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종교계의 반성/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6. 12:59

5. 종교계의 반성


한국 근대사의 지적 고민의 하나가 한국이 다종교 국가여서 종교적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한국사회는 단조로운 편이나 사상은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교·도교·불교·유교 그리고 풍수사상 등과 그 위에 제국주의 침략과 더불어 전래한 천주교·개신교·성공회 그리고 일제의 식민불교와 식민유교가 있었는데 그 밖에도 신흥종교로 동학교·대종교·대동교 등이 있어서 세계에서 대표적인 다종교 국가가 되었다. 때문에 종교통합을 기대하면서 조소앙은 1916년 대성교六聖敎를, 양기탁은 1920년 통천교統天敎를 제창하기도 했으나 뜻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서양 각국이 단일종교국인 것에 비하여 한국은 다종교로서 국민정신의 통일정립이 어렵다고 생각한 나머지의 계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10년대에 민족운동사의 의미를 기대할 수 있는 종교는 대종교·천도교·불교·개신교·유교였는데, 그 중에서 대종교는 1915년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에 의하여 종교활동이 금지당하여 만주를 비롯한 해외 동포사회로 전파하여 국내에는 그 조직이 있을 수 없었다. 유교는 일제하에서 경학원經學院과 각 지방의 향교로 이어지는 조직이 있었으나 그것은 식민적 유교조직의 구실 이상의 것이 못되었다. 민족적 양심은 곳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부지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1919년 「파리장서」를 꾸민 주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교단적 경학원 조직과 의병이나 자정론과 유관한 서원조직의 이원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3·1운동과의 관계에 대하여 논의가 분분하지만, 註84) 3·1운동은 천도교·불교·개신교가 계획했는데 경학원 조직이라면 몰라도 서원조직이 그에 합세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념상의 차이로 보아도 그렇지만, 다음에 보는 바와 같이 구한말에는 서로 배신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도교·불교·개신교는 구한말에는 민족적이 못되거나 혹은 한계가 있었다. 천도교(동학)는 제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까지는 농민종교로 있다가 그가 타계한 1898년부터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이종일·장효근 등의 지도체제에서는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1904년에는 일진회一進會를 만드는 오류를 범했고, 그 후 천도교로 개명하여 민족운동에 접근하려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민족종교의 위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8월 이종일이 중심이 되어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만들어 민족적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註85) 한말의 과오를 반성하고 민족종교의 체제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1916년 3월에는 민중혁명을 위하여 원로인사를 설득하기도 했고 註86) 1917년 러시아 2월혁명에 자극받아 註87) 천도구국단을 강화하여 민중봉기를 준비해 갔다. 그것이 교주 손병희의 신중론으로 연기되었으나 한말의 천도교에 비하면 큰 변화였던 것이다.

불교는 1877년 일본의 오촌원심奧村圓心이 부산에 동본원사東本願寺 별원을 설립한 이후부터 註88) 식민불교로 전락해 갔다. 註89) 1910년에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일본불교와의 합병을 협약으로 체결할 정도였으니 註90) 민족종교의 위치에서 탈락해 갔다. 그런데 1910년대에는 뜻있는 승려에 의해서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1913년에 발표된 한용운韓龍雲의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이었고, 1915년 중앙학림中央學林의 설립이었고, 1918년 『유심唯心』지의 간행이었다. 註91) 그런데 이 정도는 한용운·박한영朴漢永·백용성白龍城·백초월白初月 등 일부에서 일어난 변화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유교왕조에 대한 반발로 구한말에 일본불교와 야합해 가던 때와는 다른 면모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개신교는 한말에 거의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전도되었는데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따라 처음에는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그것이 1907년 무렵부터 만주에 대한 경제 침략의 문제로 미·일이 대립하여 미국 선교사의 태도도 다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말의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양심과 민족의 양심의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민족적이 못되었다. 註92)

그러한 개신교가 1911년 105인사건 때 서북지방에서 많은 교인이 고초를 겪으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선교사에게는 1915년 ‘사립학교규칙’이 태도변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때 교과과정에서 성경시간을 제외시켜 선교사업에 차질이 생겨난 것이다. 註93) 일제로서는 자기들의 신도神道에 의한 황도신민皇道臣民의 교육을 강행하는데 註94) 개신교가 저해요인이 되었으므로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개신교 교단은 조선총독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반면에 기독교의 양심과 민족 양심의 접합이 이루어져 갔다. 개신교는 한말의 오류를 반성하면서 민족교회의 형성에 길을 열어 갔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송죽형제회나 註95) 국권회복자립단이나 註96) 조선국민회 같은 조직이 교인들에 의해서 탄생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1910년대에 국내에 교단을 가지고 있던 종교로서 천도교·불교·개신교에서 민족적 방향 모색이 있어나고 있었는데, 그 교단들이 구한말에는 다 함께 반민족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1910년대의 변화는 반성적 시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 의해서 3·1운동이 계획되었다는 것은 3·1운동 자체로 보면 일정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구한말의 그들의 위치로 보면 기대하기 힘든 교단에 의해서 3·1운동이 계획될 정도로 반성적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민족사의 발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