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의병전쟁의 전개/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4. 14:21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의병전쟁의 전개

계몽주의의 사상구조

문화 민족주의


1. 의병전쟁의 전개

한말의 의병1)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民兵이었다. 민병이라고 해도 관군을 지원하는 등의 단순한 민병이나 관군의 위치를 초월한 민족의 군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관군과 함께 또는 관군의 보조적 위치에서 작전을 수행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의병과 다른 점이다. 그러한 성격은 1904년부터 일어난 중기의병 이후의 의병전쟁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구한말 의병항쟁을 의병전쟁이라고 이름하는 것도 민족의 군대로서 항쟁했다는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말 의병전쟁은 1894년 갑오왜란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3·1운동 직전인 1918년까지 계속되었다. 시기문제에 대하여는 뒤에서 재론하겠지만 이 시기에는 의병전쟁 외에도 개화개혁운동·동학농민전쟁·광무농민운동·계몽운동 등의 민족운동도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이 글은 그러한 여러 민족운동과 관계에 유의하였다. 


1. 굳이 ‘전쟁’이라 하는 이유

전쟁은 원래 국가 간의 무력충돌을 말하고, 전쟁 의사를 결정할 당국의 대내적인 결정 절차에 의한 충돌이어야 국제법상 전쟁이라 말한다. 그러한 결정 절차를 밟지 않은 일부 무장부대 사이의 충돌은 사변事變이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그렇다면 한말 의병도 일부 무장부대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대한제국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전쟁 의사를 결정할 국왕과 정부가 전쟁 의사를 결정하지 않았다면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제국 국왕과 정부는 국민이나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특히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는 대한제국의 주권의 행사인 통치행위가 일본제국주의의 ‘시정개선의 충고’3)라는 명목의 간섭으로 제약을 받았다. 그 후에도 그 해 8월의 한일협약으로, 이듬해 11월의 을사늑약의 소동 후 통감부 설치로, 1907년 7월의 ‘한일신협약’으로, 통치권의 제약은 심화되었다. 주권의 본질인 최고·유일·절대·불가분의 성격은 1904년 2월부터 가시적으로 잠식되고 박탈당하여 결국 1910년에 이르러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왕과 정부는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쟁 의사도 결정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럴 때 민족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권의 형식적 당국자가 아니라 민족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민족 자체라면 모호하기 그지없다.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해서 민족의 대표 의지를 포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운동의 주류의지와 행동양식을 민족의 대변자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구한말 민족운동의 주류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당시의 사람도 의견이 갈리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학설도 일치한 것 같지가 않다. 필자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운동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고 의병의 의지가 민족의 양심과 의지를 대변했다고 믿는다. 註4)필자의 구한말 의병에 대한 의견은 다음의 연구물에 나타나 있다. 민족문화협회, 『의병들의 항쟁』, 1979 ; 조동걸, 「한말 의병운동의 민족주의상의 위치(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3 ; 조동걸, 「한말 의병운동의 민족주의상의 위치(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 1985 ; 조동걸, 『한말 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그러므로 의병운동을 민족의지를 표현한 성격의 호칭인 의병전쟁이라고 한 것이다.

민족운동의 세계사적 유형은 민족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 그리고 민족통일운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의 정상 궤도라면 반봉건적 민족혁명운동이 선행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에도 그것이 개화개혁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으로 나타났는데, 그러한 민족혁명운동의 추진 중도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민족혁명운동과 더불어 반제국주의운동인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다. 그때 어느 것을 우선하고 상위개념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는 역사조건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때부터는 민족해방운동이 앞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한말 민족운동에서 계몽운동보다 의병전쟁이 민족의 중심이념이었고 민족운동의 주류의지였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계몽운동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5)그러나 의병전쟁과 비교했을 때, 근대지향적이기는 해도 구국이념의 성격이 모호했거나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의병전쟁을 민족운동의 주류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한말 의병전쟁의 성격이나 특징은 그에 대한 시기구분의 논의를 검토하면 총괄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의병전쟁의 시기를 연구자에 따라 2시기, 3시기, 4시기, 5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2시기 구분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 것인데6)전기는 1896년에 해산한 유림중심의 척사의병斥邪義兵을 가리키고, 후기의병은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봉기한 구국의병救國義兵을 일컫는다. 그와 같이 일단 전후기로 구분하고 다음에 후기의병을 다시 세분할 수 있다는 관점인데 이 방법은 의병의 주체적 성격을 기준하여 척사의병과 구국의병으로 대별했다는 데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시기 분류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을미의병·을사병오의병·정미의병으로 구분한 것인데7)의병 봉기의 동기를 중시하여 봉기 연도의 간지干支를 사용하여 이름한 것이다. 봉기 연도가 고정되어 있고 시간적 단면을 중시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음에는 근래의 연구자간에 전기·중기·후기로 나누고 있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8)봉기 연도가 연구 진행에 따라 변하고 있으므로 연도가 고정되지 않으면서 전체상을 성격에 따라 구분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의 의병은 독립군으로 처리했는데 의병의 이념이나 조직이나 방법 등의 주체는 변하지 않았는데도 독립군으로 처리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4시기 분류는 앞의 3시기 구분에서 후기의병을 1909년 9·10월의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기준하여 다시 분기한 방법이다.9)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하여 의병이 해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해 간 시기를 ‘전환기의병’이라 이름하였다.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해간 역사 발전 상태를 중시한 시기구분이다. 이 경우는 의병전쟁의 하한선을 1914년 독립의군부의 해체, 또는 1915년 채응언蔡應彦 의병진의 해체에 두고 있다. 이 경우는 해외라고 할지라도 아직 대한제국이 존재한 1910년 이전부터 독립군이라 해야 하는가의 논란이 있을 수 있다.

5시기 구분은 위의 4시기의 1915년까지를 ‘전환기의병’이라 하고 잔여의병이 1919년 3·1운동까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해외로 망명하지도 못한 채 즉, 독립군으로 전환하지 않고 국내에서 의병방식으로 항전하고 있던 사실에 주목하여 말기 의병 시기를 설정한 경우이다.10)이것은 의병의 주체성격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인데 너무 오래까지 의병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시기구분에서 사소한 의견차이는 많으나 크게 문제되는 것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의병을 의병으로 보지 않고 독립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11)이것은 의병의 성격이나 개념을 규정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주의깊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으므로 멸망전의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이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을 보면 그렇지만 역사해석에는 주체적 조건을 보아야 한다. 주체조건은 변하지 않았는데 객체조건만을 보면 1910년 8월 29일까지는 의병이라 하고 30일부터는 독립군이라 해야 한다는 극단 논리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조건을 고려하여 1910년전이라도 독립군으로 전환한 경우가 있었던가 하면 반면,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5년이라도 의병으로 존재한 경우가 있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체조건으로 보아서 이념이나 조직과 항전방법이 의병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의병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령 강기동姜基東이나 채응언의 경우와 같이 의병이 1910년 이후에도 국내에서 전과 다름없이 계속 항전하고 있었다면 의병전쟁사의 범주에 포함해서 보는 방식인 것이다. 다만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객관 조건이 변하고 있었으므로 전과는 다르게 독립군적 의식이 심화된 의병이었다는 점이 특징인 것이다.


3. 이념상의 특징

전기의병은 위정척사를 위한 척사의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위정척사란 용어는 정조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자료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알려진 바인데, 그때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척사의 주체 이념인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은 조선초기에 원류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때는 위정의 의식은 있어도 척사의 논리는 당장에 필요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부정하려는 구체적인 객관적 작용이 대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성리학의 확산만이 과제였다. 그리하여 향교와 서원, 향약과 가묘의 설치를 추진하면서 성리학 지배체제를 수립해 갔다. 그러한 가운데 사림파가 집권하는 조선중기를 맞게 된 것이다. 조선중기에는 성리학에 철저한 사림파가 집권했던 이유 외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리학의 본산인 명나라의 원조를 받게 되어 성리학의 확산이 더욱 촉진되었다. 명나라와 국경개념을 초월한 성리학의 보편주의 의식과 질서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서양 중세의 카톨릭 보편주의와 같은 성격의 역사 현상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후 명나라가 멸망하자 성리학 국가로는 조선만 남게 되어 당시의 성리학자는 우선 중국에서 성리학을 복원하는 것이 지상과제요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北伐論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 위정에 머물지 않고 척사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과 정책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북벌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북벌론 의식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후에도 북벌론을 제기한 노론 세력이 집권하면서 북벌론 의식은 위정척사의 논리로 다듬어지면서 그의 상대도 청나라에서 천주교로, 다시 서양제국주의로, 다시 일본제국주의로 변화해 갔다. 그것은 성리학을 위협하는 객관적 현실적 변화에 따른 변화였다.

그와 같이 위정척사의식은 일시에 형성되어 폭발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북벌론에서 구체화된 사상으로서 그 후 실학의 북학론北學論에 맞서, 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나 개화론에 맞서 계승되어 오다가 폭발한 것이 일제침략에 항거한 전기의병이었다. 그들의 의식과 논리는 조선이 성리학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러한 조선을 침략하는 일제에 항거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감히 의병으로 봉기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전기의병을 척사의병이라 한 것이다.12)이때의 춘추대의는 척사로 이해하였다. 다음에 척사의 주인공을  국왕으로 보았기 때문에 척사의병은 모두 근왕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전기의병이 모두 척사의병은 아니었다. 1894년 갑오왜란을 계기로 일어난 안동의 서상철徐相轍의진이나 상원의 김원교金元喬의진은 척사를 전제하지 않고 충군 논리에 입각한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3)즉 이때의 춘추대의는 충군에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성리학 질서가 붕괴된다는 위협에 당면하여 척사의병이 비로소 봉기했는데 그때도 강릉의 민용호閔龍鎬의진, 진주의 노응규盧應奎의진은 척사보다 충군의식이 앞섰던 경우로 이해된다.14)그 외는 거의 척사의병이지만 춘천·경주·나주의진의 경우처럼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15)

척사의병의 성격이 가장 강렬한 의진은 유인석의 호서의진과 기우만奇宇萬의 광산의진이라 할 것이다.16)그것은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으로 이어진 학통에 연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항로 문인의 봉기가 근래 새로운 연구의 주장대로 왕실 척족의 종용을 받아 봉기했다 하더라도17)그들의 문서나 구호는 척사논리로 메워져 있었다.

중기의병부터는 구국의병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자라고 해도 성리학이 존립할 국가가 위태로운 형편에 성리학을 위해서도 먼저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전기의병은 유생이 주도했는데 중 기의병의 경우에는 유림이라고 해도 최익현崔益鉉·민종식閔宗植·정환직鄭煥直의 경우처럼 관료출신자가 주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한말 의병전쟁을 주도한 의병장들(좌로부터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중기의병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계기로 일어난 의병에서 비롯된다. 즉 을사늑약의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일의정서나 그해 8월의 한일협약으로 나타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허위許蔿·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 등과 같이 유림일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보다 더 많았던 것은 활빈당 등의 농민운동 조직이 의병으로 전환해간 경우였다. 1896년 전기의병이 해산한 후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자료에 남학당·영학당·동학당·북대·남대·초적·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때의 농민조직이었다. 그들은 1900년 무렵부터 활빈당活貧黨으로 정비되어 가다가 1904년부터 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경우가 신돌석申乭石의진이다. 의병으로 전환하기 이전인 1896년부터 남학당·활빈당 등의 농민항쟁을 광무농민운동이라고도 하지만, 광무농민운동의 이념은 반봉건성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으로 표현된 일제의 침략을 맞아 반봉건이 실현될 근거인 국가가 위태롭게 되어 활빈당운동은 의병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이념은 반제국주의적 구국이념이었다.

이와 같이 중기의병에서는 유림의병이었다고 하더라도 전기의병과 같은 척사이념은 부차적이거나 잠복하고 구국이념이 중심개념으로 부상하였다. 광무농민운동 조직에 의한 농민의병일 경우는 말할 것 없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농민의병일 경우에는 그 모체가 광무농민운동에서 보인 반봉건성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의병전선에 농민의병의 반봉건 의지가 크게 영향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념상의 특징은 후기의병에서 일반적 성향으로 나타났다. 후기의병은 1907년 7월의 광무황제의 퇴위와 정미조약 그리고 8월의 군대해산 등의 망국사태를 맞아 민족적인 규모의 의병봉기와 더불어 해산군인이 의병전선에 대거 참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이념은 다원적이고 다양하였다. 이강년李康秊·이인영李麟榮·이석용李錫庸처럼 전통 유림의 충군적인 성향도 있었고, 허위·민긍호처럼 충군적이지만 근대국가를 지향한 성향도 있었고, 홍범도·김수민金秀民·연기우延基羽·지용기池龍起·안규홍安圭洪처럼 평민의병이 추구하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수많은 의진이 전국에서 항전을 전개했다.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의병이 많았다는 것은 바로 이념이 다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혹은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실 의병전쟁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논리를 극복하고 새 정치이론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의병이 근대국가 이념을 확실히 갖추게 되는 것은 전환기의병에 이르러 해외에서 계몽주의자와 함께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성취한 일이었다. 그때 계몽주의자는 의병의 정의론과 무장방략을 수용하였고, 의병은 계몽주의자의 근대국가 이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의병과 계몽주의자가 연합한 13도의군의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18)

대부분의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한 뒤의 잔여 의병이 식민통치에서 항전을 계속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말기의병의 이념은 그전의 것을 발전시킬 형편이 못되었던 것은 식민지하에서 어쩔수 없는 일로 이해된다.


4. 조직상의 특징

의병이 민병이었던만큼 부대의 편성도 정규 군대의 조직처럼 규모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또 당초에 유림에 의해서 비롯된 의병 조직이었으므로 전통시대의 편성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의병까지 전투부대를 전군·중군·좌군·우군·후군 방식으로 편성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의병이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여 근대 군대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인원 구성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전기의병에서 지휘부는 유생이 맡았고, 병사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지휘를 맡은 유생가운데 무신이나 무과 출신자는 드물었다.19)갑오의병인 안동의진의 서상철이나 을미의병인 남한산성의진의 심상희沈相禧·민병천閔丙天·이인영李麟榮·김하락金河洛, 홍주의진의 김복한金福漢·이설李楔, 광산의진의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 나주의진의 이학상李鶴相, 춘천의진의 이소응李昭應·유홍석柳弘錫, 강릉의진의 민용호, 제천의진의 유인석·안승우安承禹·서상설徐相說·이춘영李春永·주용규朱庸奎, 문경의진의 이강년李康秊, 안동의진의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선성의진의 이만도李晩燾, 영양의진의 김도현金道鉉, 의성의진의 김상종金象鐘, 경주의진의 한구韓久, 김산의진의 이기찬李起燦, 진주의진의 노응규 등 모두 글하는 선비들이었다. 다만 갑오의병으로 상원의 김원교와 을미의병으로 강계의진의 김이언金利彦은 문무 성분이 불확실하고 또 이강년이 무과에 급제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도 확실치 않다. 그러니까 전기의병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보다 더 유생 성격이 짙었다. 하급장교격으로 포수가 많이 기용되었던 것은 임진왜란 등의 전통시대 의병과 비슷하였다.

유생들의 집결 범위는 갑오의병인 서상철의 경우는 그가 청풍 유생인데 고향을 떠나 안동에서 기의한 것은 유림의 본고장을 근거했다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이듬해 을미의병의 경우는 강릉의 민용호의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향토성과 학통성에 따라 집결했다. 그리고 당시 전국을 8도에서 23관찰부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였는데 8도 감영 소재지에서는 집결한 사례가 없고, 새로 관찰부가 된 춘천·강릉·안동·진주·나주·홍주·충주 등지에 집결한 사례가 많았다. 그것은 행정개편에 따른 군사와 행정의 공백을 이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직의 향토성은 단발령을 집행하는 관찰사나 군수에 대한 직접적 저항을 의미하고, 학통성은 척사 이념을 실현하려는 사상과 이론의 동질집단의 형성을 의미한다.20)

병사의 역할을 담당한 농민은 유생 지주를 따라 출전한 소작농민, 동학농민전쟁 후 동학여당을 색출하고 있던 당시에 그를 피하여 잠적한 동학농민, 다음에 의병이든 관군이든 보상을 찾아 모인 용병적인 포수농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경우라고 해도 농민이 주체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었므로 을미의병은 수적으로는 농민이 많았더라도 농민의식이 반영된 의병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을미의병에서 농민의 위치는 종속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병으로 일단 집결하여 전투까지 경험하면서 새로운 농민으로 변질하고 발전했던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즉 을미의병은 농민조직이 새로 발생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1896년 의병이 해산한 후 전국적으로 파다하게 일어난 영학당·남학당·동학당·초적·화적·북대·남대 등의 농민조직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농민조직은 1900년 무렵부터 활빈당으로 개편되어 갔지만 필자는 그것을 광무농민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21)

활빈당 등의 광무농민운동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04년부터 중기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므로 중기의병의 조직은 농민의병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조직상의 특징은 활빈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기의병과는 달리 농민 독자적인 의병이 나타난 것이 중기의병의 특징이었다. 농민 독자적 의병은 신돌석 의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휘부와 병사가 모두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2)그런가 하면 1904년 8월 한일협약과 특히 이듬해의 을사늑약 문제를 계기로 유림의병이 크게 일어난 것도 중기의병의 특징이었다.23)그런 경우는 지휘부는 유림 특히 관료출신자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병사부는 대개 농민이었다. 농민이라고 하더라도 전기의병처럼 종속성에서는 탈피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후기의병의 조직상의 특징은 다양하였다. 이강년·이석용·고광순·허위·이진용·이인영의진처럼 유림을 중심한 의진이 있었던가 하면, 홍범도·김수민·안규홍·지용기의진처럼 평민의진도 있었고, 민긍호·연기우·김규식金圭植의진처럼 해산군인의 의진도 있었다.24)의진의 구성원도 중기의병까지와 비교했을 때 유생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또 군인·상인·관리 등 신분이나 직업도 다양하여 의병전쟁이 국민전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대조직에서 중기의병까지는 대부대 단위가 일반적이었으나 후기의병부대는 소부대의 활동이 많아졌다. 1908년 5월 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을 끝내면서 대부대 의진을 지휘하던 이강년·민긍호·허위 등의 의병장이 체포되거나 전사한 뒤에는 유격전을 수행하기 편리한 소부대 조직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1909년 9~10월의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이 큰 타격을 입은 뒤에는 유격전투의 소부대만 존속할 수 있었다. 하물며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식민통치 속에서 항전한 의병은 말할 여지가 없었다. 후기의병이 소부대의 유격 조직으로 개편되어 항전할 때는 의병전선이 민중화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때 양반 유생이 참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재산은 의병 자금으로 소진하였고 일본군이 집조차 불태워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중에서 노숙하며 쫓고 쫓기는 유격전투를 수행하자면 전통 유생이나 양반의 행색과 의식으로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유생도 민중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지휘부와 병사층이 따로 구성되지 않고 양반이든 쌍놈이든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의병이 지휘를 맡았고 따라서 쌍놈의 대장 밑에 양반 병사가 소속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활동상의 특징

의병전쟁의 시기별 활동상을 보면, 전기의병은 전투의병 외에 시위의병도 적지 않았다. 의병을 일으켜 단발령을 감행하려는 관리를 처단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전투태세를 미리 갖추었던 의진이 아니었다. 춘천관찰사·충주관찰사·안동관찰사 등 고급 관리를 처단한 경우도 어디까지나 처단이었지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관군이 공격해 오면 그에 반격하면서 그 후부터 전투의병으로 전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기의병부터는 전투의병만 존재하였다. 중기의병에서는 최익현·정용기·신돌석·민종식의진에서 나타나듯이 대부대 작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민종식의 홍주의진이나 정용기의 산남의진처럼 패전할 때는 희생이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부터의 후기의병에서는 의병전쟁이 더욱 활기를 띠웠다. 그것은 해산군인의 참전이 크게 작용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전투는 승전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일본군은 정규군이었고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적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1907년 12월부터 1908년 5월까지의 서울탈환작전을 고비로 의병전선은 유격전투로 전환해 갔는데 특히 1909년 9~10월의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서 크게 타격을 받고 의병전선의 대부대는 사라지고 모두 소부대에 의한 유격작전으로 변하였다. 일본군의 전면적 반격을 맞아 대부대 조직으로는 이동이 어려웠고 효과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전투지역은 전국에 걸쳤는데 전기의병은 처음에 향교에 집결하여 관아를 중심한 들판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의병이 처음부터 전투를 목표한 것이 아니라 단발령을 저지하는 등의 관리의 활동을 봉쇄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기의병부터는 홍주의진이나 태인의진 그리고 남원의진의 경우처럼 읍성을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읍성 외에도 산성으로 이동하여 싸운 사례도 많았다. 들판·읍성·산성을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부대 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후기의병에서는 산악이 무대가 되어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때 지리산과 태백산, 그리고 추가령지구대와 개마고원은 의병전쟁의 훌륭한 무대로 이용되었다. 이는 소부대의 유격전이 전개된 의병전쟁의 추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1907년 군대해산 후 해산군인이 참전하면서 전술과 전투 양상도 변화하였다. 그러나 의병전선이 유격전으로 변모하자 이론을 앞세울 겨를이 없었고, 결국 천차만별의 전투 양상을 나타냈다.

전기의병은 평소의 옷을 그대로 입고 무장도 갖추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무장을 했던 경우는 포수들의 화승총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유인석의 제천전투나 민용호의 원산진격 전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투 중에 비만 오면 전투 능력을 상실하고 패전하였다. 기록상 군복을 입은 경우는 민용호의진이 강릉에서 원산 진격을 앞두고 제복을 만들때, 한복에 황색을 입히었고 장교는 소메 끝에 검은 줄테를 돌렸다.25)그외는 어떤 문헌에서도 제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중기의병부터 자기총自起銃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정환직·신돌석·최익현의진이 관아를 습격하여 뇌관을 타격 폭발시켜 총을 쏘는 근대식 자기총을 압수하여 사용하였다. 후기의병은 군대해산 후이기 때문에 자기총을 사용한 것이 일반화되어 갔다. 혹간 천보총과 한식총이란 이름이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화승총을 자기총으로 개조하거나 장총을 단총으로 개조한 것을 가리켰다.26)후기의병 당시 양회일梁會一과  임창모林昌模의진이 무기를 제조하던 유적이 지금도 전남 화순군 증리 중조산 밑에 있어, 의병이 무기를 생산했던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27)후기의병에서도 군복은 별도로 있을 수 없었다. 구한국군의 복장을 구해 입거나 일본군의 군복을 노획하여 입은 외에는 평상복을 입었다. 평상복이 농민으로 가장하기 쉬웠으므로 오히려 유리한 경우가 많아 유격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의병전쟁에서 특히 후기의병은 의병전쟁사를 대표할 만큼 여러가지 특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것은 후기의병은 해산병의 합류로 전투 조직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이 독립전쟁의 양상과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그전까지만 해도 활발하지 않던 북부지방에서 후기의병부터 의병이 크게 일어나 전국이 의병전쟁의 격전장이 되었던 점은 곧 독립전쟁을 예고하는 현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상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907년 말부터 전개한 13도 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의병전쟁의 격조와 높은 수준을 웅변하고 있는 역사적 계획이었고 그의 실천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6. 의병전쟁의 의의

첫째는 의병전쟁은 무엇보다 먼저 수천년 문화민족의 전통을 입증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근대화에는 늦었던 대한제국이었지만, 문화의 전통을 자부하며 일제 침략에 항전하였다. 그 문화의 전통은 침략자 일본을 가르쳐 준 문화였으므로 의병들의 자부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사적으로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항거한 한국인의 항전이 원시적 본능에 의한 반발이 아니라 문화적 근거에 기초한 이념적 항전이었다는 것을 의병전쟁은 입증하고 있다. 수천년간 키워온 조선 신사도선비의 유형을 사육신과 생육신으로 나눈다면, 의병은 사육신의 전통을 계승함이요 생육신의 전통은 자정론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두번째는 일본 제국주의에 항전하여 결국은 패전하고 말았으나 거기에서 잃었던 것은 인명과 재산이었지만 귀중한 정신적 유산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정신적 유산 위에서 독립운동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의병들이 전사한 무덤과 그들의 집이 불탄 잿더미 위에서 정의는 꽃피고 역사는 발전했던 것이다. 국내외 독립운동자가 자신들의 독립운동 전통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의병들의 항전을 앞세웠던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

세번째는 그와 같이 의병전쟁은 독립운동의 단서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주목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독립군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08년부터 연해주에서 유인석·이범윤·안중근·최재형 등을 중심한 의병은 독립군 형성의 선구적 조직이 되었고28)홍범도를 비롯한 함경도 의병은 그대로 독립군으로 전환해 간 사례였다.29)신민회의 계몽주의자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를 개척한 사실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의 통합성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30)그것은 곧 계몽운동이 해외로 이동하면서 이념은 계몽주의가 갖는 근대주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립운동 방략은 의병 노선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을 계승한 독립군의 독립전쟁이 독립운동 방략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네번째로 의병전쟁이 진행되면서 당초의 척사의병이 1904년부터는 근왕적 구국의병으로, 1907년 후기의병부터는 근왕주의도 서서히 탈피하면서 민족의식이 부상해 갔다. 그리고 당초에 양반 유생을 중심한 의병조직이 특히 후기의병에 이르면 그러한 봉건성을 극복하면서 평민이 주도한 의진이 확대되어 갔다. 그와 같은 변화는 의병전쟁이 갖는 봉건적 범주를 탈피하면서 근대적 성격으로 발전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격변화를 말하면, 충도忠道·충군忠君·충국忠國·충민忠民으로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의병전쟁이 보여준 근대적 성장은 의병전선에 참전한 봉건적 유생의 자기 변화에 의해서 달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농민의병의 참전에 의한 평민적 역할이 컸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섯번째는 의병전쟁을 통하여 농민조직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농민조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역사에 크게 부상하였으나 그것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파괴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의병 봉기와 더불어 결집되어 1900년을 전후한 광무농민운동을 통하여 동학이나 의병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 농민조직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 조직이 활빈당이었고 그것은 또 중기의병의 기초 조직이 되어 의병전선의 봉건성 탈피에 기여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섯번째는 의병전쟁을 통하여 전민족이 반제국주의적인 항일이념을 과시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제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의병전쟁에서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일본군과 2,852회의 전투를 전개했고, 1만 7천 779명의 의병이 전사하였다.31)이는 의병이 전국토를 피로 물 들이며 항전했던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적 항전의 사실은 먼저 일제의 한일합방의 합법성 강변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입증해 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지만, 다음에 당시 세계를 풍미하고 있던 제국주의 사조에 항전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항전한 세계사적 기록으로 중시해야 할 것이다.

일곱번째는 그러한 역사 발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한편, 의병전선에서 봉건성을 탈피하면서도 근대적 지도이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근대국가의 정치이론을 개발하지 못하여 의병전쟁의 합목적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의병이 근대적 독립군으로 발전하자면 계몽주의의 정치이론을 수용한 해외의 독립군기지에서 성취될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전기의병 가운데 정치 파쟁에 편승하여 봉기한 의병이 있었고, 후기의병에서 잡범 방식의 의병이 있었다고 의병전쟁의 역사적 위치를 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표현상태만으로 의병의 성격을 규정해서 안 될 것이다. 또 실제에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의병전쟁의 주류현상이 아니며, 중심개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