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혁명전략의 대두와 대한광복회/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6. 12:49

3. 혁명전략의 대두와 대한광복회


1910년대에는 여러 가지 정치사상이 다양하게 전개된 시기이고 또 주장도 다양하였다. 한말부터의 주체적 조건으로 보아도 다원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일제 식민통치에 따른 객관적 조건도 한결같지 않아 각색의 충격 파문 속에서 다양한 이념이 교차해서 표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부터 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까지 국제사회의 변동도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유주의 또는 공화주의 사상의 성장에 기여한 국제여건의 착용들이 특별히 주목되는 것이다.


1.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 독립운동계


1910년대 국제정세는 신해혁명과 제1차세계대전·러시아혁명과 그에 따른 국제적 파동이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신해혁명은 한국과 인접한 중국에서 전통질서를 부정한 근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깊은 관련이 있었고,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은 국제사회의 재편을 바라는 한국인에게 기회 포착의 조건을 제공한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때 연해주에서는 권업회勸業會와 대한광복군정부가 해체당했고, 만주에서 간민회墾民會와 부민단扶民團이 해체 또는 무력해지는 등 직접적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은 다양한 파문을 던졌거니와 그에 앞서 러시아혁명은 핀란드·폴란드의 독립선언과 함께 연해주에서 재로한족회在露韓族會 중앙총회中央總會가 결성됨으로서 1914년 폐쇄되었던 한국 독립운동 조직의 재건이 추진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때 상해에서는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여러 가지 여건 변화에 따른 국내 동향만을 보면, 우선 신해혁명의 영향이 컸다. 그중에서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전통적 모화사상의 뿌리가 흔들려 전제군주론이 크게 후퇴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이 독립의군부나 민단조합이 대중적 기반을 얻지 못한 간접적 요인이 아닌가 한다. 그와 아울러 공화주의 혁명사상이 성장하게 되었다.

중국과의 전통관계나 지리적 관계로 보아도 신해혁명의 소식이 빨리 전파되었지만, 박상진朴尙鎭·이관구李觀求·신규식·조성환曺成煥·박경철朴景喆·김병만金秉萬 등 신해혁명 대열에 참가하거나 그 대열의 와중에서 참관한 인사도 많아 혁명이념이 국내외 동포사회에 의미 있게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조성환은 북경에서 신해혁명 때 신규식과 함께 자유당自由黨에 입당하여 활동하면서 미주에 있는 안창호에게 정기적으로 혁명 진행상황을 연락하고 있었다. 註40)

그리고 국내에서도 이종일李鍾一은 손병희孫秉熙에게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개편하고 군소정당을 모아 국민당國民黨을 결성한 사실을 알리고, 이웃이 이러한데 우리도 비밀조직이긴 하지만 하나의 정치적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타진하였다. 註41) 한편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신해혁명과 같은 혁명이 조선에서도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그와 비슷한 전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註42)

다음에 러시아혁명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은 미국과 중국의 참전까지 있어 국제사회의 변동이 극심한 해였으므로 독립운동계의 반응도 다양하였다. 미주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설립되었다. 스톡홀름의 국제사회당대회國際社會黨大會, 뉴욕의 소약국동맹회 등에 대표를 파견하면서 「대동단결선언」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의식한 일제는 함경북도 경무부로 하여금 러시아 방면의 출입국자를 월별로 조사하게 하였다. 그에 의하면 1917년 1월 461명의 입국자가 있은 후 註43) 1918년 10월에는 958명이 성진城津과 경흥慶興으로 입국하고 있었는데, 註44) 이와 같이 입국자가 매월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점은 그에 따라 러시아혁명 소식이 국내에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때 일제가 양준명梁濬明·이용규李容珪·윤병일尹炳日·이만식李晩植·이래수李來修·김태영金泰泳·진치만陳致萬·전용규田瑢圭·손진형孫晋衡·최전구崔詮九·이종호李鍾浩 등에 대하여 욕지도欲智島·백령도白翎島 등으로 유배 감금 조치를 취했는데 註45) 그것도 그 시기에 따른 일제 나름의 조치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3·1운동 때의 헌병문서나 판결문에서 발견되는 주의사상主義思想 또는 과격사상이라는 말은 러시아혁명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혁명 사상이 3·1운동 이후 전래한 것이 아니라 1917년 이후 서서히 전파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광복회는 혁명계획을 추진해 갔다.


2. 풍기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대동상점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은 1913년에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禹錫 등 한말 의병 또는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가 결성하였다. 광복단원들은 때마침 피난민이 많이 모여들던 풍기에 피신해 온 사람 가운데서 註46) 의기투합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풍기광복단은 의병적 인사라는 점과 사회경제적으로는 이미 생활 근거를 상실한 유랑인사들이 조직하였다는 점이 특색이다. 註47)

그에 비하여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주의적 인사로서 중산층 이상의 인사가 독립군 지원활동을 위하여 1915년 대구에서 결성한 것이다. 註48)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이영국李永局·박상진朴尙鎭·안희제安熙濟·남형우南亨佑 등이 시회詩會를 가장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인사임을 말해 준다. 이는 실제로 단원들은 경상북도 서남부와 경상남도 지방에서 유산가有産家로 명망이 높던 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사상에서 주목할 것은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를 봉사奉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註49) 이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10년대 국내외 민족주의가 공통적으로 대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다. 註50)

이러한 국권회복단의 단원 가운데서 과격한 인사가 풍기광복단과 합류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그 외에 대부분의 단원은 시회를 가장하여 활동하면서 각자의 지방에서 3·1운동을 추진하였고 혹은 유림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송달을 지원하기도 하다가 그해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국권회복단은 명칭으로 보면 독립군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나 내용으로 보면 시민적 계몽주의 단체였던 것이다.

대동상점大同商店은 영주에 있던 잡화와 곡물상이었다. 1915년에 박재준朴齊璿·권영목權寧睦 등 전직 훈도들이 자금을 모아 상점을 만들어 자금도 증식하고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으로도 이용하며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점 설치의 방식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주요 양식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앞의 조선국권회복단도 그의 연락 거점을 대구 서상일의 태궁상회太弓商會와 부산 안희제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거점으로 하고 활동했으며, 후술하는 대한광복회도 대구 박상진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에 본부를 두고 각처에 미곡상을 설치하여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 대동상점도 대한광복회의 연락소가 되었지만 이러한 상점을 설치하여 거점으로 이용하는 것은 군자금 출납을 위장하는데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회사령」으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이 봉쇄당하고 있던 1910년대에 잡화상이나 곡물상 외에 다른 경영체를 가질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보여준 중산층적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대동상점의 비밀활동은 1918년에 발각되었다. 註51)


3. 대한광복회


대한광복회 註52)는 앞에서 말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모여 1915년 7월에 대구에서 결성한 혁명단체였다. 한말 의병장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이 주도하여 처음에는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16년부터는 충청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전라도 등지로 확대하여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박상진·채기중·우재룡·한훈 등 당초의 지도자 외에도 충청도의 김한종金漢鍾과 황해도의 이관구李觀求와 전라도의 이병호李秉昊 등이 가입하여 새로운 중심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이석대李奭大·김좌진金佐鎭 등은 박상진 총사령 밑의 부사령으로서 만주에 파견되어 있었다. 회원들은 양반출신과 평민출신이 함께 어울려 있었고 직업도 다양하였다. 註53) 회원들은 유창순·한훈·우재룡·양제안梁濟安 등 의병 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박상진·김좌진·이관구 등 신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서 박상진·이관구는 신해혁명에도 참가한 혁명적 인사였다. 그리고 박상진 등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와 이관구는 대종교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註54)

이와 같은 구성원의 성격으로 볼 때, 대한광복회는 근대 지향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니 이 기회에 국왕 없는 공화국 건설을 목표하고 있었으며, 註55) 국내의 100여 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일시에 봉기하는 혁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경험한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은 것을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논리였다. 이를 위하여 대구·영주·천안·광주·삼척·인천·서울·해주·신의주·안동만주·장춘 등지에서 잡화상이나 미곡상, 아니면 여관을 설치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처의 거점에서는 무기도 수십 정 확보하였고 만주에 인재를 보내 훈련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회원의 활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이었다. 註56)

1915년 대한광복회가 결성될 때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세계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채응언의 의병 등 아직 의병전쟁이 종식되지 않고 있었고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 등의 복벽주의운동도 전국의 화제로 퍼져 있었으며, 광무황제의 망명계획이 발각되어 경향京鄕의 뜻있는 인사에게 민족적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때에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혁명전략의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향이었고 발전적 모습이었다.

광복회는 상동上東광산, 직산稷山광산, 경주慶州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전국의 부호명단을 작성하여 모금하기도 했고, 그에 응하지 않은 칠곡 장승원張承遠·아산 박용하朴容夏·보성 양재성梁在誠·벌교 서도현徐道賢 등의 악성 부호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악성 부호의 처단은 1917년과 1918년초에 있었던 것이다. 처단 현장에는 선언장宣言狀 註57)을 두었기 때문에 광복회의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그에 따라 일제의 수사도 강화되어 1918년초부터 관계자가 발각되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파괴되었다. 註58) 그리고 잔존한 회원은 한훈·우재룡·김상옥金相玉처럼 만주로 망명하여 암살단暗殺團·주비단籌備團 등을 결성하여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전후하여 의협투쟁을 전개한 경우도 있었으며, 김상옥처럼 의열단義烈團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의협투쟁의 측면에서 보면, 대한광복회가 암살단과 의열단으로 이어지는 그 선구적 조직이라 할 수 있다. 註59)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그리고 대동상점 등의 독립운동조직을 총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혁명단체로서 그 이념도 새롭게 발전한 공화주의의 단체였다. 그 점에서 광복회는 파괴된 뒤에도 그 이듬해에 일어난 3·1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폭넓게 형성시켰다고 할 것이다.


4. 조선국민회


1915년에는 채응언의 의병진과 민단조합이나 신한혁명당의 국내조직이 파괴당하여 독립운동의 그늘진 측면도 있었지만 전술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의 발전적 조직이나 후술하는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국권회복자립단國權恢復自立團 등이 결성되고 있어 독립운동의 성장측면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 조선국민회는 1915년 3월 평양에서 결성한 단체였다. 이 지방은 전술한 105인사건으로 민족 지도층이 크게 타격을 입은 지방으로 그 후 대부분의 인사는 해외로 망명하거나 좌절하고 말아 독립운동 조직이 새로 탄생하기가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 따라서 1915년에 결성한 조선국민회는 새로운 세대인 청년 학생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105인사건은 양기탁·안창호 등 신민회 계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의 수난이었는데 조선국민회는 미주의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에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관련된 조직으로 그의 국내 지부와 같은 것이었다. 註60)

숭실학교 출신의 장일환張日煥이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을 만나 뜻을 같이하고 귀국하였다. 장일환은 평양에서 배민수裵敏洙·백세채白世彬 등과 협의하고 1915년에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자신이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백세빈은 만주지방을, 오병섭吳炳燮은 경상도, 노선경盧善敬은 황해도, 강석봉姜錫奉은 전라도를 맡았다. 註61) 대개 숭실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되었고, 숭실학교가 선교학교였으므로 기독교인이 많았다. 하와이 국민군단 국내지부로 형성되었으므로 특별한 강령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몇 가지의 실행세칙이나 서로 간에 교통할 연락 암호는 필요했다. 註62) 그리고 황해도·경상도·전라도로 국내조직의 확장을 시도해 보았으나 군산이나 목포에 다소의 근거가 마련되었을 뿐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군자금 수합과 무기 구입을 진행하다가 1918년 2월에 발각되고 말았다. 註63)

조선국민회는 신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던 청년 학생들만에 의해서 만들어진 독립군적 단체로 국내에서는 최초의 것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국민회가 계몽운동과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註64) 독립군적 조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숭실학교 등의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의 조직이라면 계몽주의적일 가능성도 있으나 독립전쟁론으로 일관했던 박용만 계열이라는 점, 암호까지 사용하던 비밀결사라는 점, 그 암호의 구성은 독립군적 성격의 것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계몽주의적인 면이 있었더라도 분명히 독립군적 조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이 1914년에 연해주에서 결성한 이상설 중심의 대한광복군정부와 밀접한 관계 위에서 조직된 것이라면 註65) 대조선국민군단과의 연락으로 만들어진 평양의 조선국민회가 1915년에 대한광복군정부의 후신으로 탄생한 신한혁명당이나 그 밖의 만주의 독립군과 어떤 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야하는데 아직 규명된 바는 없다. 그러나 백세빈이 안도현安圖縣으로, 노선경은 삼원포三源浦로 갔고, 배민수는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한 동정들을 보면, 1917년 박용만이 중국을 다녀간 것을 전후하여 특수한 계획이 진행된 것 같다.

1917년은 러시아혁명, 미국과 중국의 참전과 러시아 권역의 핀란드·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의 독립선언에 이어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이 고조되는 등,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상해의 신규식·조소앙趙素昻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해이니 註66) 그 선언에 참가한 박용만과 그 계열인 조선국민회가 어떤 관련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국민회가 1918년초에 발각된 것도 그와 유관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조선국민회와 같은 무렵에 있었던 기성단箕城團과 註67) 선명단鮮明團도 註68) 비슷한 담당주체의 성격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