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계몽주의의 사상구조/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4. 15:12

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계몽주의의 사상구조 


2. 계몽주의의 사상구조

구한말 계몽주의 註32)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120~140쪽. 란 1904년 러일전쟁과 일본군의 만행, 그리고 한일의정서를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가고 있을 때, 그에 대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국민적 계몽운동의 논리를 말한다. 그를 담당한 추진주체는 시민적 지식인이었고 민족운동의 원류는 개화운동이었다. 그 개화운동이 갑신정변으로 굴절을 겪은 후, 갑오경장·광무개혁에 이르는 개화개혁운동으로 이어져 1904년부터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계몽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註33) 한말계몽운동을 손진태, 『국사대요』, 1948, 252~253쪽에서 애국계몽운동이라 명명한 후 그 용어가 학계의 통설로 정착되어 있으나 애국이란 관두어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계몽운동의 개념과 성격을 혼란스럽게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그 관두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구한말에 반제 구국운동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역사의 구조적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구국의병전쟁이요, 구국계몽운동이란 구국의 관두어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별도로 거론할 때 구체적 시기의 지칭이 필요하다면 한말의병전쟁 또는 한말계몽운동이라고 할 것이고 구체적 시기의 지칭이 필요 없을 때는 의병전쟁 또는 계몽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화운동은 처음에 선진적 중인이나 양반 또는 불승佛僧 등 소수인원에 의해 개화당開化黨이라는 조직을 통한 정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정치분야 외에 경제·사회·문화운동의 영역에서는 어떠한 조직도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개화운동은 전체든 일부의 동도서기든, 현실적으로는 서양화운동의 논리였는데, 이론의 체계도 정립하지 못한 채 갑신정변을 겪어야 했고, 인원도 소수에 그쳐 대중적 기반을 갖지도 못했다. 그 위에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배우는 정도로 서양화라고 해도 서양에는 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채 일본이나 청을 통하여 개화하는 굴절개화의 한계조차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개화사상도 좁은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개화사상은 오히려 갑신정변 후에 망명객이나 주 외국공사관 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전달·정리되어 갔다. 갑오경장이나 광무개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화개혁운동의 논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앞에서 주체적 논리의 정립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일전쟁 후 한국이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가고 그 위에 서양열강의 각축전이 덮쳐 있었던 때에 개화에 기울어 제국주의 침략에 대처하는 논리에는 주의가 부족하였다. 오히려 청과의 전통적 사대관계 또는 1882년 임오군란 뒤에는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으로 실정화된 청의 종주권적 지배에만 민감했다. 그런 나머지 청일전쟁 결과, 청의 굴레에서 탈출하게 된 행운에 도취하여 註34) 『독립신문』 1896년 4월 18일자 논설 ; 주진오, 「독립협회의 대외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 연세대석사학위논문, 1984 ; 김도형, 「한말계몽운동의 정치론 연구」, 『한국사연구』 54, 1986, 77~84쪽.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감각을 흐려놓고 있었다. 그것이 당시 지식인의 애국적 열성의 부족에서 온 소산이라는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역량 자체의 부족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역량의 한계는 열강과의 제국주의 역학관계뿐 아니라 열강의 산업 침투를 개화로 착각하였고, 국민의 평등을 말하면서도 서민이나 민중을 경시하였고, 종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이해하지 



한말 개화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영환지략』과 『음빙실문집』

못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걸쳐 논리 자체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틈과 한계에 편승하여 제국주의는 구석구석에 침투하였고 끝내 제국주의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싸움인 러일전쟁을 이 땅 위에서 맞게 된 것이다. 그 때에 반일제의 대외인식을 비로소 설정하면서 그때까지 개화개혁운동의 대안으로 계몽주의가 대두한 것이다. 

계몽주의는 종래의 개화운동이나 개화개혁운동을 계승한 개화근대사상을 기초로 성립되었다. 그때까지 서서히 전래해 오던 사회진화론이 1903년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永室文集』이 들어오면서 확산되고 있었는데, 때마침 러일전쟁을 보면서 그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확신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그 위에 뒤늦게나마 확산된 민족문화를 폭넓게 성장 강화하려는 국학민족주의를 이론으로 한 자주자강의 사상을 체계화시켜 갔다. 그러한 개화근대사상·사회진화론·국학민족주의로 구성된 계몽주의는 당시 망국사태에 임한 구국의 논리로 대두하였다. 

1. 개화근대사상
한국의 근대주의는 실학 때부터 태동하였다. 근대주의란 중세질서를 탈피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합리주의 논리를 말하는데 그 논리는, 개항과 더불어 근대주의가 선착한 구미문화를 유입함으로써 달성된다고 하는 서양화, 즉 문명개화의 이론으로 정착하였다. 그런데 그 문명개화의 논의는 정권과 유착하여 역사발전을 위한 토론의 광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정쟁의 변론으로 전락해 갔다. 그리하여 정쟁이 외피로 표출하여 그 내면에 담긴 발전논리는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외피만이 활개치는 갑신정변이나 갑오왜란 등의 사건이 연속되어 혼란이 계속되었고 그 혼란을 틈타 열강의 제국주의가 깊숙하게 침략해 왔다. 

열강의 각축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 결말지어진 1904년에 이르러 개화사상은 정권과의 관계를 떠나 국민적 기반을 얻기 위한 계몽주의로 발전해 갔는데 그것은 당시의 정부가 국가를 부지할 힘을 상실했을 때 나타난 국민적 방략 또는 그의 논리로 제시된 것이다. 때문에 계몽주의가 개화사상을 기초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초기 개화파의 근대주의와는 주체적인 면과 국민적인 면에서 달랐다. 

먼저 개화론자의 문명개화론은 정권과의 유착이나 이론의 한계 탓으로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주체적 논리의 전개에서 

조물주는 이러한 비옥한 땅과 지하자원이 쓰이지 않고 내버려두게끔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인류는 누구나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 역사는 우리에게 서양문명이 미치는 곳마다 그 곳이 새로운 나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 인도와 아프리카의 열대연안의 많은 곳들은 가장 문명화된 종족의 거주지로 변모하였다. 우리는 서양문명이 아시아 대륙의 모든 구석까지 미치어 조물주가 만든 이 아름다운 세계를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註35)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11월 12일자 및 14일자 논설(이 논설은 러시아의 만주진출을 중심한 것이었지만, 그 후 독일과 미국이 동양에 대한 침략에 대하여도 1897년 11월 30일자 및 1898년 7월 2일자 역시 영문 논설에서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국주의 유치논설은 영문이 많았다는 점과 1896년 『독립신문』 초기나 1898년 그 말기의 논설이나 다름이 없었다는 점이다.) The Creator of the Universe did not intend to make these fertile valleys and the mineral deposits therein to be kept unused. They were made for the benefit of mankind and who soever makes use of them,(…) History tells us that wherever Western civilization has made its appearance, the place was transformed into a new country altogether(…) and many place of the tropical coasts of India and Africa have been changed into abodes of some of the mostenlightened races of man. We hope the time will soon come when Western civilization will penetrate every corner of the Continent of Asia and make use of the Creator's beautiful soil for the good of his people over the world. 라고 제국주의의 유치론을 펴는가 하면, 같은 『독립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와 상반되는 논설도 폈다.
 

나라일에 당하여서는 조선 사람이 조선 일을 하여야 하지 외국사람이 조선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외국 사람을 쓰려며는 조선사람의 고입雇入한 사람으로 기계같이 쓰는 것은 가하지만 외국사람이 주인이 되어 가지고 일을 해서는 첫째는 독립한 나라의 구체도 아니거니와 일이 되지를 아니하는 법이다.… 그런고로 남을 믿고 일을 해서는 아무 일도 아니되는 것이요 어느 나라 사기를 보던지 그나라 인민이 그나라 일을 하였지 남의 나라 사람이 와서 그 나라 일을 해주었다는 나라는 듣도 보도 못하였는지라.36)


위의 『독립신문』의 두 논설이 서로 모순되나 이는 당시의 개화근대론이 물질개화에 주력한 나머지 정신적 주체성이 없던 단면으로도 해석된다. 그리고 문명개화와 역사발전의 담당주체에 대한 논리도 모호하였다. 위의 1897년 8월 7일자 논설을 보면 국민의식이 민중적인 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 같으나 그 뒤의 논설을 보면 여태까지 국중에 불행한 일이 생긴 것은 외국사람도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실상을 볼진대 대한 관민들이 잘못한 때문37)



이라고 하여 “관민들은 … 임금과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니 관민·임금·백성을 구분하여 관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의회설립도 백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 자기중심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백성을 문명되지 못한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다.38)그러므로 의병과 동학농민군을 난적으로 보고 그것을 토벌하기 위한 일본군의 주둔을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논변하는 해괴한 발상까지 하게 될 정도로39)국민의식이 미흡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명개화론이 대자적對自的 주체성이나 담당주체의 국민적 측면에서 일관된 관점이 없거나 또는 모순되고 있었다. 오히려 대자적 주체성으로 보면 제국주의 유치론이 우세했고 즉자적 측면에서는 지식인 의식에서 나온 우민관이 우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개한 이론이 단편적으로는 입헌군주론이 있었다고 해도 또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론, 사회적으로 인권자유론이 있었다고 해도, 또 자료에서 그에 합당한 것만 모아 보면 그렇게 보일는지 몰라도, 종합해서 보면 일관성이 없거나 주체성이나 국민민중적 기반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한국사에 대한 의식을 제창하고 있고40)『독립신문』을 한글판으로 간행할 정도로 민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학 논리의 한계성이나41)특히 종교의 무정부주의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와 열국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든지,42)혹은 일본 신교나 일본 불교의 상륙과 일제의 침략관계를 외면했다든지, 문화의 각 영역에서 근대적 주체성을 상실한 문명개화론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문명개화론자의 근대사상에 비하여 계몽주의자의 것은 우선 담당주체에 대한 시각에서 주체적이요 국민적인 것에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도 사람에 따라 그 논리가 다양했다. 그것을 총괄해서 검토할 겨를이 없으니 우선 단재 신채호申采浩의 경우를 뽑아 앞에서 본 개화파 인사를 대변한 『독립신문』의 논설과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재의 논설은 시종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했고 초기에는 영웅론·국민정신·애국심 등에 대한 것이었고 후기에는 국학에 관한 어문이나 역사의식을 통한 민족주의의 제창과 경제문제에 대한 논설이었다. 그중에서 근대의식에 관한 것만을 보면 개화파의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던 주체성의 한계나 국민적 의식의 결함이나 물질지향성을 크게 극복하고 있다. 우선 계몽주의에서는 정신적 주체성이 강조되어 단재는 국토의 자연과 그의 개발이 어느 하나 “무비애국자無非愛國者의 정신기백精神氣魄으로 소화육자야所化育者也”라고 하며43)대아大我 즉, 정신적 아를 주장함에 “질계質界 구각계軀穀界를 일초一超하여 정신적精神的·영혼적靈魂的의 진아眞我·대아大我를 아로 쾌오快悟하면 일체만물一切萬物이 불사不死”한다 고 했다.44)그것이 1909년에는 「국민國民의 혼」이란 논설로 발전하여 나라의 호걸도 교육도 실업도 그 이전에 국민의 혼 다음의 것이라야 하고, 학술·기예·법률도 국민의 건전한 혼 위에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어느 나라의 천병만마라도 산하는 정복할 수 있어도 국민의 혼은 감히 동요치 못한다고 하면서 정신적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었다.45)그러한 단재의 주체성 논리가 그의 사회진화론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국주의에 함몰하지 않게 했던 이유가 됐던 것이다. 즉 개화에서 외국사회를 모방할 때 동등적 사상이나 후각적 모방이어야지 동화적 모방은 노예적 모방이라고 경고하였고,46)주체사상은 역사의식에서도 표현되고 있었다. 가령 고대 삼국상쟁에 신라와 당,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서 각기 당과 일본의 지원을 받을 때 신라는 외력을 이용했고 백제는 외력에 의지했다고 비교하면서 외력을 의지하는 주체의 조건이면 백제가 당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멸망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47)주체성을 중시하였다. 때문에 주체적 반제론인 국수론을 펴면서48)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에 저항했고, 또 반제이론이면서도 주체성을 흐리게 하여 일제에 현혹당하고 있던 동양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다.49)

그러한 주체의식에서 단재는 한문을 배격하고 국학적 민족주의를 제창함에 “자국自國의 언어言語로 자국自國의 문자文字를 편성하고 자국의 문자로 자국의 역사·지리를 찬집하여 전국 인민이 봉독전송捧讀傳誦하여야 기 고유固有한 국정國精을 보지保持하며 순미純美한 애국심愛國心을 고발鼓發할지어늘”이라고 갈파하였다.50)그러한 관점에서 『독사신론』은 당시의 계몽주의 사학자들이 타율적 사안으로 쓰고 있던 역사 서술에 대한 경종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51)『독사신론』뿐 아니라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에서 단재는 역사교육을 강조하면서 역시 역사와 현재의 주체적 처신을 분석하고 있다.52)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다음에 국민의식에 대하여 살펴보면, 초기 개화운동은 그의 담당주체가 ‘관민’ 등으로 표현되었듯이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계몽주의에서는 담당주체의 대중적 확산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재의 논설을 통해 보면 단재도 처음에는 다른 계몽주의자와 같이 영웅론을 펴고 있었는데 1907년 정미조약 이후 계몽주의에 분화가 일어나는 등의 변화와 더불어 1908년에 이르면 몇몇 영웅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역량에 주목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대에는 일국의 원동력이 항상 일이호걸一二豪傑에 재在하고 국민은 기지휘其指揮를 수隨하여 좌우할 뿐이러니 금일에 지하여는 일국의 흥망은 국민 전체실력에 재하고 일이호걸에 부재不在할 뿐”이라고53)하여 이전에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이나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저술할 때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54)그러한 변화는 1908년 7월 31일 『대한매일신보』에 「국가는 즉 일가족」이란 논설55)이후 그 해 8월 27일부터의 『독사신론』을 통하여56)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국가는 군주나 관리의 소유가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시각인 것이다. 그리하여 영웅론의 경우도 구영웅은 영웅이 아니라고 하며 신영웅론으로서 국민적 영웅이라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국민적 종교, 국민적 학술, 국민적 실업, 국민적 미술이어야 하고 그에 따라 국민적 실업가가 나온다고 하며 그 연후에야 동국이 동국인의 동국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57)그리고 사회진화론적 경쟁에서도 국민적 경쟁으로서 “국민경쟁은 기원동력其原動力이 일이인一二人에 부재不在하고 기국민其國民 전체全體에 재하며 기승패其勝敗의 과가 일이인一二人에 불유不由하고 기국민其國民 전체에全體에 유하며”라고58)제국주의시대의 경쟁 담당주체를 군왕이나 소수의 관민 또는 국가로 보지 않고 국민이나 민족에 두는 신국민론을 제기하였다. 때문에 같은 「이십二十세기 신국민론」에서 자유주의와 입헌공화주의를 제창하면서59)국민 아닌 국과 세계대세를 역하는 국은 필망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한 국민의식의 관점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국민의 정신적 주체성을 위하여 국민적 민족주의를 강조하였거니와 국민경제론을 장황하게 주장했다.60)그러한 국민적 민족주의 시각은 국민에 대한 신뢰를 기초한 논리였다. 때문에 단재는 「한국자치제의 약사」에서 전통시대의 사회조직으로 성장하고 있던 면향동面鄕洞의 자의自議 즉, 자치기능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치론은 국민의 자주와 자유를 전제하고 또 신뢰하는 논리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61)

이와 같이 계몽주의의 근대사상을 단재의 논설을 통해서 볼 때62)초기 개화론에서 갖는 물질개화 편중과 주체성의 한계와 국민적 시각의 오류를 극복하고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극복을 통하여 공화주의 정치사상이 일어날 수 있었고, 이것이 또한 1907년 신민회가 결성되면서 전망되는 계몽주의의 좌파적 분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징이 단재의 경우만으로 보면, 1908년 중기부터의 일이었으니 이미 때가 늦어 구국운동의 효과면에서는 실기 失機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단재와는 달리, 당시 계몽주의자의 일반적 추세는 우파적이었고 그들은 1908년부터 제국주의 문명론을 더욱 강하게 부상시킨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63)즉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논조보다 『대한협회협보大韓協會會報』의 논조가, 『태극학보太極學報』보다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의 논조가 더욱 주체성을 상실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64)


2. 사회진화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계몽주의자의 근대주의가 개화파에 비하면 진보된 것이었다. 그것은 1907년 여름의 망국사태를 계기로 좌우파로 분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근대주의만을 보면 개화사상과 계몽주의의 전반적 추세와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개화인사들에 의해서 도입되고 있었고 또 개화인사나 한말 지식인의 사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사회진화론이 확산된 상태를 보면 양자의 차이가 완연하다.

사회진화론은 1870년대 영국에서 시작하여 1900년을 전후로 전 세계에 풍미했는데 그것은 산업혁명 또는 자본주의의 진행과 더불어 특히 영·독·미와 동양 삼국에서 극성이었다.65)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생물진화론의 파동이 일었는데, 그것을 스펜서H. Spencer가 인간사회에도 적용하여 자본주의적 적자생존론을 중심한 사회진화론을 제창했고 이어 헉슬리T. H. Huxley·헤켈E. H. Haeckel이 자연도태론을 중심한 진화론을 제기하였다.66)그리하여 19세기 후반부터 심화되어 갔던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문제나 국가 간의 제국주의문제를 비판 적 안목에서 반성하지 못하고 노동자에 대한 수탈과 국가간의 침략을 자연법칙으로 생각하는 반인도주의적 사상이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모순을 합리화하려는 논리는 인종진화론에 의한 백인주의를 강화시켰고, 기독교적 종교진화론까지 파생시켜 제국주의의 비극을 극대화시켰다. 그와 같은 비인도적이고 반사회적인 진화론이 한국에 전래하니 인간과 국가 문제를 경쟁투쟁개념으로 확대·적존適存·도태패망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지식인의 지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비관적 도태의 위기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구국의 계몽주의 논리를 성립시켜 나갔다.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전래한 것은 처음에는 주한 미공사관의 통역으로 미국인과 교류가 많았고 갑신정변 후 1895년까지 중국이나 미국에 유학한 윤치호尹致昊나 역시 갑신정변 후 미국에 10여 년 살다가 온 서재필徐載弼 그리고 일본과 미국을 유학한 유길준兪吉濬 등에 의해서 독립협회 활동기(1896~1898)에 전달되고 있었다. 당시 『독립신문』의 논조에 진화론의 논리나 생존경쟁生存競爭이니 우승열패優勝劣敗니 하는 용어가 상당히 소개되고 있었다.67)

진화론을 비교적 체계있게 전달한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인데,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도일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 복택유길福澤諭吉의 집에 머물며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유학한 후 1882년말에 돌아왔다가 또 1883년에는 파미사절의 수행원으로 도미하여 모스Edward S. Morse의 집에 하숙하며 유학하고 1885년에 귀국했는데68)그 후 그는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복택유길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대본으로 하여 자기 견문을 첨가한 내용인데 여기에 「경쟁론」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다경쟁론은 1883년에 쓴 것이다. 이것은 복택유길과 특히 미국의 진화론자 로서 일본까지 영향을 준 모스의 사상을 전수한 내용이었다.69)

『서유견문』은 1895년에 간행되지만 당시에 크게 읽히지 않았다. 사회진화론이 체계있게 전달된 것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 들어온 뒤부터였다70). 그것이 식자간에 널리 읽혔던 것은 물론, 때마침 전국적으로 울흥하던 학교설립과 더불어 그 교재로 채택되었으니71)그 속에 편집되어 있는 「신민설」·「시국」·「교육」·「학설」 등에 나타난 사회진화론이 시대지성 또는 구국논리로 전파되어 갔다.72)

더구나 청일전쟁·을미사변·아관파천, 특히 러일간의 각축 끝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통하여 우승열패를 확인한 처지에서 사회진화론을 의심없이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쟁의 힘을 국민적으로 기르는 계몽운동을 절감했던 것이다.73)그러므로 1904년 국민교육회부터 대한자강회· 신민회·대한협회 등의 계몽주의 단체는 물론 거의 모든 계몽주의자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구국계몽을 제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적 사고는 계몽주의 전후기에 관계없이 일관되었다.

1904년의 국민교육회는 그가 관장한 일성학교一成學校의 「운동가」에서 다음과 같이 경쟁시대를 말하며 교육구국을 외치고 있었다.



동서분도東西奔走 생산업은 인류동작최령人類動作最靈이라

생존경쟁 차세계此世界에 밀쳐가는 주보走步로다.

주야질탕晝夜秩蕩 저항력抵抗力은 육주웅권六州雄權 호거虎距로다.

확호불발確乎不拔 자강력을 운동하야 길너보셰 …74)



1906년의 대한자강회도 진화론적 의식의 산물이었다. 자강회의 발기인이며 발기사무소 주인이며 『대한자강회월보』 제1호 편찬자였던 윤효정尹孝定은 발기총회에서 취지 연설할 때 “고금顧今 전구全球가 개비대비교대경쟁적豈非大比較大競爭的 세계호世界乎아”라고75)외쳤으며 『대한자강회월보』 창간에 즈음해서는 “동포호同胞乎 동포호同胞乎 경쟁은 차하등시대호此何等時代乎며 약매弱昧는 아하등지위호我何等地位乎아”라고 하며76)진화론적 경쟁력의 배양을 촉구하였다.

 

개화기 간행되었던 잡지들


1907년부터 계몽주의 후기의 신민회나 대한협회도 마찬가지였다. 신민회란 이름 자체가 진화적 진보를 지향한 양계초의 신민설에서 연유하거니와77)그렇지 않더라도 신민회의 설립자인 안창호 외에도 박은식·신채호 등의 회원이 사회진화론자였다.78)대한협회도 창립 취지서에서 국가유기체설을 말하며 진화의 논지를 펴고 있었다.79)

사회진화론이 계몽주의의 전후기를 통하여 변화없이 고수되었던 사실은 1906년의 서우학회와 1908년의 서북학회가 함께 진화론을 표방한데서도 잘 나타나있다. 『서우학회월보』의 설립 「취지서」에서 “범물凡物이 고하면 급하고 군하면 강하며 합하면 성하고 이하면 패함은 고연지리固然之理라 인금세계矧今世界에 생존경쟁은 천연天演이오 우승열패優勝劣敗난 공례公例라”80)했고 『서북학회월보』 창간호에서도 역시 취지서와 같은 성격의 권두 「논설」에서 “이황而況 현금은 세계인류가 지력경쟁智力競爭으로 우승열패하고 약육강식하난 시대라 오족吾族의 지력智力이 타족他族을 부적不敵하면 유린탄蹂躪呑을 피하여 토태이진淘汰以盡함은 천연공례天演公例라”81)고 서우학회 때와 다름없이 「경쟁」의 천연과 우승열패를 공례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위의 계몽주의단체 외에도 장지연·안창호·박은식·신채호·윤효정·최석하 등 거의 모든 계몽주의자가 진화론을 펴고 있었고 그들에 의해서 편집되던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 진화론적 논설이 발표되고 있었다.82)이와 같이 사회진화론은 계몽주의를 특징 지우는 기초사상이었다. 역사의 변천을 정체적이거나 복고적이거나 순환적 시각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의 논리로 설명함으로써 미래지향적 사관을 일으키는 데는 사회진화론의 공헌이 컸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논리였다. 그중에도 자연도태사상은 참혹한 반인류적 논리였다. 열등한 인종은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는 공포에 전율케 하는 가증스런 이론이었다. 때문에 사회진화론은 구국의 논리로 공식화시킬 수 있었던 반면에 무서운 것은 패배주의에 함몰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에 근거하여 일제는 민족동화를 망상했고 패배주의자들은 동화를 오히려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않았던가. 진화의 법칙을 진리로 이해하면 인도주의나 사회정의는 무시당하고 말살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의병적 저항은 힘의 낭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화파 이래 서양과학에 대한 맹목적 수용자세가 사회진화론도 비판없이 추종하게 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다윈의 생물진화론도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처지에서 혹은 생물학의 기초도 없었던 처지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것은 이론적 사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 신앙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경쟁의 발전동력으로서의 긍정적 측면은 외면하고 투쟁으로만 생각하여 도태의 필연적 운명을 믿게 되었지 않았던가 한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앉아서 맞을 수밖에 없다는 자기비하의 의식까지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진화의 주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국가가 멸망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진화의 주체를 국가로 본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민족을 주체로 보았을 때와는 크게 다르다. 민족을 주체로 보면, 형상으로서의 국가가 멸망해도 진화의 주체인 민족은 존재하기 때문에 패배주의에 함몰하지 않고 진화와 경쟁을 위하여 노력하는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는 진화론적 논리가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이 계몽주의의 좌파적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양기탁·신채호·박은식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는 진화의 주체를 국가로 보았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자가 진화의 주체인 국가가 없는 일제하에 변절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대부분 1907년 말부터 계몽주의의 우파적 양태를 보이고 있었다. 즉 진화를 당연한 진리로 믿었으므로 퇴화도 진리로 보았고 자기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