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중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 한말 중기의병

몽유도원 2014. 4. 12. 18:05

제8장 중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중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한말 의병전쟁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계봉우필명 ‘뒤바보’는 의병은 그 이름만으로도 ‘훌륭한 대가치가 있다’고 전제하였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행복의 조건이 되는 ‘정의’를 추구하던 ‘의인義人’의 집단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註1) 곧 의병전쟁은 한민족이 견지한 정의正義가 무도한 일제의 불의不義를 격멸하기 위해 전개한 ‘의전義戰’이었다는 논리였다.


의병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무렵인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가 일어났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주지하다시피 대한제국 외부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등박문을 첨병으로 한 일제의 대한침략정책을 대외적으로 정당화시켜 홍보해 주는, 곧 일제의 침략 대변인 역할을 하던 악랄한 친일파였다. 의거 다음날 현지에서 발간되던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콜』The San Francisco Call에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이인영李麟榮’의 명의로 된 「격고재외국동포문檄告在外國同胞文」이 영인 전재되었고, 이와 함께 ‘한국민의 대일성전對日聖戰 격문은 스티븐스 사형집행 영장Korean Proclamation of Holy War Against Japan is Death Warrant for Stevens’이라는 제목으로 스티븐스 처단의거를 보도하였다. 여기서 의병전쟁을 ‘성전Holy War’으로 정의한 것은 위 계봉우의 견해와 더불어 한말 의병전쟁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註2)


백범 김구는 남북협상에 즈음해서 1948년 2월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글 속에서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도睹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상황에서 일제 강점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민족의 운명으로 규정하였다. 註3)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강제력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했다는 논리인 것이다.


백범의 말대로 사실 의병전쟁의 ‘승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전쟁에 투신한 의병 자신들도 이처럼 고단한 형세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패이둔불고勝敗利鈍不顧’를 표방하고 ‘후세에 할 말을 있게 하기 위해’ 일신을 산화한 것이다. 일찍이 박은식이 의병을 ‘민족의 정수精髓’로 표현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이러한 한말의 의병전쟁 가운데 중기의병은 일제침략이 한층 강화되는 어려운 객관적 조건 위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4년 이후에는 수도 서울에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러일전쟁을 명목으로 일본군 정예병력이 전토를 침략하고 있었다. 또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을 강요한 뒤 1905년 을사조약을 늑결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침략은 국운을 재촉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강력한 침략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한다는 것은 곧 국가와 민족 앞에 일신을 불사르는 살신성인의 구현이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을사조약을 계기로 본격화된 중기의병에는 전기의병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가담하였고, 이들이 주도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원주의병을 이끌었던 원용팔元容八을 비롯하여 단양에서 거의한 정운경鄭雲慶, 그리고 제천에서 일어났던 이강년李康秊 등은 과거 제천의병에서 활약했던 전력이 있고, 홍주의병의 주도인물 가운데 안병찬安炳瓚과 이세영 등이 그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밖에도 황간에서 재기한 노응규盧應奎, 안동의 유시연柳時淵과 영양의 김도현金道鉉, 그리고 영해의 신돌석申乭石도 전기의병에 참여한 전력을 갖고 중기의병에 투신한 것이다. 또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고광순高光珣과 기삼연奇參衍 등도 전기의병 참여 경험이 있던 지사들이었다. 이와 같이 전기의병과 중기의병이 인맥으로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뒷받침해준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 봉기 이후 10여 년 동안 변화된 시대적 여건을 변수로 여러가지 면에서 발전된 형태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단계의 의병은 이전의 전기의병과, 1907년 하반기에 들어 계기적으로 연속되는 후기의병을 염두에 둘 때 과도기적 성격을 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중기의병은 전기의병보다 후기의병에 더 가까운 투쟁양상과 성격을 보여준다.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되는 의병전쟁의 양상이 이 단계에서 점차 그 틀을 형성해 갔던 점에서 그러하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는 지역성과 학통성·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본서에서 언급한 전국 의병의 활동 개황은 현재 확인된 의병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단위 의진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 밖에도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곧 이 시기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단위의병의 빈도수가 그만큼 증가하고, 또 그에 따라 단위의병 구성원의 수도 현저히 줄어드는 추세가 나타난다. 전기의병 때 통칭 수만에서 수천 명에 이르던 대단위 부대가 이 시기에 와서는 수백 명, 심지어는 수십 명을 단위로 편성되던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만큼 의병이 정예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또한 의병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어 가던 사실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04~1905년간 중기의병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전기의병 시기에 보이지 않던 농민층을 주축으로 한 ‘농민의병’이 다수 출현하면서 의병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즉 동학농민전쟁-전기의병-광무농민운동의 투쟁경험을 토대로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강요된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등 일제침략을 계기로 ‘민족적 농민’은 그들의 조직을 의병으로 전환시켜 간 것이다. 또 중기의병 시기에도 전기의병과 같은 양반유생 의병장이 다수였다고 하더라도, 양회일·고광순처럼 순수 유생도 없지 않았으나, 최익현·민종식·정환직 등 관인 출신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가 척사斥邪보다 국가의식이 더 절박하게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註4)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의병은 전기의병에서 지향한 ‘복수보형復讐保形’보다 발전된 더욱 선명한 구국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기의병 단계에서는 또한 전술상의 변화도 점차 나타나고 있다. 단위의병의 수는 늘어나고 편제 성원의 수가 감소하는 경향은 다음 단계인 후기의병의 보편적 전술인 유격전의 형태가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는 산악지대가 의

병의 근거지로 점차 그 비중을 더해가게 된다. 그만큼 일제 군경을 상대로 한 전투가 치열해져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기의병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단위의병들은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또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상호연계를 부단히 모색하였던 점도 두드러진다. 이러한 양상은 지역별로 일정한 범위를 갖고 있었다. 의진간 상호 연합전선을 모색하던 가장 두드러진 경우는 최익현의 태인의병이었다. 호남의 의병세력을 규합하였던 최익현은 민종식이 주축이 된 호서의 홍주의병과 긴밀한 연계를 시도하였고, 나아가 영남지방 의병세력과의 연계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호서, 영남 등 삼남지방의 의병세력간 대연합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태인의병 이후 호남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의병도 또한 상호연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일어났다. 곧 고광순 의병, 쌍산의소, 양한규 의병, 백낙구 의병 등 중기의병 시기 호남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병들은 상호 긴밀한 연계하에 항일전을 공동으로 전개하는 방안을 부단히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산남의진과 신돌석 의병, 그리고 유시연 의병 등도 일제 군경에 비해 열세를 보이던 전력을 상쇄하고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상호 연계하에 연합전선을 부단히 구축하고 있었다.


중기의병의 전략적 특징 가운데 또 한 가지는 각 의진이 열국 공사관을 상대로 한 선전·외교 분야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원주에서 일어난 원용팔 의병을 비롯해 최익현의 태인의병, 민종식의 홍주의병, 그리고 영양의 김도현과 평북 태천의 전덕원 의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이 열국 공사관에 보낸 공함의 주된 내용은 을사조약 늑결 등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국권회복투쟁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고, 최익현의 경우에는 적국인 일본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의병이 항일무력전을 전개하는 한편, 이

와 같이 각국 공관에 공함을 보냈던 이유는 한민족이 일제를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지원과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 무렵 의병들이 국제관계의 존재와 현실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근대적 국가 개념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기의병은 다음 단계의 후기의병으로 간단間斷없이 계기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의병은 일제 군경에 비해 여전히 화력 면에서 절대 열세에 놓여 있어 큰 전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기의병 단계에서 활동하던 각지의 의병은, 홍주의병과 산남의진, 그리고 호남의 여러 의병의 예에서 단적으로 보이듯이,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전력을 한층 강화하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혀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되어 가는 의병전쟁의 초석을 다져놓게 된다. 곧 중기의병은 다음 단계에서 더욱 확대 심화되는 후기의병의 기반과 여건을 마련해 가는 과정으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중기의병 가운데 신돌석 의병의 경우는 후기의병으로 발전되어가는 중간 도정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신돌석 의병은 평민층의 의병참여 확대와 그들의 주체적·능동적 투쟁양태를 비롯해, 전술적 측면에서도 탁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한 유격전술을 주된 전법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후기의병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 단계인 중기의병 시기의 항일전을 선도한 의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註5)


한편 일제는 거족적 항일기세를 차단시킬 의도로 중기의병을 상징하는 태인의병과 홍주의병의 중심인물 11명을 대마도로 끌고가 유폐시켰다. 호남의병의 총수 면암 최익현과 그의 참모 임병찬을 비롯해 최상집崔相集·이상두李相斗·안항식安恒植·유준근柳濬根·남규진南奎振·신보균申輔均·이식李侙·문석환文奭煥·신현두申鉉斗 등 홍주 9의사가 그들이다. 곧 이들 유폐의병은 일제가 항일투쟁의 상징적 세력으로 형상화해 놓은 인물들이었고, 이들을 대마도에 유폐한 것은 결국 분출하는 항일열기와 민족정기를 대마도에 철저히 ‘밀폐’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의병 유폐계획은 대한침략의 원흉인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에 의해 수립·추진되었다. 곧 의병유폐의 의도와 목적, 그 구체적 방안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계획이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육군대신 사내정의寺內正毅는 통감의 의뢰를 받아 청의안請議案을 내각총리대신 서원사공망西園寺公望에게 올려 각의를 통과시켜 정책적으로 뒷받침해 주었고, 나아가 그 유폐 실무를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제12사단에 지시한 ‘방조범’이었다. 또 다른 ‘공범’인 한국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육군대신과 통감의 지시를 받고 의병을 대마도로 유폐하는 과정과 절차, 설비 등에 대한 준비를 진행했던 책임자였다. 결국 의병의 대마도 유폐는 통감-육군대신-내각총리대신으로 연결되는 일제의 정책결정 라인과 통감-육군대신-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연결되는 일제의 군대 명령계통에 따라 수립·집행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항일의기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한 치밀한 의도하에서 수립·추진된 일제의 대마도 유폐정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귀착되었다. 항일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자임한 최익현이 대마도 현지에서 순국으로 항거함으로써 전국적·거족적 항일기운을 더욱 격동시켰고, 나머지 유폐 의병들도 끝까지 대한 의사로서의 기개와 지조를 지켜 민족의 의기를 수호해 냈기 때문이다.


최익현의 대마도 현지 순국은 오히려 전 국민의 항일기세를 가일층상승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였고, 나아가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의병전쟁을 확대·격화시키는 한 동인이 되었다. 그뒤 호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최익현의 거의와 순국 사실을 거론한 점에서도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다대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유폐의병은 모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직 고관, 유생들이었고, 인격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비록 유폐 감금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현지 일본인들보다도 지적·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그러므로 애국적 지식인들이었던 유폐의병에 대해 현지 일본인들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따라 인간적·도덕적 견지에서 대체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폐의병의 여러 일상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현상은 대한의사가 견지했던 올곧은 기개와 담대한 포부의 생생한 증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한민족의 항일의기로 형상화되어 대마도에 유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던 11명의 의병은 일제의 강포한 탄압에도 꺾이지 않고 민족자존의 의기를 드높인 지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註 1] 뒤바보, 「義兵傳」, 『독립신문』(상해판) 1290년 4월 27일자. ☞

[註 2] The San Francisco Call 1908년 3월 24일자; 국가보훈처, 『장인환 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Ⅰ, 2008, 733·739쪽. ☞

[註 3] 『白凡金九全集』 8, 대한매일신보사, 1999, 567쪽. ☞

[註 4] 조동걸, 「의병운동의 한국민족주의상의 위치」, 『의병전쟁연구(상)』, 지식산업사, 1990, 245~249쪽 참조. ☞

[註 5] 박민영, 「한말 의병 참여자의 국가의식 변화」, 『나라사랑 독립정신』, 국가보훈처 학술논문집 1, 2001, 84~9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