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전시파시즘체제 구축과 친일세력의 동향 /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몽유도원 2014. 1. 9. 11:11

전시파시즘체제 구축과 친일세력의 동향

1. 총동원·총력체제의 구축

2. 전쟁협력단체의 조직과 활동

3.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활동


1. 총동원·총력체제의 구축


전시파시즘기 일제는 내선일체를 구현한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사상통제를 실시하였다. 그 목적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저항과 불만을 무마시키고 효율적인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한편으로는 국정 전 부문에 걸친 강력한 통제정책을 수립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의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하 총동원운동·국민총력운동이하 총력운동으로 이어지는 관제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총동원운동·총력운동은 일제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당면 과제, 즉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조선의 인적·물적 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장 역점을 둔 정책이었다.

1938년 7월부터 시작된 총동원운동은 일본 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운동의 출범 단계부터 이미 관 주도의 철저한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과 차이가 있었다. 일본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중앙조직인 중앙연맹은 하부 조직을 갖지 않은 채 발족하여 단지 각종 조직의 연락기관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의 경우는 처음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정동연맹 아래 행정조직과 완전히 일치된 지방조직과 각 직장을 단위로 하는 각종 연맹까지도 망라하는 철저한 하부조직 체계를 갖고 출발하였다. 註1)

정동연맹 출범 직후 하부조직인 도연맹이 1938년 7월 7일 강원도를 시작으로 9월 18일 함경북도까지 2개월 만에 전국 13도 조직 결성이 완료되고, 10월 말에는 280,135개의 애국반까지 결성되는 등 註2) 단시일 내에 하부조직까지 완료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관 주도로 추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연맹은 일제가 스스로 인정하듯 총독정치를 보조하는 실천기관으로서 강력한 총독부 외곽단체의 기능을 갖고 출범한 것이다. 註3) 남차랑 총독도 정동연맹은 “통치의 보익기관補翼機關이며 … 문무, 각 관아와 긴밀하게 연락 협조하여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부문을 개척하여 상의하달上意下達·하의상달下意上達로 통치의 제미濟美, 군국의 시무에 기여하는 것을 본의로 하고 있다” 註4)고 하였다.

정동연맹은 또한 일본 국내의 ‘거국일치擧國一致·견인지구堅引持久·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세 가지 목표 이외에도 내선일체의 철저와 조선인의 급속한 황국신민화 도모에 목적을 두었다. 정신운동의 철저한 강화를 통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동연맹은 구체적 활동 지침으로서 모든 연맹원이 실천해야 할 20여 항목에 달하는 실천요목을 정했으며, 이중에서도 ‘궁성요배宮城遙拜’와 ‘근로저축’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2원칙으로 설정해 정신적인 황민화와 물질적인 전시동원을 동시에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각종 강연 및 좌담회와 강습회 개최, 인쇄물을 통한 홍보·선전, 라디오 방송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밖에 중견청년수련소·교학연수소·유도연합회 등과 같은 단체를 조직했다. 특히 기초 조직이자 실천 조직인 애국반의 활동은 실천요목을 중심으로 한 정동연맹의 활동 지침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註5)

정동연맹은 이처럼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관제 국민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실질적으로 총독부와 다름없는 조직과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동연맹의 외형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조직된 단체로 포장되었다. 준비위원부터 민간유력자로 구성되었고, 註6) 정동연맹 규약에 개인이나 단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연맹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명시하였다. 註7) 발기인도 민간유력자와 단체들이었다. 1938년 6월 22일 부민관에서 열린 발기인 총회에 참석한 발기인 57명은 대부분 민간유력자들이었고 65개의 단체도 민간의 유력단체로 구성되었다. 또한 1938년 12월 6일에는 출범 당시 명예총재였던 대야록일랑大野綠一郞 대신에 총독부 관료가 아닌 육군대장 천도의지川島義之를 정식 총재로 추대하였다.

조직 구성도 표면적으로는 민간 주축이었다. 정동연맹은 출범 당시 이사장·이사·평의원·참사 등의 임원진을 구성하면서 이사와 평의원의 수를 가장 많이 두었는데, 이사는 대부분 민간유력자였고 개인과 단체로 구성된 평의원 또한 민간의 유력자와 단체였다. 정동연맹이 이처럼 민간 주도의 기구임을 애써 드러내고자 했던 이유는, 총동원운동에 민간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민간의 참여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한편으로 정치와 선을 그어 있을지도 모를 총동원운동에 참여하는 조선인들의 참정권을 비롯한 정치적 요구를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註8) 특히 정동연맹이 정치와 무관한 조직이라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1939년 4월 15일 규약까지 개정하여 “본 연맹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註9)

실상 일제가 정동연맹을 민간 주도의 단체로 포장했던 것은 총동원운동에 조선인을 대가 없이 최대한 동원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실제로는 준비 과정부터 모든 실권이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었고 민간 유력자와 단체들은 조직 운영에 아무런 권한이 없는 전시용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임원진으로 참여한 조선인 유력자들은 이미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순응의 길을 걷고 있던 친일인물들이었고, 단체 또한 관변단체이거나 관변화된 민간단체였다.

하지만 민간 주도라는 명분조차도 1939년 정동연맹의 조직 변화와 함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39년 4월 조선총독부 내에 국민정신총동원위원회와 간사회가 설치되었는데, 국민정신총동원위원회는 위원장을 정무총감으로 하여 총동원운동의 중요사항에 대한 조사·심의를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 간사회와 함께 정동연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핵심기구로서 위원들도 조선총독부 각 부처의 국장·부장·사무관 등 고등관 이상의 관료들이었다. 註10) 또한 정동연맹 내에 기획을 담당하는 이사회와 참사회가 설치되었는데, 이사·참사는 국민정신총동원위원회와 간사회 위원인 총독부 관료들이었다. 註11) 조직 전면에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나서면서 비로소 정동연맹은 막강한 권한을 지닌 관변단체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여기에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국민총력운동으로 전환되고 총동원연맹이 국민총력연맹이하 총력연맹으로 개편되면서 총독부와 거의 일체를 이루는 통치기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연맹 총재가 민간인에서 조선총독으로 바뀌었고, 정무총감이 부총재가 되었다. 註12) 또한 총독부 내에 총력운동의 기본방침을 심의·결정하기 위해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지도위원회 위원에는 대부분 총독부 각 국장들이 임명되었다. 註13) 또한 조선인 임원들은 일제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협조하는 친일인사들로 망라되었다. 1941년 5월 현재 조선인 임원은 다음과 같다.



전무 : 정교원鄭喬源, 중추원 참의

이사 : 윤치호조선기독교청년회장·고원훈高元勳, 중추원 참의·최린매일신보 사장·한상룡韓相龍, 조선생명보험 사장·김연수金秊洙, 경성방직 사장·이승우李升雨, 중추원 참의·손영목孫永穆, 선만척식 이사·박흥식朴興植, 화신 사장·한규복韓圭復, 중추원 참의·오긍선吳兢善, 세브란스의전 교장·김명준국민협회 이사장·김성수金性洙, 보성전문 교장·김동훈金東勳, 북선제지 감사역·박상준朴相駿, 중추원 참의·김활란金活蘭, 이화여전 교장·김정호金正浩, 중추원 참의·김원근金元根, 도회의원·임창수林昌洙, 도회의원·김영무金英武, 도회의원·김신석金信錫, 중추원 참의·서병조徐丙朝, 중추원 참의·김경진金慶鎭, 중추원 참의·김기수金基秀, 중추원 참의·이기찬李基燦, 중추원 참의·이희적李熙迪, 변호사·최준집崔準集, 중추원 참의·방의석方義錫, 중추원 참의·장헌근張憲根, 중추원 참의

참여 : 이항구李恒九, 이왕직 장관

평의원 : 장직상張稷相, 실업·장헌식張憲植, 중추원 참의·박상준朴相駿, 중추원 참의·양주삼梁柱三,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이해승李海昇·이진호李軫鎬, 중추원 참의·김갑순金甲淳, 조선신문 사장·송종헌宋鐘憲·최창학崔昌學, 실업·문명기文明琦, 광제회 회장·홍승균洪承均, 실업·김활란이화여전 교장·이종린천도교중앙교회대 종사장·박승직朴承稷, 실업·윤갑병尹甲炳, 중추원 참의·신석린중추원 참의·민규식동일은행 두취·원덕상元悳常, 중추원 참의·유만겸兪萬兼·박두영朴斗榮, 중추원 참의·김태석조선광업진흥 감사역·이종은李鍾殷, 동양척식 감사역·유진순劉鎭淳, 중추원 참의·오긍선세브란스의전 교장·김성수보성전문 교장·김관현金寬鉉, 중추원 참의 註14)



총력연맹의 집행기구인 사무국도 크게 개편되어 총무부·지방부·식산부·농림부·저축부·보도부·방위지도부·문화부·훈련부·선전부 등 10개의 부서가 설치되었다. 각 부서장은 대부분 총독부 각 국장들이었으며 조직체계 또한 총독부 조직과 비슷하였다. 註15) 총독부 조직을 그대로 조선연맹 조직으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제가 총력연맹의 조직 강화와 함께 총력운동으로 전환한 것은 일본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중심으로 한 신체제운동으로 개편한 것에 보조를 맞춘 것이지만, 여기에는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식민지적 특성이 고려되면서 일본의 신체제운동과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대정익찬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데 비해 조선에서는 대정익찬회라는 명칭이 주는 정치운동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 국민총력연맹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또한 일본의 신체제운동과는 달리 조선의 총력운동은 국가봉사 제일주의에 입각해 일방적 봉사적 실천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대정익찬회 외에 산업·문화 등 각 부문별로 신체제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모든 조직을 총력운동에 통합시켜 일원적 운동체계를 강조하였다. 註16)

이렇게 총력운동은 식민지적 특성을 지닌 국민운동이었고, 그 핵심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적·인적 수탈을 위한 강력한 전시파시즘체제의 구축과 강화에 있었다. 이러한 총력운동의 본질은 연도별 운동 목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41년 총력운동의 목표는 사상의 통일, 국민 총훈련, 생산력의 확충, 운동 능률 증진 및 연맹정신의 앙양 등이었으며, 1942년은 필승체제 확립에 대한 계도, 지도자의 연성, 국민개로운동, 부인계발운동, 국어일본어생활의 철저 등이었다. 또 1943년 총력운동의 목표는 도의道義 조선의 확립, 황민의 연성, 결전생활의 확립, 필승 생산력의 확충, 징병제도 실시의 준비 등이었다. 전쟁 막바지인 1944년은 “신민의 총력을 직접 전력 증강의 한 점으로 결집함으로써 대동아전쟁의 완승을 도모한다”는 기본 방침 아래 국민신앙의 확립, 황민연성의 철저, 내선일체의 철저·황도문화의 작흥作興, 사봉仕奉증산의 강화, 결전생활의 철저, 징병제도의 완수 등을 총력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註17)

[註 1] 최유리, 『일제말기 식민지지배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1997, 93~94쪽. ☞

[註 2] 국민총력연맹 편, 『朝鮮に於ける國民總力運動史』, 1945, 32쪽. ☞

[註 3] 조선총독부, 『國民精神總動員』, 1940, 26쪽. ☞

[註 4] 조선총독부, 『施政30年史』, 1940, 824쪽. ☞

[註 5] 조선총독부, 『국민정신총동원』, 34~45쪽. ☞

[註 6] 준비위원은 矢鍋永三郞·前田昇·丹羽淸次郞·林茂樹·尹致昊·韓相龍·賀田直治·曺秉相·朴榮喆·崔麟 등 10인이다. ☞

[註 7] 제2조 본연맹은 내선일체·거국일치·국민정신총동원 취지의 달성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 취지에 찬동하는 조선의 각종 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국민총력연맹 편, 『朝鮮に於ける國民總力運動史』, 81쪽). ☞

[註 8] 최유리, 『일제말기 식민지지배정책 연구』, 104~105쪽 참조. ☞

[註 9] 국민총력연맹 편, 『朝鮮に於ける國民總力運動史』, 35~36쪽. ☞

[註 10]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ニ於ケル國民精神總動員機構」, 『국민정신총동원』, 59~61쪽. ☞

[註 11] 조선총독부, 「國民精神總動員運動ニ關スル件(官秘제63호, 1939.4.15)」, 『국민정신총동원』, 138쪽. ☞

[註 12] 「國民總力朝鮮聯盟規約」 제6조 총재에는 조선총독을 추대한다. 제7조 부총재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추대한다(조선총독부, 『半島ノ國民總力運動』, 1941, 21쪽). ☞

[註 13] 조선총독부, 『半島ノ國民總力運動』, 18~25쪽. ☞

[註 14] 『국민총력조선연맹 역원명부』, 1944. ☞

[註 15] 조선총독부, 『半島ノ國民總力運動』, 23~25쪽. ☞

[註 16] 최유리, 『일제말기 식민지지배정책 연구』, 128~132쪽 참조. ☞

[註 17] 국민총력조선연맹 편, 『朝鮮に於ける國民總力運動史』, 1945. ☞


2. 전쟁협력단체의 조직과 활동


전시파시즘체제가 강화되면서 그 동안 합법적으로 존속하던 조선인 중심의 민간단체들도 당연히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주의 색채를 띠었던 단체는 이미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정치성 여부와 상관없이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수양동우회였다. 수양동우회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서 비밀결사가 아닌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한 친목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독립운동단체로 몰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관계자 150명을 검거했다. 註18) 1938년 내선일체운동이 본격화 된 이후 민간단체 통제는 더욱 철저해졌다. 정치적 성향과 활동 여부에 관계없이 조금이라도 민족적 색채를 띠었던 단체들은 내선일체의 명분에 따라 대부분 해산되었고, 조선체육회나 조선변호사협회 등과 같은 직능위주의 단체들은 일본인 단체로 흡수 또는 일본인 중심의 단체로 통합되었다. 통폐합 명분은 내선일체였다. 그러나 조선인 중심의 단체라 하더라도 국민협회와 같이 친일 성향이 뚜렷한 단체들은 중일전쟁 직후에도 통폐합 대상이 아니었다. 종교단체들은 종교적 특성상 통폐합 대상은 아니었지만 파시즘체제의 강화와 함께 친일단체로 전락하거나 일본 교단으로 흡수되는 양상이었다.

이 시기 기존 민간단체에 대한 통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첫째는 단체의 해산이고, 둘째는 기존 일본인 단체로의 흡수, 셋째는 조선인 중심에서 조선인·일본인의 통합단체로 재편하는 것이다. 단체의 해산은 주로 내선일체에 방해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민족적인 색채를 띤 단체가 주 대상이었다. 일본인 단체로 흡수되거나 조선인·일본인 통합단체는 대개 예체능·종교·직능단체 등이었다. 이들 단체들이 통폐합되는 이유는 대개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조선인 본위의 단체로서 내선일체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새로이 설립된 민간단체들도 상당수에 달했지만, 이들 단체들은 대부분 일제의 필요에 따라 설립된 전쟁협력단체들로서 외형적으로는 민간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관변단체와 다름없었다. 또한 대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급조된 단체들이 많았기 때문에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곧 해산되거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전시파시즘기에 존속했던 합법적 민간단체들은 전시파시즘체제에 맞게 개편, 또는 전쟁협력단체들로서 활동목표와 방향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인의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데 있었다. 이 시기의 친일세력은 대부분 전쟁협력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전시파시즘기에 조선인이 중심이 되었던 주요 전쟁협력단체들을 설립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금차회


금차봉납도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부인들로 구성된 전쟁후원단체로서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종용에 따라 조직되었으며, 주로 귀족 부인과 지도층 여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여성들의 ‘황군원호皇軍援護’를 위한 금제품 헌납, 총후보국銃後報國, 시국인식 주입, 국방헌금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금차회’라는 의미는 여성들이 전쟁 지원을 위해 금비녀까지 뽑아 바친다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1937년 8월 한상룡 등 39명이 모여 애국금차회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석진형石鎭衡·윤태빈尹泰彬이 애국금차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취지서에서 “남자들이 의도義刀를 휘두르며 성전에 나서는 비상한 때에 조선여성은 분기하여 애국금차회를 조직하여 내선일체로 협심하여 황군의 행동을 도와 국은國恩에 보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註19) 주요 사업으로 황군의 환송, 총후 가정의 위문격려 총후 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와 국방비 헌납 독려 등을 내걸었다. 같은달 김활란金活蘭의 사회로 결성식이 개최되었으며, 이날 금비녀 11개, 금반지 3개, 금귀고리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금하여 헌납했다. 이후 각 지방에도 지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용산육군병원을 위문했으며, 11월 김은호金殷鎬가 애국금차회에서 금비녀·금가락지·백금귀걸이 등을 헌납하는 광경을 그린 「금차봉납도」

를 제작하여 총독에게 증정하기도 했다. 참여자는 다음과 같다.



◇ 발기인 : 홍승원洪承嫄·이숙종李淑鍾·김활란·나숙하羅淑河·민채덕閔彩德·손정규孫貞圭·송금선宋今璇·고황경高凰京·김희인金禧仁·유각경兪珏卿·차사백車士百·서은숙徐恩淑 〔부인〕 윤덕영·박영효·이윤용李允用·민병석·한상룡·박영철朴榮喆·김홍정金鴻晶·장헌식張憲植·한규복·김관현·최린·장직상·석명선石明瑄·이범익李範益·윤태빈·김영상金永祥·김대우金大羽·김사연金思演·조병상·이승우·이응준·김명준·석진형·조성근趙性根·민대식·이진호李軫鎬·방태영·현헌玄櫶·고원훈·유성준兪星濬·박흥식朴興植·안종철安鍾哲·이강혁李康爀·오건영吳健泳·유홍종劉泓鍾·이경식李敬植·박희도朴熙道·박호영朴鎬榮·서상천徐相天·박부양朴富陽·심우섭沈友燮·서춘徐椿·김규진金逵鎭·임흥순任興淳·노창성盧昌成·윤치호

◇ 회장 : 김복수金福綏, 尹德榮의 처

◇ 간사 : 고황경·김복인金福人·김성덕金成德·김순영金純迎·김현실金顯實·김화순金和順·김활란·마경이馬景伊·민채덕·방신영方信榮·손정규·손희원孫熙嫄·송금선·심경섭沈卿燮·우현례禹顯禮·유각경·유용선柳庸善·유혜경柳惠卿·윤창희尹昌喜·이용경李龍卿·이혜윤李慧潤·조기홍趙圻洪·조성순趙聖淳·조숙자趙淑子·조인옥趙仁玉·주경애朱敬愛·차사백·최순이崔順伊·홍옥경洪鈺卿·홍선경洪善卿·홍승원 註20)


2. 지원병후원회

지원병후원회는 1939년 1월부터 지원병 후원을 위해 각 지역에서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에 대한 군사적 동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1937년 12월 24일 각의에서 ‘조선인특별지원병제’가 결정되고, 1938년 2월 22일 칙령 제95호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支援兵令’의 공포와 동시에 조선에서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 조선총독부령 제70호로 ‘조선총독부육군병지원자훈련소규정朝鮮總督府陸軍兵志願者訓練所規程’이 공포되었고, 4월 4일 육군성령 제11호로 ‘육군특별지원병령시행규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제1회 지원병을 모집했는데, 보병 200명, 특무병 100명, 고사포병 100명 등 모두 400명을 선발했다. 지원자는 매년 확대되어 1942년에는 위생병을 제외한 모든 병종에 조선인이 채용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제출한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보면, 1941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총 지원자 145,04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는 50,184명이고, 관청의 종용에 의해 지원한 자는 79,672명, 기타 15,190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각지에 조직된 것이 ‘지원병후원회’이다. 지역에 따라 ‘육군지원병 후원회’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9년 3월 7일 현재 전국에 132개소가 조직되었다. 지원병후원회는 강연 활동과 선전을 통해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각 지역 지원병후원회의 주요 조선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 : 윤치호

이사 : 조병상·최창학崔昌學·박영철朴榮喆·한상룡韓相龍·김연수金䄵洙·

박흥식·이승우·이규완李圭完·오긍선·한규복

간사 : 한상억韓相億

감사 : 고원훈·박두영朴斗榮

고문 : 백관수白寬洙·방응모方應謨·윤덕영·박영효·김명준·최린

◇ 부천 지원병후원회

회장 : 김동완金東完

부회장 : 원인상元仁常

이사 : 이성환李聖煥

상담역 : 신용식申庸植

◇ 문산 지원병후원회

회장 : 이종철李鍾哲

부회장 : 김규봉金奎奉

고문 : 김윤배金允培

◇ 연천 지원병후원회

회장 : 홍응관洪應觀

부회장 : 강대곤姜大崑

고문 : 최탁崔卓

◇ 포천 지원병후원회

회장 : 김정배金貞培

◇ 함북 지원병후원회

회장 : 장헌근張憲根 註21)


이밖에도 각 지역 단위로 지원병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939년 3월 현재 전국에 132개의 지원병후원회가 조직되었다. 註22) 강원도 양양에서는 각 관공서장 및 관내 각 이구장里區長이 협력하여 지원병후원회를 조직했으며, 註23) 충청남도에서는 각부읍면에 지원병 후원회를 설치하여 “지원병제도의 철저한 이해와 보급, 지원이 될만한 청년과 가족의 격려, 지원병의 기초적 교양훈련, 제도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註24) 특히 각 지역의 친일인사들은 군·경찰·관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지원병 독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 윤치호는 “지원병제도 실시 3년을 경과하여 1940년에는 14만 4천명, 1941년에는 25만명이나 지원했다며, 160만의 적령자 가운데 나머지 청년들도 분발하여 속히 지원”하라고 촉구했다. 註25)


3. 대화숙

대화숙大和塾은 1940년 12월 사상통제와 전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개편한 단체이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1938년 7월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전향자 단체였다. 1938년 6월 동경에서 열린 전향자들의 모임인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박영희朴英熙와 권충일權忠一이 조선 대표로 참석한 뒤, 귀국 후 경과보고회를 하는 자리에서 조직이 결정되었다. 1938년 7월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정신의 앙양에 노력하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를 기한다. 우리들은 사상국방전선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하는 육탄적 전사가 되기를 기약한다. 우리들은 국책 수행에 철저적으로 봉사하고 애국적 총후활동의 강화철저를 기약한다” 등의 3개 항목의 결의문 채택과 함께 결성되었으며, 일본정신을 파악하여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사상을 정화해서 품성을 연마하며, 생활의 쇄신을 도모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후 전국에 7개의 지부와 80여 개의 분회가 결성되어 각지의 보호관찰소와 연계, 협력하여 취직을 알선하는 등 비전향자들의 전향 촉구에 나섰다. 그밖에 군인원호행사·신사참배단 파견·부여신궁 건설을 위한 봉사수양단 파견 등의 활동과 함께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사상전’을 수행했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편되면서 ‘사상보국운동의 합리화와 사상범보호사업의 진전을 꾀하고, 내선일체를 철저히 구현’하기 위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1941년 1월까지 해소하고 이를 대화숙으로 재조직했다. 이에 따라 종래 경성·함흥·청진·평양·신의주·대구·광주에 있던 사상보국연맹의 지부는 각기 독립된 재단법인 대화숙으로 재편성되었다.

대화숙은 ‘보호관찰대상자나 대화숙의 취지에 찬동하고 그 사업에 봉사 협력하고자 하는 자’를 회원으로 하여, ‘황도정신의 진기振起 앙양과 내선일체 심화·철저’를 기하고 사상사건 관계자를 선도·보호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주요 활동은 ‘황도정신 수련도장의 신설, 일본어 보급, 강습회·강연회·좌담회 등의 개최, 기관지 및 출판물 간행, 수산授産 경영’ 등이다. 특히 대화숙은 황국신민 연성기관으로서 일본어 강습회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어 강습소는 경성대화숙 12개소, 함흥대화숙 2개소, 청진대화숙 1개소, 평양대화숙 2개소, 신의주대화숙 7개소, 대구대화숙 1개소, 광주대화숙 3개소로 모두 28개소가 있었으며 1941년 8월 현재 약 2,000명이 일본어강습회를 수료했다.

대화숙에서는 국민학교용 일본어 독본 12권과 산술·수공·창가·유희 등도 가르쳐, 대화숙 2년 과정을 마치면 국민학교 5학년에 검정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사는 단순히 일본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잘하게 하여 일본정신을 주입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또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화가정숙을 운영하였으며, 전향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일종의 직업보도기관인 수산장授産場, 응용미술·간판·포스터 작성, 종이상자 제작, 명찰 인쇄, 양재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91개 지부에 5,400명의 회원을 두었다. 대화숙에서 활동한 주요 조선인은 김응방金應芳·유억겸兪億兼·이묘묵李卯默·장덕수·김한경金漢卿·조일명趙一明·한상건·민병회閔丙會·최용달崔容達·윤치호·이용설李容卨·현제명玄濟明·이종만李鍾萬·이재경李載璟·이재숙李在淑 등이다. 註26)


4. 황도학회

황도학회皇道學會는 1940년 12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황도사상을 교육·선전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발기인 대표는 이광수이다.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해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정신을 받들자”는 취지로 결성되었으며, 註27) 활동 내용은 ① 황도사상의 학습, ② 황도정신의 일반에 대한 보급, ③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이었다. 학습교재로는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칙어집勅語集』 등을 사용했다. 1940년 12월 25일 부민관에서 열린 황도학회 결성식에는 정교원鄭僑源,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장·천월川越, 조선군 참모·송본중언松本重彦, 경성제대 교수 등이 내빈으로 참석했으며, 발기인 대표 이광수가 황도학회의 취지와 경과 보고가 있었다. 註28) 이후 황도학회는 황도강습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부여신궁 건립공사에 근로봉사대를 조직하여 파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황도학회 조선인 발기인과 임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발기인 : 이광수발기인 대표·정인섭鄭寅燮·박영희朴英熙·김동환金東煥·주요한朱耀翰·오장환吳章煥·계용묵桂鎔默·안회남安懷南·신봉조辛鳳祚·최효정崔孝貞·노성석盧聖錫·최영주崔泳柱·이선행李善行·김정희金貞熙·박순천朴順天·이윤재李允宰·안윤숙安允淑·박현환朴賢煥·허연許然·곽행서郭行瑞·이묘묵李卯默·손홍원孫弘遠·오용탁吳龍鐸·김동원金東元·최옥희崔玉禧·심형구沈亨求·안종화安鍾和·김동준金東駿·이영근李永根·이창용李創用·이재명李載明·이규환李圭煥·김택용金澤勇

회장 : 신봉조

이사 : 구자옥具滋玉·박영희·손홍원孫弘遠·정인섭鄭寅燮·현영섭玄永燮·김택용 註29)


5.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1941년 9월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하여 결성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이다. 조선인 유력자를 최대한 동원하여 도별로 발기인을 구성해 결성했다. 임전대책협력회는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로 출발해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되었다. 김동환을 비롯한 각계 인사 120여 명이 부민관에 모여 임전체제하에서 자발적 황국신민화운동을 위한 실천방책을 논의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실천방침으로는 물질·노무 공출의 철저화, 국민생활을 최저표준으로 인하, 전시봉공의 의용화義勇化 등을 표방했으며, 민간 차원에서 전쟁에 철저히 협력하기 위해 명사들을 동원한 채권판매운동, 저축보국운동 등에 앞장서기로 했다. 註30) 또 흥아보국단은 1941년 8월 윤치호·한상룡·조병상·박흥식·김연수·김사연 등 조선인 유력자 50여 명이 모여 전시체제에 협력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로 논의한 뒤,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에 결성한 단체다. 활동 목표로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그 대응 결의, 근로보국의 실행 등을 내걸었다. 註31) 이 두 단체는 9월 초 동일한 목적을 지닌 단체로 합병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두 단체를 해소하고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①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②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卽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③ 아등은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초해서 국민개로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④ 아등은 국가 우선의 정신에 기초해서 국채의 소화, 저축 여행勵行, 물자의 공출, 생산의 확충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⑤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註32)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전국의 유력자들을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1941년 10월 5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결단식이 거행되었으며, 활동 목표로 국민생활쇄신 운동, 국채의 소화·저축의 장려·물자의 공출운동, 근로보국 도장의 설치, 계도장禊道場의 설치, 지도자 단기 이동 강좌의 개최, 기타 필요한 애국운동을 내걸었다.


소년병학교에 강제 편입된 조선인 학생들


이후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군·관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10월 초 경성부 내 유력자 70여 명이 ‘꼬마’ 채권을 가지고 가두에 나와 팔아 ‘국채소화운동’을 전개했고, 11월 지원병제도의 취지를 선전하는 강연대회를 개최했다. 註33) 12월에는 긴급임시전선대회 개최해 태평양전쟁 개전에 따라 전시협력을 강화하기로 결의하고, 앞으로의 활동 내용으로 중앙과 지방조직을 통해 저축 강조, 금속회수운동, 청년체력검사 취지 철저운동, 부인계몽운동, 군복의 근로수리작업 등을 결정했다. 이와 함께 영미타도 대강연회를 개최했다. 또 1942년 1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에 부인대婦人隊를 발족했다. 註34) 부인대의 지도위원은 고황경高凰京·김선金善·김활란·박마리아·박순천朴順天·박승호·박은혜朴恩惠·박인덕朴仁德·배상명裵祥明·서은숙徐恩淑·송금선宋今璇·손정규孫貞圭·유각경兪珏卿·이숙종李淑鍾·임숙재任淑宰·임영신任永信·차사백·최이권·황신덕黃信德·홍승원洪承嫄 등이며, 간사장은 임효정林孝貞이 맡았다. 이어 5월에는 일본정부의 징병제 실시 결정에 발맞추어 단장 최린이 징병제도 시행에 대한 감격과 “황국군인의 명예를 연마하고 성은에 보답하여 자자손손 번영”하자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註35) 이후 각 지부에서 징병제 선전을 위한 활발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경성지부에서는 이종린·이광수·조병상·주요한 등이, 평양지부에서는 이기찬·김건영·최정묵·채필근 등이 주요 연사로 활동했다. 註36) 1942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고문 : 윤치호·이진호李軫鎬·한상룡·박중양朴重陽

단장 : 최린

부단장 : 고원훈

이사장 : 한규복

상무이사 : 신흥우·김연수·민규식·박흥식·김사연·이성근李聖根·정교원·김시권金時權·박기효·이용신李容愼·이성환李晟煥·김동환·원덕상元悳常·조병상·이종린·이종욱李鍾郁·방의석方義錫

이사 : 안종철安鍾哲·최창학崔昌學·이병길李丙吉·유억겸·현상윤·방응모·최두선崔斗善·이종만·구자옥·신태악辛泰嶽·김갑순金甲淳·이규원李圭元·장덕수·정은섭丁殷燮·김기수·이명구李明求·김영무金英武·현준호玄俊鎬·장직상·김병규·이기찬李基燦·고일청高一淸·김명학金明學·장헌근

감사 : 박상준朴相駿·손영목孫永穆·김명준·김동훈·김성수

평의원 : 임흥순任興淳·노창성盧昌成·이정섭李晶燮·김동진金東進·서춘·함상훈咸尙勳·김승복金昇福·장면張勉·김주익金周益·오용탁吳龍鐸·조기간趙基栞·유만겸·김태석·최규동崔奎東·이병규李炳奎·민석현閔奭鉉·장기식張驥植·허헌許憲·이상협李相協·김명하金明夏·안인식安寅植·유광렬柳光烈·이헌구李軒求·조동식趙東植·이승우·소완규蘇完奎·장우식張友植·김광수金光洙·오긍선·이종회李鍾會·豊村裕·박창서朴彰緖·손홍원孫弘遠·양주삼梁柱三·장석원張錫元·한익교韓翼敎·서광설徐光卨·박창훈朴昌勳·정구충鄭求忠·이준열李駿烈·정인과鄭仁果·김활란·정춘수鄭春洙·박용운朴龍雲·박영희朴英熙·조대하趙大河·정현모鄭顯模·윤치영·이용설·신용욱愼鏞頊·박승빈·박인덕朴仁德·임명재任明宰·백기호白基昊·김성진金晟鎭·양재하梁在廈·안종화安鍾和·현제명·이숙종李淑鍾·황신덕黃信德·배상명裵祥明·모윤숙·최정희崔貞熙·정운용·김성권金星權·성원경成元慶·박희도朴熙道·박완朴浣·鶴川浣·이각종李珏鍾·박준영朴駿榮·이극로李克魯·김기덕金基德·이종은李鍾殷·박기돈朴基敦·이한복李漢復·李原漢復·민병덕·김홍량金鴻亮·김상은·이중갑李重甲·민영은閔泳殷·김원근·이종덕李鍾悳·김창수金昌洙·조강희趙岡熙·양상경梁相卿·최승렬崔昇烈·장병선張炳善·문재철文在喆·송화식宋和植·김신석金信錫·차남진車南鎭·서상일徐相日·신현구申鉉求·서병조徐丙朝·김동준金東準·김장태金璋泰·이면재李冕載·김건영金健永·채필근蔡弼近·최정묵崔鼎默·이희적李熙迪·강이황姜利璜·이영찬李泳贊·한림韓林·조영희趙永熙·남백우南百祐·이창인李昌仁·김정석金定錫·金山韶能·윤석필尹錫弼 註37)


6. 국민동원총진회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는 1944년 9월 이성환을 중심으로 친일 유력자들이 결성한 민간 전쟁협력단체이다. 근로정신을 계몽한다는 명목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근로 동원에 앞장섰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징용·징병·군사기지화를 위한 노무 동원 등에 앞장서다 1945년 3월에 해산되었다.

결성 직후인 1944년 10월 부민관에서 『매일신보』·『경성일보』 후원으로 강연회를 열어 ‘성전찬양’·‘학병참가’·‘증산보국’ 등을 고취했다. 강연자와 강연주제는 이성환의 ‘2,600만의 총진군’·김동환金東煥의 ‘부산부두 유감’·신태악辛泰嶽의 ‘장려운동에 대하여’·최재서崔載瑞의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장덕수張德秀의 ‘대의에 철徹하라’ 등이다. 註38) 또 1945년 2월에는 국민동원총진회 경기도임원대회에서 원호운동 시찰차 각도에 이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경기도에 한상룡·김동훈, 충북에 한규복, 경북에 손영목, 전남·강원에 정연기鄭然基, 황해도에 이성근 등을 파견했다. 註39)

해산 당시 경무국장 서광충웅西廣忠雄이 “국민동원총진회는 국가가 위급할 때 반도에서 자발적으로 발족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註40) 임원진은 이사장에 이성환, 이사에 조병상·손영목·한규복·정연기·김동환·신태악, 감사에 박흥식 등이었다.


7. 대화동맹

대화동맹大和同盟은 1945년 2월 고위 관료를 지냈던 엄창섭嚴昌燮과 손영목의 주도로 ‘미영격멸米英擊滅·내선단결內鮮團結·성전필승聖戰必勝’을 위한 국민운동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다. 손영목은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 대화동맹에 대해 “참정권문제가 일본각의에서 통과되어 조선에서 ‘처우감사궐기운동處遇感謝蹶起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국민운동으로서 황풍皇風의 철저한 침투와 신도실천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유지 등이 모여 조직한 단체”라고 밝혔다.

징병·증산·황국신민화를 통해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구체적 실천 사항으로 첫째 황국공민皇國公民 자질의 연성과 향상, 둘째 결전태세의 강화특히 학병권유·징병·징용에 중점을 둠, 셋째 내선동포의 정신적 단결 촉진, 넷째 증산자增産者의 공출供出 책임 완수유휴지 경작, 한 뙈기 땅에도 곡물과 야채를 심을 것. 각 학교 운동장을 식량증산에 전용할 것 등을 내걸었다. 발회식 때 손영목은 “우리 동맹은 반도 2천만의 총력을 집중시켜 성전완수에 돌입하는데 추진력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註41) 대화동맹의 운영비는 모두 전중철삼랑田中鐵三郞, 조선은행 총재·소창죽지조小倉竹之助, 남선전기 사장·박흥식 3인이 자진하여 부담하였다. 註42)

임원진은 위원장에 윤치호尹致昊, 이사에 강병순姜柄順·박춘금·손영목·이광수·이성근·조병상·진학문秦學文 등이다. 또 심의원은 고원훈·김동진金東進·김동환·김사연·김성진金晟鎭·김신석金信錫·노성석盧聖錫·박흥식·설의식薛義植·이승우李升雨·이원보李源甫·이충영李忠榮·이해용李海用·

장직상·정연기鄭然基·조동식·주요한·최정묵崔廷默·최준집崔準集·홍승표洪承杓 등이다. 註43)


8. 대의당

대의당大義黨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위해 박춘금의 주도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이다. 註44) “일신一身·일가一家의 소의小義를 포기하고 진충盡忠·애국의 대의에 살자”는 취지로 조직되었고, “조선·중국·만주의 민족은 일본과 운명을 같이 하여 서양의 침략주의를 분쇄해야 한다”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했다. 강령으로 “오등吾等은 먼저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자기로 하여금 대의의 덕기德器가 될 것을 기함. 오등은 널리 동지를 구하여 대의에 순殉할 굳은 단결을 기함. 오등은 황도의 본의에 기하여 국민사상을 통일하여 전력증강과 국토 방위의 임무에 취할 것을 기함. 오등은 지도자가 아니다. 국가에 대하여는 병졸이며, 동포에 대하여는 충복이 될 것. 오등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 註45)등을 내걸었다.

이러한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 직후인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했다. 이성근의 개회사에 이어, “아세아 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함에 이르러 대일본제국 육해군 장병 제위의 어분전御奮戰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아세아 민족해방이 하루라도 속히 오기만 기원”한다는 대일본 육해군 장병에 대한 감사결의문 채택했다. 강연은 정원간鄭元幹, 중국대표의 ‘아세아민족 대동단결의 필요성’·정유분鄭維分, 중국대표의 ‘왕도문화의 위대성과 국부國父의 예언’·동춘전董春田, 만주국대표의 ‘신흥 만주제국과 왕도정치’·이창인李昌仁의 ‘아세아 민족의 자유와 책임’, 박춘금의 ‘아세아 민족의 해방’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대회 도중 대한혁명청년단 소속의 조문기·강윤국·유만수가 대회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발기인은 박춘금·이광수·이성근·김동진·김광민金光敏 등이며, 임원은 당수에 박춘금, 위원에 고원훈·김동진·김동환·김민식·김사연·김신석金信錫·박흥식·손영목·신태악·이광수·이성근·이승우·이원보·이재갑·정연기·조병상·주요한 등 註46)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인물들로 구성되었다.


9. 국민동지회

국민동지회國民同志會는 1945년 7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성근을 비롯한 친일세력들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이다. 징용자 원호와 총후 전쟁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구성원은 이성근·이종린·이종욱 ·안정식·정인익·이성환·신태악·최재서崔載瑞 등이었다. 註47)


[註 18] 조선총독부, 「最近に於ける朝鮮の治安狀況」, 1939, 389~390쪽. ☞

[註 19] 『매일신보』 1937년 8월 21일자 ; 『동아일보』 1937년 8월 21일자. ☞

[註 20]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2004, 289~290쪽. ☞

[註 21]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328쪽. ☞

[註 22] 『매일신보』 1939년 3월 7일자. ☞

[註 23] 『매일신보』 1939년 1월 15일자. ☞

[註 24] 『매일신보』 1939년 12년 3일자. ☞

[註 25] 『삼천리』 13-12, 1941. ☞

[註 26]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373쪽 ; 『재단법인 광주대화숙요람』. ☞

[註 27] 설립취지는 다음과 같다. “본시의 조선 사람 그대로는 황국신민이 될 수가 없다. 황도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우리는 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것이다. 황도학습은 참으로 긴요 절실한 바로서 이 사업의 지속 여하에 따라 내선일체의 완전한 실현의 지속이 결정될 것이며 고도국방국가의 국민으로서 반도인이 응분의 총력을 바칠 수 있다”(『매일신보』 1940년 12월 27일자). ☞

[註 28] 『매일신보』 1940년 12월 27일자. ☞

[註 29]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376쪽. ☞

[註 30] 「臨戰對策協議會 開催에 관한 건(京高秘 제2397호)」(1941년 8월 27일). ☞

[註 31] 「興亞報國團設立準備會 開催에 관한 건(京高秘 제2372호)」(1941년 8월 25일). ☞

[註 32] 조선임전보국단, 『朝鮮臨戰報國團槪要』, 1941. ☞

[註 33] 『매일신보』 1941년 11월 8일자. ☞

[註 34] 『매일신보』 1942년 1월 6일자. ☞

[註 35] 『매일신보』 1942년 5월 14일자. ☞

[註 36] 『매일신보』 1942년 5월 15일자. ☞

[註 37] 조선임전보국단, 『朝鮮臨戰報國團槪要』, 1941. ☞

[註 38] 『매일신보』 1944년 10월 15일자. ☞

[註 39] 『매일신보』 1945년 2월 28일자. ☞

[註 40] 『매일신보』 1945년 3월 31일자. ☞

[註 41] 『매일신보』 1945년 2월 13일자. ☞

[註 42] 『매일신보』 1945년 2월 24일자. ☞

[註 43]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410쪽. ☞

[註 44] 『매일신보』 1945년 6월 26일자. ☞

[註 45] 고원섭 편, 『反民者罪狀記』, 1949. ☞

[註 46] 민족문제연구소, 『일제협력단체사전』, 411쪽. ☞

[註 47] 김여진, 『民族正氣의 審判』, 여강출판사, 1986. ☞


3.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활동


1. 일제의 사상통제와 대중선동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사상통제와 시국선전 활동이었다. 일제는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7월 22일 “국민정신을 앙양시키고 시국에 대한 인식을 강화함으로써 국민을 총집결시킨다”는 목적 하에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곧이어 전국 각도에도 정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조선중앙정보위원회는 조선에서의 사상통제와 시국선전 활동을 총괄하는 기구로서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위원에는 총독부의 각 국장·경기도지사, 임시위원에 조선군 참모장·해군 참모장·조선헌병사령관 등을 임명하였다. 주요 업무는 언론통제와 정보 수집·여론 파악 및 조정·불순분자의 동향 파악 등의 정보활동, 인쇄물·영화·강연·좌담회 등을 통한 시국선전, 기타 애국일의 설정·황국신민서사의 제정·국방헌금 실시 등이었다. 註48) 일제는 정보위원회 외에도 일반 행정조직이나 경찰조직 등을 활용해 사상통제와 시국선전 활동에 적극 나

섰다.

일제의 사상통제는 1938년 초 남차랑 총독이 ‘내선일체’를 조선통치의 목표로 강조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38년 2월 남차랑은 도지사 회의 훈시에서 “통치의 목포를 반도의 일본화, 즉 내선일체를 구현하는데 두어야 한다. …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 첫째는 조선인 지원병제도의 실시, 둘째는 교학쇄신 및 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註49)며, 내선일체의 강조와 함께 그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했다. 내선일체를 통치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조선 지배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병참기지로서의 조선의 역할과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은 일제의 요구와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조선지배정책의 변화가 필요하였고, 여기서 전면 등장한 것이 내선일체였다. 전시동원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국민총력운동’의 명분도 내선일체의 구현이었다. 註50) 남차랑은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식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를 받드는 반도통치의 최고 지침으로 내선일체의 대이상大理想을 철저히 구현하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다” 註51)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비롯해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1941년 2월, 「국방보안법」1941년 5월·「조선임시보안령」1941년 12월·「치안대책요강」1943년 1월·「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전시특례」1944년 2월·「조선전시형사특별령」1944년 2월 등 사상통제를 위한 각종 법률들이 제정, 또는 개정되었다.

내선일체를 내건 전면적인 사상통제에 따라 조선사회는 극단적인 통제와 억압을 받는 파시즘체제로 빠져들었고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파시즘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 수탈과 노동력 수탈,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면서 조선사회 전체에 대한 감시체제를 구축하였다. 불심검문과 검거·사찰·불온언동과 유언비어 단속 등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이전의 민족주의·사회주의운동 경력자에 대한 탄압과 감시·전향 강요가 노골적으로 추진되었다. 체제나 전쟁에 비판적인 지식인은 물론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지식인은 모두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인 중심의 단체 또한 사상성과 정치적 색채가 약한 단체라 할지라도 내선일체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대부분 통폐합되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조선인의 시국인식 강화와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방위적인 선동활동에 나섰다. 라디오·신문·잡지 등 매스컴을 활용한 선동뿐 아니라 강연회·좌담회·포스터·팜플렛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선전매체를 활용하였다. 그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한 선전수단은 시국좌담회였다. 시국좌담회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각 지역의 행정력·경찰력을 동원한 소규모 시국좌담회가 가장 많이 열렸으며, 농어촌 지역에서는 대부분 주재소를 매개로 개최되었다. 좌담회 내용은 ‘시국인식’의 강화에 초점을 두어 전쟁의 원인과 진행과정 및 동양에서 일본의 위치나 구미 각국의 상황 등을 질의 응답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37년 9월부터 1939년 말까지 공식적으로 개최된 좌담회 회수만도 총 197,400회, 참가 연인원은 10,759,563명에 달했다. 특히 1940년부터 급증하여 1941년 10월 초까지 총 좌담회 회수는 6만여 건에 달했다. 註52)

또한 중대한 정책이 결정되거나 정세의 변화가 있을 때는 여론 조성을 위해 매스컴을 활용하여 각계각층의 유력인사들이 참여하는 시국좌담회를 개최하였다. 대표적인 좌담회로는 1937년 7월 매일신보사의 ‘북지사변 비상시국’ 좌담회최남선·오긍선·윤치호 참석, 註53) 1940년 10월 매일신보사의 ‘반도신체제’ 좌담회, 註54) 1940년 12월 삼천리사의 ‘의무교육’ 좌담회윤치호·윤덕영·한상룡 참석, 註55) 1942년 2월 동양지광사의 ‘미영타도’ 좌담회박희도·장덕수·백낙준·신흥우·전필순·이용설·정춘수·정인과·김인영·최동·한석원·양주삼·윤치영·박희도·윤일선·이훈구·박인덕·최순주 참석, 註56) 1942년 6월 조광사의 ‘징병령과 어머니의 결의’ 좌담회홍승희·배상명·박마리아·허하백 참석, 註57) 1942년 11월 조광사의 ‘징병령과 여자교육’ 좌담회조동식·조석봉·신도순 참석, 註58) 1943년 1월 조광사의 ‘세계정국의 전망’ 좌담회함상훈·홍익범·유광렬·이정섭 참석 註59) 등이었다.

특히 일제는 지원병제·징병제·학병제 등 중대한 정책이 결정되거나 시행될 때마다 대대적인 선동활동을 펼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대표적인 관주도의 선동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8년 2월 일본 각의에서 조선지원병제도가 결정되고, 동시에 추밀원 본회의에서 일본과 조선의 학교 명칭 통일과 공학共學제도의 실시를 골자로 하는 ‘개정조선교육령’이 통과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사전 준비과정을 통해 이 두 법령이 시행되는 시기에 맞추어 4월 3일 전국에서 동시에 대대적인 축하회를 열었다. 행사내용은 신궁과 신사에서의 봉고제 집행, 학생들의 가두행진·강연회·영화회, 각 학교에서의 훈화 등이었다. 註60) 전국적으로 축하회가 열린 가운데 경성에서는 11시부터 총독이 참

여한 봉고제가 열렸고, 이어 신궁 봉찬전 옆 광장에서 총독을 비롯한 관민 1,300여 명의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축하회가 거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경성부 내 80개교 73,000여 명의 아동이 동원되어 학교 관할구역 내에서 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도 축하행사로서 학교에서 조선신궁까지 가두행진을 한 뒤 신사참배를 했다. 또 도심에서는 학생들로 구성된 음악대가 축하 행진을 벌이는 등 대대적인 축하회가 거행되었다. 경성부에서는 이날을 특별히 국민정신총동원 강조일로 정하고 각종 행사와 아울러 경성부교화단체연합회와 공동으로 일반시민·은행·회사·상점 등에 일제히 국기를 게양하게 하였다. 註61) 이후 지원병제의 취지를 설명하고 지원병을 권유하기 위해 간담회·강연회·좌담회 등을 통한 대대적인 선동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1942년 5월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선동활동에 들어갔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5월 11일을 기해 “2천 5백만 동포의 감사와 정성을 피력하고, 황은에 보답할 것을 맹세한다”며 전국에 일제히 국기를 게양하고 각 신궁·신사·사원에서 봉고제와 선서식을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註62) 5월 17일에는 징병제실시 기념강연회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어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첩경은 병역의 의무를 같이 하는데 있다”고 선동했고, 강연 내용은 경성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중계방송되었다. 註63) 이후 국민총력경기도연맹을 비롯한 각 연맹의 주도하에 징병제도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한 순회강연을 실시했다. 이어 1943년 8월 1일 징병제 시행일을 맞아 일주일 동안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게 하고 이 기간 동안 성대한 축하행사를 벌였다. 경성에서는 8월 1일 오전 7시 50분부터 조선 신궁 대전에서 조선연맹·경기도연맹·경성부연맹 주최로 총독, 정무총감, 육군무관 대표, 해군무관 대표, 각 중등학교, 전문대학 관계자 등 군관민이 모여 ‘징병제실시 감사 봉고제’를 거행한 뒤, 오전 9시부터 경성운동장에서 총독과 정무총감을 비롯해 남녀 중등학교 생도, 전문대학 학생, 청년훈련소 생도, 기타 각종 단체 회원 등 3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징병제실시감사결의선양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국기게양, 궁성요배, 묵도, 소기小磯 총독의 조서 봉독과 훈시, 학도생도 대표의 결의선양 선서,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 순서로 3만의 학도대가 분열식을 거행한 후 가두행진을 벌였다. 註64) 이후 일주일 동안 지원병제도 실시를 기념하는 야외음악회·영화상영회·기념강연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으며, 註65) 국민총력 각 연맹의 주도로 징병제실시기념사업을 위한 대대적인 헌금운동을 전개했다. 註66)

또한 1943년 10월 일본 육군성이 재학생들의 징집연기 폐지를 골자로 한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하자, 조선총독부도 ‘조선의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을 발표해 재학 중 징집연기의 특전을 받고 있던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까지도 특별지원을 할 수 있게 했다. 일제는 이 조치를 조선학생들에게 특전을 베푸는 양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註67) 10월 30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최고위직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각 대학·전문학교 학생들과 경성의 남녀 중학교 최고학년 생도 등 3만여 명의 학생들을 동원한 성대한 ‘학도임전결의대회’를 열어, 註68) 학생들을 선동하고 학병 출진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註69) 또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학도들이여 나가라! 대호령은 학도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징병제 실시 신궁봉고제


황은에 보답할 때는 이때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속히 전열戰列에 달려가라. 조선 청년의 철화鐵火같은 의기를 세계에 떨쳐라! 일어서라 그리고 나가라!”는 선전포스터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註70) 12월 28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관으로 1주일간 특별지원학도임시연성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1944년 1월 20일의 입영을 앞둔 학도들의 사기를 격려하고 무운장구를 기원하기 위한 ‘임시육군특별지원학도출진장행회’를 부민관 대강당에서 개최했다. 註71) 이어 입영 전날인 1944년 1월 19일에는 각 지역별로 경찰서 주도로 애국반원을 비롯한 대중들을 동원해 성대한 환송식을 거행했다. 註72)

이밖에도 일제는 중일전쟁 기념일, 남경·싱가포르 함락, 태평양전쟁 개전 등과 같은 전쟁 관련 기념일이나 중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각종 기념행사나 시국강연회를 통해 조선인들의 시국인식을 강화하고 전쟁협력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이러한 대중선동책은 조선인들을 파시즘체제에 순응하게 하여 자발적인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관주도의 선동·선전 활동은 자발적 전쟁협력을 이끌어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대대적인 선동책과 단속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불리한 유언비어가 끊임없이 나돌았고, 註73) 대다수 조선인들은 여전히 전쟁협력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 유력자나 친일단체를 내세운 민간차원의 선동·선전활동을 강화해 조선인 스스로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특히 청년·학생층을 대상으로 한 지원병·징병·학병 등의 선전활동에는 항상 교육·학술·문화계의 지식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2.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 활동

1) 선동·선전 활동

전시파시즘기 일제의 사상탄압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대다수 조선지식인들은 체제에 순응하거나 침묵했고, 이중 상당수는 적극적인 협력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친일의 길로 들어선 지식인들은 단순히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친일지식인들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의 힘에 압도되어 독립보다는 일제에 편승하는 것이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는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을 넘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전쟁 초기에 일제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점차 독립불능론에 빠져들어간 지식인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인정식·서춘 등이었다. 註74) 더욱이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자 독립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일제가 구체적 실천방안까지 내세우며 내선일체를 통치 전면에 내세우자, 친일지식인들은 내선일체를 ‘차별로부터의 탈출 논리’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극복하기 힘들었던 민족차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제국의 신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까지 하였다. 이제는 식민지인이 아니라 제국의 신민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전면에 내세우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병역과 의무 교육을 실시하게 되자 내선일체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져갔다. 내선일체의 논리가 비록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일본의 힘 앞에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지식인들로서는 새로운 희망이었고, 또 그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인식도 큰 작용을 하였다. 이처럼 친일지식인이 협력의 길로 나서게 된 데는 외부적 요인 못지않게 내재되어 있는 자발성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의 협력행위는 주로 시국강연·좌담회·담화·논설·시·수필 등 글과 강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행위는 대중들의 시국인식을 강화하고 전쟁협력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쟁협력 선동·선전에 나선 지식인들은 당시 교육학술·언론·종교·문학·예술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당시 신문·잡지 지면에 자주 오르내렸던 친일지식인을 분야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교육학술 : 구자옥·고승제·고황경·김두정·김성수·김활란·박인덕·백낙준·송금선·신봉조·유억겸·유진오·윤치영·이숙종·이헌구·

인정식·장덕수·조동식·최남선·최재서·황신덕·현상윤

② 언 론 : 김형원·박남규·박희도·서강백·서춘·유광렬·이창수·함대훈·함상훈

③ 종 교 : 갈홍기·신흥우·양주삼·유각경·윤치호·전필순·정인과·정춘수기독교·권상로·이종욱불교·이돈화·이종린·최린천도교·안인식·박상준유교

④ 문 학 :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용제·노천명·모윤숙·박영희·백철·서정주·이광수·주요한·채만식·최남선·함대훈

⑤ 예 술 : 구본웅미술·현제명음악·서광제영화·이서구연극

⑥ 기 타 : 강중인·신태악법조·오긍선·이용설의학·홍승원·김한경·차재정·현영섭단체



이들의 선동·선전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신문·잡지에 담화·논설 등의 선동 글을 실어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고 전쟁협력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일이었다. 친일지식인의 선동 글은 전쟁 관련 중요 정책이 발표되거나 중대 사건이 발생할 때, 그중에서도 징병제와 학병제 등과 같은 청년·학생층의 전쟁동원과 관련한 정책이 나올 때 집중되었다. 가장 많이 활용된 매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서 징병·학병에 관한 중요 정책이 나올 때는 어김없이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 글이 지면을 장식했다.

1942년 5월 일본정부가 1944년부터 조선에서 징병을 실시한다는 발표를 하자, 친일지식인들은 『매일신보』에 연이어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발표 직후인 5월 10일에는 이헌구「적성赤誠을 보일 기회 왔다」·윤치호「대어심大御心에 감격!」·송금선「군국의 어머니, 반도여성의 책무도 크다」·최린「있는 힘을 다 바치자」 등이, 5월 12일에는 유각경「어머니 자신부터 가질 ‘대화혼大和魂’」·이숙종「다시 한번 굳게 해야 할 진충보국의 결의」·


1943년 개정 병역법에 대한 이광수의 환영 담화



조동식「군인의 아내를 육성할 여학교 교육의 새 정신」 등이, 5월 13일에는 배상명「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 등이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1943년 8월 조선의 징병제를 규정한 ‘개정 병역법’이 시행되자, 친일지식인들은 8월 1일 시행일을 전후해 『매일신보』에 환영 담화와 논설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시행일 직전인 7월 28일에는 이광수「兵制의 감격과 用意」, 8월 1일에는 윤치호「다년의 염원 달성」·홍승원「황은에 보답할 길」 등, 8월 2일에는 현영섭「역사 창조의 날」 등이 환영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김기진·김용제·김상용·노천명 ·김종한·김동환 등의 문인들은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란 제목으로 연속으로 징병제에 감격하는 시를 게재했다. 註75)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라는 특집란에는 박상준「視死如歸의 정신. 어머니의 자각이 필요」·주요한「8월 1일 불후의 事蹟.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자」·최재서「道義世界選士로」·고황경「건군정신에 투철」 등이 논설을 실었다. 註76) 이어 채만식「鴻大하옵신 성은」·함대훈「장정의 각오」·김성수「文弱의 痼疾을 버리고 尙武氣風 助長하라」·김활란「거룩한 大和魂을 명심. 적 격멸에 일로매진」·고승제「감격과 반성」·유각경「당신들도 우리도」 등이 담화와 논설을 게재했다. 註77)


친일지식인들이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선동하는 특집 글



이어 1943년 10월 말 일제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학생의 징집연기 폐지를 골자로 한 이른바 학병제를 공포하자, 친일지식인들은 11월 초부터 『매일신보』에 연일 학생들을 선동하고 독려하는 글을 올렸다.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라는 특집란을 통해 연일 최남선「보람있게 죽자. 임전무퇴 空論無用」·오긍선「환하게 열린 征路,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김성수「大義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양주삼「虎班傳統을 창조, 적국의 학생병을 치자」·현상윤「士는 國之元氣. 滅私, 구원의 생을 찾자」 등이 글을 실었다. 註78) 윤치호는 「내 아들의 전도를 축복, 이제 당장 지원토록 내지 재류 학도에 전보를 치자」라는 논설을, 신흥우는 「전통의 용맹을 보이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註79) 또 문인들은 학병제를 찬양하고 학생들의 지원을 독려하는 「조선의 학도여」이광수·「나도 가겠습니다-특별지원병이 되는 아들들을 대신해서-」김기진·「권군勸君 ‘취천명就天命’』김동환·「나는 울었다-출진학도를 보내면서」김용제·「출정하는 동생에게」노천명·「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서정주 등의 시를 연속으로 발표했다. 註80) 이러한 선동·선전에도 불구하고 학병 지원률이 저조하자 윤치호·장덕수·주요한·유진오·최남선 등은 지원을 촉구하는 「총출진하라」윤치호·「대용단 내라」장덕수·「나서라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주요한·「병역은 곧 힘이다」유진오, 「가라 청년학도여」 註81) 등의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 말부터 1944년 1월 말까지의 『매일신보』에는 출진하는 학도병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윤치호와 장덕수는 「장하다, 그대들 용단. 오직 순충봉공殉忠奉公에 몸을 바치라」·「학도 열의에 감사」라는 담화문을 발표했으며, 註82) 이헌구·이병규·정구충은 「학병이여 잘 싸워라」라는 제목으로 각각 논설을 발표했다. 註83) 또 이광수는 「학병에게 감사」라는 논설을 게재했다. 註84) 1944년 1월 들어 김활란은 「감격과 가중한 책임」, 유억겸은 「적의 야망을 파촉」, 구자옥은 「필승은 신의 명령」, 장덕수는 「빛나는 정도征途를 축복」, 김성수는 「징병이 닥쳐온다」란 논설을 게재했으며, 註85) 문인들은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란에 「입영기入營旗」이광수·「신전神前의 맹서」김기진·「일장기 물결」김동인·「입영의 아침」박종화 등을 발표했다. 註86)

이와 같이 지원병·징병·학병 등 전쟁동원을 선동하는 친일지식인들의 활동은 『매일신보』의 지면을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매일신보』가 선동·선전의 장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은 당시의 언론 매체 중 일반 대중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로서 그만큼 선전효과가 컸기 때문이었다. 참여 인사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교육계·여성계·문학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특히 교육계 지도자들이 적극 나섰다. 구자옥중앙학교 교감·고황경이화여전 교수·김성수보성전문 교장·김활란이화여전 교장·박인덕덕화여숙 교장·백낙준연희전문 교수·송금선덕성여자실업 교장·신봉조이화여교 교장·신흥우배재중학 교장·유억겸연희전문 교수·유진오보성전문 교수·이숙종성신여교 교장·이헌구보성중학 교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황신덕경성가정여숙 교장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친일지식인들은 『매일신보』 외에도 여러 잡지에 기고를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과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전시파시즘기의 잡지사들은 대개 민간에서 운영하였지만, 조선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일제의 선전도구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신문과 달리 독자층이 한정되어 있었고 다소 전문성을 띠고 있다는 차이 뿐이었다. 신문에는 주로 지식인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활용한 대중적이고 선동적인 글이 많이 실렸던 반면에, 잡지는 전문성과 지식을 활용한 이론적인 글이 많았다. 친일지식인들이 잡지에 기고한 주요 글들을 살펴보면 〈표 13〉과 같다.

잡지에 실린 친일지식인의 글들도 대부분 전시파시즘정책과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역설하거나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는데 역점을 둔 선동적 내용의 글이었지만, 일반 대중보다는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 글이 많았고 필자의 상당수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지닌 이론가들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정책과 침략전쟁의 근거와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글들이 많았다.

문학 분야의 이론적인 친일논설 중 대표적인 글은 곽종원의 「결전문학의 이념」, 김용제의 「전쟁문학의 전망」, 박영희의 「전쟁과 조선문학」· 「신체제와 문학」, 백철의 「전쟁문학 일고」, 이광수의 「국민문학문제」·「황민화와 조선문학」, 채만식의 「문학과 전체주의」, 최재서의 「전쟁문학」 등이 있다. 또한 문학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관한 주요 친일논설로는 고승제의 「전환기의 문화이론」, 김기진의 「문화인에 격함」, 백철의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 이광수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신시대의 윤리」, 최재서의 「전형기의 문화이론」 등이다.


〈표13〉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의 잡지 기고글(필자별 주요 글)
필자제목출전잡지형태
갈홍기종교적인식의 방법삼천리 1941년 12월호논설
그리스도교의 인생관녹기 1940년(5권) 6호논설
고승제전환기의 문화이론인문평론 1941년 1월호논설
곽종원결전문학의 이념국민문학 1944년 4월호논설
구자옥전선에서 진실 발휘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김기진문화인에 격함신시대 1944년 9월호논설
대동아전쟁송조광 1942년 2월
김동인아부용조광 1942년 2월소설
김동환국방관념과 상무열의 고취삼천리 1940년 7월호논설
의무를 충실히하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伯林凱旋신시대 1841년 1월
아세아 부흥과 내선일체동양지광1939년 4월호논설
징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연성동양지광 1943년 3월호논설
김문집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조광 1943년 9월논설
김용제
 
전쟁문학의 전망동양지광 1939년 3월호논설
내선일체의 노래동양지광 1939년 4월호
아세아시집동양지광 1939년 7월호
內鮮結婚我觀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해신조광 1942년 2월호
御東征녹기 1943년 2월호
민족적 감정의 내적 청산으로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김한경동양문화와 일본정신동양지광 1939년 2월호논설
현대조선청년론동양지광 1939년 6월호논설
청년의 성격과 그의 연성에 대하여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김해강아름다운 태양조광 1942년 6월호
김활란반도여성의 궐기삼천리 1941년 12월호논설
최대임무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여성의 무장조광 1942년 2월호논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신시대 1942년 12월호논설
뒷 일은 우리가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노천명기원조광 1942년 2월호
승전의 날조광 1942년 3월호
지원병에게삼천리 1942년 1월호
동방의 여인들신시대 1942년? 1월호
어린 날개신시대 1943년 12월호
박남규결혼의 인식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생활의 인식으로내선일체 1940년 2월호논설
박영희황국신민의 각오를 새롭게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기타
전쟁과 조선문학인문평론 1939년 10월호논설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국민문학 1941년 11월호논설
반도신체제의 기치: 신체제와 문학녹기 1940년(5권) 10호논설
박인덕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미국 부인의 전쟁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동아여명과 반도여성대동아 1942년 5월논설
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신시대 1943년 4월호논설
박희도신동아 건설과 우리의 사명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사변전도에 대한 각오동양지광 1939년 7월호논설
배영운동강화론동양지광 1942년 8월호논설
일사보국의 생각동양지광 1940년 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일본은 왜 싸우는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싱가포르 함락과 팔굉일우동양지광 1942년 3월논설
백낙준미영의 民情과 식민 정책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백철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天皇陛下御親閱 특별관함식 배관근기삼천리 1940년 12월기타
전쟁문학 일고인문평론 1939년 10월호논설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인문평론 1940년 7월논설
서강백세계신질서 건설의 장래춘추 1942년 2월호논설
세계전국의 전망춘추 1942년 5월호논설
서광제신체제와 영화인문평론 1940년 11월호논설
서정주스무 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수필
崔遞夫의 군속지망조광 1943년 11월호소설
서춘준선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조광 1937년 12월호논설
正業轉換에 대하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1월호논설
조선과 총력운동신시대 1941년 2월호논설
필승의 신념대동아 1942년 7월호논설
송금선시대도 새로운 이날 여인으로 알아둘 예절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부인부대와 지원병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신봉조적이여 보라조광 1943년 2월호논설
신흥우태평양풍운의 전망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조선기독교도의 국가적 사명동양지광1939년 2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영국인의 민족성동양지광1942년 2월호좌담회
신가파와 공영권대동아 1942년 5월논설
신태악신내각과 오인의 각오녹기 1941년(6권) 11월호논설
심형구시국과 미술신시대 1941년 10월호논설
안용백우리 국민성과 반도인녹기 제3권 10호논설
양주삼미영타도 좌담회-아메리카는 왜 싸우는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오긍선의무교육실시와 교육시설확충삼천리 1940년 9월호논설
유각경시국과 여성의 각성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
유광렬쫓겨가는 미영세력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조광 1942년 12월호논설
의무교육과 징병제조광 1943년 2월호논설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영예조광 1943년 6월호논설
징병제 감사문세와 그 의의조광 1943년 7월호논설
대동전쟁의 聖戰 의식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대동아전쟁의 史的 의의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결전 국내태세의 강화조광 1943년 11월호논설
태평양 전황과 총후의 결의조광 1944년 2월호논설
필승회의와 국민의 실천조광 1944년 3월호논설
유억겸황국과 余의 심경삼천리 1941년 4월호논설
戰必勝功必取조광 1942년 2월호논설
유진오소감삼천리 1940년 7월호논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신시대 1944년 9월호논설
유치진대륙인식인문평론 1940년 7월호논설
싸우는 국민의 자세국민문학 1943년 6월호논설
윤치호조선인의 갈길을 알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내선일체 철저화를 위하여동양지광1939년 2월호논설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동양지광1939년 4월호논설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조광 1940년 3월호논설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도록삼천리 1940년 7월호담화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결전과 시련동양지관 1942년 1월호기타
산 역사의 주인공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이광수지원병 장행가삼천리 1939년 12월호
가끔씩 부른 노래동양지광 1939년 2월호
신시대의 윤리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우리집의 노래신시대 1941년 1월호
대화숙수양회 잡기신시대 1941년 4월호수필
사변과 조선-국민의식의 앙양과 지위향상신시대 1941년 7월호논설
싱가포르 함락되다신시대 1942년 3월호
진주만의 九軍神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신시대 1942년 6월호논설
앞으로 2년신시대 1942년 9월호논설
전망녹기 1943년 1월호
국민문학문제신시대 1943년 2월호논설
이숙종비상시 부인보국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
전시하의 가정생활조광 1943년 1월호논설
이종린鴻恩感泣대동아 1942년 7월호논설
이창수지나사전 6주년과 대동아전조광 1943년 7월호논설
중대한 시국에 처하야조광 1944년 2월호논설
이 시련을 극복하라조광 1944년 8월호논설
국민징용과 성업익찬조광 1944년 9월호논설
인정식내선일체의 필연성에 대하여동양지광 1939년 1월호논설
전시체제하의 조선경제동양지광 1939년 2월호논설
동아권의 경제적 성격과 조선의 지위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의 문화적 이념인문평론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와 언어삼천리 1940년 3월호논설
감히 도시의 청년에게 경고한다.동양지광 1943년 5월호논설
희망의 농촌조광 1943년 10월호논설
건전농촌과 모범부락조광 1943년 11월호논설
장덕수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동양지광 1939년 3월호논설
장기전을 각오하자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美英敵性의 정체동양지광 1942년 2월호논설
한 마음 한 뜻으로조광 1943년 12월호수필
정춘수應戰의 이유 3가지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주요한팔굉일우삼천리 1942년 1월호
동양해방삼천리 1940년 12월호
임전조선신시대 1941년 9월호논설
루스벨트여 답하라신시대 1942년 1월호논설
명기하라 12월 8일신시대 1942년 1월호
상해조계 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조광 1942년 2월호
마음속의 싱가폴신시대 1942년 3월호
戰必勝功必取신시대 1942년 4월호논설
첫피신시대 1942년 9월호
최저생활의 실천- 모든 물가가 군수품이다신시대 1943년 3월호논설
12월7일의 꿈신시대 1942년 12월호
채만식문학과 전체주의 -우선 신체제 공부를-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최남선동방민족의 중원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민족의 향방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0월호논설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1월호논설
만주건국의 역사적 유래신시대 1943년 3월호논설
성전의 설문신시대 1944년 2월호논설
최린자기 완성이 필요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삼천리 1940년 9월호 논설논설
최재서전쟁문학인문평론 1940년 6월호논설
사변당초와 나사변당초와 나수필
전형기의 문화이론인문평론 1941년 1월호논설
징병서원행국민문학 1943년 8월호수필
최정희5월9일半島の洸 1942년 7월호수필
군국의 어머님들半島の洸 1944년 2-4월수필
야국초국민문학 1942년 11월호소설
징용열차반도지광 1945년 2월호소설
군국모 성찬半島の洸 1944년 6-7월수필
함대훈지원병제훈련소 1일입영기인문평론 1940년 11월호수필
함상훈구주대전의 신단계조광 1942년 10월호논설
歐洲戰局의 1년조광 1942년 12월호논설
조선학령아동의 의무교육 실시조광 1943년 1월호논설
현영섭사변의 인류사적 의의동양지광 1939년 7월호논설
내선일체의 세계사적 의의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와 총후청년의 임무조광 1940년 5월호논설
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녹기 제3권 제1호논설
국민정신운동과 우리의 임무조광 1940년 6월호논설
현제명싱가포르 함락 감상동양지광 1942년 3월호논설
황신덕비상시국과 가정경제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정치분야의 대표적인 논설은 박희도의 「배영운동강화론」, 백낙준의 「미영의 민정과 식민정책」, 서춘의 「준전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 서강백의 「세계신질서 건설의 장래」, 신흥우의 「신가파와 공영권」, 유광렬의 「대동사전쟁의 사적 의의」·「태평양 전황과 총후의 결의」, 이창수의 「지나사변 6주년과 대동아전」, 함상훈의 「근위近衛 내각의 신정책」·「구주대전의 신단계」 등이다. 또한 경제 분야에서는 인정식의 「전시체제하의 조선경제」·「동아권의 경제적 성격과 조선의 지위」, 장덕수의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 등이 대표적인 논설이다. 이밖에 영화는 서광제의 「신체제와 영화」, 미술은 심형구의 「시국과 미술」, 기독교는 갈홍기의 「그리스도교의 인생관」·신흥우의 「조선기독교도의 국가적 사명」 등이 이론적인 글들이다.

특히 전시파시즘기 일제의 통치이념인 내선일체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분석한 논설이 많았다. 대표적인 논설은 김두정의 「아세아 부흥과 내선일체」, 김문집의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 김용제의 「내선결혼아관內鮮結婚我觀」, 박남규의 「내선일체생활의 인식으로」,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 이광수의 「신시대의 윤리」, 인정식의 「내선일체의 필연성에 대하여」·「내선일체와 언어」, 현영섭의 「내선일체의 세계사적 의의」·「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 등이다. 註87)

친일지식인들은 언론매체를 통한 친일 글 뿐 만아니라 각종 강연을 통한 선동·선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이 참여한 강연회는 주로 국민총력연맹을 비롯한 관변단체·친일단체·언론사 등이 주최한 시국강연회였으며, 강연 목적은 대중들의 시국인식 강화와 전쟁협력이었다. 이들은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결정을 기념해 중앙기독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1회 징병제도대연설회’이종린·이광수·주요한 등 참석와 註88)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징병제도실시 감사축하대회’윤치호·유억겸·김활란·오긍선·신흥우·구자옥 등 참석 註89) 등과 같이 지원병·징병·학병 등과 관련한 주요 시국강연회나 행사는 물론이고, 총력연맹 등이 주관하는 전국 순회강연에도 자주 나섰다. 친일지식인 중에서도 시국강연회 강연자로 가장 빈번하게 나선 사람들은 학교장과 교수·문인·여류명사 등이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총후보국’과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여성층의 교화와 계몽을 목적으로 한 강연회가 자주 열렸는데, 김활란·이숙종·황신덕·배상명·박인덕·모윤숙·손정규·허화백·송금선 등은 강연회 강사로 거의 정형화 될 정도로 자주 참여했다. 1943년 11월 조선교화단체협의회가 여성들에게 학병제와 징병제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주관한 한 전국 순회강연회에도 이들 대부분이 ‘전위여성격려대’라는 이름으로 참여해 “우리들의 아들을 바칩시다. 동생을, 오빠를 바칩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강연을 하기도 했다. 註90)

친일지식인들은 학병 지원을 위한 선동활동에서는 강연뿐 아니라 대상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활동까지 벌였다. 1943년 11월 초부터 중반까지 경성에서는 육군특별지원병 지원 마감에 임박해 유력자를 중심으로 학부모 간담회, 대상자 가정 방문 등 대대적인 ‘지원병익찬회’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윤치호·주요한·이광수·유억겸·박인덕·배상명·신봉조·서춘·백관수·주요한·이숙종·손정규·송금선·이병규·현상윤 등은 그 실행위원을 맡았다.


2) 선동·선전내용과 논리

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들이 신문·잡지의 글, 좌담회,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한 내용은 형식과 체제는 다르다할지라도 크게 ① 전쟁협력, ② 파시즘체제 옹호, ③ 내선일체와 황민화 등 3가지로 요약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쟁협력

친일지식인들의 선동·선전활동 중 일관되게 강조한 내용은 전쟁협력이었다. 수많은 글과 좌담회·강연회 통해 항상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했고, 전쟁협력의 근거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미화했다. 침략전쟁 찬양은 구체적으로 침략전쟁의 정당성, 일본군 찬양과 필승 예견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친일지식인의 글은 대부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전쟁으로서 대동아건설의 성전임을 내세우고, 영·미 등 서양 열강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박희도의 「일본은 왜 싸우는가」, 백낙준의 「미영의 민정과 식민경제」, 양주삼의 「아메리카는 왜 싸우는가」, 유광렬의 「쫓겨가는 미영세력」·「대동아전쟁의 성전聖戰의식」, 장덕수의 「미영적성米英敵性의 정체」, 최남선의 「동방민족의 중원진출과 아세아 제민족의 향방」, 현영섭의 「사변의 인류사적 의의」 등이 대표적인 글이다.

일본군을 칭송하며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은 주로 시·수필 등 문학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기진의 「대동아전쟁송」, 김동인의 「일장기의 물결」, 김해강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노천명의 「승전의 날」, 모윤숙의 「어린 날개」, 박희도의 「싱가포르 함락과 팔굉일우」,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 윤치영의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 이광수의 「싱가포르 함락되다」, 주요한의 「팔굉일우」·「마음속의 싱가폴」, 현제명의 「싱가포르 함락 감상」 등이 대표적인 글들이다. 또한 국제정세와 전황 분석 등을 통해 일본의 필승을 강조한 글도 상당수에 달했다. 구자옥의 「필승은 신의 명령」, 서강백의 「세계신질서 건설의 장래」, 성인기의 「수혈로 잃은 장蔣정권」, 신흥우의 「태평양 풍운의 전망」, 유광렬의 「영미소 진영의 내홍」, 유진오의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용설의 「대동아전쟁 소감」, 이창수의 「지나사전 6주년과 대동아전」, 주요한의 「동양해방」, 함상훈의 「구주대전의 신단계」 등이 대표적인 글이다.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활동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일이었고, 이들의 글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지원병제·국민징용령·징병제·학병제 등 전시파시즘 강화를 위한 중요 정책이 나올 때마다 그 의의를 미화하고 조선인의 자세와 역할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주요 글들을 살펴보면 계광순의 「징병제와 조선」, 고승제의 「신청년의 방향-입대」, 김기진의 「신전의 맹서」, 김동인의 「감격과 긴장」, 김두정의 「징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연성」, 김성수의 「징병이 닥쳐온다」, 김활란의 「감격과 가중한 책임」, 모윤숙의 「지원병에게」, 박종화의 「입영의 아침」, 박희도의 「일사보국의 생각」, 서정주의 「스므살 된 벗에게」·「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 서춘의 「조선과 총력운동」, 신흥우의 「전통의 용맹을 보이라」, 양주삼의 「적국의 학생병을 치자」, 유광렬의 「징병제 감사문세와 그 의의」·「결전 국내태세의 강화」, 유진오의 「병역은 곧 힘이다」, 윤치호의 「조선인의 갈길을 알라」, 이광수의 「지원병 장행가」·「앞으로 2년」, 이성환의 「지원병제도에 관하여」, 이창수의 「국민징용과 성업익찬」, 장덕수의 「빛나는 장도를 축복」, 주요한의 「임전조선」·「나서라 지상명령이다」, 최남선의 「가라 청년학도여」, 최정희의 「징용열차」, 함대훈의 「장정의 각오」, 현영섭의 「내선일체와 총후 청년의 임무」 등이다. 註91)

이러한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선동하는 글들의 핵심 내용은 황국신민의 길, 내선일체의 길을 위한 실천적 노력의 일환으로서 전쟁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원병제·징병제·학병제 등 전시동원을 위한 각종 정책이 나올 때마다 진정한 황국신민의 길이 열렸다고 환영하고 여기에 적극 동참할 것을 역설했다. 이종린은 “육군지원병제는 우리 반도인에게 완전한 국민자격이 부여되려는 첫 시험” 註92)이라고 했고, 임효숙은 “우리는 불평과 불만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지인과 꼭 같은 대접을 받을만한 무슨 공을 세웠습니까? 내지인과 같이 천황폐하를 위하여 피를 흘린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아들이나 남편을 일본의 역사를 빛내기 위하여 제물로 받친 일이 있습니까?” 註93) 라며 진정한 황국의 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김성수도 학도병을 격려하는 연설에서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니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註94)며 조선이 황국이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장덕수는 일본 유학생의 학병지원율이 저조하자 “제군은 이 땅의 장래를 힘차게 쌍견에 지고 반도의 황민화라는 일대 이상을 완수할 희망의 항성恒星일 것을 나는 이때까지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 제군은 얼마나 나의 희망을 낙담케 하고 있는가” 註95)라며 한탄하기까지 하였다. 진정한 황민신민화는 희생을 통해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비석은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정신을 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정신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군대를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인과 군대와는 너무나 인연이 멀었다. 그러나 명년부터는 우리 주위의 청년들에게도 군문에 들어갈 수 있는 광영이 베풀어졌다.… 반도 민중들도 참으로 일본정신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군문을 거쳐 나와야 할 것이다. 일본정신은 문자를 초월한 행行의 정신이라고 말한 분도 있는 듯한데, 만약 일본정신이 행의 정신이라면 그 행行이 가장 정화된 데가 군대가 아닐까 나는 생각하였다. 註96)



또한 이들은 조선인이 병역의 의무를 지는 것은 황국신민이 될 수 있는 특권이라며 병역 그 자체를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유진오는 “특별지원병제도는 조선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병역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전” 註97)이라고 했고, 이광수는 조선인의 병역의무를 천황이 “조선 사람을 황국신민으로 믿어 주신 것” 註98)이라고 주장했다. 최정희도 징병제를 조선에 실시키로 한 결정에 대해 “이날부터 우리는 신의 사명을 받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신의 법규를 지키는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사람의 값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라고 감격해 했다. 註99) 최재서도 조선인의 병역 의무는 천황이 조선인을 적자로서 신뢰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감격의 표현을 했다.

군인칙유에는 ‘짐은 너희를 손발같이 믿노라’라고 적혀 있다. 잘 알다시피 군인칙유는 다른 칙유와 달리 국무대신의 부서가 없다. 그것은 폐하께서 스스로 직접 군에 알리는 조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반도 2,300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폐하께서 스스로 ‘너희들을 짐의 손발처럼 믿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선 땅에서 생을 누리는 우리들이 어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註100)



이들은 또한 전쟁협력 논리로서 전쟁의 정당성과 목적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동양평화와 신동아건설이었다. 전쟁은 아시아인의 해방과 신동아 건설을 목표로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침략전쟁이 아닌 성전聖戰이라는 논리였다. 동양평화는 이들이 전쟁기간 동안 줄곧 강조하는 전쟁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전쟁 초기와 태평양전쟁기가 달랐다. 중일전쟁을 도발할 당시 타도 대상은 중국 내 군벌과 정치가들이었다. 최린의 주장처럼 중일전쟁은 중국민중을 군벌과 정치가들의 학정에서 구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것이 동양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길이라는 것이다.



현하의 지나를 현대적 국가관으로 볼 것 같으면 한 사회에 불과하지 완전한 국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불통일한 조직 하에 군웅이 지방을 세력범위로 할거해서 안으로는 불쌍한 지나민중을 폭정과 착취로써 질곡 가운데서 고민하게 하고 밖으로는 외국인의 … 세력을 이용하야 자기네들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하는데서 동양평화에 대한 최대의 위험과 해독을 끼치고 있다. 그럼으로 제국의 금번 출병은 지나민중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릇된 정책과 폭학暴虐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 지나민중의 적이요 동양평화의 장애물인 군벌과 정치가를 응징하여 동양평화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의의 기치이다. 註101)



이후 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자 타도 대상은 자연스럽게 영·미로 옮겨졌다. 해방의 대상도 중국인에서 아시아인 전체로 확대되었다. 유광렬은 “대동아 10억의 민족이 모두 … 공존공영을 할 수 있게 되느냐 혹은 다시 전락하여 미영의 비정秕政하에 피압박민족의 고뇌를 받게 되느냐는 정히 이 대전쟁에 달려 있다” 註102)며 태평양전쟁이 전체 아시아인을 영·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임을 강조하였다. “동아 10억의 민족을 저 앵글로색슨의 손으로부터 해방” 註103)시키자고 한 김활란의 주장이나 “전체 동양·전체 황색인종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미·영의 모든 세력을 우리 동양에서 철하게 축출” 註104)하자고 한 이용성의 주장도 모두 같은 맥락이었다.

이와 함께 전쟁이 장기화되고 조선이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일본과 공동운명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쟁협력을 촉구했다. 윤치호는 “일본제국이란 거선巨船이 내선인을 한데 태우고 바야흐로 항구에서 대해를 향하여 출범하려 하고 있다. 만약에 거선이 불행히도 풍파를 만나서 난파한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 속에 탔던 조선인은 모두 한꺼번에 운명을 같이 하고 말 것이다” 註105)라고 했고, 서춘이 “전쟁은 장기다. 자손의 대에까지 계속될는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각오하고 이러한 각오 하에 여하한 곤난 결핍에라도 감내” 註106)해야 한다며 끝까지 싸울 것을 강조했다. 이창수는 종전이 가까워지자,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도 함께 망한다며 결사항전을 촉구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당국자들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일본에 대하여 특히 국도國都 동경에 대해서 공전空前의 대폭격을 행할 것을 꿈꾸고 있다. … 적들이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때에는 피등彼等은 패자로서 정복자로서 절대권을 가지고 인류에 임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즉 그들이 이기는 경우에는 인류는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데 대해서 새삼스러이 몸서리가 처진다. 註107)


(2) 파시즘체제 옹호

친일지식인들은 파시즘체제를 적극 옹호하며, 일제가 파시즘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전개한 국민총력운동, 이른바 ‘신체제운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신체제운동은 1940년 7월에 성립된 일본의 근위近衛내각이 ‘기본국책요강’을 결정하고 이어 8월에 발표한 ‘신체제성명’에서 비롯되었다. ‘기본국책요강’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에 입각한 강력한 ‘신정치체제의 확립’과 ‘대동아 신질서 확립’을 목표로 교학쇄신, 신정치체제, 일·만·지日滿支 3국의 자주경제에 의한 국방경제, 인구증가와 체력 향상, 국민희생 불균형 시정과 강건한 국민생활 수준 확보 등 5개 항목을 제시한 것이다. 註108) 일본정부가 ‘신체제성명’에서 강조한 것이 관민 협동의 강력한 국민조직의 확립과 자발적인 국민운동의 필요성이었고, 그 목적은 거국일치의 강력한 정치체제 하에서의 고도국방체제의 확립과 신동아공영권의 건설이었다. 이러한 신체제운동을 일본에서는 ‘대정익찬운동’ 으로 명명하였고 조선에서는 ‘국민총력운동’으로 불렀다. 1940년 10월 총독 남차랑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종래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기구개편과 강화를 통해 강력한 ‘국민총력운동’을 선언했다. 註109)

신체제운동이 조선에서 전개되자 친일지식인들은 신체제운동을 예찬하고 그 정당성과 실천방안을 설파하는데 열을 올렸다. 대표적인 글로는 고승제의 「대동아건설의 윤리」, 김동환의 「신윤리의 수립」, 박영희의 「반도신체제의 기치」·「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 서춘의 「조선과 총력운동」, 유광렬의 「결전 국내태세의 강화」, 유치진의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 이건혁의 「신체제와 투자」, 이광수의 「신시대의 윤리」·「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 이창수의 「국민징용과 성업익찬」, 전석범의 「대동아전쟁과 조선경제의 진로」, 정인과의 「일본적 기독교로서 - 익찬일로의 신출발」, 채만식의 「문학과 전체주의」, 최기석의 「대동아건설과 통제경제의 현단계」, 최린의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 최재서의 「전환기의 문화이론」, 함상훈의 「근위내각의 신정책」 등이 있다. 註110)

최린은 “우리 국민으로서도 국가기구의 전면에 긍亘한 신체제에의 변혁 전환의 국가 대방침에 순응하여 정부와 공통한 운명을 가지고 재래의 개인적 자유주의에 철저한 부정 위에서 국가전체정신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註111)라며 개인주의·자유주의를 버리고 국가주의·전체주의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춘은 국민총력운동은 제도기구의 개편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는 반드시 일억 신민의 애국정성으로부터 나오는 만민익찬, 직역봉공의 신윤리, 신도덕이 있어야” 하며 직역봉공이라는 것은 “신민이 각각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사리사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표준하여 국가에 유리하도록 언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며 철저한 직역봉공의 신윤리·신도덕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서 “종래의 자유주의·개인주의·아리주의我利主義 사상 위에 건설되었던 제도·기구·윤리·도덕이 국민의 두뇌로부터 일소” 註112)된다는 것이다.

특히 남차랑 총독이 ‘신체제’를 선언하면서 “본 운동을 계기로서 관민의 정신사상의 일대 경신을 도圖할 것, 즉 신체제의 기본관념은 만민익찬萬民翼贊 직역봉공職域奉公에 있다. 따라서 관민 각인의 경우 계급의 여하를 불문하고 그 근로는 각인 자신의 이익추구가 아니고 마치 응소군인이 흔연히 그 신명을 군국君國에 받치어 명령된 국방의 부서에 취하는 것과 동양同樣의 심경에서 총후에 있어서 각인참전各人參戰·직능보국職能報國의 엄숙한 의의를 갖는 것을 모든 기회에서 강조하여 본 운동의 신전강화伸展强化를 기할 것이다” 註113)라며 직역봉공을 강조하자, 직역봉공의 신질서·신윤리·신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 분야로 확대되었다.

각 분야의 친일지식인은 글을 통해 신체제의 건설을 외치면서 낡은 기구와 사상과 문화를 청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한 신체제운동하에서 자신의 분야가 나가야 할 방향과 그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친일문인들은 신체제 문학을 국민문학으로 명명하면서 신체제하에서 문학의 방향과 역할·의의, 문인의 임무 등을 강조하였다. 이미 신체제운동 이전부터 전쟁문학론을 주장한 註114) 박영희는 “문학의 전시체제란 국가적 목적을 작가 자신의 목적으로 삼고, 국가의 사상을 작가의 의식내용 속에 수용하여 전시 국민의식을 양양하고, 국민의 정서를 국가정신 속에 조직하는 임무를 완수하는데 있다. 즉 지금은 국민을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작가의 취미에 따라 개인 심리를 탐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개인을 국민적으로 집합시켜, 국가적 행진 속에 통합하는 바와 같은 감정을 조직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인 것이다” 註115)라며 문학의 국가주의화, 전체주의화를 강조하였다. 여기에 이광수는 “국민문학의 결정적 요소는 그 작자가 ‘천황의 신민’이라는 신념과 감정을 가짐에 있다. 이 신념과 감정을 가진 작자의 문학이 곧 국민문학이 되는 것이다. … 조선에서 생길 국민문학은 이러한 황민생활을 하는 작가의 손으로 된 황민생활의 기록이라야 할 것이다” 註116)며 황도정신에 입각한 작가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채만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신체제는 결코 소비에트러시아처럼 국민의 일부분인 프로레타리아만으로 된 집단체나 그의 기능과는 전연 달라서 1억의 전국민이 무슨 주의나 이해, 그런 것으로가 아니라 황도적으로 한데 맺어진 일심국가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그담에 올 기미가 있는 공산주의를 내외로 물리치고 황도일본의 본연한 국체를 만전하여 빛내기 위한 소화유신의 방향이 있었던 것이다. … 문학이 이러한 신체제에 참여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註117)



김기진 또한 국민문학이 황도정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격동하는 시대와 이 엄혹한 환경 가운데서 조선의 문학은 과거의 온갖 잡연한 사념을 청산하고 국민문학의 순일純一한 개념에로 전환되어 현재 ‘일본적 도의의 실천을 통해 자기연성’의 단계에 처하고 있다”. 註118) 또한 최재서는 신체제운동을 문화전반으로 확대해 신체제 하의 문화를 국민문화라고 하면서 “국민문화는 국민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문화”이고 이러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은 “국가이념 이외에 있을 수가 없다” 註119)며 문화에 대한 국가통제를 정당화 하였다. 이러한 신체제운동의 논리는 예술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유치진은 “신체제에 있어서의 연극 통제란 결코 예술의 속박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기초적인 자세라 해석함이 타당하다. 예술의 새로운 발전이면 어디로 향한 발전일까. 그 방향은 두말할 것 없이 신체제하에 있어서의 국민이 향할 바 이념의 길이다” 註120)며 국민연극 수립을 제안하였고, 영화를 포함한 예술전반에 대해서 이광수는 예술지상주의를 청산하고 국가주의에 입각한 신체제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예술지상주의를 청산하는 것이 문학의 신체제요 영화의 신체제, 즉 예술의 신체제가 될 것이다. … 문학과 영화 등 문화의 각 부문은 전체주의·국가주의를 기조로 하는 신체제에 참가하여야 할 것이며 조선의 예술군藝術群도 내선일체 하에서 국가를 위해 그 보조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註121)



개인주의·자유주의·예술지상주의를 청산하고 황도정신에 입각한 국가주의·전체주의로 나가야한다는 것이 문학예술계 친일지식인들의 신체제 논리였다. 종교계 지식인들도 직역봉공의 신체제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돈화는 “오늘날 종교의 신체제는 교회는 국가를 초월한 교회가 아니요 국가 안에 있는 교회, 국가의 통제에 순응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교회란 것을 깊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전체주의 국가 이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운명이다” 註122)라며 종교계도 예외 없이 신체제에 따라 국가의 통제에 순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인과는 더 나아가 “국가 사회를 떠나고는 건실한 종교의 완성을 기할 수 없으며, 국가와 종교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註123)며 종교의 존재자체를 국가에서 찾고 있다. 또한 경제 분야의 지식인들은 「경제신체제확립요강」에 따라 일제가 제창한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병창기지화정책의 발전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註124)


(3) 내선일체와 황민화

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이 선동·선전활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기본 전제가 된 것은 내선일체와 황민화였다. 내선일체와 황민화는 친일지식인이 지녔던 기본 논리요, 이념이었다. 수많은 글과 강연에서 내선일체와 황민화는 친일지식인이 가장 많이 역설했던 부문이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바탕이 된 것은 내선일체와 황민화였다. 실상 전시파시즘기 지식인들의 친일은 일제의 지배 논리인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받아들이는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친일지식인의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관한 글은 대부분 내선일체의 의의·정당성·실천방향,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따른 조선인의 지위 역할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로 논설 형태로 논리적 측면을 다루는 글이 많았고 필진도 대체로 각 분야의 전문적인 이론가들이었다. 주요 글로는 김두정의 「아세아 부흥과 내선일체」, 김동인의 「반도민중의 황민화」, 김문집의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 김용제의 「내선결혼아관內鮮結婚我觀」·「민족적 감정의 내적 청산으로」, 박남규의 「내선일체 생활의 인식으로」, 서춘의 「조선과 총력운동」, 신갑범의 「세계사의 동양적 전회」,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내선일체의 대한 이념」, 이광수의 「황민화와 조선문학」·「사변과 조선」, 인정식의 「내선일체의 필연성에 대하여」·「내선일체와 언어」, 현영섭의 「내선일체의 세계사적 의의」·「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 등을 들 수 있다. 註125)

친일지식인들이 특히 강조하는 부문은 기본적으로는 내선일체 그 자체라기보다 내선일체를 위한 노력과 과정이었다. 진정한 내선일체는 조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내선일체란 “내가 재래의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일언이폐문하면 이것이다. 그리하여서 조선 이천삼백만이 모두 호적을 떠들어 보기 전에는 내지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최후의 이상”이며 따라서 “내선일체가 되고 아니 되는 것은 오직 나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註126)라고 하였다. 박남규는 또한 내선일체를 위한 노력은 “내선이라고 하는 구별된 형상이 하나로 되기 위한 노력이다. 하나로 되려는 생활을 말한다. 개성을 가진 두개가 하나로 되려면 고투苦鬪도 될 수 있고 쾌락도 될 수 있다. … 옷을·음식을·집을·말을·지식을·정의情意를·습관을 일체로 일체에 근접하기 위한 일생 최대의 노력이다” 註127)라며 삶 전체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김용제·박남규 등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인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註128) 현영섭은 조선어를 전폐할 것을 註129)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내선일체를 위한 길이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조선인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인정식은 내선일체의 길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황도정신 밑에서는 가능하다고 파악하였다.



아무리 동조동근의 근원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미 과거에 있어서 기천간의 서로 분리된 언어와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을 가지고 온 두 민중을 일체화 한다는 것은 어떠든 인류사상에 예외가 그리 많지 못한 엄숙하고 지대하고도 곤란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위업을 기도한다는 것만도 일본적인 위대한 황도정신의 밑에서만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註130)



내선일체의 정당성에 대해서 윤치호는 “내선일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진로를 발견하는 것이며, 이 도로 위에서 행복이 있는 장래를 전폭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註131)며 내선일체가 현실적인 선택임을 강조하였고, 김문집은 내선일체는 “내선의 상고적 귀원歸元에 다름없는 것”이고 그 정신은 곧 “옛날 내선이 일체였든 그 시대의 우리 선조의 정신” 註132)이라며 일제가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의 논리를 수용하였다. 또한 내선일체를 수용하면서 철저한 황국신민화로 나가야 하다고 강조하였다. 내선일체는 조선인이 천황의 적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천황에게 더욱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선일체는 곧 황민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광수는 내선일체를 위해 가장 긴급한 것은 “황실에 대한 충성 정조情調의 함양” 註133)이라면서 조선인이 가장 열심히 “배울 것은 천황께 바치는 공부” 註134)라고 주장하였다.

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의 선동·선전활동은 형식과 방법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파시즘체제를 미화·찬양하고 순응과 협력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 핵심 내용은 내선일체의 논리를 토대로 일제의 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며, 그 실천적 노력이 전쟁협력이라는 것이었다. 병역 등을 통한 적극적 전쟁협력은 일제의 신민이 되기 위한 과정이며 또한 진정한 내선일체를 실현하기 위한 조선인의 의무라는 것이다. 또한 총력전체제를 강화화기 위한 일제의 신체제운동의 논리에 따라 모든 조선인은 직역봉공의 자세로 국가주의·전체주의에 순응하고 보국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친일지식인들의 주장과 논리는 일제의 입장을 거의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일제가 파시즘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조선통치상 필요한 정책과 방침은 이들의 선동·선전활동을 통해 정당화되거나 미화되었다.

〈박 수 현〉


[註 48]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朝鮮時局宣傳事務槪要」, 1937. ☞

[註 49] 조선총독부, 『朝鮮』 2월호, 1938, 182~183쪽. ☞

[註 50] 박수현, 「전시파시즘기(1937-1945) 조선지식인의 체제협력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163쪽. ☞

[註 51] 조선총독부, 『조선』 6월호, 1939, 2쪽. ☞

[註 52] 변은진, 『일제 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현실인식과 저항』, 고려대박사학위논문, 1998, 37~38쪽. ☞

[註 53] 『매일신보』 1937년 7월 23일~25일자. ☞

[註 54] 『매일신보』 1940년 10월 24일~11월 12일. ☞

[註 55] 『삼천리』 12월호, 1940. ☞

[註 56] 『동양지광』 2월호, 1942. ☞

[註 57] 『조광』 6월호, 1942. ☞

[註 58] 『조광』 11월호, 1942. ☞

[註 59] 『조광』 1월호, 1943. ☞

[註 60] 『매일신보』 1938년 3월 3일자. ☞

[註 61] 『매일신보』 1938년 4월 4일자. ☞

[註 62] 『매일신보』 1942년 5월 11일자. ☞

[註 63] 『매일신보』 1942년 5월 18일자. ☞

[註 64] 『매일신보』 1943년 8월 1일자. ☞

[註 65] 『매일신보』 1943년 8월 9일자. ☞

[註 66] 『매일신보』 1943년 8월 4일자. ☞

[註 67] 『매일신보』 1943년 10월 14일자. ☞

[註 68] 『매일신보』 1943년 10월 31일자. ☞

[註 69] 『매일신보』 1943년 10월 31일자. ☞

[註 70] 『매일신보』 1943년 11월 14일자. ☞

[註 71] 『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자 및 29일자. ☞

[註 72] 『매일신보』 1944년 1월 20일자. ☞

[註 73] 전시파시즘기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宮田節子, 「조선민중의 중일전쟁관」,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청아, 1988 ; 변은진, 「일제의 파시즘전쟁(1937-45)과 조선민중의 전쟁관」, 『역사문제연구』 3, 역사문제연구소, 1999 ; 박수현, 「중일전쟁기 유언비어와 조선인의 전쟁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참조. ☞

[註 74] 이준식, 「파시즘기 국제정세의 변화와 전쟁 인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 혜안, 2005, 110~112쪽. ☞

[註 75] 『매일신보』 1943년 8월 1일~8일자. ☞

[註 76] 『매일신보』 1943년 8월 2일~5일자. ☞

[註 77] 『매일신보』 1943년 8월 2일~4일자 및 6일~7일자. ☞

[註 78] 『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7일자 및 9일자. ☞

[註 79]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8일자. ☞

[註 80] 『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7일자 및 10일·16일자. ☞

[註 81] 『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20일자. ☞

[註 82] 『매일신보』 1943년 11월 22일자. ☞

[註 83] 『매일신보』 1943년 11월 24일~26일자. ☞

[註 84]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 ☞

[註 85] 『매일신보」 1944년 1월 4일자 및 6일~7일·17일·22일자. ☞

[註 86] 『매일신보』 1944년 1월 17일자 및 19일·22일~23일자. ☞

[註 87] 박수현, 「전시파시즘기(1937-1945) 조선지식인의 체제협력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178~179쪽. ☞

[註 88] 『매일신보』 1942년 5월 14일자. ☞

[註 89]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

[註 90] 『매일신보』 1943년 11월 14일자. ☞

[註 91] 박수현, 「전시파시즘기(1937-1945) 조선지식인의 체제협력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183~184쪽. ☞

[註 92] 이종린, 「부형과 학생들에게 고함」, 『매일신보』 1943년 11월 19일. ☞

[註 93] 임효정, 「대전과 여성의 길」, 『대동아』 7월호, 1942, 52쪽. ☞

[註 94] 김성수,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6일. ☞

[註 95] 장덕수, 「대용단을 내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7일. ☞

[註 96] 정비석, 「군대생활」, 『신시대』 7월호, 1943, 37쪽. ☞

[註 97] 유진오, 「병역은 곧 힘이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19일. ☞

[註 98] 이광수, 「징병과 여성」, 『신시대』 6월호, 1942, 38쪽. ☞

[註 99] 최정희, 「5월 9일」, 『半島の侊』 7월호, 1942, 27쪽. ☞

[註 100] 최재서, 「징병서원행」, 『국민문학』 8월호, 1943, 46쪽. ☞

[註 101] 최린, 「동양평화의 대정신」, 『매일신보』 1937년 8월 15일. ☞

[註 102] 유광열, 「대동아전쟁 3년 - 결전의 해인 동시에 결승의 해이다」, 『조광』 1월호, 1944, 26쪽. ☞

[註 103] 김활란, 「거룩한 대화혼을 명심」, 『매일신보』 1943년 8월 7일. ☞

[註 104] 이용성, 「대동아전쟁 소감」, 『동양지광』 1월호, 1942, 52쪽. ☞

[註 105] 윤치호, 「내선인은 동일운명-巨船의 항해에 임하여」, 『매일신보』 1937년 8월 15일. ☞

[註 106] 서춘, 「필승의 신념」, 『대동아』 7월호, 1942, 23쪽. ☞

[註 107] 이창수, 「중대한 시국에 처하야」, 『조광』 2월호, 1944, 19쪽. ☞

[註 108] 전상숙, 「일제 군부파시즘체제와 ‘식민지 파시즘’」, 『일제 파시즘 지배정책과 민중생활』, 혜안, 2004, 30쪽. ☞

[註 109] 「半島新體制確立 -南總督의 決意演說-」, 『삼천리』 12월호, 1940, 68~71쪽 참조. ☞

[註 110] 박수현, 「전시파시즘기(1937-1945) 조선지식인의 체제협력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189쪽. ☞

[註 111] 최린,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 『삼천리』 9월호, 1940, 30쪽. ☞

[註 112] 서춘, 「조선과 총력운동」, 『신시대』 2월호, 1941, 24~25쪽. ☞

[註 113] 『삼천리』 12월호, 1940, 71쪽. ☞

[註 114]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전쟁문학은 그 실은 일본정신의 일영역에 불과한 것이다. 금번 지나사변은 전투를 위한 전투가 아니다.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한 일본정신의 발로다. 즉 동양정신의 선구라고도 할 만한 이 일본정신은 내가 이곳에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역설하려는 것은 이 일본정신 속에는 옛 부터 조선 사람들이 귀중하게 생각하던 도덕과 정의감이나 또는 지나인들이 생각하던 그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광범하고 또 광범한 그 정신하다. 그러한 까닭에 이 정신을 기초로 한 전쟁은 말할 것도 성전임에 틀림없다. 이 성전에 있어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황군은 또한 일본정신의 정화이다. 이 이상 그 노고가 문자로 그리어져서 나타날 때는 작품의 가치는 천추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문학적 효과는 국내의 국민만을 움직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세계 사람들의 흉중에 남김이 또한 있을 것이다.”(박영희, 「전쟁과 조선문학」, 『인문평론(창간호)』 10월호, 1939, 40쪽). ☞

[註 115] 박영희,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 『국민문학』 11월호, 1941, 43쪽. ☞

[註 116] 이광수, 「국민문학문제」, 『신시대』 2월호, 1943. ☞

[註 117] 채만식, 「문학과 전체주의」, 『삼천리』 1월호, 1941, 250쪽. ☞

[註 118] 김기진, 「탄환과 충언」, 『매일신보』 1944년 1월 5일~7일. ☞

[註 119] 최재서, 「전환기의 문화이론」, 『인문평론』 2월호, 1941, 22쪽. ☞

[註 120] 유치진,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 『매일신보』 1941년 1월 3일. ☞

[註 121] 이광수, 「新體制下의 藝術의 方向」, 『삼천리』 1월호, 1941, 35쪽. ☞

[註 122] 이돈화, 「성전과 종교의 사명」, 『매일신보』 1941년 8월 30일~9월 2일. ☞

[註 123] 정인과, 「일본적 기독교로서 - 익찬일로의 신출발」, 『매일신보』 1941년 9월 3~5일. ☞

[註 124] 방기중, 「조선 지식인의 경제통제론과 ‘신체제’ 인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 혜안, 2005, 77~87쪽. ☞

[註 125] 박수현, 「전시파시즘기(1937-1945) 조선지식인의 체제협력 양상과 논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180쪽. ☞

[註 126] 이광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매일신보』 1940년 9월 4~12일. ☞

[註 127] 박남규, 「내선일체생활의 인식으로」, 『내선일체』 2월호, 1940, 50쪽. ☞

[註 128] 김용제, 「內鮮結婚我觀」, 『내선일체』 1월호, 1940 ; 박남규, 「結婚의 認識」, 『내선일체』 1월호, 1940. ☞

[註 129] 현영섭, 「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 『녹기』 1월호, 1939. ☞

[註 130] 인정식, 「내선일체의 문화적 이념」, 『인문평론』 1월호, 1940, 5쪽. ☞

[註 131] 윤치호,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 『동양지광』 4월호, 1939, 23쪽. ☞

[註 132] 김문집,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 『조광』 9월호, 1943, 34쪽. ☞

[註 133] 이광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매일신보』 1940년 9월 4일~12일. ☞

[註 134] 이광수, 「신시대의 윤리」, 『신시대』 1월호, 1941, 1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