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5장 중기(1919~1931)의 독립운동, 재만독립전쟁의 전개와 특징/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7. 22:08

3. 재만독립전쟁의 전개와 특징


1. 재만독립운동의 전개


19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극우와 극좌 논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만주 한인의 독립운동 註10)에 대한 선구적 연구는 개인보다는 공공 연구기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에 이르러 많은 학자가 참여하고, 註11) 이어 연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이제는 이 방면에 대한 논저가 적지 않게 쌓이게 되었다. 註12) 필자도 몇 개의 글을 발표하였지만 註13) 그때마다 걸림돌로 느껴졌던 문제 하나는 만주滿洲나 간도間島라는 호칭이었다.

우리가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택리지擇里志』 평안도조에서 나온 것을 보면, 註14) 늦어도 조선시대부터는 사용해 온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32년에 일제의 괴뢰로 건립한 만주국滿洲國 때문에 중국인은 지금도 만주라는 호칭을 기피한다고 한다. 간도라는 호칭도 비슷한 이유로 기피하고 있다. 간도란 지금의 연변자치주 지방을 말하는데 한국과는 역사적으로 국경분쟁이 있었던 지방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간도라는 호칭 사용을 백안시한다. 그래서 특수한 경우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지방의 지명 호칭에 혼란이 있다. 지금은 압록강 북쪽지방을 서간도西間島,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北間島라고 하지만 원래는 간도를 기준하여 서쪽을 간서지방間西地方, 간도 북쪽을 간북지방間北地方이라 불렀다. 때문에 자료를 처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註15) 그러나 이 글에서도 이제는 버릇이 되어 버린 북간도와 서간도란 호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재만독립운동은 독립전쟁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독립군의 변천이나 독립전쟁의 전개 양상을 기준하여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895~1921년까지는 만주에 망명촌을 건설하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하여,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경신참변庚申慘變을 겪으면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끝낸 다음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러시아로 넘어갔던 시기이다.

둘째, 1921~1933년까지는 러시아에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전선을 개편하는 가운데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로 정비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 이원체제로 동포사회를 관할하던 시기이다. 유일당운동을 맞아서는 삼부를 통합, 국민부와 한족총회로 개편하였다. 괴뢰 만주국에 대해서는 민족진영의 조선혁명군국민부과 한국독립군한족총회이 공산진영의 유격대와 손잡고 중국구국군과 연합작전으로 반만항일전쟁을 폈는데 1933년에 한국독립군은 관내로 이동하고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셋째, 1933~1945년까지는 중공 만주성위원회의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북인민혁명군과 통일전선을 펴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이 크게 타격을 입은 시기인데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되면서 새롭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 조국광복회가 결성되고 보천보전투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까 일제의 반격도 전에 없이 강화되어 1940년부터는 항일련군이 러시아로 이동한 시기이다. 이것을 다시 8개시기로 구분하여 보기로 한다.


1) 1910년 전후의 망명촌 건설


서간도에 망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895년 김창수金昌洙·김형진金亨振·유인석柳麟錫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註16) 그 사실은 김구의 스승 고능선高能善에게 보고되었고, 고능선은 이듬해 같은 화서학통華西學統의 유림이 일으킨 유인석의 호서의진에 오가면서 호서의진이 도만渡滿할 때 만주지방에 대한 사전 지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리하여 유인석이 사첨자沙尖子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한때 통화현 오도구五道溝에 머물며 거기를 부흥기지로 구상하였다. 註17)

이러한 백범 김구의 오도구지방에 대한 정보는 신민회新民會가 망명계획을 수립할 때 다시 제공된 것으로 보인다. 신민회 망명 추진회의에 백범 김구도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註18) 그러한 백범의 정보를 듣고 이동녕·이회영·주진수·장도순·이관직이 답사한 끝에 註19) 삼원포 지방은 현청 소재지가 아니어서 인구가 적고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몇십리 이어진 광활한 평야를 가진 지방으로서, 통화에서 거기로 가자면 높은 준령을 넘어야 하는, 은신하기에도 적절한 곳이어서 삼원포 일대가 망명지로 선정된 것이다.

한편, 북간도 지방은 서간도와 달리, 일찍부터 이주민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1902년에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파견했다. 이범윤이 러일전쟁 때 사포대私砲隊를 설치하고 활동한 것이 독립군 성격의 조직으로는 처음이었다. 1906년에는 이상설이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이 김약연金躍淵에 의해 명동학교로 발전하면서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던가 하면, 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홍범도洪範圖·김정규金鼎奎 의병이 연해주와 두만강을 넘나들며 활동했고, 1908년 이후 연해주에서 기병한 유인석·이범윤·안중근·이석대이진용 의병도 북간도를 드나들며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므로 구한말에는 서간도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의병조직이 의군부이범윤·철혈광복단계봉우·대한광복군정부이상설·이동휘 등의 독립군으로 발전하는 한편, 정재면鄭在冕을 중심한 명동학교, 계봉우桂奉瑀를 중심한 광성학교길동기독학관 후신, 남공선南公善을 중심한 창동학교가 간민교육회의 민족교육을 담당하여 망명 이주민의 정착을 도왔다. 이동휘가 설립한 나자구 사관학교와 하마탄학교가 이른바 간북지방에서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서북간도 곳곳에 망명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망명으로 끝나면 생육신生六臣이나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삶 이상이 못된다. 註20) 망명촌이 독립군 근거지로 발전해야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때문에 서간도에서는 망명하자 곧 청나라 복색을 하고 청나라 국적을 얻어 토지를 구입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註21) 그 경제적 기반 위에 삼원포의 신흥학교, 합니하의 신흥중학교, 환인의 동창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만주 한인에게는 민족교육의 전당이었다. 거기의 졸업생을 모아 1914년에 385명의 ‘백서농장 군영白西農庄 軍營’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망명촌 건설→민족교육→독립군 양성의 의도적 절차가 진행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註22) 그것은 서간도에서 경학사耕學社, 1911~1913-공리회共理會, 1913~1916-부민단扶民團, 1916~1919으로 변천하여 註23) 3·1운동과 더불어 한족회를 결성한 단계적 절차로도 나타나 있다. 註24)


2) 3·1운동과 봉오동·청산리전쟁


3·1운동이 일어난 곳도 1910년대에 독립운동의 기지로 개척되고 있던 고장이었다. 북간도 동포사회의 중심지였던 용정과 훈춘, 서간도 동포사회의 중심지였던 삼원포와 통화·환인 일대에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행정 중심지이자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어나고 있던 길림에서는 「대한독립선언서」가 39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발표되었다. 註25) 그러므로 3·1운동과 더불어 각처에서 결성한 독립군도 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일제가 자행한 경신참변도 그 지방에 집중되었다.

경신참변은 1920년 6월에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 참패한 일본군이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 출동의 명분을 만들고 10월 14일 이른바 ‘간도출병성명서間島出兵聲明書’를 발표하고 서북간도에 침략하여 살인·방화·독가스 살포 등을 자행한 만행이었다.

그때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군·군무도독부군·의군부·북로군정서군·서로군정서군 등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백두산 언저리에서 연합작전으로 대적할려고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일대에서 격전을 치렀고, 그해 12월 5일 하마탄 전투까지 간도 동부지역에서도 격전이 전개되었다. 註26) 이것을 총칭하여 청산리전쟁이라 한다. 여기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청산리전쟁 후의 승전기념


첫째는 청산리전쟁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독립군기지를 개척한 독립군의 준비된 전쟁이라는 점이다. 다음은 연합작전으로 전투를 수행했고, 서부전선의 전투가 끝난 뒤에 러시아로 넘어가기 위하여 밀산密山으로 집결할 때도 연합작전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해 연말에 밀산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를 결성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통일의 교훈으로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에 청산리전쟁은 동포 주민의 지원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청산리에서 2천리 북쪽 밀산까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북상할 수 있었던 것도 동포 주민의 지원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지도자는 민중에 뿌리하고 있을 때 지도자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독립군이 밀산에 모여 러시아로 진군한 것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작전 구도에 의한 것인데 볼쉐비키 혁명에 참가하여 시베리아에 진주하고 있는 일본군과 일대 결전을 편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독립군이 러시아로 진군했을 때 러시아에 있던 독립군이 때마침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대립하여 있던 때였으므로 대한독립군단의 각부대도 인연이 닿는대로 이편 저편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홍범도·이청천李靑天은 이르쿠츠크파로, 김규면金圭冕·이용李鏞은 상해파,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圭植은 다시 만주로 돌아오는 등,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註27) 흩어질 뿐 아니라 1921년 6월 자유시自由市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 367km 남쪽의 소흑시小黑河와 그 건너 만주 땅 흑하시黑河市에 이르기까지 제야강 일대에서 참혹한 살육이 감행되어 상해파 군졸이 무참하게 죽었다. 이것을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 한다. 註28)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청산리전쟁을 끝내고 과연 러시아로 넘어 가야 했던가? 그렇게 어렵게 넘어간 러시아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라 설 수밖에 없었던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3) 흑하사변 이후 독립군의 만주 귀환과 삼부의 성립


흑하사변이 끝나고 레닌의 중재로 양파의 협상회의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되었으나 무위로 끝났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이 퇴각하고 혁명전쟁이 끝나자 독립군은 러시아 군단에 편입되거나 만주로 되돌아 왔다. 그러니까 만주에서 독립군 단체가 새로 정비되어야 했다.

독립군의 정비는 경신참변을 겪은 뒤인 1921년 4월에 북경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황학수黃學秀 등이 서간도 독립군 대표 이상룡李相龍을 초청하여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군사통일회는 경신참변을 당하고 있던 그때에 정쟁이나 일삼고 있던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행태에 반발하여 개최하였으므로 註29) 처음에는 호응을 받았으나, 임시정부의 근본부터 부정한 정치집회로 변질되자 서간도 대표가 퇴각하여 무위로 끝났다. 註30)

독립군의 정비는 서간도 자체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이 통군부統軍府·의군부義軍府·통의부統義府 등의 명멸이었다. 그런데 통의부가 자리 잡기 전에 국내외 독립운동자 총회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이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였다. 국민대표회는 북경 군사통일회 주장을 이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개편하자는 주장으로 대립하여 무산되고 말았지만, 국민대표회에는 통의부 총장인 김동삼金東三이 의장을 맡는 등, 만주 동포사회의 지도자가 중심적 위치에서 활약했으므로 만주 독립군의 정비는 보류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국민대표회 문제로 충격 받은 임시정부가 만주에서 세력을 만회해 보려고 1923년에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를 결성하자 상해 정국의 구도가 만주에서 재현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에서 돌아온 인사들이 1924년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註31) 그리고 러시아에서 귀환한 독립군이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니, 학자들은 삼부시대三府時代를 열었다고 말한다. 삼부는 구역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특징 외에 민정과 군정으로 나누어 활약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독립운동이 장기체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3년 연해주에서 결성된 적기단赤旗團이 흑룡강성 중동선 일대로 이동하여 활동하였고, 1926년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흑룡강성 일면파一面坡에서 결성되자 그도 중동선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시작되어 세력 판도 문제가 중복 제기되었던가 하면 한편 만주 동포사회에 새로운 사상과 의식이 확산되어 갔다.


4) 유일당운동과 조선혁명군 및 한국독립군의 창설


만주에서 사상적 분화가 나타나자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전술의 하나로 통일전선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1924년에 중국국민당의 좌우합작국공합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영향이 한국독립운동에도 반영되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뒤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 북경촉성회가 결성된 이후 국내외 각처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결성으로 나타났고, 중국 관내에서는 북경·천진·남경·상해·한구·광주에서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었던가 하면, 임시정부는 유일당 탄생을 예상하여 1927년 4월 11일 헌법을 고쳐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갖추었다. 註32)

유일당이란 다양한 이념의 독립운동 단체 위에 그들을 총괄 지도하는 하나의 지도 정당을 결성하자는 것으로, 민족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인 동시에 소련이나 중국에서 표방하고 있던 이당치국 또는 이당공작以黨工作 체제였다. 만주에서는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던 때였으므로 註33) 통일전선은 어디 못지 않게 요구되었다. 1926년에 양기탁 등이 정의부의 지도 정당으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했던 것이 그의 서곡이었지만, 1927년에는 정의부에서 신민부 참의부 인사를 설득시켜 재만 사회운동·청년운동 단체까지 포함하여 유일당 결성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27년에 중국 국민당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북벌 도중에 분열하였다. 남경정부와 서금정부로 분열할 뿐 아니라 국공전쟁國共戰爭이 전개되었다. 국공이 전쟁하는 중국에서 양자의 합작을 의미하는 유일당 결성은 아무리 주체가 다른 한국 독립운동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주에서 유일당회의가 몇 차례나 열렸고 혁신회의革新議會를 만들어 해결책을 찾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3부 통합회의로 방향을 바꾸어 1929년에 국민부國民府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조직을 개편하는 데 그쳤다. 註34)

유일당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유일당운동을 통하여 정당이 독립운동 또는 정치운동 중심에 부상한 것은 한국 정당사에서 주목할 점이다. 1929년과 1930년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결성이 그것을 말한다. 註35) 이어 정당의 당군으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설치했던 것도 새로운 조직체계라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은 삼신동체三身同體의 조직이었고, 한국독립당은 한족총연합회또는 한족자치연합회와 한국독립군과 삼신동체의 조직이었지만, 조직과 활동 체계로 보면 그것은 사회주의의 이당공작 방식을 도입한 변화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직에서 사회주의운동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조선혁명당은 노농사회를 지향할 정도로 진보적이었고, 한국독립당 당강에서는 민본정치民本政治·노본경제勞本經濟·인본문화人本文化 註36)를 표방할 정도로 이념도 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만주에서 우익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치열하게 대립해 있었으므로 보수 반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또한 자본주의 정당으로 보기는 힘들다. 註37) 그러므로 필자는 만주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추적할 때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정경玄鼎卿·현익철玄益哲·이진탁李辰卓·양세봉梁世鳳·김활석金活石 등의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은 도합 4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계산하는데 신빈현 왕청문에 본부를 두고 종래의 참의부와 정의부 관할 지역인 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홍진·김동삼·김좌진·김규식·이청천 등의 한족자치연합회·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도 400~450명의 인원이었는데, 영안·해림·석두하자·위하·주하로 근거지를 북상 이동하며 종래의 신민부 관할지역인 중동선 연변 즉,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근거지를 북상한 것은 목단강시를 중심한 조선공산당의 근거지 설치에 밀렸기 때문인 것 같다.


5) 만주국의 건립과 한중연합군의 반만항일전쟁 註38)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註39)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3월 1일에 그들의 괴뢰정부로서 만주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는 중국 본토 침략에 착수하였으니 금주침공錦州侵攻과 상해사변이 그 구체적 실천이었다. 여기에 이르러 한국독립운동은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1909년 간도협약→1920년 간도침공→1925년 삼시협정→1928년 장작림 폭사→1931년 9·18사변→1932년 만주국 건립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그때마다 한국 독립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만주국이 건립된 뒤부터 만주국의 관헌조직과, 일본군과 경찰의 조직적 활동, 註40) 중국인 한간漢奸과 한국인 주구배의 註41) 준동으로 독립운동은 사면초가를 맞아 희생이 막심하였다. 만주사변 전후에 김좌진·김종진·김동삼·남자현·김규식·이원일이 희생되거나 체포된 것이나, 이호원·김관웅·이종건 등, 신빈사건에서 조선혁명군 10여 명이 잡히거나 희생된 것도 겹겹으로 둘러싸인 일제의 정보망 속에서 당해야 했던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장개석 정부처럼, 만주에서 무력하게 후퇴할 수는 없었다. 만주를 잃은 중국인은 곳곳에서 동북의용군을 결성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의용군과 한중연합작전으로 반만항일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신빈현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이진탁李辰卓에 이어 양세봉이 사령관을 맡아 1932년 3월 12일 영릉가전투永陵街戰鬪를 승전하고, 4월에는 당취오唐聚伍를 중심으로 한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 또는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하여 註42) 환인·통화·유하현을 평정하고, 1933년 5월에 신빈 청원현 전투에 이어 다시 영릉가전투를, 7월에는 석인구전투石人溝戰鬪와 무순현 노구대전투老溝臺戰鬪를 통하여 독립군의 기상을 높였다. 註43) 이때 양정우楊靖宇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1934년 9월 20일 양세봉 장군이 함정에 빠져 순국하면서 쇠퇴하였다. 註44) 그 뒤 조선혁명군은 김활석이 지휘하여 1938년까지 항전하였다. 註45)

그런데 현익철·최동오·김학규 등의 조선혁명당 인사가 관내로 들어가 1935년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 조선혁명당 당명으로 참가하면서 김활석까지 민족혁명당 중앙위원에 포함되어 조선혁명군은 명목상 민족혁명당 당군이 되었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였지만, 이와 같이 파쟁에 싸였던 가운데 조선혁명당의 젊은이가 1938년 장사長沙에서 남목청사건楠木廳事件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현익철을 중심한 조선혁명당 중진이 만주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던 김활석의 조선혁명군을 방관하고 있던 사실에 격분한 나머지의 행동이었다. 註46)

한편 이청천을 중심한 한국독립군은 이두李杜·정초丁超·오덕림王德林·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의 길림자위군 또는 중국구국군과 연합하여 중동선 일대에서 싸웠다. 1932년 1월의 서란현전투, 1932년 9월의 쌍성보전투, 1933년 2월의 경박호전투, 그해 6월의 동경성전투와 7월초에 걸친 대전자전투, 註47) 동녕현성전투를 치렀다. 동녕현전투에는 오의성의 길림구국군이 참전했는데 참모는 주보중周保中이 맡았고, 왕청유격대에는 김일성金日成도 참전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공산주의 빨치산 인원이 적지 않게 참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한중연합전선의 주도 세력이 점차 공산주의자로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녕현성전투가 끝나고 구국군을 지휘하던 시세영과 사충항史忠恒이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것도 그때의 형편을 말해 주고 있다. 註48)


6) 독립군의 관내 이동과 동북인민혁명군


그 무렵 한국독립군의 관내 이동이 추진되었다.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자, 김구와 장개석蔣介石 사이에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합의한 뒤 이청천에게 한인특별반을 맡아줄 것을 타진해 온 것이다. 그래서 1933년 10월에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과 한국독립군 사령관 이청천을 비롯하여 김창환金昌煥·황학수黃學秀·신숙申肅·김상덕金尙德·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鮮·공진원公震遠 등 40여 명의 독립군이 남경이나 낙양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모두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 요직을 맡아 활약하게 되지만, 관내로 가지 않은 최악·안태진 등의 잔여 인원은 북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다가 대부분 공산당 유격대에 편입하였다.

한편 1928년 말에는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1국1당의 원칙이 채택되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되고 한국 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 벽두인 1930년에 간도에서 5·30투쟁에 이어 8월에는 길돈봉기吉敦蜂起가 있었고, 1931년 만주사변 직후에는 추수투쟁秋收鬪爭, 1932년에는 춘황투쟁春荒鬪爭이 전개되었다. 1931년 중공당 만주성위원회 소속 당원 1,190명 가운데 97%가, 또 공산청년단 1,500명 가운데 39명을 제외한 97.4퍼센트가 조선인 공산주의자라는 점에 註49)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1930·31년 투쟁이 소작농의 대지주투쟁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조선인의 중국인 부호에 대한 민족적 보복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춘황투쟁 후에는 유격대를 조직하여 우파인 중국구국군이나 한국독립군과 함께 반만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부터 연길유격대를 비롯하여 화룡·왕청·훈춘·남만·영안·요하·주하·밀산 등 동북만 일대에 그 유격대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유격대가 1933년 ‘1월서한’에 따라 한중 공동항일의 통일전선을 표방한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는데, 지역적으로 남만·동만·북만으로 윤곽이 잡혀갔다. 1934년 11월에 남만유격대를 기반으로 중공 남만특별위원회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결성하였다. 1935년 5월에는 연길·왕청·화룡·훈춘유격대를 기반으로 제2군 결성이 발표되었고, 註50) 1935년 1월에는 주하유격대를 기반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결성되었고, 요하유격대는 제4군에 편입되었고, 채녕綏寧 지방에 제5군, 탕원湯原 지방에서 제6군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통일전선은 민생단사건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했던지는 알 수 없으나, 생겼다가 없어진 민생단을 토벌한다고 만주성위원회의 반민생단투쟁이 전개되어 500여 명의 한인 공산당원이 중공 당국에 의해서 무참하게 학살 당하고 1천여 명의 당원이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註51) 그때 공포의 전율을 상상해 보라.


7) 조국광복회와 동북항일련군의 보천보 공략


민생단 문제는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인민전선 전략의 채택으로 해결되었다. 註52) 그에 힘입어 1936년에 전광全光, 吳成崙을 중심으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가 결성되어 오랜만에 독립운동이 고양되기에 이르렀다. 註53) 1935년 12월 코민테른 7차 대회의 「만주에서 반제 단일전선에 관하여」라는 결정문에 따르면, 만주에서 한조중의 항일연합군을 편성할 것과 아울러 조선 혁명의 단일조직도 편성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조국광복회는 그에 따른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김일성金日成이 지휘하는 한인 부대가 1937년 6월 국내로 진격하여 보천보普天堡를 공략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보천보 공략의 소식이 얼마나 통쾌했던가는 당시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연일 대서특필로 보도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註54)


보천보 전투의 상황을 알리는 기사


그에 앞서 중공당의 지시로 1936년 2월 20일 「동북항일련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여러 갈래의 반만 항일군을 통일 조직으로 재결합하고 효과적인 한중 통일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동북항일련군이 1군에서 11군까지 결성되었다. 거기에는 민생단사건의 수습 의도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註55) 그리하여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회의迷昏陣會議에서는 조선인부대의 국내 진격과 조국광복회 결성이 논의되어 5월의 동강회의東崗會議에서 확정·발표되었다. 註56) 7월 하리회의河里會議에서는 1군과 2군을 통합하여 6,000명에 이르는 제1로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이 확대 개편되어 제1로군은 남만 국경지방에서 항전하고, 제2로군은 동북만주에서, 제3로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앞에서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만 간단히 소개하였지만 그 외에도 동북항일련군이 전개한 항일전쟁은 수없이 많았다. 거기에서 조선인부대 또는 조선인의 활약이 남달랐던 것은 1938년 두만강 양안에서 조국광복회 관계자로 체포된 인원이 739명, 평안도 후창에서도 48명이나 됐던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또 흑룡강성 하얼빈의 혁명박물관에 가면 1942년에 전사한 허형식을 특별히 전시하고 있는가 하면 상지시에 김책중학이 설립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8) 동북항일련군의 소련 이동과 임오교변


동북항일련군은 1940년부터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1940년에 홍기하전투를 끝으로 김일성이 이동하고 뒤따라 최용건이 이동하고, 전광은 이동하던 중 잡혀 전향했다고 한다. 1942년 허형식이 전사한 뒤, 마지막으로 김책도 넘어갔다. 러시아로 넘어간 동북항일련군 551명까지 합쳐 1,500명 병력으로 국제군단인 88여단을 편성했는데 조선인은 290명이었다고 한다. 註57) 그들은 하바로프스크 교외 야스코예에 주둔해 있다가 해방 후에 북한으로 들어왔다. 88여단에 편입된 후에도 만주에 진공한 작전이 있었다고 하나 그것은 앞으로 추적되어야 할 과제이다. 註58)

1942년 이후의 만주는 독립운동의 고장이 못되었다. 1933년에 동녕현성전투를 끝으로 한국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하고 1938년으로 김활석의 조선혁명군도 생명을 다 했다. 1940년부터는 동북항일련군까지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만주국의 행정조직과 관헌, 일본군과 영사관 경찰의 준동, 5족협화회와 조선인민회의 조직이 만주 천하를 덮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하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4년에 조선의용군의 선견대로 하얼빈에 잠입했던 이상조李相朝는 취원창聚源昶에 거주하던 독립운동자 김형식金衡植을 독립동맹 북만 책임자로 포섭하여 활동하였고, 註59) 그에 앞서 영안현 동경성 일대에서 윤세복尹世復·안희제安熙濟 등의 대종교 교인들은 발해농장과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11월에 모두 잡혀 고역을 겪었는데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한다.

2. 재만독립운동의 특징과 반성


위에서 재만독립운동의 추세를 개관하였다. 종래에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정치적으로 윤색하여 말했던 것을 벗기려고 노력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재만독립운동은 독립전쟁의 역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운동 단체는 독립군이었고, 독립운동은 곧 독립전쟁이었다는 데에 만주에서 전개한 한국독립운동의 첫번째 특징이 있다. 러시아에서도 독립군의 독립전쟁이 있었으나,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면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혁명의 종결과 함께 끝났다. 註60) 중국 관내에서도 독립전쟁이 있었으나 그것은 1938년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고, 1939년에 군사특파단이나 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1940년에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이 결성된 이후의 역사였다. 미주에서도 독립군이 있기는 하였다. 박용만이 주도하여 1909년의 네브라스카 소년병과 1914년 하와이 국민군단이 그것인데, 이승만의 방해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註61)

재만독립군은 먼저 망명촌과 민족사회라는 경제적·문화적 독립운동 기지 또는 근거지를 발생 기반으로 구축하였다. 망명촌은 일본 식민통치를 거부한 집단이다. 따라서 망명촌에는 새 조국 건설을 위한 민족교육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망명촌 건설→민족교육→독립군 양성이라는 절차가 해외독립운동의 전형적 코스로 확립되었다. 망명촌 건설은 경제적 기반을 해결하는 것이고, 민족교육은 민족공간 또는 민족사회 형성을 위한 기본조건이었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결실이 청산리 전쟁이었다.

그와 같이 독립군은 망명촌을 기반으로 편성되었으므로 망명촌 주민과 함께 독립전쟁을 수행했고, 그것이 청산리전쟁에서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층과 민중의 연대에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독립군 부대 간의 연합작전의 효과도 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청산리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러시아로 이동할 때도 연합부대로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그것이 자유시참변으로 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홍범도·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로, 김규면·이용은 상해파로 분열함으로써 독립군 최대의 참상을 자초한 것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독립군을 러시아로 이동시킨 이동휘에게는 실책이 없었던 가에 대해서도 이제는 솔직하게 반성해야 한다.

망명촌을 기초한 재만독립군이었으므로, 독립군 단체는 동포사회를 관할하는 민정과 독립전쟁을 관할하는 군정의 이원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 동포사회에 사회주의 사조가 확산되면서 민정의 기반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우파 정당이라고 하는 조선혁명당이나 한국독립당이 노농정권 또는 노본주의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註62) 대부분의 동포가 소작농민이었으므로 철저하게 토지개혁을 표방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의 선전 선동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파 정당은 농민의 기반을 빼앗기면서, 재만독립운동은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공산주의 노선으로 옮겨갔다. 그것이 1933년 이후의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역사이다.

재만 동포사회에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던 이유가 거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재만동포가 소작농민이 많았던 것은 영세농가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지만, 이회영·이상룡·김동삼·김형식·이세영·이관직·주진수·황만영처럼 양반지주 출신자도 망명 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신의 역사적 처지를 비판적 안목으로 자성하면서 새롭게 이상사회를 탐색한 나머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교 대동주의에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접목시킨 경우가 많았다. 註63)

그와 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은 1929년 경제공황의 폭발과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더욱 확산되어 갔다. 만주사변 이후에 반일유격대에 가담하거나 그의 후원자가 증가했던 경향이 그것을 말한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길이 아니면, 아예 일본의 주구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에 가담하여 만주국의 차등국민次等國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註64) 그와 같이 복잡한 만주사회였으므로 한국독립운동의 투쟁 대상도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한간과 주구배도 독립운동을 가장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독립운동을 위장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1932년에는 민생단사건이 발생하였다. 소문에 그친 민생단을 실재한 것처럼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반민생단투쟁을 전개하여 몇 천 명의 조선 공산주의자가 희생되거나 감금되었다. 그것은 1930년 5·30투쟁부터 1932년 춘황투쟁이 조선인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그의 꼬리를 물고 일어난 반민생단투쟁은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희생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통일전선을 추구했다. 청산리전쟁 끝의 대한독립군단의 결성부터 시작하여 1921년부터 군사통일회·통군부·통의부·남만통일회·전만통일협의회에서 보듯이 재만독립운동의 초기부터 통일은 숙명적 과제였다. 그것이 1920년대 후반에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3년부터의 동북인민혁명군이나 1936년부터의 동북항일련군의 경우에도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민족 간의 통일전선 성격이 강했다. 1936년의 조국광복회가 계급통일전선을 추구하여 만주에서는 진보적 우파의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폈고, 국내에서는 천도교 조직과 손잡기도 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전선에서 통일 또는 통일전선이 끊임없이 추구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통일전선의 형성에 앞서 서로를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했다. 1933년 남만에서 중국구국군과 조선혁명군·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필요할 때는 함께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경우와 같은 것이다. 註65)

그러나 통일전선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통일이 최대 과제라는 한반도의 현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통일전선을 형성했을 때 표방한 강령이 가장 역사적 의미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도 알 수 있다. 3·1운동 선언서 이후에는 1936년의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1941년의 임시정부 건국강령이 독립운동의 이념을 가장 적절하고 정당하게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통일전선을 추구하고 있던 때의 강령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註66)

1940년부터 동북항일련군까지 러시아로 이동하여 만주는 독립운동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20년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로 넘어갔던 사실과 1933년 한국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한 것과 아울러 독립군의 만주탈출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일정하게 재단할 수 없을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만주에는 조선의용군이 개선 진주하였다. 그리고 확대 개편하여 중국 해방전쟁에 참전하여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 독립군의 독립전쟁, 항일련군의 혁명전쟁, 조선의용군의 해방전쟁의 결실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탄생하였다. 그렇다면 연변의 역사적 임무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세 가지 역사적 업적에서 공통한 가치 즉, 민족주의의 양면성과 인류동포주의의 조화를 달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한국독립운동은 국내 독립운동과 재만독립운동과 재중독립운동의 3대 지역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3대 지역 가운데 독립전쟁은 청산리전쟁에서 보듯이 재만독립군이 개척하였다. 그러한 재만독립전쟁을 기반으로 1930년대 이후에 각처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한중연합군으로서 동북항일련군의 역사가 전개되었고, 중국 관내에서는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련군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서로 비하해서 안 된다. 앞으로는 독립운동이나 독립군에 관하여 저술할 때는 같이 소개해야 한다. 그럴 경우를 생각하여 앞에서 재만독립군의 변천을 간추려 개관하였다. 그것이 남북통일의 준비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재만독립군의 변천을 개관하면서 역사적 의의를 추적해 보았다. 그리고 반성할 점이 무엇인가도 찾아보았다. 그런 가운데 역시 분열과 통일문제가 독립운동에서도 가장 큰 의의와 반성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남북 분단이 당초에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로 보면, 한반도 조선 사람은 민족사적 교훈으로 겸손하게 받아 드려야 할 것이다. 다음에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분단정국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윤색 과장했던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사를 학문의 본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도 통일이 당겨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