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1장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 독립운동의 방법론/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3. 16:08

3. 독립운동의 방법론

독립운동에서 토론이 옥신각신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방법론이었다. 방법론은 당시에는 방략이라 해서 방법과 전략을 가리켰다.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해야 효과적이냐 하는 것이었다. 가장 대립을 이루었던 방략은 독립전쟁론과 실력양성론이었다. 독립전쟁론은 의병전쟁에 원류를 두고 있었고, 실력양성론은 계몽운동에 원류를 두고 발달한 이론이었다. 의병도 패전을 거듭하면서 안동의 이상룡李相龍·이중업李重業·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처럼 계몽주의자로 전환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계몽운동가도 실력양성의 한계에 부딪히자 안중근安重根·이동녕李東寧·이남규李南珪처럼 의병으로 전환한 경우가 있기는 해도 그것이 역사의 틀까지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1. 초기(1910~1919)의 준비론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구국에 성공하지 못하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독립운동은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기서 의병전쟁과 계몽주의 강경파좌파가 합류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을 추진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와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처럼 혁명기지를 개척한 것이다. 합류 내용으로 보면, 의병전쟁은 계몽운동의 정치이론을 수용한 것이고, 계몽운동은 끝내 실력양성론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의병전쟁의 무장투쟁으로 수정한 것이다. 독립군기지 개척은 이상용·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박용만朴容萬 등에 의해서 만주·연해주·하와이에서 추진되었다. 독립전쟁을 위하여 독립군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신흥학교新興學校·대전학교大甸學校·대조선국민단大朝鮮國民軍團이 그것이다.

나라는 망했지만 시간이 있으니 새롭게 정비하여 준비를 갖추는 것은 독립전쟁의 경우만 해당한 것이 아니라 실력양성론에도 해당되었다. 구한말에는 급한대로 큰집 사랑방을 빌려 시작한 학교를 통폐합하는 등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1910년대에 새롭게 태어난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가 바로 그런 작업을 통해 생겨난 학교였다. 그런 작업을 위하여 조선물산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가 결성되어 1910년대 지식인의 동정을 대변했다.

이와 같이 1910년대는 준비론의 시기였다.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이 관여하여 미주에서 간행된 『신한민보』에서는 연일 준비론에 대하여 논설을 게재할 정도였다. 이광수李光洙·김성수金性洙 등이 주관하던 동경 유학생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이나 국내에서 최남선崔南善이 간행하던 『청춘靑春』에서도 준비론적인 논설이 자주 게재되었다.

『학지광』에서 이광수는 유학생에게 실력을 쌓아 고향에 돌아가면 각군의 참여관 등 기다리는 자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유혹성 준비론을 투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준비론이 있으니까 준비론을 비판하는 소리에 현실도피성 변명에 불과하다고 공격하는 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민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론이 현실도피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준비가 축적하여 3·1운동을 폭발시켰다.


 2. 중기(1919~1931)의 다양한 방법론

3·1운동을 계획한 천도교·기독교·불교·동경유학생의 대표를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의 시각으로 보면 계몽주의 온건론자우파로 그들은 3·1운동이 전민족운동으로 전개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전 세계 혁명주의 지도자도 놀랠 정도로 전민족·전민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레닌은 3·1운동에 놀라 임시정부에 200만루불의 지원을 약속하고 우선 40만 루불을 내놓았다. 3·1운동과 같은 민중적 민족운동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불길이었으므로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고, 3·1운동을 전개한 조선인들은 자신감에 충만한 새 시대를 맞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이제는 준비론이 아니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방법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무장투쟁론이 급부상하여 독립전쟁과 의열투쟁이 국내외 각처에서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이상룡·김동삼을 중심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김좌진金佐鎭·이청천李靑天을 중심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고, 1914년에 이상설李相卨이 주도하여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결성했던 연해주에서는 홍범도洪範圖·계봉우桂奉瑀 등이 각종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싸웠다. 한편 길림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義烈團을 만들어 의열투쟁이 본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각종 무장단체가 지하 레지스탕스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3·1운동으로 민중역량이 고양되어 민중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노농총동맹勞農總同盟·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농민야학農民夜學·여성동맹女性同盟·형평사衡平社·청년동맹靑年同盟·소년회少年會 등이 그것이다. 학원에서 학생 독립운동조직이 발달한 것도 이때였다. 이제 준비론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럴 때 준비론을 주장하면 현실도피의 방법이상이 못되었다. 준비론자들은 자치론자로 전락해갔다. 이광수가 1924년에 「민족적 경륜」을 발표한 그것이 준비론을 자치론으로 포장한 것이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출범하였다. 조선공산당을 만든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김남수金南洙·이준태李準泰 등은 모두 안동의 유생청년이었는데 일단 출범시켰으므로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정당이었으므로 독립운동의 방법을 극단으로 몰고 갔을 것은 말할 것 없다. 1929년 해체할 때까지 크게 네 차례의 옥사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극단적 활동을 민활하게 전개했다는 말이 된다.


3. 후기(1931~1945)의 민족혁명노선과 계급혁명노선

6차 코민테른대회 이후는 전세계 사회주의운동이 계급노선을 강화하여 민족노선이 크게 후퇴하였다. 조선문제를 다룬 ‘12월테제’에서 조선공산당은 말을 앞세워 분파만 조장하므로 노농운동에 기초한 당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라고코민테른에 종사하던 일본인 좌야학佐野學의 작품 지적하여 1929년 초에 조선공산당을 해체하여 노농운동이 크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노농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면서 엄격히 계급혁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민족혁명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가 1932년부터 500명이나 숙청되는 참극을 맞아야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36년에 연해주 한인 당원이 숙청되고 이어 1937년부터 스탈린의 공포의 강제이주가 강행되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한인들은 거기서 다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끄즐오르다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실시하던 고려사범대학을 재건하여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것은 1년이 못가서 서리를 맞았다. 학교는 유태계 러시아인에 인계되고 도서는 불태워졌다. 이 사실들은 거기의 교수로 활동하던 계봉우의 일기 『꿈속의 꿈』에 잘 나타나 있다. 스탈린은 그루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자기의 소수민족 출신의 약점을 소수민족 탄압으로 극복하려고 계급혁명을 강조하며 한인 공산주의자의 민족노선을 억압하였다. 끄즐오르다 대학의 유태인 실무자도 같은 이율배반론자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 민족혁명노선이 고양되던 유일한 곳이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열투쟁의 영향을 받은 임시정부 주변이었다. 대신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을 받아 임시정부는 상해上海를 떠나야 했다. 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진강鎭江·남경南京·항주杭州·장사長沙·광주廣州·유주柳州·기강綦江을 거쳐 1940년 중경重慶에 정착하기까지 8년간 유랑생활을 겪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 운동도 인민전선노선을 택하게 되어 이탈리아· 프랑스 공산당이 코민테른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코민테른 7차 대회가 소집되어 1935년 인민전선노선을 정식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그래서 만주에서는 민생단民生團사건이 종결되고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서둘러 강제이주가 강행된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기미를 포착한 국내 운동자들은 민족혁명노선을 확산시켜갔다. 지식인 사이에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을 일으켜 국학 민족주의를 파급시켰던가 하면 노농운동에도 민족노선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혁명노선의 확산은 운동의 순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학생운동에서도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에 오면 전반기에는 볼 수 없었던 고려회高麗會·한글연구회·한글독서회 같은 비밀 써클이 학원에서 발달하는가 하면, 해방을 전망한 1940년대에는 태극단太極團·근목당槿木黨·순국당殉國黨이 나타나더니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건국위원회建國委員會·무궁단無窮團·화랑회花郞會·  백의동맹白衣同盟 등의 노골적인 독립운동 단체가 어린 학생운동 단체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때 계급혁명노선이 민족혁명노선으로 수정되고 있던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방법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는 있었으나 중심은 민족혁명을 통한 독립 쟁취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