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5장 중기(1919~1931)의 독립운동,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7. 21:58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3·1운동과 더불어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 註4)가 수립되었다. 그것은 3·1운동과 동시에 독립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의식의 반영이다. 임시정부란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정부이다. 註5) 준비정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무엇을 계산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서울·평안도·연해주·간도·길림·상해 등지에서 독립선언과 더불어 공표되었다. 註6) 7개의 임시정부가 공표되었는데 거기에서 정부 수립자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서울의 대조선공화국세칭 한성정부연해주의 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그러니까 3자의 교섭으로 통합이 추진되어 1919년 9월에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통합정부를 수립하였다. 거기에서 놀라운 것은 어느 것이나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부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합정부를 수립할 때 만든 헌법이 당장에 급하지도 않은 삼권분립까지 표방한 민주주의의 이상을 나타낸 것은 정식정부를 예상한 준비정부로서 만전을 기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식정부 수립이 요원해지자 임시정부의 헌법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조항만 두게 되었다. 그것이 1925년과 1927년의 헌법이다. 그 후 1941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만든 헌법에 이어 1944년의 헌법에서는 광복을 전망하면서 다시 준비정부로서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권력구조를 나타낸 정부형태의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註7)

임시정부의 변천에 대하여는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정치사에서는 권력구조를 중시하기 때문에 헌법의 변화 즉 정부형태의 변화를 기준해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사의 각도에서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1940년 광복군의 창설을 기준하여 변천시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시기구분은 임시정부가 머물었던 곳에 따라 상해시기1919~1932, 이동시기1932~1940, 중경시기1940~1945로 나누는 것과 일치하므로 이해하기가 편리하다. 이 글도 그러한 용례를 따라 상해시기의 임시정부에 한정해서 살피기로 한다.

임시정부는 1919년 준비정부로 탄생했기 때문에 정식정부의 수립 준비를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에 집중하는 한편, 각종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정부란 주권의지의 조직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수립은 일본에 대한 여하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독립의 의지를 집약한 표상의 실체였다. 그리고 주권은 최고·절대·유일·불가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권의 존재인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탄생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조직을 정비하면서 국내외 동포를 관할하는 연통부聯通府·교통국交通局·거류민단居留民團 등도 설치·운영하였다. 註8)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의 외교적 쟁취가 무산되고 1920년 청산리전쟁에 이은 경신참변 등으로 독립전쟁이 크게 타격을 입은 뒤에 준비정부로서의 임시정부 성격은 희석되고 말았다. 1920년 말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도임하여 분란만 일으킨 것을 고비로 준비정부의 위치는 상실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래서 1921년 초에 이동휘李東輝·김규식金奎植·안창호安昌浩 등 임시정부 초기의 주도자들이 줄줄이 임시정부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주권의지로 수립한 것이므로 발생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독립운동 전체를 재정비하려고 1921년부터 국민대표회 소집이 제기되었다. 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勳·안창호·김동삼金東三 등이 국민대표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어떤 정부이건 정부란 국민적 기반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국민적 기반을 만회하자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3년 1월 3일부터 그해 5월 15일까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보존이승만·이시영과 개조안창호·김동삼·여운형와 창조김규식·김응섭·윤해의 주장이 대립하여 회의는 실패하였다.

실패의 근본 이유는 통일전선에 대한 이해부족이었다. 보존파의 막후 방해도 그것이었지만 창조파가 국민대표회를 깨고 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상해를 떠나 결렬되고 말았다. 연해주에서 국민위원회가 통일전선에 새롭게 눈을 뜨고 1924년에 민족대당을 제창했을 때는 시기가 맞지를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상해, 1919)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통령 이승만의 비정상적 운영 때문에 임시정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여 1923년에는 대통령불신임안을 결의하였다. 그래도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자 1925년에 대통령탄핵안을 통과시켜 그를 축출하고 뒤이어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는 임시정부를 준비정부 보다는 독립운동 지도체제에 맞게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것이 1925년의 국무령國務領을 중심한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새 헌법에 따라 안창호·양기탁梁起鐸·이상룡李相龍·홍진洪震·김구金九 등이 차례로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이때는 1924년부터 국민위원회 인사들이 추진하던 민족대당운동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註9) 1926년부터는 임시정부 안팎에서 민족대당 결성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때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가 민족대당을 임시정부위의 최고기관으로 한 이당공작以黨工作 체제의 헌법을 만드니 이것이 1927년의 국무위원회 중심의 관리정부형태의 헌법이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거리는 온통 민족대당 형성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만주와 북경·천진·상해·남경·무한·광주 등의 관내 곳곳에서도 민족대당결성촉성회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중국국민당의 국공분열이 영향하여 국내에서 신간회가 결성된 이외에 어디의 대당운동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의 분단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안타까운 역사라고 하겠다.

그러나 두 가지 긍정적 유산도 남겼다. 하나는 민족대당운동을 계기로 정당 결성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1924~5년 만주에서 한족노동당과 고려혁명당이 탄생한 후,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독립당·신한혁명당이 결성됐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정부를 관리정부 형태로 개편하므로써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이동기의 임시정부를 운영하기에 편리했다는 점이다. 이동기의 임시정부가 왜소하게 보였던 것도 관리정부 형태의 정부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활력소를 찾고 임시정부의 생기를 찾았던 것이 한인애국단이 주도한 1932년의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상해의거였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의의 경종인 동시에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이 새롭게 활기를 찾는 쾌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한국독립운동은 잊어버린 임시정부를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국민적 기반을 회복했다는 말도 된다. 국제적으로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나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다시 한국독립운동의 중심 위치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3·1운동에 의해 탄생한 그의 발생가치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발생가치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느냐의 역할가치는 사람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 있다. 많은 한계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을 규제하는 표상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가 다른 나라 독립운동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임시정부의 개요를 살피면서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거기에서 다시 기억할 것은 한국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임시정부는 한국사에서 볼 때 혁명적으로 추구한 자유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치를 표방하여 한국근대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는 식민지 무효론의 역사적 근거이며 절대독립의 민족적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자가 해방 조국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역사의 순리였다. 그것을 미국 주둔군이 방해하였다. 또 독립군이나 임시정부가 식민지 무효론을 주장하고 절대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해방 후 한국이 독립할 엄연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일본에 배상금을 청구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은 그러한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특히 군사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배상금을 포기한 민족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러한 민족적 과제는 앞으로 있을 북일회담을 통하여 극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1920년대의 한국사에는 독립운동이 민족총력항쟁으로 전개되면서 3·1운동에서 부상한 인도주의가 여러 가지 실천 논리를 찾던 가운데 사상과 방략이 만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가 매력을 끌었다. 거기에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가 원칙으로 국제주의 또는 세계주의를 추구하는 이념이지만 그에 앞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하에 있던 약소민족은 해방운동의 논리를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어디에서 찾더라도 그의 전단계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독립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이념이기 때문에 국수주의와 구별됐다. 그러한 이치를 외면하고 직접 세계주의를 달성할수 있다고 선전 선동한 공산주의 노선이 있었다. 그것이 한때의 독립운동을 혼돈에 빠뜨렸는데 깊이 반성할 문제이다.

방략은 정치투쟁·무장투쟁·외교론·실력양성론이 있었던가 하면 자치론·타협론·비타협론 등,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고 논의되고 있었다. 다양하게 추구되었다는 자체가 민족총력항쟁기에 보여준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가 깊어가면서 자치론이나 타협론은 독립운동에서 탈락해 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가 되면 사회운동이나 문화운동도 새롭게 정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