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군사분야의 운동 / 애국계몽세력의 정치사회운동 / 애국계몽운동 Ⅰ 정치사회운동

몽유도원 2014. 6. 22. 20:44

4. 군사분야의 운동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계몽가들은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근대전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을 추진하였다.

합법단체인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 등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민족의 실력양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양성된 실력을 독립으로 연결시키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근대적 지식과 경제적 자립능력, 강건한 애국정신과 정치참여 능력이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이 양성되어 문명화가 이루어지면 보호국체제가 철폐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註315) 그러나 일제의 병합정책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다수의 애국계몽가들은 합법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고자 하여 비밀결사운동을 꾀하였다.

비밀결사 신민회 중심의 애국계몽가들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일제와 근대전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이제 이들 애국계몽가들이 구상한 독립전쟁론과 서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항일민족운동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독립전쟁론과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1907년의 군대해산과 정미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행정권·사법권·경찰권을 장악한 일제는 한민족의 국권회복운동에 대하여 강도 높은 탄압을 가해 왔다. 이에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던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일각에서는 항일투쟁 방법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항일의병장 가운데서는 국내에서의 즉각결전보다 국외에서의 장기적인 무장투쟁이 모색되었다. 애국계몽가들 가운데서는 국내에서의 실력양성에 더하여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이 모색되었다. 항일의병운동의 전통적인 ‘즉각 결전에 의한 즉시 독립론’은 실력양성에 의한 점진적 독립론으로 전환을 모색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지적 경제적 ‘실력양성에 의한 자강독립론’은 군사력의 양성에 의한 근대적 독립전쟁론으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독립전쟁론은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 등 합법단체의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다수 포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주도하였다. 신민회의 국권회복론은 기본적으로 먼저 실력을 양성한 다음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선실력 후독립론’이었다. 이러한 신민회의 ‘선실력 후기회론’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선자강 후독립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외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군사적 실력양성론이었다. 이는 군사적 실력양성에 의한 독립전쟁론인 점에서 합법단체의 국권회복론과 차별성를 가진다. 註316) 곧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구상은 일제로부터 한국민족이 독립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적절한 기회에 일본과 근대전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신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인사들의 독립전쟁론은 1907년 7월과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광무황제 퇴위와 정미조약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 등의 망국적 사태가 벌어지고, ‘신문지법’과 ‘보안법’의 제정으로 합법적인 민족운동이 극한점에 달한 상황에서 구상되었다. 신민회의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은 의병운동의 퇴조기에 구체화되었다. 註317) 신민회는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사안을 의결하고 이의 실행을 계획하였다. 註318) 독립군 양성의 거점은 1860년대 이래 이주에 의하여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는 서북간도西北間島와 러시아령 연해주지역이 상정되었다.

신민회가 구체적으로 독립전쟁론을 채택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때는 안중근의 이등박문포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된 신민회 간부들이 석방된 직후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석방된 간부들을 중심으로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독립전쟁론’을 국권회복의 최고 전략으로 채택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신민회 긴급간부회의는 일제에 의해 구속당했던 간부들이 우선적으로 국외로 나아가 독립군기지 건설사업을 담당하고, 국내 잔류 간부와 회원은 이 사업을 지원함과 동시에 종래의 실력양성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註319)


신민회가 독립군기지로 선정하였던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전경

 


이때 결정된 독립운동기지 건설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로 국내에서 재력있는 다수의 인민을 서간도에 집단 이주시켜 토지를 매입하여 부락을 만든다는 것, 둘째로 서간도에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며,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 교육을 실시하고 사관을 양성한다는 것, 셋째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군을 창설하여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註320)

이것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적절한 시기’에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전쟁 전략’이며, 당시 합법단체들이 지닌 국권회복론의 한계성을 한 단계 극복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족의 실력’이란 근대적 지식과 경제적 자립능력, 그리고 확고한 민족정신과 근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적절한 시기’란 장차 일제가 더욱 팽창하여 러시아나 청국 또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때와 같은 독립전쟁의 기회를 의미한다. 註321) 신민회의 독립전쟁전략은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정책을 써서 열강과 전쟁을 일으키면, 국외의 독립군으로 하여금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게 하고, 국내에서는 신민회를 비롯한 애국계몽세력들이 민중을 결집하여 이에 호응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한다는 방침이었다. 결국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론은 일제가 장차 침략전쟁을 벌이는 시기에 대비하여,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註322)

국외로 망명한 신민회 간부들은 1910년 4월의 청도회의靑島會議와 9월의 해삼위회의海蔘威會議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였다. 註323) 그러나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한 한인들의 만주에서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이미 을사조약 체결 이후부터였다. 이때 북간도의 용정촌龍井村과 명동촌明東村, 소만蘇滿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密山府의 한흥동韓興洞에서는 애국계몽인사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적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註324)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렬·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이강 등은 중국 청도로 출국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청도회의’에서는 우선 신문·잡지의 발간으로 독립정신을 계몽하자는 유동열·김희선 등의 입장과 농지개척 사업으로 당장 이주민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자는 안창호·이갑 등의 입장으로 나뉘어 독립군기지 건설준비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註325)

국권피탈 직후 1910년 9월에 열린 ‘해삼위회의’에서 신민회 간부들은 독립전쟁론에 뜻을 같이했으나 추진 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 전쟁론과 점진적 전쟁론으로 나뉘었다. 곧 유동렬·김희선 등은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장기적인 독립군의 양성보다 당장 국외 교포들을 모아 독립군을 결성하여 즉각적으로 국내에 진공할 것을 주장한 반면, 안창호·이갑 등은 장기적인 전략으로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건설하여 독립전쟁의 토대 구축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 노선상의 갈등으로 힘이 분열되어 안창호·이갑 등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註326) 유동렬·김희선 등이 독립군의 모집을 위하여 연대煙臺로 갔다가 체포됨으로써 註327)즉각적인 독립전쟁론도 실패하고 말았다.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 잔류한 신민회 간부들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한인의 집단적인 서간도 이주를 결정했으며, 1910년 가을 양기탁·이동녕·주진수朱鎭洙 등은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독립운동기지 후보지를 선정하고 한인집단이주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0년 12월에 양기탁·안태국·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은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① 국내에서는 서울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각도에

는 통감統監을 두어 비밀리에 국민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것, ② 국외에서는 서간도 통화현通化縣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일 것, ③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하여 국내로부터 계획적인 집단이주를 시행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註328)

이와 같은 신민회의 독립전쟁전략이 결정된 직후부터 한인의 서간도 이주사업이 급속히 진전되어 국내에서 이주민 모집과 자금 확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한인의 국외 집단이주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그럼 신민회의 재정 확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신민회는 그 조직을 통하여 자체적으로 자금 확보에 주력했고, 국외 이주민에게 자금 휴대를 권장하고 있었다. 1910년 4월에 열린 청도회의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에 소용되는 자금을 이종호가 우선 조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매입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개인에 의해서 충당될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1910년 가을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의 ‘서간도 이주회의’에서는 단체이주를 시행하되, 될 수 있는 대로 1인당 금金 100원 이상을 휴대할 수 있는 이주민을 우선적으로 모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각도 대표로 양기탁경기도·삼남·김구황해도·안태국평안남도·이승훈평안북도·주진수강원도를 선정하여, 이주민 모집과 함께 군자금 확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외에 신민회 회원들이 솔선수범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주진수 등은 가산을 전매하여 이주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註329)

신민회 간부 및 회원들은 1910년 12월부터 이동녕과 이회영 5형제, 주진수의 가족들 및 애국청년들의 단체이주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신민회는 1911년 봄에 서간도로 대규모의 한인 집단이주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1년 1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의하여 신민회 중앙간부와 황해도 지회 회원들이 대거 검거되었고, 9월에는 사내寺內 총독 암살미수로 날조된 ‘105인사건’에 의하여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이 다시 체포되는 등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註330) 그러나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북간도와 서간도, 그리고 연해주에 독립군기지가 건설되어 갔다. 당시에 서북간도와 연해주에는 이미 많은 한인들이 이주 정착하여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생계유지가 어려운 한인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만주지역은 농토가 비옥하였고, 특히 간도지방은 우리 민족의 옛 땅이었으므로 고국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만주와 연해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쉽게 이주할 수 있었다. 1860년대 이후에 청과 러시아가 변방 개발을 위해 한인 이민을 환영하기도 하였다. 한말에는 항일의병들과 애국계몽인사들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하여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으며, 일본의 토지약탈로 농토를 잃게 된 농민들도 생계를 찾아 이주하였다. 註331)

만주지역에는 1860년대에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는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 일대에 한인들이 밀집해 살았고, 연길현과 화룡현에 이어 해란강 유역에도 한인마을들이 형성되었다. 1890년대에는 목단강 방면의 하얼빈 일대까지 한인들이 이주하였다. 서간도방면에도 백두산 서쪽, 압록강 너머 혼강渾江 일대를 중심으로 집안현·통화현·유하현·장백현 등 넒은 지역에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1910

년경 만주지역에는 20만 명 이상의 한인들이 거주하였다.

연해주지역에도 1860년대 초기부터 한인들이 가족 단위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일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한인들이 이주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귀화정책에 의하여 토지를 분배받기도 하고 소작인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연해주지방에 15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거주하였다. 사실상 연해주의 대부분은 한인들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註332)

만주와 연해주지역의 한인들은 주로 집단마을을 형성하여 자치기구를 만들고 자제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그리고 을사조약 이후로 이 지역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2. 북간도·북만지방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

애국계몽인사들에 의하여 국외 독립운동기지가 가장 먼저 착수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너머의 북간도지역은 한민족의 연고지로 1900년대 한반도가 일제의 침략 아래 짓밟히면서 민족의 신천지로 대두된 곳이다. 북간도는 흔히 백두산 동쪽의 연길·화룡·왕청 3개현을 지칭하지만 훈춘·액목·돈화·동녕·영안 등 5개현을 포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한말에 수많은 애국계몽인사들은 북간도지역에 언론기관·학회·교육단체, 그리고 다수의 사립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용정촌 서전서숙瑞甸書塾, 화룡현 명동학교明東學校,

연길현 광성학교光成學校, 왕청현 동흥학교東興學校, 혼춘현 북일학교北一學校 등 북간도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는 항일민족교육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그중 서전서숙은 북간도지역에서 신교육에 의한 민족주의 교육의 효시를 이루었다. 註333)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중심이 되어 북간도의 중심지인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되었다. 을사조약에 반대했다가 투옥된 이상설은 1906년 봄에 석방된 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가 북간도 용정으로 옮겨가 이동녕·정순만·여준呂準·박정서朴楨瑞 등 애국계몽인사들과 함께 1906년 9월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이상설은 개인 재산으로 70여 평의 건물을 마련하고 이곳 동포들의 자제 22명을 모아 서전서숙을 시작하였다. 註334)

이상설·이동녕·정순만 등 서전서숙 설립 인사들은 사재를 털어 무상교육을 하였고, 민족교육에 뜻을 둔 지사들의 성원으로 학교 운영이 활발해져 1907년에는 학생수가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갑반 20명, 을반 20명, 병반 34명으로 분반하여 3개 반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들 각 반 학생들에게 실시한 교육목표는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의 함양이었다. 교과목도 국어·역사·지리·풍속·산술·국제공법·정치학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 필요한 국학과 근대의식의 함양에 필요한 학문이 주가 되었다. 산술은 이상설과 김우용金禹鏞, 역사와 지리는 황달영黃達永, 한문·정치학·헌법·국제공법은 여준 등이 각기 분담해서 교육하였다. 서전서숙은 서양 선진문명의 수용과 관계있는 근대교육과 더불어 철저한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독립군양성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註335)

이처럼 근대교육과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여 일종의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던 서전서숙은 1907년 가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서전서숙의 주도자인 이상설이 헤이그특사가 되어 그해 4월에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고, 그 뒤 서숙의 재정 상태가 어려워졌다. 그해 8월에는 일제 통감부가 용정촌에 간도파출소를 두고 애국지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여 더 이상 서숙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註336) 서전서숙은 민족교육의 실시와 독립군기지의 건설을 통하여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했던 애국계몽인사들에 의해 설립되어 북간도에 있어서 항일민족교육의 상징적 기관이 되었다. 후일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서전서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교육의 진흥, 거금 13년 전에 이상설·이동녕·정순만·박무림朴茂林=朴禎瑞제씨가 5조약이 체결된 것에 국권의 타락됨을 분탄憤歎하야 용정촌에 내來하여 서전서숙을 설하니 차는 간북교육墾北敎育의 기원이다. 참담한 경영으로 80여 명의 청년자제를 모집하야 철혈적 정신으로 교도하다가 불행히 왜倭 통감부파출소가 들어온 결과로 8개 월 넘지 못한 단기교육이나 후일 간북교육에 큰 성공이 되었다. 그 다음 간민교육墾民敎育의 설력設力으로 다수한 학교가 도처 설립되는 그때에 서전서숙 학생의 노적勞績이 가장 불소不少하였다. 註337)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 뒤 일부는 서울로 유학을 가고, 대부분은 자기 마을에 돌아가 서전서숙의 건학이념과 교육정신을 계승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교가 명동학교이다. 서전서숙이 폐숙된 뒤 1908년 4월 김약연金躍淵은 박정서·여준 등 서전서숙 관계자들과 합력하여 용정촌에서 40여 리 떨어진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종성鍾城의 한학자였던 김약연은 1899년 마을 사람들과 화룡현 장재촌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인마을인 ‘명동촌’을 건설하고, 전통 유학교육을 실시하던 규암재圭巖齋 등 세 곳의 서당을 통합하여 서전서숙을 계승할 교육기관으로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註338)

이 무렵 이동녕과 이동휘를 고문, 정재면鄭載冕을 단장으로 하고 기독교 전도사·의사·재무담당자를 포함하는 ‘신민회 북간도교육단’이 파견되었다. 정재면이 명동서숙의 교사로 초빙되면서 명동서숙은 1909년 4월 명동학교로 개칭되었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보광학교 교사였던 정재면은 명동학교를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근대학교로 개편하고, 김약연 등 명동촌 전체를 개종시켜 명동학교를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는 기독교학교로 개편했으며, 뿐만 아니라 명동교회明東敎會도 설립하여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을 병행하였다. 1910년 3월에는 종래의 초등 교육과정에 더하여 3년제 중학과정을 증설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김약연이 교장직을 맡고 국내의 우수한 민족주의 교사들인 황의돈黃義敦·장지영·김철金哲·김홍일金弘壹 등이 초빙되어 국사·한글·윤리·체육 등을 가르쳤다. 그 외에 최기학·박정서 등 도합 11명의 교사가 있었다. 1911년 당시 학생수는 남자 114명, 여자 46명으로 도합 160명에 달하였으며, 1914년에는 수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명동학교는 문무쌍전의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여 북간도지역 민족교육의 본산이 되었다. 註339)


1910년대 명동학교 전경

 


명동학교에서는 각종 시험에서 작문을 중요시하였는데, 거기에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담지 않으면 낙제점이나 불량성적을 받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파병을 감행한 뒤 독립군과 민족운동자들을 탄압 학살하고 명동학교를 소각했을 당시, 명동학교가 강력한 항일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보고 자료가 알려주고 있다.



학교명동학교 교수용 지도 및 기타 서적 중의 다른 것도 모두 조선을 일본 본토와 다른 색깔로 표시하였고, 장식용 만국기 중 구한국기태극기는 있어도 일장기는 한 장도 없었다. 註340)

명동학교의 기반이 마련된 뒤 김약연·정재면 등 명동학교 관련 민족운동자들은 북간도의 한인사회를 조직하여 한인의 자치와 경제적 향상 및 독립운동을 추진할 기구로서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조직하였다. 간민자치회는 북간도 제1의 도시인 연변 국자가局子街 연길에 본부를 두고, 한인마을 도처에 지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러나 간민자치회는 일본측과 중국 관헌들이 한인의 자치활동을 방해하려는 책동 때문에 그 명칭을 ‘간민교육회’로 개칭하고 1910년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註341)

간민교육회는 이동춘李同春을 회장으로 하고 회원의 다수는 간도지방 각 학교의 교원들로 구성되었다. 주요 인물은 박정서·김약연·정재면·계봉우·김립金立·윤해尹海·김영학金永學 등이었다. 간민교육회는 한인마을에 학교를 설립하도록 장려하고, 기관지로 『교육보敎育報』를 간행하여 한인교육의 활성화에 노력했다. 광성학교의 계봉우, 명동학교의 정재면, 창동학교의 남공선南公善 등 3인을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삼아 초등·중등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간민교육회가 민족교육을 위해 보급한 『대한역사』·『유년필독』·『대동역사략』·『월남망국사』·『오수불망吾讐不忘』 등 역사교과서는 국내에서는 사용 금지된 것들이었다. 당시 간민교육회의 역사교육은 단순한 ‘역사지식의 교육’이 아니고 민족의식과 반일사상을 고취하려는 ‘역사의식의 교육’이었다. 註342)

간민교육회는 그 산하에 연구회를 설치하여 중국 지방정부의 한인교육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또한 이주한인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관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인들의 법적문제를 직접 중재하여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註343) 간민교육회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로를 닦고 깨끗한 우물을 파 위생시설을 갖춘 모범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고, 생산·판매·소비조합의 운영을 통하여 농촌부흥도 도모하였다. 이밖에도 간민교육회는 한인사회에서 교육회비와 지세, 토지매매세 등을 징수하는 등 자치단체로서 역할을 하였다. 註344)

1911년 손문孫文이 영도하는 신해혁명이 성공하여 1912년에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가 ‘연성자치聯省自治’를 표방함에 따라, 간민교육회는 ‘간민회’로 개명하고 정부조직 형태를 가진 자치기관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 지도자 이동춘·김약연·김립 등은 1913년 4월에 중국정부으로부터 정식허가를 받아 간민회를 북간도 조선인의 합법적 자치단체로 출범시켰다. 간민회는 중앙에 회장과 부회장, 총무 그리고 7개 부서를 두었다. 초대 회장에는 김약연, 부회장에는 백옥보, 총무에는 도성都城, 민적과장에는 남공선, 식산흥업과장에는 이동춘 등이 임명되었다. 간민회는 총회본부를 국자가에 설치한 뒤 연길현·화룡현·왕청현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고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행정자치를 실시하였다. 註345)

간민회는 중국 지방당국의 권한에 속하는 호구조사 사업을 협조하는 가운데, 1910년 초 15만에 달하는 간도지역의 한인 인구를 파악하고, 500호 이상 1,000호 이내의 범위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여 한인들로부터 간민회 의무금을 징수하는 등 한인관리 사무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고 간민회는 토지조사 사업과 더불어 간도지역 한인의 토지매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간민회는 한인 이주민의 80%가 농민임을 감안하여 한인들의 토지매매 문제에 간민회가 간여하여 한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간민회는 교육사업을 강화하면서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여 각지 한인마을과 한인학교의 학생들과 학부형들을 한자리에 모아 한인사회의 유대강화에 노력하였다. 1913년 용정촌에서 열린 ‘연변학생대운동회’에는 한인 학생과 학부형 1,500여 명이 모였으며, 2일간의 운동회가 끝난 뒤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일제시대의 운동회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민족대단합’의 실천이었다. 註346) 특히 간민회는 각종 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항일사상을 키워나갔는데, 1911년 한 해에만 36개의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들은 훗날 대일투쟁의 인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간민회는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註347) 간민회는 1914년 명맥을 다할 때까지 ‘북간도지역 한인에게 조국정신을 고취하여 사상 변천의 일대 기원’이 되었다. 註348)

한편 해외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회복을 꾀했던 민족운동자들은 1909년부터 독립군기지 건설을 목표로 북간도와 더불어 북만주 소만 국경지대의 밀산부密山府 경영에 착수하였다. 헤이그특사로 활동했던 이상설과 이 지역 한민회韓民會 회장 김학만金學萬, 정순만과 유학자 이승희 등은 이곳 수 천리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의 ‘한흥동’을 세우고 한민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註349) 밀산부 한흥동은 미국에서 조직된 국민회와 안창호·신채호 등이 주도한 신민회에서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하고 그 기지로 건설하고자 노력했던 곳이었다. 註350)

1910년대 초에 이갑李甲 등 신민회 회원들은 밀산현 봉밀산자蜂密山子에 밀산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1912년에 신민회 간부 이종호 등은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 중학과정의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3년에 이동휘·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은 이곳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일명 大甸學校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註351) 이동휘 중심의 동림무관학교와 이갑 중심의 밀산무관학교는 각각 신민회의 함경남북도 지회와 평안남북도 지회의 회원이 중심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북간도와 북만지방에서는 애국계몽인사들을 중심으로 한인촌을 건설하여, 한인학교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세우며, 한인자치단체를 만들어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갔다.


3. 서간도지방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

서간도는 백두산 서남쪽 압록강 너머 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송화강 중상류 지역인 집안·통화·유하·회인·관전·임강·장백·무송·안도·흥경·해룡 등 11개 현을 지칭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뒤 신민회 간부들을 비롯한 애국계몽인사들이 독립군기지의 건설을 위하여 이곳에 집단으로 이주하였다. 이회영·이시영의 형제를 위시하여 이동녕·이상룡·김창환·주진수 등의 선발대는 그들의 가족들을 이끌고 1911년 봄까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다. 이회영 가족의 경우, 11 남매 50여 명의 대가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토지를 팔고 1910년 말에 압록강을 건너갔다. 註352)

이들 선발대에 이어 삼엄한 일제 군경의 감시 속에서 국내의 각 도, 각 군에서 동포들의 망명 이주가 계속되었다. 1911년 초 안동 출신 이상룡과 울산 출신 주진수가 망명한 뒤 그 부근 일대에서는 이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후속 이주가 활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1911년 주진수의 권유로 영양·봉화·예안·안동·영해 등지에서 87명이 영천역과 대구역을 통하여 떠났고, 이상룡의 뒤를 이어 경북 각 군의 이주열이 고조되어 1912년 1월부터 9개월 동안에 1,092명이 망명·이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註353)

1911년 4월 이동녕·이회영·이상룡 등 신민회 간부들은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한인 자치기구로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경학사란 ‘경耕’ 곧 실업과 ‘학學’ 곧 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한다는 취지에서 조직되었다. 경학사의 사장에는 이상룡, 내무부장에는 이회영, 농무부장에는 장유순, 재무부장에는 이동녕, 교무부장에는 유인식이 선임되었다. 경학사는 설립 이후 토지 개간과 농업 경영으로 한인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일종의 자치기구로서 민단民團의 역할을 하였다. 경학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재만한인사회를 묶어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구국단체의 역할을 하였다. 곧 경학사는 서간도지역의 대일투쟁의 선봉 단체가 되어, 한인의 이주와 정착, 민족의식의 고취, 문무쌍전의 민족교육 실시, 군사훈련의 실시 등을 통하여 한인 거주지를 항일독립운동기지로 만들어갔다. 註354)

경학사 설립과 함께 근대교육과 군사교육의 실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가 설립되었다. 사관 양성기관으로 설립된 신흥강습소의 명칭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나라를 일으키는興國 구국투쟁을 한다는 ‘흥興’자를 모아 ‘신흥新興’이라 한 것으로 신민회흥국투쟁新民會興國鬪爭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강습소’라는 명칭은 주변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註355) 신흥강습소의 교직원으로는 이동녕·이상룡·이철영李哲榮·이광李光이 교장으로, 김달金達이 교감으로, 윤기섭이 학감으로, 김창환·이장녕·이갑수·양성환梁聖煥 등이 교관 및 교사로 활동하였다. 註356)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인 이동녕과 초대 교감인 김달 등은 신민회 출신이었고, 사실상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의 일환으로 설립·운영되었다. 양성환 등 교원 다수는 대한제국시기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신흥강습소에는 중학과정의 본과와 무관양성 교육을 위한 속성과가 있었다. 註357)

경학사의 지도자들은 흉작과 수토병水土病 때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남쪽으로 90여 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合泥河로 옮기고, 1912년 가을에 경학사를 강화하여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다. 부민단은 경학사의 토대 위에 자치 범위를 확대하여 기구를 정비한 것이다. 부민단은 “부여구강扶餘舊疆에 부여유민扶餘遺民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의미로, 신민회와 경학사의 정치적 이념인 공화정치를 표방하며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체제상으로 중앙과 지방을 분리하여 자치정부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는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의 부서를 두고 총장이 이를 총리케 했다. 초대 총장에는 허위許蔿의 형인 허혁許赫이 추대되었고, 다음에는 이상룡이 선임되었다. 지방에는 1,000가家·100가·10가를 단위로 조직화하여 천가장千家長·백가장·십가장을 두었다. 이처럼 부민단은 한인사회의 중앙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자치단

위를 효과적으로 조직화하였다. 註358)

부민단의 표면적인 사업은 재만한인의 자치를 담당하고 재만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 재만 동포들을 대신하여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처리해 주는 것, 그리고 재만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만한인을 토대로 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註359)

부민단은 1913년 5월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명하고 독립군 간부양성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신흥중학은 여준이 교장, 윤기섭尹琦燮이 교감, 이규봉李圭鳳이 교사, 김창환金昌煥이 교관을 담당하였다. 신흥중학에는 4년제 중학과정의 본과가 있었고, 6개월 과정의 장교반과 3개월 과정의 하사관반이 있었다. 본과는 중학교 수준의 문무쌍전교육으로, 교과내용에서 무관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을 강화하였다. 신흥중학 졸업생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에 배치되어 대일투쟁의 대열에 서거나 만주지역의 각 학교에 교원으로 배치되어 건학정신에 따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註360) 3·1운동 이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 간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신흥중학에 입교를 원하게 되었다. 이에 1919년 5월 신흥중학은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교사를 옮겨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명하고 독립군양성 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부민단을 계승한 한족회의 산하 학교로서 일제의 만주지역 내 독립군 토벌 강화와 마적들의 습격사건 등으로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폐교 후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고산자 일대

 


출신자들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열단·광복군 등 수많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註361)

신흥중학 졸업생들은 독립군이나 각급 학교에서 민족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3년에는 교장 여준과 교감 윤기섭 및 제1기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 삼원포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였다. 註362) 처음에는 복구강토復舊疆土라는 의미에서 ‘다물단’이라 하였다가 ‘학우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신흥학우단은 신흥학교 교직원과 졸업생을 정단원으로, 재학생을 준단원으로 하여 조직된 강력한 독립운동 결사체였다. 조직 목적은 “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해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신흥학우단의 중요사업으로는 ① 군사·학술의 연구를 통한 실력 양성, ② 각종 간행물의 발간을 통한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 ③ 한인의 자위체 조직으로 일제 및 그 주구의 침입 방지, ④ 노동강습소의 개설로 농촌청년에 대한 군사훈련과 계몽교육의 실시, ⑤ 한인마을에 소학교 설립을 통한 아동교육의 실시 등이었다. 3·1운동 이후에는 한족회의 군정부 관할 하에 들어가 국내 및 만주에서 들어오는 청년들을 모아 독립군으로 양성하였다. 註363)

한편 신흥학우단 편집부는 월보와 주보, 그리고 연 2회 이상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를 간행하여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을 제시하고 학술연구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1913년 7월부터 간행된 『신흥학우보』는 군사·시사·문예·농사 등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여 신흥학우단원뿐만 아니라 서간도 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흥학우단 토론부에서는 매주 토론회를 개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군사와 학술이론의 연마에 노력하였다. 註364) 그리고 신흥학우단은 신흥학교 졸업생들 가운데 독립군으로 되지 않은 졸업생들에게는 의무적으로 각종 학교에서 동포들의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이들은 통화현·유하현·장백현·화룡현·연길현·왕청현 등 북간도 전역의 ‘신흥’이라 명명한 각 학교에서 학교 운영은 물론 군사훈련까지 담당함으로써 장기적인 독립전쟁에 대비코자 하였다. 註365)

1914년에 들어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이 신흥학교와 분교·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에서 양성한 독립군 385명을 근간으로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건설하고 서간도 독립군을 편성하여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필자 미상의 『백서농장사白西農莊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註366)



신흥학우단에서 주동이 되어 일력·물자·금력을 동원하여 갑인년 가을부터 벌목을 시작하여 일대에 군영으로 수천의 병력을 수용 가능한 건축을 완료하고, 독립전쟁에 자기 목숨을 홍모鴻毛같이 버릴 건장한 의기에 불타는 애국열혈에 피 끓는 청년, 신흥학교에서 필업한 제1회에서 제4회의 일부와 각 분지교分支校 노동강습소에서 훈련된 385명이 입영하였다. 註367)



백서농장은 봉천성 통화현 백두산 서쪽 산기슭 사방 200리의 고원지대 평야에 건설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독립군 군영이었다. ‘백서’는 백두산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농사가 가능한 고원지대를 거점으로 군사훈련을 하는 독립운동 기지였지만, 만주에서 한인들이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중국인들이 금지하였기 때문에 ‘농장’이라 칭하였다. 백서농장은 김동삼金東三을 장주莊主로 하여, 훈독訓讀·총무·의감醫監·경리·수품需品·외무·농감農監·교관·교도대장·1중대장·2중대장·3중대장·규율대장 그리고 각 소대의 부서를 두었다. 註368)

백서농장 간부들은 신흥학우단 회원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지역별로는 경기·충청·경상·평안·강원도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평안도 출신이 많았다. 백서농장은 3·1운동 때까지 독립군영으로서 존속하면서 수천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수토水土의 부적절, 운수 왕래가 적당하지 않은 것이 이유가 되어 한족회 총회의 지시로 폐지되었다. 백서농장 출신자들은 1919년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지휘관도 백서농장 출신이었다. 註369)

요컨대 애국계몽인사들을 중심으로 경학사가 조직되고, 이를 계승하여 부민단·한족회로 발전된 서간도의 항일단체는 한인의 경제적 토대의 마련, 무관학교의 설립, 항일의식의 고취, 군사교육의 실시, 나아가 독립군영의 설치를 통하여 서간도 전역을 독립군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4. 연해주지방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

러시아는 청나라와 1858년의 아이훈조약과 1860년의 북경조약에 의하여 흑룡강 이남,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를 영유하게 되었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한인들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러시아 한인들은 1864년 연추煙秋, 노부키에프스크 지방 지신허地新墟에 이주 개척한 것을 러시아 이민의 기점으로 잡고 있다. 이로부터 한인들은 소왕령蘇王嶺·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 도처에 이주하여 한인촌을 개척하였다. 註370)

한인들의 연해주로 초기 이민의 동기는 국내의 농촌경제의 파탄과 흉년으로 인한 영세농민과 빈민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것으로 이해된

다. 초기 이민의 규모는 어느 통계에 의하면, 1882년 연해주 총인구 92,708명 중 러시아인이 8,385명인데 비하여, 한인은 10,137명으로 제 1위의 인구 비율을 보이고 있다. 註371)

연해주로의 한인 이민의 성격은 1904, 5년의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부터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후 1907년의 군대해산, 광무황제의 퇴위, 정미조약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애국계몽계열과 항일의병계열에 속한 인사들의 만주와 연해주로의 이동이 많아져 정치적 망명 이주가 두드러졌다. 일제의 한국강점을 계기로 한인의 연해주로 이주는 급격히 증가하여 1910년 1월 13일 한국주차 헌병대원의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령 연해주와 흑룡주의 이주 한인수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註372)

연해주지방에서는 1902년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과 교민 최재형崔才亨이 3~4,000명의 의병을 모아 연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홍범도弘範圖·김영선金永先·안중근 등 의병장들도 장백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과 대립관계에 있는 러시아 영토에서 활동하는 유리한 점이 있었고,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한인마을에 합숙훈련까지 하며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註373)

1909년에 이르러 연해주지방의 항일의병들은 국내 진공작전도 펼치게 됨에 따라 연해주와 북간도 의병부대를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연해주지방의 의병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월 21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었다. 유인석柳麟錫을 도총재로 하는 ‘13도의군’에는 이범윤·홍범도·이남기李南基·이진용李鎭龍 등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인물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신민회 활동을 주도하던 안창호·이갑·이상설 등 애국계몽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연해주지방의 의병의 통합을 의미하며 종래 서로 노선을 달리하던 애국계몽계열의 구국운동과 의병운동계열의 구국운동이 통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註374)

‘13도의군’은 장차 국내 13도에 의병 조직을 만들어 통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광무황제에게 두 가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첫째로는 ‘13도의군’이 국권회복을 목표로 편성되었음을 밝히고 군비가 부족하므로 내탕금에서 군자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둘째로는 광무황제으로 하여금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영도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 이후 곧바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망명정부의 수립을 모색한 점이 주목된다. 註375)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톡海參威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지방의 한인들은 “한일합병은 22일 조약의 조인을 마치고 29일과 30일 이틀 중에 일반에 발표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700여 명이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주동 인물은 ‘13도의군’의 중심인물인 유인석·이범윤·이상설 등이었다. 성명회의 뜻은 “성피지죄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寃” 곧 “저들일제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는 의미이다. 성명회는 취지문에서 “신성한 우리 2천 만 단군의 자손은 5천년래의 조국을 버릴 수 없다. 간악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독립권을 침해하고 우리의 부모형제를 학살하고 우리의 가옥전토를 강탈하였다. 먼저 열국에 우리의 합방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고 왜적의 죄를 성토한다”고 하였다. 註376)

성명회는 조직 당일 50명의 청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고, 그 이후 결사대 수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성명회는 일본정부에 ‘국제공약에 대한 배신’을 책하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의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선언서를 보냈다. 註377) 성명회는 1910년 8월 26일 미국에 보낸 전문에서, “일본의 폭력적인 한국합병은 평화의 위반일 뿐 아니라 미래의 끝없는 투쟁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 귀 정부가 일본의 한국합병을 반대하는 적절한 태도를 표명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고 하였다. 또한 성명회는 미국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서를 보냈다.



한국인은 일본이 힘으로 뺏으려는 범죄가 문명의 역사를 말살하려는 것임을 귀국 정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을 희망하는 바이며, 진정한 한국인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10월 1일로 접수된 이 선언서에는 유인석·이범윤·김학만·홍범도·정재관 등 8,624명의 서명록이 붙어 있었다. 성명회 활동도 애국계몽계열의 인사들과 항일의병계열의 인사들이 연합하여 전개한 것이었다. 註378)


한인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던 연해주 신한촌 전경



‘13도의군’과 성명회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강력한 항의와 러일 간의 형사범 인도협약에 의거하여 일본이 주동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의 주동자인 이상설을 비롯한 20여 명의 성명회와 ‘13도의군’ 간부들을 체포함에 따라 1910년 9월 11일 성명회 해산에 이어 ‘13도의군’도 해체되고 말았다. 註379)

1911년 5월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이종호·김익용·강택희姜宅熙 등이 발기하고 민족운동가 57명이 찬동한 가운데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었다. 최재형을 회장, 김홍도를 부회장으로 하는 권업회는 급속히 회세를 확장해가며, 연해·흑룡주의 통제권을 가진 러시아 극동총독 곤닷지의 허가를 받아 12월 17일에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합법단체로 재창립하였다. 총회를 통하여 권업회의 실질적 운영책임자가 되는 의사부 의장에 이상설,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었다. 권업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연해주에서 한인의 이주 개척과 자치,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물들과 ‘13도의군’과 성명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註380)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여러 계열이 단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첫째로는 최재형·최봉준·김학만·김익용 등 러일전쟁 이전에 이주하여 러시아에 귀화하여 지위와 신분을 획득하고 한인사회의 자치 확립에 기여한 한 인물들이다. 둘째로는 이범윤·홍범도·유인석 등 국내와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08년을 전후하여 연해주에 들어가 최재형 등과 연합하여 의병의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다가 ‘13도의군’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셋째로는 이상설·정재관·이종호·신채호·이동휘 등 국내에서 신민회의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다가 군대해산을 전후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에 힘쓰고 성명회를 주도한 인물들이다. 註381)

권업회는 그 목적으로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한인의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한인의 저축과 친목과 문명을 도모하자는 경제단체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뒤바보의 『아령실기俄領實記』에는 “회명을 권업이라 함은 왜구의 교섭 상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요, 실제 내용은 광복사업의 대 기관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註382) 그리고 권업회 총재 최재형이 1912년 발회식에서



우리 동포는 한갓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나 자활自活의 길이 서지 않으면 하등의 공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 일하여 재력財力을 만들고 상당한 준비를 하여 일조一朝 기회가 도래하면 일거에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註383)



고 했듯이, 권업회의 내면적인 목적은 경제적 역량을 배양하여 국권을 회복이었다. 곧 권업회는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을 목표로한 단체이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단체였다.

권업회에는 총회와 의사부에서 결정된 사업을 집행하는 집행부가 있었다. 집행부는 국무를 분담하듯 신문부新聞部·교육부·실업부·경무부·외교부·검사부·통신부·기록부·구제부·종교부·경제부·서적부·연론부演論部 등 13개의 부를 두었다. 각부의 부장과 부원은 애국계몽인사들과 항일의병인사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권업회는 하바로프스크·우수리스크·니콜리스크·이만 등 13개 처에 지부를 설치하고 8,579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권업회의 활동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註384)

첫째로 권업회는 신문간행과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1912년 4월에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창간하였다. 『권업신문』은 연해주 지방의 항일언론지였던 『해조신문』과 그를 이은 『대동공보』·『대양보大洋報』를 계승한 것으로, 연해주 각 지역의 한인촌과 서북간도 및 미주지역에까지 보급시켰다. 『권업신문』은 배일기사와 더불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권업회의 사업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이 신문은 1914년 9월 권업회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간행되었다. 註385)

권업회 간부들은 강연회를 통하여 회원들의 단합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권업회는 창립 기념행사, 연초 시무행사, 개천절 기념행사, 안중근 의사 추도회 그리고 국치 기념행사 등에서 애국계몽강연을 행하였다. 권업회는 배일연극·풍자극 그리고 합창 등 연예회 등을 자주 개최하여 배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와 같은 권업회의 각종 계몽집회는 본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톡뿐만 아니라 각 지회에서도 개최되어 구국계몽운동에 기여하였다. 註386)

둘째로 권업회는 교육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조국독립의 이념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교육진흥을 중요시했으며, 민족주의적 근대교육을 통하여 조국독립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하여 권업회는 신문과 강연회를 통하여 교육진흥을 강조하였고, 1909년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 있던 계동啓東·세동世東·신동新東학교를 한민학교韓民學校로 통합·확장하여 연해주지방의 민족주의 교육의 중심으로 삼았다. 당시 한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연해주 각 지방마다 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주의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와 같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교육진흥운동은 구국민족교육이 발흥하던 애국계몽기의 국내보다 오히려 활발했다고 한다. 註387)

셋째로 건업회는 실업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연해주 각지의 한민회를 주도하면서 한인의 자치와 러시아당국과의 관계사무, 그리고 토지조차와 귀화 등의 사무도 취급하였다. 당시 연해주지방의 한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는데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했다.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정책에 의하여 한인들은 강제로 이주당하기도 했으며, 주권피탈 후 다수 한인들이 이주하여 경작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권업회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실업부와 구제부를 두어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러시아 관헌과 접촉하여 귀화와 토지조차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권업회는 거주권이 없는 미귀화 한인들이 노동할 수 있는 일터를 알선하는 사업도 추진하였다. 홍범도 등은 많은 한인노동자를 모아 노동회를 설립하고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한인가에 분산 하숙시켜 여러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註388)

넷째로 권업회는 광복군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하여 광복군을 양성하고자 했고,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군영지를 확보하였다. 권업회는 러시아 극동총독과 교섭을 벌여 흥개호興凱湖 연안의 이유가伊柳街와 흑룡강·송화강의 합류지점인 올라까하烏拉雜卡河 등지에 토지를 조차하여 한인 수백 호를 이주시켰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한인의 이주 개간을 표방한 것이었다. 이는 이주 개간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광복군 군영지 곧 독립운동기지의 확보를 위함이었다. 註389)

권업회는 광복군 양성을 위하여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 등의 비밀결사를 운영하였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는 잡화점 같은 상점이었으나, 내면으로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조직이었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조창호趙昌浩 집에 러시아어로 ‘양군호’라는 간판을 단 잡화상을 차리고 조직원을 점원으로 두어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활동을 했으며, 잡화점의 수입은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권업회는 연해주에 인접한 북간도 훈춘에 ‘해도호’라는 객주가를 차리고 북간도와 연해주간의 중개영업을 했는데, 이것은 권업회의 중진인 이종호와 김익용이 포함된 비밀결사였다. 일제군경에 의해 압수된 문건에 의하면, 당시 권업회 초대 의장 이상설의 주관 하에 블라디보스톡 중

심의 연해주지방에 있는 한인 훈련 병력은 19,365인으로 파악된다. 註390)

다섯째로 권업회는 광복군정부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 연초부터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러일전쟁이 임박했다는 풍설이 떠도는 가운데, 권업회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하여 광복군정부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권업회의 핵심인물인 이상설·이동녕·이종호·정재관 등은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은 규합하여,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항일투쟁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어 러시아당국이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권업회는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의 중요한 인물을 투옥 추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도 활동을 못하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註391)

[註 315] 大垣丈夫, 「본회취지」, 『월보』 1, 25쪽 ; 김가진, 「我國有識者의 日本國에 대 感念 」, 『회보』 6, 1~2쪽. ☞

[註 316] 유영렬, 「애국계몽파의 민족운동론」,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300~301쪽. ☞

[註 317] 원의상, 「신흥무관학교」, 『신동아』 1969년 6월호, 23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1973, 162~163쪽. ☞

[註 318] 원의상, 「신흥무관학교」, 『신동아』 6월호, 236쪽. ☞

[註 319] 도산기념사업회, 「李剛回顧談」, 『속편 도산안창호』, 1954, 134~145쪽 ; 주요한, 「安昌浩豫審訊問記補遺」, 『안도산전서』 부록, 896~897쪽. ☞

[註 320]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대사론』 Ⅱ, 30쪽. ☞

[註 321]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대사론』 II, 27쪽. ☞

[註 322]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대사론』 II, 26~28쪽 ; 국사편찬위원회, 「105人事件公判始末書(1)」,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 1986, 290·295·305·312·315쪽 ; 국사편찬위원회, 「105인사건공판시말서(Ⅱ)」,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 1986, 79~80쪽. ☞

[註 323] 안창호, 「예심신문기보유」, 『안도산전서』, 859~899쪽. ☞

[註 324]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대사론』 II, 36쪽. ☞

[註 325]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262~262쪽 ;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07쪽. 윤경로는 청도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독립전쟁론이 제기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는데 반해, 신용하는 안창호·이갑 등이 신한민촌과 무관학교의 건설을 주장했다고 보고 있다. ☞

[註 326] 도산기념사업회, 「李剛回顧談」, 147~148쪽. ☞

[註 327] 주요한, 「안창호예심신문기보유」, 『안도산전서』, 897쪽. ☞

[註 328]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09~111쪽. ☞

[註 329]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1~112쪽. ☞

[註 330]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2~113쪽. ☞

[註 331] 윤병석, 「한인의 간도개척과 민족운동」, 『근대한국 민족운동의 사조』, 470~471쪽. ☞

[註 332]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일조각, 1990, 6~7쪽. ☞

[註 333] 四方子, 「北間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

[註 334] 『默菴備忘錄』 1907년 2월 10일(이현희, 「서전서숙의 창립운영과 석오의 위상」, 『성신사학』 7, 성신여대, 1989, 13쪽에서 재인용) ; 이정은, 「서전서숙」, 『한국독립운동사사전』 5, 2004, 113쪽. ☞

[註 335] 이현희, 「서전서숙의 창립운영과 석오의 위상」, 『성신사학』 7, 17~18쪽. ☞

[註 336]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4~16쪽 ; 이현희, 「서전서숙의 창립운영과 석오의 위상」, 『성신사학』 7, 21쪽 참조. ☞

[註 337] 四方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

[註 338] 박주신, 「일제하 북간도 명동학교의 민족교육운동」, 『한국교육사학』 18,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 1996, 85쪽. ☞

[註 339] 유병호, 「명동학교」,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409~410쪽 ; 윤병석,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항일결사, 민족교육」,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0, 65~68쪽. ☞

[註 340] 梶村秀樹·姜德相, 「日本軍討伐狀況及犧牲者調査」, 『현대사자료』 29, みすず서방, 1972, 453~ 455쪽. ☞

[註 341]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8쪽. ☞

[註 342] 김춘선, 「간민교육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42쪽. ☞

[註 343] 김춘선, 「간민교육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43쪽. ☞

[註 344] 윤병석,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항일결사, 민족교육」, 『독립군사』, 369~70쪽. ☞

[註 345] 김춘선, 「간민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44쪽. ☞

[註 346] 김춘선, 「간민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45~46쪽. ☞

[註 347] 홍종필, 「재만 조선인 사회단체 소고」, 『인문과학논총』 10, 명지대, 1993, 178~179쪽. ☞

[註 348] 사방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

[註 349]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6쪽. ☞

[註 350]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7~ 18쪽. ☞

[註 351]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9~121쪽. ☞

[註 352]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3쪽. ☞

[註 353] 윤병석, 「1910년대 서북간도 한인단체의 민족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6쪽. ☞

[註 354] 윤병석,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0, 47~49쪽. ☞

[註 355] 원병상,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전투사자료집』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12쪽. ☞

[註 356] 박환, 「신흥강습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6, 353쪽. ☞

[註 357]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사학연구』 40, 한국사학회, 1989, 367~368쪽. ☞

[註 358] 박영석, 「일제하 서간도지역 공화적 민주주의계열 한국독립운동단체에 관한 연구」, 『성곡논총』 14, 성곡학술문화재단, 1983, 66쪽 ; 박환, 「부민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626쪽. ☞

[註 359] 박환, 「부민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627쪽. ☞

[註 360] 강재언,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문제」, 『근대한국사상사연구』, 미래사, 1986, 227~228쪽. ☞

[註 361] 박환, 「신흥무관학교」, 『한국독립운동사사전」 5, 358~361쪽. ☞

[註 362]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3~117쪽 ; 원의상,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전투사자료집』, 238, 240~241쪽. ☞

[註 363]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사학연구』 40, 383쪽 ; 강재언,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문제」, 『한국근대사상사연구』, 230쪽. ☞

[註 364] 윤병석,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항일결사, 민족교육」, 『독립군사』, 81쪽. ☞

[註 365]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사학연구』 40, 390~391쪽. ☞

[註 366] 윤병석, 「백서농장과 대한광복군정부」, 『독립군사』, 94쪽. ☞

[註 367] 윤병석, 「백서농장과 대한광복군정부」, 『독립군사』, 95쪽. ☞

[註 368] 윤병석, 「백서농장과 대한광복군정부」, 『독립군사』, 96쪽 ; 박환, 『재만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341쪽 ; 박환,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 『사학연구』 40, 387쪽. ☞

[註 369] 박환, 『재만한인민족운동사연구』, 341쪽 ; 박환, 「백서농장」,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565~566쪽. ☞

[註 370] 이상근, 『한인노령이주사연구』, 탐구당, 1996, 33~43쪽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70~171쪽. ☞

[註 371]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72쪽. ☞

[註 37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516~517쪽 ; 윤병석, 「독립군기지와 성명회 선언서의 의의」, 『독립군사』, 55쪽. 이상룡의 『石洲遺稿』에 의하면, 1910년을 전후하여 연해주지방에 15만 이상의 한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

[註 373]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75~176쪽. ☞

[註 374] 유한철, 「십삼도의군의 설립과정과 조직상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16~17쪽 ; 박민영, 「십삼도의군」, 『한국독립운동사사전』 5, 386쪽. ☞

[註 375]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226쪽. ☞

[註 376] 윤병석, 「독립군기지와 성명회 선언서의 의의」, 58~60쪽 ; 윤병석, 「성명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132~134쪽. ☞

[註 377]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23쪽. ☞

[註 378] 윤병석, 「독립군기지와 성명회 선언서의 의의」, 61~62쪽. ☞

[註 379]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81~182쪽. ☞

[註 380]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227~228쪽. ☞

[註 381]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898, 133쪽 ; 윤병석,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동향」,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447쪽. ☞

[註 382]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33~134쪽. ☞

[註 383] 『日本外務省記錄』, 「在外不良鮮人の狀態」, 85~91쪽 ; 윤병석,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동향」,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478쪽. ☞

[註 384]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35~136쪽. ☞

[註 385]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224쪽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94~ 197쪽. ☞

[註 386]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36쪽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97~ 199쪽. ☞

[註 38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975쪽 ;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38~139쪽 ; 이상근, 『한인노령이주사연구』, 257쪽. ☞

[註 388]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218~220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202~206쪽. ☞

[註 389]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07~208쪽. ☞

[註 390]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07~209쪽. ☞

[註 391] 박환,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사』, 탐구당, 1995, 141~142쪽 ; 이동언, 「노령지역 초기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228쪽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207~20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