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해방 이후 친일세력 처리와 반민특위 활동 /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몽유도원 2014. 1. 13. 09:21

 제8권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 제6장 해방 이후 친일세력 처리와 반민특위 활동

1. 친일세력 동향과 국내 정치세력의 인식과 대응

2. 반민특위의 활동

3.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의 조직

4. 반민특위 활동과 방해 책동

5. 반민특위의 역사적 성격


1. 친일세력 동향과 국내 정치세력의 인식과 대응


1945년 8월 15일 일제 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한국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은 일제강점기에 줄기차게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성과물이라기보다는 연합국 승리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장래는 우리의 주체적인 노력보다 외세의 간섭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외국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기 전 권력의 공백이라는 불안정한 정세가 조성되었지만, 전국 곳곳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건국준비의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친일파는 해방의 감격은커녕 해방의 분위기를 불안한 심정으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해방 직후부터 친일파 처단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높아 전국 곳곳에서 친일파에 대한 공격이 일어났다. 일제의 항복선언 이후부터 10여 일 동안 한국인이 일본인과 한국인 관리를 폭행한 360여 건 가운데 한국인 관리에 대한 공격이 220여 건, 일본인 관리에 대한 공격이 140여 건으로 일본인 관리보다 한국인 관리가 훨씬 많았다. 이 때문에 미군이 남한을 점령할 때까지 경기도 경찰의 출근율은 일본인 경찰이 90%인데 비해 한국인 경찰은 20%에 불과했다. 해방 직후 친일파에 대한 공격은 민족과제인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인식도 일정 정도 작용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한 행위에 대한 감정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 註1)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친일파 처단은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어려움에 부딪쳤다. 미군정은 친일파를 처단하기는커녕 이들을 보호·지원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종전 이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정책을 입안했다. 여기에 한반도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한국을 독립시키되 먼저 연합국 공동 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특정한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전일적 지배를 방지하고, 안보를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종전 이후 자칫 폭발적 상황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한반도의 민족운동의 고양에 강대국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조절하고 내정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미국·영국·중국·소련 4개국이 참여하는 관리 방식을 통해 어느 단계에서나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註2) 미국의 한반도 점령의 중요한 목적은 군사적 전략기지 확보를 통한 대소 방파제의 구축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고 정치적으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이었다.

미국은 대한정책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예상되는 혁명적 상황을 진정시키고 안정적인 현상 유지를 점령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현상유지정책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 상황을 파악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미국은 일제가 철수한 후에는 사회주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현상유지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D. MacArthur에게 미군정 장관의 지시하에 조선총독 및 그의 일본인 참모진을 한국의 행정에 활용하는 것이 기본계획이라는 대일 훈령을 내렸다. 아울러 미국의 이해를 대변할 세력으로 친일파를 주목했다. 미국은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외의 한국인 단체나 그 지도자들에 비해 정치의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지도력도 친일경력 때문에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해방 이후 국가 경영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의 경험이 있는 하급관리들을 참여시킨다면 실무적인 행정 능력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註3)

미국무성의 지시에 따라 맥아더는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에 앞서 군정을 실시하고 조선총독부의 기구 및 인원을 이용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일본인 관리의 유임을 골자로 하는 현상유지정책은 국내의 비판적인 여론으로 수정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해임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인 하위 관리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해임된 정무총감과 조선총독부의 각 국장도 군정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은 기존의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각 국장을 모두 미군으로 교체했다. 미군정은 일본인 고위 관리를 해임하고 한국인을 군정에 기용했다. 미군정의 한국인 고위 관리의 임용 원칙은 첫째, 영어를 잘 구사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무엇보다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두번째 원칙은 공산주의와 관계있는 한국인을 배제한다는 점이었다. 이 원칙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해방 이후 사회주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처럼 실제로 해방 후 남한과 북한에서 사회주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왔다.

미군정 관리 임용 원칙에 따라 미군정청 중앙행정기구에 기용된 대다수의 한국인 고위 관리들은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유학하는 등 영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숭실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들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를 지낸 경력도 있었다. 이들 기용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선교사의 영향이 작용했다. 註4)

미군정 조선인 고위 관리 가운데 문교부장 유억겸兪億兼, 농무부장 이훈구李勳求, 보건후생부장 이용설李容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침략전쟁을 지원했던 조선임전보국단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비롯한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아울러 유억겸과 이용설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잡지에 게재했으며,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은 ‘조선인은 일제의 충량한 병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한 경력이 있었다. 체신부장 길원봉吉元鳳, 운수부장 민희식閔熙植, 토목부장 최경렬崔景烈은 조선총독부 고위관리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친일관리의 기용은 중하위직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많았다.

미군정의 행정관리는 고위직일수록 조선총독부 관리의 비율이 낮았지만, 사법부와 검찰은 고위직일수록 조선총독부 관리의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미군정기 동안 사법부의 대법원장, 공소원 원장, 지방법원장으로 기용되었던 13명 가운데 12명이 조선총독부 판사나 검사, 또는 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미군정기 동안 판사로 기용된 총 250여 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40여 명이 조선총독부 판·검사 출신을 비롯한 사법 관리 출신이었으며, 일부는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었다.

또한 미군정기 동안 검사장으로 기용된 17명 가운데 14명이 조선총독부 판사나 검사, 또는 관리와 부회 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검사로 기용된 160여 명 가운데 70여 명이 일제시기 판·검사 출신을 비롯한 사법 관리 출신이었으며, 일부는 조선총독부 하위 관리를 지낸 경력이 있었다. 이처럼 미군정기 동안에 임명된 판·검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조선총독부 판·검사 출신이었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사람에게 중형을 선고한 자였다.

미군정의 일제관리의 기용은 경찰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1946년 11월 무렵 전체 2만 5천여 명의 경찰 가운데 5천여 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이들은 전체 경찰의 20%에 불과했지만, 경찰 고위직을 장악했다. 경찰 간부는 1946년 5월 무렵 8개 도 경찰청장 가운데 5명, 6명의 경찰청 차장 가운데 4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으며, 치안감 1명, 총경 30명 가운데 25명, 경감 139명 가운데 104명, 경위 969명 가운데 806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즉 경위 이상 경찰간부 1,153명 가운데 945명이 일제경찰 출신으로 전체의 82%를 차지했다. 미군정기 동안 도 경찰의 국·청장으로 기용된 30명 가운데 25명이 일제 경찰이었거나 군수 등을 역임했으며, 일부는 조선총독부 하급 관공리, 도회 의원,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경찰과 함께 미군정의 주요 물리력이었던 군의 기용 실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의 간부와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 4월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모두 200명이 입교하여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일본군 출신이 87명, 만주군 출신이 21명이었으며, 2명이 중국군 출신이었다. 미군정기 동안 조선경비대의 총사령관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지낸 26명 가운데 23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더구나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11명이었다. 註5)

이처럼 미군정기 동안 행정·사법·경찰·군의 고위 관리로 기용된 자 가운데 대부분이 일제 관리였으며, 일부는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미군정은 일제 관리들이 조선인에게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친일파를 기용한 이유는 이들이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의 현실에는 아랑곳없이 일제에 협력했듯이 미군정에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친일파의 기용은 단순히 군정 관리로서의 문제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군정기 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 다시 친일파가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까지 이어졌다. 친일 세력은 미국의 예상대로 미군정기 동안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무너뜨리고,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토를 분단시켜 분단체제를 형성하는데 앞장섰다.

한편 국내 정치세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입장을 달리 했다. 주요 정치세력 중에서 조선공산당이 친일파 처리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부터 친일파 처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를 배제하자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친일파의 배제 내지 숙청이라는 원칙적 입장만 되풀이했을 뿐 친일파의 범주와 처리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대중적 기반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인민당은 친일파를 처리하되, 그 범위는 최소화하자는 입장이었다. 친일파 처리는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지나친 적대적·배타적 태도는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여러 정치세력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기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 임시정부는 경우에 따라 친일파 처리를 주장했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의 처리를 국가 건설 후에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자들을 포함한 친일파를 활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임시정부의 이러한 입장은 지나치게 임정법통론을 주장하며 국가 건설을 임시정부 중심으로 이루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선통일 후친일파 처리’와 ‘선친일파 처리 후통일’의 결과는 동일하다는 인식으로 나타났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좌파계열은 친일파 처리라는 단호한 입장과 함께 그 처리 범위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들은 임시정부 내에서 비주류였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친일 자본가·지주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정부 수립 후에 친일파를 처리하자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친일파 처리를 반대하고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는 이승만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일제강점기에 해외에서 활동한 관계로 국내의 기반이 취약하여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친일파를 자신의 주요 기반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친일파 처리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미군정기에 친일파 처리문제는 정치세력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였다. 註6)

미군정기에 친일파 처리에 대한 정치세력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1946년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친일파 처벌을 위한 법 제정을 논의했다. 법 제정은 입법의원에 참여한 중도 좌파세력이 주도했으며, 그 결과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어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친일파 처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친일파 처벌에 반대했거나 친일 경력이 있는 의원들이 법 제정을 무산시키거나 법안을 약화시키려는 온갖 방해 책동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7년 7월에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조례가 제정되었다. 이로써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1947년 11월 미군정은 남한만의 선거와 이를 기반으로 정부 수립이라는 방안이 유력해지던 상황에서 친일파가 배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조례의 인준을 보류했다. 註7) 미군정은 특별조례의 인준을 거부할 경우 쏟아질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인준 보류라는 기만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비록 미군정의 반대로 특별조례는 시행되지 못했지만, 정부 수립 후 바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으로 줄임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의의가 있었다.

[註 1] 해방정국기 국내 정치세력의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52~116쪽과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나남, 2003, 42~88쪽 참조. ☞

[註 2]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출판부, 2003, 19~62쪽. ☞

[註 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110쪽. ☞

[註 4] 박태균, 「8·15 직후 미군정의 관리충원과 친일파」, 『역사와 현실』 10, 한국역사연구회, 1993, 60~62쪽. ☞

[註 5]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6~52쪽 ☞

[註 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231~281쪽 ;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52~77쪽. ☞

[註 7] 김영미, 「미군정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성립과 활동」, 『한국사론』 32, 서울대 국사학과, 1994 ;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92~116쪽. ☞


2. 반민특위의 활동


1.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정

친일파 처리문제는 제헌국회가 개원한 직후부터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이는 5·10선거에서 친일파 처리에 적극적인 인물들이 당선됨으로써 가능했다. 1948년 2월에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선거가 결정되자, 좌파 세력과 중도파 세력은 5·10선거가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토를 분단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친일파를 포함한 보수 우익 세력이 대거 당선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심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인물뿐만 아니라 소장파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제헌국회 개원 직후부터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제반 개혁입법의 제정을 주도했으며, 무엇보다 친일파 처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註8)

친일파 처리문제는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소장파 의원 김광준金光俊은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을 법안에 둘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선열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법안의 마련을 동의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


친일파 처리의 주장에 대해 해방정국 시기에 친일파 처리를 반대했던 한국민주당도 정부수립 후에 친일파 처리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동의가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헌법 10장 부칙 제100조에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었다. 이 조항은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어 헌법 101조에 두었다. 註9)

친일파 처리를 위한 법제정은 8월에 국회 본회의에서 김웅진金雄鎭 의원이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기초할 위원회의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김웅진은 공무원의 채용에서 친일파를 제외시키고, 해방 후에도 악질적인 친일파들이 조금의 반성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웅진의 동의안에 대해 일부 의원이 정부 수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 처리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동의안은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註10)

김웅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법기초위원회’는 해방 후 논의된 친일파 처벌안을 가지고 회의를 한 끝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를 토대로 마련한 전문위원의 안을 채택하여 심의했다. 아울러 일본의 공직추방령, 북한 인민위원회의 법안, 중국의 전범자 처벌안 등을 참고하여 초안을 마련했다.

반민법 초안은 8월 16일 국회에 상정되어 17일부터 심의에 들어갔다. 반민법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정부 내 친일파 처리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김인식金仁湜은 상공부 차관인 임문환任文桓과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의 친일행위를 지적하며, 정부 내의 친일파의 파면을 건의하는 건의문을 내자고 주장했다. 김인식은 8월 19일 다시 정부 고위 관리의 친일행위를 거론하며,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건의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물론 그 동안 반민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던 의원들도 적극 지지했으며, 일부 의원은 친일파의 임용을 금지하는 임시법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인식의 동의안은 한 명의 의원도 반대 없이 통과되었으며, 동의안을 제안한 의원을 중심으로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친일파로 지목된 체신부 장관 윤석구尹錫龜, 교통부 장관 민희식閔熙植, 상공부 차관 임문환, 그리고 법제처장 유진오의 일제시기 행적을 현지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임문환과 유진오, 그리고 민희식의 친일 행적을 국회에 보고하고, 정부 내 친일파 조사에 관한 보고서와 건의안을 정부에 이송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조치가 없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단에게 이 문제를 위임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어 이들의 처리는 무산되었다. 註11)

‘특별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반민법 초안은 8월 21일에 대체 토론을 마치고 25일부터 축조 토의에 들어갔다. 축조 토의는 그 동안 질의응답과 대체 토론에서 나온 수정안 가운데, ‘특별법기초위원회’와 수정안을 제출한 의원과의 합동회의에서 합의된 조항이 수정안으로 채택되었다. 국회는 이를 토의한 후 각 조항별로 표결하여 통과시켰다.

반민법이 제정되어 가는 가운데 김준연과 곽상훈 등 일부 의원들은 반민법이 시행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고 주장하며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거나 친일파의 범주를 축소하고 처벌도 관대히 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공소시효의 연장, 가감례 조항의 삭제, 처벌의 강화 등 반민법의 강화를 주장하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반민법안에 대한 토의는 9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같은날 반민법이 통과되었다.

국회에서 통과된 반민법은 정부로 이송되었다. 9월 21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의 대다수는 반민법을 시행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에 환부還付하기로 결정하고 이의서異議書를 작성했다. 이의서의 내용은, 첫째 특별재판부에 국회의원을 포함한 것은 삼권 분립 정신에 배치되는 사법권 침해이며, 둘째 법관을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은 법관의 자격을 법률로써 정한다는 헌법에 위반되며, 셋째 선악을 불문하고 직위에 따라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헌법의 정신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9월 14일에 정부보유미 문제로 시급을 요하던 양곡매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이었다. 정부의 양곡매입법안에 대해 국회 산업노농위원회는 이 법안의 내용 중 양곡의 강제매입을 자유매입으로 하는 등의 수정안을 마련함으로써 정부안과 상충되었다. 22일 다시 국무회의를 열어 양곡매입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상황에서 반민법을 국회로 환부할 경우 양곡매입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렵다고 판

단하여 반민법에 서명하고 법령 제3호로 공포했다. 註12)


2.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내용과 성격

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 및 처벌규정,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 및 수속, 마지막으로 부칙으로 구성되었으며, 조항은 모두 32개 조항이었다. 제1장에 규정된 친일파의 범주와 처벌규정은 모두 8개 조항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죄

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通謀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수受한 자 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

제3조 일본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惡意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4조 좌左의 각各 호號의 일一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

① 습작襲爵한 자

②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되었던 자

③ 칙임관 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④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⑤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⑥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⑦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日政에 아부하여 그 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

⑨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罪迹이 현저한 자

⑩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⑪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⑫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제5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勳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헌병보·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 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

제6조 본법에 규정된 죄를 범한 자 중 개전改悛의 정상이 현저한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

제7조 타인을 모함할 목적 또는 범죄자에 관하여 허위의 신고, 위증, 증거소멸을 한 자 또는 당해 내용에 해당한 범죄규정으로 처단한다.

제8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로서 단체를 조직하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註13)



반민법에 규정된 친일파의 범주는 크게 행위와 관계없이 일정한 지위에 있었던 자에게는 모두 적용되는 당연범과 행위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선택범으로 구분되었다. 당연범은 1조부터 3조까지와 4조의 1항부터 3항까지이며, 선택범은 4조 4항부터 12항까지였다. 당연범으로 규정된 1·2·3조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의 민족반역자 규정과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처벌 내용에서는 최저형을 규정한 ‘이상주의以上主義’가 채택되었다. 아울러 친일파의 재산을 비롯한 물적 기반을 박탈하기 위해 규정된 재산형에서도 재산뿐만 아니라 유산을 포함하는 등 ‘특별조례’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반민법 1조에 적용되는 친일파는 2조에 해당되는 친일파와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이 조항에 적용되는 자들은 대부분 사망하여 실질적인 처벌보다는 반민법의 취지를 살린 상징적인 성격이 강했다. 3조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하거나 박해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이었다. 여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을 고문하여 사망시켰거나 불구로 만든 경찰과 독립군을 토벌했던 군인들이 주요 적용대상이었다.

반민법 1조와 2조가 반민법의 정신을 살린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면, 친일파의 실질적인 처벌을 가능하게 한 조항은 4조였다. 이 때문에 반민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의원들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다. 이 조항은 ‘특별조례’의 부일협력자 규정과 거의 동일했으나, 처벌은 보다 강화되었다. 하지만 4조 4항까지는 지위와 죄질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추상적으로 규정되거나 선택범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처벌에서도 최저형을 규정하지 않은 ‘이하주의以下主義’를 채택하여 반민특위 조사위원이나 특별검찰관·특별재판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5조는 ‘특별조례’와 반민법 초안에는 없었던 조항으로 반민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새로 마련된 조항이었다. 이 조항은 친일파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효과뿐만 아니라 이들이 직위를 이용하여 친일파 처벌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효과를 기대하고 마련된 규정이었다. 註14)

반민법 제정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내용은 친일파의 범주 규정과 함께 6조의 ‘가감례’ 규정이었다. 이 조항은 친일파 가운데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반민법의 시행에 적극 협조할 경우 정상을 참작하겠다는 취지로 규정된 규정이었다. 아울러 친일파의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반성과 참회를 유도하여 포용하겠다는 뜻이 담겨진 규정이었다. 하지만 처벌의 경감뿐 아니라 면제까지 규정한 것은 특별재판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문제점이 있었다.

반민법 제7조는 반민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 개입되어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거나, 친일파를 옹호할 목적의 허위 신고나 위증·증거인멸을 방지하기 위해 규정된 조항이었다. 친일파의 행위는 일제강점기의 문서와 신문·출판물 등 각종 자료에 근거하여 밝힐 수 있었지만, 많은 조항은 당시 사람들의 증언이나 신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련된 규정이었다. 하지만 자칫 신고자나 증언자가 처벌을 두려워하여 신고를 기피하거나 증언을 거부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 처벌 과정에서 일반인의 참여와 원활한 운영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많은 조항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될 경우 친일파가 처음부터 조사 대상에서 빠질 위험성도 안고 있는 규정이었다.

결국 반민법은 반민특위 조사위원·특별검찰관·특별재판관의 의지에 따라 친일파의 처벌이 엄중하게 이루어질 수도, 약화될 수도 있는 성격이었지만, 당시 친일파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정부가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등 친일파의 처벌을 가로막는 요소가 곳곳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공 여부는 불투명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註15)

[註 8] 백운선, 『제헌국회 내 ‘소장파’에 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2. ☞

[註 9]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29~131쪽. ☞

[註 10]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삼민사, 1984, 28~29쪽. ☞

[註 11] 오익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91, 121~122쪽. ☞

[註 12]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33~142쪽 ;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02~112쪽. ☞

[註 13]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38~39쪽. ☞

[註 14]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13~116쪽. ☞

[註 15]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42~148쪽 ;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13~120쪽. ☞


3.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의 조직


1. 반민특위의 조직

반민법이 공포된 후 이를 시행하기 위한 첫 출발이 반민특위의 구성이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사위원의 선출은 지역 실정에 밝은 의원이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각도에서 1명씩을 선출하여 국회에서 승인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승인 방식도 일괄적으로 처리할 경우 부적격한 인물이 인준될 가능성이 있어 개별적으로 인준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김상돈金相敦, 서울·조중현趙重顯, 경기·송필만宋必滿, 충북·김명동金明東, 충남·오기열吳基烈, 전북·김준연金俊淵, 전남·김상덕金尙德, 경북·김재학金載學, 경남·이종순李鍾淳, 강원·김경배金庚培, 황해·제주가 조사위원 후보로 호선되었다. 註16)

10명의 조사위원 후보 가운데 송필만과 김재학을 제외한 8명이 승인되었다. 두 사람이 인준되지 못한 이유는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친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필만은 ‘특별법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할 때 반민법의 내용을 관대히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김재학도 정부 내 친일파의 조사·숙청도 반대하는 등 친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이후 박우경朴愚京과 김효석金孝錫이 충북과 경남을 대표하는 조사위원으로 승인되었다. 註17) 10월에 김상덕과 김상돈이 반민특위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구성은 마무리되었다. 註18)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처벌하는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반민특위가 일차적으로 친일파를 체포·조사를 했으며, 이들이 체포되지 않으면 아무리 죄질이 무겁다하더라도 처벌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반민법에 의하면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친일파의 조사를 마친 후 특별검찰부로 송치할 때 이들에 대한 「의견서」를 첨부하게 되어 있었으며, 「의견서」는 특별검찰부가 기소하는 단계에서 기소 여부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일제시기 경력을 살펴보면, 독립운동을 전개한 위원은 김상덕·김명동·김준연·오기열·이종순·김경배 등 모두 6명이었다. 이들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에 관공리나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었다. 김상돈은 약 10년 동안 정회町會 총대總代로서 활동했으며, 박우경은 군농회와 축산조합의 간부를 지낸 경력이 있었다. 김준연은 일제 말기에 대화숙大和塾에 가입해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서 세 사람의 경력이 반민법에 규정된 친일파 범주에 해당되는지의 여부를 별개라 하더라도 일반인과는 달리 높은 도덕성과 엄격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함을 고려할 때 일정한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일제강점기 경력은 조사위원으로서의 자격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었다면,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은 반민특위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조사위원들의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은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김명동은 조사위원 가운데 친일파 처벌에 가장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건의한 의원 중에 한 명이었으며, 정부 내 친일파를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친일파의 범주뿐 아니라 처벌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조규갑과 김경배도 반민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적극 찬성한 인물이었다.

반민법의 제정과 친일파 처벌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반민특위 조사위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조사위원도 적지 않았다. 김준연은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미군정기 동안에 한국민주당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친일파 처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반민법이 시행될 경우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적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적용 범위를 대폭 완화하고 처벌도 관대히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김상돈도 논란이 많았던 ‘가감례 조항’을 적극 찬성하는 등 반민법의 완화를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註19)

반민특위가 조사할 친일파의 선정과 체포 여부를 조사위원의 만장일치제로 결정한 방식을 고려할 때 조사위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친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인 인물이 조사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어려움을 겪고, 나아가 친일파 처벌의 험난함을 예고

하는 서막이었다.

한편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구성이 마무리되자, 반민특위의 실무를 담당할 중앙사무국이 조직되었다. 중앙사무국의 구성원은 조사위원과 국회의원, 그리고 각도 조사부장 등의 추천을 통해 임명되었다. 중앙사무국은 친일파를 분야별로 조사하기 위해 정치 분야의 반민족행위 조사를 담당하는 제1조사부와 산업·경제 분야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는 제2조사부, 그리고 일반 사회 분야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는 제3조사부로 조직되었으며, 각 조사부에는 부장을 포함한 5명의 조사관과 서기가 배치되었다. 註20)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의 구성원은 활동하는 동안에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으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된 채 운영되었다. 조사관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인물이 많았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했던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조사관으로서 부적격한 인물도 일부 기용되었다. 註21)

반민특위는 조사위원과 조사관, 특별검찰부의 특별검찰관 등의 신변을 보호하고 친일파의 체포를 담당하기 위해 특경대를 두었다. 특경대원의 대다수는 미군정기에 광복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인물이었으며, 일부는 현직 경찰로 구성되었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은 1948년 12월에 조사관과 서기의 구성이 대부분 완료되었으며, 1949년 1월 5일 취임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편 반민특위는 9개의 도 조사부를 설치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과 중앙사무국의 인력으로는 광범위한 지역의 친일파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각도 조사부의 책임자는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추천하여 국회에서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

의 단독 추천보다는 해당 도 출신 의원과 협의하여 선정되었다. 책임자로 추천된 인물 가운데 독립운동 경력이 불투명하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지 않아 지역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인물도 있어 1949년 2월에야 인준이 마무리되었다.

각도 조사부의 책임자는 경기 이기용李起龍, 충남 윤세중尹世重, 충북 경혜춘慶惠春, 경북 정운일鄭雲馹, 경남 강홍렬姜弘烈, 전북 손주탁孫周卓, 전남 최종섭崔鍾涉, 강원 김우종金宇鍾, 황해·제주 송창섭宋昌燮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손주탁을 제외한 8명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각도 조사부에도 조사관과 서기가 배치되었으며, 특경대도 설치되었다. 각도 조사부의 조사관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도 있었지만, 국내와 만주지역의 친일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일제 관리를 지낸 인물도 일부 있었다. 註22) 이들의 친일행위가 경미했다고 하더라도 친일파 처벌을 목적으로 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는 부적당했으며, 반민법에 규정된 조사관 자격 요건에도 어긋났다. 이는 반민특위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2. 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의 조직

특별검찰부과 특별재판부는 친일파를 기소하고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특별재판관은 1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회와 일반 사회 그리고 법조계에서 각 5명씩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특별검찰관은 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에는 국회·일반 사회·법조계에서 각 3명씩 선출하되, 각 분야에서 2배수로 추천된 인물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여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특별검찰관은 국회의원 5명, 법조계 2명, 일반사회분야 2명으로 변경되었다.

반민특위가 국회의원에게 할당된 특별검찰관의 후보로 추천한 의원은 곽상훈郭尙勳·김병회金秉會·김웅진金雄鎭·서용길徐容吉·김인식 등 10명이었다. 선출은 다득표 순으로 결정되어, 곽상훈·김웅진·노일환·서성달·서용길 5명이 특별검찰관으로 선출되었다. 특별검찰관장으로는 현직 검찰총장이었던 권승렬權承烈이 선출되었으며, 검찰차장으로는 국회의원 중에서 최다 득표를 했던 노일환으로 결정되었다.

특별검찰관으로 일반 사회 분야와 법조계에서 추천된 후보는 강명규姜明圭·김의한金毅漢·심상준沈相駿·유도우柳道祐·이의식李義植·이종성李宗聖 등이었다. 의원들의 투표에서 다득표 순으로 이의식·이종성·심상준이 특별검찰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종성은 1949년 1월에 사퇴하여 신현상申鉉商이 특별검찰관으로 선출되었다. 註23) 1949년 6월 이후에는 권승렬·김웅진·노일환·서용길이 사퇴하여 김익진金翼鎭·정광호鄭光好·홍익표洪翼杓·조병한趙炳漢이 특별검찰관으로 활동했다.

특별검찰관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경력을 볼 때 특별검찰관으로서 자격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없었으며, 대체로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거나 엄중한 처벌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친일파 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거나 특별검찰부의 설치를 반대하고, 처벌의 완화를 주장하여 특별검찰관으로서 부적당한 인물도 일부 있었다. 註24)

한편 반민특위가 국회의원에게 할당된 특별재판관의 후보로 배수 추천한 의원은 홍순옥洪淳玉·서우석徐禹錫·최국현崔國鉉·서순영徐淳永·오택관吳澤寬·김장렬金長烈 등 10명이였다. 특별재판관은 특별검찰관 선출 방식과 마찬가지로 다득표 순으로 선출되어, 서순영·오택관·최국현·김장렬·홍순옥 5명이 선출되었다.

일반 사회 인사 중에서는 신현기申鉉琦·이춘호李春昊·김호정金鎬禎·정홍거鄭弘巨·고평高平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법조계 인물은 노진설盧鎭卨·김용무金用茂·김찬영金瓚泳·이종면李鍾冕·최영환崔永煥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특별재판부 부장은 당시 대법원 원장이었던 김병로로 결정하였다. 註25) 각 부의 부장재판관은 국회의원·법조계·일반 사회 인사 중에서 각각 최다 득표를 한 인물이 맡는다는 규정에 따라 서순영·노진설·신현기로 결정되었다. 김용무와 김찬영은 각각 1949년 1월과 2월에 사퇴하여 신태익申泰益과 김병우金秉愚가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고, 5월에는 김장렬과 홍순옥은 박흥식의 보석에 항의하며 사임하여 정준鄭濬과 조옥현趙玉鉉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노진설은 사퇴하고, 최영환은 사망하여 강세형姜世馨·윤원상尹元上이 특별재판관으로 활동했다.

특별재판관의 경력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신간회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병로와 신간회 지방지회에서 활동한 김장렬,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신현기·고평 등이었다. 서순영·노진설·김용무·이종면·최영환·신태익·김병우는 일제가 실시한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이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김찬영은 일제 초기에 판사를 지냈으며, 신태익은 판임관 견습으로 법원에서 활동하다가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특별재판관 가운데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었다. 김찬영은 친일단체인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을 지냈으며, 노진설은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의 본부간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특히 이춘호는 1938년 9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 이후 구락부 회원 전원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최국현은 해방 무렵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의 후생부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註26)

이와 같이 특별재판관 가운데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특별재판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었다. 아울러 친일파 처벌에 소극적이거나 특별재판부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설치를 반대했던 인물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는 요인으로 이어졌다.

[註 16] 처음 보고에서는 제주도의 吳龍國이 반민특위 조사위원 후보로 호선되었으나, 황해도가 누락되고 제주도는 행정구역상의 문제로 황해도와 제주도를 합해 조사위원 1인을 선출하기로 결정되어 김경배가 호선되었다. ☞

[註 17] 김효석은 1949년 1월 3일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曺奎甲이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註 18]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33~34쪽. ☞

[註 19]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53~158쪽. ☞

[註 20]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33~136쪽. ☞

[註 21]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61~166쪽. ☞

[註 22]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68~179쪽. ☞

[註 23] 오익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119쪽. ☞

[註 24]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83~186쪽. ☞

[註 25] 오익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119쪽. ☞

[註 26]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86~193쪽. ☞


4. 반민특위 활동과 방해 책동


1.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의 사무실에서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의 조사관과 서기의 취임식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먼저 취급할 친일파를 선정하기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갔다. 예비 조사는 『조선총독부관보』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각종 직원록, 그리고 신문·출판물 등 일제강점기의 자료와 반민특위의 활동을 앞두고 발간된 『친일파 군상』의 책과 일반인의 투서 등을 기초로 진행되었다.

반민특위는 7천여 명의 친일파의 일람표를 작성하는 한편 조사관을 직접 현지로 파견하여 실제 조사에 착수하는 등 약 1개월 동안의 예비 조사를 진행했다. 이러한 예비 조사를 기초로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취급할 친일파를 결정하고 이들의 체포 준비에 들어갔다. 註27)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친일파의 체포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의 거물들에게 처벌할 계획이라는 처벌 방침을 밝혔다.

반민특위는 먼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의 거두 가운데 도피를 시도하는 자들의 체포에 주력했다. 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시기를 전후하여 친일 행적이 있는 자들이 이미 해외로 도피했거나 도피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진학문秦學文은 정부 수립 직전에 일본으로 도피했으며, 중추원 참의와 경방단 단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로 지목받던 조병상曺秉相도 일본으로 도피하기 위해 일본여행권을 외무부에 신청한 상황이었다.

또한 교육계의 차사백車士伯·황신덕黃信德·배상명裵祥明·이숙종李淑鍾 등은 정부 수립 후 교육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출국한 상황이었다. 김활란金活蘭도 1948년 9월에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출국했다. 이에 대해 소장파 의원 이문원李文源이 국회에서 친일파를 특사로 기용하고 출국한 사실을 비난하자, 의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이 무렵 반민특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친일파들은 이미 행적을 감추거나 외국과의 무역을 구실로 외무부에 여행증을 청구하는 등 해외로 도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반민특위는 외무부에 국외여행증 발행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관계 당국에 이들의 밀항을 철저히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註28)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에 미국으로 도피를 꾀하고 있던 박흥식朴興植을 가장 먼저 체포했다. 박흥식은 반민법이 공포된 후 사돈 관계에 있던 장직상張稷相과 함께 김연수金秊洙를 방문하여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외무부 장관 장택상의 도움으로 기한이 만료된 여행증을 갱신하여 미국으로 도피를 꾀했다.

반민특위는 이어 적극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던 이종형李鍾滎을 체포했다. 이종형은 해방 직후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파 처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반민법이 공포된 후에는 이른 바 ‘반공구국총궐기대회’를 열어 반민법을 제정한 국회의원을 ‘김일성의 주구’로 비난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에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친일파 처리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어 반민특위는 일본으로 도피를 꾀하고 있던 방의석方義錫·김태석金泰錫·조병상을 잇달아 체포하였다.

반민특위는 1월말부터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거물급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먼저 대구에서 제국의회 의원을 지낸 박중양朴重陽을 체포했으며, 경북 문경에서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고원훈高元勳은 도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 부산에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우영金雨英을 체포한데 이어 일제강점기에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고등계 형사 하판락河判洛·노기주璣柱를 체포했다. 註29) 공주와 대전에서는 이 지역 출신인 김명동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지휘하에 김갑순金甲淳·임창수林昌洙를 체포하였다.

한편 도 책임자의 인선 문제로 구성이 늦어졌던 반민특위 각도 조사부는 2월 초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조직의 구성을 마무리 지은 경남도 조사부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다른 도 조사부는 대부분 3월부터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註30) 이로써 자수하는 친일파가 속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체포와 함께 국회의원과 정부 관리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고등관 3등급 이상을 재직하고, 훈勳 5등 이상을 받은 친일파, 즉 반민법 제5조에 해당하는 자를 처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무엇보다 정부가 수립된 후 일제 관리가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파가 기용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반민법이 제정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함께 친일파가 정부 관리로 있는 한 반민특위의 활동도 어려울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반민법을 제정할 당시부터 친일행위가 있는 국회의원도 처리하라는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반민족행위처벌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기사


반민특위는 반민법 제5조에 해당되는 국회의원과 정부 관리들을 처리해줄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국회와 정부에 발송했다. 아울러 친일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요청에 대해 반민법 5조에 해당하는 의원이 없다고 반민특위에 보고했다. 하지만 친일파 처리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국회 부의장 김약수金若水는 국회 스스로의 숙청에 의존하지 말고 반민특위가 조사하여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도 반민특위의 요청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애초에 정부는 각 부처와 각도에 해당자의 조사를 지시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심지어 대표적인 친일경찰로 손꼽이고 있던 노덕술盧德述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석방 이유에 대해 노덕술이 경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자이자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서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의 석방을 거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를 의법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註31)

이승만 대통령은 나아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했다. 아울러 반민특위의 활동이 치안에 방해된다면 결코 포용할 수 없다며 정부 관리의 처리하라는 반민특위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반민특위는 정부가 친일 관리 처리 요구를 거부하자, 정부 관리의 체포에 나섰다. 반민특위는 상공부 광무국장인 김용근金龍根을 체포한 데 이어, 김제경찰서장 이성엽李成燁과 전북경찰국 수사과장 호경원扈京源을 체포했으며, 경북경찰국 수사과장 이대우李大雨도 체포했다. 이후에도 현직 관리의 체포는 계속되었지만 행정 관리의 체포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경찰에 집중되었다.

반민특위는 군대 내부에 있던 친일파의 체포에 나섰다. 반민법의 공포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강점기 군인과 경찰이었던 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군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경찰부 보안과장을 지낸 전봉덕田鳳德은 반민법이 공포된 직후 군에 입대하여 헌병부사령관으로 있었다. 더욱이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체포에 나서자 군에 입대하는 친일파가 속출했으며, 특히 현직 경찰이 입대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군에 입대한 일제강점기의 경찰이나 군인은 기술자이기 때문에 반민법 제5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았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에 경찰이나 군인으로 동포를 탄압했던 자는 경찰이나 국군에 있다고 하더라도 반민법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군 내부의 친일파 조사에 착수했다. 반민특위는 국방부에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군은 이들의 친일행위를 증명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고 군에 필요한 인재라는 이유로 소환을 거부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채병덕蔡秉德 육군 총참모장을 방문하여 소환 거부를 항의하고, 재차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국방부는 끝내 거부했다. 註32) 심지어 반민특위는 국방부의 요청으로 체포했던 자들도 석방했다.

반민특위는 특경대까지 갖춘 조직이었지만, 정부의 협조 없이는 관리나 군인·경찰을 체포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군 내부의 친일파의 체포는 고사하고 조사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반민법 제5조는 정부의 비협조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한 현직 관리, 군인·경찰 가운데 일부 하위직 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일반인들은 군인·경찰을 포함한 현직 관리는 체포하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만 체포한다는 활동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으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註33)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현직 군인이나 경찰의 체포뿐 아니라 일반인을 체포하는 숫자도 날이 갈수록 저조했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친일파를 체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만 4개월 동안 취급한 친일파는 80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친일파가 석방되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거물급 친일파들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것에 일반인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반민특위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으며, ‘잠자는 반민특위’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부진한 데는 정부의 비협조뿐만 아니라 반민특위 내부의 원인도 작용했다. 먼저 활동에 필요한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를 체포하고 조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각도 조사부가 중앙사무국으로 압송한 친일파는 바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지 않고, 다시 중앙사무국이 조사를 담당해야 했다. 즉 각도 조사부가 1차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한 자들을 다시 조사한 후 의견서를 첨부하여 특별검찰부로 송치해야 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 사이의 불협화음과 조사관의 문제도 반민특위 활동이 부진한 원인이 되었다. 김준연은 불협화음을 조장한 대표적인 조사위원이었다. 그는 해방 후부터 줄곧 친일파의 처벌에 반대했으며, 반민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법의 약화를 주장했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된 후에도 조사위원으로서의 활동보다는 반민특위의 내부 분열을 조장했다. 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반민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을 신문에 게재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혼란을 초래했다. 그의 주장은 반민법의 개정이었지만 사실상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친일파를 처벌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김준연은 반민특위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준호玄俊鎬의 체포를 결정하자 그에게 미리 알려주어 자수토록 했다. 또한 노덕술을 은닉한 자에게도 체포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 도피토록 하는 등 조사위원으로서가 아니라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김준연은 이후에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표되기 전에 이 사건을 암시하는 내용과 이 사건으로 구속된 소장파 의원의 석방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정부를 부정하는 김일성의 추종자라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여 의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註34) 이외에도 그는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친일파의 반민특위 사무실 앞 시위사건, 김구의 암살 사건에도 깊숙이 개입하였다.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이 체포된 친일파를 독단적으로 석방하는 일도 일어났다. 김경배 조사위원은 체포된 상공부 광무국장 김용근을 다른 조사위원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석방했다. 이종순 조사위원도 같은 강원도 출신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장준영張俊英을 강원도 조사부가 체포했지만, 직권으로 영장을 취소하고 석방하기도 했다. 이에 반발하여 강원도 조사부 조사관이 이종순을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하려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註35)

또한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조사관 양회영梁會英은 특경대 대원과 공모하여 전라남도 조사부가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한 친일파 이문환李文煥의 조사 서류를 없애고 대신 자신이 허위로 작성한 조사 서류를 제출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이 일로 일부 반민특위 조사관이 해임되고 새로운 조사관이 선임되기도 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이처럼 일부 반민특위 조사위원과 조사관이 친일파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나 이들에게 매수되어 친일파를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반민특위 내부의 문제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에게도 영향을 미쳐 세 기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註36)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9년 5월에 경찰은 소장파 의원의 활동을 주도하고 있던 이문원과 최태규崔泰奎, 그리고 이구수李龜洙를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현역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부결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친일 세력은 석방요구 결의안 제출을 빌미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친일파가 주도하고 있던 국민계몽회國民啓蒙會는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국회의원을 빨갱이로 몰아 부치고 국회를 비난하는 시위를 연일 벌였다. 아울러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는 반민특위 내부에 있는 공산분자의 숙청을 요구하며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국민계몽회의 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이상히 여겨 조사한 결과 경찰이 개입한 증거를 입수했다. 반민특위는 군중 동원을 지원하고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을 체포했다. 이들의 구속과 반민특위가 경찰을 가장 많이 체포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소속의 경찰은 정부가 경찰의 신변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총사직을 결의했다. 이들은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정부와 반민특위를 압박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경찰의 거듭된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註37)

결국 내무부 차관 장경근張璟根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민특위 관계자를 체포하고 서류를 탈취했다. 같은날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도 경찰이 습격하여 조사관의 무기를 압수하고 조사부 사무실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도 철수시켰다. 이후 충남과 충북도 경찰국을 비롯한 각도 경찰국도 특경대 대원과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철수시켰다.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사건 다음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과 조사위원 오기열·조규갑·김경배·이종순 등이 경찰의 처사에 항의하며 잇따라 사표를 제출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아울러 특경대 대원이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특경대의 기능도 마비되어 반민특위 중앙의 친일파 체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6월 하순에 특별검찰부 차장 노일환을 포함한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되어 반민특위의 활동은 더욱 약화되었다.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민특위는 친일파 거두를 제외한 당연범은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각도 조사부의 구속영장 청구를 보류하면서까지 체포를 늦추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6월말에 당연범의 명부 작성을 마무리 짓고, 이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친일파의 처벌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와 잇따른 친일파의 방해 책동, 그리고 반민특위 활동에 실망한 일반인의 관심이 멀어지는 등 친일파 처벌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급격히 약화되는 상황에서 소환에 응하는 친일파는 거의 없었다. 註38)

명맥만 유지하던 반민특위는 반민법이 개정되어 정리 국면으로 들어갔다. 7월 1일에 특별검찰관 곽상훈을 포함한 의원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말까지로 단축하는 내용의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국회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영향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을 견제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이던 윤치영尹致暎이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급격하게 친정부 자세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민법 개정안은 의원들의 압도적

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다음날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날까지 50여 일밖에 없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사퇴했다.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전원 사퇴함에 따라 국회는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새로 선출했다. 이전의 조사위원 가운데 경남 조규갑, 경기 조중현, 강원 이종순, 황해·제주 김경배가 다시 선출되었으며, 서울 이인李仁, 충남 유진홍兪鎭洪, 충북 송필만宋必滿, 경북 조헌영趙憲泳, 전남 조국현曺國鉉, 전북 진직현晋直鉉이 조사위원으로 새로 선출되었다. 위원장에는 이인, 부위원장에는 송필만이 선출되었다. 註39)

반민특위 지도부인 위원장 이인과 부위원장 송필만은 그동안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인은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송필만은 반민특위가 구성될 때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추천되었지만, 친일파의 범주와 처벌 수위를 관대히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유일하게 부결된 인물이었다.

반민특위 위원장 이인은 반민특위 활동에 대해 일반인의 인식과는 달리 그 동안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거의 처단하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공소시효가 단축되어 친일파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국내외 정세가 긴박하여 남북한에 균형적 운영을 못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혀 적극적인 반민특위 활동에는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입장은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 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키는 조치로 나타났다.

7월 하순 반민특위는 전체 회의를 열어 그동안 미루어졌던 반민법 제4조 1·2항에 해당하는 당연범을 취급하기로 결의했다. 만약 이들이 호출에 불응하거나 주소가 불명인 자들은 도피자로 규정하여 공소시효의 중단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영장을 발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정부 관리 가운데 반민법에 해당하는 자는 해당 부·처장에게 통고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하는 결정을 내렸다. 반민특위의 방침은 지금까지 체포된 친일파의 조사와 친일파의 자수를 유도하는 방향에 중점을 둔 것으로, 실제 반민특위 중앙이 반민법이 개정된 후 체포한 친일파는 거의 없었다.

반민특위는 친일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의원의 조사는 반민특위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높이고 친일파 처벌에서 국회의원도 조사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국회의원의 조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보듯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그 동안 자신과 대립해온 국회를 압박하여 약화시키고자 했다.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도 반민법을 이용하여 국회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註40) 이는 조사 대상에서 친일 행적이 뚜렷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웠던 의원이 제외된 데서 잘 알 수 있다.

반민특위는 국회의원의 일제강점기 경력에 대한 예비 조사를 마치고, 친일 혐의가 짙다고 판단한 이종린李鍾麟·이항발李恒發·한암회韓岩回 등의 행적을 조사하였다. 반민특위는 이들의 친일행위는 인정되지만, 악질적인 행위가 없고 죄상도 일반적 수준보다 훨씬 가벼울 뿐 아니라 해당 지역구민의 위신과 의사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소환 요구와 자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미흡하자 한 차례 시한을 연장했으며, 또 다시 기대에 못 미치자 대상자의 명단을 발표하고 자진 출두를 촉구했다. 이인은 이로써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처리할 친일파의 정리는 사실상 완료되었다고 밝혔다. 공소시효 종료를 앞두고 이인은 남한에서 조사하지 못한 친일파는 300여 명에 이르며, 남은 기간 동안에 이들의 조사를 완료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정부 관리 가운데 친일 혐의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 동안 고발도 없었고 조사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 군 내부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반민특위는 공소시효가 종료된 9월 초에 조사위원, 조사관 간부, 도 조사부 책임자의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 반민특위는 업무를 대폭 줄이지만, 시효중단자인 도피자와 조사 불능 지역에 거주하는 친일파의 조사는 계속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반민특위 위원장 이인은 9월 7일에 반민특위 활동이 종료되었다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나아가 이인의 주도 아래 의원들은 반민특위 조직법 폐지안과 특별재판부 폐지안, 그리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담당했던 업무를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반민법 개정안과 각 조직법 폐지안은 국회에서 가결되어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는 해체되었다.

개정된 반민법에 따라 기소된 친일파에 대한 재판은 대법원으로 이양되었다. 대법원은 이들을 재판할 재판관이 부족하여 임시재판부를 설치했다. 임시재판부 재판관으로는 대법원장 김병로가 추천한 5명이 임명되었다. 이들 가운데 4명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낸 인물이라 특별재판부와 마찬가지로 친일파를 재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친일파의 재판은 1950년 4월 하순부터 재개되었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재판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반민법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에 폐지되었다. 반민법 폐지안이 제출된 이유는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거물급 친일파들의 재판은 일찍 끝나 자유로운 몸이 된 반면에 친일행위가 가벼운 자들은 비록 보석으로 모두 석방되었지만 재판이 종료되지 않아 형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은 대체로 완전했고, 전쟁 속에서 친일파들이 열심히 일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1명의 의원도 반대하지 않은 채 가결되었다. 이로써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법적 근거는 완전히 사라졌다. 註41)


2. 이승만정권과 친일파의 방해 책동

1)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운동

제헌국회에서 의원들이 헌법에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고 논란을 벌일 때만해도 이 문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서 반민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거론되자, 정부와 정치세력의 반응이 나타났다. 1948년 8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처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민주당은 친일파 처벌을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확대하고 과도한 처벌을 하게 되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사실상 친일파 처벌을 반대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도 공산당이 정부 파괴 공작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민법 제정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이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친일파의 처벌은 주권을 공고히 세운 후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은 경찰 쪽에서 시작되었다. 국회에서 반민법 제정이 확실시되자, 8월 24일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金泰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민족정기를 앙양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퇴진을 결의했다. 이들의 결의는 표면적으로는 용퇴였지만, 사실은 반민법 제정에 불만을 품고 이승만정권의 주요한 물리적 기반인 경찰을 동요시켜 반민법 제정을 무산시키려는 위협이었다.

검사들은 친일경찰보다 앞서 퇴진하겠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며, 일부 판사들은 반민법이 공포된 후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다. 반민법 문제로 공무원들이 동요하자,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는 공무원들에게 행동의 자제를 촉구했다. 註42) 이런 움직임의 일부는 반민법 제정의 취지에 따르겠다는 양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친일파의 범주에 자신들이 포함된 데에 대한 불만과 친일파 처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압력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에 지나지 않았다.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는 책동은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국회에서 난동을 부리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국회의원들의 숙소와 서울시 내 각처에 ‘반민족행위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공산당의 주구’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안의 철회를 요구’하는 전단이 뿌려졌다. 또한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인 의원들에게는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우익 계열의 청년들은 의원들이 반민법을 심의하고 있는 회의장에 난입하여 반민법 철회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註43) 이처럼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친일파의 방해 책동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친일파가 주요 당원이던 한국민주당은 국회의원들에게 반민법의 제정을 연기시키거나 완화시키려는 로비를 벌였다. 한국민주당에 매달 자금을 제공하던 친일 자본가는 반민법을 완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키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나아가 친일파들은 친일 자본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아 조직을 결성하고, 반민법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註44)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법이 제정되는 과정부터 공포되고 난 후까지 반민법 제정과 친일파 처벌에 대한 입장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법 제정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민심이 이반되는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은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행정권을 이양 받은 직후에는 정부 각 부처의 간부를 중앙청 광장에 집결시켜 이들을 격려하는 훈시를 하고, 친일파를 처벌할 시기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친일파를 안심시켰다. 註45) 반민법이 공포된 후에는 친일파의 처벌은 정부가 완전히 수립된 후에 해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 무렵 반민법을 반대하는 친일파의 책동은 반민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9월 23일에 열린 ‘국민대회’였다. 이 대회의 정확한 명칭은 ‘반공구국총궐기 정권이양 대축하 국민대회’로 형식상 반공 궐기 대회였으나, 실제로는 반민법을 반대하고 국회를 규탄하는 집회였다. 친일파 이종형李鍾滎이 단장으로 있던 한국반공단韓國反共團이 주최했으며, 내무부 장관 윤치영의 지원 아래 언론 분야의 이종형, 경찰측의 이구범李九範과 노덕술, 재정분야의 백낙승白樂承 등이 주도하였다. 이날 대회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여 축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대독했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직접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이 대회는 열리기 수일 전부터 대대적으로 신문에 보도되고 대회를 알리는 광고가 실렸다. 대회 당일에는 경찰과 동 회장 등이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빨갱이·좌익·공산당이며, 배급통장을 뺏겠다고 위협하면서 대회 참가를 강요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시민을 위해 서울 시내 택시의 대부분이 동원되었다.

대회를 주도한 이종형은 반민법은 동장·반장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망민법網民法이라고 규탄했다. 반민법을 제정한 의원들에 대해서는 공산당의 프락치이자 ‘김일성의 주구’라고 강변했다. 이날 대회장인 서울운동장에는 ‘반민법을 철폐하고 국회를 쳐부수자’라는 전단이 뿌려졌으며, 반민법의 수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회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국회에서는 대회를 두고 격렬한 논란이 되는 동안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해방 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극찬하는 방송을 했다. 註46)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부터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조사만 하고 검거와 재판은 행정부와 사법부로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반민특위의 무력화를 뛰어넘어 반민특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분별한 난동’이라고 규정하고 단호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인 법무부 장관이 노덕술이 체포된 사실을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 의법 처리하며 계속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반대하는 반공국민대회 기사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요구한 반민특위의 건의를 거부하고, 반민법을 일시적으로 정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민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49년 2월 정부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반민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는 대검찰청 산하에 두고 반민특위 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 그리고 특별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독립된 반민특위가 아니라 대통령 산하의 반민특위로 만들어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반민법 개정안은 국회의 강력한 거부로 각하되어 반민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려는 갖은 책동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하자, 반민특위 관계자의 일제강점기의 경력과 개인 비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는 반민특위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어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조사는 친일경찰로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이던 최운하가 주도했

다. 경찰 조사를 바탕으로 친 이승만 계열의 박준朴峻 의원은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일제강점기에 총대總代를 지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김상돈의 경력을 두고 국회의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며, 김상돈이 이 문제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반민특위는 타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상돈의 개인적인 과실 치사 사건을 직접 거론하는 등 반민특위 관계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반민특위를 무력화 시키고자 했다. 註47)


2)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은 친일경찰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여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궁극적으로 친일파 처벌을 무산시키고자 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48년 10월경부터 계획되었으며, 친일경찰인 전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노덕술,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熙, 전 서울 중부경찰서장 박경림朴京林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9월에 열린 반공궐기대회에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대회가 끝난 후 반민법 제정과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국회의원과 청년단체의 간부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친일경찰은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기 위해 먼저 특별검찰관 차장 노일환과 특별재판관 김장렬, 그리고 반민법 제정을 주도했던 김웅진 등 국회의원을 납치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들을 납치하여 북한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강제로 쓰게 한 후, 이 성명서를 대통령·국회와 각 신문사에 보내 발표하고자 했다. 그런 후 38선 부근에서 이들을 암살하여 이들이 월북하는 도중에 애국 청년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고 위장하는 계획이었다.

친일경찰이 이들 외에 암살대상으로 지목한 인물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특별검찰관장 권승렬, 특별검찰관 곽상훈·서용길·서성달,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특별재판관 오택관·최국현·홍순옥 등 반민특위의 핵심적인 관계자였다. 또한 친일파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년단체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유진산柳珍山·이철승李哲承·김두한金斗漢도 암살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註48)

이 사건을 주도한 노덕술은 1948년 10월 중순경에 미군정기부터 자신과 접촉하고 있던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를 이 사건에 적합한 인물로 보고 홍택희에게 추천했다. 홍택희는 다시 백민태를 최난수에게 추천했으며, 11월 중순경에 최난수는 백민태에게 암살 계획을 설명하고 거액의 활동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최난수는 홍택희·백민태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백민태에게 국회의원 노일환·김웅진·김장렬 3명을 납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최난수는 친일 자본가 박흥식에게 받은 수표와 수류탄·권총·탄환 등을 건네주었다. 백민태는 최난수의 지시에 따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덕술에게 전달했다.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민태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백민태는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비롯한 암살 대상이 충격적이라 두려움을 느꼈고, 무엇보다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백민태는 조헌영·김준연 등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1948년 12월 중순에 김준연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다. 註49) 김준연의 폭로는 의원들 사이에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 졌으나, 폭로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전모는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하자, 백민태는 검찰에 자수하여 계획의 전모를 털어 놓았다. 검찰은 수사 끝에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노덕술·최난수·홍택희·박경림 4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1·2심에서 노덕술과 박경림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1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벌금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이 사건에 관련된 친일경찰이 무죄 선고를 받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은 이유는 재판부가 사실에 입각하기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재판했기 때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친일경찰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만을 받아들이고 불리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의 핵심 인물이던 노덕술은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또한 최난수와 홍택희가 징역형에서 벌금형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은 1심 공판은 반민특위가 활동하는 시기에 있었지만, 2심 공판은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파 처벌문제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시기에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재판부의 재판 결과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재판 과정에서 줄곧 혐의 사실을 부인했던 홍택희가 훗날 검찰의 기소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시인한 데서 알 수 있다. 註50) 재판이 끝난 후 석방된 노덕술은 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헌병대장을 역임하는 등 경찰에서 활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군에서도 정보와 대공對共을 다루는 분야에서 활동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경찰 총경으로 승진하고, 치안국의 정보와 수사 분야에서 활동했다.

친일파와 친일경찰의 사주 하에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또 한 차례 있었다. 1949년 3월에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에서 조사부 책임자 김우종의 호위를 맡고 있던 김영택金榮澤이 김우종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처음에 김영택이 김우종에게 권총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과정에서 김영택의 실수로 발포되어 김우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사관이 총알의 진행 방향과 김영택이 호위를 자청한 사실 등 몇 가지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고, 조사한 끝에 강원도의 거물급 친일파가 경찰과 공모하여 김우종과 특경대 대장 지상호池相豪를 제거하려던 사건임을 밝혀냈다. 註51)

김우종 암살기도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자, 경찰은 김영택이 북조선노동당 당원이었다며 북한의 공작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김영택이 거물급 친일파와 경찰이 김우종을 제거하면 거액의 돈을 받기로 했다는 자백을 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우종 암살기도사건은 경찰이 김우종의 호위 담당으로 내정되어 있던 인물을 대신하여 현직 경찰인 김영택을 강력히 추천한 점을 고려할 때, 친일파와 경찰이 두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강원도 조사부를 조직할 무렵부터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택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지만, 배후 인물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일단락되었다. 오히려 김영택이 특별검참부에 송치되어 조사받을 동안 친일파와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특별검찰관이 조사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할

정도로 친일파와 경찰의 책동은 노골적이었다. 김영택은 재판 과정에서 기소 내용을 전면 부인했으며, 결국 특별재판부의 공소기각으로 석방되었다. 반면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은 이후 김영택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특경대 대장 지상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증인을 고문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뒤 석방되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註52)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은 ‘반공궐기대회’나 ‘국회 프락치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친일파 처벌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요인은 물론 대법원장과 검찰총장까지도 암살을 시도했던 사건은 친일파가 처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고자 했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 사건은 공공의 이익 대신 사익을 채우려 했던 친일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친일파 처벌의 당위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3)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

친일파의 방해 책동과 이승만정권의 비협조 속에서 어렵게 활동하고 있던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두 사건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빌미가 되어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건의 중심에는 소장파 의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개원 직후부터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을 견제하는 사실상 유일한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먼저 소장파 의원들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충돌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헌법안의 심의가 이승만 대통령의 야심에 따라 졸속으로 진행되자, 국가의 장래를 좌우할 헌법이 민의에 따라 제정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주장에 너무 끌려 다닌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李允榮의 인준을 거부했으며, 반민법 제정과 정부 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여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충돌했다. 친일파 처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반민특위 조사위원,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되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여러 가지 개혁법의 제정에도 앞장서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인권을 침해하는 법과 제도를 비판했다. 1948년 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자, 이 법을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마련된 치안유지법이나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가 유태인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법과 같다고 비판하고 폐기를 주장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두 차례나 걸쳐 평화통일을 위해 외국군의 즉시 철퇴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지역민이 자치단체장을 직접 선출하는 지방자치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또한 농민의 권익을 담고 있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는 데도 앞장섰다. 註53) 이처럼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소장파의 전성시대’라고 불릴 만큼 독재 체제를 강화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 맞서 활동했다. 註54)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의 발단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5월 18일 최운하가 지휘하는 경찰이 이문원과 최태규를 체포한데 이어 이구수를 체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권승렬 검찰총장은 국회 보고에서 검찰과 경찰이 3월 중순부터 세 의원의 활동을 이상히 여겨 수사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이 좌익계열의 인물과 접촉하는 사실을 탐지했다고 밝혔다. 4월 초순부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세 의원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검찰총장은 세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물적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외국군의 완전 철수, 정치범 석방, 친일파 처벌, 남북정치회의 구성 등 남조선노동당의 남북평화통일의 7원칙에 따라 활동했기 때문에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 프락치 사건은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국회폐회 기간 중에 3명의 의원이 구속되자, 의원들은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과 구속 사유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석방요구 결의안은 재석 의원 184명 가운데 찬성 88명, 반대 94명, 기권 1명으로 부결되었다. 註55)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친일파들은 석방요구 결의안의 제출을 빌미삼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친일파들은 국민계몽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계몽회의 간부들은 5월 하순에 모임을 가지고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을 공산분자라고 규정짓고 이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국민계몽회의 주요 간부는 친일파인 손홍원孫弘遠과 김정한金正翰이었다. 손홍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국민훈련후원회 회장을 지낸 인물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부터 포상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김정한은 녹기연맹綠旗聯盟의 간부와 일제 문부성文部省 촉탁으로 활동한 친일파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 단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친일파 처리를 반대했던 국회의원 김준연과 이강우李康雨가 지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註56)

5월 31일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석방요구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국회를 성토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국회 내 적색분자를 숙청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와 반민특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에는 손홍원과 김정한의 주도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반민특위 내의 공산분자를 숙청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민특위를 성토했으며, 반민특위 사무실 진입을 시도했다.

6월 4일 반민특위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국민계몽회 회장 김정한 등을 국민계몽회가 주도하는 시위에 군중을 동원하고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했다. 반민특위는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처한 점과 시위 현장에서 국회의원을 폭행하고 시위를 주동한 자를 체포했으나 바로 석방한 점 등을 이상히 여기고 조사에 착수했다. 註57) 반민특위는 시위에 참여했던 자를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연이은 시위에 경찰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최운하와 조응선은 김정한을 숨겨주고 이들과 활동 계획을 협의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던 김정한이 모 장관을 찾아가 신변 보호를 요청하자, 장관은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金泰善에게, 김태선은 다시 최운하에게 이임하여 그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친일경찰의 구심점이던 최운하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경찰과 검찰의 간부진이 총동원되었다. 친일경찰 출신이던 마포경찰서장은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을 만나 석방을 요청했으며, 권승렬 검찰총장은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일일이 방문하여 최운하의 석방을 요청했다.


반민특위 특경대원을 구인하여 활동을 방해하는 기사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가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자 정부 고위 관리들이 나서 반민특위 지도부를 위협했다. 장경근張璟根 내무부 차관과 이호李澔 치안국장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방문하여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을 경우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치안국 고위 간부도 김상덕·김상돈·서성달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소속 경찰 400여 명은 정부가 경찰의 신변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며 총사직을 결의하고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반민특위가 최운하와 조응선의 석방을 거부하자, 장경근 내무부 차관과 이호·김태선 등 경찰 수뇌부는 회의를 가지고 검찰·경찰·헌병 세 기관이 함께 최운하가 수감되어 있는 마포형무소를 습격하여 최운하를 빼내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검찰과 헌병 측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6일 아침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尹箕炳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사무실을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특경대 대원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후 체포했으며, 반민특위의 활동과 관련된 서류와 집기도 탈취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중앙뿐만 아니라 각도 조사부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하는 날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 사무실에도 경찰이 난입하여 반민특위 조사관의 무기를 압수하고 사무실의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후 충남과 충북도 조사부의 특경대 대원과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경찰을 철수시켰으며, 경기도 조사부의 사무실을 봉쇄했다. 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보고와 외신 기자와 가진 회견에서 자신의 명령으로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고 밝혔다. 註58)

습격사건 다음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조사위원들은 정부와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도 사건을 보고받고 국회 차원의 대책을 논의했다. 국회는 내각 총사퇴 건의의 조속한 실행, 반민특위의 원상회복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만약 정부가 국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부가 제출한 각종 법안과 예산안의 심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국회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휴회에 들어갔다. 국회 의장단은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국회의 결의를 전달했으며, 국회의원 각 계파의 대표들은 내각의 일부 퇴진, 반민특위 간부의 일부 변동 등을 타협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특경대 해체는 불가피한 조치였고, 내각 사퇴의 주장도 위헌이라며 타협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와 정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의원들은 이러한 사태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6월 하순부터 노일환·박윤원朴允源·강욱중姜旭中·황윤호黃潤鎬 등 소장파 의원들의 핵심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됨으로써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과 개헌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의원들이 체포될 때부터 사실 여부에 대한 많은 의혹이 있었다. 수사 당국이 의원들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제출한 문서의 신빙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하는 등 많은 점에서 의혹이 있었다. 註59) 특히 이러한 논란은 이 사건을 담당한 특별수사본부의 주요 인물들이 친일경찰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수사는 군·경찰·검찰의 합동으로 설치된 특별수사본부가 담당했다. 특별수사본부는 반민특위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친일경찰 출신으로 당시 헌병부사령관이던 전봉덕이 주도했다. 또한 헌병대에서는 전봉덕과 마찬가지로 반민특위의 체포를 피해 입대한 친일경찰 출신 김정채金貞彩·윤우경尹宇景 등이 참여했으며, 경찰에서도 친일경찰 출신 최운하·김호익金昊翊 등이 참여하여 수사를 담당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재판은 검찰과 재판부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노일환은 남로당의 가입 사실과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활동했다는 자신의 자백이 헌병대의 고문에 못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의원들은 자신들의 혐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 변호인은 의원들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 암호 문서를 소지했던 정재한과 소장파 의원들을 조종했다는 남로당원을 재판정에 출정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검찰은 이를 무시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과 기타 여러 요청을 기각한 반면에 검찰 측 증인 신청은 모두 인정하고 직권으로 검찰에 유리한 자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일방적인 재판 속에 의원들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註60)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데 그친 것은 아니었다. 두 사건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정권이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49년 5월부터 남한에서는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거론되던 미군 철수 문제가 1949년 5월에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어, 6월에 미군을 완전 철수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불안하던 이승만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이승만정권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국 두 사건은 이승만정권이 기반을 공고히 다지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장악했으며,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으로 친일파 처벌을 무산시켰다. 이로써 이승만정권은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독재체제를 공고히 해 나갈 수 있었다.

[註 27]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77쪽. ☞

[註 28]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98~199쪽. ☞

[註 29] 허종, 「반민특위 경상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대구사학』 69, 2002, 10쪽 ; 허종, 「반민특위 경상남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2003, 573쪽. ☞

[註 30]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252~288쪽. ☞

[註 31]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00~201쪽 ;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221~223쪽. ☞

[註 32]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166쪽. ☞

[註 33]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03~205쪽. ☞

[註 34]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996, 205~206쪽. ☞

[註 35] 허종,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역사학보』 190, 2006, 107~109쪽. ☞

[註 36]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06~208쪽. ☞

[註 37]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174~178쪽. ☞

[註 38]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09~210쪽. ☞

[註 39] 오익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147~148쪽. ☞

[註 40]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203쪽. ☞

[註 41]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11~215·232~234쪽. ☞

[註 42]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30~332쪽. ☞

[註 43]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44쪽. 전단의 내용은 ‘행동위원 일동’의 명의로 -.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을 철회하라, -. 반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의원을 타도하라, -.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뭉쳐야한다는 것이었다. ☞

[註 44]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33쪽. ☞

[註 45]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48~49쪽. ☞

[註 46]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57~159쪽. ☞

[註 47]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36~337쪽. ☞

[註 4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130~131쪽 ;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167~168쪽. ☞

[註 49]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70~71쪽. ☞

[註 50] 조갑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한길사, 1987, 56쪽 ;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42~343쪽. ☞

[註 51] 김길인 조사관이 찾아낸 암살 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冠省, 전일에 惠書 又 서약서를 배견하니 當會의 의기는 실로 衝天之勢올시다. 금반의 成行으로 김 동지의 일생은 좌우됩니다. 우선 不備禮一金을 송부하오니 笑納하소서. 목표인물 조사부장, 특경대장. 讀認後 소각하시오. 4282년 3월 5일 本會 제3호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67~68쪽). ☞

[註 52] 허종,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역사학보』 190, 109~112쪽. ☞

[註 5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82~104쪽. ☞

[註 54] 백운선, 「제헌국회 내 ‘소장파’에 관한 연구」. ☞

[註 5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204~208쪽. ☞

[註 56]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48쪽. ☞

[註 57]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208~209쪽. ☞

[註 58]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49~351쪽. ☞

[註 5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217~229쪽. ☞

[註 60]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170~171쪽 ;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53~356쪽. ☞


5. 반민특위의 역사적 성격


1. 반민특위의 활동 성과

반민특위는 조사위원의 선출부터 시작해 공소 시효가 만료되는 1949년 8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12월에 조사관이 선임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활동은 약 8개월여에 불과했다. 반민특위가 이 기간 동안에 취급한 친일파는 여성을 포함하여 모두 688명이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31일에 그동안의 활동 내용을 밝히면서 682명을 취급했다고 발표했다. 반민특위는 공소 시효가 만료된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으며, 이때 기소 중지된 친일파를 일부 더 취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하여 국회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에서 688명이라고 밝혔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688명 가운데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이 직접 취급한 친일파는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326명이었으며, 9개 도 조사부는 362명을 취급했다. 9개 도 조사부 중에서 경상남도 조사부가 67명으로 가장 많이 취급했다. 그 다음으로 전북 54명, 전남 45명, 충북 40명, 경북 39명, 경기와 충남 각각 37명, 강원 27명, 황해·제주 15명 순이었다. 취급 주체가 불분명한 친일파는 1명이었다. 註61)

반민특위가 취급한 친일파는 688명이었지만, 실제로 취급한 친일파는 훨씬 많았다. 실례로 반민특위의 발표에 따르면 경상북도 조사부가 39명의 친일파를 취급했다고 밝혔지만, 경상북도 조사부가 8월 24일까지 취급한 친일파는 102명이었다. 또한 강원도 조사부는 발표 내용보다 7명이 많은 34명, 충청남도 조사부는 2배가 많은 74명이었다. 다른 도 조사부의 상황도 이와 유사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경상북도 조사부의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경상북도 조사부는 공소 시효의 종료를 앞두고 조사가 진행 중이거나 소환에 불응한 친일파 가운데 일부는 자체적으로 무혐의 처리했다. 아울러 나머지는 조사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조사를 중단하고 조사가 완료된 친일파만을 반민특위 중앙에 보고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했다. 註62) 다른 도 조사부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렇게 볼 때 반민특위는 약 1천여 명의 친일파를 취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민법 규정을 적용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는 반민법 제2조와 제4조 1·2·3항에 ‘당연범’으로 규정된 수작자·습작자, 중추원 고문·부의장·참의, 칙임관 이상의 관리 가운데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사망했거나 북한에 있던 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취급했다고 볼 수 있다. 반민특위는 이들을 직접 체포하거나 소환하여 조사했으며, 도피한 자는 시효를 중단했다. 반민특위가 당연범의 대다수를 취급했다고 해서 이를 반민특위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반민특위가 직접 체포한 친일파는 많지 않은 반면, 소환되거나 자수한 친일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의 업적을 정리한 기사


반민특위는 활동 초기에 당연범 중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를 체포했으나 3월 이후에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반민특위의 활동 계획 때문이었다. 반민특위는 활동 초기에 도피를 시도하거나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 친일파, 그리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거물급 친일파를 먼저 처리한 후 6월말부터 일괄적으로 당연범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활동 계획은 이승만정권과 친일파의 방해 책동으로 큰 타격을 받아 제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이후 반민법이 개정되고 반민특위 조사위원이 대폭 교체되어 친일파 처벌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약화된 7월 중순 이후, 특히 8월 이후부터 소환장이 발부된 친일파가 출두하거나 자수한 친일파가 많았다. 註63)

반민특위는 반민법 제4조 4항 이하에 규정된 선택범 가운데 친일경찰은 많이 취급했지만, 10항에 규정된 친일단체에 활동했던 친일파, 그리고 11항에 규정된 종교·사회·문화·경제계에 있으면서 언론 등에 일제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글을 게재한 친일파의 취급은 미흡했다. 특히 반민법 제4조 6항에 규정된 군인에 대한 취급은 더욱 미흡했다.

친일경찰이 가장 많이 취급되었던 이유는 이들이 일반인의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러 친일행위를 체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고 체포된 사람을 고문하여 숨지게 하거나 그 후유증으로 사망 혹은 불구가 되는 사람이 많아 일반인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부 수립 후에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친일파와는 달리 이들은 그러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상황도 작용했다.

경찰과는 달리 군인의 취급이 미흡했던 이유는 반민특위가 이들의 친일 행적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정부 수립 후에 이미 국군의 요직에 기용되어 있었고, 더구나 남북한이 대치하고 좌익 무장게릴라가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군인을 조사하기에는 많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찰로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입대한 친일파의 체포가 군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고, 반민특위 간부와 국무위원이 참석한 합동좌담회에서 군 내부 친일파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기로 합의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註64)

친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거나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과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글을 신문이나 잡지 등에 게재했던 친일파의 체포도 미진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광수·최남선 등 일부의 친일파는 체포되거나 소환되었지만, 당시 정치·사회·문화·종교·교육계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친일파는 취급하지 못했다. 이처럼 선택범의 처리가 저조했던 것은 이들의 친일 행적이 가벼웠기보다는 이미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들에 대한 반민법의 조항이 추상적으로 규정되어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친일파 688명 중에서 599명이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으며, 절반도 되지 않는 293명이 기소되었다. 현재까지 기소 현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전체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다만 당시 신문 보도와 재판 기록을 통해 180여 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친일경찰이 90여 명으로 가장 많이 기소되었으며, 다음으로 중추원 참의, 밀정, 칙임관 이상 관리 순이었다.

특별검찰부의 기소 현황의 특징은 당연범의 기소율은 낮고 선택범의 기소율은 높았다는 점이다. 특별검찰부는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당연범의 불기소 이유에 대해 이들이 일제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임명되고 악질적인 반민족행위가 없었다는 점, 교육이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점 등을 들었다. 하지만 특별검찰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친일파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친일파는 그렇지 않았다. 특별검찰부의 결정은 정치적 판단이었다. 즉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당연범은 정부수립 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거나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기소 여부가 친일파 처벌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약화된 시기, 특히 집중적으로 반민특위 활동의 종료를 앞둔 시기에 결정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에 친일경찰을 비롯한 선택범은 당시 사회적 지위가 낮아 친일행위 이외에 다른 점을 고려할 요소가 없었고, 반민특위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시기에 기소 여부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기소율은 높았다. 註65)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293명의 친일파 가운데 78명이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에 재판이 종결되었고, 215명이 미결이었다. 1950년 4월부터 미결인 친일파의 재판이 재개되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재판이 중단될 때까지 재판이 종결된 친일파는 1명에 불과했다. 결국 반민법이

적용되어 판결을 받은 친일파는 79명이었다. 재판이 종결된 친일파는 기소와 마찬가지로 친일경찰이 가장 많았으며, 처벌도 가장 무거웠다. 다음으로 중추원 참의,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순이었다.

반민특위는 활동 초기에 친일파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승만정권의 노골적인 방해를 비롯한 각종 외압이 있었지만, 친일파 처벌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된 상황에서 본연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정치적인 압력과 친일파의 방해 책동, 그리고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의 불협화음과 갈등 등으로 활동이 약화되어 갔다. 결국 반민특위의 활동은 극우 반공체제를 구축하려는 이승만정권의 방해와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친일파 처벌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또다시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2. 반민특위 좌절의 영향

반민특위의 활동이 좌절된 후 친일파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친일파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좌절되자, 행정부를 비롯한 권력의 요직을 장악했으며, 경제·사회·문화·교육 모든 분야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친일파는 이승만정권부터 박정희정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관료를 지냈다. 특히 친일파의 규정 여부를 떠나 친일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은 권력의 정점인 내각 수반과 대통령까지 지냈다. 조선총독부 판사를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사법관료들도 박정희정권까지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의 고위직을 장악했다. 특히 친일파는 정계 진출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이승만정권부터 박정희정권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권의 독재 체제강화와 장기 집권에 앞장 서 갖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일제에 협력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자본을 축적했던 자본가들은 또다시 권력과 유착하면서 특혜를 받으며 생명력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부정부패와 추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교육계에서 친일파들은 사학재단의 이사장과 대학총장을 지내는 등 주요 사학재단을 장악했다. 종교계에서도 친일파들이 각 교파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언론계에서도 신문사 사장을 지내는 등 친일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친일경찰도 다시 경찰로 복귀하여 공안과 정보계통에 있으면서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가에게 가했던 고문을 다시 자행하면서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했다.

이처럼 정부수립 후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 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은폐시키고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하며 독재정권의 영속을 추구하는 가운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또한 친일파가 단죄를 받기는커녕 권력의 요직을 장악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서 지도층임을 자처하며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엄청난 의식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상식은 물론 사회 정의가 무너져 가치관을 극도로 혼란에 빠뜨렸고,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등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기본으로 삼게 했다. 현대사에서 일어난 부정부패의 모든 원인이 친일파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주변 인물로 때로는 중심인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군국주의를 교육받은 친일 군인과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했던 친일경찰이 군과 경찰을 장악하여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은 각종 선거에 개입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등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역량을 무시하고 제

기된 민족개량주의가 변형되어 경제발전과정에서 민족문제가 배제된 근대화 지상주의의 경제발전모델을 만들었으며, 군국주의 정신의 발로인 밀어붙이기 식의 형태를 만연하게 했다.

친일파의 처리문제는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여 무너진 민족기강을 바로 세우고 사회정의를 확립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나타난 민족문제·사회문제의 발생 근원에까지 닿아있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친일파는 자연적인 수명이 다해 사라졌지만,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일제잔재의 처리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전히 유의미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기주의와 성장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백신은 될 것이기 때문이다. 註66)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사 정리’ 또는 ‘과거청산’의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입장을 달리하는 논란 속에서도 이 문제의 핵심적 과제가 친일파 처리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친일파 처리는 일제에 협력하고 민족을 고난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규명하여 사회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사회정의의 확립만이 이 과제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일차적 과제를 바탕으로 성찰과 관용을 통해 사회발전을 위한 밑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허 종〉

[註 61]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15~216쪽. ☞

[註 62] 허종, 「반민특위 경상북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대구사학』 69 ; 허종, 「반민특위 경상남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 허종, 「반민특위 전라남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대구사학』 73, 2003 ; 허종, 「반민특위 강원도 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역사학보』 190. ☞

[註 63]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96~297쪽. ☞

[註 64]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201~202쪽. ☞

[註 65]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298~299쪽. ☞

[註 66]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76~377쪽,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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