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민족교육의 강화/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6. 12:56

4. 민족교육의 강화


한말 계몽주의운동의 중심 기능으로 전개된 구국교육은 나라를 구하려고 한 그 나라를 1910년에 잃으면서 구국에 실패하고 일제하에서는 민족교육으로 독립운동의 기초정립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가 독립운동은 아니지만 그의 기초나 민족적 역량 증대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한말 계몽주의의 전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중국이 신해혁명으로 공화주의가 달성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이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만한 역량이 없기 때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국내외에서 민족교육에 관심을 쏟은 이가 많았다. 민족교육이라고 해도 해외에서의 경우와 국내의 경우가 같을 수 없고, 국내의 경우라도 모두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지만, 그 민족교육의 전당인 사립학교가 후일 3·1운동의 거점의 구실을 담당한 사례가 많았고, 또 1910년대의 민족교육을 통하여 배출된 당시의 학생이 3·1운동 때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1910년대의 민족교육에 대하여 경시할 것은 아니다. 註69) 더욱이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의 취임 제1성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고 하면서 註70) 한국인을 일본인화시키는 민족동화가 일제의 식민정책의 원대한 계획이었고, 민족동화의 달성은 식민교육을 수단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여 민족어와 민족사 교육 등을 통하여 민족을 지킨다는 측면에서 민족교육은 독립운동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1. 민족교육의 체제정비


구한말의 계몽주의교육 또는 구국교육은 다급한 나머지 학교 건물을 세울 겨를도 없이 큰 기와집을 빌어 간판을 붙이고 방과 방을 교실로 해서 우선 체계 없이 교육을 실시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선교학교보다 민립학교가 더욱 그런 경향이 짙었다. 그런데 1910년 나라가 망한 뒤에는 새로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한 판의 전투가 끝난 뒷마당이어서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체제로서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그의 구속을 받아야 했으므로 외형상으로나마 그에 준거한 학교정비를 늦출 수도 없었다. 註71) 그리하여 1910년대에는 학교를 새로 설립하는 것보다 기왕의 학교를 정비하여 내용의 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조정하였다. 註72)

그리고 교과운영도 전문화된 교사를 배정하고 특히 이때 교훈·교가·교표를 만들어 교육이념을 정립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구한말에 대개의 민립학교는 교훈·교가·교표도 없었는데 1910년대 초에 와서만든 것은 이때에 교육이 정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註73) 체제는 정비되어도 교육내용은 어려움이 많았다. 일제의 식민교육에 대항한 민족교육으로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남궁억南宮檍은 『조선이야기』, 장도빈張道斌은 『국사』를 비밀리에 저술하여 보급시켰고, 혹은 원영의元泳義처럼 자신의 『동국역사東國歷史』를 허리춤에 넣어 교실에 들어가 가르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겪는 수도 많았다. 한영서원韓英書院 개성, 온천학교溫川學校 鏡城, 일신재日新齋 利原, 문명학교文明學校 영흥에서 애국창가집이 발각된 것이 그것을 말한다. 註74) 반면에 『학지광』 같은 간행물을 통해 보면 당시의 지식인에게 자치론의 사고가 널리 깔려 있는 경향은 그때의 학원문제를 규명하는데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점이다. 즉 민족교육을 볼 때는 그 양측면을 의식하고 살펴야 하는 것이다.


2. 학생운동 단체의 대두와 조선산직장려계


1910년대에 민족교육이 정비되어 가면서 교육의 결실로서 학생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학생의 지성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학생 지성은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註75) 하나는 신교육과 그의 영향 하에 성장한 근대적 지성이고, 하나는 기성세대에서 나라를 잃은 것을 자기 세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민족적 지성이고, 하나는 몇 만 명밖에 안되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는 당시로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 출신이었으므로 중산층적 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註76)


1910년 조선산직장려운동을 주도했던 『학지광』


그러한 학생지성의 산물이 1910년대에 학생계층의 형성이고 또 학생운동 단체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학생계층이란 중산층·지식층·청소년층의 복합적 성격을 총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당시와 같이 사회계급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사회운동의 담당주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학생운동단체는 협성회協成會나 각종 친목회처럼 이미 한말에 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0년대에 동문회나 학우회 또는 이화학당 이문회以文會, 신명학교 공주회公主會 같은 친목을 위한 학생단체를 제외하고도 학생운동단체가 발달하고 있었다. 이때도 사회인이 참여한 계몽적 한계는 있어도 송죽형제회·대성학교의 기성단·숭실학교의 조선국민회·경성고보의 조선산직장려계 같은 것이 결성되고 있어 불원간 순수한 학생운동 단체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제하의 학생운동이 갖는 민족운동상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학생운동단체가 대두하고 있었던 역사성에 대하여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조선산직장려계는 학생과 교원의 조직으로서 1910년대 학원의 주변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산직장려계는 1914년 9월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교원양성소 註77) 학생 이용우李用雨 등 6명이 발의하여 1915년 3월에 뜻있는 교원과 사회인사가 합세하여 결성한 경제사상운동조직이었다. 발의 직후인 1914년 10월에 졸업여행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동유지東遊誌』 90부를 비밀히 만들어 민족적 토론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결론으로 도출한 경제자립운동을 일선교육을 통하여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휘문의숙徽文義塾의 남형우南亨祐 교사와 사회인사 최남선崔南善의 동조를 얻어 전국의 교원과 신교육을 받은 인사를 포섭하여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하였다.

이때 계장은 중앙학교 교사 최규익崔奎翼이 맡았지만 註78) 참여인사 130명의 명단을 보면 註79) 당시의 지식청년을 전국적으로 망라한 느낌이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서북지방의 중산층 지식청년이 큰 타격을 입은 뒤, 여타의 청년들은 산직장려계로 일단 연락망을 갖춘 셈이었다. 105인사건의 인사가 대개 한말 신민회와 관련이 깊었다고 보면 한말 계몽주의의 좌파적 인사였다고 할 수 있는데, 1915년 조선산직장려계의 조직은 계몽주의의 우파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파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민족적 양심과 민족의 독립을 지향하지만 직접적으로 체제부정적 혁명전략을 취하지 않는 온건파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제와 타협하는 개량주의와는 다르다. 그러나 개량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이들은 1916년 3월 보안법 위반으로 고생을 했지만, 대부분이 교원이었으므로 일선에서 남긴 민족교육의 영향은 3·1운동에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3·1운동의 전개양상이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서당교육과 야학


1910년대에는 전통적인 서당교육이 크게 성행하여 서당이나 서당의 학동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한말 계몽주의에 의해서 신교육이 성장하였으나 구국운동에 이바지한 공과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혹은 계몽주의자가 변절한 사례가 많았으므로 1910년의 국치에 임하여 그에 대한 반발로 1910년대에는 서당에 모여 드는 인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군청 소재지에 1개교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있을 정도였고, 또 월사금의 부담도 있어 서당이나 야학으로 가서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경우도 많아져 서당이 해마다 늘어났다. 註80) 그리하여 서당교육이 성장해갔는데 이것은 1910년대에 오히려 전근대적 성향이 고조된 일면이기도 했다.

한편 서당이라고 해서 전통교육이나 봉건교육의 일색으로 볼 것은아니다. 당시 학교설립이 부자유한 처지에서 외형상의 서당에서 내용은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註81) 또한 서당에서는 교과과정이 규격화되어 있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항일교육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1910년대 서당교육은 민족교육의 중요한 몫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때문에 일제는 1918년 ‘서당규칙’을 발동하여 서당에서 사용하던 교과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제외시켜 그 속에 있는 한국역사 교육을 봉쇄했던 것이다.

서당에도 갈 수 없는 서민은 야학을 찾아 갔다. 1910년대에 야학은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註82) 반면 일본어 보급을 위한 국어강습회(소)는 널리 운영되었다. 이는 ‘차별화된’ 동화주의에 입각한 식민지형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註83) 그중에도 마산의 노동야학처럼 규모나 내용에서 민족적 의미가 있는 야학이 있었던 점에 대하여 유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것은 3·1운동 이후 들불처럼 확산된 야학운동을 추동시키는 기폭제였다는 민중사적 측면에서 주목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