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1910년대 독립운동/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6. 12:41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1910년대 독립운동

망명정부 수립계획

혁명전략의 대두와 대한광복회

민족교육의 강화

종교계의 반성

노동운동의 대두와 민중조직


1. 1910년대의 독립운동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국가란 현실적으로 국민민족의 정치조직으로 존재하는데, 정치조직은 곧 정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대한제국 정부의 해체였다. 일제가 그것을 계획하고 추진한 것은 1894년부터 본격화하였다. 그러므로 1894년부터 1910년까지는 반식민지 또는 준식민지 상태에 있던 한국이었다. 註1)

당시 한국정부 담당자 가운데 정합방政合邦이란 해괴한 기대를 가진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峻·이용구李容九 등과 같은 인물도 있었다. 말하자면 스튜어트왕조 때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혹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같은 엉뚱한 망상이 아니면, 영국의 인도통치처럼 간접식민통치가 이루어져 그들이 일황日皇 밑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대한제국을 멸망으로 몰아갔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은 국민의 의지와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와 그의 추종자 몇몇 사람에 의하여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그리고 스튜어트왕조나 인도 식민통치체제도 아닌 일제에 의한 직접 식민통치가 강요되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소멸과 함께 곧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면리까지 통할하는 식민행정의 전달체계를 확립하고 조선군사령부가 지휘하는 헌병경찰이 전국을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적 조직을 모두 파괴하고 또 새로운 성장을 봉쇄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부터 동리계里洞契 등을 통하여 성장한 동리자치里洞自治 기능을 말살시키며 식민적 행정조직으로 개편해갔다그의 완성이 1914년의 행정개편임. 그러한 식민체제의 경제적 기반 즉, 수탈체제의 완성을 위하여 조선토지조사사업과 1911년 ‘회사령’을 발포 강행하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및 조선금융조합을 통하여 수탈금융체제를 확립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의 기본 목표는 경제수탈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의 특징은 그 경제수탈의 영원한 계산이기도 한 민족동화를 획책하고 있었던 점이다. 그것은 식민문화의 확림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조선교육령’·1915년 ‘포교규칙’·‘조선반도사편찬사업’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민족의 독립운동도 갖가지로 전개되었다. 대한제국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운동도 있었고, 이제는 민족의 운명을 군왕에게 맡길 수 없다는 관점에서 혁명절차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일으킨 운동도 전개되었다.


1. 독립운동의 정비와 105인사건


1904년부터 대한제국의 멸망 절차가 진행되자 광무농민운동이 의병운동으로 전환하여 註2)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해 8월에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가 결성되면서 계몽운동도 전개되었는데 註3) 이때의 구국운동은 급한 나머지 정비되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지하에서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체제정비가 필요했다. 나라는 망했으나 당장에 독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때 이회영李會榮·이상룡李相龍·허운·홍범도洪範圖처럼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를 건설한 경우도 있었으며 또 각종 사립학교의 통폐합과 정비 등으로 민족교육의 발전을 도모한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 독립운동의 체제정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을 정비하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한 정비작업의 특징은 의병전쟁을 독립군 조직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었고, 계몽운동을 반성하면서 독립군 양성교육으로 개편하는 것이 중심적인 추세였으나 한편 채응언처럼 의병전쟁을 그대로 고집한 경우도 있었고 또 계몽주의에 머무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고집한 경우 외에는 중산층 인사가 시민적 특성을 보이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이념상으로는 발전 특성을 보이면서도 조직에서는 분산적이고 단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직상의 한계는 일제의 탄압에 연유한 바가 컸다. 일제는 한말부터 민족적 사회조직의 발생과 성장을 파괴해 왔는데, 1910년에 이르러는 사회조직 봉쇄정책이 더욱 철저하였다. 기왕의 조직이 파괴당한 것은 물론이지만, 민족적 조직의 기미만 발견되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梁起鐸·주진수朱鎭洙 등의 보안법 위반에 이은 105인사건이었다. 처음에 일제는 안명근安明根의 독립군 모집과 경비조달을 위한 활동정보를 입수하고 註4) 1910년 12월 그와 관계한 황해도 일대의 애국지사들 160여 명을 검거했는데, 註5) 그것은 한말 이래 의병과 계몽주의자가 많았던 황해도 일대의 민족조직을 파괴하는 작업이었다. 註6)


105인 사건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


그에 이어 1911년 1월에는 양기탁·주진수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급 인사 33명을 검거하였다. 신민회 인사의 망명은 5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첫번째가 1910년 5월 청도회의靑島會議를 개최한 것이었고, 다음이 청도회의 실패 후 이회영·이관직李觀稙 등의 서간도西間島 개척이고, 셋째가안동 일대 인사의 망명인데 그들은 양기탁 등의 검거가 진행되던 소란 중에 망명하였다. 註7) 다음이 양기탁 등 서울의 중앙간부들의 망명계획인데, 그들은 망명 직전에 모두 검거되었다. 註8) 마지막의 것이 서북지방 회원의 망명인데 그들은 앞의 안악사건과 뒤에 말하는 105인사건으로 모두 검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05인사건은 1911년 9월에 일어난 일이다. 그 해 7월에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에 대한 재판을 끝낸 일제가 그와 관련 있는 인사가 평안도 일대에 많다는 판단 아래 사전에 그들을 검거하여 민족 기반을 파괴한다는 계산으로 감행한 조작사건이 105인사건이다. 당시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 암살사건’이라 조작하여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하였다. 註9) 1년간에 걸친 악형 끝에 1912년 9월 105명에게 실형을 언도함으로써 105인사건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당시의 인사들은 각 지방의 중류 이상의 지도자들로서 독립운동의 구심체적 위치에 있던 인사였다. 註10) 원래 일제가 조작한 것이었으므로 재판에 불복하여 1913년 7월에 고등법원 판결에서 윤치호尹致昊·양기탁·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옥관빈玉觀彬 등 6명 외에는 모두 풀려났지만, 그로 인한 민족사회의 타격은 컸다. 그러니까 일제로서는 사건을 조작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의 계획이 크게 위축된 것은 물론이고, 또 독립운동 전반에서 그를 주도할 중산층의 일각, 특히 계몽주의 좌파左派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후일 국내 독립운동의 담당주체 가운데 시민적 중산층의 거취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1910년대 초 독립운동의 체제는 일제에 의해서 파괴당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귀족령에 의하여 76명이 작위를 받게 되어 그들이 조선귀족회를 만들었고, 註11) 그 밖에도 이른바 은사금을 받은 많은 인사들, 그리고 1911년 이후 전국의 군郡대표를 일본을 방문케 하는 것 외에도, 만주의 재만동포로 하여금 이른바 ‘모국방문단’을 만들어 수시로 방문케 하는 등의 친일조직이 확산되어 가는 속에, 독립운동의 조직이나 민족적 분위기의 성장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독립운동의 정비나 그 조직의 성장 발전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민족적 분위기가 일어나 독립운동의 이념이나 조직의 한계성을 유착시키는 것이 사실이었다.


2. 의병전쟁의 두 계열과 흐름


1) 의병의 민중적 항전

한말 의병전쟁은 1909년 가을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한 일제의 야만적 반격으로 국내에서는 쇠퇴해 갔다. 註12) 그러나 이는 그전에 국민전쟁과도 같은 의병전쟁에 비하여 쇠퇴했다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의병항전이 끝났다는 말은 아니다. 1910년 이후에도 의병의 유격전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1908년부터 의병이 해외로 이동하여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서 술장수·엿장수·글방 훈도 등으로 잠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10년 후 식민통치 하에서 의병이 전개한 최후항전은 특히 식민성 봉건체제 즉, 가례나 지키면서 안주하던 조선조의 귀족인 양반가정, 그중에도 당시는 토지조사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그 토지측량에 만족하고 있던 부호의 가정에 대한 공격이 치열하였다. 註13) 그러한 집이 많은 마을이면 마을도 공격하였다. 거꾸로 의병의 마을이면 마을사람들이 일제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다. 註14)

이때에 각 도에서 활약한 주요 의병장은 경기지방에서 전성근田聖根·최영우崔永宇, 강원지방에서 강두필姜斗弼·정경태鄭敬泰·신태여申泰汝·박치도朴致道·함병태咸炳台·이진도李鎭道·박문술朴文術·권태정權泰鼎·이기연李基淵, 충북에 최익삼崔益三·경북에 노병직盧炳稙·사상두史相斗·김병일金炳一·권욱영崔旭永·김완태金完泰·유시연柳時淵·최성천崔聖天·한명만韓明萬·윤국범尹國範, 경남에 안범성安範成·신임전申任典·신석원申錫元·이용운李龍雲, 전북에 이석용李錫庸·유장렬柳壯烈·박한국朴漢局·정세창鄭世昌·김학준金學俊·이의실李毅寬, 전남에 정세창鄭世昌·김학준金學俊·김수정金守正, 황해도에 한정만韓貞萬·채응언·이진룡李鎭龍·김정언金貞彦·김정안金貞安·고달순高達順, 평북에 한응정韓應貞·이진룡李鎭龍, 평남에 동종찬董宗贊·김재화金在化·홍석준洪錫俊·이용석李龍石·김이도金利道 등이었다. 註15)

그리고 1911년과 1912년 양년에 강원도에서만도 교전회수가 43회였다고 한다. 註16) 그와 같이 중부 이북 지방에서 의병항전이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1915년까지 양서兩西 지방에서 100명의 부대로 항쟁한 채응언의 활약은 의병전쟁사의 최후의 결정結晶이기도 했다. 註17) 그렇다고 산발적인 몇몇 의병의 활약조차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註18) 실제에는 1910년대에 걸쳐 간헐적으로는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묵암비망론默菴備忘錄』이나 『장효근일기張孝根日記』 등을 보면, 의병에 관한 기사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註19) 이와 같이 식민통치 하에서도 의병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을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하여 단순한 초적草賊, 강도의 종류에 지나지 않아 이미 정치적 의미가 있는 폭도는 한 사람도 없다” 註20) 할 만큼 의병들은 일본관헌은 물론 식민통치하에서 안주하는 부호나 지주, 그리고 관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구한말부터 나타난 추세로서 민중의병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것을 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식민적 안목에 불과한 것이다. 더구나 1910년대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던 기간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러한 민중적 항쟁은 사회경제적 의미까지 포함하여 뜻있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병의 기질이 잠재해 있던 기층사회였으므로 3·1운동이 평화적 시위로 계획되었더라도 대중화 과정에서 폭력시위로 확대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2) 척사유림의 의병조직

위와 같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도 의병의 항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하에서 그러한 의병을 조직적으로 재정비하여 총독부를 축출하려는 유림들의 의병 계획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임병찬林炳瓚을 중심으로 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편성이었다. 유림의병의 계획은 이때에도 척사적이었다. 즉 척사유림의 복벽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국권강탈을 당하여 척사유림의 향방은 망명과 자정自靖과 의병의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의병조직은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民團組合이 대표적이었다. 註21)

독립의군부를 결성한 임병찬의 註22) 계획은 광무황제의 밀조密詔에서 비롯되었다. 1912년 9월 이식과 1913년 1월 이인순李寅順이 의병 규합의 밀조를 가져왔으므로 임병찬은 아들 응철應喆을 상경시켜 확인하니 또 다시 밀조를 가지고 옴으로써 註23) 계획에 착수했다. 임병찬은 “정이품 자헌대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正二品 資憲大夫 獨立義軍府 陸軍副將 全羅南北道 巡撫總將”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8도에 도 대표를 두고 우선 전라도에는 각군 대표까지 선임하였다. 註24) 자료에 의하면 총인원 327명또는 53명 모두가 유생이었다. 이는 독립의군부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지만 1914년 5월 일제에 발각됨으로써 의군부의 조직은 봉쇄당했다. 이에 유림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독립의군부는 전국 각 군 조직을 마친 후 조선총독부에 대하여 일시에 축출 각서를 보내고, 일본정부와 외국정부에도 항의각서를 송달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이었으며 동시에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한다는 것이었다. 註25) 따라서 독립의군부의 조직 파괴는 위정척사적 복벽주의 세력이 붕괴하게 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에 유림으로 주목받은 인사가 많이 유배당했고 임병찬도 거문도巨文島 유배 중에 1916년 5월 23일 순국하였다.

독립의군부가 전라도와 충청남도 등 서남부 지방을 중심한 복벽주의 유림의 단체라고 하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등 동남부 지방의 복벽주의 유림 조직은 민단조합이었다. 그런데 민단조합은 독립의군부가 해제된 후에 결성된 탓인지 몰라도 그 규모가 작다. 그것은 지방적 특색에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충북의 척사유림은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 이후 그와 함께 연해주나 만주로 망명한 경우가 많았고, 아니면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 등의 망명계열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註26) 그리고 신규식申圭植·신채호의 가문이나 홍범도의 가문처럼 註27) 문중 단위로 신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일제하에 위정척사적 유림으로 잔존한 경우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은 경상북도에서도 비슷했다. 을미의병의 중심이던 안동유림의 이상룡·유인식 등이 1904년부터 계몽주의자로 변신하여 1911년에는 신민회를 따라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註28) 또 하나의 척사계열인 허위의 유족들도 그와 같았다. 註29) 그러한 분위기에 따라 진작부터 국내에서는 유림 출신 청년의 공화주의 조직이 발달하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해 갔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척사적 복벽주의 단체는 민단조합 정도의 작은 규모로밖에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단조합은 1915년 문경聞慶 새재鳥嶺 주변에 거주하던 유생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는데 한말 의병장인 이인영·이강년과 인연이 깊은 이동하李東下·이은영李殷榮·김낙문金洛文·이시재李湜宰·최욱영崔旭永 등이 조직했으나 군자금 모집과정에서 1915년에 발각되고 말았다. 註30) 이와 같이 척사적 복벽주의는 계획단계에서 봉쇄당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복벽운동이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즉 복벽주의의 대중적 기반은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척사유림의 의병조직은 민단조합으로 끝을 맺었다. 註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