대 후반에는 민족주의가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에 고조된 민족주의 사조를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산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사회주의 지식인의 대변지를 자처하고 있던 『비판』에 제7차 대회의 노선변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국내에서는 국제당의 노선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註46) 조국광복회의 국내공작이나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이강국이 제7차 대회의 소식을 전달한 흔적이 있기는 해도 註47) 그것은 왜관이나 삼천포의 경우처럼 국부적 사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1930년대 후반에 고조된 민족주의는 1930년대 전반에 나타난 국제주의에 대한 내재적 반성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1930년대 전반기에 배성룡·최익한 같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요인이 국제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의 행보를 걸었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註48) 그리고 안재홍이 1930년대 중반에 계급해방론과 국제주의를 수용한 민족주의의 새로운 진로를 제창하고 있던 사실도 주목되는 것이다. 註49) 그 무렵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요되어 그에 대한 반사적 민족의식도 고양되고 193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가 부상하게 된 요인을 이루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코민테른에서 ‘12월테제’의 조선문제 입안자로 아시아 사회주의자로부터 존경을 받던 일본인 좌야학佐野學이 1933년에 전향하는 등 일본사회주의 일각이 무너지고 있어 사회주의에 대한 매력이 삭감되고 있던 사실도 다소 작용된 듯하다. 註50)

이와 같이 193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있던 사실은 앞에 소개한 ‘1930년대 전반기의 학생운동단체’의 일람을 통해서 쉽게 파악된다. 전반기의 일람표에 나타났던 계급혁명적 국제주의가 크게 사라지고 새롭게 민족주의가 학원에 확산되고 있던 사실은 단체 이름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註51)

이상과 같은 1930년대 사회운동의 추세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발동하면서, 또 그에 이은 ‘소작료통제령’·‘직업이동방지령’·‘임금통제령’·‘국민징용령’ 등 일련의 전시입법이 강요되면서 봉쇄당했고 또 모양을 바꾸어갔다.

3. 문화운동의 위치

1930년대 민족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국학이 체계를 갖추며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1920년대에는 성격이 모호한 문화활동이 실력배양의 명분 아래 산만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註52) 거기에는 목적의식 없는 지식인의 낭만주의적 성향이 산만한 분위기를 부채질하였다. 註53)

1930년대에도 그런 속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각기의 방략을 비교적 분명하게 설정한 문화활동이 전개되었고 그것은 학술계의 동향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물론 1930년대 문화계가 정돈되어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920년대 업적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는 학술계뿐만 아니라 문학계도 한결 정돈된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근래의 연구 결론이다. 註54) 학술계가 정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보다 1930년대에 학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조선어학연구회朝鮮語學硏究會가 1931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편발전하면서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이어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편찬사업에 착수하고 있던 사실. 註55)

둘째, 1933년 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을 중심으로 경제학계를 망라한 조선경제학회朝鮮經濟學會가 결성된 사실. 註56)

셋째, 30년대에 들어와 유심론사학唯心論史學과 유물론사학唯物論史學이 고양되는 배경 속에서 1934년에 이윤재李允宰·이병도李丙燾를 중심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결성된 사실.

넷째, 1934년 김용관金容瓘·이인李仁을 중심으로 과학지식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를 결성한 사실. 註57)

다섯째, 1934년 정인보鄭寅普·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선학운동이 일어났던 사실. 註58)

그리고 이와 같이 학술계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자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서는 학계 동향을 실은 신년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에서 백남운이 ‘중앙아카데미’ 창설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제치하에서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거족적인 중앙학술원을 제창하였다는 역사성은 바로 1930년대 학계가 정리 정돈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59) 이것은 1920년대에 이념도 현상도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던 상황과 비교되는 발전적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시기에 간행된 교양지의 논조나 학술지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파악될 것이다.

1930년대에는 학술지 외에 교양지계몽지의 경우를 봐도 1920년대처럼 잡다한 내용을 무원칙하게 편집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돋보인다. 즉 각기 특정한 성향을 가지고 편찬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신조선』, 민족개량주의적인 『동방평론』, 사회주의 대변지를 자처하던 『비판』, 사회개량주의의 『신계단』·『대중』 등 어느 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각기 표방하는 바에 따라 계몽지가 간행되고 있었다. 다소 혼합 편집된 바가 없던 것은 아니나 1920년대처럼 다원적이 아닌 성향의 색깔에 따라 헤어지고 모이면서 지식인의 집단과 노선이 한결 정돈되고 있던 1930년대로 이해된다.

그리고 민족주의도 1920년대에는 이론체계가 불투명한 점이 많았고 사회주의도 유형의 구별 없이 모두 조선공산당에 몰려 있던 무분별한 상황과는 1930년대는 달랐다.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위하여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수많은 혁명적 농조와 노조운동의 전위인물로 활약한 반면에,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개량주의자는 위에 소개한 교양지를 통해 사회주의 계몽에 이바지하고 있던 현상도 1930년대 새로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측, 가령 이재유 그룹에서는 사회개량주의적 성향의 배성룡裵成龍·김세용金世鎔·김약수金若水·노동규盧東奎·이청원李淸源·여운형呂運亨·이여성李如星·김태준金台俊·인정식印貞植·최익한崔益翰 등의 문필활동자를 카프계와 함께 공산주의운동의 탈락자로 민족개량주의자에 못지않게 맹박했던 것이다. 註60)

아무튼 1930년대에는 행동성향의 분간이 뚜렷해 갔고 학술지와 계몽지의 성격도 선명하게 자리잡혀 갔다. 1920년대처럼 지사 초년생에 기회주의자까지 모여들어 혼잡하던 문화계와는 달랐다. 그것은 1920년대의 문화적 축적 위에서 요구된 일이기는 했지만 1930년대 식민지 탄압이 가중되던 속에서 기회주의 공간이 좁아진 데에 대한 대응현상이기도 했다.

그에 따른 이론전개의 수준도 1920년대에 비하면 월등하게 향상되고 있었다. 그것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이 1933년에 나왔다는 것이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신채호·백남운·문일평·정인보 등에 의해서 역사학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던 사실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이론도 1920년대에는 팜플렛 지식수준에 불과했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본론을 이해할 정도로 향상된 점을 주목해야 한다. 註61)

끝으로 식민지시기의 문화운동에 대한 평가가 다양한 것에 대하여 한마디 붙이면, 이 문제는 식민지 조건과 특성을 고려해서 논단해야 할 것으로 안다. 일제가 조선을 완전 식민지, 영구 식민지화를 꿈꾸며 민족동화를 획책하고 있었고 그러한 동화정책은 언어와 역사의 말살을 통한 식민문화수호와 개발에 대한 민족문화운동은 값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세월없이 실력양성을 목표로 한 문화운동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이와 같은 문화운동도 1939년을 고비로 봉쇄당하고 민족적 의미가 있는 분야는 침몰해 갔다. 그것은 1930년대 가장 강력한 저항논리를 폈던 『비판』이 변질하여 개량의 길을 걷는 데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

4. 이념과 방략의 극단적 변화

1929년 12월 민중대회사건을 계기로 신간회 허헌許憲 체제가 끝난 후에 조공계열 인사는 조선공산당재건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신간회 해체를 추진하였다. 그 후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될 때까지 1년 반 동안은 신간회의 일각이 무너지면서 조공재건 작업이 확산되어갔다. 그 때 민족진영에서는 수세적 입장에서 별다른 이론이나 방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간회 해체를 방지하는 데 주력했으나 뜻과 같지 못하고 결국 1927년 이래의 민족협동전선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신간회 산파역을 담당했던 안재홍 등은 신간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註62) 1932년 3월 재만동포구호의연금在滿同胞救護義捐金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일제의 분열정책의 농간이 겹쳐 재건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다. 註63)

그 후 사상계는 민족주의비타협와 민족개량주의, 그리고 사회주의혁명와 사회개량주의 노선으로 정비되고 지도인사들마다 그에 따른 처신이 뚜렷해졌다.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각기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 창립을 전후하여 민족주의 자체 내에서 비타협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파로 분리되기는 했어도 사람에 따라 선명하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사회혁명주의와 사회개량주의가 분간되지 않았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재건문제와 더불어 혁명적 노동운동을 추진해 간 사회주의 노선과 민주사회주의로 일컫던 사회개량주의가 분리되어 갔고,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혁명적 사회주의 인사는 민주사회주의자의 개량적 행적에 대하여 신랄히 공박하고 있었다. 註64)

그러한 가운데, 식민지시기 민족문제로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따른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노선의 선후문제 논쟁이 비등하게 되었다. 30년대 전반기에 가장 격렬한 노농운동, 이른바 적색해방운동은 계급해방을 외치며 국제주의이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간회 방식의 민족통일전선은 점점 멀어져 갔다. 이것은 코민테른 노선을 비판 없이 수용한 민족적 과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근래 러시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는 코민테른의 관여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고 하는 바도 있으므로 앞으로 주목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국제주의가 러시아 민족주의를 대변한 성향이 짙었다고 하는 논의도 일고 있는 데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국제주의는 사회주의 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국제주의도 1930년대에 확산되고 있었다. 註65) 인권의 보편성 원칙을 내세운 자유주의의 명분 아래 또 인류보편주의의 형식논리에 입각하여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어갔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인민전선 노선의 채택으로 반성되어 갔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940년 루스벨트의 동양삼국에서 미국인 철수령에 이르러 반성의 기미를 보였다.註66) 그런데 어느 것이나 실제에서는 지식인 지도층의 일부에 국한되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짙다. 그것은 학원의 학생운동 조직을 보면 1930년대 후반기에는 국제주의적 계급혁명을 우선한 1930년대 전반기와는 달리 민족혁명을 표방한 단체가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註67)

그렇게 보면 1930년대 전반기 국제주의 또는 계급해방을 상위개념으로 한 민족운동은 잠정적 현상에 불과하고 대하大河의 물줄기는 민족통일전선을 주류로 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사상의 유형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한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때에 따라 국제주의를 표방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민족주의 방략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을 구분할 때는 먼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분류하고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시기에 따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것에도 해당된다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방식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민족지향성은 민주사회주의에 국한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1914년 제2인터내셔날이 해제된 것도 제1차세계대전에 임한 민족주의 문제 때문이었지만 그 때와 같이 일반적으로 혁명사회주의공산주의는 민족지향성을 거부 또는 외면한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후일 특히 스탈린의 영향한 바가 컸다. 스탈린은 소련의 많은 민족 단위의 가맹공화국과 자치공화국, 그리고 자치주의 독자성을 희석시켜야 할 과제를 해결하는 정책추진에서 민족을 자본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수탈단위로 이해하면서 민족지향성을 마멸하고자 했다. 註68)

여기서는 민족론을 펼 겨를이 없으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지만, 민족은 고대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면서 통일국가가 성립하는 가운데 생활공동체가 형성되고 그것이 의식공동체로 성장하면서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註69) 우리의 남북국시대가 그때이다. 註70) 중국이나 일본도 시기의 차이는 있어도 상황은 우리와 같았다. 그러나 서양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그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즉 서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더불어서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와 카톨릭 보편주의의 지배가 진행되어 민족 형성의 서두에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하면서 비로소 민족의 형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서유럽의 특성을 세계 일반성으로 확대해서는 안된다. 서유럽에서 민족과 국민이 구별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서유럽을 제외하면 민족 형성이 고대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민족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아니지만 역사적 산물로 실재한 것을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역사해석상의 부작용만 크게 남길 뿐이다. 1930년대 전반기에 혁명사회주의측에서 식민지 문제를 민족혁명이 아닌 계급혁명으로 해결하려고 판단했던 사상동향은 적어도 식민지 민족문제에 관한 한 오류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식민지시기의 계급문제도 민족혁명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논리가 필요했다.

자유주의나 민주사회주의의 민족주의와의 관계에 대하여 잠시 언급했는데, 그 어느 것이나 원래의 모형은 혁명이 아니라 의회 절차를 존중하는 사상이고 방략이겠지만, 식민지에서는 의회가 있을 수 없으므로 민족혁명의 방략을 전제해야 진정한 민족주의의 길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방략의 면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주사회주의가 모두 혁명사회주의와 같이 혁명방략을 채택하고 있었다는 식민지시기 민족운동의 공통된 특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방략상의 특성은 이 시대 연구에서 특별히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1930년대 민족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경제공황을 맞아 군국주의를 강화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악랄하게 확대하고 심화하는 속에서 자율·타율간에 선별적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 수많은 민족운동단체는 1930년대에 들어 존속여부를 분명하게 가려야 했다. 그러한 요구로 민족운동단체는 객관정세의 변화와 함께 타율적으로 도태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며 자율적으로 정비되기도 했다. 그리고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하는 문제가 겹쳐 국내에서는 1920년처럼 해외와 연결된 독립운동조직이 성장하지 못하고 해외 조직에 대한 인력공급 정도에 머물렀는데 그것도 1940년을 전후해서는 거의 단절되었다. 반면에 1940년대에 8·15를 전망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조직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학원 내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하였던 사실은 특별히 주목되어야 한다.

사회운동은 농민·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연결된 경우가 많지만 독립을 위한 정치투쟁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1920년대보다 더 확대되고 또 발전하였다. 단지 노동운동에서 농민·노동자의 주체성과 사상면에서 국제주의적 계급혁명론이 민족혁명론에 앞서 상위개념으로 부상했던 1930년대 전반기의 사조는 민족사적으로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1930년대 전반기의 사조는 학생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반기부터 민족혁명론이 강조되면서 1940년대 해외독립운동과 관계 없이 국내 자체에서 독립군적 조직이 학원에서 발생하고 있던 사실은 식민지 36년간 독립운동 의지가 팽배하고 있었다는 현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런데 농민·노동·학생운동 이외에 1920년대에 발전하고 있던 여성·형평·소년운동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앞으로 천착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그리고 1940년대 농민·노동운동의 사례별 연구도 과제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는 학술운동이 체제나 내용이 함께 향상되었다는 것이 문화운동 분야에서 괄목되는 일이다. 1930년대 문화운동에서 민족문학이 크게 발전하고 민족사상도 1920년대의 잡다한 갈래가 정돈되었다는 점에 주목된다. 이 글에서 민족문학에 대해서는 이미 학계에 만족할 정도로 보고되어 있으므로 생략했지만, 국학이 고양되고 민족사상이 정비되고 있던 상황은 1930년대 특징으로 다시 한 번 주목하였다. 그와 동시에 1930년대 출판활동의 공간이 넓었다면 학술이나 문학의 성과도 좀더 폭넓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군국주의 압제 속에서 그나마의 열매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고 할 것이다.

끝으로 1930년대 문화운동이 예술이나 종교, 그리고 교육과 언론분야는 오히려 퇴조하였고, 학술과 문학도 1938년부터는 침몰함에 따라 문화운동 담당자인 지식인의 나약한 체질 때문이라고 해야 할런지, 이는 반성할 문제다. 즉 당시의 지식인들이 침묵을 지켰을 정도만 되어도 전통 선비의 그림자의 구실은 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친일문학론을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침묵을 못 지켰던 점은 식민지시대 반민족적 행태라는 단면과 아울러 문치사회文治社會의 민족사적 전통에서 마련된 유산인 선비상을 이어주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아프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