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4장 3·1운동의 전개, 지방운동의 특수성/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7. 21:35

2. 지방운동의 특수성


전국적인 추세로 보면 지방의 운동은 중앙의 종교조직을 통해서 연락을 받아 일어났고, 그곳이 지방의 진원지가 되어 다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의 경우는 다르다. 종교조직을 통하여 전달된 예는 있으나 대중운동으로 성취되지 못하였다.

종교조직으로 전달된 것은 천도교와 감리교의 경우가 있는데 감리교의 경우는 원주로 전달되었으나 당시 미국 선교부에서 밀고하여 실패하였다. 註22) 천도교를 통해서 선언서가 평강교구平康敎區로 전달된 것은 강원도 영서지방의 북부 일대에 배포되었는데 이것도 만세 분위기를 조성시키는 역할로서는 중요했지만 그 자체가 만세운동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1. 운동의 전개

2월 28일 중앙 천도교회의 안상덕安商悳이 독립선언서 700매를 평강교구장 이태윤李泰潤에게 전하여 이태윤이 그것을 이천·철원·김화·화천·춘천·진양에 배부하고 평강 각면에도 배포하였다. 이것이 3월 1일과 2일에 있었던 일인데, 각군에서는 그것을 요소에 붙이고 군데군데 뿌렸으나 거의 모두 체포되어 3월 초에 선언서를 배포한 평강지역의 천도교인들은 직접 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태윤을 비롯한 이들의 태도도 대단히 모호한 것이었다. 이태윤의 판결문을 보면 註23) 중앙의 안상덕으로부터 선언서를 받아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김찬호金瓚鎬를 서울에 파견했는데, 김찬호가 3월 1일에 돌아와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니 그제야 믿고 배포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때 춘천에서는 사전에 발각되어 선언서 150매를 갖고 온 임종한任宗漢·신윤철申允喆이 체포되어 실패했지만, 그 밖의 북부 지구에는 선언서를 배포하여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강원도에서 만세운동이 표면상의 시위로 나타난 것은 3월 10일 철원의 운동이 시초였다. 그러나 철원의 운동이 전도적全道的인 근원지 혹은 진원지는 되지 못하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강원도는 교통수단이 철원과 평강을 제외한다면 모두 조선시대의 전근대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산악이 남북 동서로 뻗어 있어서 진원지가 있을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이었다. 때문에 강원도는 영동지방과 영서지방, 영서지방에서도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으로 나뉘어 각각 문화성격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듯 이 3·1운동 때도 역시 다르게 나타났다.

만세운동이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데는 서울의 정보가 나름대로 입수되는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의 정보는 인산에 참가했던 사람이 귀향하는 길에 가져오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학생들 편에 들어오는 경우였다. 그들은 정보를 전달할 뿐 아니라 만세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3월 1일 선언서 배포 후에는 산발적이 되었지만 그래도 종교인의 활동이 컸다. 강원도의 경우는 천도교와 감리교의 활동이 있었고, 불교와 천주교는 도내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활동은 별로 없었다.


2. 운동의 특수성


이와 같이 3월 10일부터 곳곳에서 서서히 일어나 3월 하순과 4월 초순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 전개되었고, 4월 중순부터 산발적으로 나타나 5월 9일 양양에서 시위가 있었던 것까지 2개월 동안의 시위였다. 이것을 지방적 특수성이라는 관점하에 각도에서 분석하여 보겠는데 운동개요를 놓고 서술하면 이해가 쉽겠으나 장황하니 다른 책자를 참고하기 바라고 여기서는 특징적인 것만을 추려서 검토하겠다.

먼저 추진인물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종교적 연합이 어려웠다는 점과 유학자가 추진한 운동은 면부面部 아니면 동리洞里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강원도 3·1운동을 추진한 인물의 성격은 비교적 단조로웠다. 거의 천도교·기독교·유교가 각각 단독으로 추진하였는데, 단지 신문화에 접촉한 청년들은 어느 계층과도 합류할 수 있었다. 도내에서 종교 간에 공동으로 추진한 경우는 홍천읍의 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하였고, 양양에서 기독교와 유교가 연합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와 유교가 공동추진한 곳은 철원의 독검리篤儉里와 이천의 경우이다. 그 외 도내의 수많은 운동은 어느 하나의 독자적인 추진에 의해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독자적인 추진일 때의 운동은 종교가 평소에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대중적이 못되었을 때는 춘천·양구의 천도교에 의한 운동과 강릉·장전의 기독교에 의한 운동같이 종교적 행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음에 유학자가 추진한 운동은 양양을 제외하면 모두 군소재지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양양의 경우도 읍을 담당하여 계획을 추진한 것은 교회의 청년들이었다.

유학자가 추진한 운동이 읍을 떠나고 있는 현상, 즉 읍에 살던 유학자는 추진인물로 등장하지 않았던 점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읍에는 주로 아전이 살던 곳이 아니냐는 것도 있겠으나, 읍에는 신문화의 조류를 받아 유학층이 쇠퇴하였던 것으로 보아 과도기적 시대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 추진인물의 성격에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의병 종사자가 추진인물로 합세했을 때는 어느 경우나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고 중도에 합세하여 운동의 방향을 과격하게 발전시켰던 점이다.

강원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이 치열하던 곳이며 경술국치 후까지 계속되었던 곳이다. 국치 전후에 일제의 공격이 심할 때 의병들은 마지막까지 싸우기도 했으나, 국경을 넘기도 했고, 남의 집 머슴으로, 혹은 화전민으로 혹은 술장사를 하며 은신하였던 것인데 은신한 예가 강원도에는 허다하였다. 농민 출신의 의병은 머슴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술장사나 화전민으로 변장하는 것이 쉬웠을 터이니 변장한 의병은 그 상태에서 3·1운동을 겪었다면 추진인물로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원도 3·1운동사에서 의병출신이 추진인물이었던 경우로서 조사된 것은 다음과 같다. 註24)


〈표 3〉 강원도지역의 3·1운동 주요지도자
이름3·1운동 때 주소 및 직업추진한 운동의병활동지
박춘실양양군 서면 상평리 : 술집4월 4일과 7일의 양양읍과 서면의 운동강원도
손계원도천면 논산리(지금의 속초시) : 엿방4월 8일의 논산리 운동경상도
강명하화천군 상서면 봉오리 : 화전민3월 28일 상서면운동함경·강원
김연태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 술집3월 28일·29일 창도리운동경기도
송의선철원군 철원면 요리 : 농업3월 10일 철원읍운동강원도
장도훈횡성군 안흥면 상흥안리 : 화전민3월 27일 횡성읍운동평안도
박영하원주군 소초면 둔둔리 : 글방4월 5일 원주군 소초면운동강원도
전상요25)정선군 북면 상평리 : 글방경북 안동운동강원도


위의 것 외에도 홍천운동 당시 성명 불상의 의병출신자가 활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註26) 횡성의 4월 1일 운동에서도 크게 활약한 강만형姜萬馨은 천도교의 중심인물이었는데,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횡성군 청일면 춘당리의 당고개 전투에서 전사한 강도영姜道永의 아들이었다.

다음에는 대중의 참여도와 참여방법상에 나타난 특징을 보겠다. 우선 추진인물이 어떤 종교인이었을 경우에는 단독 추진일 때는 유교든, 천도교든, 기독교든, 그것이 서민사회에서 신망을 받고 있거나 서민층이 가세하여 있던 것이었으면 대중의 호응도가 높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다른 기회를 통하여 운동을 전개할지라도 그때에는 대중적 호응을 나타내지 않는 경향이 짙었다. 강릉에서 4월 2일 기독교도가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장날인데도 불구하고 호응도가 약하였다. 그러나 7일의 장날에는 수비대가 1개 중대나 경계를 폈는데도 그 지방의 청년이 추진하였으므로 호응도가 높았다. 註27)

횡성의 4월 1일의 운동은 대단히 큰 규모였고 폭력시위였는데 이때의 추진인물은 천도교인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단독 추진이라고 해도 횡성은 당시에 천도교세가 강하여 도내에서 유일하게 대교구가 설치되어 있었으니 이해할 만하다. 홍천 동면이나 물걸리 그리고 원주의 소초면에서 있었던 4월 2일과 3일 그리고 5일의 시위는 사상자도 많았던 운동이었다. 이 경우에는 유학자가 추진하였다. 유학자가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방에서는 지방유생과 글방 훈도 등이 신망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조사된다.

물론 4월 4일·5일·6일·9일의 양양의 운동이나 4월 1일의 홍천운동과 같이 각 계층이 연합해서 추진하면 대중의 호응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하였다. 그런데 강원도의 경우, 각리의 이장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던가 하는 것이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왜냐하면 도내에서 규모가 컸던 운동에서는 철원읍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경우에 모두 구장이 적극 참여하고 있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강원도 특히 산악지방의 서민사회에서는 평소에 구장의 위치가 타지방보다 높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군중의 동원에서 어느 정도 강제성이 개재한 경우가 있다. 「약이불음시훼가출송若而不應時毁家出送」의 통문을 보냈던 경우인데 그것은 천도교의 추진일 때 몇 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조사된다.

위에서 추진인물로 종교 관계자, 이장, 유학자 등을 말했는데 이들이 강원도에서는 지도급의 인물이지만, 전국적 수준에서 본다면 대중 세력에 포함시킬 수 잇는 경우도 많다. 신교육을 받은 청년이 추진한 예는 3월 10일의 철원읍, 3월 12일의 철원군 갈말면葛末面, 4월 4일의 양양읍의 것이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것인데 이것은 기독교나 유학자 아니면 이장과 연합하고 있었다. 그 밖의 경우는 삼척·간성·통천같이 보통학교 생도를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민사회와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신교육을 받던 청년이라면 당시로서 비교적 부유층의 자제였을 터이니 단독으로 서민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운동으로 발전됐을 때 집결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어 갔다는 것이니 이것이 정말 ‘만세꾼’인가 싶다. 註28) 이것은 장날에 있었던 장터의 시위와 질적 차이가 있는 운동으로 규정하여야 될 것으로 안다. 위에서 대중동원 내지 호응에 관하여 특수한 것을 몇 가지 말하였는데 당시 대중의 심리적 경향이 어떠하였던가를 보면, 물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이겠지만 혹간의 경우는 독립된 줄 알고 일본인에 대한 보복으로 행동하였던 경우도 있으며, 또 강제 통문에 의한 경우도 있었으나 많지는 않았다. 조사한 바로는 독립이 됐다 안됐다고 하는 사실보다 대중사회에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으니 신망 있는 지도자나 사회적 연합에 의한 공동추진을 한다면 대중은 따르기 마련이었고 이는 독립쟁취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었던 구조상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운동일자와 장소에 관하여 간단히 보기로 한다. 운동기간은 앞에 말한 대로 3월 10일 철원운동을 기점으로 5월 9일 양양의 시위를 마지막으로 약 2개월 동안이었는데, 선택된 날짜는 대개 장날이었다. 장날이 아니라도 장날에서 확대된 운동이었다. 그렇지 않았던 운동은 철원의 내문乃文, 김화의 창도昌道, 화천의 상서上西, 황성의 서원書院, 영월의 금마金馬와 원주의 각 지방이었다. 장날을 택하지 않았을 때는 치밀한 계획이 전제되었던 공통성이 있는데, 원주의 경우는 동리운동이 많았다. 원주에서 동리단위의 운동이 많았던 것은 읍에 중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하여 있었기 때문이고 흥업면과 소초면을 제외한 동리단위 운동은 밤에 봉화를 올리며 시위하였다.

장소는 시장 아니면 관공서 주변에 집결하였던 것이 통례인데 원주에서는 뒷동산 혹은 달맞이 하는 장소를 택한 동리단위의 시위가 많았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物傑里는 조선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기에 4월 3일 물걸리의 만세운동이 동리단위의 운동 같지만, 부근 면민이 모여 시위하다가 9명의 사망자까지 내었다. 동창리東倉里라고도 불리는 물걸리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마방馬房·주막酒幕이 많았고 상업 창고까지 있었는데 3·1운동 당시만 해도 전근대적 교통수단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물걸리는 마방까지 있을 정도로 번창한 상업중심지였다.

다음에 시위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면, 먼저 순수한 시위로 나타난 경우가 있다. 원주의 지정면地正面·부론면富論面·건등면建登面의 봉화시위, 횡성군 서원면의 시위 등이 평화적 시위였으며 삼척·간성·통천의 보통학교 생도의 시위도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운동은 폭력시위로서 일본의 관공서를 파괴하거나 일본인을 축출하거나 혹은 친일배를 공격하였다. 친일배 공격의 대표적인 예는 3월 10일 철원읍에서 구한말의 판윤으로 일제의 남작위男爵位였다고 전해 오던 박의병朴義秉을 납치하여 문책 구타한 것이다. 일본 관공서 파괴와 일본인 축출운동에 대하여는 예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디나 막론하고 시위 군중이 군소재지나 면소재지에 갈 때는 곤봉 같은 것을 들고 갔으며 화천과 양양의 경우는 때마침 가로수를 심고 지주를 받쳐 놓았던 때여서 그 지주를 뽑아들고 갔다. 군중이 사용한 무기는 돌과 곤봉이 대부분이었는데 4월 6일에 있었던 통천군 고저庫底 시위 때는 총검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註29)

강원도의 3·1운동은 중앙과 유기적 연락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시위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거나 살포하는 경우가 적었다. 또 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방 자체로서 선언서를 작성한 경우도 흔치 않았다. 시위할 때 태극기를 든 것은 대부분이었는데 계획된 시위에서는 대표기를 꼭 가졌다. 대표기의 경우는 대한독립지기大韓獨立之旗라고 쓴 것과 대형 태극기가 가장 많았는데, 4월 6일의 양양 손양면민의 시위 때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기를 들고 농악대를 앞세워서 읍으로 행진하였고, 3월 23일 화천읍의 시위 때는 면민대표面民代表 김창의金昌義·이은규李殷奎의 기와 조선독립만세의 기를 앞세웠다. 註30)

끝으로 시위군중의 성격을 구분하여 보겠다. 시위군중이 대중성을 갖추었을 때와 특수집단이었을 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농민이 집단의식이나 계급의식을 가지고 참여했던 경우는 편의상 특수집단으로 취급하였는데, 다음 표에는 특수집단의 경우만을 나타냈다. 註31)


〈표 4〉강원도지역 3·1운동의 성격
시위일자시위장소집단성격비고
3월 28일춘천읍천도교인 
단독시위
천독교적 종교행사의 범위
4월 3일양구읍
4월 2일강릉읍감리교인 
단독시위
기독교적 종교성이 강함
통천군 장전
4월 6일통천군 고저노동자 
단독 후 합세
고저는 어항이며 교통(해운)의 요지였으며 군 
중 속에 총검을 가진 자가 있었다.
4월 4일강릉읍농민 
단독시위
남대천 洑공사하던 농민인데 지도자는 노동 
야학을 경영하던 최집·최진규
4월 6~7일양양군 서면 상평리6일에는 4일의 시위 때 파실당한 김학구의 
장례 때 상여를 메고 면소를 습격했으며, 7일 
에도 동료 사망에 분을 못참아 시위했음. 지 
도자는 의병 출신인 박춘실
3월 11일철원읍보통학교생도 
단독 후 합세
간이농교생도 다수 참가했으나 집단성을 띤 
것은 아님
3월 18일간성읍 
단독시위
일제측문헌에는 미수로 수록되어 있으나 조 
사한 바로는 교내에서 시위했음
4월 8일통천읍보통학교 생도의 집단시위로서 교내에서 그 
쳤으나 미수였던 곳은 원주·횡성·인제·삼 
척·강릉에도 보교생의 계획은 있었으며, 양 
양에서는 집단성이 아닌 산발적 참가였다.
3월 29일원주군 부론면 노림리노림의숙(노림국민학교 전신)
3월 12일철원군 갈말면 문혜리서당생도 
합세시위
서당교사 신성규의 지도 
(『判決文綴, 京城地法』 제8책, 110~119쪽)
3월 28일김화군 기오면 창도리도장관보고문(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Ⅱ, 710쪽)
4월 2일홍천군 동면현지조사
4월7일양양군 현북면 장리·도리현지조사(서당교사 이성윤)
4월 7일평강군 서면 완산리교사 권대완의 지도 
(『判決文綴, 京城地法』 제13책, 299·304쪽)
4월 8일이천군 판교면 명덕리교사 김병수의 지도 
(『判決文綴, 京城地法』 제16책, 444·448쪽)
4월 10일이천군 서면 축동리서당교사 박용의의 지도 
(『判決文綴, 京城地法』 제7책, 213·219쪽)


〈표 4〉에서 종교적 범주를 벗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앞에서 서술한 것이므로 생략하겠지만 고저의 노동자와 강릉의 농민운동은 계급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데 주의할 만하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보통학교 생도는 단독으로 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많았는데, 서당 생도는 모두 다른 사람들과 합세하여 운동한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유교의 생활윤리가 당돌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과 서당의 생리에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서당의 생리란 스승이 결정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는 생도가 앞서 행동하는 것이 보통 허용되지 않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서당 생도가 운동한 경우에는 서당 훈장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던가 하는 추리가 간다. 그와 같이 서당 훈장의 참가는 서당 생도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이것은 보통학교 경우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에서 보통학교 생도의 동향은 강릉과 삼척의 경우 교사의 행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그 외의 경우는 선배, 또는 그 지방의 청년들의 관여에 의해서 움직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방사적 의의를 간추려보기로 한다. 의의는 지방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그 성격 파악의 방법으로 요약하였다.

3·1운동을 일으켰던 사상적 기저는 유교의 가례나 군사부철학에 기초를 둔 반일감정과 천도교적 민족의식, 그리고 각종 학교와 기독교 등을 통해 들어온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는데, 이것은 강원도뿐 아니라 일반적 경향이었을 것이지만 비중은 지방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고르게 원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근대민족주의의 표현인 윌슨의 자결원칙이나 헌정운동이 파급될 만큼 근대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강원도의 사상적 기저에서는 구한말의병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전술한 바이나 실제 3·1운동에서도 의병이 참가하고 있었으니 의병과 3·1운동의 인적 맥락이라는 점에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3·1운동을 일으킨 데는 물론 서울의 운동이 영향한 것이지만 지방에서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 기저도 중요한 것이었으나, 가깝게 본다면 일제통치 즉 농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지방행정상의 문제에서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때마침 광무황제의 독살설이 전파되어 반일분위기를 고조시켰다는 것에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3·1운동은 대중의 호응을 받은 민족운동이었다. 그런데 대중적 성격은 대중의 사상적 기저에 따라 다를 것이고, 사상적 기저는 지방에 따라 다르며, 지방에서도 지방 나름의 대중성이 문제된다. 대중의 속성이 개인적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행동을 독자적으로 취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운동의 대중성문제는 대중의 이해와 공통적인 연결을 맺을 수 있는 지도급의 행동과 직결된다. 그리하여 강원도의 경우에 지역성, 사회성격의 개별성, 종교분포 등에 따라 다양하게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렇게 3·1운동이 전개되어 강원도에서 2개월간 계속되었는데 이로써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역사적으로 가진 의의를 지방사적으로 어떻게 규명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일제의 가혹한 총격과 처벌에 반일감정은 더욱 고조되었고 독립의식이 보편화되어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반적인 이야기다.

특수한 점을 지적하면 먼저 종교 간의 반목을 해소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를 백안시하던 태도가 불식되었다는 데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영동지방과 같은 토착사회의 성격이 강한 지역에서 기독교의 전도는 쉽지 않아 3·1운동 전에는 교세가 대단히 약하였다. 때문에 기독교가 단독으로 추진한 운동은 대중성을 띠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을 목격한 대중은 기독교를 백안시하던 태도를 고쳤다. 그것은 횡성과 강릉에서 3·1운동 뒤에 있었던 청년회 구성이 기독교인의 여부를 막론하고 조직되었던 사실로서도 알 수 있다.

또 종교 간에도 3·1운동 전에는 서로 대화가 오가지 못하였는데,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사업을 치루면서 그의 공동운명에 처했던 경험을 계기로 서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철원애국단사건鐵原愛國團事件 註32)에 잘 나타났다. 철원애국단은 불교도, 기독교도, 유학자, 일반청년 등 강원도 지도급 인물이 총망라되어 3·1운동 직후에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철원 도피안사에서 조직된 것이다. 목사와 불승이 한자리에서 민족운동을 의논한 자체, 유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 종교인이 하나의 애국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한다는 것은 종교 간의 반목을 해소시킨 증거로 충분할 것이다. 3·1운동 뒤에 범 강원도의 애국단체이고 민족운동의 강원도 본산이었던 철원애국단에 천도교인이 없었던 이유는 강원도에서는 3·1운동 때 천도교의 지도급은 모두 검거된 데에 있었다. 3·1운동이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론이 없겠으나 천도교의 경우는 지방에서 종교적 행사 같은 태도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천도교회의 지도급은 3·1운동에 모두 희생을 당하여야 했으나 3·1운동 후의 철원애국단에 참가할 인적 자원이 없었던 것으로 조사된다.

3·1운동을 계기로 종교간의 반목이 해소됐을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 구논리를 고집하던 청년과 신교육을 받던 젊은이와 접근하게 되어 신구청년간의 막幕이나 간격을 없애게 되었다. 강원도의 경우 춘천·양구·평창·정선을 제외하고 모든 곳에서 교회 주변의 청년이 아니면 학생 또는 보통학교 생도가 운동에 참가하였으니 그 지방에 많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세력이 분열되어 있던 것을 결합하게 되었다는 것은 민족적 지성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큰 것이다.

다음에는 3·1운동 전에는 신민적 정치의식이 온존되어 왔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시민적 자세로 변천하였다는 데 또 하나의 큰 의의가 있다.

3·1운동의 사상적 기저를 설명할 때 말한 바이지만, 3·1운동 전에는 신민적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광무황제의 승하에 대한 망곡례를 치루고 백립을 쓴 예가 많았고 보통학교 생도들까지 상장을 달았던 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3·1운동을 통하여 대한제국의 시기는 복구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 쟁취하는 나라는 임금없는 국민정부에 의해서 통치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3·1운동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백안시의 풍조가 해소됐다는 사실이나 신교육을 받던 젊은이를 소원하던 풍토가 해소됐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층 더 구체적인 실증은 3·1운동 후에 많은 젊은이가 서당과 고향을 떠나 학교로 진출한 현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3·1운동 중의 사례를 통해서, 혹은 운동 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3·1운동 중의 사례에서 원주군 귀래貴來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김현수金顯洙와 서상균徐相均이 군중으로부터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누구를 임금으로 모시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군중에게 공화정치를 설명하느라고 고생한 이야기가 이 지방에 그대로 전한다. 註33) 이러한 이야기는 마을의 노변담화로서도 얼마든지 있었을 법한 이야기이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각종 정부가 수립됐었고 또 강원도 지방에는 앞에 서술한 것과 같이 철원애국단의 설치를 보아 임정자금 조달이나 그의 조사원·특파원이 공화정치를 설명하고 있었으니 노변담화 이상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보아야 한다. 천도교회에서도 3·1운동 뒤의 공화정치에 대한 계몽을 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註34)

이상과 같이 신민적 태도에서 시민적 태도로 전환되면서 신문화 수용에 더 과감하여져 정신구조상 근대사로 향하는 발전속도가 높아졌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중사회에서 민족운동의 방향감각이 정립된 점이다. 우리의 근대 민족운동의 기점을 어디서 잡느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논할 바 아니나, 초기에는 반봉건주의운동과 반제국주의운동이 양립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은 민족운동에서 상호대립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구한말 지도자의 결정적 과오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정미의병 때 이강년이 양양을 점령했을 당시 현산학교峴山學校를 불태워 버렸다. 현산학교는 1906년 남궁억이 양양군수로 있을 때 설치한 학교로 영어·일어·음악·수학·체육 등을 교과내용으로 교육하던 학교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현산학교는 양양지방에 근대사상을 심어주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지방민도 처음에는 맹렬히 반대했으나 설치 후에는 한때 생도수 100명을 헤아릴 정도로 협조적이었다.

그런데 의병대에 의해서 소각되었으니 대중은 어느 것이 옳다고 보겠는가. 즉 이와 같은 민족운동상의 이질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3·1운동을 계기로 반제·반봉건의 지성을 하나로 모아 동시에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병만의 경우로 보아도 1910년대 국내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성격에서 이중구조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1운동 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같이 복벽적 성격의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의병이 발전한 독립군 조직의 근대지향성이 지배적이었다.

다음으로 3·1운동의 폭력 비폭력의 문제에 주목해야 될 것 같다. 강원도의 경우, 그 계획단계에서는 비폭력 시위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대중화의 단계에서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폭력시위로 전개된 경우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국적인 추세이기도 할 것이다. 3·1운동이 대중화의 단계에서 폭력시위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 즉 일제하 독립운동에서 자치론 같은 어떠한 제한독립설制限獨立說도 부정당하고 절대독립설絶對獨立說만 용납되었던 것은 3·1운동이 폭력시위로 전개된 그 대중적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일제가 1910년대의 식민통치에서 어떤 흥정의 여지를 두고 있었다면 3·1운동의 대중화에서도 역시 흥정의 여지를 둔 비폭력 시위로 전개되었을 것이고, 그 후의 독립운동도 흥정의 성격을 띤 제한독립성이 고개를 들 수 있었을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지방으로 갈수록 어떠한 틈새도 없이 탄압하고 착취하였다. 그러므로 대중은 어떠한 흥정의 성격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의 한국사적 특수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