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문화 민족주의/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5. 08:48

3.문화 민족주의


사회진화의 주체가 원형에서는 인간이었겠지만 그의 집단적 실체로는 국가냐 민족이냐를 구분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1907년 말부터 계몽주의가 좌우파로 분화될 때 우파는 대개 진화의 실체를 국가로 인식했고, 좌파는 민족으로 이해한 경향이었다. 국가로 이해했을 때는 국가의 자강론으로서 정치 경제의 이론만으로 족할는지 모르지만, 민족을 실체로 인식했을 때는 민족 내재적 전통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내재적 전통을 체계화하고 강화함으로써 진화적 힘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재는 “국가가 개시旣是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라고 註83) 하면서 국가는 민족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상적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부여족我扶餘族의 역사와 왕통王統이 초멸銷滅되었을지라도 타족他族을 아사我史에 참입參入함이 불가不可하거든” 註84)이라고 말할 정도로 국가보다 민족의 주체의식이 강하였다.

그런데 민족의 존재표상이 무엇이었던가에 따라 현실적으로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양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 보면 민족은 혈통·국가·종교·어문·역사전통·생활풍속 등의 공통성으로 표상되고 있다. 때문에 민족주의나 민족운동은 국가적 정치·경제·사회의 자주 자강운동으로 타나나는 것 외에 종교·어문·역사민족주의로 표현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것은 민족적 응집력을 제고시킨다는 뜻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다종교국이어서 종교지향성이 약하기 때문에 종교민족주의가 어문이나 역사민족주의보다 약하게 표현되었고 그것은 한말 계몽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 어문민족주의

한국의 어문은 한말에 국문으로 불렀는데 일제하에 일본어가 국문이 되었으므로 한글이라는 호칭이 나오게 되었다. 말과 글에서 말은 오래 전부터 민족어의 전통을 이어왔으나 글은 신라 때 민족어 운동의 싹이 터 이두문吏讀文이 나온 바는 있었으나 고려 때 한문 과거제가 정착하면서 한자 민족의 외형이 강제되어 왔다. 세종 때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되었으나 한문 과거와 그에 따른 한문교육 등 한문체제가 그대로 고수되어 한글은 한문 이해의 표기나 내간문內簡文의 위치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한글소설이 퍼져가면서 개화인사들이 각성을 촉구해 『한성순보漢城周報』가 국한문을 혼용한 바 있고 이어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역시 국한문으로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문사용이 제도화되는 것은 갑오경장 때 칙령 제1호에 의한다. 註85) 이때 어문이나 역사본국사나 연호조선기원 등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즉 그것은 한문지배체제에서 어문의 독립이었고, 중국부용적 중화사관에서 한국사의 독립이었고, 중국연호 사용의 종결과 조선기원의 독립적 사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문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이 국문으로 간행된 데에서 비롯되고 그 뒤를 이어 1898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협성성회보』와 그것이 발전한 『매일신문』의 간행이었는데 註86) 여기에는 주시경의 활약이 컸다. 이때는 극소수 인사에 의한 어문운동에 불과했다. 그리고 소수의 학교를 중심한 것이어서 극히 제한적 범위의 일이었다.

1904년부터 계몽운동이 일어나고 언론과 교육이 광범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자 보다 많은 잡지와 교과서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거의 국한문으로 저술되었다. 가령 국사 교과서의 경우 1906년부터는 예외 없이 국한문을 혼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7년 학부에 국문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결성되어 어문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중에 국어연구학회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문법 정리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1907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개설된 하기국어강습소夏期國語講習所를 비롯한 동명학교東明學校·명정학교明正學校 등 전국 각 학교에서 실시한 국어강습으로 박태항朴兌恒·박재준朴齊璿·장지영張志映·이규영李奎榮·박준성朴俊成·최현배崔鉉培·권덕규權悳奎 등의 새로운 국어운동자가 배출되는 결실을 얻었다. 註87) 이와 같이 보면 국어운동을 1908년부터 조직적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따라서 어문민족주의도 1908년에 이르러 운동조직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어문운동을 통하여 한글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니 한말 계몽주의적 어문운동은 민족어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그러나 구국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때는 너무 늦었고 또 주도층도 국한된 범위여서 구국역량의 축적에는 한계를 면할 수 없었다.


2. 역사민족주의

근대에 한국민족주의의 과제는 먼저 중화적 세계주의에서 탈피하고 그의 잔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에서 독립하는 것이고, 이어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과제는 한국근대사학 성립에서도 투영되어 있었다. 즉 중세적 세계주의중화사관와 중세적 윤리사관經史一體에서 민족사학을 註88) 정립해 가려고 한 시기에 일제의 침략사학을 맞아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한국의 근대사학이었다.

한국의 근대사학은 조선 후기 실학사서가 시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註89) 경사일체에서 역사학의 독립을 시도했고, 중화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사학을 서술하려고 노력했고, 실증적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 흔적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아직 만족할 만한 것은 못되고 또 중세적 명분론이 특히 삼한정통론을 중심으로 강하게 남아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나마의 근대적 시도도 세도정치기의 반동체제로 봉쇄되었고 그이후 시기인 개항 전후에는 개화인사의 외향성으로 말미암아 내재적 문제인 자국사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여 실학사서를 계승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註90)

그러다가 1894년 갑오경장과 더불어 자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듬해의 「소학교령」·「한성사범학교령」·「성균관경학원규칙」에 따라 교과과정으로 ‘본국사’를 강의해야 할 당면과제에 봉착하여 1895년에 『조선역사朝鮮歷史』·『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조선사략朝鮮史略』 등을 출간하니 실학사서 이후의 공백기를 극복할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책은 관찬사서였다. 1899년에도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대한역대사략大韓歷代史略』·『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의 교과서가 나왔으나 역시 학부의 관찬사서였다. 사찬사서가 출간된 것은 1902년 김택영金澤榮의 『동사집략東史輯略』부터인데 그 후에는 관찬체제를 탈피한 사서의 간행이 진행되어 1904년부터 부상한 계몽주의에 따라 많은 학교가 설립되고 각급학교에서 한국사 교육이 활발하게 실시된 그 수요에 따라 새로 간행된 사찬교과서가 공급되고 있었다. 註91) 그리고 국민교육회나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주의단체에서도 국어교육과 더불어 국사교육을 구국교육의 핵심 교과목으로 보고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개화기 간행되었던 역사서(좌로부터 『역사집략』, 『대동역사』

1902년의 『동사집략』부터 민족사학이 일제의 침략사학에 밀려 그 아성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註92)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표현하는 데도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특히 일제의 침략의도에서 서술하고 있는 가령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같은 것을 고증도 없이 수용함으로써 구국적 계몽주의의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註93) 그리고 앞에서 국어연구학회와 같은 토론의 광장도 마련하지 못하여 학문적 반성을 가질 기회조차 없이 식민사학에 전락해 갔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면서 민족주의사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 1908년 신채호의 『독사신론』이었다. 註94) 그러나 『독사신론』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글이었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식민사학에 감염된 교과서는 각급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의 역기능이 만연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사신론』이 계몽주의에 순기능의 역할이 있었다고 해도 구국의 차원에서는 이미 때늦은 외침이었다. 이렇게 보면 계몽운동에서 역사민족주의는 구국운동의 요구에 부응할 내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종교민족주의

민족은 어문과 국가와 종교가 같아야 형성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종교가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신의 지배사회로 인식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여 종교가 민족 형성의 요인이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전통시대에 제1계급이 종교 성직자가 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원시종교인 무교부터 온갖 외래종교가 그의 정치사회적 위치를 바꿔가면서 전통종교로 온존되어 왔고, 제국주의와 함께 전파된 천주교·개신교·성공회·희랍정교·일본신교·일본불교 등도 차례로 상륙해 한말에는 전통종교와 함께 선교되고 있어 세계에서 유례없는 다종교국이 되었다. 즉 전통적인 종교무관심의 풍토가 어느 종교도 배타적이 아닌 다종교국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말에 이르러는 종교와 달리 전통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예론도 붕괴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은 제국주의침략에 대처해야 할 민족의 응집력을 필요로 했고, 더구나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두 각기의 종교를 앞세우고 침략하던 객관적 조건을 직시하면서 한국적 종교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동학교가 창도된 바가 있었지만 1904년부터 일진회로 변신하여 반민족적 행각을 보임으로써 동학은 민족적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때에 박은식을 중심한 유림 일각에서 대동교大同敎를 제창한 바 있었으나 그것도 전통적 귀족성으로 말미암아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서양인은 여호와Jehovah신을, 일본인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을 표방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니 그 속에서 신궁봉경회神宮奉敎會 같은 매국 조직까지 출현하여 종교적 위기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단군교檀君敎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단군교는 1909년에 창도됐는데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정훈모鄭薰模·김인식金寅植 등 그 창시자들은 일본을 몇 번이나 여행한 계몽주의자로서 일본에서 그 많은 신사神社를 육안으로 보고 어떤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다. 단군교의 창시자인 나철은 처음에 민간 차원에서 구국외교에 관심을 쏟았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후 도미외교를 계획한 바도 있었으나 좌절되고, 1905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오기호 등과 같이 도일한 바 있었고, 1906년 10월부터 12월까지 강기환姜基煥과 함께 재차 도일하여 일본 조야를 상대로 민간외교를 편 바도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의병적 방도로 바꾸어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김동필金東弼·이용채李容彩 등과 함께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을 조직하여 1907년 3월 25일 결행했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18명이 검거되었고 나철은 그 해 12월까지 옥중에 있어야 했다. 註95) 출옥한 직후인 1909년 1월 15일에 창시한 것이 단군교였다.

때마침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의욕이 고조되고 있었고 그 민족주의사학이 단군의 위치를 확고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던 터였는데, 단군교의 제창은 민족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측면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국어연구의 중심인물인 주시경이 개신교를 버리고 단군교로 개종함으로써 그 여파가 널리 퍼져 갔다. 주시경은 외래종교의 선교를 정신적 침략으로 이해하였다. 註96) 그리고 일제는 식민사학을 통하여 회유책의 일환으로 양국동조론으로써 일본의 시조신인 천조대신 동생素盞鳴尊의 아들 오십맹신五十猛神이 곧 단군이라 했다. 註97) 그에 따라 계몽주의단체의 대표격인 대한자강회 고문이었던 대원장부大垣丈夫는 공공연히 양국인의 동조동종同祖同種을 말하면서 단군을 일본사에 부용적 위치로 전락시켜 갔다. 註98) 민족사학조차 그에 물들어 가던 당시에 註99) 단군교를 창시한 것은 민족주의의 정신적 측면에서 의의가 컸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더 많은 지사들이 단군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세를 발전시켜 갔다.

그러나 한편, 한말 구국운동의 위치에서 보면 내용 여하간에 때가 너무 늦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종교이론의 측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어 선교도 쉽지 않아 다른 종교세를 능가하지 못한 채 대한제국의 멸망을 맞아야 했다.

이와 같이 한말 계몽주의는 근대주의근대국가론, 사회진화론사회경쟁론, 국학적 민족주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그의 원류인 개화개명주의의 외향성보다 주체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러므로 시민민족운동의 사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국운동의 논리로 보면 산만한 점이 많아 대중적 민족역량으로 집약되는 데에는 한계가 컸고, 또 시기로 보아도 이론 정립이 이미 때늦은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계몽주의 구국단체는 많았으나 행동강령은 구호에 머물렀고 실천논리로 구체화되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그리하여 구국운동으로 작동하면서 오히려 일제침략에 함몰해 간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구국논리가 더 선명한 유생의병儒生義兵이나 농민 또는 민중의병과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한말 구국운동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데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통합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실제는 서로 대립되었는데, 그 이유가 적어도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념상의 차이가 존재한 그 이유는 담당주체의 사회경제적 이익과 전통적 체질의 상이성에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07년 후반부터 계몽주의의 방략이 수정되면서 민족운동의 강경론左派이 대두하여 시민민족주의와 민중민족주의가 만나고 있던 현상을 별도로 주목해야 한다.

이상에서 계몽주의의 변천과 그 사상적 특성에 대하여 살피면서 독립운동사적 의미에 대하여도 추적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먼저 계몽주의 조직이 등장하는 것은 1904년 국민교육회부터라는 점을 거론하고 그것은 그에 앞서 있던 보안회와 헌정연구회 같은 직접적 정치조직의 길을 피한 우회적 구국운동단체로 출발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와 같은 정치우회성은 그 뒤의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 그리고 5학회 등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니까 1904년부터의 준식민지 상태와 대한제국의 군주정치라는 현실체제에 대한 긍정적 기초 위에서 사회진화론적 계몽주의가 추구되었다는 것이 한말계몽운동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907년 정미조약 등에 이르러서는 좌파적 분화가 일어났다. 즉 정미조약 등을 망국사태로 인식한 계몽주의자들은 우선 일제의 식민사태와 융희황제의 무력한 군권 하에서는 종래와 같은 계몽운동이 구국의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지하조직인 신민회나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게 되었고 아울러 계몽운동의 방략도 의병전쟁의 방향으로 수정을 가하면서 독립군기지개척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에 우파 계몽주의는 식민체제 속으로 함몰해 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은 별다른 정치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진화만을 막연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적 진화를 단념한 좌파의식은 진화의 주체를 국가가 아닌 민족으로 보고 새로운 방향모색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자들의 민족적 위상은 그들이 근거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그들은 거의 지주 자산가였다. 그러므로 체제를 전면 부정하면서 자신의 지주 기반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의 속성 때문에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한 경제이론 즉 민족경제로서의 상공업적 인식도 창출하지 못하였다.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이나 광무사 같은 철도의 민족화를 기도했으나 시기가 늦었던 것은 물론, 일제의 농간으로 어느 것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민족적 부르주아로서의 길을 빼앗겨 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따라서 그들에 의한 시민민족주의가 민중민족주의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 1907년 여름부터 좌파적 지향이 민중과 만날 수 있는 여지는 있었고 또 만나고도 있었으나 계몽운동의 대세는 아니었다. 때문에 1910년대의 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정미조약 등의 망국사태 이후에 발생한 좌파노선에서는 사회진화론의 실체인 민족의 더 결속된 역량을 위하여 어문과 역사와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강하게 쏟으면서 국학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체계화시켜 갔다. 물론 국학 또는 국학민족주의가 종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민족운동 조직으로 의미 있게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그렇게 빨랐던 것이 못되었다. 오히려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는 우선 적기를 상실한 반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 대두 시기1904도 그렇고 좌파가 분화된 시기1907도 그렇다. 그리고 계몽운동은 체제 속에서 전개한 구국운동이었으므로 독립운동상의 의미도 같은 때의 의병전쟁에 비하면 우회성의 한계를 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1894년부터 반식민지 하에 놓이게 되었고 1904년부터는 준식민지화된 대한제국이었는데 그러한 현실인식 자체부터 의병만큼도 정확하지 못한 탓이 큰 원인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원인은 계몽주의의 담당주체였던 시민계층이 특히 지주의 경제 기반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근대상공업이나 근대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리적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때문에 구국운동을 망국일 아침까지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의 원인遠因은 시민층이 중층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시민민족주의를 만족스럽게 발달시키지 못했다는 데에도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시민민족주의의 역사적 임무였고 또 역할이기도 한 대중문제나 그 지성을 수용하지 못하여 민중민족주의가 별도로 존재한 우리의 근대사적 특징과 과제를 안고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 계몽주의는 시민민족주의를 성장시키는 데에 공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1910년대 독립운동에서 공화주의 이념이 성장하는 기초가 되어 대한광복회나 조선국민회를 탄생시켰으며 아울러 독립운동 방략을 새롭게 발전시켜 해외독립운동의 방향을 정착시켜 간 것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