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1930년대 사상전향정책 / 193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강화

몽유도원 2013. 7. 25. 10:46

제5장 1930년대 사상전향정책 

제1절 전향정책 의 전개와 개념 177 

1. 사상운동 에 대한 탄압 법률 177 

2. 사상전향 의 개념 180 

3. 전향공작의 시행 184 

제2절 사상전향 공작과 전향단체 190 

1. 사상전향 공작 190 

2. 1930년대 전반기 사상전향 단체 194 

3. 중일전쟁 이후의 사상전향 단체 198 

제3절 전향단체의 활동 211 

1. 시중회 211 

2. 대동민우회 214 

3. 녹기연맹 216

4.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217 

5. 대륙경제연구소 221 

제4절 전향논리와 그 특성 223 



1. 전향정책의 전개와 개념

1. 사상운동에 대한 탄압 법률
1930년대 들어 일제는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뽑기 위해 이른바 ‘사상전향’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이른바 ‘사상범’이라고 하여 특별하게 다루고 처벌하였다. ‘사상범’이란 처음 경시청에서 동경지방의 검사국으로 보내오는 사건으로 특별고등경찰과를 경유한 것을 사상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시점은 1925~1926년 경으로 보인다. 그리고 1928년경 일본 사상계 검사들이 사법성에 모여서 ‘사상범’의 종류를 정했는데, 치안유지법위반·황실에 대한 죄·내란에 관한 죄, 소요죄·신문지법위반·출판법위반·폭력행위에 관한 처벌·폭발물취체벌칙 및 기타로서 사상운동에 관련된 범죄라고 하였다. 그후 ‘사상범’이란 범주는 1936년 5월 사상범보호관찰법이 공포되면서 법체계 속에 확립되었다. 註1) 지승준, 「1930년대 일제의 ‘사상범’ 대책과 사회주의자들의 전향논리」, 『중앙사론』 10·11, 중앙사학연구회, 1998, 268쪽. 

일제는 『사상범수사제요思想犯搜査提要』라는 책에서 “사상범죄라는 것은 헌법의 조항에 의해 정해진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상의 기구를 폭력을 사용하여 불법 또는 폭력에 의해 급격 혹은 점차적으로 변혁하여 붕괴시키려고 하는 범죄를 총칭한다. 따라서 이상의 의미의 사상범죄의 범위는 이른바 ‘정치범죄’보다도 넓고 금일까지 일반적으로 정치범죄가 되는 것으로 취급해온 사실도 전부 사상범죄 중에 포함된다. 또한 이 정치범죄에 포함되지 않는 범죄 현대문명의 파괴, 만인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 급격한 혁명을 음모하고 선동하는 행위도 또 포함되어 사상범죄”라고 하였다. 註2) 中川矩方, 『思想犯搜査提要』, 新光閣, 1934, 1쪽. 

일제는 이같은 사상범죄에 대해 사상전향을 꾀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사상전향정책의 목적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사상 또는 그에 기반한 운동을 포기하거나 다른 온건한 방향으로 돌리게 하는데 있었다. 이로써 사상전향정책은 치안유지법을 이용한 사상탄압과 함께 1930년대 이후 일제 사상통제정책의 한 축이 되었다. 註3) 장신, 「1930년대 전반기 일제의 사상전향정책 연구」, 『역사와 현실』 37, 한국역사연구회, 2000, 327쪽.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들 ‘사상범’들에 대해 사상전향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상전향을 실시하기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1907년 보안법保安法을 적용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보안법만으로는 법적용에 한계를 느끼고 형법 제77조의 ‘내란죄’ 법규를 적용하여 사형 또는 무기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19년 4월 15일에 재빨리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제7호을 제정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의 결과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한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늘어나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 공산주의운동이 체제변혁을 꾀하며 일제식민지 통치체제를 위협하자 1925년 4월에 제1차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보완하였다.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은 1925년 5월에 보통선거법과 함께 의회에서 통과되어 시행되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의 공산주의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와 코민테른의 적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정되어 국체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또는 그 실정을 알고도 결사에 가입하는 자를 최고 사형에서 10년 이하 징역 또는 무기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이 최초로 적용된 곳은 일본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였다. 치안유지법은 식민지에서의 공산주의를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법규로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한국에서는 선거권은 커녕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은 채 치안유지법만 칙령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치안유지법은 1928년 6월에 ‘치안유지법중治安維持法中 개정긴급칙령改正緊急勅令’으로 일부가 개정되었는데, “조선의 독립을 달성코자 함은 우리 제국영토의 일부를 잠절潛切하여 그 통치권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축소하여 침해시키려는 것이므로, 즉 치안유지법의 이른바 국체변혁을 기도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라고 하며 식민지를 일본영토로 치부하여 독립운동은 통치권의 내용을 영토적으로 축소한다는 의미에서 국체변혁으로 해석하여 치안유지법을 확대 적용하였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공산주의 색채가 없다해도 어떠한 형태의 독립운동도 ‘국체변혁기도’ 행위로 파악되어 결사조직 지도자에게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침략 이후에 일제는 전시하의 비상체제에서 탄압책만으로는 이른바 ‘제국판도’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내와 식민지 모두에 ‘국가주의운동國家主義運動’을 전개하면서 적극적인 사상통제에 나서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위협과 회유의 양면정책으로 사상‘전향轉向’을 유도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민족운동을 포기하게 하고 이를 통치선전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전향공작에 나서게 되었다. 註4) 일제의 전향정책에 대해서는 이명화의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을 참고. 

2. 사상전향의 개념
‘전향’이란 적어도 일제지배하에서는 항일抗日을 친일親日로 추락시키기 위한 사회적 강제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전향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복본화부福本和夫이다. 그가 “이제 이 ‘전향’을 할 때가 왔다”고한 이후 ‘전향’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약삭 빠르고 머리 좋은 일본 사상검사들은 이 ‘전향’을 슬쩍하여 변절·불복·반성 따위의 어감이 좋지 않고 자존심 상하는 말 대신에 ‘전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의 공식문서에 전향은 1932년부터 나타난다. 1932년 공포된 ‘사상범인思想犯人에 대한 유보처분취급규정留保處分取扱規定’은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를 사상범으로 취급하여 장기간 그의 행장을 감시하고 전향을 강요하는 법이었다. 

‘전향’의 개념에 대해 사상과학연구회思想の科學硏究會의 『공동연구 전향』에서는 “권력에 의해 강제되어 일어나는 사상의 변화”라고 규정하고 있다. 註5) 鶴見俊輔, 「轉向の共同硏究について」, 『共同硏究 轉向』 上, 思想の科學硏究會 編, 1959, 5쪽. 이러한 전향의 개념에 따르면, 먼저 국가의 강제력이 있고 다음에 개인의 선택·결단에 의한 사상변화 즉 개심改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제력과 자발성은 전향 현상의 불가결한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된다. 

일제하 ‘전향’의 개념은 두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 하나는 전향을 ‘마르크스주의 사상·운동의 포기’라는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사회주의자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하 전향이 ‘일본 파시즘·친일 반공노선과의 야합’으로써 전향을 마르크스주의자뿐 아니라 일제 파쇼진영으로 투항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친일·민족반역행위 일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註6) 이수일, 「일제말기 사회주의자의 전향론-인정식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79, 국사편찬위원회, 1998, 96쪽. 두번째의 경우 일제하에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를 막론하고 친일·민족반역행위를 ‘넓은 의미의 전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註7) 金石範, 『轉向と親日派』, 岩波書店, 1993, 7쪽 ; 김민철, 「일제하 사회주의자의 전향논리」, 『역사비평』 28, 역사문제연구소, 1995, 232쪽. 아무튼 일제강점기 전향은 정신적·사상적으로도 강도 높은 억압과 수탈을 강제한 일제 지배체제의 파시스트적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식민지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註8) 전상숙,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현실적 선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인식과 대응』, 혜안, 2005, 307쪽. 

“일본인 전향자는 돌아갈 민족과 나라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조선인 전향자는 돌아갈 민족과 국가가 사실상 없다” 註9) 林房雄, 「轉向について」, 『文學界』 3월호, 1941. 는 말처럼, 일제하 한국인의 전향은 민족주의자·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를 불문하고 절대 악惡인 ‘일본 파시즘과의 야합’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일제 당국의 조사에 나타난 한국인 사상·운동가들의 주된 전향동기는 이른바 ‘시국인식時局認識’이었다. 시국인식이란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계기로 나타난 일제의 국력에 대한 굴복이자, 그에 따른 한국 독립에 대한 절망감의 직접적 반영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전향은 체포·구금이라는 외부적 강제 속에서 일제에 대한 ‘패배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전향의 내면적 의식구조에는 ‘불가항력의 일본자본주의’라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패배의식의 고취는 사상범의 ‘무기력’을 유도하는 일제 사상교화의 기본방침이기도 하였다. 
 
‘전향’이라는 말이 일제 사법당국의 공식문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1932년에는 그 기준이 다음과 같았다. ① 비합법운동에서 합법운동으로 전환, ② 일본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인터내셔날리즘에서 내셔날리즘을 기조로 한 사회주의로의 전환, ③ 일본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 전술의 변경을 제창하기에 이른 전환, ④ 맑시즘에 근본적 세계관의 차이를 느끼고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에서 정신생활을 기조로 하는 종교의 세계로의 전환, ⑤ 아직 정확하게 다른 세계관을 갖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불만을 느끼고 종래의 운동에서 이탈한 경우 등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註10)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轉向に對する處遇就にて」, 『사상휘보』 4, 1935, 165~166쪽. 

전향은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지 반국가적 사상을 방기하는 일이 아니다. 일보 전진하여 일본인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註11) 長崎祐三, 「時局と轉向者將來」, 『綠旗』 7월호, 1937, 23쪽. 이 시기에 전향기준은 “우리나라에서의 사상전향이란 일본인이라는 자각을 되찾는데 있는” 이상, 공산주의 사상의 포기뿐만 아니라 “충량한 신민臣民으로서 사회에 유용한 재목이 되는 것”에 있었다. 註12) 森山武市郞, 『思想犯保護觀察法解說』, 松華堂書店, 1937. 59~60쪽. 1941년 2월에 일본보다 1년이나 앞서 한국 내에서 실시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은 비전향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수용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전향이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개별적 현상이라기보다도 사회적 현상으로 되었으며, 개인문제라기보다 사회문제’로 되었을 경우 즉 사회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전향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註13)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轉向に對する處遇に就て」, 『사상휘보』 4, 164쪽. 일본에서 전향이 본격화 한 것은 1933년 6월 10일 좌야학佐野學과 과산정친鍋山貞親이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공동피고 동지에게 고하는 글共同被告同志に告ぐる書」을 그해 『개조改造』 7월호에 게재하면서부터였다. 
   1931년 감옥 안에서 좌야학은 대공황에 의해 격화된 사회적 모순이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 것이라 기대하며 공판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공판투쟁은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된 채, 좌야학 기대와는 정반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공판 후 좌야학은 일본 천황제는 막부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통일 일본을 건설하는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보시킨 것으로 보았다. 천황제는 일본사회에서 인민적 성질을 갖고 진보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장래 민족의 중추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좌야학은 천황제이데올로기에 흡수된 대중의식을 직시하면서, 그것은 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 하기에는 천황제가 대중에게 갖고 있는 의미가 너무도 크다고 인식하고, 대중의 천황에 대한 친화감은 장구한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민족적인 본연’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註14) 정혜선,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전향과 천황제」, 『일본역사연구』 10, 일본역사연구회, 1999, 253쪽. 

좌야학과 과산정친의 뒤를 이어 7월 말까지 전향자는 미결수 1,370명 중 415명31%, 기결수 393명 중 133명34%으로 548명에 이르렀다. 이후 전향은 일반화되어 1936년 5월 말 현재 전수감자 438명 중 전향자가 324명으로 74%에 이르렀고, 1943년 3월에 기소된 사회주의자 2,440명 중 비전향자는 겨우 37명에 지나지 않았다. 註15) 김현숙,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전향연구」, 연세대석사학위논문, 1990. 

그러나 좌야학과 과산정친의 전향이 한국인 사상범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전형무소에서 이들의 전향서를 읽은 약30여 명의 사상범 중 2~3명을 제외한 전원이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국에서 사상범 중 전향하는 자가 일본에 비해 매우 적었던 것이다. 註16) 吉田肇, 「朝鮮에 있어서 思想犯의 科刑幷累犯狀況」, 『思想硏究資料』 61, 司法省刑事局, 1939. 나아가 역전향·위장전향도 적지 않게 나타났는데, 1930~1935년까지의 전향자 2,137명중에서 역전향을 한 자는 221명이었다. 註17)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轉向者にして再び治安維持法に違反したる者に關する調査」, 『사상휘보』 6, 1936.3, 93쪽. 예컨대 함북 명천에서 운동을 하던 이문홍은 “나는 처음 좌야학과 고교정수高橋貞樹 등의 사상전향문을 입수한 즉시 그들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 우리는 이들의 반동성, 반쏘적 사회파쇼적 사상적 경향을 폭로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사상과 쏘비에트동맹의 옹호를 위하여 전全유치인의 사상교양에 전력하였다” 註18) 역사문제연구소, 「일제하(1932-35) 전향공작에 대한 옥중투쟁기」, 『역사비평』 21, 1993, 372쪽. 라고 하였다. 

3. 전향공작의 시행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민족분열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재등실은 1920년 11월 20일자 훈령 제59호로써 조선정보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조선정보위원회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총독부 서무부장을 부위원장하는 고등관급 관리 20여 명과 민간인 지식·경험자 약간명을 위원으로 하였다. 그외 간사 1명과 서기 약간명으로 조직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1921년 4월 이종국李鍾國이 유일하게 정보위원에 참가하였다. 조선정보위원회를 통해 일제는 독립운동 대한 정보와 동향을 교환하고 탄압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사상대책의 전환과 특징은 1920년대 사상대책의 기조가 이른바 ‘엄벌주의’라고 표현되는 강압주의였다면, 1930년대는 그러한 탄압을 기조로 하면서 과거와는 달리 전향유도정책 및 전향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1930년 3월 학무국 주최로 열린 ‘사상문제강연회’에서 이등헌랑伊藤憲郞 검사는 “사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형벌만능주의보다 사회개선·사상선도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정보위원회 편, 『정보휘찬』

일제의 전향정책은 공산주의를 중점 대상으로 하는 ‘위험사상’에 대한 사법취체 선상에서 사상범 대책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본 법체계상에서 사상범 정책, 곧 전향정책으로 정립되어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함께 확대·강화. 전향의 정책적 정비와 확대 시행에 기본적인 준거이자 기준으로 작용한 것은 이른바 일본의 ‘국체國體’와 ‘국체에 대한 변혁’이다. 일제가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나 공산주의를 일제 지배체제가 기초하고 있는 ‘천황제’와 ‘국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공식화한 것은 ‘치안유지법’이며, 치안유지법 제정 이후 일제는 국체를 위협하는 불온사상, 공산주의운동을 ‘교정’하는 주된 방책으로 엄격한 처벌위주의 시책을 실행하였다. 註19) 전상숙,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현실적 선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인식과 대응』, 319~320쪽.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국가의 정치조직의 근본을 파괴하고자 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운동은 단호히 소탕할 것”이라는 취체 방침을 발표하였다. 만주 진출은 일제가 항시 경계하는 ‘적화’의 주적인 소련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치안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고, 내무성과 사법성은 1928년 개정·강화된 치안유지법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재개정을 1932년부터 검토하였다. 일제시대 전향시책은 인적·물리적 시설의 부족과 일본에서 시작된 전향시책을 곧바로 실시해도 되는가 하는 논란 끝에 1933년 중반 이후 시작되었다. 전향정책이 일본과는 달리 뒤늦게 그것도 일선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시행된 것은 ‘전향’문제가 갖는 특수성과 식민지가 갖는 특수사정 때문이었다. 註20) 전상숙,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현실적 선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인식과 대응』, 326쪽. 

1933년 2월 16일자 “사상범 취체정책의 전환”이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시평時評은 강압주의가 다소 변화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정책을 다소 완화하여 ‘사상선도思想善導’의 의미로 일본에서 실시하는 유보처분留保處分을 적용한 것이 정책 전환의 골자이다. 그런데 유보처분을 한국에 적용하려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실시되지는 않았다. 1933년 7월 28일자 『조선중앙일보』 사설은 함남경찰서장회의 결과를 보도하면서 조선총독부 당국의 사상대책의 신방침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종래에는 대소를 막론하고 검거, 엄벌주의를 취하여 왔었으나 금후로는 중요한 인물 외에 일반으로 사상이 불철저한 자 또 사상전향의 희망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가급적 관대한 태도를 취하여 엄숙한 감독과 지시로써 대신하랴는 것이라”라고 하여 엄벌주의에서 전향유도정책으로 전환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정도로도 한국에서의 민족운동을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사상범보호관찰법思想犯保護觀察法은 일본에서 1936년 5월 29일 공포되어 11월 20일부터 실시되었고, 한국에서는 같은 해 12월 12일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공포되어 같은 달 20일부터 실시되었다. 이것의 입안동기는 비전향자 및 전향자에 대한 재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행규칙 총칙 제1조에 따르면 보호관찰은 본인의 사상전향을 촉진 또는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혀, 이 법안이 사상전향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법의 제정취지를 내세워 기소유예·집행유예를 언도받고 혹은 가출옥을 허락받은 자와 만기 출옥한 자를 대상으로 적용하였다집행정지·집행면제를 받은 경우는 적용하지 않음. 적용대상자 중 의연히 ‘불온사상不穩思想’을 품고 있다고 판단되면 비전향자 또는 준전향자에 대해서는 전향하도록 추진하였고, 완전 전향자에 대해서는 전향의 확실한 보증을 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향했어도 재범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전향자를 계속 감시하고, 그들이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감시토록 하는, 이전에 비해 법적 구속을 한층 강화한 것이다. 이처럼 철저한 사상보호관찰령 시행에 대하여 언론은 사설을 통해 형기를 마친 사람들을 계속 검찰 감시하에 둠으로써 인간생활의 자유를 억압하여 갱생의 길을 차단하고 실망과 자포자기의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악법을 한국인에 대한 꾸준한 위협과 회유라는 카드로서 활용하여 ‘전향’에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쟁의 장기화 국면을 타파하는 동시에 국내적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효율적 자원 배분과 안정적 민중 동원을 위해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일제는 대동아공영권 확립과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법률시행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1941년 2월 12일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제령 8호’이다. 이 법령은 형벌 제도만으로는 처벌이 어려운 점을 보족補足하기 위한 처분이었다. 이는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된 정치범이 “석방 후 다시 동법의 죄를 범할 우려가 현저할 때”, 즉 전향공작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는 예방구금소에 이들을 수용하여 개전改悛시킨다는 내용이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행규칙에 따라 지정된 보호단체들

사상전향을 하지 않아 재범의 우려가 현저한 자를 일정 조건 아래 사회로부터 격리시킴과 동시에 엄격한 규율 아래 이들을 교화 단련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비전향의 정치범을 형기민료 후에도 계속 구금시키는 인권유린의 식민지 악법을 ‘합법화’한 법적 조치였다. 註21)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2쪽. 

이러한 식민지 악법은 더욱 강화되어 1941년 5월 15일에는 ‘치안유지법 개정법률’이 시행되었다. 이는 종래 규정 전반에 걸쳐 개정을 가한 것으로, 이른바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한 어떠한 행위나 결사에 대하여도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새로이 마련하고 벌칙도 한층 강화하였다.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도전하는 어떠한 불령不逞 행동도 철저하게 박멸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한국인의 전향을 강제로 유도하는 한편 동일범이라도 일본인보다 형벌을 무겁게 과하는, 민족차별의 법적용을 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일본보다 한국에서의 형벌 부과가 중한 이유를 한국의 사상운동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일본보다 심각하므로 엄벌에 처하여 한국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고, 사상범 사건은 치안유지법만이 아니라 형법 기타 법률을 적용받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쇠멸되어 거의 ‘목적수행범’으로 처벌하지만 한국에서는 결사조직죄가 적용되고 사상범으로써 전향하는 자가 일본에 비하여 적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민족차별적인 법 적용은 한국인들에게 공포감을 조장하여 내심에서 우러난 사상전향이라기보다는 무리한 물리적 사상전향을 유도함으로써 대량 전향사태를 낳았던 것이다. 註22)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3~374쪽. 
 
2. 사상전향 공작과 전향단체

1. 사상전향 공작
일제는 만주침략을 ‘동양 평화의 영원한 확보’와 ‘대이상을 향한 매진’이라 하면서 ‘일반一般은 이제 다시 우리 국력의 위대함에 외경畏敬’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아울러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고 자포자기를 유도하기 위한 전향공작에 한층 열을 올렸다.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한국인들의 민족성을 유지해둔 채 총력적인 전시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심한 끝에 나온 통치책이 식민지에서의 황민화정책의 실시이며 전향공작의 강화였다. 

전향자들의 운동노선과 경향을 보면 주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을 주장하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실력양성론자들은 식민지통치에 대한 직접투쟁이 아닌 교육진흥과 산업발달을 도모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장래 독립을 달성하자는 노선을 갖고 있는 자들로, 일찍이 일본 혹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층이 많다. 이들 중에는 민족의 독립을 절대의 가치로 여기고 사회주의운동 및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투쟁을 전개한 이들도 있으나 신교육과 선진문화를 경험한 민족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먼저 좌절하였다.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 논리에 함몰되어 전면대결과 무장투쟁으로는 일제를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 역사관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거나 이상을 가질 수 없었다. 강력한 일제 무력통치에 저항하느니 개량주의적 실력양성과 자치운동만이 식민지 실정에서 실현 가능한 운동으로 보았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 민족독립에 매달리느니 개량주의적 실력양성운동과 자치론으로 운동방향을 선회하였다. 이처럼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독립문제보다는 근대화, 실력양성 문제를 우선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일제의 동화주의와 다른 민족의 논리를 갖지 못하였다. 그들의 근대화 지상주의는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에 빠지게 될 때, 강자에 의존해서라도 근대화하는 길만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끊임없는 민족차별과 식민지 수탈의 회의 속에서도 민족문제를 외면하고 현실순응이라는 대세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권력에 기생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였다. 註23)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82~383쪽. 

1930년대 새로운 사상의 전환을 내세우면서 등장한 것은 이광수李光洙와 신흥우申興雨였다.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핵심인물이었던 이광수는 1930년대 초부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서 파시즘의 적극적인 평가와 수용을 주장하였다. 신흥우 역시 1932년 미국 여행에서 귀국한 후 파시즘에 입각한 강력한 조직운동을 제기하였다. 또한 자치론자의 변절과정의 전형은 최린을 통해서 볼 수 있다.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이면서 천도교 신파의 지도자인 최린은 이미 1930년 이전부터 일제의 통치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32년 천도교 대도정에 추대된 그는 1933년 4월 정기대회에서 천도교는 정치적 목적이 있는 단체가 아님을 천명하면서 자신이 줄기차게 주창해오던 자치론을 포기하였다. 정치적 신념에 의한 포기가 아니라 일제가 내지연장주의로 통치방침을 바꾸고 일체의 자치논쟁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최린은 기회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며 발빠르게 1933년 말경 이른바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제창하여 일제의 전시체제에 부응, “현하 국제정세 아래서 동아제민족은 강국 일본을 맹주로 매진해야 하고 특히 조선에서는 내선융합內鮮融合·공존공영共存共榮이 민족갱생의 유일한 방도” 註24) 조선총독부, 「時中會の結成と其の活動に就て」, 『高等警察報』 4, 1935, 34쪽. 라고 떠벌렸다. 

조선대아세아협회 편, 『일본에 대한 아세아의 기대』

1933년을 전후하여 ‘대아세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일부 자치운동을 추진하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켰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朝鮮大亞細亞協會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발족 당시 한국인 상담역 15명과 일본인 30명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인 상담역 15명 가운데는 친일파인 박영효朴泳孝·박영철朴榮喆·한상룡韓相龍 등이 포함되었다. 註25) 조선대아세아협회, 『大亞細亞主義』 4월호, 1934. 

이와 아울러 조선대아세아협회를 이용하는 기관이 일본의 군부였기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조종하는 시중회時中會와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최린은 1934년 4월 중추원 참의로 취임하고, 6월에 동경여행을 다녀와서, 8월에 시중회 조직을 발기함으로써 전향은 결실을 맺게되었다. 시중회는 그해 11월 제1회 대회를 개최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데, “세계의 대세와 비상시국의 출현에 따라 국민은 각기 자기의 요구와 환경에 적응하여 신운동을 일으켜서, 무위적 타력주의他力主義와 퇴영적 처사주의處士主義 등 일체의 인식착오를 청산하고, 우리의 장래는 우리들 스스로 건설한다는 새로운 기치 아래 진솔하게 현상타개에 노력하자”는 취지를 내걸고, ‘신생활의 수립’·‘신인생관의 확립’·‘내선일가의 결성’ 등 강령을 제정하였다. 註26) 윤해동, 「민족부르주아지에서 황국신민으로」, 『역사비평』 22, 1993, 41~43쪽. 

사상전향 공작의 주대상인 사회주의 세력에 엄중한 취체와 회유작업으로부터 시작하여 공개적인 사상전향을 이끌어내었다. 일제가 사상전향을 요구하면서 이른바 ‘성명서聲明書’·‘상신서上申書’·‘감상문感想文’ 등을 발표케 하여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하였다. 전향서를 쓴다는 것은 식민지 시기 전향의 요건이자 전향 여부를 알려주는 유일한 물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전향자들은 상신서·감상문·성명서 등의 제목으로 전향서를 썼다. 일본에서는 좌야학·과산정친의 전향이론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 나중에는 그러한 선을 타고 쓰여졌다. 註27) 「現代世界と轉向 〈共同討議〉」, 『轉向』 下, 424쪽. 전향의 내용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반성문 수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나름대로 체계를 갖고 비판을 가한 것이 있다. 

일제는 무정부주의자와 농민조합·노동동맹·민족주의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는 자들을 사상전향 대상자로 파악하였다. 지방별로 관할 고등계 주임과 주재소경찰관으로 하여금 전향대상자들을 사찰 또는 끈질기게 접촉케 하여 전향하도록 설득하였다. 한편 전향대상자들에게 직업 소개 및 알선 등 생활 대책을 마련해주고 공공사업에 참여토록 하였으며, 지방 중견청년양성강습소에서 수강하도록 배려하는 등 통치권의 지도를 받도록 함으로써 체제 내로 이끌어 운동계에서 탈각토록 조장하였다. 

한편 그들이 다시 결사활동을 통해 역전향을 하지 못하도록 일체의 사상단체를 철저히 취체·해산시키는 대신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어용적 사상전향단체를 조직하여 전향대상자들을 여기에 가입시키고 황민皇民이 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는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의 전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민족운동계에서 변절자로 낙인 찍히게 하면서 대중에 대한 이른바 ‘사상정화운동思想淨化運動’에 이들을 동원하여 선전대상으로 이용하였다. 註28)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5쪽. 

2. 1930년대 전반기 사상전향 단체
일제의 사상전향단체로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34년 12월 26일 경성에서 조직된 소도회昭道會이다. 소도회는 사상관계자 보호선도기관으로 설치된 이후 논산을 비롯하여 예산·부여·청양 등 각지에 사상선도위원회가 만들어져 전향공작을 펼쳤다. 註29) 조선총독부, 「朝鮮內における思想淨化運動」, 『고등경찰보』 5, 1935, 1쪽. 이어 1935년 2월 11일에는 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일찍이 황민화운동에 기수가 된 친일파 이각종李覺鐘의 주도하에 ‘조선에서 사상전향자의 보호구원사업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백악회白岳會라는 어용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어용조직은 천황하사금, 총독부와 도道·부府 등에서 자금보조를 받아 운영되었다. 이른바 사회주의·공산주의·민족자결주의 등 사상과 노선을 청산하고 전향한 자들이 회원이 되어 ‘사상정화’를 내세워 전향공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백악회는 1936년 9월 20일에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註30)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5쪽. 

대동민우회는 사상전향자들에 의해서 재정비된 조직으로 역시 이각종이 종신終身 고문으로 취임하여 이전 전향자의 ‘보호구원’이라는 기만적 구실을 벗어던지고 ‘일본정신을 기본으로 한 국가주의의 새로운 지도이념을 구성하고 이를 개편하여 적극적으로 사상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목표를 표방하였다. 보고에 의하면 1만명 정도의 좌익분자들에게 호소, 약 500명의 찬동을 얻었다고 하며, 1936년 10월 말 175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사상전향자의 심리적 과정을 조사·검토하여 대체의 표준에 의해 이를 유별하고 전선전향촉진운동에 이바지”케 한다는 사업 및 활동개황을 세워 민간적 차원에서 전향운동을 전개하여 내선일체·황민화운동의 기수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통치가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이른바 사상범죄는 매년 격증하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만주침략 이래 반도 민중은 일본제국의 부동의 태도와 국제적 지위를 재인식하고 편협한 민족주의 의식을 버리고 전면적 전향기운을 초래”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가면 일제의 전향공작은 민족성을 무시하며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즉 한국인에게 단순한 민족주의에서의 이탈만이 아닌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지 반국가적 사상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보 전진하여 일본인이 되는 일” 註31) 長崎祐三, 「時局と轉向者の將來」, 『綠旗』, 1939. 7, 23쪽. 이라 하여, 전향은 사상범이나 일부 전향대상자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을 대상으로 전개되어 민족의식을 완전히 해소하고 ‘일본정신의 체득’을 주입하는 대중적인 ‘전면적全面的’ 전향시대를 선언하였다. 

1938년 무렵이 되면 적어도 표면적으로 결사단체들이 모두 해체되거나 전향하자, 일제는 민족운동의 탄압이라는 방어적 자세에서 이제는 황민화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입한다는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이른바 ‘사상정화운동思想淨化運動’을 전개하였다. 1938년 7월 24일에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保國聯盟이라는 단체의 결성은 일제의 사상전향공작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체이다. 이 단체가 결성되면서 내걸은 목적은 “전시사상범전향자의 국가총동원운동으로의 협력을 다시 강화하고 또 적극적으로 사상국방전선에 활동케 하여 무릇 반국가사상을 파쇄破碎·박멸하고 황도정신의 진기振紀앙양에 노력함과 동시에 실천활동을 통하여 저들의 자주적 사회복귀를 일층 촉진시키기 위하여 전선사상범전향자를 묶어 하나로 하는 강력한 자주적 조직을 형성함” 註32) 조선총독부, 「時局對應全鮮思想保國聯盟)の活動狀況」, 『사상휘보』 20, 1939. 9, 214쪽. 이라는 거창한 것이었다. 그리고 행동강령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강화철저, 애국적 총후銃後활동의 강화, 사상국방전선으로의 적극적 참가협력, 국책수행으로의 철저한 봉사, 후진 전향자의 유액誘掖선도로 정하고, 전시사상범으로 전향을 표방한 자들을 국가총동원운동에 동원하였다. 註33)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6쪽. 

그외에 1938년 8월 15일에는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가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의 박멸과 방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일본정신앙양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걸고 조직되었다. 註34) 조선총독부, 「朝鮮防共協會)の設立及その活動狀況」, 『사상휘보』 20, 1939. 9, 182쪽. 본 협회는 사상전람회 개최, 기관지 발행, 팜플렛 발행, 방공영화 제작, 좌담회·강연회 등을 통하여 일본 무사도 정신을 한국인에게 고취시키고 일본과 한국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과 ‘내선융화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등 일본식 제국주의 논리를 유일정신으로 받들도록 강압하는 꼭두각시노릇을 하였다. 이외에도 전향아닌 변절자들에 의하여 많은 어용 전향단체들이 만들어져 황민화, 전시동원을 한국인에게 선동하였다.  
    
조선방공협회 취지서

1939년 8월 초순에는 일제히 사상정화대책을 철저히 강화한다는 방침아래 각도의 고등외사 경찰과장들이 협의한 결과, 각도에 ‘사상정화대책요강思想淨化對策要鋼’을 공포하였다. “공산주의·민족주의·불령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제·청산하여 전민중으로 하여금 신동아건설의 위업에 매진하고 있는 제국의 결의와 실력을 재인식시키고 진실로 황국신민이라는 자각에 기초하여 일본정신의 진기振起 앙양을 도모”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이를 위한 실행상의 주의요강과 대책요강 등을 각도에 시달하였다. 여기에는 방공사상을 철저히 보급함과 동시에 일제에 충성할 애국교화단체인 온건단체와 특수단체를 조성·지도하고 이들 단체가 중심이 되어 학생 및 청소년을 지도에 철저를 기할 것 등이 제시되었다. 註35)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7쪽. 

또한 사상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자를 ① 요시찰·요주인 인물, ② 전향자, ③ 비전향자, ④ 사상사건검거자, ⑤ 사상전과자 등으로 구분하고, 이들에 대한 지도와 감시 대책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대대적인 사상전향 공작을 전개하였다. 개별적 대책으로 주목되는 것은 ‘전향자’로 이미 판명된 자들도 취직·전직을 알선하며 일본시찰 등을 통해 전향결의를 강고히 하도록 공작하는 등 경계를 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요에 따라 경찰부와 경찰서에 정화공작 지도기관을 두고 각도에서 적당히 통제하도록 하는 등 대대적인 사상전향공작을 실시하였다. 註36) 조선총독부, 「思想淨化對策)に就て)」, 『高等外事月報』2, 1939. 8, 4∼6쪽. 

3. 중일전쟁 이후의 사상전향 단체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에 대한 침략을 단행한 이래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발발하여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단행하였다. 이와 같은 전쟁의 확대와 함께 이전 민족분열책과 총독부 교화운동에 적절히 이용하며 일면 방관적 태도를 취했던 실력양성운동과 자치운동에 대해서도 그 자체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조금이라도 띠고 있으면 탄압을 가하여 민족말살을 전제로 한 내선일체를 획책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는 현재 ‘선내鮮內 요주의要主意 단체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각 단체와 그 구성인원의 성향에 대해 또다시 세밀히 파악함으로써 전시체제 사상검토를 재실시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된 단체의 반수는 사변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갖고 하등 활동을 하지 않으나 반수는 국방헌금·출정장병영송·동방요배·국기게양·신사참배·시국강연회·전승기원제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조사·보고하였다. 註37)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昭和13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槪況」, 『사상휘보』 18, 1939, 28쪽. 이러한 일제의 조사보고에 의존해 유추해 본다면, 1938년 당시 한국에 존재한 운동결사는 하나같이 시세방관단체 아니면 친일단체였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입각하여 민족운동 및 사상운동을 철저히 취체한 성과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취체 정도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우리 조선인을 일본국민이라 칭하여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하게 하는 것은 조선인의 수치羞恥다. 우리 조선인은 조선인임을 자각하여 조선어를 열심히 배워 성인이 된 후 조선을 일본과 같이 세계에 과시하여 훌륭한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註38)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昭和13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槪況」, 『사상휘보』 18, 28쪽. 라는 민족적 발언만으로 치안방해죄로 검거되는 상황이었다. 註39)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79쪽. 

이러한 시세하에서 일제가 그간 크게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완전 전향을 보장받기 위하여 일으킨 것이 동우회同友會와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이다. 공산주의의 취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제는 이제 개량주의 온건단체로 분류했던 양 단체를 일제통치를 위협하는 민족혁명단체로 규정하고 완전히 해체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미국의 흥사단 본부와 상해의 흥사단 원동위원회 및 국내의 수양동우회 사이에 규약 개정에 관해 협의와 절충을 거듭한 결과 1929년 11월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운동을 통일하였다. 이에 따라 명칭은 ‘동우회’로 고치고, 규약 중 “조선 신문화운동”이란 표현을 “신조선 건설운동”으로 고쳤다. 또한 “혁명 대당의 일지대이어야 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조항을 첨가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과 평양·선천의 수양동우회 본부와 지회를 ‘동우회 지방회’라고 개칭하였다. 동우회는 그간 노선갈등으로 부진했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1927년 8월호를 마지막으로 휴간하였던 기관지 『동광東光』을 1931년 1월호부터 다시 속간하였다. 

『동광』 표지

같은 해 2월, 이 회의 중앙위원회에서 회원의 질적 향상 및 가입회원의 배가·청년 훈련 사업 개시·기금 설치 및 가입회원의 배가·민중 교양 운동과 회원의 배가 등 4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1931년 9월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여 정세가 점점 악화되고 설상가상으로 1932년 4월 상해에서 안창호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됨으로써 대부분 그 실시가 유보되고 말았다. 기관지 『동광』도 1933년 1월 통권 40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여도 동우회의 모임과 활동은 일제에게 위험시되지 않았다. 당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동우회를 움직여야만 했다. 더욱이 이 동우회에는 개량주의적인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였기 때문에 일제가 황민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단체마저도 일제의 정책에 장애가 되었다. 일제 경찰은 마침내 이러한 단체에도 검거의 마수를 뻗쳐 이들을 위협 회유함으로써 부일협력자로 ‘전향’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래서 1937년 4월 어느날 종로서 형사가 당시 동우회 이사장 주요한朱耀翰을 찾아와 동우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귀뜀까지 해주었으나, 이사회 개최를 핑계로 머뭇거리자 곧바로 검거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일제 경찰이 이 사건을 통해 노렸던 점은 민족주의자들의 대거 친일 ‘전향’이었다. 

수양동우회 관계자 검거에 대한 일제 경찰문서

이 사건으로 결국 동우회원 181명이 검거되어 이 가운데 49명이 기소 되고, 안창호安昌浩·최윤세崔允洗·이기윤李基潤이 옥중에서 발병하여 사망하였고, 김성업金性業은 혹독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다. 일제 검찰은 동우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기소하였으나, 일제의 법정도 인정키 어려워 1939년 1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결심 공판에서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일제 검찰은 다시 이를 상고하여 1940년 8월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이를 번복하고 관련자들을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에 이르는 실형을 언도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듬해인 1941년 11월에 경성고등법원에서 열린 상고심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동우회는 학계·언론계·산업계 등에서 활약하는 부르주아계층의 명망있는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였지만, 註40) 김상태, 「1920∼1930년대 동우회·흥업구락부연구」, 『한국사론』 28, 서울대 국사학과, 1992, 226∼236쪽. 근대적 지식층과 자산가층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기독교를 주요 배경으로 하였다. 회원들 대부분이 일본 혹은 미국유학을 통하여 서구지향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부르주아계층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보완해주는 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대륙침략의 정세와 황민화운동 시기에 좀더 확실하게 전향을 보장받고자 동우회를 “저 상해임시정부 기타의 민족주의단체와 같이 급진적은 아니더라도 진정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동지를 획득하고 그 실력을 양성하고 영구적 사업으로 활동을 계속하여 왔다”라고 운운하며 동우회를 신간회 해소 이후 가장 유력한 단체로 부각시키고 탄압하였다. 

흥업구락부는 YMCA총무인 신흥우가 1924년 5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기독교총회에 한국 대표로서 참석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하와이에 들려 이승만을 만난 것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신흥우와 만난 자리에서 금후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종래와 같이 단지 국외에서의 파행적 운동으로서는 도저히 한국 독립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금후에는 어떻게 하여서든 국외와 국내의 운동을 병행적으로 전개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다가 호기에 이르러 일제히 호응 궐기하여 소망의 달성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기 위해서 국내에도 동지회와 동일한 사명의 비밀단체를 조직하기 바란다는 권유를 하였다. 이에 신흥우는 동지회의 3대 정강 4대 진행방침을 기초로 한 혁명적 비밀결사를 국내에 조직할 것을 약속하고 11월 귀국하였다. 

신흥우는 귀국 이후 비밀결사 조직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모임을 갖고, 이 회의 명칭은 일제 당국의 사찰을 피하기 위하여 표면상 친목단체로 위장하기로 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사직동 신흥우 집에 이상재·구자옥 등 기독교 유력 간부 9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는데, 결사의 명칭을 단순한 실업단체로 위장, ‘흥업구락부’라 하였다. 여기에 준하는 규칙을 제정하고 운동방침 등을 결정하는 한편, 초대 부장에 이상재李商在, 회계에 윤치호尹致昊·장두현張斗鉉, 간사로 이갑성李甲成·구자옥具滋玉을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흥업구락부는 표면상으로는 국민의 복지향상과 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상은 해외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대어 주는 하나의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특히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일본의 국제적 난관을 이용하여 민족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꾀하기 위해 적극적인 자금 조성 방법이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흥업구락부에 대해 “기독교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실천에 착수한 현저한 사안으로 주의를 요한다”고 평하고 있다. 일제의 감시하에 비밀리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흥업구락부가 일제 당국에게 탄로 난 것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의 일이었다.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유억겸愈億兼의 집에서 미주의 동지회와 밀접한 연락이 있었다는 문서가 압수되고, 또한 5월 19일 미국에서 돌아 온 윤치영尹致暎을 취조하다가 동지회원의 기념사진을 발견하고 국내에도 동지회의 연장 단체인 비밀결사 흥업구락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일제경찰은 신흥우·이건춘·구자옥·이관구·최두선·홍병덕·정춘수·구영숙·박승철·이만규 등 54명의 흥업구락부원들을 체포하였다. 

일제 당국자들은 이 사건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유식 지도자 계급의 인물들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을 전향시켜 그들을 전쟁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온갖 위협과 회유를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다수 유식인사를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지 말고 총후활동銃後活動에 자발적 협력을 하게 하여 충량한 제국 인민으로서 갱생시키는 것이 각반의 정세로 보아 가장 적절 타당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 경무 당국에서도 사건의 취급에 관해서는 특히 유의하여 장래에 사건 관계자의 갱생과 활약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는 바”라고 하는 삼교三橋 경무국장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일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등我等은 … 광휘光輝 있는 황국皇國 일본의 신민臣民으로서의 영예와 책임과를 통감하고 팔굉일우八紘一字의 도의적道義的 결합으로써 자분노력自奮努力케 함을 성심誠心으로 서誓하는 바이다”라는 이른바 「사상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6개월만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註41)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 「흥업구락부사건」. 

어쨌든 이러한 성명서 발표로 당시 민족주의 결사단체의 마지막 보루였던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는 완전히 일제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일제의 황민화로 나가게 된 완전한 전향이 된 셈이다. 일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검거로 서울지역의 민족주의단체는 거의 박멸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향운동은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진행되어 한인들이 유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일제는 한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동요의 기색이 있는 자들을 회유와 위협으로 비밀리에 포섭하였다. 만주침략 이후 포섭공작은 더욱 극성해져 변절한 이들을 이용하여 일제는 독립운동계 사이를 이간·중상하고 모략케 하였고 밀정들을 침투시켜 암약케 하였다. 

일제가 꾸민 국외에서 전향공작의 한 예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조직 해소사건을 들 수 있다.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경으로 이동했을 때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단원들도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이동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흥사단원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 간부로 활약한 이들이 많았다. 문제는 생활상의 이유로 상해에 잔류한 단원들이었다. 상해 주둔 일본군과 일본영사관은 중경과 미주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상해에 잔류한 단원들을 위협하여 전향성명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 결과 단원 53명의 명의로서 1940년 7월 16일자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성명서의 내용은 국내 동우회 전향의 소식을 듣고 원동지부는 자발적으로 해산할 것을 결정하며 과거의 잘못된 사상을 일소一掃하고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전향한다는 것이었다. 성명서에 이어 일제는 재류조선인 보호무육사업에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원동위원회의 소속 재산남경의 토지와 은행예금을 무조건 차압한다는 고시를 하였다. 註42)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91쪽. 

중경에 있었던 단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명의가 도용되어 발표된 전향성명에 접하고 당장 반박 성명을 발표하여 전면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미 해소 성명서는 인쇄되어 중경과 미주·조선 각 방면으로 전파되었고 한글신문에까지 발표되어 이 소식에 접한 각지의 흥사단원들을 비롯한 민족운동계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공작은 이미 총독부에 의해 자행된 국내 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사건과 같이 대중선전 방법을 동원한 수법으로 일제가 노리는 전향운동의 효과였던 것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에는 종교계가 가지고 있는 위상이 지대하였다. 3·1운동을 비롯한 커다란 독립운동에는 종교계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분열책을 획책하면서 한국 민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종교계에 꾸준히 침투하여 친일화 획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교·유교·기독교·천도교 모두가 일제 전향공작의 대상이었는데, 일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향공작이 어렵게 되자 친일파를 침투시켜 교단을 분열시키고, 중앙교단을 친일화시켜 개인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註43) 이명화, 「일제의 전향공작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193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392~396쪽. 

일제는 만주침략 이후 전쟁이 확대되면서부터는 친일적 종교계를 대중운동에 접목시키는 사회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친일화를 어느 정도 성공시킨 불교계와 유교계를 동원하여 전개한 이른바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은 대표적인 것이다. 일제가 종교계에 강요한 궁극적인 방향은 우리 종교의 고유성을 버리게 하고 종교계의 친일파를 동원하여 일본종교, 즉 신도神道로 재편해 황도皇道를 강압하는 것이었었다. 

불교의 친일화 분열책은 이미 1910년대부터 상당히 진행되었다. 불교의 중앙교단인 불교중앙교무원은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을 선전하는 어용종교 교단이 되었다. 1937년 이후에는 18개 사찰 대표자가 협의회를 갖고 조선총독의 훈시에 따라 전시에 일치 협력할 것을 결의하고 각종 군사후원사업에 동원되었고, 중앙교무원에서는 총독의 훈시를 전국 31개 본산本山 주지에게 하달하여 후방지원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각 본산은 물론 1천 3백여 말사末寺에서 승려 7,000명을 동원하여 기원제를 엄수하고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금품을 거둬들이고 전쟁에 위문사를 파견하는 등 불교교단을 전시동원에 철저히 이용하였다. 

유교 역시도 1910년대 이미 조선총독부의 지도를 받는 경학사가 중앙은 물론 지방의 향교를 장악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중앙본부격인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훈시를 각 지방 문묘와 향교 직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고 친일유림단체인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에서는 시국에 따라 거국일치를 요망한다는 통문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각지의 유림회·명륜회 또한 통치당국의 지도에 따라 무운장구를 기원하고 시국강연과 국방헌금·황군 위문에 힘쓰고 각종 제전에 일장기 게양과 중국 응징 서원문 낭독을 하는 등 전시 황민화운동에 동원되었다. 

3·1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민족종교인 천도교에 대해서 일제는 유사종교로 분류한 바 있다. 일제는 천도교 내에도 친일파를 육성하여 천도교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최린을 비롯한 천도교 신파들은 1933년에 ‘대동방주의’를 제창하며 노골적으로 친일을 표방하였다. 그 후 최린은 1934년 4월에 중추원 참의에 취임하고 그해 6월에 동경에 가서 일본의 조야인사들을 방문하고 신궁과 어릉을 참배하고 돌아와서, 8월에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우도성삼牛島省三와 경무국장 지전청냥池田淸兩의 지도 알선을 받아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시중회’를 조직하였다. 시중회는 내선일체를 근기根基로 한 “신생활의 건설·신인생관의 확립·내선일가의 결성·근로신성의 체행·성경신誠敬信의 실행”이라는 강령을 내세우며 5만인의 회원을 확보하고 전시체제하의 식민지 정신지배운동에 적극 나섰다.  
 
 
국방헌금 모금 기사

시중회 결성 당시 일반에서는 시중회가 여전히 자치운동기관이며 합법운동에 의하여 민족의 실력양성을 꾀하려 한다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시중회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시중회가 결성되자 천도교 구파가 최린과 시중회를 맹공격하였고 상해 한국독립당에서는 「토최린서討崔麟書」 註44)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공보』 58, 1934년 9월 1일. 를 게재하여 통렬히 비난할 정도로 그의 친일행위는 민족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그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시중회는 해산하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시천교侍天敎는 일찍이 친일종교로 낙인찍혀 민중적 영향력은 없었으나 친일파들이 시천교를 전향공작 단체로 전환시키기 위한 공작에 들어가 1938년 4월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李碩奎를 일본에서 돌아오도록 하였고, 시천교 간부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천교 개혁을 내세우며 친일파 이각종 등과 밀의하여 사상전향공작 단체인 대동민우회와의 합류를 꾀하였다. 시천교도들의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두 단체를 11월 28일부로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로 통합하였다. 대동일진회는 과거 이용구가 조직한 일진회를 복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1938년 기독교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원의 전향선언은 다른 기독교인들의 전향을 부추겼다. 이후 기독교계는 경쟁적으로 일본교회에 종속되어갔다. 이는 그간 종교계의 친일화를 도모하던 사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한 조처로서 친일파들에게 교권을 장악하게 해주고 그 반대급부로 일제 통치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들 친일종교계 인사들은 자신들의 출세 대가로 신자들을 전쟁동원 황민화운동에 내몰았던 것이다.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각성한 기독교인 중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가 정책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일제에 항거했던 이들도 기독교도였다.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거부가 황민화운동에 큰 장애가 되자 일제는 집요한 탄압과 회유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논리를 펴며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계의 학교 교장을 파면시키고 폐교시키거나 교회를 폐쇄시키는 강경책을 썼다. 그리고 친일분자들을 교회에 포진시키고 기독교의 일본화운동을 전개하여 교단과 개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향운동을 벌였다. 윤치호·양주삼 등이 지도자로 있었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1935년 세계연맹으로부터 탈퇴하여 일본기독교 연맹 산하로 들어가면서 종속의 길에 들어가는 서막을 열어 주었다. 

천주교에서는 신사참배를 로마교황청에 문의하여 1936년 5월에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받아내어 신사참배를 허용한 바 있다. 감리교에서는 1936년 6월에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이 총독부 좌담회 참석 후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감리교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지 종교가 아니므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주장을 대변하였다. 장로교에서도 1938년 2월에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1938년 9월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승인하였다. 이후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과 강제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 전향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다가 순교하거나 옥고를 치른 이들이 많았지만 교단의 변절자들은 기독교의 탄압을 면하고자 했다는 구실 아래 일제 권력에 의존하여 과잉충성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나갔다. 

한편 기독교계 친일어용단체의 등장은 교회를 더욱 분열시키고 교도의 친일화를 획책하였다. 1938년 5월 기독교단의 정춘수·김종우·김우현·차재명·이명직·윤치호·양주·이동욱 등 지도자들이 망라되어 ‘경성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종교보국을 선언하였고, 7월에는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렇게 훼절하면서 기독교계는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제 국책에 순응함을 지상과제로 삼아 기독교의 본질과 종교적 양심을 왜곡하고 서로 앞다투어 충성 경쟁을 하였다. 

1938년 9월 평양장로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문제에 찬의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됨을 자각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939년 장로교 제28회 총회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기로 의결한 후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부일협력에 나섰다. 

1939년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감리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日鮮監理敎特別委員會가 구성되어 정춘수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9년 9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된 정춘수는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 경찰당국의 위임장을 제시하면서 이사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감리교혁신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감리교의 일본화와 전쟁협력을 선언하고 나섰다. 

  
   3. 전향단체의 활동

1. 시중회
시중회는 1934년 11월 5일 최린崔麟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을 포기하고 일제하 한국인 자치를 추구하면서 조직한 단체였다. 註45) 시중회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에서 시중회 항목을 요약·정리. 설치 목적은 “대세大勢에 합류하여 실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조선민중의 신생활 신문화로 신흥조선을 건설”하며,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 합작하여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시중회의 창립 「취지문」에 그 같은 내용이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대세의 동향과 비상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모든 국민은 각각 자기의 요구와 환경에 적응한 신운동을 일으켜 전세계가 신흥기분으로 가득한 이 때에 있어서, 어찌하여 우리 조선만이 민중 스스로의 향상 신운동新運動이 일지 아니하는가? 이와 같은 무기력 무자각은 正히 우리 이천만 동포의 일대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 민중의 대부분은, 우리의 장래를 자기 자신으로 개척할 용기를 결한 결과, 타력他力에 구할 줄만 알고 민중으로의 정정당당한 이상을 수립하야, 써 우리의 전도는 우리의 힘으로 타개하겠다는 의사의 현현顯現이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니, 우리 스스로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과연 참됨이 적은 민중이란 것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민중이야 구학溝壑에 빠지거나 말거나, 조선의 현실에 관여치 아니하면, 그것이 곧 처사處士이라는 퇴영주의退嬰主義를 묵수하고, 적극적으로 민중을 향상시킬 줄 몰라서도, 그는 대중에 불충실한 소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무위적 타력주의와 퇴영적 처사주의 등 일체의 과거의 인식 착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건설하자는 신흥의 기치를 들고 진실하게 현상 타개에 매진치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타개하여 향상 갱생시킬까 하는 문제는 상아탑적 관념론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자립적 실력 여하로만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필요한 실력 양성은 우리의 철저한 각오를 제일요건으로 하는 동시에 깊이 동서문화의 이동異同을 탐색하며, 널리 동아 대세와 세계 정국의 동향을 살필 때에, 우리는 일본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합작하야 나아감으로서만,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부터는 산업경제는 물론, 널리 문화적으로 자립하는 준비공작과 훈련을 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 우리의 이 신생운동이야말로, 현실에 근거한 2천만 민중 당위의 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래의 개인적 또는 사회적 생활에는, 우리의 신생운동을 방해할만한 허다 편견과 누습이 고저高著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위선爲先 이런 것부터 완전히 삼제芟除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생운동에 추진력을 굳세게 하기 위하여 아래의 강령에 기基하여 심물心物 양방면으로, 이 실현을 필기必期코저 하는 것이다. 


이같은 취지에 따라 실천요강으로는 심적心的 방면의 ‘정덕正德’·물적物的 방면의 ‘후생厚生의 대본大本’을 수립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는데, 특히 후자를 위해서 ① 국산품 애용 등을 통한 의식주의 자작 자급, ② 색의色衣 관용慣用 등을 통한 의식주 개선, ③ 산업조합 또는 협동조합 설치, ④ 농산어촌진흥, ⑤ 풍속진흥 등을 내걸었다. 또한 시중회는 5대 강령으로 ① 신생활의 건설, ② 신인생관의 확립, ③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결성, ④ 근로신성勤勞神聖의 체행體行, ⑤ 성誠·경敬·신信의 실천을 하고자 하였다. 

시중회의 임원은 이사와 평의원·간사·촉탁 약간명을 두었으며 본회를 경성에 두고, 지방지부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시중회의 경비는 회원 회비와 일반 유지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설립 당시 이사에는 최린·박영철朴榮喆·정대현鄭大鉉·김사연金思演·장직상張稷相·하준석河駿錫 등이었으며, 간사에는 박준영朴駿榮·이정섭李晶燮, 그리고 평의원은 45명을 두었다. 

1934년 6월 최린이 동경에 가서 여러 명사를 방문하고 신궁과 어능에 참배하였으며, 그해 8월 30일 최린·김사연·장직상·정대현·하준석·박희도·주종선朱鍾宣·최석련崔碩連·정광조鄭廣朝·이군오李君五 등 18명이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약 1개월간 발기인을 각도에 파견하여 회원을 모집하였다. 1935년 4월 22일 현재 시중회 회원은 258명으로, 경기 64명, 충북 16명, 충남 3명, 전북 13명, 전남 5명, 경북 25명, 경남 17명, 황해 6명, 평남 35명, 평북 38명, 강원 3명, 함남 26명, 함북 6명, 간도 1명이었다. 1935년 9월부터 기관지로 『시중時中』 창간호를 발행하였으며 1937년 3월 제16호까지 발행하였다. 

이후 친일색채를 점점 강화해 가던 시중회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발기단체로 참가한 뒤 해산하였다. 
 

2. 대동민우회

1936년 2월 11일 전향자의 단체로 조직된 백악회白岳會를 확대하여 그해 9월에 재조직된 것이 대동민우회이다. 註46) 대동민우회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에서 대동민우회 항목을 요약·정리. 백악회가 확대 재조직된 이유는 “진정한 사상전향은 종래의 신념주의로부터 다시금 새로운 원리를 목표로 하여 사상적으로 추급하는 것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여, 일본정신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의 신新지도이념을 구성하고, 이에 다시 적극적으로 사상운동을 일으킬 필요를 인정하여 조직되었다. 대동민우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오인吾人은 대국가주의大國家主義 의식을 강조하여 국가전체의 번영을 위하야 노력함. 

2. 오인은 조선인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기함. 

3. 오인은 국가적 통제경제의 확립을 달성하며 대중의 생활 안정을 도圖함. 

4. 오인은 공산 기타 반국가적 일절의 사상 계열을 배척함. 

5. 오인은 시대의 진운進運에 적응適應한 도덕을 수립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기함. 


창립 이후 대동민우회는 1936년 8월 29일 대동민우회창립위원회 명의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그해 9월 20일에는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대동민우회는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강행하였으며, 일제의 사상전향 정책에도 동참하여 형무소를 방문하여 전향 설득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대동민우회 성명서


대동민우회의 연사들은 “신일본의 지도원리는 전적으로 조선의 지도원리이다. 조선과 내지에서 신아시아주의의 실현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는 팽창하는 인구를 소화하고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1938년 6월 18일 전영택田榮澤·현제명玄濟明·홍난파洪蘭坡 등 흥사단·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18명이 전향 성명을 발표하고 대동민우회에 가입하게 하였다. 


또한 대동민우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후원하고 선전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대해 7월 19일 중일전쟁에 관한 시국 슬로건 발표 및 유인물 3만매 살포하고,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국강연회 개최하였으며, 7월 30일에는 「사변事變의 본질 및 금후今後의 동향침로動向針路」라는 제목의 성명서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일본군 송영반送迎班을 조직하여 경성역에서 출정부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으며, 일본군 가족을 위문하는 한편 각 부대장에게 위문문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동민우회는 미영배격설전대美英排擊舌戰隊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구미유학자나 기독교 목사 등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아온 인물들을 경찰력 또는 관력官力을 통해 동원하여 평안남도 등지에서 순회를 하였다. 


3. 녹기연맹

녹기연맹은 총독부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진 않았지만, 총독부의 ‘내선일체운동’을 뒷받침한 대표적인 민간단체이다. 註47) 녹기연맹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에서 녹기연맹 항목을 요약·정리하였다. 녹기연맹의 전신은 1925년에 조직된 경성천업청년단京城天業靑年團과 1928년에 결성된 묘관동인회妙觀同人會가 통합하여 1930년에 결성한 녹기동인회綠旗同人會였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녹기연맹은 한국 내 일본인들로만 구성되어 사회교화단체를 표방하며 일본인의 국가주의 사상의 일상화와 생활화를 목표로 하는 수양단체였다. 


진전영津田榮 등 일련종日蓮宗에 심취한 경성제국대학 교수 및 학생 등 한국에 있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출발한 녹기연맹은 처음에는 ‘종교수양’을 내걸고 시작했지만, 국가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며 일본주의를 표면에 내걸었다. 1933년 2월 ‘사회교화단체’를 표방하며 녹기연맹을 출범시킨 이들은 50여 명의 회원을 시작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1936년부터 월간잡지 『녹기綠旗』를 발간하며 한국 내에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국체정신을 함양시키고 한편으로 한국인들의 생활을 비판하며 일본식 생활을 교육시켰다. 註48) 이승엽, 「내선일체운동과 녹기연맹」, 『역사비평』 50, 2000, 201~203쪽 전시기에 들어 녹기연맹은 국민총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여 1941년부터는 녹기문화연구소가 본격적인 연찬활동을 시작했다. 녹기연맹 주최의 강연회는 줄었으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관하는 강연회에 녹기연맹 구성원이 연사로 충당되었다. 또한 『녹기』 또한 전시체제지원을 선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註49) 정혜경·이승엽, 「일제하 녹기연맹의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10, 1999, 364쪽. 


1937년 1월 현영섭玄永燮의 가입은 녹기연맹 활동에 큰 활력이 되었다. 광주학생운동 당시 경성제대의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1935년 무렵 전향하여 녹기연맹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이후 박인덕朴仁德·김용제金龍濟·이석훈李石薰·이영근李泳根·배상하裵相河 등이 녹기연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황도학회·임전대책협의회 등 각종 협력단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녹기연맹의 주요활동으로는 1938년 1월 현영섭이 『조선인의 나아갈 길』일문을 출간하여 내선일체의 실천을 주장하였으며, 1939년 10월 진전강津田剛이 조선문인협회에 참여하면서 이후 반도신문화연구소·대동아문학자대회·조선문인보국회에도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40년 1월 창씨개명정책에 발맞추어 ‘씨창설氏創設 상담소’를 녹기연맹에서 개설하였다. 


4.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1930년대 말 대표적인 사상전향 조직이다. 註50)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에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항목을 요약·정리하였다. 1938년 6월 동경에서 전향자들로 이루어진 시국대응전국위원회가 열리자 국내에도 대표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의 전향자들은 박영희朴英熙와 권충일權忠一을 대표로 추천하여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대표로 추천된 권충일·박영희 양인이 경성관찰소 보호사 황전오일橫田伍一의 인솔로 위원회 참석하였다. 이들이 7월 3일 돌아와서 가진 경과보고회 석상에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직 건을 가결하고, 준비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정식으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각 지부를 결성하였는데 1938년 8월 7일 평양지부, 8월 27일 광주지부, 28일 대구지부, 9월 4일 신의주지부, 12월 4일 인천분회, 12월 17일 통천분회의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1939년도에 들어서도 3월 18일 부산분회, 4월 8일 수원분회, 7월 24일 대전분회, 12월 6일 개성분회의 발회식을 가졌다. 


시국대응조선위원회 결성식에서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정신의 앙양에 노력하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를 기한다. 우리들은 사상국방전선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하는 육탄적 전사가 되기를 기약한다. 우리들은 국책 수행에 철저적으로 봉사하고 애국적 총후활동의 강화철저를 기약한다”등 3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또한 일본정신을 파악하여 내선일체 정화하고, 사상을 정화해서 품성을 연마하며, 생활의 쇄신을 도모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들의 「선언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일본제국은 두 가지 세계사적 임무에 당면해 있다. 하나는 일본정신을 발양發揚하여 동양문화의 신新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일체一切 구미파歐米派의 파괴적인 사상관념思想·觀念 등으로부터 전全동양의 민중을 문화적으로 해방·방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치·경제 등의 영역을 통하여 일본·만주·중국 등을 합쳐 한 덩어리로 하는 신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열국列國의 침략적 쟁탈전을 배제·근절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동양, 아니 나아가 세계영원世界永遠의 평화를 건설하는 것은 역사상 비할 데 없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도정신皇道精神이 그렇게 만드는 까닭으로 하여 일청日淸·일로日露 전쟁을 시작했고, 이 번 중일中日 전쟁의 결정적 수행 등은 그 현현顯現이 아니면 안된다. 이제 우리 일본은 세계 열국의 면전面前에 당당히 정의正義의 군대를 진격시키고 있다. 정의 앞에 적敵이 없는 우리 제국이 이 역사적인 중대사명을 완수해야 할 성전聖戰을 개시한 이래 일년一年 남짓 중국 북쪽 변방에서 남南중국의 고도孤島에 이르기까지 일장기가 찬란하게 휘날리는 한편 중국 북부, 중부에서 신정권新政權은 서로 호응·궐기하여 이 세계적 성업聖業에 참가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장차 또한 문화적으로도 동양옹호를 위해 눈부실 정도로 훌륭하게 분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국민은 임무의 중대함을 자각하고 거국일치의 체제를 더욱 강고히 해야 한다. 


현대 전쟁은 단순한 무력전武力戰이 아니라 정치전政治戰·경제전經濟戰 특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쟁이 각각의 분야에서 통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가총동원·국민정신총동원 등 시국대응의 시책은 이러한 견지에서 매우 적절한 철혈정책鐵血政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전 국민은 단호한 결의로써 이 국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국위선양·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며,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명징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강화·철저, 응소자應召者 유가족의 구원, 생업보국生業報國, 근검저축, 근로봉사 등에 적성赤誠을 다하여 이 난국을 극복함으로써 제국帝國 백년百年의 대사명大使命을 완수해야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체적 임무의 완성은 국민 전체가 각각 소속 부면部面에 따라 각자의 책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에 의하여 비로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여 그 임무와 사명을 수행하려 한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사상적 오류로부터 탈각脫却하고, 관념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자기청산自己淸算의 빛나는 긍지를 획득했다. 아울러 우리는 이에 만족해야 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전체적인, 보다 높은 활동분야와 천직天賦의 사명에 적극적으로 각성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소극적인 자기청산으로부터 적극적인 자기완성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희구希求는 이미 열매를 맺었고, 시국대응의 국민운동은 점점 그 도度를 높여가고 있으며, 우리도 역시 국가총동원운동에 헌신·봉사하여 특히 사상국방思想國防이란 특수한 전야戰野에서는 우리의 총 역량을 집중하여 싸워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사상국방의 영예로운 전사戰士로서 자임하고, 과거의 경험과 실천능력을 여기에 바침으로써 反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破碎擊滅하여 황도정신의 진기앙양振起昻揚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또한 우리는 이를 계기로 하여 연맹원 상호간의 인간적인 재조련再調練·재도야再陶冶를 도모하고, 일본정신의 파악, 내선일체의 강화, 사상의 정화, 품성의 연마, 생활의 쇄신 등으로써 전선全鮮 전향자轉向者의 부단한 실천적 과제로 삼아 더욱 결속을 강고히 하고, 그 목적의 수행에 매진할 것을 서약한다. 



즉 전향자들의 일제의 침략전쟁 및 지배정책에 적극 협조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의문」에서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일본정신日本精神의 앙양昻揚에 노력하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를 기약한다. 우리는 사상국방전선思想國防戰線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破碎·격멸擊滅하는 육탄적肉彈的 전사戰士가 될 것을 기약한다. 나는 국책수행國策遂行에 철저히 봉사하며 애국적 총후활동銃後活動의 강화·철저를 기약한다”라고 하여 친일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임원은 총무에 박영철朴榮喆, 차장에 제양명堤良明, 간사에 율전청조栗田淸造·귤길장橘吉藏·김한경·박득현 등이었다. 주요활동으로는 1938년 12월 기관지 『사상보국思想報國』을 월간으로 발행하였으며, 1939년 2월 11일에는 사상전의 무기로써 활동사진기와 영사기를 육군에 헌납하는 헌납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9년 10월 8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제1회 통상대회通常大會를 개최하여 ‘반反코민테른 결의’ 및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에 ‘성지순례단’김두정·장덕수 외 21명을 파견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이후 전국에 7개의 지부와 80여 개의 분회가 결성되어 각지의 보호관찰소와 연계·협력하여 취직을 알선하는 등 비전향자들의 전향 촉구에 나섰다. 그밖에 군인원호행사·신사참배단 파견·부여신궁 건설을 위한 봉사수양단 파견 등의 활동과 함께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사상전’을 수행하였다. 1940년 12월 28일 사상전향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되면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해소되었다. 


5. 대륙경제연구소

대륙경제연구소는 전향한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중심이 된 통제경제연구·언론단체이다. 註51) 대륙경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에서 대륙경제연구소 항목을 요약·정리하였다. 대륙경제연구소는 1939년 설립되었는데, 잡지사인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와 같은 건물을 썼고 이념이나 참가자 면에서 동양지광사와 공통성이 많았다. 대표인 겸전택일랑鎌田澤一郞는 전 조선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와 가까웠던 일본 민간인으로 내선일체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대륙경제연구소에 참가한 한국인들은 녹기연맹과 같은 전면적·급진적 동화론보다는 석원완이石原莞爾의 동아연맹론東亞聯盟論에 경도되고, 전시체제기의 파시즘적 통제경제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입장에서 조선경제의 내선일체적 사실을 연구 발표하는 월간 『대륙경제大陸經濟』를 발행하였다. 


대륙경제연구소의 대표는 겸전택일랑이고, 편집국장은 국전양탁菊田洋卓, 편집사무는 이정우李遉雨, 明治大 경제학부 출신·인정식印貞植·桐生一雄 등이었다. 동양지광사가 주최하고 『매일신보』가 후원한 강연회에서 대륙경제연구소 대표인 겸전택일랑이 연설을 하였다. 


   4. 전향논리와 그 특성


일제시기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은 1933년 4월 함흥형무소의 기결수, 영흥농민조합 간부 조성과趙成鍋가 ‘상신서’라는 이름으로 전향진정서를 소속 검사에게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이어졌다. 전남 영암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최판옥崔判玉은 1933년 일제경찰에 체포된 이후 재판과정에서 전향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되었는데, 註52) 『동아일보』 1933년 9월 17일 「方向轉換者를 分離하라」. 최판옥은 사상에 대한 성명서 60여 매의 전향서 註53) 전향서의 내용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반성문 수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나름대로 체계를 갖고 비판을 가한 것이 있다(지승준, 「1930년대 일제의 ‘사상범’ 대책과 사회주의자들의 전향논리」, 『중앙사론』 10·11, 285쪽). 를 재판장 앞에서 낭독하였다. 註54) 『동아일보』 1933년 9월 17일 「轉換書 朗讀하자 各 被告 騷然」. 그의 전향논리는 일본에서 공산주의혁명이 실현되지 않으면 조선의 독자적 민족독립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는 “민족이란 관념은 세계 사상상思想上에서 점점 엷어지게 된 것은 아닌가. 그것은 국가형식의 단위가 국민과 영토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민족에 대한 고려보다 국가주의로 기울고 있다. 註55) 지승준, 「1930년대 일제의 ‘사상범’ 대책과 사회주의자들의 전향논리」, 『중앙사론』 10·11, 285~287쪽.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로서 인정식의 전향은 당시 운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정식은 마르크스주의 운동가·농촌경제 연구가였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철저한 친일로 변신하였다. 그의 전향론은 크게 두 개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일만지日滿支블럭·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불리는 일제의 ‘엔블럭’ 체제에 대한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엔블럭 내에서 조선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명치明治 이래 제기된 아시아주의의 외연적 확장이자 엔블럭 체제의 정치논리로서 제기된 ‘동아협동체·동아연방제’에 의거했으며, 후자는 그러한 정치적 논리속에서 농업문제 해결에 기초한 ‘내선일체’의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른바 ‘신체제 농업론·전향 농업론’이 그것이었다. 註56) 이수일, 「일제말기 사회주의자의 전향론-인정식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79, 101~102쪽. 


연희전문학교 교수인 노동규盧東奎도 이른바 ‘감상록感想錄’을 예심판사에게 제출하였다. 그의 감상록에 따르면, “지금에 이르러 과거를 생각하면 황국의 교육을 받고 황국의 교육에 종사하는 몸이 되어서도 사상의 근저로서 일본정신에 자각하지 못하고 단지 당시의 지배적 사상에 부침한 것은 참괴慙愧를 견딜 수 없다. 그 참회록으로서 또 금후 일본정신에 각성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갱생할 제일보로서 이하 소감을 고백한다”라고 하였다. 註57) 노동규, 「感想錄 : マルクス理論克服日本精神體得記」, 『사상휘보』 23, 1940, 219쪽. 


전향자들의 정세인식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독립불가능론에 근거하고 있는데, 일례로 영흥적색농민조합에 참여했던 조성호趙成鎬는 현 정세로는 혁명이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전향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논리는 혁명이 완성되고 독립된다고 해도 구미의 백인종이 약소한 미개국을 침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필연적으로 잠식당한다는 것이다. 같은 영흥농민조합에 참여했던 김윤경金允經은 세계 각국은 지금 생존 경쟁이 한창인데 한국과 같이 작은 나라가 외국과의 경쟁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註58) 지승준, 「1930년대 일제의 ‘사상범’대책과 사회주의자들의 전향논리」, 『중앙사론』 10·11, 285~286쪽. 


전향을 통해 직업적 친일분자로 변신한 현영섭은 “조선의 진로는 절대로 일선연방도 아니며, 내선연맹도 아니며, 다만 내선일체의 길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하여, 진정한 내선일체는 ‘협화적 내선일체’가 아니라, ‘철저일체론’을 주장하였다. 내선일체의 계기는 ‘타협적 태도’에서가 아니라, ‘신을 숭배하는 마음’과 같은 정신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김명식은 내선일체가 제기되는 계기를 ‘인적 물적 요소의 보장’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내용에서도 민족과 민족의 협동을 의미하는 동아협동체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註59) 홍종욱, 「중일전쟁기(1937-1941)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서울대석사학위논문, 2000, 53쪽.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인으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1934년 6월 30일 조선총독부 판사에게 보낸 경성제국대학교수 삼택녹지조三宅鹿之助의 “나는 장래에 같은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그리고 죄의 심판을 받은 후에는 선량한 가정인家庭人으로서, 또 충실한 일본신민으로서 갱생할 것을 아울러 서언誓言하는 바입니다” 註60) 「三宅城大敎授の上申書」, 『사상휘보』 1, 1934, 114쪽. 라는 상신서이다. 


일제하 사상검사인 이등헌랑伊藤憲郞는 “조선에서 사상운동의 근원은 어떠한 사상 어떠한 형태를 채택한다 해도 결국 Nation의 문제”라고 보았다. 註61) 伊藤憲郞, 「朝鮮特殊の刑事政策的問題」, 『司法協會雜誌』 11-5, 1932, 22쪽. 따라서 한국의 사상범의 활동은 언제나 ‘민족문제 해결의 선상’에 있기 때문에 일본의 사상범보다 ‘한층 복잡한 특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註62) 富士原景樹, 「朝鮮に於ける思想犯の保護對策」, 『사법협회잡지』 11-9, 1932, 123쪽. 보호관찰소장 장기우삼長崎祐三도 “조선에서 사상운동은 민족적 불평불만을 그 근저로 하고 있는 관계상 실행성이 풍부하고 다분히 위험성을 포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註63) 長崎祐三, 「思想犯防遏(二)」, 『治刑』 16-11, 1938.11, 8~9쪽.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이른바 ‘사상운동’ 혹은 ‘사상범’은 민족독립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제가 강압적 방법과 수단으로 전향을 시킨다 해도 그 원천으로 회귀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향선언이 모두 공산주의운동 선상에서 활동 중 검거되어 구금의 고통을 경험한 뒤 이른바 ‘상신서’라는 이름으로 사법 당국에 제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 점이다. 둘째는 공산주의의 모순이나 비판에 대해서도 재감 이후, 즉 수감생활을 계기로 자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로 사상의 전향을 자신들 때문에 고통을 받거나 가슴 아파하는 부모와 가족 등 혈육의 정으로 인한 심정적 변화에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넷째로 전향 이후 선량한 국민으로서 충정을 다하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형식으로 전향서를 마감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품었던 사상을 포기하는데 따른 지식인의 번뇌나 고민, 사상전환의 변론이라 할만한 논리를 추적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註64) 전상숙,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현실적 선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인식과 대응』, 341쪽.