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1장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 독립운동의 이념/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3. 16:03

제1장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

독립운동의 개념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운동의 방법론

2.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운동의 이념이란 독립운동의 방략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독립운동이 성공하면 어떤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목표를 말한다. 독립할 나라는 어떤 사회원리와 정치원리로 운영할 것인가 하는 목표이다. 이것을 방략과 합쳐 독립운동의 사상이라 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때는 광무황제를 중심한 근왕병적 독립운동이었으나 광무황제가 작고한 1919년부터는 근왕의 논리가 의지할 실체를 잃었으므로 근왕사상은 크게 후퇴하고 이념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1. 초기(1910~1919)의 이념

대한제국이 멸망해가던 때에 전개한 의병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은 대한제국을 보존하는 것이 이념의 전부이므로 보황주의保皇主義가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1907년 광무황제가 쫓겨나고 융희황제가 일제에 의해 즉위하면서 주권 행사가 사실상 무력해지자, 임금에 대한 기대를 후퇴시켜, 보황주의는 퇴색하고 공화주의가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운동 이념은 보황주의와 공화주의로 나뉘고, 그때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잔존하였으므로 3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 초기의 이념은 정치이념에 한정해 있었는데 복벽주의전제군주제·보황주의입헌군주제·공화주의민주공화제로 대별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 당시 모습이었다. 복벽주의자는 보황주의를 택할 때도 있었고, 보황주의자도 공화주의를 넘나들었다. 공화주의자로 알려진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가 1917년 광무황제를 중심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 필요에 따라 보황주의를 수용하고 있었다는 사례라 하겠다.

명망 높은 박은식·신채호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이 조선 동포를 대변한다고 말해도 믿어줄 위력을 갖지 못했다. 그때 광무황제를 앞세울 필요를 느끼게 되어 광무황제의 망명을 추진하고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던 것이다. 망명정부의 추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망명정부 추진은 세 갈래가 있었는데 1908년 유인석柳麟錫이 연해주에서 추진한 것이 처음이고, 다음이 신한혁명당의 것이고, 비슷한 시기에 이회영李會榮이 추진한 것까지 모두 세 갈래 있었으나 성공한 것은 없었다. 이러한 임금의 망명 추진에 불안을 느낀 일본 경찰이 광무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 ‘광무황제 독살설’의 주장이다.


2. 중기(1919~1931)의 이념

독살 여부 간에 광무황제가 승하하자 정치논의는 자유로워졌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어느 이야기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라고 해도 제국주의전쟁인 제1차세계대전 후반에 이르자 세계개조의 신기운이 풍미하여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갔다. 레닌의 민족자주론이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하지 않더라도 1917년 미국의 연합군 참전과 2월혁명, 10월혁명을 통한 러시아의 개조와 반동 카리스마였던 원세개袁世凱 사망 후의 중국은 북경北京 중심의 군벌정권과 광동廣東 중심의 민주정권이 대립하여 개조의 신기운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신기운은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접어든 일본에서도 불기 시작했을 때인 1918년 말에 광무황제가 승하한 것이다. 자유로운 정치논의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을 동시에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17년에 민족 선각자들은 비밀리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돌리고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세계사회당대회에도 참석할려고 했다. 공공연하게 인도주의가 제창되었다. 이쯤 되자 자유주의·평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어느 용어도 부담되거나 구속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때에 3·1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서울의 3·1운동에서는 정의 인도를 위하여 사회개조·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만주의 3·1운동 선언서에서는 독립군의 궐기를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3·1운동이 3~5월에 걸쳐 전개되는 가운데 정의·인도·독립·민주주의·사회개조 등의 논의는 급한 물살을 타고 퍼져나갔다.

3·1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독립을 하면 누가 임금이 되느냐라는 소박한 질문이 시골 소박한 백성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그에 대하여 임금 없는 나라를 세운다고 역시 소박한 답변이 민중사회에 확산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임금 없는 나라로 미국·러시아·프랑스가 있었다. 러시아와 프랑스에서는 황제를 처형하여 없앴다. 그러므로 임금 없는 나라로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것을 민주공화국이라 한다는 정치 계몽도 동시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 이념의 논의가 폭넓고 자유롭게 이루어져 나갔다. 그때에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논의의 강력한 촉진제가 되었다. 임시정부 헌장은 다양한 이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헌장이 연통부와 교통국 조직, 혹은 특파원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사회 구석구석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신사상연구회 조직 및 활동


그때에 국내에서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탄생하였다. 이때 신사상이란 사회주의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를 말했다. 사회주의란 처음에 무정부주의를 가리켰는데 1925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당 무렵을 전후하여 공산주의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념은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의 세 갈래 논의로 정리되어 갔다.

해외에서는 1918년에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결성되어 볼셰비키 혁명전사가 적지 않게 배출되고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혁명 조국을 이상향으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만주에서는 1920년 간도참변이후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체제로 정비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자유주의를 추구하던 사람은 임시정부와 미주동포 독립운동가와 그와 연락하던 국내 인사들이었다.

그렇게 보면 1920년대 독립운동의 이념은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뚜렷하게 정립하고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복합되어 존재한 것이 1927년의 신간회新幹會였고,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보자는 운동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었다. 그리고 1926년의 6·10만세운동이나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원산노동자파업·용천소작쟁의 등 에 이념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3. 후기(1931~1945)의 이념

1930년대에는 20년대 신간회처럼, 이념의 복합적 반영이나 복합적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념의 단순화가 요구되었다. 그러한 요구는 1931년 신간회 해체로 나타났다. 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도 후퇴하고 말았다. 사회주의운동은 철저하게 계급노선을 추구하는 극좌노선이 지배하였다. 1928년 6차 코민테른대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노선에는 민족주의가 크게 후퇴하였다. 그때 만주에서 민생단民生團사건이 발생하여 공산주의자가 민족을 표방하면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숙청으로 희생된 인원이 5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립운동단체는 모두 지하로 잠적하여 비밀투쟁을 전개하는 1930년대가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 속에서 다시 민족을 상위개념에 놓고 1920년대와 같은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 전략이 채택된 뒤부터였다. 30년대 후반부터 학생운동 단체도 민족을 표방하기 시작하고 만주에서는 좌파인물을 중심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생기가 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1년 전 세계가 전쟁의 불속에 들어간 때부터는 세계는 경쟁적으로 민족을 표방하게 되었고, 한국독립운동도 어느 이념보다 민족을 상위개념에 두고 싸웠다. 학생운동 단체 문서에서 조국·광복·독립·민족 등의 문구를 찾아보기 힘들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라고 해도 어느 것 하나 한국에서 검증해본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라고 하면, 개인주의의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회주의라고 하면, 유물사관과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는 각기 설명이 달랐다. 무정부주의는 자치협동의 사회 건설이라는 이상보다는 권력부재·정부부재·지배부재라는 현상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검증없이 시험하는 해방정국이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