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애국계몽운동의 역사적 의의 / 애국계몽운동 Ⅰ 정치사회운동

몽유도원 2014. 6. 23. 09:48

제5장 애국계몽운동의 역사적 의의


계몽운동의 역사적 의의


애국계몽운동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이 피탈되어 가는 시기에,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개화자강계열의 무수한 민족운동단체들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활동을 통하여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문화의 향상,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족군대의 양성을 통하여 민족역량을 배양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한 광범위한 구국민족운동이었다.

첫째로 애국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하였다.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은 일제의 보호국체제에서 벗어나 국가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국권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전근대적인 전제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국민의 주권을 확립하려는 국민국가건설은 또 다른 궁극적인 목표였다. 민족운동을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자유민권이 향유되는 국민국가의 건설을 도외시하고 민권부재의 전제왕권을 존속시킨 채로 단순한 국가독립운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민족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 민족운동이란 외형적인 국가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내면적인 국민

국가건설운동을 포괄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민국가건설을 전제로 하여 국권회복을 목표로 내세웠던 애국계몽운동은 당시의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고 근대사의 발전방향에 합치되는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의 이념은 ‘국권피탈’ 이후 민족운동의 주류가 복벽주의復辟主義로 흐르지 않고, 근대국가건설을 전제로 한 근대적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게 한 점에서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註1)

둘째로 애국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제시하였다.

한말의 애국계몽단체들의 국권회복의 전략은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으로 집약되어진다.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 합법단체들은 군사강국인 일제에 대항하여 즉각결전에 의한 국권회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준비없는 무력항쟁은 실력의 파괴만을 초래한다는 판단 하에 국권회복을 위해 국민계몽·교육진흥·산업개발·정치개혁 등을 통한 국민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밀결사인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실력양성과 더불어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민족의 군사적 실력양성을 또 다른 당면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것은 적절한 시기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국권회복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것이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투쟁에 있어 본능적·감성적 대응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으며,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는 민족역량의 배양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에서, 애국계몽단체들의 실력양성론은 우리 민족운동사에 있어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註2) 더

욱이 국민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과 일제와의 근대전을 전제로 한 민족의 군사적 실력양성을 배합시킨 신민회의 국권회복전략은 합법적 계몽단체들의 무력투쟁을 배제한 독립쟁취 의지의 취약성을 보강하고, 항일의병의 준비없는 즉각결전의 무모성을 보완한 것으로 우리 민족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신민회의 독립전쟁 전략은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투쟁방법을 발전적으로 종합하여 ‘국권피탈’ 이후 독립운동전략의 골격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운동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註3)

셋째로 애국계몽운동은 실제로 민족역량의 축적을 통하여 장기적인 민족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단체들의 사회계몽운동은 다수의 지식인·실업가·민중들을 근대의식과 민중의식으로 개명시켜 국권회복운동의 대열에 서게 했다.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3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사회일반에 놀라운 교육열을 불러 일으켰다. 註4) 애국계몽단체들의 교육구국운동은 이처럼 무수히 설립된 사립학교를 통하여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보급시켜 한국의 교육체계와 지식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령·학회령 같은 일제의 교육탄압을 무릅쓰고 근대적 민족교육도 발흥시켜 민족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애국계몽단체들의 경제구국운동은 사회일반에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한 경각심과 근대적 경제의식을 일깨워 전국 각계각층의 국민들로 하여금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경제적 자주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다수의 애국적인 실업인들로 하여금 근대적인 상회사와 공장들을 건설하여 일제의 독점적인 대자본에 맞서 근대적 민족산업을 발흥시키고 민족자본을 육성토록 하여 민족독립운동의 경제적 토대가 되도록 시도하였다.

나아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민족의 군사력 양성운동은 결실을 맺어 1910년대에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애국계몽세력과 항일의병세력의 제휴 하에 독립군기지가 설치되고 근대적인 독립군이 양성되었다. 이와 같은 근대적 독립군의 양성은 3·1운동 이후 무수한 독립군부대의 출현과 근대적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註5)

이처럼 애국계몽운동은 실제로 민족의 일대 분발과 지적·경제적·군사적인 민족역량의 증강을 통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민족운동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은 민족운동으로서 일정한 한계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첫째, 애국계몽운동은 각계 각층의 진보적인 정치세력·사회세력이 그 이전 단계보다 한층 더 확대된 근대적 민중운동을 전개했으나 농촌사회까지 침투하여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서울과 지방도시의 지식층과 개화유생층의 운동에 국한된 감이 있어 대중성의 부족이 그 한계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둘째, 애국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으나 합법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는 일인 고문을 두었고, 대한협회는 한때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유착관계를 가졌다.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독립전쟁론도 즉각결전이 아닌 독립전쟁 준비론의 성격이 짙어 전투성의 부족이 그 한계성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셋째,

애국계몽운동은 국민국가 건설을 또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신민회는 공화정체의 확립을 공식목표로 세운 것처럼 그 이전 단계에 비하여 국민주권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었지만, 애국계몽운동의 주류는 ‘국권피탈’ 때까지 주로 정치의식의 계몽에 그쳤을 뿐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혁명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여 혁명성의 결여는 한계성으로 지적될 수 있다. 註6)

그럼에도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의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예속 하에서 국민들을 일대 각성시켜 당시 사회를 근대적 민족적 측면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민족역량을 증강하여 일제식민통치하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했다. 또한 ‘국권피탈’ 이후 우리 민족운동의 주류가 민족의 독립과 근대국가의 건설이라는 근대적 민족운동이념에 귀일케 하고,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 근대전의 수행이라는 근대적 독립전쟁전략을 기본노선으로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민족운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註 1] 윤병석, 「제국주의침략에 대한 한국의 저항」, 『한국근대사회와 제국주의』, 185~186쪽. ☞

[註 2] 강재언, 「新民會の活動と百五人事件」, 『朝鮮の開化思想』, 403쪽. ☞

[註 3] 윤병석, 「제국주의침략에 대한 한국의 저항」, 『한국근대사와 제국주의』, 185~186쪽 ;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23~124쪽. ☞

[註 4] 『황성신문』 1909년 5월 8일 잡보 「私立學校認許數」. ☞

[註 5]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22쪽 ; 윤병석, 「제국주의침략에 대한 한국의 저항」, 『한국근대사와 제국주의』, 176쪽. ☞

[註 6]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84, 240~2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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